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풍경과 행로
이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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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밀레니엄 시대의 첫 10년이 지났다. 새 천년의 첫 10년은 이전 세기의 마지막 10년과 비교할 때 세계화 ․ 정보화를 비롯한 여러 국면에서 새로운 질서와 가치의 경험과 함께 여전한 갈등과 모색 속에서 변화의 속도가 더욱 가팔랐다.
지난 10년을 돌아보건대, 우리 시단에서도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어법과 감성과는 확연히 다른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의 ‘젊은시’들이 시단에 새 바람을 일으켰으며, 지금도 그러한 경향은 우리 시의 지평과 전망을 새로이 개척하고 확장하리라는 믿음에서는 모종의 지향성과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계간 『시작』과 『서정시학』 등의 문예지들이 그런 점에서 2000년대의 첫 10년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장을 마련한 것은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기획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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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에 들어와서도 양적인 면에서는 시는 여전히 팽창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전에 비해 더 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시인지망생과 문예지는 더 늘어났다. 그러나 창작 주체와 창작 여건의 저변 확대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시와 시인의 양적인 팽창을 우려하는 논의의 일단은 시가 너무 쉽게 생산되고 너무 쉽게 소비된다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발표되는 적지 않은 시가, 예전에 대장간의 모루 위에서 생산된 칼이나 낫과 같이 오래 두고 쓰다가 날이 무디거나 이가 빠지면 그대로 곧바로 내다버리지 않고 숫돌에 다시 날을 세우고 쓰던 긴요한 기물들이 아니라 대량 생산의 틀에 맞춰 찍혀나와 일회성으로 한 번 쓰고 쉽게 소비되는 일회용 물품을 닮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시의 풍요 속에 내장된 염려스러움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집중과 몰입의 치열한 장인정신의 결여와 그로 인한 감동의 엷음, 진정성에 토대한 시의 위의에 값하지 못하는 데 따른 부정적 인식에 기인하겠다.
그렇다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의 삶 속에서 일부 시와 시인에 대한 신뢰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점점 더 확대생산되고 있는 연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시작은 제 안에서 다 연소되지 못한 삶을 연소시키는 작업”이라는 김현옥 시인의 견해에 동의할 때, 시대의 양상은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우리의 삶 속에서 다 연소되지 못한 슬픔과 고통, 분노와 좌절, 쓸쓸함과 외로움 같은 삶의 부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의 자정 기능 때문이기도 하리라. 부박한 삶에 부대끼며 상처받기도 하고 자신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기도 하지만 또한 시가 있으므로 시와 동행함으로써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삶의 길 위에서 주저앉지 않고 삶을 견뎌낼 수도 있는 것이리라.
어시장에 가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꼭두새벽부터 생선 비늘이 된 중매인들의 번득이는 눈빛, 열 손가락 오므렸다 폈다 낙찰 받는 하루품의 삶, 생선가게 아줌마들 바쁜 손길도 경매競賣된다 적조의 반란, 불가사리 떼들의 집단 시위, 중국산 싸구려 덤핑, 거센 풍랑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마침내 건져낸 그물 속 길길이 뛰는 신토불이 당찬 씨알들. 비록 만선의 꿈은 접었지만 지치고 쓰린 가슴 한 잔 쇠주로 달래고, 배춧색 만 원권 지폐 몇 장 받아 쥔 어부들 한숨 어느새 냉동이 된다 개판 같은 정치놀음, 상처받은 자존심 얼큰한 복매운탕으로 씻어내며 어제 같은 오늘 하루 무덤덤하게 다시 여는 마산 어시장 첫새벽. 밤새 닻을 내린 어둠도 미처 출항하지 못하고 사람 냄새 그리운 포구를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다
―이광석, 「마산 어시장 풍경」(《서정과 현실》 2010 하반기)
시장은 사람과 산물이 모이는 곳. 이광석 시인은 마산 어시장에서 “적조의 반란, 불가사리 떼들의 집단 시위, 중국산 싸구려 덤핑, 거센 풍랑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마침내 건져낸” “신토불이 당찬 씨알들”을 “배춧색 만 원권 지폐 몇 장”과 바꿔 지치고 쓰린 가슴을 한 잔 쇠주로 달래는, “개판 같은 정치놀음”에 자존심 상처받은 어부들의 “하루품의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곳은 우리들의 삶과 다름없는 “중매인들”, “생선가게 아줌마들”의 곤고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워하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임을 확인하게 한다.
이곳은 참 복잡하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낯설다.
포항 죽도공동어시장 고기들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아직 싱싱하다. 붉은 고무 다라에 들어 우왕좌왕 설치는 놈들은 활어라 부르고, 혹은 좌판 위에 차곡차곡 진열된 놈들은 생선이라 부르고….
죽도시장엔 사람 반, 고기 반으로 붐빈다. ‘어류’와 ‘인류’가 한데 몰려 쉴 새 없이 소란소란 바쁜데, 후각을 자극하는 이 파장이 참 좋다.
사람들도 그 누구나, 죽은 이들을 닮았으리.
아무튼 나는 죽도시장에만 오면 마음이 놓인다. 이것저것 속상할 틈도 없이 나도 금세 왁자지껄 섞이는 것.
여긴 비린내 아닌 시간이 없어,
그것이 참 깨끗하다.
―문인수, 「죽도시장 비린내」(《서정과 현실》 2010 하반기)
사람 사는 냄새. 꼭두새벽 경매로 시작하는 첫 장(場)이나 파장도 “어시장에 가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어시장에서의 사람 사는 그 냄새는 비린내. 문인수 시인은 그 비린내의 현장 속으로 우리를 끌여들여 그 비린내에 공감하게 한다. 시인은 활어와 생선/삶과 죽음이 공존하면서 “사람 반 고기 반”으로 왁자지껄 붐비는 포항 죽도공동어시장의 풍경을 통해 싱싱한 삶의 비린내를 활기 있게 보여준다. 죽도어시장에서는 죽음도 죽음을 닮은 삶도 “비린내 아닌 시간이 없”지만 한데 어울려 왁자지껄 섞이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이것저것 속상한 일들” 많은 삶의 그 비린내마저 참 깨끗하다고 삶을 긍정하며 삶을 다독이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활어와 생선이 서로 닮았듯이, 알고 보면 “사람도 그 누구나” 죽은 이들뿐만 아니라 산 자들끼리도 닮았으므로 그래서 우리가 죽도시장에만 가면 마음이 놓이게 되지 않던가.
‘어시장’이 “하루품의 삶”과 삶의 “비린내”를 확인하는 곳이라면, ‘길’은 우리와 우리 안의 나가 걸어가는 행로이다. 우리 삶은 현실과 지향의 두 줄의 행로를 따라가는 자갈밭일까, 꽃밭일까.
눈 뜨고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다
눈 감고 나를 들여다본다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떠돌던 내가
느릿느릿, 내 안으로 되돌아온다
앞모습도 가까이 보인다
제각각 달리던 길들과 바람 소리도
나를 따라 내게 들어온다
발목 잡듯 허둥지둥 일제히 쳐들어온다
이내 제 길로 되돌아간다
이윽고 낯익은 모노톤의 그림 한 장,
이 수묵빛 번지는 풍경 속에는
눈을 감아야 보이는 내가 눈뜬다
길을 찾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 속에서 눈뜬 내가
나를 떠나 다시 아득한 길을 나선다
* ‘눈 뜨다’는 ‘눈 감다’의 반대말이며, ‘눈뜨다’는 ‘사물의 이치나 참뜻을 깨달아 알게 되다’라는 말.
―이태수, 「눈 감고 눈뜨기」(《서정과 현실》 2010 하반기)
이태수 시인은 여전히 ‘길’ 위의 시인이다. 그에게 ‘길’은 흐름이고 떠돎이다. 시인은 왁자지껄한 ‘시장’의 시공간에서 멀리 비켜나 고요히 눈을 감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누구든 삶이 일생의 화두가 아닌 이 없겠지만, 번다한 세상살이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고단한 일상에 매달리다 보면 어느새 내 안의 나는 화두를 놓치고 길을 잃고 저대로 떠돌기도 하는 법. 현실과 지향의 길이 서로 결별한 그 길 위에서의 떠도는 삶이란 어쩔 수 없는 어떤 애틋함과 비애를 동반하며, 그것을 안고 떠돌며 시인(“나”)은 운명처럼 ‘비린내의 삶’과 동행할 수 없는 “내 안의 나”가 길을 잃고 떠돌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윽고, 이내, “낯익은 모노톤의 그림 한 장”을 떠올리며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 속에서 눈뜬 내가 / 나를 떠나 다시 아득한 길을 나서”는 걸 본다. 아마도 이태수 시인에게 있어 ‘떠돎’은 이 서걱한 시대의 삶의 화두를 풀기 위한 끝없는 행로이며, 그것은 또한 부박한 삶 속에서 “길을 찾아 걸어가는” “눈뜬” 자들의 자화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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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하루품의 삶” 속에서 시간을 쪼개 시를 읽는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사색하고 성찰하고 씻어내고 고요하자고 시를 읽지만 문예지들마다 넘치는 많은 시들은 그것들과는 먼 길이다. 그래도 시를 읽으며 삶의 풍경과 만나고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 속에서 눈뜬 내가 / 나를 떠나 다시 아득한 길을 나서”고자 시의 길을 따라가지만, 나름대로는 집중하고 반복하며 읽음에도 쓸데없는 덤불과 미로에 빠져 번번이 길을 잃고 만다. 자주 난처하다. 그래도 나 또한 좋은 시를 쓰고자 되도록 많이 읽어보려 노력하지만 그럴 땐 시 읽기가 무슨 의무처럼 부담스럽다. 의무로서의 시 읽기는 편한 즐김이 아니라 무언가 성과나 소득의 창출을 기대하는 감정적 정신적 압박의 노동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다행히 좋은 시라도 만나면 그 감정노동은 보상을 받지만, 내게 그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 읽을수록 기대감은 소진되고 기운은 빠지는 그런 시가 아닌, 사람은 많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듯 시도 그런 시를 많이 만나고 싶다.
몸 안을 보여주는 것은 내시경이지만, 좋은 시는 우리의 삶과 마음의 내면을 보여준다. 좋은 시일수록 오래 두고두고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며 내 안의 나와 만나게 한다. 오늘 문명과 시대의 이정표가 아득해진다하더라도 그럴수록 잊고 지낸 “낯익은 모노톤의 그림 한 장”을 나침반 삼아 또 다시 삶의 길을 나서야 하리라.
(<서정과현실> 2011년 상반기호 '내가 읽은 시')
첫댓글 "시의 풍요 속에 내장된 염려스러움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집중과 몰입의 치열한 장인정신의 결여와 그로 인한 감동의 엷음, 진정성에 토대한 시의 위의에 값하지 못하는 데 따른 부정적 인식에 기인하겠다." 이승주의 현대시에 대한 일갈에 전폭적 동의를 보낸다.
현대에 양산되는 시가 너무 가볍다. 반면, 독자들을 폭행하는 수준의 난해시는 , 현대 사회의 빈부의 격차만큼이나 크다. 오랫동안 푹 삭은 무릎을 절로 치는, 묵은지의 서정시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