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육군의 초기 주력 전차 M1 슈퍼 셔먼)
"현대전 게시판"은 크게 세개의 주요 소재들로 꾸며나갈 예정입니다.
첫번째는 2차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인해서 발발했던 중동 전쟁들을 다룰 예정이고....비록 전쟁의 시작이 2차대전 직후부터 시작하기는 하지만 냉전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배경과 원인으로 진행된 전쟁들이므로 현대전 게시판에 함께 묶을 예정입니다.
둘째는 미국이 이라크와 벌인 걸프 전쟁입니다. 우선 중동 전쟁 이야기부터 끝내놓고 순서적으로 후에 다룰 내용이지만 현용 전투기들과 탱크들의 이야기가 무척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세째는 최신 탱크, 전투기들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걸프 전쟁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에 시작할텐데 우리나라가 구매를 결정해야 할 차세대 전투기와 그외 깨알같은 최신 무기 이야기들이 될 것 같습니다. 이상의 세가지 소재들이 좀 개별적인 관계로 이얘기 저얘기 섞어버리면 너무 혼란스럽고 두서없을 듯 하여 일단 중동전쟁 -> 걸프 전쟁-> 최신 무기 順으로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중동 전쟁의 얘기를 시작하려면 아무래도 배경 역사에 대해서 조금 숙지하고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해서 오늘은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우선 지도부터 한번 보도록 하지요.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동 지도에서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이 어디에 누가 있는지 좀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일 수 있지요. 바쁘게 살면서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우리와 별 상관 없다 싶은 나라들을 미주알 고주알 알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모델러들은 이스라엘이나 이라크에서 사용하던 전투기들이나 탱크들의 키트를 자주 접하고 작업할 목표로 세우기도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는 위에 보여드린 슈퍼 셔먼 이후에 자신들의 독립적인 탱크 시리즈를 개발하여 우수한 성능으로 주변에 부강한 산유국들이 소련에서 구입한 탱크들과 맞서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모양도 독특한 이스라엘 탱크들과 소련제 탱크들을 제작하면서 그 탱크들에 얽힌 전쟁 이야기들을 이해하면 더 흥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타미야제 1/35 이스라엘 메르카바 탱크, 모양 참 개성적인 탱크입니다.)
자! 중동 전쟁은 한마디로 이슬람 국가들이 살고 있는 동네 한복판에 정말 좁쌀만한 땅에 말뚝을 박고 살고있는 이스라엘이 마땅치 않아서 주변 국가들이 손 좀 봐주려고 나섰다가 번번히 동네 초등학교 꼬마에게 코피 터진 고등학교 불량배들처럼 민망한 모습이 되곤 했던 사건들이었습니다. 군사 전문가들 조차 도대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4차례의 중동 전쟁은 어쨌든 이스라엘에게 중동 지역에서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나라로 자리 매김을 해준 셈입니다.
시오니즘이란?
우리는 신문에서나 언론매체를 통해서 들어온 시오니즘(영어로 Zionism)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그 이해의 첫걸음을 띠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가장 극명한 차이점은 기독교가 인종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았음을 믿는 종교라면 유대교는 유태인의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는 구약성서만을 붙들고 자신들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얄미운" 사상이 바탕이 되는 종교입니다. 그런 탓에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폐쇄적인 시각에서 "우리끼리"만을 고집하는 민족인 것입니다.
시오니즘은 바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믿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종의 민족 운동입니다. 유태인 국가의 개념은 구약에 나와있듯이 모세의 출애굽기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2차대전 후에 유태인이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절실해진 것은 대전 중에 히틀러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오랜 세월 유럽에서 타민족들에게 배척당하고 멸시 당해온 반유대주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지극히 현세적인 민족운동의 성격이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유태인 강제 수용소에 갖힌 유태인들....그들의 종교가 어찌 되었든,
그들이 어떻게 남들에게 배타적이었든간에 이런 반인류적인 학살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시온"이라는 뜻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유태인 작가 네이던 버바움이 "자기 해방"이라는 저널에서 처음 이 단어를 쓴 걸로 알려져있는데 그는 카디마로 불렸던 최초의 학생 유대민족주의 운동의 창시자였습니다.
시온주의의 역사적 배경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당시 유대 지역은 헤롯이라는 이름의 왕이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임명되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동방박사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듣고 유태인들의 갓난 아기들을 몰살시킨 악명 높은 바로 그 왕입니다.)
(유태 헤롯왕 (기원전 73년~ 기원전 4년)
헤롯이 죽고 그 아들 헤롯(자기 아버지와 동일한 이름)이 왕위를 잇고 그의 아들 아그리파 1세가 다시 왕이 될 때까지는 비록 로마의 허락을 받은 왕이지만 유태인들을 유태의 왕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기원후 44년 아그리파 1세가 병사하자 로마는 아예 로마 총독에 의해서 유대 지역을 다스리기로 결정합니다. 로마부터가 쥬피터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을 믿는 다신교였고 유대 지역 주변에 타 이민족들도 모두 다신교를 믿고 있는 상황에서 단일신을 믿는 유태인들은 로마는 물론 주변 민족들과도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결국 유태인들은 로마 주둔군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전쟁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하지만 기원후 70년 에루살렘이 로마에게 함락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고 이후 핍박을 받게 된 유태인들은 뿔뿔이 지중해 주변의 다른 나라들로 떠나가게 됩니다.
세월은 흘러 19세기 무렵에 시오니즘이 유태인들의 강렬한 염원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하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 미국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같은 열강의 지도자들 중에도 시오니즘을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19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그곳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유태인들이 이주하지 않은 탓에 50만명의 팔레스타인 거주민 중에서 유태인은 고작 2만명에 불과했습니다.
(1차대전에 참전한 오스만 제국 병사들)
하지만 1차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자 국제연맹은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령이던 국가들 중에 터키를 제외하고 한시적으로 식민지화하는 것을 인정해줍니다. 여기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현지인들의 협조를 구하여 식민지를 다스리기 위해서 아랍인들과는 향후 아랍인들에게 이지역을 돌려주겠다는 맥마흔 선언(1915년)을 하였고, 2년 후에 유태인들과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면 그땅을 유태인들에게 주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하였습니다. 결국 양쪽 모두에게 영국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린 셈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두 강대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 지역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남(南)시리아의 4개 지역으로 분할합니다. 남시리아 지역(이제 위에 지도 보면서 위치를 대충 감을 잡으시길....)은 공식적으로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이었고 영국은 이 지역을 요르단 강을 경계로 구분하여 동서로 다시 분할하였다. 이리하여 요르단 강 동안은 훗날의 요르단 왕국이 되며 요르단 강 서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1922년, 팔레스타인 인구 조사는 종교별로 구분하여 약 589,200명의 무슬림과 83,800명의 유태인, 71,500여 명의 그리스도인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점차 유대인의 이민 수가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점차 기존에 있던 아랍인들과의 마찰을 낳는 결과를 빚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 발생했던 시온주의자들은 이 지역에 유대인 정부를 건설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으며 아랍인들 대다수는 이것이 곧 비(非)유대인들의 추방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
여기서 우리에게도 알려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 영국군 장교 T.E.로렌스가 등장하는 시대가 됩니다.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 있던 아랍인들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특히 토지의 지배권 확보라는 이권을 위해 자신들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과 그 이후 다시 그들을 지배하는 영국에게 저항을 하게 됩니다. 로렌스 같은 영국인은 그런 그들의 민족주의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영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식민지에 골치덩어리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아람인들은 영국에만 저항한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유태인들도 공격하였는데 결국 1920년 팔레스타인 폭동과 1921년 야파 폭동으로 이어지는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1929년에 일어난 팔레스타인 폭동 기간 중에는 무려 67명의 유태인들이 헤브론 지역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아랍의 독립 운동 (1936년 ~ 1939년 )
1935년까지는 아랍의 젊은 무슬림 단체인 YMMA등이 주축이 되어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고 유태인들을 공격하는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으나 주로 영국 식민성이 그들의 불법 행위를 제재하였습니다. 하지만 1935년 11월에 영국 경찰에 의해 이슬람의 예언자로 인정받던 샤키 이즈 아딘 알퀘삼이라는 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랍의 독립 운동은 훨씬 광범위하게 벌어지게 됩니다. 그 해 여름 동안, 수백 명의 유태인 농부들의 농장과 과수원들이 파괴되었으며 몇몇 유태인들이 살해당하여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며 약 18개월간 영국은 통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1936~1939년 사이에 일어난 아랍 운동에서, 영국군은 유태인들을 지원하여 6,000여 명의 치안 경찰을 조직하여 이 운동에 대한 진압에 들어가게 되는데 . 이로 인하여 약 5,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하고, 만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영국군 장교 찰스 윙게이트는 영국군과 유태인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갈릴리 지역과 에즈릴 계곡 주변에서의 아랍 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야경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인들로 구성된 방위조직 아그나는 약 2만여 명의 경찰력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 인원 중에는 훗날 중동전쟁에서 미국의 패튼이나 독일의 롬멜 못지않은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는 모세 다얀이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이 활동을 통하여 약 13,200정의 화기를 아랍에서, 유대인에게서 521정의 무기들을 회수하였습니다.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
모세 다얀 장군(1915년~1981년))
이상의 진행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2차대전 후에 유태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하기에 앞서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과 유태인간의 반목은 매우 뿌리 깊게 곪아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영국은 자신들의 군대와 유태인들을 동원해서 아랍인들을 탄압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 없었는데 이런 편향적인 태도는 어쩌면 그들의 조상이 십자군 원정을 떠나 이슬람 군대와 벌인 장기간의 전쟁이 추악한 죄악으로 변색되었고 결국은 실패한 전쟁으로 끝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에게 더 우호적인 시각에서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비록 기독교도인 영국인들에게 유대교를 믿는 유태인들 역시 이교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슬람교도보다는 우호적인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과 유태인의 깊은 원한의 골을
파게 만든 주범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결정의 원인은 어쩌면 1,00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참혹한 전쟁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운동으로 인해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지도력을 상실하는 결과가 빚어졌다는 평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서 지속된 분쟁의 불씨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기에 발생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테러는 세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는 영국군이 필요에 의해서 만든 무장조직이었지만 훗날 이스라엘 건국때 활약하게 되는 유태인 무장 조직의 모태가 만들어졌습니다.
둘째, 이제 아랍인들과 유태인들은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습니다.
세째, 2차대전 중에 유태인의 이지역 이주를 제한하려는 협의안에 대해서 영국이 백지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아랍은 더 이상 영국을 믿지 않고 협력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랍인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대인 무장 조직 (하가나)은 영국군에 의해서 고도로 훈련을 받고 기동화된 6,000명~8.000명의 치안 경찰 조직이 되었고 야경단을 포함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무려 14,000명 규모의 유태인 치안 부대가 조직된 셈입니다. 하가나는 단순한 경찰 활동 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에 대한 첩보 활동과 역첩보 공작을 담당하게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마크)
2차대전 발발과 하가나 조직의 활약
2차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의 위협은 중동지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영국군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군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과 유태인들로 구성된 왕립 켄트 연대를 조직하여 추축군에 대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결과 팔레스타인 아랍인 3,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의 부대가 영국군에 의해서 훈련받게 됩니다. 드디어 롬멜 군단이 이집트로 진격하자 영국군은 1941년 만여명의 유태+아랍 방위군 조직을 동원하였습니다. 여기서 유태인 조직 하가나는 나치 독일로부터 보급을 받아서 영국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게릴라 공격을 하는 팔레스타인 낙타 척후부대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전쟁이 끝나고, 영국 정부는 이 지역의 군대를 즉시 무장 해제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이에 불응한 하가나 몇몇 대원들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차대전 기간 중에 그렇게 요긴하게 사용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무장 조직은 이제 영국군에게는 귀찮은 상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1946년 영국은 요르단 왕국의 압둘라 왕과의 약속대로 아랍지역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비록 영국의 영향력이 강하긴 하였지만 압둘라 요르단 왕의 이복 형제 파이잘 왕자가 이라크의 왕이 되었고, 시리아는 프랑스에서 독립을 합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이지역에 모든 아랍 국가들도 독립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이라크의 왕이 된 파이잘 왕자는 바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알렉 기네스가 맡았던
그 파이잘 왕자를 말합니다.)
UN의 팔레스타인 안건 결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련 국제연합 제181 결의안 결의 모습)
그리고 드디어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은 제181결의안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아랍인과 유태인으로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안건을 제시합니다. 전체를 3개로 분할하여 야파 지역을 아랍인에게 주도록 하고,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지역은 UN이 관할하는 공동 구역으로 결정한 이 결의안을 대부분의 주류 유태인들은 환영하였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과 주변 아랍국가는 반대했습니다.
아랍 측은 전체 인구의 40%에 못 미치는 유대인이 58%의 영역을 할당받은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나 할당된 지역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야파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갈릴래아 지역 중 야파와 요르단이 아랍 지역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에 배정된 지역 절반 정도는 네게브 사막(광야)였기에 아랍의 주장도 부당한 면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아랍인 정부 구성
예루살렘의 아랍계 지도자로 아랍상위평의회의 의장인 아민 알 후세이니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독일에 협력한 바 있다. 1940년 그는 추축국에게 이 지역에서 유태인들을 몰아낼 권리를 요구한 바 있습니다. 전쟁의 절반 기간 중, 후세이니는 나치 독일의 방송을 통하여 무슬림들에게 공통의 적(유대인)에 대항하여 추축국과 함께 싸우자는 선동을 한 바 있으며, 그는 방송을 통하여, "아랍인들은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투쟁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족족 죽여라. 이것이 아랍을 위한 것이며 알라를 기쁘게 하는 것이니, 명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알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발언한 바 있습니다.
홀러코스트 직후, 아랍 지도자들의 이러한 발언들은 유대인들에게 "인종 청소"로 받아들여졌고 1948년, 후세이니는 "지하드"(성전)을 선포한다. 무슬림 형제들이여, 유대인들을 죽여라. 모조리 말살하라"라고 발언합니다.
(히틀러와 만나고 있는 아미 알 후세이니 (1941년), 그는 노골적으로 반유태 사상을
주장했지만 1971년 베이루트에서 병으로 죽었다. 유태인들이 가장 증오하던 대상 중에
하나였을 것이나 어쨌든 그는 국제연합의 결정 후에 팔레스타인에 아랍 정부를 세운
지도자였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시작하자 후세이니는 이집트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는 아랍 지도자들과 긴밀한 친분을 유지하였으며 1948년 2월 다마스커스에서의 팔레스타인 야전 지휘 조직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여 그의 "지하드군"의 지휘관, 하산 살라마와 아브 알 퀘디르 알 후세이니를 선출합니다. 다마스커스 회의 이후 4일 뒤, 그는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합니다.
(영화 "영광의 탈출"(1960년)의 한 장면, 실제로 이스라엘 건국은 폴 뉴먼이 연기한 것처럼 그렇게 멋있거나
감격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 통치의 실패로 아랍인들과 유태인들 간에 원한만 잔뜩 쌓아놓고
자기는 떠나버리고 이제부터 너희들끼리 알아서 살아라"하고 내팽겨쳐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이 떠난
후에 중동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주변 국가들과 팔레스타인의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한편 요르단에 압둘라 국왕은 다마스커스에서 5월 13~14일간 열린 국제 아랍연합군 회의를 통하여 아랍연합군 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아랍 전략을 통괄하여 트렌스 요르단이 영국의 구 팔레스타인 식민지 지역을 통합하는 전략을 구상합니다. 당시 영국은 압둘라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압둘라는 훗날 "당시에 신생 이스라엘 국가를 침공하는 결정을 하면서 영국의 후원 문제로 걱정한 적은 없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불행히도, 요르단 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압둘라 국왕의 의도를 아랍 국가들이 의심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랍연합군의 내부 불화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합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불과 몇년만에 중동 지역에는 이스라엘이 건국하였고, 그 주변 아랍 국가들도 모두 독립하게 됩니다만 위에서 흝어봤듯이 불과 50년도 안되는 기간 중에 팔레스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을 빚게되는 화약고 중에 하나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왔고 다음 편에서는 1948년에 발발한 1차 중동전쟁과 이스라엘이 사용했던 무기들을 흝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댓글 사족일 수 있지만 제 가게 주말에 새벽 담당 매니저가 팔레스타인인에다가 무슬림입니다. 저는 기독교신도지만 절대 종교 관련해서는 서로 언급 피합니다. 가끔 지하실로 내려와 천 깔고 혼자 절하고 기도하는 것 볼 때는 참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뭔가 관계가 오묘하군요. 미국은 다문화 사회이니 굳이 종교문제를 언급할 필요는 없긴 하겠습니다. 근데 쫌 무섭당...~~~ ㅜㅡ
뭐.딴 것은 멀쩡해요. 그러니 데리고 일 시키지요^^
이리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해가 쏙쏙됩니다.
바로 그말이 제가 가장 듣고싶은 말입니다! 스마트폰이 있으니 바로 바로 답 댓글 쓸 수 있어서 참 편하네요!
오오오... 드디어 modern war 리뷰하시는군요. 알차고 재미있는 리뷰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사드 마크가 일곱촛대군요. ^^
모든 대립중에서 종교적대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지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보다 더 넘기 어려운 벽이 종교 대립인 것 같네요.
'이뿅영' 편집장님께 살짝 죄송하긴 하지만, 예전에 모형잡지에서 읽던 중동전사 보다 이야기가 오히려 풍성하고 재미있는 것 같네요.
모르고 있는 역사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고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영광의 탈출' 다시 한 번 챙겨 봐야겠습니다. ^^
아이구!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그분 전사 관련 기사 못읽어봤거든요..... 글 하나 하나 나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역사 지식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치일피일 읽기를 미루다가 오늘 일과후 단숨에 읽었습니다. 특히 구약과 신약을 언급하면서 유태인들의 종교관까지 설명해 주셔서 기독교를 이해하는데에도 아주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은 진짜 재밌습니다. 아니 이제는 재밌다는 몇글자로는 형님글에 대한 칭찬이 안되네요. 전쟁과 무기를 소재로 해서 글의 대부분을 이어 나가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거의 고등학교시절의 '세계사' 과목 하나 정도에 해당하는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역사적 사실들은 얼마든지 참고 자료 찾아낼 수 있지만 읽는 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추리고 설명하는 것이 제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게시판 추가하신 것 읽는 분들의 관심과 응원이 있는 한 후회하진 않으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