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천면
목천군 동쪽에 있는 면중에서 제일 가까우므로 근동면(近東面)이라하다가 고종
32년 1895년 치랏골 이름의 뜻을 따라 갈전면(葛田面)으로 고쳐서 상백전(上栢
田), 용연(龍淵), 가암(佳岩), 서원(書院), 일병천, 이병천, 일한천(一寒泉), 신
촌(新村), 평기(平基), 도원(桃源), 광기(廣基), 덕신(德新), 가정, 반계(磻
溪), 명암(鳴岩), 명성(明星), 의동(衣洞), 냉정(冷井), 의관(衣冠), 매당(梅
堂),작성(鵲城), 공심(公心), 봉암(鳳岩), 소근(所斤), 삼성(三星), 석항(石項)
의 27개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14년 군통폐합에 따라 이동면(二東面)의 일탑원
(一塔院), 이탑원(二塔院), 이한천(二寒泉) 3개리와 수신면(修身面)의 상리(上
里)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갈전면이라 하여 천안군에 편입되어 가전, 병천, 도
원, 관성, 매성, 봉항, 탑원리로 개편하여 천안군 갈전면이 되었다. 1942년에
갈전면을 병천면으로 고쳐 천안군 병천면이었으며, 1963년 1월 1일 천안읍과
환성면이 천안시로 승격되므로 천원군 병천면이 되었었다.
1973년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수신면의 복다회리와 동면의 용두리가 편입
되어 7개리였던 것이 9개리로 되었다. 동쪽은 동면, 북쪽은 충청북도 진천군 백
곡면, 남쪽은 수신면, 서쪽은 북면을 접하고있다.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914년 지방행정 통폐합으로 일탑원리, 이탑원리, 이한
천리, 이동면 일부, 수신면 상리 일부를 병합하여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던 숙박
시설인 탑원이 있었던 곳이므로 탑원의 옛 이름 대로 탑원리라 하고 병천면에 편
입되었다.
너분들 : 광암(廣岩), 매봉 서쪽에 있는 마을. 넓은 반석이 있다고 한다.
대수리(大樹里) : 너분들 북쪽에 있는데 큰 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대장간이 있었
다.
류관순 사당(柳寬順祠堂) : 등재 동북쪽 매봉 산 밑에 있는 류관순 사당.
1973년 준공되었다.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등재 : 이한천(二寒泉) 너불들 서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 뒷산이 성과 같이 둘
러 있는데 찬 우물이 있다고 한다.
(전설) : 이 부락이 삼태미 형으로 생겨서 곡식이 삼태미에 채워지면 넘치므로
큰 부자는 낫지 않고 작은 삼태미 부자는 생긴다고 전하여 온다고 한다.
찬샘골 : 류관순 사우 뒤 찬 물이 솟는 샘이 있다.
덕산재 : 덕성(德星), 일탑원(一塔院), 탑골 북쪽에 있는 마을.
탑골 : 대수리 위 쪽에 있는 골. 예전에 있었다고 한다.
밤골 : 전곡(田谷), 창틀 북쪽에 있는 들.
창틀고개 : 병목고개. 창평리, 호항령이라고도 하며 창들에서 만마루로 넘어가는
고개 2개가 높고 병목같이 생겼음.
창들 : 등재 남쪽에 있는 마을. 복치형(伏稚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본래 청
주목 수신면이었다가 병천면에 편입되었다.
선바위 : 탑골 서쪽 산 들에 서 있는 바위.
부처당 : 절터가 있었다고 하며 기왓장이 나온다.
씨름판 골 : 옛날에 이 곳에서 부락 사람들이 씨름 시합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서낭댕이 : 서낭이 있었는데 근래에 없어졌다.
병천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 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일병천리, 이병천리, 일한천리, 신촌, 서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병천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
어 지므로 병천면 병천리가 되었다.
개목이 : 구항(拘項), 신촌(新村)이라고도 하며 개목 고개 입구에 있는 마을.
조선조에 질그릇과 사기점이 있었다.
개목고개 : 서원말에서 북면 매송리로 넘어가는 고개
(전설) 옛날 어떤 사람이 봄에 자기 집 개를 데리고 술이 취해 가지고 이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마루턱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마침 산불이 나서
이 사람이 타 죽게 되어도 잠에서 깰줄을 모르고 곤히 자므로 따라 다니
던 개가 급히 그 아래 냇가에 가서 몸을 냇물에 적시어 가지고 불위에 둥
글어 몇번을 계속하여 불을 끄고 주인을 살렸으나 개는 죽고 말았다고 한
다. 주인이 잠에 깨어 일어나 보니 옆에는 온통 재로 변하여 있고 자기
가 요행히 살게된 것을 개의 도움인 것을 깨닫고 이 후로는 술을 끊고 마
시지 않았다고 하며, 미물인 개가 주인을 위하여 죽었으므로 의구시를 지
어 돌에 새겨 의구비를 세워주고 개의 장사를 잘 지내 주었다고 한다.
개목이 산신제 : 정월 길일을 택하여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을 선정하여 제
관으로 삼고 비용은 당일 모금하여 충당하고 제관, 축관, 두 사람이 제를
올리고 부락민중에서 탈이 없는 집 들은 개별적으로 자기집에서 시루떡을
해놓고 자기 집 평안과 일년간 무탈하기를 빈다.
구장벌 : 병천 앞에 있는 들. 1913년까지 이곳에 아내장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말(書院里) : 은석산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 처음에는 이곳도 개목이라 하
였는데 선조 때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당의 터를 닦는데 죽립
(竹林)이라 새긴 지석(誌石)이 나오므로 죽림서원이라 하였다.
인조 때 사액을 받아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세운 후 부터 서원말이라 한
다.
3.1운동 기념비 : 병천 뒷산 지서 앞산에 있는 기미년 3.1운동에 순국한 유관순
외 20명의 기념비. 1946년 11월에 세웠다.
병천 : 구계(九溪), 아내, 아오내라고도 하는데 시장이 있어 아내장이라 흔히 부
른다. 치랏내와 병천천이 합쳐 지므로 두물이 아울린다고 하여 아내라하
기도 하고, 구계(九溪), 아홉내에서 온 아우내라고도 한다.
구계라고도하는 것은 철이 이내에서 생산되므로 철내의 옛 이름이다.
까치고개 : 작현(鵲峴), 일한천(一寒泉), 아내장터 위쪽에 있는 마을.
찬 우물이 있고 이 부근을 한천들이라 부르며, 마을 뒷산이 까치 목처럼
생겼다고도 한다. 옛날에 조선 오리나무가 무성했는데 나무 가지에 까치
들이 많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도 한다.
세고개 : 병천 뒤에 있는 고개.
병천에서 천안으로 가는 곳인데 철의 생산지이다.
대챙골 : 쟁이(工人)들이 살던 곳. 도공 철공들이 이 곳에서 장이 섰다고 하며
이 곳에 그릇 시장이 있었던 것 같다.
신선동 : 구 장터 서쪽에 있는 마을.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둔터골 : 예전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퉁점 : 개목이에 있는데 놋쇠 일을 하던 곳.
바위 아가리 : 바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중군 모랭이 : 예전에 이 곳에 중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돼지논 : 옛날에 이곳이 병천 장터였으며 비옥하여 돼지논이라 한다.
도원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
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
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
리가 되었다.
중 썩은골 : (전설) 이곳에 사는 한 장수가 병풍 바위 옆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
던 중이 우리 힘자랑 합시다. 누가 빠르고 쉽게 이 병풍바위를 오르는
가?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만약에 지는 사람은 어떠한 벌도 달게 받
기로 하고 먼저 중이 뛰어 오르는데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
다.
다음에 이곳 장수가 뛰어 오르는데 쉽게 뛰어 올랐다. 오르고 내려온 장
수는 형편없는 중놈이 까분다고 하면서 등을 잡고 던진 것이 이 골에 떨
어져 죽었다. 그후부터 이곳을 중썩은 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전설) : 노은정에서 광터골에 가려면 돌이 거북이 같이 생긴것이 있었는데 이곳
에서 [거북]하고 대답하는데 이말이 크게 들리고 작게 들리는데 따라서
광터골이 흥하고 도원골이 망한다고 하여 광터골 사람들이 정으로 부수어
소리가 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노은정(老隱亭) : 검계가에 있는 정자. 큰 바위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고 그
아래는 냇물이 깊이 패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숙종 때 학자 김상기
(金相器)가 벼슬을 하려고 스물네차례나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이 되고
노년에 모든 세상일을 잊으려고 이 정자를 짓고 큰 바위에 노은정(老隱
亭) 석자를 새겼다.
광터골 : 광기(廣基).광기리, 도원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 구리성에 웅거 할
때 이곳에 관을 두었으므로 관터 골이라하던 것이 변하여 광터 골 또는
광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바위 : 구암(口岩) 도원골 건너 미륵당 서쪽에 있는 바위.
(전설) : 바위가 입을 벌리고 동네를 향하여 있는데 풍수가가 이 동네의 기운을
빨아 먹어 버린다하여 동네 사람들이 날을 정하여 없애 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마침 그 마을에 사는 김도혁(金道赫)이 서산원이 되어 있었다.
어느날 김도혁의 꿈에 한노인이 간청하기를 나는 입바위 산신인데 사람
들이 나를 없애려고 하니 그대가 구해달라 하므로 김도혁이 곧 돌아와서
동네 삶을 설득시켜 금지 시키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대록지)
칠성바위(七星) : 입바위 아래에 있는데 큰 바위가 북두칠성같이 놓여 있다.
수탁개울 : 노은정 왼쪽에 있는 골. 골의 물을 홈으로 흘러내려 오게 하여 사용
하였다고 한다.
소반봉(小盤峯) : 울바위 뒤쪽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소반과 같다.
심방골 : 벌터 앞에 있는 골짜기.
섶골 : 번재울 남쪽에 있는 골. 반계(磻溪) 한응남(韓應南)의 묘가 있다.
삭성대(削成臺) : 노은정 아래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대를 만든 듯 한 바위가 냇
가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삭성대 석자를 새겼다.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다.
벼루바위 : 벌터 앞에 있는 큰 바위. 바위 모양이 벼루같이 생겼다고 한다.
벌터 : 덕신(德新) 광터골 밖 벌판에 있는 마을. 인조 때 학자 이효범(李孝範)
이 서당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마을 이름이 덕신이라 하였다고 한
다.
번재울(磻溪) : 벌터 서북쪽 골에 있는 마을. 마을이 성처럼 둘러 쌓여 있어서
높고 아늑하며 선조 때 학자 한응기(韓應箕), 한응남(韓應南) 형제가 번
재울에 살았는데 살면서 호를 반계(磻溪)라 하였다. 그가 한응남이다.
백석탄(白石灘) : 도원골 입구 냇가에 있는 여울. 크고 흰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 바위예 백석탄 석자를 새겨 놓았다.
반계송남유허비 : 번재울 입구에 있는 선조 때 반계(磻溪) 한응기(韓應箕) 송암
(松庵) 한응남(韓應南)형제의 사적을 적었다.
도원정(挑源亭) : 도원골 입구에 있는데 강릉 김씨문중에서 세웠으며 도원(挑
源) 김만중(金萬重)의 사적 및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미륵당 : 칠성바위 아래 논가에 있는 미륵당.
면실 : 벌말, 평기(平基), 도원골 아래 벌판에 있는 마을. 숙종때 학자 김일우
(金一宇)가 처음 터를 잡아 살면서 실학에 힘쓰라는 뜻에서 면실(勉實)이
라 하였다. 동학때 접주 김고양이 살았으며 왜군들이 부락에 불을 놓아
전부락이 소실되고 없었는데 새로 신축된 마을이라 한다.
도원동리비 : 도원골 입구에 있는 비.
작은 비에 도원동리 대명천하(挑源洞裡大明天下)라 새겼고 그 옆에 느티
나무가 있으며 앞에 도원정이 있고 그 밑 냇가에 백석탄이라 새긴 흰돌이
있다. 이 도원동리 비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글씨라고 한다.
노은정 : 가정이라고도 하며 노은정에 있는 마을.
도영암(倒影岩) : 삭성대 옆에 있는 바위.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어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도영암 석자를 새겼다
고 한다.
강당터 : 번개울 뒤에 있는 강당 터.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처가인 한씨들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다락동 : 누동(樓洞) 광터 골 동쪽에 있는 골.
고무래 봉 : 입바위 북쪽에 있는 산. 모양이 고무래 같이 생겼다고 한다.
검계(儉溪) : 노은정 앞에 있는 내. 삭성대 도영암들이 있었다.
울바위 : 명암(鳴岩), 병풍바위라고도 하는데 도로 옆에 있는데 병풍처럼 생겼으
며 이곳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전설) : 병풍바위에 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도로 확장으로 묻히어 없어졌고
하나도 앞이 막혀 찾기가 쉽지 않다. 옛날에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인색하여 중이 시주를 하라고 하여도 거절하고 모욕만 주고 하였다.
하루는 중이 분하여 이 집을 망하게 하려고 이 집이 더 큰 부자가 될 방
도가 있다고하니 욕심많은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중
을 정중히 모시고 방도를 일러 주기를 청하였다. 중은 병풍바위의 굴이
두 개가 있는데 위굴의 입구를 막아버리면 이 집이 더 큰 부자가 되고 부
귀를 누리며 호강한다고 일러 주었다. 부자는 중이 시키는대로 굴의 위
돌을 깎아 입구를 봉하였다. 굴윗돌의 돌을 깎을 때에 돌에서 피가 나왔
으며 굴 입구를 막은 후 이 부자는 망해 버렸고 그때 굴 위 바위를 떼냈
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한다. 목천읍지인 대록지에 의하면 이 굴에
불을 때면 사흘후에 그 연기가 작성산성 꼭대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심방동 : 수안이씨 들이 살았으며 묘들이 있다.
거미중터 : 생김이 거미와 같다고 한다.
둔터고개 : 군이 주둔하였던 고개라고 전해온다.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틀을 질흙으로 만들어 철일을 보조하던
곳. 사정대 안동김씨 김옥(金 )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
다.
명암(鳴岩) : 울바위 옆에 판서 유명홍(兪命弘)대감이 살았다.
매성리
목천군 근동면의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로 갈전면이 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매당리, 작성리, 공심이, 명암리, 봉암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매당리의 매자와 작성리의 성자를 따서 매성리라 하여 갈전면 매성리에 편입되었
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면서 병천면 매성리가 되었다.
봉암산 : 상여바위 뒤에 있는 산. 봉항리 봉암 앞의 산이 된다.
봉황이 형국이라 한다.
매당리(梅堂) : 매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 매화낙지형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철의 생산지이다.
독점 : 상여바위 부근에 있는 골짜기.예전에 옹기점이 있었다.
구억말(鵲城) : 작성이라고도 하며 작성산 밑에 있는 마을.
오래전부터 있던 마을 같다.
교의틀봉 : 매당리 뒤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교틀과 비슷하다.
공시미 : 공심리(公心里)라고도 하는데 원적산 밑에 있는 마을.
마을이 원적산 밑에 있으므로 번뇌 잡념의 세계를 떠나 청정하고 공정한
마음으로 산다는 뜻에서 공심리, 공심이가 되었다 한다.
귀한분이 살았다고도 한다.
강당산 : 구억말 뒤에 있는 산. 예전에 강당이 있었다고 한다.
상여바위 : 공시미에서 봉항리 봉암으로 가는 중간 길가에 있는 큰 바위.
바위모양이 상여같이 생겼다.
정문거리 : 희여기 길가에 있는 이복장(李福長)의 삼세(三世)정문.
원적골 : 공시미 서쪽에 있는 골. 예전에 원적사가 있었다.
새터말 : 구억말 동쪽에 새로된 마을.
희여기 : 희역골 백제 때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기예를 닦았다고 전하여 온
다.
매당골고개 : 북면 매당골 가는 고개.
동경날 : 산날 생김이 칼날같이 생겼다.
절터안 :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펀펀한 돌에 말발자국 같이 생긴 자국이
몇 개 있다. 이것이 장수 말 발자국이라고 전해 온다.
선바위 : 바위가 서있어서 선바위라고 한다.
맹맥이골 : 산제비가 많이 살아 이런 이름이 생겼다.
두꺼비혈 : 두꺼비 같이 생겨 좋은터라 한다.
숭조단 : 수안 이씨의 숭조단이 있는데 묘가 이북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단을 모
시고 제를 올린다.
시장터 : 구억말에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 시장이 섰다고 하여 마을중간에 있다.
큰어둔골 : 골이 응달이 지고 아늑하여 항상 어둡다.
우물제 : 매당에서 정월 보름 전날 길일을 택하여 생기복덕을 보아 닫는 사람으
로 제관 축관을 선정하여 지내는데 떡, 포, 삼색실과를 제물로 먼저 물을
떠 먹으면 재수가 있고 행운이 그 가정에 찾아온다 하여 먼저 떠가려고
아우성이며 언제부터 우물제를 지내온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당일 샘청소를 하고 황토를 펴며 금줄을 매고 부정을 금한다.
제관은 삼일간 담배를 금하고 부정한 일을 삼가며 부락민도 당일에 한하
여 부정한 일을 삼간다. 제지내는 시간은 밤 10시경이다.
봉항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에 따라 갈전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소근리, 삼성리, 석항리, 봉암리 일부를 통합하여 봉암리
의 봉자와 석항리의 항자를 따서 봉항리라 하고 갈전면 봉항리가 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봉항리가 되었다.
산제당 : 석항부락에서 정월 초승 길일을 택하여 부락민 중에서 생시복덕을 보아
적합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한후 비용은 부락 기금으로 하고 5∼6인이
올라 가서 지낸다. 제관축관 불대잡이 심부름꾼이며 부인은 참석치 못한
다. 언제부터 제를 올려왔는지 모르며 옛 어른들이 지내 온지라 그 뜻
을 이어 받아 지낸다.
비녀봉 : 돌모기 뒤에 있는 산봉우리.
이 산기슭에 선조때 공신 죽계(竹溪) 김계종(金繼宗)의 묘가 있었는데 금
차형이라 한다.
갓모봉 : 돌모기 서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갓모같이 생겼다고 한다.
삼성당이(三省) : 돌모기 서남쪽에 있는 마을. 이곳에 효자가 있어 부모 산소에
매일 세 번씩 성묘하였다고 한다.
봉암(鳳岩) : 서근배미 옆에 있는 마을. 마을 뒤에 바위들이 있는데 부엉이가 살
았다 한다.
서근배미 : 소금밤. 소근(所斤) 삼성 남쪽에 있는 마을.
이곳에서 석기시대 돌도끼가 나왔다고 한다.
(전설) : 옛날에 이곳에 밤이 하도 잘되어 한 개가 서근 반이나 되었다고 하며
머그나미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까지 먹으며 가도 다 못먹고 밤이 남
았다고 한다.
안터 : 서근배미 서쪽에 있는 마을.
사기점터 : 만삼골에 있는 옛날의 사기점터 사기조각과 옥토가 남아 있다고 한
다.
쉬동이 : 큰 골 옆에 있는 골짜기.
베장골고개 : 돌모기에서 북면 베장골로 넘어가는 고개.
머그나미 : 동막골 남쪽 옆에 있는 골짜기.
망해골 : 만골 봉암 뒤 망해산 망해암이 있던 골.
매봉 : 서근배미 앞에 있는 산. 매같이 생겼다.
방아잣골 : 절골 입구에 있는 골.
만삼골 : 갓모봉 동남쪽에 있는 큰 골. 만세암이 있음.
마른골 : 방아잣골 옆에 있는 골.
돌목고개 : 돌목이에서 진천군 대문리로 넘어가는 고개.
뒷방비 : 돌목이 뒤 동남쪽에 있는 골.
돌목이(石項) : 봉항리에서 가장 큰 마을. 돌이 많이 있으며 아늑하고 병천면의
맨 북쪽이다.
마른골 : 비아잣골 왼쪽에 있는 골.
김효자정문 : 봉황입구에 있는 효자 김인석의 효자 정문.
당골 : 서낭당 왼쪽에 있는 골.
고야봉 : 돌모기 서남쪽에 있는 산.
이효자정문 : 이순학 이기응 효자정문 시묘를 잘 살았다고 한다.
대방골 : 봉암 앞에 있는 골짜기.
텃골 : 만세암골 동쪽에 있는 골. 만세암 터가 있다.
통목골 : 만세암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큰골 : 방아잣골 왼쪽에 있는 골.
절골 : 돌목이 뒤에 있는 골. 전에 절이 있었다.
왕대 : 봉암 북쪽에 있는 마을. 백제때 왕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왕대들 : 왕대 앞에 있는 들. 쇠를 담금질 하였다고 한다.
쇠당이고개 : 봉항리에서 충북 백곡면으로 넘어가는 고개.
옥녀봉 : 비녀봉 위에 있는 봉우리.
영운암 : 절골 왼쪽에 있는 골. 영운암이 있었다 한다.
오동촌고개 : 봉암리에서 북면 오동촌으로 넘어가는 고개.
비선골고개 : 고개 마루턱에 강릉김씨 묘비가 있다.
고닥골 : 풀무질하며 철의 일을 하였다 한다.
용두리
목천면 이원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만화리, 용두리, 신촌, 산서
리, 수입리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용두리라 하여 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
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동면에서 분리되어 병천면에 편입되었다.
용두리 : 뒷동산의 산등이 용과 똑같이 생겼고 용의 머리부분이 되므로 용두리라
하였다고 한다.
대위 : 대위산이라고도 하는데 만마루 오른족에 있는 산. 돈대로 되었다.
이 산기슭에 선조대 어우(於于) 류몽인(柳夢寅) 유활(柳活) 고종때 유봉
석(柳鳳錫)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를 지낸다.
지령리(芝靈里) : 산서(山西)라고도 하며 매봉 밑에 있는 마을.
산이 둘러싸고 물이 돌아 흘러서 인걸이 많이 날 땅이라 하여 지령리라
하였는데 영조때 학자 유광흥이 지와(芝窩)라고 하고 지령으로 고쳤다.
산이 서쪽에 병풍같이 둘러 있으므로 산서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순국처
녀 유관순이 태어났으며 그의 비와 생가가 있다.
찬우물 : 만마루에 있는 우물. 청결하고 물이 달며 수량이 많다.
창틀고개 : 창평리 호항령 만마루에서 병천면 탑원리 창들로 넘어가는 고개.
병목같이 생겼다.
장각골 : 무드리 왼쪽에 있는 골자리 입구는 좁고 그 안쪽은 넓고 매우 아늑하
다. 영조 무신난 때 만화당(晩華堂) 류진한(柳振韓)이 17세에 이곳에서
피난하면서 들을 읽었다.
용마지(龍馬池) : 만마루 강신대 위에 있는 못. 숙종때 참판 류광익(柳光翼)이
꿈에 이 못에서 말이 나와 용으로 변하였으므로 용마지라 하며 자손의 이
름을 용마의 이름을 붙여 지었고 그 자손들이 매우 번창하고 있다.
와우고개 : 와우현(臥牛峴) 무드리에서 칡덮말로 넘어가는 고개.
고종때 학자 노제 류지빈의 묘소가 와우형인데 그 뒤가 된다.
삼수처사 : 류봉석 기념비, 고종 때 학자 류봉석 기념비를 대화산 기슭에 1965
년 10월 목천 유도회에서 그의 충효우(忠孝友)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안장바위 : 말바위 옆에 있으며 말안장 처럼 생긴 바위.
영회단터(英會堂) : 강당터, 수리봉 아래에 있는 영회당 터,
영조때 만화당 류진한, 지화 류광흥, 사암 김윤재가 강당을 세우고 후진
양성으로 영재를 길러 내었다.
서바랭이 : 무르리 입구에 있는 버덩.
만마룻들(萬華坪) : 만마루 앞에 있는 들.
무드리 : 수입리(水入里) 지령이 동쪽에 있는 마을.
개울이 마을을 돌아 흘러 간다.
백석봉 : 고등말 입구에 있는 산. 봉우리에 흰돌이 많이 있다.
부엉바위 : 부엉박골에 있는 바위. 부엉이가 살았다.
부엉박골 : 지령리 북쪽에 있는 골. 부엉바위가 있는 골.
말바위 : 지령리 북동쪽에 있는 바위.
(전설) : 모양이 말의 머리처럼 생기고 그 입이 동면 구도리 보평마을을 향하여
벌리고 있는데 보평사람들이 이 말이 보평의 양식을 먹고 똥은 지령리에
서 누어서 보평은 늘 가난하고 지령리는 부하게 된다 하여 밤에 몰래 이
말바위 혀를 잘라다 산제당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유관순 집터 : 지령리에 있는 류관순의 집 터. 3.1 운동때 왜적들이 불을 놓아
전소되었다. 1962년에 충열비를 세우고 공원을 만들었으며 교회당을 짓
고 관리사를 새로 세웠다.
만마루 : 만화동, 만화촌(晩華村), 분토동, 쇳대배기, 효죽리라고도 하는데 용두
건너편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아서 멀리 보이며 흙이 분토처럼 곱다.
류광천과 남세강이 함께 등과하여 솟대를 세웠으며 문장가 유진한이 호를
만화제라 하였다.
수입리 산제 : 산제가 있었는데 5년전에 교인들의 반대로 없어졌다.
옛날에는 도깨비가 많아서 도깨비 장난을 없애기 위해 생겼다고 하며 산
현 밑에 주인이 거주하므로 부락의 안녕과 복을 산신에게 빌었다 한다.
송정리
옛날에는 청주목 수신면 지역이었는데 1895년 지방 관제 개정 편제때 목천군 수
신면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군·면 통합때 송정 와촌 복다이 뒷골 거무산 취락을
합하여 복다회리(卜多會里)라고 일제가 고쳐서 천안군 수신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로 병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8월 22일 천안시 조례 제160호 일제 잔재 청산하는 정부방침에 따라 고유
지명인 송정리(松亭里)로 환원 개정되었다.
송정(松亭) : 소정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때 죽계 김계종(繼宗)이 이곳에 살았
었는데 몸소 군량을 가지고 선조(宣組)가 파천한 의주까지 가서 나라를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었는데 송정(松亭)의 유래는 다음과 같
다.
※ 유래 : 죽계 김계종이 지명(地名)에 소나무송자를 붙이면 왜군이 피할 것이라
고 생각하여 송정(松亭)이라 이름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정자에서 술
을 대접하고 짚신 한 켤레와 노자를 보태주며 송정이라고 부르게 하여 마
을 이름이 송정(松亭)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리하여 왜군이 들어오지
아니하여 난리중에도 온 마을이 무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추측하건대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군대를 왜군들이 피할 것이라고 예측
한 듯 하다.(한글학회지은 한국 지명총람 4, 충남편 하338쪽 참조)
복다위 : 약사산(보련산) 밑에 있는 마을로 복(福)이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불리
여 왔는데 1914년 일인들이 측량하면서 점복자를 써서 卜多會로 잘못 불
린 일이 있었다.
왜마루 : 백운산 동남쪽 기슭에 있는데 와촌(瓦村)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기와
를 구었다고 전한다. 구한말 당상관 도정 김동년(金東年)의 생가지가 있
다.
팽나무정이 : 왜마루 앞에 팽나무 정자가 있었다. 선무공신 죽계 김계종의 장손
성균진사 김大年의 묘소가 있다.
상촌 : 송정에 새로 되 마을로 신뜸이라고도 하며 녹동천의 상류변에 있다.
청룡안산 : 선무공신 김계종의 부친 경(鏡)(이조판서)의 묘소가 있다.
기미 독립만세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아우내장터에서 왜병에게 피살된
항일독립 투사 김상헌의 묘소와 그때 왜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고서
와병중 순사한 항일 독립투사 김상훈의 묘소가 있다.
거무산 : 솔림산 덜미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을사조약후에 광복단원으로 의병에
참가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붙고 가사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 열사
유창순(庾昌淳)의 생가가 있고 그 후록에는 열사의 묘소가 있다.
뒷골 : 옛날 마방 주막뒤에 있는 작은 마을.
성아비 : 성압이라고도 한다. 선무공신 죽계 김계종의 장남 진사 엽(曄)의 묘소
가 있다.
정거장 주막 : 조선시대에는 영남·호남으로 왕래하던 대로이었는데 과거 선비들
이 일박하고 가던 주막이었다. 근래에는 청주 오창·옥산면 사람들이 병
천장을 보고 갈 때 쉬어가던 곳이다.
송당 김상철 시비(松堂 金相喆 詩碑) : 1993년 10월 대전엑스포 세계박람회에서
주최한 구제한시백일장대회에서 장원 입상한 기념비가 돋보인다.
송정 김태진 교장 송덕비(松亭 金泰珍 校長 松德碑) : 어린이의 수신학교 통학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송정 초등학교를 설립하게 하여 통학의 어려움을 해결
하니 송정학교 출신은 물론이며 주민들의 추앙 칭송은 후대에도 빛날 것
이다.
진주 정씨 숙덕 순열비 : 시집온지 반년에 남편(金相玉)이 요절하니 장조카(柄
應)를 양자로 삼고 송죽같은 순열로 가통을 지키면서 평생을 고고하게 지
냈으니 수가 75이시라.
표당 김병응 효자비(杓堂 金柄應 孝子碑) : 배부(諱一相玉)에게 입양되어 홀로
계신 어머님을 지성으로 모셨으니 효심은 물론 향교 유림으로 교화계도
또 구빈에게 남다른 면을 보이셨으며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 주민의 사표
로 존경을 받았다.
안동김씨 효부비 : 남편 오병순이 요절하여 홀로 노쇠하신 시아버님의 봉양을 넉
넉지 못한 형편에도 7년간이나 정성으로 모시니 시아버지는 혼자된 자부
효심에 오히려 연민(憐憫)의 정을 느껴 구부간의 인간애 정신은 당세뿐
아니라 후세에게도 만인의 귀감이 될만하다. 그는 바로 한학자 김상 철옹
의 고모이시다.
호랑이비 : 상촌 앞 내건너 산의 바위로 모양이 흰 호랑이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
인다.
띠우지 : 당골 남쪽에 있는 골(백운산 동쪽)로 띠가 많았다고 한다.
노고절 : 옛날에 노고절(老古寺)이 있었다고 한다.
약사절 : 약사산(일명 보련산)에 있다.
사리울들 : 미호천에 상류의 한 지류인데 천안동부 6개면의 물이 합쳐 흐르는
큰 내로 충청북도와의 경계가 되기도 하며 전에는 내바닥에 철이 있어서
함박으로 철즉쇠를 채취하기도 했다.
덜미고개 : 충청북도와 경계가 되는 고개로 청주·오항으로 통한다.
관성리
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1895년 지방행정 편제때 갈전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
역 통폐합으로 명성리, 의동, 냉정동, 의관동을 병합하여 의관동의 관자와 명성
리의 성자를 따서 관성리라하여 천안군 갈전면 관성리가 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되면서 병천면 관성리가 되었다. 1963년 군면이 천
원군으로 개칭되므로 천원군 병천면 관성리가 되었다가 다시 환원되었다.
북달안 : 이곳에 예전에 군사가 많이 주둔하였는데 그당시 이곳에 북을 매달고
북을 쳤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이 쳤다고도 하고 백제 군사가 쳤다고도
한다.
만뢰산 : 관성리 뒷산 줄기로 상봉인데 전쟁에 쓰던 뢰를 만개나 쌓아 두었으므
로 만뢰산이라 한다고도 하고, 만안이 피할 곳이라 하여 만인산이라고 하
기도 한다.
전설 : 만뢰산에 우물을 파도 물이 나지 않아서 삼십일 기도를 드리는데 그때 전
라도 백만장자가 피난하러 가솔을 데리고 남부여대 하여 이곳에 찾아 왔
는데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비를 내리고 판 우물에 물
이 솟아 올랐으며 장자가 가지고 온 재물과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곳의 난민들은 덕을 가지고 온 장자를 축하드리기 위하여 북을 치고 기
뻐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서로운 구름이 서쪽으로 부터 왔다고 하여 서
운산이라 한다고 하고 그전에는 물을 진천 수문골에서 퍼다 먹었다고 한
다.
사자골 : 냉정리(冷井里), 찬샘 골이라고 하는데 독가말 동북쪽 위에 있는 마을
이며 뒷산이 웅장하고 찬우물이 있어서 약물로 쓰고 그 위에 안사자 골이
있는데 그전에는 인가가 살았으나 현재는 없어졌고 대원군 시절 병인교란
때 이곳에서 천주교인 다수와 불란서 신부 페롱권신부, 칼레강신부, 리멀
이신부가 은신하고 있던 곳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병 다수가 이곳
에 숨어 살기도 했다고 전한다.
왜펀덕 : 왜병들이 이곳에 와서 의병들을 총으로 많이 죽였으므로 왜펀덕이라고
한다.
바타니고개 : 사자골에서 동면 바타니로 넘어가는 고개.
반고개 : 밤고개라고도 하며 명성골에서 동면 광덕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고개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명성골(明星) : 명성리라고도 불렀으며 관성리에서 가장 크고 구억말 동쪽에 있
다.
매봉 : 응봉이라고 하는데 명성골 서남쪽에 있는 산.
모양이매같이 무섭게 생겼다 한다.
훈련골 : 백제때 이곳에서 병사들이 훈련하였다고 하는데 동면과 경계지점에 있
는 골이다.
독가말 : 의동(衣洞). 명성골 북쪽에 있는 마을. 그릇이 있었으며 점말이라는
곳이 있고 옹기 가마터가 밭에 있었다.
안터 : 독가말 안쪽에 있는데 조선조 영조대왕이 스승이었던 곽시징(郭始徵)이
살았고 그의 묘가 이곳에 있다.
행암고개 : 관성리에서 동면 행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옹갓골 : 의관동(衣冠洞)이라고도 하는데 관성지구이며 옛날 옥이 있었다 한다.
노적봉 : 명성골 입구에 있는 산. 산 모양이 노적가리 같이 생겼다.
장자펀덕 : 옛날에 장자 즉 큰 부자가 살았다.
정자 : 독가말에 있는데 권농정이라 하며 이 부락민 한동수씨의 유언에 의하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한상운(韓相雲)형 제가 건립하여 휴식처가 되고 있
다.
망해암 :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중국 산동성이 보이고 일본 가지도 보인다는 말
이 전해오면 임진왜란때 동면 하유동에 살던 16세 소년 이응이 뛰어난 지
략으로 피난민을 모아 설득하여 돌과 활로 왜군과 수일간 싸워 격퇴시킨
곳이다.
선바위 : 바위가 서 있는데 옷갖골 뒤에 있다.
절골 : 절이 있었는데 돌절구가 남아 있다.
고로골 : 굴이 있는데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다.
불무골 : 철을 녹이기 위하여 불무하던 곳.
기와탄말 : 기와조각이 많이 나오고 있다.
기름챙이골 : 명성골에 있는데 예전에 공인(工人)들이 집단으로 살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