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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작성 배경(1):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국민언약
제임스 1세가 죽고(1625)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가 잉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1626) 단다. 찰스 1세는 절대 왕정주의자였고 의회를 인정하지 않았어. 유럽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의회 민주주의 사상이 싹터 일반화되고 있던 잉글랜드의 귀족과 중상층은 찰스 1세의 절대권력에 대항했단다. 특히 찰스 1세가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전쟁(1627)에 패하면서 국가적 위신뿐만 아니라, 국고도 낭비하게 되자, 의회는 마침내 1628년 왕에게 그 유명한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를 하지. 이 과정은 이미 1215년 존(John, 1166-1216) 왕이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함으로 절대왕정이 거부되고 왕의 권한이 법에 의해 제한된다는 입헌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 중 한 부분이지. 찰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권리청원에 서명해. 왕의 국정운영 실패가 의회 민주주의를 불러왔단다. 그 내용은 국회의 동의 없이는 어떤 세금도 걷지 못하고, 법에 따르지 않고는 국민을 마음대로 잡아 가두지 못하고 군대를 민가에 머무르게 하지 못하며, 군인이 아닌 국민은 군법에 따라 처벌되지 않는다는 법이야. 찰스 1세는 의회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왕의 직권으로 1629년 의회를 해산한단다. 그는 11년 동안 혼자 나라를 다스리지. 의회의 도움 없이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찰스 1세는 어머니가 로마교회 신앙을 가졌기에 개신교 신앙보다는 로마교회 신앙을 포용하며 자랐지. 뿐만 아니라, 그의 프랑스인 아내는 독실한 로마교회 교인이었어. 찰스 1세는 로마교회의 의식을 회복시키고 교회당에 제단을 만들고 주교제도를 공고히 하고 청교도를 핍박했지. 성찬식은 다시 화체설로 바뀌었어. 또 찰스 1세는 신학적으로 네덜란드 도르트회의에서 정죄한 아르미니우스적인 입장을 지지했지. 또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1633) 임명했는데, 윌리엄 로드는 ‘공동기도서’에 로마교회 교리를 섞어 개정했단다. 그러니 잉글랜드 청교도의 눈에는 찰스 1세가 사악한 교황처럼 보였단다.
마침내 찰스 1세는 1637년 스코틀랜드 교회에 공동기도서를 강제로 시행하도록 했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찰스 1세의 정책에 일제히 항거하며 일어섰단다. 24세의 젊은 목사 질레스피(G. Gillespie, 1613-1648)는 항의의 책을 써 장로교인의 마음에 불을 집혔어. 그 해 어느 주일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St Giles’ Cathedral)에서 한 할머니가 공동기도서 사용을 강요하는 주교를 향해 의자를 던지는 일이 일어나고 곧 폭동으로 이어지지. 이 사건은 전 스코틀랜드 국민을 자극했고 잉글랜드를 향한 분노로 연결되었단다. 이 때 스코틀랜드 온 국민은 역사에 보기 드문 ‘국민언약’이란 것을 작성했어.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목사가 초안한 이 언약 문서에 단번에 3천 2백 명이 서명하고 나중에 전국으로 서명이 진행되어 전 국민의 60%나 서명했단다. 그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했지. 언약 문서에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인정하지만, 종교와 법, 국민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랐어. 그 해 말에 진행된 장로교회 총회에 헨더슨이 총회장이 되고 공동기도서의 불법성을 천명하고 주교제도를 거절한다고 선언했단다. 1639년 장로교회 총회는 장로교 제도가 가장 성경인 하나님이 주신 제도라고 천명하지. 이 때가 스코틀랜드에서 본격적으로 장로교회가 시작된 시점이란다. 찰스 1세의 스코틀랜드 박해가 장로교회를 더 장로교답게 만든 셈이야. 찰스 1세는 당장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싸움을 ‘주교전쟁’(1차)이라고 불러. 주교제도 때문에 생긴 전쟁이기 때문이지. 결과는 어땠을까? 총력을 기울인 스코틀랜드 군대는 오합지졸의 찰스 1세 군대를 박살내고 말았단다. 찰스 1세는 1639년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1640년 4월 스코틀랜드에 지불해야 할 전쟁배상금을 요구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지만 실패한단다. 청교도 의원에 더 많이 당선되었기 때문이야. 3주 만에 폐회한 이 의회를 ‘단기의회’(The Short Parliament, 1640.4.13~5.5)라고 부르지. 그래도 대주교 윌리엄은 찰스 1세에게 백성의 동의 없이도 왕은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통치할 수 있다고 말했단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잉글랜드 사제에게 ‘국교회의 정치제도를 고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했단다. 이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겪이 되고 말았어. 잉글랜드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될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배경(2):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배경
스코틀랜드 군은 점점 잉글랜드로 남진해왔어. 다급한 찰스 1세는 전쟁을 위한 세금을 거두기 위해 다시 선거(1640.10)를 치렀고 의회를 소집했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었지. 이번에는 더 많은 청교도들(493명 중 350명)이 당선되었단다. 의회는 전쟁배상금과 경비를 마련하지 않으려 했지. 왕은 다시 의회를 해산해 버렸어. 그런데 이번에는 의회가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왕의 허락이 없어도 의회가 3년마다 의무적으로 열리도록 하고 왕이 거두던 건함세(군함 세금)를 폐지하고 왕립재판소를 폐지하는 개혁안을 처리했단다. 그리고 주교 로드와 간신들을 탄핵하고 옥으로 보냈지. 분노한 찰스 1세는 1641년 친위대를 이끌고 국회로 쳐들어갔어. 하지만 국민의 웃음꺼리만 되고 말았단다.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눠져 긴 내전(1642~1651)이 시작되지. 동시에 긴 ‘장기의회’(The Long Parliament, 1640~1653)도 진행됐단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은 밀고 밀리는 싸움을 거듭했어. 1643년 의회파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밀리며 불리한 상황이 되자, 잉글랜드 의회는 다급해 스코틀랜드 의회에 군대를 보내 도와 줄 것을 요청했지.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에게 군사를 보내는 대신 약속을 하나 요구했단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야. 이 조약은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는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지.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아. ‘첫째,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개혁된 교회의 모범을 따라 교리, 예배, 권징 및 교회 정치에 관해 그리고 신앙고백, 예배모범, 교리문답에서 가장 가까운 일치와 통일을 위해 힘쓴다. 둘째, 교황제나 주교제, 미신과 관습, 이단, 분파, 신성모독 등, 건전한 교리와 경건에 반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리기로 약속한다. 셋째, 의회의 권리와 특권과 세 왕국의 참된 종교와 자유를 보존하고 지킬 목적이지 국왕의 정당한 권력과 위대함을 축소시킬 생각이나 의도가 전혀 없다. 넷째......다섯째......여섯째......등’
이렇게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에게 감독제를 버리고 장로교 제도와 개혁신앙의 신학과 예배를 따를 것을 요구했어.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잉글랜드 의회를 통해 찰스 1세를 압박할 수 있었지. 당장 도움이 필요했던 잉글랜드 의회는 이 언약서에 서명했단다. 동시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8명의 특사(목사 5명과 장로 3명)를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파송했어. 잉글랜드 의회는 1643년 감독제도를 폐지함으로 새로운 신앙고백과 교회제도가 필요하게 되어 ‘성직자 총회’(Assembly of Divines)를 열도록 했단다. 신학자 121명과 의회위원 30명(상원 10명 + 하원 20명) 총 151명이 참석하는 총회였지. 1643년 7월 1일 시작된 총회는 스코틀랜드 특사가 도착한 9월부터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되었어. 이들은 투표권이 없어도 자문위원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단다. 예배모범, 권징, 그리고 정치와 교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앞의 세 가지는 새롭게 연구해 만들어야 할 과제였어. 마지막 신앙고백은 1609년 39개조 항을 개정하기로 했었지만, 스코틀랜드 특사들이 주도적 자문역할을 하면서 세 나라가 함께 사용할 전혀 전혀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기로 했지. 결과적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단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의회가 모든 재정적 지원을 했단다. 장소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었는데, ‘헨리 7세 예배실’에서 모였으나, 나중에는 예루살렘 쳄버(Jerusalem Chamber)에서 회의를 했다고 해. 회의는 평균 60~70명 정도 회의에 참석했으니, 모이기에 적당한 곳이었지. 151명은 소집된 전체 인원이고 실제는 40%의 인원이 참여했어. 회의 기간은 1643~1649년으로 총 5년 7개월 22일이 걸렸다고 해. 회의 숫자로 보면 1,163회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행했어. 오전에는 전체모임을 하는 데 예배와 기도 그리고 토론을 했어 대체로 오전 9시에 시작하면 1시에 끝났다고 해. 오후에는 주로 소위원회로 모여 토론하고 결과물을 만들었고 저녁에는 개별 토론과 성경 묵상, 그리고 총회 주제와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단다. 밖에는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신학자들은 기도하며 주제를 가지고 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씨름하는 시간이었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배경(3): 웨스트민스터 총회 모습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들어낸 표준문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대표 5명의 참여와 도움이 없었다고 과연 가능했을까? 그들의 영향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절대적이었단다. 그들이 누군가 한 번 볼까? 알렉산더 핸더슨(A. Henderson)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초대 총회장이었지.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1602~1662)는 매일 총회의 일들을 일기로 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겼어.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총회 기간에 『법과 왕』(Lex et Rex)라는 책을 썼다니 대단하지 않니? 그는 이 책에서 현대 국가의 왕 즉위식은 언약식이 되어야 한다고 썼어. 이스라엘의 왕 즉위식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처럼 기독교 국가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지. 만약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면 백성이 그를 끌어내릴 수 있다고 보았어. 하나님이 백성을 통해 왕에게 준 권력을 혁명이라는 방법으로 중단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당시 가히 혁명적이었단다. 마지막으로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라는 책을 썼는데, 장로교 정치(질서) 전문가야. 스코틀랜드 특사 가운데 30세로 가장 나이가 어렸다고 해. 하지만, 그의 뛰어난 학식과 언변은 총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단다. 로버트 더글라스(Robert Douglas)가 대표로 임명되었지만 질병 때문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지. 또 그 외에 장로가 3명 함께 했어.
총회 모든 회원은 매주 첫 회의 시작 때 이렇게 선서했다고 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하다고 믿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교리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평화와 건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것 외에는 그 어떤 제도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총회의 진행 방식은 먼저 여러 소위원회를 만들어 연구하고 토론하고 정리해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단다. 그 결과물을 전체 회의에서 발표하고 다시 토론 했지. 단어 하나를 가지고도 깊이 있는 토론을 했어.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소위원회는 다시 토론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 연구했지. 필요하면 특별연구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단다.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많은 전문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토론해 만들었어.
총회는 의회의 간섭을 배제했단다. 물론 5년의 총회 기간 동안 잉글랜드 정세는 부침을 겼었고 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 왕당파가 전쟁에서 의회파를 이기고 있을 때에는 잉글랜드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간섭하지 않았어. 스코틀랜드 특사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독립성이 제대로 유지되었단다. 하지만 후기에 의회파 군대가 왕당파 군대를 이길 때에는 의회가 총회를 간섭하기도 했어. 하지만, 전반적으로 총회는 차근차근 성경적 교회 세움의 원리를 잘 정리했단다.
제일 먼저 ‘예배모범’이 1645년 1월 3일 최종 완성되었어. 두 번째 ‘교회정치’가 1646년 4월 30일에 결정되었단다. 잉글랜드 의회는 30장 ‘권징’과 31장 ‘노회와 총회’에 대한 것을 수정하도록 지시했어. 세 번째 ‘신앙고백’이 1646년 12월 7일 의회에 제출되었지. 하지만, 증거성경구절을 첨가하도록 요구해 총회가 보충한 후 스코틀랜드 의회가 1647년 1월 만장일치로 신앙고백을 채택한단다. 잉글랜드 의회는 1648년 6월이 되어서야 받아들였어. 네 번째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은 1647년 10월과 11월에 각각 완성되지만, 1648년 7월에 가서야 잉글랜드 의회에서 겨우 채택되지.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대로 받아들였단다.
잉글랜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결정한 것을 수정해 받아들였어. 그것도 나중에 1660년에 왕정이 복귀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폐기처분하고 말았단다. 다시 성공회로 돌아간 거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받아들인 교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뿐이야. 스코틀랜드교회가 이것을 사용하고 세계에 알렸단다. 하나님의 섭리란다. 아직까지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단다. 신실한 개신교회는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소중하게 여기고 함께 공유하고 있어. 한국의 장로교회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Westminster Standards)를 택하고 있단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작성배경(4):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자,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대해 좀 상세히 살펴볼까? 표준(Standards)라는 말은 말 그대로 어떤 일을 시행하고 결정할 때 기준과 표준이 된다는 뜻이야. 교회의 주인은 누구시며, 지금 우리 교회는 누가 다스리지? 우리는 왜 이런 예배 순서를 따르지? 로마교회와 개신교회는 왜 성찬 하는 방법이 다를까?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일까?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행위는 필요 없는 것일까? 이런 여러 가지 궁금증은 과거 400년 전에도 있었고 중요한 문제였지.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과거에는 당연하지 않았단다.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신앙의 선배들은 모든 것을 처음 새롭게 정리해야 했어. 쉽지 않았단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교회정치 + 예배모범 + 신앙고백 + 요리문답)는 성경에 근거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한 것이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성경에서 끄집어 낸 가장 중요한 교회정치 원리는 뭐니 뭐니 해도 ‘장로정치’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지. 그런데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실까? 사람을 사용하셔.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여기에서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있단다. 감독제도(로마교회+잉글랜드 국가교회)는 감독에게, 회중제도(침례교회+회중교회)는 성도 다수에게, 그리고 장로제도는 ‘장로회’(Presbyter)에 교회 치리의 권한이 있다고 보지. 다른 한편 교회는 국가가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에라스투스파(Erastian)도 있어(루터교회와 잉글랜드 국가교회).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았단다. 장로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데 목사는 가르침에 전무하고, 장로는 다스림에 집중하지. 직분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동등하며 오히려 직분은 다양하며 그 독특성을 가진단다. 그리고 장로교는 지역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노회로 모이며 노회는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특히 목사를 교육하고 임직하고 면직시키는 권한을 갖지.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지역교회가 최종 권한을 가지고 노회와 총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 역할을 중시한단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성경에서 끄집어 낸 가장 중요한 예배의 원리는 뭐니 뭐니 해도 ‘예배모범’이야. ‘모범’(Directory)은 ‘형식’(Form)과 다르단다. 교회의 예배가 한 가지 형식, 곧 공동기도서만 따라하지 않아도 되지만, 교회마다 통일된 내용을 소유하되, 획일적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자유로워야 했지. 로마교회의 예배를 개혁한 종교개혁 초기에는 미사의 ‘제사’적 성격을 ‘식사’로 바꾸었지만, 100년이 지난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획일적 형식보다는 통일되지만 자유로운 ‘예배 지침’ 혹은 ‘모범’을 만들었어. 그리고 예배 찬송으로 시편 찬송을 공인했단다. 찬송은 리듬이 중요하지만, 내용이 우선하지. 전통적 시편 찬송은 리듬감이 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지만, 대신 가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성경에서 끄집어 낸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은 뭐니 뭐니 해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이란다. 루터가 1529년 문답형식으로 된 신앙고백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마교회를 대적하기 위한 것이었어. 1561년 벨기에 신앙고백은 로마교회와 재세례파를 대적한 것이고, 1618/19년의 도르트신조는 아르미니안주의에 대적한 것이었단다. 1647/48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은 특정 이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100년의 결과를 총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다보니,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은 아주 논리적이야. 벨기에 신앙고백이 1인칭으로 구성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인칭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 진리를 정리했단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총회의 본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잉글랜드 교회는 수정해서 받았을 뿐 아니라, 1659년 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30-31장(교회 치리회와 국가의 관계)을 폐지했고, 1689년 관용령을 채택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쓰레기 통해 버리고 말았어. 미국 장로교회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한 후 1788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 ‘정부’와 31장 ‘총회’에 관한 것을 수정해 받았고, 1903년에는 더 많은 것들이 수정되었으며 특별히 34장 ‘성령’과 35장 ‘말씀과 선교’에 대한 부분이 첨가되었지. 한국 장로교회는 1963년 이후에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했지만, 여전히 교회에서 잘 가르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단다.
첫댓글 아멘입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