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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찰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으며 때문이라고 한다. 진표율사는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또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
미륵전은 8세기경에 지어졌는데 정유재란때 불타버려 인조 1635년에 새로 세웠고,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이란다.
935년 3월 견훤이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금산사 미륵전 지하에서 울분속에
3개월간 유폐생활을 하다가,6월에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
내고향! 羅州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했다.
나주는 견훤이 오랫동안 왕건과 치열하게 싸우던 전략요충지였는데...
왕건은 도망나온 10살 연배를 상부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궁궐같은 거처도 재공했다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3층 건물이라고 한다.
보제루의 편액을 찾아보니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은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유학자이며.
호는 강암으로 간재 전우의 제자인 유재 송기면의 3남 1녀중 셋째로
1913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사면 상정리 요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녹두장군 전봉준(18545∼1895)도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훗날 그의 오른팔이 됐던 동학의 금구접주 김덕명과 태인접주 손화중도 바로 그 시절에 사귄 동무들이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갑오농민전쟁 실패 후 혼란기에 민중을 무서운 속도로 휘어잡은 증산교의 창시자 강증산(강일산·1871∼1909)은 금산사 미륵불을 공개적으로 차용했다.
강증산은 금산사 반대편의 대원사에서 49일 동안 기도한 끝에 도를 깨달았고,
오리알터 부근 구릿골 약방에서 도를 편다. 그래서 모악산은 증산교의 성지가 된다.
특히 강증산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으면 금산사 미륵전으로 오라”는 유언을 남겼다....(인터넷 자료임)
첫댓글 남간공이 금산사와 가까운 나주나씨 (금양군파)세거지에 있는 귀신사에서 김거비와 만난 시문을 보면
금산사에도 들렸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