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야기 + 괴물 = 바다괴물이야기?
요즘 한국에서는 ‘바다이야기’ 와 ‘괴물’이라는 영화이야기로 가득한 듯하다.
재미있게도 고대 유대인들도 바다이야기와 괴물이야기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괴물의 이야기는 ‘혼돈과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백성들이었다. 마른 땅을 밟고 양과 염소를 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두로나 시돈 사람들처럼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위에 배를 띄우고 살던 해양민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다는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바람이 일어서 하얀 거품을 내품으며 집어 삼킬 듯 파도가 쳐대는 바다와 한번 빠지면 결코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 깊고 깊은 바다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 자체로 근본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만들기에 충분 했었다.(자료사진 1: 갈릴리 바다사진)
거기에 더해, 그 당시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개념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다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벨론의 신화에 의하면 그 바다에 살고 있는 괴물 즉 바다의 신의 이름은 ‘Tiamat’으로서 ‘어둠과 혼돈의 용’이라고 알려 졌다.(자료사진 2 Tiamath 사진, 자료출처 'Encyclopedia of Judaica') Tiamath은 바다의 지배자였다. 그는 바다에 광풍을 일으켜 파도가 흉용하게 뛰놀게 하고 자신에게 잘 못한 사람이 배를 타게 되면 배를 부수고 그 사람을 잡아서 물 속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서 죽게 만드는 그런 두려운 존재였다. 즉 그는 바다 괴물이었다. 성경에서는, 즉 유대인들의 표현법에서는 이 바다의 괴물이 용 또는 리워야단, 악어, 라합 등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나타난다.(겔 29:3,사 27:1,시 148:7,사 30:7,사 51:9)
그렇다. 바다는 고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검푸른 물결이 두렵고, 또한 사람을 잡아 죽이는 괴물이 살고 있어서 두려운 곳이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지역 사람들의 바다에 대한 개념은 ‘바다 = 용 또는 괴물 = 두려움, 공포, 혼돈’ 라고 하는 생각의 고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러한 바다에 대한 유대인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성경에 고스란히 반영이 되게 되었고, 바다가 등장하는 성경속의 장면은 언제든지 유대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는 내용들 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두려움과 혼돈의 바다를 정복하고, 징계하는 분으로 그려지게 된다.
이러한 유대인의 개념은 역사를 통해서 계속 전수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동일하게 나타난다. 바로 아래와 같은 본문들이 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혼돈’의 개념으로 인식되었던 본문들이다.
출14-15장에서 등장하는 바다는 유대인들에게 바다가 두려운 것임을 다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록 자신들이 바다 속에 잠긴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바다가 바로와 그 군대의 장관들을 집어 삼키는 모습을 유대인들은 건너편 언덕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물론 바다를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 이셨다. 그러나 그 모습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바다가 두렵고 무서운 존재임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한 장면이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출 14:28)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출 15:10)
또한 요나의 이야기 가운데 등장하는 바다 역시 유대인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이었다. 요나가 탔던 배의 선원들과 사람들이 심한 파도와 물결로 인해서 두려워서 떠는 장면은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줄 때 아주 실제적으로 그려내던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였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3)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욘 2:5)
그 외에도 유대인들에게 바다가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는 대상으로 그려지는 성경은 셀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륙을 당한 자의 죽음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지라 (겔 28:8)
바다가 바벨론에 넘침이여 그 많은 파도가 그것에 덮였도다 (렘 51:42)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시 104:6)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마 8:24)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바다의 용’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하나님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과 시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이나 이스라엘의 대적이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파괴될 것을 예언했다.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욥 26: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 27:1)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시 74:13)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계 10:2)
[오른발은 사람의 지체 중 명예를 상징하는 또한 유대인의 상징이다. 본문에는 천사가 그 오른발을 혼돈과 두려움의 상징인 바다를 밟고 섰다는 유대인의 개념에 비춘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예수님을, 바다(용)를 잠잠케 하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바다를 이기고, 다스리시는 분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라는 말씀이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시 89: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41)
또한 이 바다(혼란,두려움,공포)는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하는데,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을 대적하는 용의 근거지로 그려지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새 예루살렘이 임하는 때에는 다시 존재하지 못하리라는 내용으로 전개 된다.
용, 즉 혼돈과 공포와 두려움과 죽음의 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과 싸움을 위해서 바다에서부터 나온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계 13:1)
‘마지막 날에 바다(혼돈과 두려움과 죽음)는 죽은 자들을 다 내어 놓는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하시는 그날에는 더 이상 바다는 죽은 자 들을 가두어 둘 수 없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3)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지는 그 날에는 처음 하늘과 땅도 없어지지만 역시 혼돈과 두려움의 개념인 ‘바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물이 바다 덮음같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 등장하는 바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간추려 본다면 다음의 두 구절로서 대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합 2:14)
우리의 생각에 ‘물이 바다를 덮는다.’ 그러면 그냥 짠물이 되고 마는 것이지만 이 구절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구절들은 ‘물’이라는 개념을 먼저 정리한 후에 이해가 될 수 있는 본문이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말한다면 ‘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대변 되었다. 결국 “대저 물(하나님의 은혜)이 바다(혼돈과 두려움과 죽음)을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조금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바다, 즉 혼돈과 두려움과 죽음을 완전하게 덮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만 보이고 하나님만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리라는 유대인들의 개념적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