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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 175 ❏배향인물: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이 황(李 滉)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이 준(李 埈) 정경세(鄭經世) ❏창건연도: 1606년(선조 39) ❏사액연도: 1676년(숙종 2) ❏향 사 일: (음력) 2월, 8월 하정(下丁) |
‘도남(道南)’이란, 북송의 정자가 제자 양시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 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의 유학 전통은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이 서원은 탄생하였다. 1605년(선조 38) 4월, 전 주부 등 8인이 묘우를 세워 유현을 모시기로 발의하고 통문을 내었으며 5월에 옥성서당에 모여 서원건립을 의결하였는데 회원은 60인이었다. 1606년(선조 39) 6월, 연악서당 회의에서 낙동강 무임포에 서원 자리를 정한 후 동년 12월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오선생 위판을 봉안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는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1635년(인조 13)에는 정경세(鄭經世)를 추가배향하였다. 1676년(숙종 2)에 사액(賜額)된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도남서원은 동학운동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동학이 일어나고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자 그에 극도로 반대한 세력이 바로 유생들이었고 그들은 조직적인 배척운동을 벌였는데 그 시발이 바로 상주지역이었다. 상주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산서원(愚山書院)에서 1863년 9월 13일자로 동학 배척통문(排斥通文)을 만들어 이웃 서원인 도남서원(道南書院)으로 보냈는데 도남서원은 경상도 일대의 서원에 통문을 보내 일제히 들고 일어나라고 호소하였다.
1992년 유림에서 4년간 강당 등을 복원하고, 상주시가 지난 2002년부터 유교문화관광개발사업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2005년에는 이준(李埈)을 추가배향하여 아홉 선생을 모시고 있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2월, 8월이 하정일(下丁日)이다.
1)정몽주(鄭夢周, 1337~139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했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되어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해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 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한 그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해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대사성 이색(李穡)은 그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그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해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사신의 임무를 다해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 同判都評議使司事 戶曹尙瑞寺 事進賢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成均大司成 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해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고려 말 다사다난하던 때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 일이나 큰 의혹이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 大明律≫·≪지정조격 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해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해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 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에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수옹(睡翁). 판종부시사 지의(之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 복주(復周)이며, 아버지는 함길도병마우후 증한성부좌윤 육을(六乙)이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여 체용(體用)의 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 11)에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지관사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8월에는 성균관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다. 1486년 어머니가 이질에 걸리자 극진히 간호했으며, 어머니가 죽자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뒤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가 되었는데 이 때 정도(正道)로써 동궁(연산군)을 보도했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질고(疾痼)가 부렴(賦斂)에 있음을 알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지어 시행한 지 1년 만에 정치가 맑아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民事)를 돌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고, 춘추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승무(陞廡)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일두유집 一蠹遺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3)김굉필(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중곤(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승순(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소형이 개국공신 조반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 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 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박한공(朴漢恭)·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4)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참군 수회(壽會)의 손자로, 생원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 昭)의 딸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수립한 것이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해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여기에서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러 개 남겼다. ≪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 태도를 가졌다. 곧,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던 것이다.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 태도에 비해 매우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그의 미완성 작품이다. 이 저술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경(九經: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 뒷날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 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 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27세에 지은 <오잠 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5)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혀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6)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 : 정교하고 명확함.)해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 : 전하여 외워옴)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해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한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 때와 같이 했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해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7)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출생. 자온(子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작(公綽)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했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 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 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 (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해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 皇華集序>를 지어 올렸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그 해 함경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했으며, 15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 精忠錄跋>을 지었고, 다음 해 ≪포은집 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崔永慶)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15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승진해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하였다.
1592년 3월에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를 보내도록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일본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 해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軍事)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권율과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고 제장(諸將)에게 방략을 주어 요해(要害)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한다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하였다. 또 군대 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및 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1594년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 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 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8)이준(李埈, 1560~16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조년(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琢)이고, 아버지는 수인(守仁)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 천명을 모집해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 해 경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 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 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로운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했으며, 그 뒤 부응교·응교·집의·전한·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집권 서인세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 하여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 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 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9)정경세(鄭經世, 1563~163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汝寬)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가(軻)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 7세에 ≪사략 史略≫을 읽고 8세에 ≪소학≫을 배웠는데, 불과 절반도 배우기 전에 문리가 통해 그 나머지 글은 스스로 해독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해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고, 1580년 유성룡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진력하였다. 1582년 회시(會試)에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한때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다. 곧이어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정랑의 직에 있을 때에 인사 행정이 공정해 현사(賢邪)를 엄선, 임용 또는 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에 승정원우승지로, 3월에는 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경상감사 재임 시에는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민풍(民風)의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자, 이 고을 풍습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함을 알고 이를 근절시켜 민풍을 일신시켰다. 그 해 겨울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잠시 상경했다가 다시 귀향하였다.
당시는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는 자못 시끄러웠다. 정경세는 이 때를 기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道學)이 정몽주(鄭夢周)에서 창시해 이황(李滉)에서 집성했으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正學)으로 더욱 깊이 연구함에, 이들 주변 수백 리 안에서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는 상주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곳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해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였다. 이 곳에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해 후학으로 하여금 도학의 정통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하였다.
1607년 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교서를 내려 정경세에게 구언(求言)하였다. 그는 이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봄에 동지사로 명나라에 가서 다음 해에 돌아오면서 화약(火藥)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진력하였으므로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그 해 4월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어 12월 부임하는 날 다시 전라감사로 영전되었다. 그 뒤 도정(道政)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8월에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일변되자 3월에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그 뒤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도(公道)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해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평소에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경했다. 주서(朱書)를 편람, 정독해 후진 교육이나 조의(朝議)에서나 경연에서 진강할 때 주서에 근거를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양정편 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 朱文酌解≫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 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경전에 밝았는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 喪禮參考≫·≪주문작해≫가 있다.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870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도남서원은 현재의 사행당(四行堂)의 건립을 시작으로 1933년 사당을 복원하고, 1994년에는 강당을 복원하였다. 상주시가 지난 2002년부터 유교문화관광개발사업으로 정허루(精虛樓)와 동·서재 등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2층 누형식의 정허루(精虛樓)가 있고 동재인 손학재와 서재 민구재, 강당인 일관당(一貫堂)이 든 ‘ㅁ’자 배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사당인 도정사(道正祠)가 솟을문 형식의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도정사의 서쪽에 전사청이 위치한다. 그리고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사행당이 있다.
참고-경북서원지
상주인터넷뉴스 www.sjinews.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