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군인 故 김오랑중령 28주기 추모행사
1. 일시: 2007. 12. 12. 14:00
2. 장소: 국립서울현충월 29번 묘역(東2923)
3. 주관: 김오랑중령 추모사업회
4. 후원: 국립서울현충원
5. 사전행사: (13:00~ )
故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 분향 참배
故 정선엽병장 분향 참배
故 박윤관상병 분향 참배
(현충탑) 선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에 대한 분향 묵념(14:00~ )
6. 故 김오랑중령 추모 식순(14:30~ )
개식: 사회자
국민의례: 사회자
내빈소개: 사회자
고인약력보고: 정무진(서울 대표)
경과보고: 윤준선(광주 대표)
추모사1: 김용환(추모사업회장)
추모사2: 임동규(평화재향군인회 명예대표, 경당대표)
추모사3: 박정욱(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대통령께 부치는 건의문: 이국희(대구 대표)
헌화분향
폐식:
* 약력보고
고인은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인 1944년 4월 5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김종수씨와 어머니 임순이씨 사이에,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해초등학교와 김해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965년 육군사관학교 25기로 입학하여, 1969년 3월 28일 졸업,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임관 후 월남을 비롯한 전후방 주요부대에서 소대장, 중대장, 참모장교로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고등군사반과 육군대학을 발군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1973년 1월 3일 백영옥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채 두지 않은 채 짧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1979년 3월 19일에 3공수여단 16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임하여 1개월여를 근무한 뒤, 사령부 추천으로 운명의 보직인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에 임명되니, 마침내 12월 13일 0시 15분경 반란군의 사악한 무리들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국가와 민족과 상관의 안위를 위해 장렬히 순직했습니다.
* 경과보고
12.12 당시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근무하다 반란군에 의해 총상을 입고 강 제 전역한 김광해중령이 고급장교 출신으로는 최초로 1993년 5월 19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반란죄와 살인죄로 고발한 이후, 검찰의 조사과정 중에 김오랑중령의 셋째 형님인 김태랑씨와 장조카 김영진씨를 처음 알게 된 인연으로 1995년 11월 2일, 김오랑중령추모사업회를 발족시키게 됐습니다.
1996년 5월 1일 김오랑중령숭모회로 명칭 변경 후,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12.12사건이 정식으로 군사반란으로 최종판결이 확정됨으로 이를 기념하고 김중령의 명예회복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장렬히 전사한 지 18년 만에 처음으로 김오랑중령추모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이후 매년 6월 6일 현충일과 12월 12일 두 차례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는 김광해님이 건강상 고문으로 물러나 앉으시고, 박대우위원장을 거쳐 현재는 김용환님이 추모사업회장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대통령께 부치는 건의문
그동안 김오랑중령추모사업회와 바른사회만들기 운동본부는 수차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12.12군사반란 당시 반란군 가담 회유를 일언지하에 뿌리치고, 국가와 민족과 상관의 안위만을 위해 홀홀단신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중령(당시 소령)의 영웅적 참군인 정신을 높이 기려 대한민국 최고훈장을 추서할 것과 김중령의 참군인 정신을 정훈교재로 작성하여 전군 장병의 정신교육 자료로 활용할 것을 건의해왔습니다. 그런데, 군 당국은 민감한 사안으로 아직 교육시기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도 군의 일부가 정치군인의 작폐에서 놀아나고 있다거나, 정치가 아직도 반란군 수뇌의 눈치나 살 피고 있음을 의심케 하는 옹졸한 처사임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대통령께서 지금이라도 온 국민의 이름으로 참군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어, 추악한 정치군인들이 흘리고 간 오물을 말끔히 씻어 내리고, 대한민국 국군의 정체성을 ‘국민의 국군, 국민의 군대’로 뜨겁게 돌려놓아 주시길 간곡히 건의합니다.
- 참군인 故 김오랑중령 전사 28주기를 추모하며 -
2007년 12월 12일
김오랑중령 추모사업회
故 김오랑 중령 추모 유감
이미 28년 전 1979년 12월 12일은 그 사건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격동의 민족사에서 잊을 수 없는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음을 부정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1979년 10. 26. 사태로 18년간 유지되어 오던 박 정희 군사 독재정권이 종결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 이러한 인류사적 기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동적 사건이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서 자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반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이며 반민족적이면서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해서 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을 산화한 김오랑 중령의 애국적인 행위를 보면서 뜻 있는 인사들은 식민지 노예사회의 사대 매판이 지배하는 전면적 절망 상태에서나마 일루의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추모식에는 제주로 고인의 조카 되신다는 김영진(51세)씨와 그분의 자제되는 김 명주군(24세)이 분향재배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인의 군 선배 되신다는 김광해(바른사회만들기운동본부 대표 총재)님과 박흥식(부정부패추방실천 시민회 상임 대표)님의 헌화에 이어서 제대군인(광주 3. 부산 2. 경기4) 들의 헌화로 간단히 끝이 났었습니다.
올해는 더욱 조용한 듯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부패와 당파세상이 대선이라는 진흙탕 잔치에 정신이 없는 상황에 그 누가 이 초라한 정의를 기억하려 하겠습니까?
28년이라!
그 기간은 김오랑을 향한 기억의 가는 끈을 놓지 않았던 동지에게는 어둠과 고통의 세월이었고, 애써 침묵하고 외면하였던 양심들은 개인의 영달과 안위만을 쫓았던 소인배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12. 12반란과 지난 28년의 기억이 찬란한 영광으로 기억되고 보상받는 이가 있으니 오장육부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참군인이자 의로운 인간 김오랑을 지우고 살고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터지는 수류탄을 온몸으로 감싸고 살신성인 한 것이나 김오랑 중령이 부대의 모든 간부들이 반란세력화 되었을 때, 상급자인 특전사령관(정병주)을 위하여 반란세력에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것은 창군 이래 대한민국 국군의 양대 귀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강재구 소령의 살신성인은 단순히 인도주의적 발상이었다 한다면 김오랑 중령의 충성심은 단순히 상관만을 엄호한 것을 지나 국가체제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본연의 군인정신의 발로로 보다 차원 높은 것으로 이해된다 할 것입니다.
창군 이래 군부 내의 하극상 사건이 4,000 여건이 넘어서 군부의 지도 이념이 위험 수위를 이미 넘었고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져 공교육이 무너져 가고 있는 마당에 수구보수 세력은 전시작전권 환수 자체까지를 본능적으로 반대하고 뉴 라이트임을 자처하는 분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합리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어이없는 현실에 어리둥절하고 맙니다.
독재자는 이미 갔고 절차상 민주주의는 상당히 진전 되었음에도 독재가 남긴 체제는 그대로 엄존하면서 이사회 구석구석을 구태의연하게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걸고 이에 종사해온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조소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 사회풍조에서 또 다시 절망 하게 됩니다.
영령이시여, 굽이살피소서.
故 김오랑 중령 추모하며...
12월 12일.
....
오늘 우리는 잠시 살다가 과거로 떠나간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빛으로 남아있을 한 사람의 삶 앞에 서 있습니다.
김오랑, 그는 참군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죽음으로 보여준 기적입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이미 그들의 집요한 회유가 있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역사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 그마저 없었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들의 추악한 욕망을 단죄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으로 국방의 의무를 신성한 명예다 뭐다 감히 입이라도 벙긋할 수 있었겠습니까.
해방 이후 친일잔재세력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움켜쥐고 뿌리를 내리며 기세등등했던 것처럼, 반란군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도 여전히 그들은 양지바른 곳을 독점하고 있고, 믿는 뒷구석은 위풍당당하기만 합니다. 만일 그마저 없었다면 어디서 다시 저들을 비웃어줄 용기라도 있었겠습니까.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12.12 반란의 역사를 생생히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을 위해서라면 국가의 사직이며 민족의 안위 따위야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전두환과 추종 정치군인들의 반역, 헌정이 유린당하고 역사가 배반의 피에 조롱당하며 거꾸러져야 했던 그해 겨울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루 전부터 자신에게 닥쳐올 피의 잔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장반역도들의 무차별 총기난사에 맞서 국가와 민족과 軍조직의 지휘체계와 상관을 위해 결연히 참군인의 길을 걸어간 그리운 그 이름 故 김오랑중령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12.12 쿠데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중령이 떠나고, 통탄할 비극으로 눈마저 실명한 채 오열하던 아내도 의문의 죽음으로 떠나고, 부모 형제들과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직속상관 정병주사령관마저 백비(白碑)의 한을 묻어 안고서 그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정의가 불의에 짓밟혔던 잘못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고 있음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불의가 호의호식 할 때, 정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면서, 여전히 아직도 마땅한 역사적 평가마저 받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을 뜯으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기적이었던 것처럼
국민들 가슴에 언제나 작은 불씨처럼 살아 있으리라 믿기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다시 소용돌이치며 회귀하고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우린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오늘 참군인 당신이 몹시 그리울 뿐입니다.
그립고 그리운 영령이시여,
고이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