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사람과산에 새로 연제하는 꼭지의 기사입니다.
2월호에 나갈 기사대
아직교정을 보지 못햇어요. 시제 맞춤법이 틀렫 양해하고 먼저 읽어주세여.
The climber and wall 1
None Karma 최석문
‘뿌린 카르마(karam, 업)의 씨앗이 없으면 거둘 열매도 없다.’
‘인간은 살아가며 직면하는 무수한 종류의 선하고 악한 카르마가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저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정신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등반도 작은 인생이기에 마찬가지다. 깎아지는 거벽을 올라서며 불연 듯 느끼는 고통과 위험! 등반가에게 있어 이런 갈등의 업(業)을 반드시 넘어서려는 의지는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無漏業)’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스스로도 그 업보(業報)에서 벗어 날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글 임성묵 빅월클라이밍 전문기자 사진 강레아 기자
2001년 여름 최성문(36세, 개미산악회,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씨는 파키스탄의 힌두라지 산맥의(Hinduraji mt's)의 다르콧산군 튜이골 갈사바르 계곡에서 작지만 전위적인 등반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 최석문씨가 포한된 ‘멀티4 원정대’는 파키스탄의 5000 ~ 6000m급 5개봉우리를 한 시즌에 오른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카라코람 산맥의 두 곳의 세계 초등을 기록하며 세 번째 , 네 번째 등반을 위한 이동을 끝낸 후였다.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시카리(Shikari, 5928m)와 무스뜸(Mustum, 5620m)은 2000m의 미등의 벽으로 험악한 설연만을 날리고 있었다. 그 거대한 벽이 전하는 긴장감속에 등반 전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등반방식은 고정로프를 사용하지 않는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로 한다.” 서기석(명지대 산악부OB)대장의 결정에 모두 동의했다. “이번에는 내가 성묵씨와 한조로 등반을 할게요.” 김창호(39세, 서울시립대 OB)씨의 제안에 등반조는 김창호씨와 기자가 한조로, 서기석, 이명희(35세,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최석문씨가 한조로 결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최석문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창호형하고 등반하고 싶은데요.” 최석문씨의 제안에 다시 회의를 거쳐 등반조가 정해졌다. 김창호, 최석문조가 시카리를 나머지 대원들이 무스뜸을 등반하기로 결정됐다. 전진캠프에는 긴장감속에 새벽까지 들리는 마른 기침소리만이 나 말고도 잠을 못 이루고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태양이 능선을 넘어서기 전 헤드램프 불빛에 의지해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을 빌며 어둠속에 등반을 시작했다. 등반 이틀째 우리에게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폭풍설이 찾아왔다. 10분 간격으로 계속되는 눈사태 속에 우리는 추위와 낙석의 공포 속에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서로의 생사를 걱정하며.. “쿵! 쿵!” 비박지 위에서 계속 떨어지는 눈사태 속에 나는 지쳐있는 이명희씨를 보며 회의 때 최석문씨가 그의 반려자인 이명희씨와 등반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그의 등반에 관한 결정은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이해 할 수 있었다.
산에서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지난휴일 모처럼 시간을 내 최석문씨가 거벽 등반가로 태어난 인수봉으로 향했다. 제법 눈이 가죽 빙벽화 위로 달라붙는다. 동면의 심우길(4마디, 100m, 5.9 A0)로 향했다. “형! 기억나?” 그의 말에 10년 전 아주 추운겨울 독한 한기를 품은 강한 바람 속에 단 둘이 이곳을 등반하던 지난 한 시절 열정이 어렴풋이 다가온다. 주렁주렁 장비를 착용하는 최석문씨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1996년 그를 처음 인수봉 야영장에서 만났다. 당시 김미선(청죽산악회)씨의 소계로 알게 된 그는 ‘알프스 3대 북벽 원정’ 준비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해여름 ‘알프스 3대 북벽등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최성문씨와 난 파키스탄의 쉽튼스파이어(Shipton spire, 5850m)등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벽이라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급속도로 친해져 있었다. 매주 등반을 함께하며 많은 벽들을 올랐다. 하지만 1999년 봔트클럽에서 주최한 탈레이사가르원정대(대장 최영국) 대원으로 최성문씨는 인도로 날아갔다. 그해 가을 여전히 강인해 보이는 구릿빛 얼굴로 그가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한켠 왠지 모를 좌절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생각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등반에 대한 실망감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가 20대 초반 끊었던 담배를 다시 찾은 것도 이때쯤이었고 술자리에서 벌컥벌컥 잔을 들이키는 그를 본 것도 이때쯤이었다. 하지만 그가 인수봉으로 향하던 발걸음엔 더욱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끊을 수 없는 업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산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 주를 빠지지 않고 그는 인수봉에 있었다.
그러던 2001년 그에게 다시 한 번 등반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 시즌에 5봉우리를 오르자고요?” 그는 이번 등반계획을 듣고 조금 놀라는 듯 했지만 언제나처럼 묵묵히 등반을 준비했다. ‘카라코람 멀티4 원정대’로 명명된 이 원정대에는 그의 인생의 반려자인 이명희씨도 대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에 도착하자 지난 일 년의 공백을 메우 듯 최석문씨는 폭풍같이 등반을 했다. 카체브랑사(5560m)에서 그는 전위(前衛)를 꿈꾸는 듯 했다. 앞서나가는 자의 불안함도 또 “휘~잉” 쇳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수많은 낙석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같이 줄을 묶는 건 생사를 가르는 위험을 같이 하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석문씨는 등반에 몰입해 있었다. 그가 그렇게 숭배하고 사랑하는 산에 와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의 노력만을 할 뿐이었다. 그는 이 등반에서 정상에 섰다. 북봉과 주봉 모두를 올랐다. 그는 예전부터 등반을 결정하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등반을 결정하면 거칠 것이 없었다. 어떤 때는 그의 기(氣)센 등반에 그의 등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긴장감에 휩싸일 정도로 그가 등반에 내뿜는 에너지는 보통의 등반가와 달랐다. 그는 절대 산에서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 산의 초등을 기록하고 우리는 40도를 웃도는 카라코람의 7월말 우리는 힌두라지 산맥으로 향했다. 이미 70여 일간 등반을 해서인지 모든 대원의 체력은 바닥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끊어내지 못할 업보 속에 있었다. 머메리즘이니 등로주의니 이런 모든 것들에 버거움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저 자신이 결정한 산에 오르는 것이 그의 삶의 한 방편이자 업보였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어 보였다. 최석문씨와 김창호씨는 눈사태와 폭풍설 속에서 2000m의 벽을 50m의 로프 한 동과 하켄 몇 개로 초등을 이뤄낸다. 그해 폭풍 같은 열정으로 누빈 카라코람의 여름이 지나고 우리는 몇 해 후 다시 인수봉에 모였다. 그사이 최석문, 이명희씨는 결혼을 해 최보건(5세)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형! 명희가 우울증이 심해요.” 항상 밝은 성격의 이명희씨는 당시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그리고 산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아주 힘든 시기였다. 이때가 2004년 이었다. 이후 다시 이명희씨는 산으로 돌아왔다. 각종 대회의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부활을 선언했다. 하지만 몇 년간 최석문씨는 휴일을 제외하곤 자주 그를 산에서 볼 수 없었다. 2004년 뿐 아니라 매년 등반에 관한 제의를 한곳은 내 쪽이었다. “형! 전 아직 안돼요. 몸 더 만들어서요.” 매번 등반 제의를 뿌리치는 그가 조금은 야속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었다. 아마 그때 그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상상해보면 “형! 바다에서 산을 그리워하지 않아요.” 이었을 것이다. 그는 5년간 부인의 외조(?)와 생활에 전력투구했다.
5년 만에 다시 산으로
심우길 두 번째 마디를 둔탁한 빙벽화를 신고 헤쳐 나가는 그의 모습이 탁월해 보인다. 그는 영락없는 벽 등반가다. 거침없이 눈 싸인 사선크랙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진다. 지난 한 시절 그의 많은 추억이 깃든 인수봉이어서인지 그는 이날 등반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눈 쌓인 진달래 능선이 저 아래로 보일쯤 우리는 심우길 등반을 정리했다. 곧게 뻗은 로프에 의지해 그의 지난 시절의 추억이 깃든 눈 싸인 인수봉을 내려왔다. 그는 알파인등반가가 도달하기 힘든 5.13급을 얼마 전에 끝냈다. 매일 피곤한 일상 속에서도 하루를 건너뛰지 않고 인터벌트레이닝과 인공암벽에 매달렸다. 도선사로 내려오는 길 넌지시 그가 말은 건넨다. “형! 나 다음 주에 남미 또레스 델 빠이네(Torres del Paine, 2800m)로 등반가요.” 그가 다시 5년 만에 산을 선택했다. 준비되지 않으면 떠나지 않던 그가 다시 침묵을 깨고 멀리 남미로 떠난다고 했다. 산을 내려오며 힌두라지산맥의 등반 회의 때 왜? 그가 창호형과 시카리를 등반하고 싶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때 그는 등반을 결정 했었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자신의 산을 포기하며 가족과 생활을 위해 또 다른 산을 힘차게 올랐었던 것뿐이다. ‘뿌린 카르마의 씨앗이 없으면 거둘 열매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만든 업보에서 벗어 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서 선택은 명확했을 것이다. 바라건대 그가 남미의 침봉을 오르며 그간 질어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벽 위로 비상(非想)을 그려본다.
(박스)
최석문 35세
개미산악회,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98년 몽블랑, 아이거, 마터호른, 그랑드조라스 등정
99년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탈레이샤가르 등반
01년 카라코람 카체블랑사, 시카리 초등
청송 달기우폭 karma 개척등반(M7,WI5)
대승,소승,토왕성,국사대 빙폭등반
첫댓글 임성묵기자의글은 어쩌면 그의 등반하는 모습과도 같군요.꽉짜여진 빈틈을 보이지 않는.... 최성문강사님 훌융하십니다.이번 등반도 후회없는 등반이 되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문광수.
잘 읽었습니다...
2001년도 그때가 생각이 나네요. 참 재미있게 등반하며, 행복했었는데...... 지금도 그 행복감을 이어가려고 노력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