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과 충주를 잇는 고개의 변천사(156~2000년)
계립령․새재․이화령․이화령터널
인류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발달한 자동차는 고개의 형태를 뒤바꾸어 놓았다. 길은 자동차가 다니기 쉽게 포장되었고, 구불구불한 곳은 곧게 퍼졌다. 이 땅에 파란만장한 고개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문경과 충주를 잇는 고갯길이다.
문경에서 충주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두대간을 넘어야 한다. 신라 아사달왕 3년, 156년에 뚤린 계립령은 문헌상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다. 이 길은 현재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하늘재~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지릅재~사문리로 연결된다.
조선시대 새재가 뚫자 계립령은 국토의 대동맥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보조적인 고갯길로 보부상이나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현재 비포장으로 남은 구간은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하는 미륵지에서 하늘재 고갯미루까지 약 1.5킬로미터뿐이다.
새재는 지금은 옛 길이지만 조선 태조 때 뚫린 ‘새 길’이다. 새재는 현재 3~4시간이면 충분히 넘지만, 당시에는 몹시도 험하고 높아 반드시 대낮에만 넘었다. 또 도적들이 들끓어 낮에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사람들이 모여 함께 넘었다.
한편 새재는 양편이 화강암 절벽으로 된 천연의 군사적 요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신림은 새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친다.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는 새재를 버린 것이 신림의 결정적 패인이라 지적했다.
1926년 개통된 신작로 이화령은 새재의 역할을 물려받은 근대적 도로다. 조령산(1017m)과 갈미봉 안부에 위치한다. 3번 국도가 지나는 이 도로로 인해 연풍이 신흥 취락으로 발전했다.
1998년 11월 10일 이화령 아래 이화령 터널이 개통됨으로서 고개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앞으로도 고개는 터널도 바뀌는 것이 주류이기 때문에 고개를 통한 이동은 사라질 것이다.
백두대간 넘나들던 사연많은 두 고개
지금은 기억 저 편으로 잊혀진 길이 되었지만 새재는 한양과 영남을 오가는 가장 큰 길이었다. 陸路보다는 水路가 발달했던 시절, 영남의 선비나 장사치들은 낙동강 수로를 따라 문경까지 와서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뱃길을 이용해 한양으로 갔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군 주력부대가 새재를 넘어 충주 달천강에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 부대를 격파하고 한양으로 무찔러들어 갔다. 영남 대로라 불리며 조선 후기 가장 큰 영화를 누렸던 이 길은 1925년 이화령이 뚫리면서 옛길로 남게 되었고,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옛길을 추억을 되새겨보는 길로 변모했다.
새재에는 숱한 사연과 전설, 그리고 조령 1․2․3관문을 비롯한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길은 포장되지 않은 흙길로 새재 정상까지 이어져 있으며 옛길도 띄엄띄엄 남아 있다.
1관문은 남에서 쳐들어 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1708년에 축조했으며 주홀관이라고도 한다. 새재에 있는 관문 중 가장 옛스럽고 보전이 잘 되어 있다. 1관문 왼쪽에 1700년 경에 세운 성황사라는 사당이 있다. 여신(女神)을 모신 곳으로 조선 인조 때 강화파의 대표격인 최명길과 새재 성황신인 여신과 얽힌 전설이 있다. 2관문은 조곡관이라 부르며 이것 역시도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1594년 왜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관문과 관문 사이에는 새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여러 있다. 길손들이 묵었다 가는 곳으로 물물교환도 했다는 조령원터, 예전의 모습대로 복원해 놓은 새재주막, 경상도에 부임하는 관찰사들이 도장을 주고 받았던 교구정터, 시인이나 묵객들이 즐겨 찾던 용추, 정조 때 산불조심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세웠다는 산불됴심비, 선정을 베푼 관리들을 치적하기 위해 세운 선정비들과 전나무터 등의 유적들이 있으며 그 앞에는 안내문을 세워 놓아 하나씩 음미해볼만하다.
삼국시대 요충지 계립령
새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고개가 있다. 지금은 하늘재라 부르는 계립령이다. 주흘산을 사이에 두고 왼쪽은 새재, 오른쪽은 하늘재다. 계립령은 서기 156년 신라가 북으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가장 낮은 곳을 골라 개척한 곳으로 조선 초 새재가 개척되기 전까지는 남북을 잇는 가장 큰 길이었다. 계립령은 충북쪽에서 넘어가는 길이나 문경쪽에서 넘어가는 길이나 할 것 없이 경사가 완만하고 편한 길이다. 문경쪽에서 오르다보면 고개마루까지 돌을 쌓아 논둑을 만든 천둥지기들이 층을 이루고 있어 정감있다. 고개마루를 넘어서면 길 주변에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어 미륵사지까지 가는 십리길도 운치가 있다. 문경쪽에서 오를 때 계립령 정상 못미처 문막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삼국시대 때 신라에서 고구려로 통행하는 문이 있어 낮에는 문을 개방하고 밤에는 문을 닫아 통행인의 왕래를 막았단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계립령이 또한 친근하면서도 가슴시리게 다가오는 것은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와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이 고개를 넘어 갔다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덕주공주는 이 길을 넘어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었다 한다. 계립령을 오르다 뒤돌아 본 마을과 산들은 또 얼마나 정겨웠을 것인가. 아스라한 여우목고개와 말머구리고개(마전령) 너머 경주 땅이 보일 것만 같아 또 가슴에 묻은 회한은 얼마였을까!
고려시대에 계립령은 불교의 성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 유적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충북쪽에는 월광사지․사자빈사지․덕주사지․미륵사지가 있고, 문경족에도 많은 절이 있었다지만 북에서 쳐들어 온 적들에 의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관음사 외에는 사명(寺名)도 전하지 않는다. 관음사는 신라시대 가나문이라는 보살이 지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관음리에서 문경에 이르는 길을 오르다 보면 이곳이 불교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갈평리 동사무소 뜰에 5층석탑이 있고, 관음리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밭 한가운데에 기단이 다 허물어진 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3층 석탑(98년경 도난)과 비료포대나 쌓아놓아야 할 창고(현재는맞배 지붕으로 보수)에 석불좌상이 있다.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개울 건너 오른쪽에 약사여래입상이 홀로 우뚝하고 한참을 더 올라가 문막마을 사과나무 밭에 반가사유상이 있다. 빙긋 웃는 듯한 반가사유상의 해맑은 표정이 천년 세월도 무색케 앙증맞다.
계립령을 넘어 십리길을 가면 미륵사지가 있다. 미륵사지는 고래 초기에 조성된 석굴사원으로 규모도 방대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방이 산으로 쌓인 아늑한 분지에 위치해 있어 절터다운 맛이 느껴진다. 미륵사지에는 거대한 거북바위와 표주박처럼 둥글게 돌을 파 만든 샘, 그리고 뒤로 5층석탑과 석등 두개, 석굴 가운데에 거대한 석불이 있다. 돌을 5단으로 쌓아 만든 석불은 어깨는 좁고, 팔도 유난히 가늘고, 양감이 부족하여 미학적인 가치는 크지 않을 듯싶다. 고려 초기 지방 호족들의 시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불은 월악산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누이인 덕주 공주는 덕주사를 창건하고 남향한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였고, 마의태자는 석굴사원을 창건하여 북쪽을 바라보게 석불을 세워 덕주사 마애불과 마주보게 했다고 한다.
월악산 미륵리와 덕주골에는 /슬픈 이야기 있다.../그러나 남의 눈을 피해 등을 하나 두고 살아야 했으니 이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랴?/둘은 서로 그리움을 달래며 돌을 쪼았다/태자는 미륵리 미륵불을/공주는 덕주골 덕주사의 마애불을/미륵리 미륵불과 덕주사 마애불이 마주보고 서있는 까닭은/둘이 서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었기 때문이라 하는데/도처에 마의태자 이야기 많아도 여기만큼 슬프진 않아/천년 지난 지금에도 오누이는 바라보고 서있는데...
-표성흠 시인의 ‘월악산-슬픈 오누이 이야기’ 중에서
계립령이 새재에 영광의 자리를 물려준 것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새재의 중요성이 부각된 조선중기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조정은 깎아지른 형세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새재를 중요한 요충지로 정했다. 그 후 새재는 선비나 관직에 적을 두고 있는 양반계층이 넘나들었고, 계립령은 포졸들의 간섭을 피하려는 보부상과 장사치들이 넘나드는 민초의 고개가 되었다. 관음리 사점마을은 조선시대 옹기를 제조해서 판매하던 곳으로 당시에 이곳이 옹기의 집산지로 옹기점방이 많았다 한다. 지금도 밭을 갈다 보면 사기그릇과 검은 옹기의 유물이 발견된다고 하고 사점마을 맨 끄트머리에 문경에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래가마가 있다. 이엉을 얹어 만든 초막 안에는 발로 돌리던 물레가 있고 뜨거운 불길 속에 달구어지길 기다리는 먹밥그릇들이 그득하다. 여섯개의 굴을 가진 흙가마터 옆에는 깨트린 사기들이 수북하다.
삼국시대의 요충지로, 불교의 성지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계립령은 97년에 도로 포장을 할 예정이다.
주흘산 산행길잡이
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문경시(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폐합되어 문경시로 되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으로 가는 우등고속버스가 점촌까지는 30분 간격(첫차 06:30, 막차 20:30)으로 운행되며 요금은 10,7000원이다.(문경읍까지는 앞의 배차 중 일부가 문경읍을 경유한다.) 문경시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는 30분 간격으로(첫차 06:00, 막차 20:50) 운행된다.
문경터미널에서 새재 매표소까지는 완행버스가 하루 6회(첫차 08:20, 막차 17:10) 운행되며 요금은 640원이다. 시내좌석버스는 하루 12회(첫차 07:15, 막차 18:50) 운행되며 요금은 650원이다. 문경읍에서 택시를 이용할 경우 새재 집단시설지구까지 들어가는데는 5,000원, 새재 집단시설지구에서 나오는 택시를 탈 경우 한사람에 1,000원이다.
문경터미널에서 지곡리 월복사까지는 07:30과 18:30 두 번 밖에 운행되지 않는다.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요금은 5,000원이다.
하늘재를 돌아볼 경우 비포장 도로라 운전에 조심해야 한다. 하늘재를 넘어가는 버스편은 없다.
숙박
문경읍에 중앙장(☎054-571-0502), 약수장(☎572-0555), 동화장(☎571-1654), 하얀장(☎571-0541), 주흘장(☎571-0241)이 있으며 2인 1실 기준 20,000원 선이다. 문경새재 집단 시설지구에도 문명장(☎570-7775), 새재모텔(☎571-1818), 태화관(☎571-3044) 등 10여 곳의 숙박시설이 있다. 제 1관문 지나 혜국사 오르는 길에 있는 주흘산장(☎571-5846)에서는 단체 20명 기준 60,000원이며 1인기준 10,000원이다.
먹거리
문경읍에서는 민속식당(☎571-9908)의 버섯전골이 먹을만 하다. 육수로 만든 국물과 깔금한 반찬이 일품이며 1인분에 5,000원이다. 만만 잘하면 담근술도 한잔 얻어 먹을 수 있다. 문경새재 집단시설지구 들어가는 길에 새재휴게소(☎572-2323)는 산채정식이 먹을만하다. 1인분에 7,000원이다. 새재 도립 공원안에 주흘산장에는 직접 기른 토종닭을 판다. 한마리에 2,500원이다.
2관문 휴게소에는 뚝배기에 담아 주는, 누룩이 둥둥 뜬 막걸리와 참기름 냄새가 고소한 도토리묵이 일품이다. 막걸리와 도토리묵 모두 5,000원이다.
문경새재도립공원 관리사무소 직전의 ‘왕건 식당’(054-571-8857,)은 토속주인 ‘왕건주’가 유명하며 특히, 아지메들의 정겨운 말씨가 음식맛을 한층 맛있게 한다. 또한 주인장은 친절하기로 매우 소문난 양반으로 갑작스런 차량 고장, 차량 열쇠 분실 등 관광객이 불편을 겪는 일을 직접 처리해준다. <사람과 산 자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