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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국권회복기 의병
1. 전기의병 배경과 개요
일제는 1876년 이른바 ‘함포외교(艦砲外交)’라는 무력시위로 병자겁약(丙子劫約)을 맺고 조선에 진출하여 점차 침략정책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이 있은 지 2년 뒤 일제는 ‘개화당(開化黨)’이라 일컬어지던 그들의 앞잡이 5명을 부추겨 부왜정권(附倭政權)을 세우려고 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이들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갑신(1884) 9월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부임지인 조선에 왔다. 이때 중국과 프랑스는 안남전(安南戰)을 벌이고 있었으
므로, 일본공사는 김옥균 등을 꾀어 말하기를, “청국은 이제 조선을 돌아볼 틈이 없으니 청국 세력을 배제하고 독립할
기회는 바로 이때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니, 매일 밤 모여서 은밀한 회합을 하고 일본군에 의탁하여 청국인을 방어
하며 자객을 양성하여 청당(淸黨)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군함을 파송하여 후원해 준다는 밀약까지
받았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갑신오적(甲申五賊)이 주동이 된 부왜인(附倭人)들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대궐로 쳐들어가서 대신들을 죽인 갑신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부왜인들은 일제의 꾐에 빠져 일본을 4차례나 건너가서 조선침략의 괴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긴밀히 협의, 거사자금까지 빌려왔던 김옥균을 비롯한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의 우리식 나이는 김옥균 34세, 홍영식 30세, 서광범 26세, 박영효 24세, 서재필 19세였다. 당시 서재필은 6대신 참살 책임자로 17,8세로 구성된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 ‘10대 암살단’을 이끌었다.
당시의 상황을 『매천야록』(황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재필은 생도들을 이끌고 칼을 휘두르며 내려치니 차례차례 모두 죽었고, 몸 전체가 많이 떨어져 나갔다. 왕은 그 광
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할 뿐이었다.
(중략)
(이튿날 아침) 중관(中官) 유재현이 어선(御膳)을 바치자 김옥균은 그 수라상을 차면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수라상을 한
가하게 차릴 수 있느냐?”라고 하자, 유재현이 크게 꾸짖어, “너희들은 모두 교목귀경(喬木貴卿)들이 아니냐? 어찌 부족
함을 걱정해서 천고에 없었던 미치광이 반역을 일으키느냐!”하니, 김옥균은 칼을 빼어 후려치니 층계 아래로 떨어졌고,
이것을 본 왕은 벌벌 떨었다. 김옥균은 옥새와 옥로를 들추어내어 박영호에게 주면서, “편할 대로 왕 노릇을 하시오.”하
였다. 반란 주모자들은 왕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부왜역적(附倭逆賊)이 생긴 것이 이들이 처음이고, 이 땅이 생긴 이래로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궁궐에 쳐들어간 부왜인도 이들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거짓 왕명으로 대신들을 입궐시켜 칼로써 찔러 죽인 다음 조각을 발표했다.
우의정 홍영식, 호조참판 판서서리 김옥균, 협판교섭통상사무독판서리 서광범, 친군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 박영효,
전영정령관 서재필,
이 땅이 생긴 이래 최연소 내각인 동시에 10대 국방부차관이 생긴 셈인데, 국왕의 요청으로 청국군이 대궐로 들어오고, 격분하고 있던 조선군이 연합하니, 일본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난을 일으킨 지 3일째가 되던 새벽에 물러갔다.
이때 상황을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때 우리 백성들은 일본인을 원수로 보았고 맹세코 함께 살 수 없다 하여 만나면 치고받아 죽이기까지 했다. 청병 또
한 일본 공사관을 밤에 몰래 공격하여 39명을 죽이고 부녀를 욕보였으며 방사(房舍)를 파괴하니, 드디어 다케조에(竹添進
一郞) 공사는 깃발을 내리고 군대를 이끌고 서소문을 빠져 도망쳤다. 이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더욱 노하여 일본 공사관
을 불태우고 일본군 대위 이소(磯林)를 죽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으로 일본 영
사관에서 나무 궤짝 속에 몸을 감추고 24일 일본 상선을 타고 도망쳤다.
일본공사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부왜인들 중에 서광범과 서재필은 미국으로 달아나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여 일본 군경의 보호를 받았다.
갑신왜란이 있은 지 10년이 지난 갑오년 5월 6일(음력 4월 2일), 조선 정부는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초토사로 홍계훈(洪啓薰)을 임명하고, 장위영 5개 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호남으로 내려간 홍계훈은 관군이 동학농민군에 비해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자 군대를 더 보내 달라는 보고를 하다가 마침내 청국에 원병을 요청해 줄 것을 전보로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보를 받은 조선 정부는 어전회의를 열어 좌의정 조병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영준으로 하여금 청국 원병을 요청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해 6월 8일(음력 5월 2일) 청국군 1천5백 명이 인천에 도착한 후 며칠 뒤 충청도 아산만으로 향했는데, 뜻밖에 요청하지도 않은 일본군이 텐진조약(1885)을 구실로 나흘 뒤에 인천에 상륙하여 한성으로 들어오니, 보병 3천여 명, 기병 3백여 명의 대부대였는데, 이어 2천여 명의 육군과 해군이 증파되었다.
일본군은 한성에 머물면서 청·일 양국에 의한 이른바 조선의 ‘내정개혁’을 주장하자, 청국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함께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일제가 주장한 내정개혁은 청국과 전쟁을 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으며, 속셈은 조선 침략과 내정간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써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고 부왜인을 정치 전면에 내세우려는 의도였으므로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무려 12차례나 요구했지만 일제는 그 요구를 묵살한 채 단독으로라도 내정개혁을 한 후 철군하겠다고 버텼다.
마침내 그해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벽 4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大島義昌) 소장이 거느리는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으로 쳐들어와서 겉으로는 흥선 대원군을 실권자로 추대하고, 실제로는 부왜인으로 구성된 내각을 세우는 갑오왜란을 일으켰다.
오토리는 새벽에 군대를 지휘하고 경복궁에 들이닥쳐 문을 부수고 돌입하여 별전에 이르니, 호위하는 군사와 시신(侍
臣)은 모두 달아나고 오직 왕과 왕비만이 남았는데, 번뜩이는 칼날에 떨며 몸 둘 바를 몰랐고, 들어온 연고를 힐문(詰問)
하려 하였으나 곁에 통역관이 없었다.
그날 새벽 일본군을 따라 경복궁으로 쳐들어왔던 부왜인은 김가진, 안경수, 유길준, 조희연 등 10여 명이었는데, 일제는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삼아 초정부적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만들어서 그 의장을 겸하도록 했다. 일제는 김홍집 부왜내각을 통하여 조선의 문물제도를 일본식으로 바꾸기 위해 법을 제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는데, 실제 작업은 군국기무처 일본인 고문관 50인이 맡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최고 실권자는 일본공사가 되어 3개월 만에 208개의 법령을 바꾸거나 만들었으니 나라는 온통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관리의 임용 제도를 과거제에서 임명제로 고쳐서 당시 “왜학도(倭學徒)”라고 불리던 일본 유학생 출신 2,30대 청년들과 갑신왜란 때 도망갔던 부왜인들을 불러들여 요직에 등용시켜 그들의 앞잡이로 삼았으며, 불량배와 다름없는 소인배나 소외되어 왔던 서자(庶子)들을 높은 관리로 등용하니, 사람들은 부왜내각의 관료들을 ‘변법소인(變法小人)’이라 여겨 “왜대신(倭大臣)”, “왜관찰(倭觀察)”, “왜군수(倭郡守)”라 일컬었다.
이 같은 문물제도의 변혁이 왕정을 폐하고 민주정치를 위한 발전적인 개혁이었거나, 배달겨레의 삶을 향상시킨 것이었다면 ‘갑오개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제를 일본식으로 바꾸고 우리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렸으며, 부왜인들을 중용하여 일제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억압 변혁이었기에 ‘갑오억변(甲午抑變)’이었고, 일본공사가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침범했기에 갑오왜란이라고 뜻매김해야 바른 용어가 될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경제 침투로 인한 경제 파탄, 갑오농민봉기의 여파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함께 새 법령 집행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지만, 일제 입장에서는 갑오년에 경장(更張)을 이루어 조선 침략의 확고한 기틀을 세운 바가 되었기에 ‘갑오경장’이 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듬해인 1895년 한가위가 지난 지 5일째가 되던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조선 왕비를 참살하기 위하여 이른바 ‘여우사냥’에 동원된 일본 수비대 병력은 3개 중대 5백여 명, 칼잡이 자객(낭인) 60여 명, 일본 순사대 1백여 명, 조선 훈련대 병사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일본공사는 김홍집, 우범선, 유길준, 이두황, 이진호, 조희연 등 부왜인들을 앞세워 또다시 궁궐에 난입하여 민비(閔妃)(1897년 11월 5일 명성황후 추증됨)를 참살하고 석유를 끼얹어 불에 태운 후 뒷산에 묻어버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국왕과 문무백관들은 일제와 부왜인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궐내에도 일본 군경과 부왜인들이 득실거려 아무 말도 못하고, 오히려 일본공사와 부왜내각의 “폐서인” 강요에 못 이겨 어처구니없게도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고 말았으며,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일제와 부왜내각의 외부대신 김윤식이 주고받은 외교문서에서 왕비가 시위대와 훈련대 병사들의 싸움으로 인하여 행방불명되었다고 날조한 것이었다.
일본공사 미우라(三浦五樓)는 외부에 공문을 보내 말하기를,
“일전의 병변(兵變)은 밖에 전해졌는데, 본월 초8일 새벽, 훈련대가 대궐 안으로 돌진해서 소원(訴冤)했는데, 편복(便服)
을 한 일본인 약간 명이 섞여 들어가서 난폭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본 공사는 비록 이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을 알고는 있으나 사건의 관련성이 긴박하고 중요한 것이니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옳지 못한 것으로 번거롭지만
귀 대신은 확실히 가부를 조사해서 회답해 주시오.” 라고 했다.
김윤식이 회답 공문을 통해 말하기를,
“우리 군대를 조사해 보니 당일 대궐에 나아가 소원할 때에 만약 시위대와 만나면 자세히 구별할 수 없어서 충돌할 우
려가 있었던 까닭에 외국 복장으로 가장하여 서로 격투를 벌이는 일이 없도록 기했던 것이며,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었
음으로 회답합니다.” 라고 말했다.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과 그들 앞잡이들과 주고받은 뻔뻔스런 언동에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國讐報復]’는 상소와 일제의 소행을 알리는 방(榜)이 나붙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갑오왜란 이후 일제의 궁궐 침범과 부왜인의 언동에 반발하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안동의병과 상원의병이다. 그 가운데 국권회복기 의병의 효시로 알려진 것은 1894년 7월(음력)에 일어난 갑오 안동의병이다.
안동의병을 이끈 서상철(徐相轍)은 충청도 공주 출신의 유생이었다. 그는 1894년 8월 2일(음력 7월 2일)에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대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인 ‘호서충의 서상철 포고문(湖西忠義徐相轍布告文)’을 발송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래 조선의 원수인 왜군이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을 협박하는 왜란을 일으켜서 도성
을 제압하고 지방까지 침입하니 조선은 중대한 사태에 직면했다. 여기 조선은 거족적으로 봉기하지 않으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있는 신하는 자각하지 않고 왜적의 부름에 응해 입각(入閣)하는 것은 심히 우려할 일이다. …….
통문의 요지는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침범하고, 국왕을 위협하여 내각을 임의로 교체하는 갑오왜란을 일으켰는데도 부왜인들이 여기에 참여한 것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니 8월 25일에 안동향교에 모여 적도(賊徒)를 토벌하자는 것이었다.
그 통문이 안동유림의 대표격인 이만도(李晩燾)에게 도달한 것은 8월 14일이었다. 이만도는 30년 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사헌부 사간 등을 거친 후 벼슬을 내놓고 제자를 기르던 학자였다.
그가 이만도를 찾은 날은 그달 20일이었는데, 이만도가 적극 지지하자 이어 안동 일대의 주요 인사들을 방문하고 동참을 호소하였다. 비록 안동부의 방해 때문에 8월 25일 향교에서의 거사는 실패했지만 9월초 안동지역에서 2천여 명의 의병이 일어났다.
그가 이끌었던 안동의병은 일본군의 병참부대가 있던 함창 태봉을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중, 9월 24일 안동 근처로 정찰활동을 벌이던 다케우찌(竹內) 대위를 체포하여 처단하고, 9월 29일에는 토고(藤後) 소위가 인솔하는 공병대 25명과 태봉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의병 2명이 사망하고 다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화승총 103정, 동전 9관문 등을 일본군에게 빼앗긴 후 청풍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10월초에 부왜내각에서 관군 2백여 명을 파견하여 일본군에 합세시킴으로써 압력을 가하였다. 서상철의 잔존 부대는 제천·청풍 일대의 전투를 거치고, 경기도 이천 단월전투를 벌인 후 10월 18일 광주 곤지암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해산되고 말았다.
1895년 7월(음력), 평안도 상원(詳原)에서도 의병이 일어나서 황해도 재령 장수산으로 진출해 웅거했다. 9월(음력) 중순까지 재령·봉산·덕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의병장 김원교(金元喬)는 ‘상원군수보다 높은 직위를 역임한 관리’, ‘전 군수’, ‘유생’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신분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강제로 해산된 평양부 소속의 해산군인과 포수들, 동학교도가 의병에 가담하여 관아를 공격한 점으로 보아 반외세보다 민중적 성격이 강한 의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의병은 일제에 의해 왕비가 참살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리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가 부왜인과 함께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참살한 을미왜란에 대하여 의분을 참지 못하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문석봉(文錫鳳)이었다.
그는 경북 현풍 출신으로 1895년 2월 공주부 영장에 있으면서 갑오왜란을 일으킨 일제를 몰아낼 것을 계획하고 영병 4백여 명을 훈련시키다가 피체되어 4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가 있었다.
그는 출옥 후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거사를 도모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경상도와 충청도를 다니면서 상주 좌영장 최은동(崔殷東), 우국지사 김문주(金文柱)·오형덕(吳亨德)·노응규(盧應奎) 등과 교유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11월 4일(음력 9월 18일), 충남 유성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거의하기에 이르렀으니, 왕비가 참살된 지 한 달만이었다.
그는 선봉장에 김문주, 중군장에 오형덕, 향관에 송도순(宋道淳)으로 하는 ‘유성의진(儒城義陣)’을 편성하여 회덕으로 진군하니 따르는 의병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회덕 관아의 무기고를 급습하여 의병들을 무장시켜 진잠을 거쳐 공주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그는 병법에 능숙한 무과 출신이고 전투 지휘 경험이 많은 무장이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으로 편성된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상도 지역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으니, 거의한 지 1개월 만인 12월 4일이었다.
그는 경북 고령, 경남 초계(현 합천군 속면) 등지를 돌면서 오형덕, 노응규 등과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고령군수 조시영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이어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고 있으니 잠시 숨어 후일을 도모하시오.”라고 이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군수의 고변으로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으니 11월 24일의 일이었다.
문석봉은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거를 위해 1896년 봄 최은동, 오형덕 등과 함께 파옥, 탈출하여 과천의 자택에 도달했지만 이미 그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없었다.
문석봉의 재거를 위해 노력하던 노응규는 그해 2월 안의에서 거의하여 진주성을 점령하게 되자 문석봉은 한성으로 가서 국왕을 알현하여 충의를 인정받고 이어 대원군으로부터 격려의 말을 들었다. 그는 원주로 내려가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2일 고향으로 귀환한 후 결국 11월 19일 46세에 병사하고 말았다.
문석봉 거의는 을미왜란 이후 ‘국수보복’의 기치로 의병을 일으킨 첫 사건이었으니 토왜의병(討倭義兵)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어 평북 강계에서 김이언(金利彦)·김창수(金昌洙:김구金九 선생의 본명)의 의병투쟁이 이어졌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그해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부왜내각에서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배달겨레는 분연히 일어섰다.
충청도 홍주의병이 홍주부에 들어가고, 경상도 안동의병이 안동부를 점령하였으며, 강원도 춘천과 경기도 가평 등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강원관찰사가 살해되고, 경기도 지평의병이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향하는 등 의병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궁궐의 시위대와 일본군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각지로 떠났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1896년 2월 11일 새벽, 경복궁을 나온 여인용 가마 2채는 비밀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가마에는 늘 드나들던 엄 상궁(훗날 귀비) 일행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가마에는 국왕과 왕태자가 타고 있었다. 국왕은 일본인과 부왜인의 독살 공포로부터 해방된 순간이기도 했지만, 궁궐을 버리고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을 해야만 했던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큰 사건으로 국왕은 왕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러시아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을미왜란 이후 국왕은 누가 자신을 독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상궁 나인들이 주는 음식에도 독이 들어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리하여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국왕의 둘째 아들)이 국왕의 안위를 생각해서 스스로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를 맡아 국왕에게 올리는 약과 음식을 관할하기도 했다. 국왕은 선교사나 러시아공사 베베르 처남의 처형인 손탁(Antoinette Sontag) 여사가 바치는 음식만 먹을 수밖에 없었기에 자신을 지켜줄 군대나 믿을 만한 신하조차 없는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 궁궐을 탈출하여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달포 전에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고 ‘춘생문의거(春生門義擧)’까지 일으켰던 국왕이었으니, 비록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본에 의해 국왕 자신의 신변보호와 아울러 나라가 멸망하기 일보 직전에 기사회생한 조치였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단행한 것이었다.
국왕이 러시아 공관에 도착하자마자 칙령을 내렸다. 첫마디가 춘생문의거 관련자를 유배지로부터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방축향리(放逐鄕里)된 죄인 이재순, 제주부 제주군에 종신 유배된 죄인 이민굉·이충구·전우기·노흥규, 해주부 장연군
백령도에 3년 유배된 죄인 안경수·김재풍·남만리를 모두 특별히 석방하라.”
이들은 지난해 11월 26일, 왕후 민씨의 위호(位號)를 ‘빈(嬪)’에서 ‘비(妃)’로 복위하고 흉악범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린 이튿날 밤 전 궁내부대신 이범진, 시종원경 이재순, 우시종 임최수, 전 훈련대 3대대장 이도철, 전 탁지부 사계국장 김재풍, 전 훈련대 중대장 이민굉, 친위대 1대대 중대장 남만리 등이 국왕의 밀명을 받고, 국왕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후 부왜내각의 대신들을 처단하려고 거사를 일으켰다가 일제와 부왜인의 저지로 실패한 후 이도철·임최수는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문 끝에 유배형을 받았던 충신들이었다.
이어 부왜내각을 일소하고 새 내각을 임명하는 조칙을 내렸다. 아관파천 직후 부왜내각의 대신·참판 등 부왜인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김홍집과 정병하는 한성 군중들의 돌멩이 세례를 받아 절명했고, 어윤중은 경기도 용인으로 피신하다가 농민들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국왕은 조칙을 내렸다.
죄가 있으면 반드시 복주되어 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국법의 떳떳한 이치이다. 아, 지난 8월 20일의 사변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 비밀리에 이루어진 흉악하고 교활한 계책은 따져 묻지 않아도 대소 신민들이 모두 알아 분노하고
있는데, 이처럼 큰 공분(公憤)을 사고 있는 괴수는 실로 약간 명에 불과하다.
지금 천리(天理)가 크게 밝혀져서 반역의 괴수가 복주되었으니, 도망 중인 죄인 유길준, 조희연,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 이진호 등을 기한을 정하여 체포하라.
국왕은 부왜인을 체포하라는 것과 의병 진압을 위해 파견했던 군대는 환군하라는 조칙도 내렸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전후 의병을 일으켜서 당시 관찰부를 점령한 6개 의진을 날짜순으로 살펴보면, 1896년 1월 15일(음력 12월 1일)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이설(李楔)·안병찬(安炳瓚) 등이 거의하여 홍주부를 점령했고, 1월 17일 안동과 예안 등지에서 거의한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이만도 등이 안동부를 점령했고, 1월 20일 춘천에서 거의한 성익현(成益鉉)·이소응(李昭應)·이진응(李晉應) 등이 춘천부를 점령했고. 일찍이 경기도 여주에서 민용호(閔龍鎬)가 거의하여 1월 30일 강릉부를 점령한 후 원산 공략에 나섰고,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伯善)·안승우(安承禹) 등이 원주·제천·단양을 접수하고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2월 17일(음력 1월 5일) 충주부를 점령했고, 경남 안의에서 거의한 노응규가 2월 19일 진주부를 점령하자 정한용(鄭漢鎔)이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상응했다.
각 지방 관찰부 점령이 아니지만 국권회복기 의병사에서 큰 의미가 있었던 주요 의병투쟁을 살펴보면, 단발령 직후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하락(金河洛)이 안성의병장 민승천(閔承天), 여주의병장 심상희(沈相禧) 등이 이끄는 의병들과 힘을 합쳐 3월 13일(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점령했다.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강원도 북부에서 활약한 이인영(李麟榮), 강원도 원주에서 한동직(韓東直),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李康秊) 등이 거의하여 독자적인 의병투쟁 후 유인석의 호좌의진(湖左義陣)과 호응했다.
북한 지역은 1895년 12월(음력)에 평안도 의주에서 전 교리 조상학(趙尙學) 등이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1월에는 황해도 해주부 경무관과 총순 등이 삭발한 죄로 참수되는 등 격렬한 의병투쟁이 전개되어 이후 해주관찰사 부임을 꺼리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한편, 의병해산령이 내린 후 거의한 것으로는 3월 23일(음력 2월 10일)에 경북 김천·성주에서 이기찬(李起璨)·허위(許蔿) 등이 거의했지만 큰 성과 없이 해산했고, 같은 날 전라도 나주부 아전과 군교 수백 명이 참서관·총순·순검을 처단하고, 시찰·주사 등 관리들을 가둔 후 이학상(李鶴相)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고, 기우만(奇宇萬)이 장성에서 거의한 기삼연(奇參衍)과 함께 광주를 점령하고, 나주의병장 이학상과 호응하면서 호남 각지의 의병을 광주로 총집결하기로 했던 4월 12일(음력 2월 30일)이 되기도 전에 선유사의 권유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당시 의병 구성원을 살펴보면,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리나 유생이었고, 의병은 농민·포수였는데, 그들의 처단 대상은 일본 군경과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단발을 강행하던 부왜관리였다.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에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일제의 공포로부터 한숨을 돌리던 국왕은 춘천부·충주부 관찰사, 안동부 관찰사·경무관, 강릉부 경무관, 해주부 경무관·총순, 진주부·함흥부 참서관, 나주부 참서관·총순과 각지의 군수 등 30여 명, 일본인 40여 명이 의병들에 의해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국왕은 난신들이 주륙당하고 죄인들이 모두 잡혔으므로 인민들은 의병을 해산하고 물러가서 생업에 안주하라는 이른바 ‘의병해산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2. 후기의병 배경과 개요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 침략이 심화된 것은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1903년 하반기부터 러일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초에는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이지용·박제순, 외부참판이었던 박용화·윤치호·이하영(이듬해 4월 외부대신 승진) 등과 자주 비밀회동을 갖고 본격적인 공작을 꾀했다.
1904년 1월 11일,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가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郎)에게 보낸 전보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실렸다.
어젯밤 이지용이 와서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중략) 황제의 의사가 거의 확정되어 적당한 시기를 골라 밀약(密約)을 체
결할 단계에 도달했지만 때마침 국상중이어서 일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정부 대관
일당 내지 유지라고 말할 수 있는 무리들의 의향도 크게 일본과 뜻을 같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상과 같은 형편이므로 현 단계로서는 비록 밀약 등이 성문화되지 않았다 해도, 한국 황제 회유에 관한 제국 정부 훈
령의 주된 뜻은 대체적으로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본사(本使)가 현상을 유지하면서
한층 더 이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진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러시아 병사가 계속 입경(入京)하기 때문에 현재
의 상황이 변화를 일으켜 오늘날까지 우리가 진력해서 이룬 것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게 할 염려가 없지도 않습니
다. 따라서 지난날부터 전품(電稟)으로 말씀드린 바 있는 한국에서의 우리의 우세를 과시하는 방도에 관하여 의논하여
결정해 주실 것을 부디 희망합니다.
이지용의 운동비로써 지난 번 송금을 요청한 1만 원에 대하여 그때그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본사와 협의를 하게 해야
하겠지만, 그의 입장으로서는 아무래도 망설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시오카와(塩川)를 시켜서 전액을 그에게 전달
하고 전적으로 그가 알아서 쓰도록 일임하였습니다.
일제는 러시아와 겉으로는 대한과 만주에 대한 우월적 지배에 관하여 논의를 거듭하면서 실제로는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기 위해 트집을 잡자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이라고 판단한 광무황제는 1월 21일, ‘만약 러일전쟁이 일어난다면 엄정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가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보낸 전보의 내용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한국 정부의 엄정중립 준수에 관한 선언>
본관은 방금 한국 외무대신의 명의로 된 지푸(芝罘) 발신 1월 21일자 불어 전문을 접수했음. 그 영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음.
“러일 양국 간에 발생한 분규와 그 평화적 해결의 도출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비추어 대한(大韓) 정부는 황제 폐하의
명에 의해 현재 양국 간에 진행 중인 예비회담의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엄정중립 준수를 확정했음을 선언함.”
본관은 비밀소식통에게서 또한 지푸에서 1월 21일에 주일 한국공사 앞으로 전송된 한국 외무대신이 서명한 동일한 내
용의 전문 사본을 입수했는데, 첫머리에는 “귀하가 파견된 정부에 대해”, 끝부분에는 “본관은 귀하가 황제 폐하께서 이
번 경우 모든 열강의 우호적인 협조에 의지하고 있음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희망함”으로 된 구절
이 첨가되어 있음. 그러므로 아마 동일한 선언문이 동시에 다른 열강에도 전달되었을 것임. 본관은 이것이 최근 뤼순구
(旅順口)에 파견된 밀사의 협의 결과로 추측함.
위의 사실은 극비임.
대한 정부의 중립 선언에 애가 탄 일제는 그들의 앞잡이들을 내세워 ‘러시아가 대한을 침공하려 한다.’는 거짓말을 광무황제에게 밤낮으로 거듭 말하게 한 후, ‘만약에 외국 군대가 침략을 해 오면, 일본 군대가 대한 군대와 함께 물리쳐 주겠다.’는 이른바 ‘한일공수동맹(韓日攻守同盟)’을 비밀리 체결함에 따라 일본과 동맹국 입장에서 자동적으로 러일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으며,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맹국인 일본에 제공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일제는 러일전쟁을 빌미로 삼아 군율통치를 위해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1904년 2월 23일, 일제의 무력시위와 부왜인들의 등살에 굴복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확신하며 시설의 개선에 관하여 일본 충고를 받아들일 것’,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편의를 줄 것’, ‘군략상 필요한 장소를 임시 수용하는 일을 가능하게 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고 말았다.
이어 4월 5일, ‘일본이 대한의 외교를 대리해 준다.’는 구실로 주청 대한 공사관을 철수시킨 후 5월에는 주영 대한 공사관을 철폐하기에 이른 것이니, 대한의 외교권은 을사늑약 1년 7개월 전에 이미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이었다.
이에 앞서 1월 2일 헌종(憲宗)의 계비(繼妃)였던 명헌태후(明憲太后)가 세상을 떠나자 대한 정부는 약 2개월 보름에 걸쳐 국상을 치러야 했다. 장례를 치른 다음날인 3월 14일, 이토(伊藤博文)가 특파대사 자격으로 내한했다가 3월 26일 돌아갔는데, 이지용이 일본 답례 방문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으로 가자, 일제는 그들 앞잡이 이지용·윤치호와 더불어 충성 경쟁을 벌이던 이하영으로 하여금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晋)을 ‘임시 소환’이라는 속임수로 소환하려고 했다.
외부대신 이하영이 아뢰기를,
“러시아 주재 공사 및 직원들이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彼得堡]에 있는데, 러일전쟁이 벌어진 지금 길이 막혀서 공사의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봉급과 경비를 보내는 것마저 매우 어려우니, 임시로 소환하였다가 일본과 러시아가 평화를
맺은 다음에 천천히 토의하여 파견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1904년 5월 12일,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李漢應)이 일제에 의해 주영 대한 공사관이 폐쇄되고 외교권이 박탈된 데 항의하여 영국 런던에서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아! 나라는 주권을 상실했고 국민은 평등을 잃었으니 무릇 외교교섭 관계도 치욕을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진실로
혈기가 왕성한 사람으로 어찌 참고 견딜 수 있겠는가?
슬프다! 종사(宗社)가 장차 없어질 것이고, 민족은 장차 노예로 될 것이니, 구차히 살려고 하면 욕됨이 더욱 심할 터, 갑
작스런 일이라 더욱 그렇구나. 죽기로 작정한 이 마당에 다시 무슨 말을 하리요.”
이한응의 유서가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일제 침략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현실에 대하여 국권회복 투쟁을 격발시키는 데 큰 자극을 주었다. 그의 자결은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에 맞선 최초의 자결이었으며, 관록을 먹은 관리들이 일제 침략에 죽음으로써 대항할 것을 촉구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한응은 1901년 3월 영국과 벨기에 양국 주차 공사관의 3등 참서관에 임명되어 런던에 부임했으며, 1904년에 주영 서리공사로 승진하여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주영 대한 공사관을 철폐시킨다는 통보를 받자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됨에 통분하여 이를 항의하고, 런던 주재 각국 공사들에게 대한이 독립국가임을 설득했으나 그것이 무위로 돌아가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이한응의 자결 소식에 놀라서 서둘러 주러 대한 공사관을 철폐시킬 것을 종용하여 마침내 이를 성사시키고, 공사 이범진을 소환함과 아울러 러시아와 사실상 단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 다음날이었다.
* 러시아의 수도에 있는 공사관을 철폐하고 공사 이범진을 소환하라고 명하였다.
* 대한 정부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이 오직 대한국의 독립을 유지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확고
히 하는 데 있다는 것을 헤아려 이미 의정서(議定書)를 체결하고 협력함으로써 일본이 교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번에 또 러시아 주재 공사관을 철폐하였으니 이것으로 사실상 대한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또 앞으로 우리 대한국의 방향을 명백하게 하고 러시아가 이전과 같이 조약과 특준(特準), 합동 등
조건을 핑계하여 침략적 행위를 다시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외부대신이 칙선서(勅宣書) 초안을 의정부(議政府) 회의에 제
출하여 토의를 거친 뒤에 의정부 참정과 연명으로 상주하니, 그것을 윤허하였다.
〈 칙선서 〉
* 이전에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약과 협정은 일체 폐기하고 전혀 시행하지 말 것이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킨 목적이 “오직 대한국의 독립을 유지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확고히 하는 데 있다.”는 일제 침략을 호도하고,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은 물론, 그동안 체결했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일제가 대한 정부에 요구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무황제는 비밀리 이범진에게 귀국하지 말고 공사로서 임무를 다하라고 했다. 이에 이범진은 부왜내각의 거듭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공사의 업무를 계속하자, 이번에는 일제 앞잡이 이지용·이하영으로부터 ‘바통(baton)’을 받은 윤치호가 일제의 손발이 되어 이른바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를 일본공사와 체결하였다.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
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
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3.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
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대한 정부는 일제가 추천하는 고문에게 의견을 물어 재정과 외교 사무를 보아야 하는 고문정치의 시작과 함께 사실상 외교권 박탈 조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범진이 러시아에 남아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일제가 윤치호로 하여금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외부대신서리 외부협판 윤치호가 아뢰기를,
“주차아국 특명전권공사 이범진을 소환할 문제를 가지고 아뢰어 이미 비준을 받았기에 본부(本部)에서 전보와 명령을
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직 귀국하지 않습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볼 때 매우 해괴한 일이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본 벼슬을 파면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광무황제는 국가 생명의 끈처럼 여기던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려는 일제와 그들 앞잡이들의 끈질긴 압력에 마지못해 러시아에 있는 공사관을 철폐하고, 공사도 소환하자는 주청을 윤허했지만 이범진 공사가 러시아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으니, 윤치호는 그의 종1품 벼슬까지 파면시켰던 것이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대한 정부에 내정간섭을 진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한 주둔군을 편성하여 그 사령부를 한성에 두고 육군 대장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주요 전선 및 군용 철도 구역을 대상으로 엄격한 군율통치를 실시했고, 이듬해 9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침략의 마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해 11월 17일, ‘대한의 외교 사무는 일본 동경으로 옮기고, 대한제국 황제 아래에 일본 통감을 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 안을 이토가 제시한 가운데 대신회의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이날의 회의는 일본군 헌병대가 덕수궁을 포위하고, 일본군 보병과 포병이 훈련이라는 명분으로 남산에서 궁궐을 향해 대포를 설치한 채 시작되었다.
한편, 이토는 일본공사 하야시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여 궁궐로 들어와서 이른바 ‘보호조약’ 안에 대해 대신마다 개별적으로 심문하는 표결 방식을 취했는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반대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5대신은 찬성했다. 이미 부왜인 중심의 내각이었기에 대신들은 이토가 의도한 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을사늑약의 소식이 알려지자 배달겨레의 분노는 당시 군율통치 아래에서 신음하던 군사체제와는 상관없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특히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로써 배달겨레의 분노를 터뜨렸으며, 「대한매일신보」가 줄기차게 반일 필봉을 휘둘렀다.
그리고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한 전국 유림의 대표들이 을사늑약의 무효와 부왜인을 처단하라는 상소에 이어 전 의정부 의정(영의정) 조병세(趙秉世), 시종 무관장 민영환(閔永煥),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전 경연관 송병선(宋秉璿)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하여 의분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일제는 이에 앞서 그들의 앞잡이들을 양성하여 의병에게 대항하게 하거나 밀정 노릇을 하게 했는데, 대표적인 무리가 일진회이었다.
일진회는 1904년 7월 서울에 거주하던 부왜인들이 ‘보안회’를 조직하고 전 만민공동회장 윤시병(尹始炳)을 회장으로 추대하면서 생겨났다. 그는 회명을 고쳐 ‘유신회’라 했다가 일진회라 개칭하여 정부를 공격하고, 일제를 돕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으며, 부왜역적 송병준과 더불어 「국민신보」를 매체로 갑오농민봉기 후 10여 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던 손병희(孫秉熙)를 귀국시켜 나라를 일제에 넘기는 데 앞장섰다.
일진회 윤시병·송병준 등이 선언서를 게시 포고하였는데, 전체의 뜻을 말하면 아국의 위망(危亡)은 이미 표면화되었으
니 공사 대소가 거의 일본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운운했다. 그것은 10월에 맺은 늑약(勒約:을사늑약-필자 주)의 인선(引
線)인 것이었다.
천도교 괴수(魁首) 손병희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는 모든 망명객들(일본으로 도망쳤던 부왜인-필자 주)과 결탁하고, 본국
의 간세배(奸細輩)와 몰래 내통하고 일진회를 설치하였고, 이에 이르러 일제를 업고 돌아왔다. 일진회원들이 환영하는
자가 수만이었다. 이에 교당을 세우고 연설하여 민중을 끌어들였고 동학을 개칭하여 천도교라 하였으며,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13자를 글자마다 뜻을 해석하여 신문에 실었다. 윤시병·송병준 등은 손
병희를 받들어 종주로 삼았다.
일제는 윤시병 뒤를 이은 이용구를 그들 앞잡이로 삼아 소외 계층을 규합했는가 하면, 종전의 ‘독립협회’ 주요인물을 내세워 부왜내각을 뒷받침하면서 대한을 지배하기 위한 수순을 밟아갔던 것이다.
배달겨레는 을사늑약에 이어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보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그러나 국권회복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그 의기를 뒷받침할 만한 무기는 겨우 화승총에 불과했으며, 책을 읽던 양반·유생이나 농기구를 만졌던 농민들이 주축인 의병이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 군경이나 정부의 관군을 상대로 투쟁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하거나 부상을 입고 체포되는 경우가 수천 차례 기록으로 남았으니, 의병투쟁에 나서는 일은 곧 나라를 위해 몸을 내던진 투쟁이었음이 『매천야록』, 『독립운동사』, 「대한매일신보」, 기타 의병 관계 자료와 일제의 비밀기록을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사』,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에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을사늑약 전후에 일어났던 주요 의병으로는 원용팔(元容八)의 주천·단양의병,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 신돌석(申乭石)의 영해의병, 전덕원(全德元)의 용천의병 등이 있다.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를 가져온 형식적인 빌미는 ‘을사늑약을 어긴’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 씨가 네덜란드 헤이그[海牙]에서 할복 자결했다’는 요지의 기사가 배달겨레의 가슴을 격동시켰다. 광무황제 퇴위 전날인 1907년 7월 18일, ‘의사가 자결’이란 제목의 「대한매일신보」 호외였다. 이튿날 호외에는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었는데, 당시 2천만 배달겨레의 가슴에 민족적 울분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준은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의 배를 찌르고 뜨거운 피를 움켜쥐고 좌석에다 뿌리며 말하기
를, ‘이같이 해도 족히 믿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피가 철철 흐르고 몸은 이미 쓰러지니 회의 참석자들은 크게 놀라서
서로 보며 말하기를, ‘천하의 열렬한 대장부다’ 하고, 모두 일본이 나쁘다고 했다.”
이준 열사가 순국한 날은 7월 14일이었다. 그는 헤이그 특사 부사(副使)로서 옥새가 찍힌 국서를 가지고 1907년 5월 21일 비밀리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헤이그 특사 정사(正使)였던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나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해 출발했던 것이 5월 24일이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특사 수행원으로 이미 폐쇄된 주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둘째아들)과 합류하여 헤이그에 6월 25일 도착했다. 그러나 정보를 입수한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와 열강의 무시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울분이 쌓여 20여 일 동안 밥을 먹지도 못한 채 분루(憤淚)를 삼키다가 순국했던 것이 와전된 것이었다.
광무황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 특사를 파견,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려서 열강의 도움으로 국권회복을 꾀하고자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일제와 부왜인들의 협박에 내선(內禪)을 결정하게 되었다.
광무황제는 이미 1년 전에 을사늑약 문서는 옥새가 찍히지 않은 것이기에 무효임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원래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6년 6월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광무황제는 1905년 9월 러시아 황제로부터 이 회의에 대표를 보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러시아 황제는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를 제안하고 주관한 경력으로 제2차 회의의 초청권을 개최지인 네덜란드 국왕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이 같은 초청 사실을 뒤늦게 알고 두 초청권자에게 ‘한국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로 외교권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초청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를 1년 뒤로 연기시켜 이듬해 6월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광무황제는 총신(寵臣)이었던 전 탁지부대신 이용익(李容翊:고려대 전신인 보성법률학교 설립자)으로 하여금 비밀리 중국을 거쳐 프랑스로 향하게 했는데, 그가 1906년 6월 중국 산둥성 옌타이(煙臺)에 기항하였다가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강제 귀국당하고 말았다. 광무황제는 일제와 부왜내각의 공격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그를 공직에서 내쫓았다가 비밀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게 했는데, 출발하기 직전 1907년 2월 24일 블라디보스토크 숙소에서 아침밥을 먹고 급사하고 말았다.
광무황제는 이용익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특사를 헤이그까지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육지의 주요 길목과 항구를 철통같이 지키던 일본 군경과 밀정의 감시망을 피해 특사가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지켜줄 유능한 ‘호위무사(護衛武士)’의 선발이었다. 연해주로 가려면 육로와 해로를 거쳐야 했기에 육상과 해상에서도 능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를 선발해야만 했다. 여기에 선발된 이가 이능권(李能權)이었다.
그는 일본 비밀기록 속에 신분이 ‘해적(海賊)’으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 수군 군관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특사를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보낸 뒤 귀국했다.
광무황제는 이에 앞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 B. Hulbert)에게 특사위임장을 주고 종전의 수교 9개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친서도 함께 보냈다. 이에 헐버트는 5월 8일 서울을 출발, 일본을 경유하여 5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일제는 헐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다가 우리나라도 일본도 아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지를 가했던 것인데, 정작 이준 특사가 국서를 가지고 비밀리 이상설을 만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이었다.
광무황제의 헤이크 특사 파견 작전은 이렇게 성공했던 것인데, 일제는 뒤늦게 광무황제의 특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 이상설·이준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무역 사무관이 이를
통감부에 보고하여 그들이 헤이그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할 것이라고 한다.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를 퇴위시키는 데 성공한 일제는 이어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해산을 획책했다. 조약의 본문에는 없었지만 비밀각서를 만들어 나라의 주권을 상징하는 군대를 해산해 버리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전국 3백여 개의 읍성은 물론 산성까지 헐어서 의병의 근거지를 없애고자 했다.
일제는 이미 일진회와 짜고 이른바 ‘내정개혁안’ 25개 항을 제시한 것이 1904년 7월이었는데, 이듬해 개편된 ‘병력 감축안’을 살펴보면, 그때 이미 우리나라 군대의 무력화를 획책한 것이었다.
재정을 정리하려 하는 까닭으로 인해 장차 한국은 군비를 축소, 많은 비용을 절약하여 전에 있던 전국의 병력 2만 명
은 마땅히 감소시켜 1천명 내외로 하며, 경성 수비를 제외하고 각 지방병은 일제히 철퇴시킨다.
1902년 10월 이후 우리나라 군대는 한성 수비의 친위대와 궁궐 수비의 시위대가 각 2개 연대 5천여 명, 각 도의 진위대 6개 연대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일제는 우리 군대해산을 위한 중간 단계로 1905년 4월에는 군대를 크게 축소했고,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을 할 때까지 점차 그 규모를 축소시켜 나가 군대해산 당시 시위대(친위대 통합) 병력은 3천4백여 명이었고, 진위대 총병력은 2천4백여 명에 불과했다.
일제는 광무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배달겨레의 분노가 거셀 것을 예상하여 북방을 통치하던 일본군 제13사단의 일부 병력을 한성으로 집결시키고, 유사시 군대·헌병 및 경찰의 행동을 통일 지휘하는 ‘경성위수사령부’를 한성에 설치했는가 하면, 인천에 구축함 4척을 정박시키고, 연안에 제2함대를 출동시켰다. 이토가 요청한 총기 6만 정도 7월 31일에는 용산 기지에 도착했으며, 일본군 헌병대도 전국 요지에 물샐틈없이 배치된 상황에서, “도수(徒手) 훈련이 훈련원에서 있으니 전원 비무장으로 참석하라”고 속여 시위대 군인들을 집합시켜 놓고, 무기고를 접수한 후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무엇이 아깝겠는가?”
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자 군인들은 일제히 궐기했다. 이때 동참했던 부대로는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 병력이었는데 군대해산이 있기 전에 이미 탈영했던 2백여 명과 함께 사흘 동안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으나 탄환이 소진되어 약 2백 명이 살상되거나 포로가 된 채 패배하고 말았다.
헤이그 특사 이준의 순국과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에 이어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자결한 박승환의 순국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의병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과거의 산발적인 전투 방식을 벗어나 체계적인 투쟁을 벌였으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이인영이 중심이 된 전국 연합의병은 ‘서울진공작전’을 벌여 통감부를 쳐부수고 국권회복을 도모하려 했으나 당시로서는 의진 상호간의 공조체제를 신속하고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형편인데다가 대규모 일본 군경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각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서울에서 꽤 먼 곳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으니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유학자이자 전 평리원 수반판사 출신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상을 당하매 그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단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각지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원 : 김덕제(金德濟)·민긍호(閔肯鎬)·성익현(成益鉉)·이구채(李球采)·이은찬(李殷瓚)·이인영(李麟榮)·정경태(鄭敬泰)·지용기(池龍起)·최도환(崔道煥)·최인순(崔仁舜)·한갑복(韓甲復)
경기 : 권중희(權重熙)·김수민(金秀民)·김용기(金龍基)·김진묵(金溱默)·신태식(申泰植)·연기우(延基羽)·왕회종(王會鍾)·유명규(劉明奎)·윤인순(尹仁淳)·이능권(李能權)·이은찬·이인영·정용대(鄭用大)·정철화(鄭哲和)·조인환(曺仁煥)·지홍윤(池弘允)·하상태(河相泰)·한창렬(韓昌烈)·허위(許蔿)
경남 : 권석도(權錫燾)·김동신(金東臣)·노병대(盧炳大)·문태서(文泰瑞)·박동의(朴東義)·박인환(朴仁煥)·서병희(徐炳熙)·유종환(兪宗煥)·윤정의(尹政儀)·이학로(李學魯)·임봉구(任鳳九)·전성범(全聖範)·차은표(車恩表)
경북 : 강진선(姜進善)·김성운(金聖雲)·변학기(邊鶴基)·성익현·신돌석(申乭石)·유시연(柳時淵)·이강년(李康秊)·이교영(李敎永)·이현규(李鉉圭)·장윤덕(張胤德)·정경태·정문칠(鄭文七)·정용기(鄭鏞基)·정환직(鄭煥直)·최성천(崔聖天)·최세윤(崔世允)
전남 : 강무경(姜武景)·강사문(姜士文)·고광순(高光洵)·기삼연(奇參衍)·김영백(金永伯)·김원국(金元國)·김율(金聿)·김준(金準)·박민홍(朴民洪)·박사화(朴士化)·박영근(朴永根)·백낙구(白樂九)·심남일(沈南一)·안계홍(安桂洪)·양상기(梁相基)·양진여(梁振汝)·양회일(梁會一)·오성술(吳聖述)·이강산(李江山)·이기손(李起巽)·이대극(李大克)·임창모(林昌模)·전해산(全海山)·정원집(鄭元執)·조경환(曺京煥)·황준성(黃俊聖)
전북 : 국호남(鞠湖南)·기삼연·김공삼(金公三)·김동신·김영백·김준·노병대·문태서·박도경(朴道京)·박춘실(朴春實)·신명선(申明善)·신보현(申甫鉉)·양윤숙(楊允淑)·양한규(梁漢奎)·오장환(吳壯煥)·유종환·이대극·이백겸(李伯謙)·이석용(李錫庸)·이성화(李成化)·이장춘(李壯春)·이화삼(李化三)·전성범·정성현(鄭聖賢)·정일국(鄭一國)·최산흥(崔山興)
충남 : 김운로(金雲老)·민종식(閔宗植)·민창식(閔昌植)·안병찬(安炳瓚)·염기덕(廉基德)·유준근(柳濬根)·이남규(李南珪)·이상구(李相龜)·이용규(李容珪)·이춘성(李春成)·정주원(鄭周源)·채광묵(蔡光默)
충북 : 김상태(金尙台)·권용일(權用佾)·노병대·노응규(盧應奎)·백남규(白南奎)·이강년·이만원(李萬源)·이명상(李明相)·정춘서(鄭春瑞)·조운식(趙雲植)·최성천·한명만(韓命萬)
평안 : 강두필(姜斗必)·김관수(金寬洙)·노희태(盧希泰)·이명보(李明甫)·채응언(蔡應彦)
함경 : 김일성(金一成)·노희태(盧希泰)·양혁진(梁㬨鎭)·임창근(林昌根)·정봉준(鄭鳳俊)·차도선(車道善)·최덕준(崔德俊)·최동률(崔東律)·태양욱(太陽郁)·한영준(韓永俊)·홍범도(洪範圖)
황해 : 강춘삼(姜春三)·김수민(金秀民)·김정안(金貞安)·민효식(閔孝植)·박정빈(朴正斌)·심노술(沈魯述)·우동선(禹東鮮)·우중렬(禹中烈)·이진용(李鎭龍)·정인국(鄭寅國)·최순거(崔順巨)·한정만(韓貞萬)
간도·연해주 : 안중근(安重根)·엄인섭(嚴仁燮)·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범진(李範晋)·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전덕원(全德元)·최봉준(崔鳳俊)·최재형(崔在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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