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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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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양평리석조여래입상 |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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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둔마리벽화고분 |
고려시대의 벽화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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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
상림리석조관음입상 |
고려 초기 양식의 석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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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
파리장서와 침류정 |
한국유림대표 173명의 연서로 파리평화회의 보낸 독립청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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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점심식사 |
맛고을 한정식 (T.055-942-1991,943-7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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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거창박물관 |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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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거열성과 건계정 |
백제의 부흥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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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정온 동계고택 / 반구헌 |
조선시대 건축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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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수승대와 황산리 신씨고가 |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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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
농산리 입석 음각선인상 |
우리나라 선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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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무주IC |
산청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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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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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일정이나 기타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旅路에서 즐기는 詩 感想 ]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의《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全文)에서-
산이 좋고 그런 산 사이로 굽이굽이 물이 흐르는 거창
2010년 5월 25일(화)
거창은 경상남도의 최북단 서부지방.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전라북도·경상북도·경상남도의 3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내륙산간지방입니다.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서다보니 산들이 주름처럼 겹쳐지는 곳에 생겨나는 계곡도 많고 깊습니다. 산이 좋고 그런 산 사이로 굽이굽이 물이 흐르고 있으니 앉을 자리 설 자리 보아가며 누대와 정자가 유난히 많은 곳이 거창입니다.
누대와 정자가 많다는 것은 바로 그 누대와 정자를 무대로 펼쳐지는 풍류 또는 문화가 있었다는 얘기고, 그 풍류 또는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계층이 두텁게 형성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큰 산에 등 기대고 산다는 것은 평시라면 퍽 든든하고 푸근하고 자족적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비상한 때에는 자칫 혼란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이는 곳으로 화하기도 하는 곳이 산이기도 합니다. 우리 현대사 속의 지리산이 그러했듯이, 지리산 끝자락에 매달린 거창에도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 자국 하나가 깊게 응어리져 있습니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
거창읍 양평리의 금룡사(金龍寺)에 있는 이 석불은 높이 4m에 가까운 거상(居像)으로 원래 이 부근에는 금양사(金陽寺) 또는 노혜사(老惠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며 통견(通肩)으로 걸친 대의(大衣)자락은 몸에 밀착되어 가슴과 허리, 양다리의 볼륨이 뚜렷하다. 왼손은 인지(人指)를 곧게 펴 가슴 높이로 들고 오른손은 곧게 내려 엄지와 인지로 옷자락 끝을 살짝 쥔 특징적인 수인(手印)을 맺었다.
대좌는 아랫폭 155㎝ 크기의 복판복련좌(複辦覆蓮座)이며, 앞쪽에 폭 135㎝, 높이 25㎝크기의 앙련석(仰蓮石)이 놓여 져 있다. 석불의 주위에는 구획이 설정되어 있는데 네 모서리에 네모진 기둥받침을 설치하고 그 사이로 긴 장대석으로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에서 벗어나 흩어진 조형성을 보이나 통일신라 후반기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상림리 석조관음입상
보관(寶冠)은 없어졌으나 머리에는 높은 육계가 솟아 있으며 보관은 별도로 만들어 씌웠던 것으로 보인다. 장방형의 얼굴은 침잠(沈潛)된 표정을 지었으며 목에는 할 줄로 삼도(三道)를 새겼다. 가슴에는 목걸이가 형식적으로 장식되었고 통견(通肩)한 천의(天衣)는 도식화 되어 있다. 허리선에서 접혀져 드리워진 군의(裙衣)자락과 천의의 옷 주름은 얇은 판을 서로 잇댄 듯 평판적이어서 마치 금동불의 옷 주름을 연상케 한다.
이 석불은 고려 초기 양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부근에 건흥사(乾興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사찰에 속했던 석불로 추정되며 지방화 된 불교와 불상을 짐작케 해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둔마리 벽화고분
거창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꼭 하나의 무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좁은 산등성이는 양쪽으로 급한 경사를 이룬 깊은 계곡으로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자리라 한다. 근처에는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된 고려·조선시대의 민묘(民墓)가 흩어져 있다.
벽화고분은 이중의 벽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땅을 파서 판석(板石)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石室]을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서쪽 돌방에는 1개의 나무관[木棺]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
양쪽 돌방의 모든 벽은 회칠하고 그 위에 흑·녹·갈색으로 인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북쪽 벽에는 희미하게 글자가 보이고 있다. 서쪽 돌방의 서쪽 벽에는 여자 2명, 남자 1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으로 붓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생기가 있다.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적 요소가 가미된 내용이다.
고려시대의 고분형식과 종교사상, 그리고 생활상을 보여주는 얼마 되지 않는 귀중한 유적이다. 비슷한 시대와 내용의 벽화고분으로는 북한 개성시의 공민왕릉과 수락암동 1호분이 있고, 2000년에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서 발견된 박익공묘(朴翊公墓)가 있을 뿐이다.
고분은 금귀봉(827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높이 450m쯤 되는 능선 상에 위치하며 이 일대는 석장(石葬)골 또는 재궁(梓宮)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고분의 모양은 능선상의 좁은 평지 위에 방형으로 지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호석(護石)을 올려놓고 봉토(封土)를 쌓은 방형호석 형태이다. 석축의 동·서 쪽에 2구의 석인(石人)이 있는데 동쪽 석인은 높이 232㎝로 두관(頭管)을 착용한 문인석(文人石)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형상이다.
서쪽의 석인은 가슴 윗부분이 절단되고 하반신만 남아 있으나 동편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봉토는 적갈색의 사질점토로 석실천정석의 윗부분까지 덮혀 있다.
석실은 암반을 깍아내고 구덩이를 만들어 여기에 남북을 장축으로 경계벽을 공유하는 두 개의 장방형 석실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였고 중앙 경계벽 가운데에는 방형의 투창(透窓)을 만들었다. 동실(245×92×90㎝)과 서실(245×93×93㎝)은 대소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석도 거의 같은 크기의 판석으로 덥혀 있다.
동서 석실의 각 벽에는 회칠을 한 뒤에 벽화를 그렸는데 그 내용은 천녀상(天女像)과 주악상(奏樂像) 그리고 남녀가 혼합된 무용도(舞踊圖)이다. 각 벽면별로 살펴보면, 동실의 동벽에는 천녀들이 그려져 있는데 크게 남북의 두 군으로 나누어지며 남쪽에 3명, 북쪽에 2명이 있다.
이 두 군 사이에는 약 60㎝정도의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도 원래 1명이 그려져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남쪽에 그려진 천녀는 높이는 약 50㎝이며, 빗어 올려 얹은머리에 둥근테 모양의 관을 썼고, 관의 양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에 눈동자가 뚜렷한 소녀상이며 귀에는 귀걸이를 달았다. 옷은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라맨 상의에 발목이 꼭 끼는 바지를 입었고 허리에는 띠가 감겼는데 그 한 끝이 왼쪽다리 위로 드리워져 있다. 조그만 장구를 가슴에 달고 오른손으로 고면(鼓面)을 때리고 왼손은 옆으로 뻗어 장구를 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반신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하반신은 거의 허리를 직각으로 돌렸고 오른쪽다리는 뒤로 꺽어 올리고 왼쪽다리로 구름위에 서서 장구를 치며 춤을 추는 모습이다.
남쪽에서 두 번째 천녀상은 보살들의 화관과 비슷한 장식을 하고 있어 불상처럼 보인다. 그 밖의 천녀상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손에 지물을 들거나 춤추는 듯한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벽에서는 적외선 촬영에 의해 세로 3행의 묵서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당시 부적에 쓰이던 주술문이나 범(梵)자를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벽에는 서쪽 실과 통하는 투창 부근에 주악천녀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 형상은 한손에 피리를 들고 또 한손에는 접시에 과일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으며 옷자락은 불상에 나타나는 문양으로 되어 있고 어깨에 스카프를 걸쳐 늘어뜨린 형상이다.
서실에는 서벽 남반부에만 인물도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벽화 중 천녀상들은 동실의 주악천녀상들과 비슷하나 북단의 것은 뚜렷한 수염으로 보아 남자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그림의 내용은 피장자의 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안주하게 하기위하여 축복해주고 있는 모습들로써 불교적인 요소가 기본을 이루며 여기에 도교적인 성격이 가미된 보다 현실적인 종교화라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린 방법은 먼저 묵선으로 윤곽을 그린 뒤 머리는 검게, 옷은 토황색 또는 황갈색 일색으로 엷게 칠했으며, 치른바 후레스코(Fresco)법으로 벽면이 마르기전에 단숨에 그린 자유롭고 생기가 도는 필선으로 되어 있어 색채가 맑고 연하여 수채화 같은 인상을 준다.
둔마리 고분 벽화는 피장자의 신분 등을 알 수 없는 점이 아쉬우나 그 당시 회화사 및 복식(服飾)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1971년 최남식(崔南植)·김태순(金泰淳)에 의해 발견되어 그 이듬해 발굴 조사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가섭암지 마애삼존불
금원산(金猿山)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磨崖佛)이다. 가섭사지(迦葉寺址) 뒤의 돌계단을 오르면 바위굴이 있고 안쪽 남향 바위에 삼존불(三尊佛)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부분을 삼각선으로 그어 구획하고, 가운데는 보주형으로 다듬어 세 분의 부처를 새겼다.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침잠한 얼굴 표정과 특이한 대좌 형식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불상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육계가 큼직하다. 넓적한 얼굴은 작은 눈과 입, 세모꼴의 뭉툭한 코, 납작하고 긴 귀 등은 토속적인 느낌이 강하다. 삼존불 모두 도드라지게 새겼으나 전체적으로는 납작하게 표현되었다. 본존불의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 부자연스레 가슴에 모은 팔, 막대 같은 다리, 좌우로 벌린 발등과 같은 도식적인 처리는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이다. 밋밋한 어깨에 신체의 볼륨은 약화되었고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평판적인 간결한 옷 주름이 중첩되어 있다. 대의 하단은 짧게 표현되어 양 다리가 길게 노출되었다.
양 발은 보편적인 정면관(正面觀)의 불신과는 달리 발꿈치를 서로 맞댄 측면관(側面觀)이어서 부자연스럽다.
양 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엄지와 인지를 맞댄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을 맺고 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추정된다. 대좌의 윗면에는 5엽의 앙련(仰蓮)을 내부에는 간엽(間葉)이 3엽의 복련(覆蓮)을 표현하였다. 광배는 융기선으로 표현한 무문(無文)의 보주형(寶珠形) 두광배(頭光背)이다.
뻗은 천의(川衣) 자락과 영락 장식 등 장식성이 강하다. 특히 한 손으로 천의자락을 잡은 자세는 삼국시대의 보살상을 연상시키지만 그 보다는 훨씬 도식화(圖式化)되었다. 본존불에 비해 여성적인 얼굴에 머리에는 화려한 화관(花冠)을 썼으며 수발(垂髮)은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광배는 원형 두광배이며 대좌는 사실적인 연꽃으로 구성되었다.
좌협시보살 옆에 세로 88㎝, 가로 70㎝ 크기로 암벽을 파낸 다음 이 불상의 조상기(造像記)를 해서체로 1행 26자, 총 21행에 540여 글자를 새겼다. 글자 중의 『天慶元年十月』은 고려 예종(睿宗) 6년(1111년)에 해당된다. 1111년에 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래의 가섭암 자리는 1770년대까지 절이 있었다는데, 지금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석재가 남아 있다. 지금 위천초등학교에 옮겨진 삼층석탑은 비슷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삼존불은 가섭암과 같이 고려시대에 있었던 절의 일부였을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에 가섭암과 지장암 등의 불사가 있었다.
거창박물관
거창의 역사 유물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거창박물관은 한옥구조의 2층 건물로 거창읍 김천리 216-5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의 규모는 2,600평의 부지에 1, 2층 250평의 전시실과 강당 및 전시실을 갖춘 120여 평의 별관 그리고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을 만들게 된 배경은 이 지역의 독지가(篤志家)인 계림농원 대표 최남식(崔南植), 제창의원 원장 김태순(金泰淳) 두 분이 평생 수집한 귀중한 자료들을 당국에 기증하고 직접 건립운동에 앞장서 1988. 5. 20 거창유물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소장되어 있는 유물의 수는 1,200여점이며, 중요소장품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유형문화재 제275호), 송림사지석조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311호), 정온선생 관복(중요민속자료 제218호), 이보흠선생 실기책판(유형문화재 제248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다수의 중요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거창박물관은 둔마리 고분벽화 자료를 비롯하여 소장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거창 지역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어 지역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松林寺址石造如來坐像)
이 불상은 마리면 말흘리 송림마을의 절터에서 발굴되어 마리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불상은 민머리[素髮]에 상투모양이 약하게 표현되었으며,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양어깨에 걸친[通肩] 옷자락[法衣]은 길게 늘어뜨려져 있고, 소매 부분에 여러 갈래의 좁은 주름을 만들었으나 훼손이 심하다. 양손과 다리 부분은 훼손되어 알 수가 없다.
불상은 연꽃받침[蓮花臺]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불상의 받침대는 송림마을에 있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짜 맞춘 것으로 그 출처를 알 수 없다. 또한 아래 받침돌[下臺石]이 심하게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위 받침돌[上臺石]과 같은 한 짝일 경우, 위 받침돌에 위를 향한 연꽃[仰蓮] 무늬가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아래받침돌에는 아래를 향해 핀 연꽃무늬[伏蓮]가 새겨진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하의 받침을 연결해주는 중간받침돌[中臺石]에는 나한상(羅漢像)을 조각하여, 조형미를 더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알기 어려우나, 조형 기법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6)가 27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에 완성한 지도이다. 순조 34년(1834)에 자신이 만든 《靑邱圖》를 27년 후에 증보 수정한 대축척 지도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지도첩이다.
형태를 보면,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했다.
동서방향은 구획된 판을 접어서 연결시켜 1첩으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남북은 동서의 방향을 연결시킨 각 첩을 펼쳐서 순서대로 이어대면 연속된 남북을 볼 수 있게 했다. 지도의 제1층에는 지도의 제목과 발간 연도 및 발간자를 명시하고 본도와는 별도로 서울의 도성도(都城圖)와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를 상세하게 그렸다. 축적을 보면, 지도의 제1층 첫머리에 그려져 있는 지도 방안(方眼)에 매방십리(每方十里)라고 되어 있어서 간접적으로 축척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좌표에 해당하는 이 방안은 지도를 동서로 접은 1면을 남북 12방안, 동서 8방안으로 구분하고 있고 남북이 120리, 동서는 80리로 되어 있다. 그리고 1면의 실제 길이는 남북이 약 30㎝, 동서가 약 20㎝이다. 그러므로 동서 20㎝가 80리(32㎞)에 해당되는 축척이므로《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약 1/160.000 이 된다.
지도의 내용을 보면, 일반 지도에서는 지형표시에서 개개의 산지나 평지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나《대동여지도》에서는 개개의 산보다 산줄기를 표시하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물줄기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거리는 붉은 선으로 처리하였는데 거의 직선으로 표시하고 십리마다 표시를 하여 어느 지점간이라도 방표의 수를 헤아려봄으로써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한편 14개 항목의 지도표(地圖標)를 만들어 가능한 부호로 처리한 점도 이 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哲宗 12年)에 처음으로 만들어 김정호가 직접 목판으로 판각하였으며, 그 후 고종 원년(1864년 甲子本)에 수정본이 재간되었다. 박물관의 소장본은 1864년도 재간본으로 박물관 2층 중앙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이 지도는 1864년(고종 1)에 목판(木板)으로 다시 찍은 것을 김은호(金殷鎬)가 색칠과 함께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대동여지도」는 동서 80리(약 32㎞) 남북 120리(약 47㎞)의 지역을 1층으로 하여, 모두 22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층은 세로 30.2㎝, 가로 20.1㎝ 크기의 8쪽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며, 22층 모두를 순서대로 붙이면 1/16만 축척(縮尺)의 우리나라 전체 지도가 된다. 전체 지도의 크기는 세로 7m, 가로 3m이다. 지도의 첫 머리인 1층에는 좌표(座標)와 ‘지도유설’(地圖類說) 등이 실려 있다. 지도에는 따로 축척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좌표에 모눈[方眼, grid]을 그리고 ‘각 모눈은 10리(약 4㎞)’라고 표시하여, 사실상 축적을 표시하고 있다. 서문(序文) 격인 ‘지도유설’에는 지도의 제작 경위와 중요성, 읽는 법, 실용 가치 등에 대해 서술하고 전국 해안선의 길이 및 6대 간선도로의 총 길이를 기록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현재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의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또한 국토지리에 대한 당대의 시대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지도들은 각 지역의 호구(戶口) 수나 토지 면적 등의 표시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대동여지도」는 그것보다 지형과 산맥, 하천, 도로, 역참 등과 같은 교통로를 상세히 표시하였다. 이전의 지도가 국방과 조세 부과 등 정책적 필요에서 제작된 반면,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에 활발해진 상업 활동을 반영하여 제작되었다. 상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물자의 이동망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동여지도」의 표시 내용은 이러한 시대 요구를 잘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정온선생 문집책판(鄭蘊先生 文集冊版)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의 문집은 1660년(현종 1)에 손자(孫子)인 정기수(鄭岐壽)에 의해 처음으로 간행된 뒤, 1852년(철종 3)에 다시 간행되었다. 이곳에 보관 중인 책판은 모두 299매로, 처음 문집을 간행할 때 제작된 것이다.
문집에는 선생이 쓴 시 374수(首)를 비롯해, 선생이 친지들과 학문적 내용을 바탕으로 주고받은 편지와 국가 정책에 관한 상소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또 허목(許穆)과 조경(趙勁)이 선생의 행적에 관해 쓴 글을 비롯해, 임금이 내린 교서 등 선생의 행적과 관련된 글들도 실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을 반대한 「갑인봉사」(甲寅封事)와 청(淸)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소」(斥和疏)와 같은 문장은 왕권 계승을 둘러싸고 당시에 전개되고 있던 권력 투쟁과 청(淸)나라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인식 및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정치 및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그밖에도 선생의 문집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대북(大北)·소북(小北)간의 당쟁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거열성
거열성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東國輿地勝覽』에 "在邑八里石築三里"라 적혀 있고 『신동국여지슴람』에서는 신라 문무왕 13년 "居列州萬興寺"의 산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문무왕(文武王) 상(上)에 三年春三月欽純天存領兵攻取百濟居列城斬首七百餘級"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백제 부흥군이 신라에 대항한 최후의 항전지 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백제 부흥군들이 나라를 재건할 목적으로 덕유산·지리산의 산악지대에 거열성·거물성(居勿城;남원)·사평성(沙平城;구례)·덕안성(德安城;장수)등을 쌓았다고 한다.
또 서기 673년 거열주대감 아진함(阿珍含)이 당군(唐軍)과 싸움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성벽은 일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허물어졌으며 망루를 세운 흔적과 건물의 유적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다.
규모는 둘레가 약 2.1㎞이며 높이 8m, 하부폭 7m, 상부4m 정도이다. 지금은 거창군에서 군립공원으로 지정하여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성은 일명 건흥산성(乾興山城)이라고 한다. 덕유산(德裕山) 줄기에 있는 표고 563m의 건흥산 꼭대기에 있으며, 산 아래쪽에서 성곽이 보이지 않게 산의 지세와 능선의 기복을 이용하여 축성한 요새와 같은 산성이다. 성벽은 자연석과 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지형에 따라 3~9m의 높이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둘레는 약 2.1km이고, 폭은 아랫부분이 7m, 윗부분이 4m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버렸지만, 주변에는 성벽에 쓰였던 석재(石材)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또한 성안에는 각종 건물 터와 부서진 기와 조각, 군사 훈련지 등 여러 부대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지방이 신라와 백제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인 만큼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나 백제가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신라의 김흠순(金欽純)과 천존(天存)이 백제의 거열성을 함락하고 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그 거열성이 바로 이 산성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그 유민들이 백제의 부흥을 위해 거창에 거열성, 남원에 거물성(居勿城), 구례에 사평성(沙平城), 장수에 덕안성(德安城) 등을 쌓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이곳 거열성은 신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규모도 제일 커, 백제가 망한 후에도 3년 동안이나 백제의 부흥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라 한다.
건계정
건계정은 거창장(章)씨 문중이 1905년에 세운 것으로, 문중의 시조인 평보(平甫) 장종행(章宗行)이 고려 충렬왕(1240년)때 중국으로부터 귀화했는데, 그의 아들인 두민(斗民)이 공민왕 때 홍건적들이 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들을 지휘하여 개경으로부터 홍건적을 몰아내어 국란의 위기를 극복한 무훈을 세우자, 이에 대한 공로로 공민왕이 두민을 아림군(娥林君)으로 봉했다. 이에 그 후손들이 두민의 공을 기려서 세운 정자이다.
현재의 정자는 1970년에 중건되었다. 정자 오른쪽으로는 신라에 망한 백제인들이 나라를 부흥하기 위하여 쌓은 거열성(경상남도기념물 제22호)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약 30분이면 산성에 닿을 수 있어 이른 아침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산성 조금 못 미쳐 약수터가 있기에 향토인들이 즐겨 찾는다. 주위의 노송과 백일홍등 자연과 잘 어울린 정자이다.
계곡의 상류는 양쪽 산 사이로 한줄기 물이 휘어 돌면서 일단 멈추어 뱃놀이를 즐길 수 있고, 여울져 흐르는 물길은 크고 작은 바위들을 다스리며 세차게 흐른다.
정온선생 고택(동계고택)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년)선생의 사당을 모시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종택으로 대문채, 큰사랑채, 중문간과 중사랑채, 곳간채, 안채, 안사랑채, 사당, 토석 담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이며 인조(仁祖)임금이 내린『文簡公桐溪鄭蘊之門』의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6칸, 전퇴(前退)가 있는 2칸 반의 사랑채는 ㄱ자형이며 사랑채 상량대에는 "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순조(純祖) 20년(1820)에 해당된다. 사랑채 마루벽에 정조임금이 지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日長山色碧嵯峨(일장산색벽차아) 세월은 흘러도 산은 푸르고 높으며
種得乾坤正氣多(종득건곤정기다) 정의로운 기운은 온 천지에 가득하네.
北去南來同一義(북거남래동일의) 북으로 가거나(金尙憲이 심양에 간 것) 남으로 오거나(정온을 모시러 온 것) 의리는 매 한 가지
精金堅石不會磨(정금견석부회마) 금석같이 정결하고 굳은 절개는 아직도 삭아 없어지질 않았다.
(崇禎四庚年 居昌府使金麟渟謹書 숭정사경년 거창부사김린정근서)
안채는 남향으로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정후퇴(前後退)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에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다. 곳간채는 서편에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마당 동측에 서향(西向)한 아래채가 있는데 4칸집이다.
사당은 안채의 후원에 삼문(三門)을 낀 낮은 토석담장 안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남부지방 양반집 형태를 잘 갖추고 있으며, 각 신분에 따라 공간구별이 잘 구분된 조선시대 건축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주거시설로 현재 종손이 관리하고 있다.
이 집은 정온[1569~1632]선생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 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섭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안채도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에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의 안뜰인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서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이 있다. 곡간 뒤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마당 동쪽에는 서향한 뜰아래채가 있는데 4칸 집이다. 사당은 안채의 향원에 삼문을 짓고 그 안에 있는데, 전퇴가 있는 3칸 집이다.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면서 장대하고 훤칠해 보인다. 학술적 가치는 집 전체의 평면구성에 있다.
반구헌
반구헌은 조선 헌종·철종년간에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野翁 鄭夔弼)선생이 기거하던 주택이다.
야옹선생은 목민관 재임시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안의현감의 도움으로 이 반구헌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반구헌이란 이름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의미인 "反求於諸心"에서 유래한다.
반구헌은 현재 대문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는데 사랑채에〔崇禎丁丑後二百三十四年〕이라는 상량문이 남아 있어 현재의 건물은 1870년대에 건립 또는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구헌이라 불리우는 사랑채는 팔작기와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이루어진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이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청이 중앙에 있지 않고 규모가 1칸인 반면에 방이 3칸이라는 점이다.
또한 측면 1칸에 난간을 두룬누마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물 후면 중앙에 아궁이를 설치하여 방 2개를 한곳에서 난방하도록 평면을 구성하였다. 구조는 민도리집으로 단순 소박하지만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품격을 풍기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수승대(거북바위, 요수정, 관수루, 구연서원)
이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는데 이는 유림과 거창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고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고란초를 비롯한 희귀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시문은 `나제전명수송대(羅濟傳名愁送臺 신라ㆍ백제에서 전한 이름 수송대요) 요수개명암구대(樂水改名巖龜臺 요수선생이 개명한 이름은 암구대라) 퇴계석명수승대(退溪錫名搜勝臺 퇴계가 내린 이름은 수승대요) 유풍송명요수대(遺風誦名樂水臺 유풍으로 읊는 이름은 요수대라)'의 칠언절구이다.
특히, '계해 4월 조영 서(癸亥 四月 趙榮 書 계해년(1743년) 사월 조영석 쓰다)'한 글귀가 새겨져 있어 관아재의 친필임을 보여준다.
관아재는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고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삼재(三齋)로 꼽힌 인물로 시와 글씨에도 능통해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로 불렸다.
거북바위
수승대의 명물 거북바위는 바위가 계곡 중간에 떠있는 모습이 거북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세월의 아픔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바위 곳곳에 자라고 있어, 마치 평지 같은 인상을 준다. 바위둘레는 이황이 수승대라 이름 지을 것을 권한 4율시를 비롯, 옛 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 차 있다.
요수정
요수 신권은 연산 7년(1501)에 나서 선조 7년(1573)에 졸한 분으로 학문에 능하였으나 숲속에 숨어 살면서 안분낙도와 후학 교육에 힘쓴 분이다. 요수정은 요수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다시 수파를 만나 1805년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다.
요수정은 수승대 건너편 솔숲에 부속건물 없이 홀로 세워진 중층의 정자이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어칸의 배면에 1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구성하였다. 방은 판방으로 구성하여 배면을 제외한 3면에 문을 내었다. 누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 좌측의 출입구 일부를 제외한 4면 모두 계자난간을 둘렀다.
요수정은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운 건물로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다. 특별히 기단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배면쪽에 경계의 표시와 굴뚝을 겸하는 낮은 돌담을 쌓았을 뿐이다. 기둥은 원기둥과 각기둥을 사용하였는데, 단칸의 방을 구성한 4본은 각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누하기둥은 직경을 상부기둥보다 크게 하여 구조적 안정을 꾀하고 있다.
건물의 네 모퉁이에는 처마의 사래를 받치도록 활주를 세웠는데 팔각으로 다듬은 돌기둥 위에 원주를 올려 사래에 고정시켰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올려 종보를 받고 종보 위에서는 상부에 소로를 끼운 사다리꼴의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건물의 좌우 측면에서 뻗어 나온 충량이 어칸 대들보 위에 걸쳐 있으며 끝단은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공포는 초익공 형식으로 기둥머리를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와 직교하여 보아지를 걸고 그 위에 주두를 올렸다.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일반적인 초익공집과 마찬가지로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처마앙곡과 기와의 와곡을 크게 하였다.
요수정은 수승대의 경치를 완상하고 시회와 교육 등을 위해 솔숲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정자 건물로 형태가 매우 아름답다. 전통적인 정자건물 형식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산간지역의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의 내부에 방을 들이고 있어 이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고 연대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구연서원 관수루
구연서원은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세 분의 행의와 학덕을 경모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들이 세운 서원으로 1540년 신권이 구연재를 완성하였으나 1694년 구연서원으로 개칭함.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1868년)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지속되어지고 있다.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로 1740년 창건되었으며 자연암반을 활용하고 틀어진 재목을 하부기둥으로 사용하는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형태 또한 대단히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암반 사이에 조성된 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웠다. 누하부 정면에 출입을 위한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개방하였다. 상층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올려 종보를 받고 다시 종보 위에서 상부에 소로를 끼운 사다리꼴의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좌우측면에는 충량으로 가구를 구성하였는데 끝단을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기둥머리는 초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며 처마앙곡과 기와의 와곡을 크게 하였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자연과의 조화라는 한국건축의 가장 큰 특징을 잘 보여주며, 누정건축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입면에 비례가 뛰어나 학술적 가치가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므로 도유형문화재로 지정함.
황산리 신씨고가
거창 신씨(居昌愼氏) 집성촌인 황산 마을에 있으며 일명 「猿鶴古家」라 칭한다. 주요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7년에 건립한 것으로 검소한 양식에 서민적인 전통 한옥 특징을 갖추고 있다.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요수(樂水) 신권(愼權, 생몰년 미상)이 이곳에 들어와 산 이후, 이 마을은 거창(居昌) 신씨(愼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번창해 왔다.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이 집은 1927년에 지어졌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경남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인 홑집 대신에 겹집의 팔작(八作)지붕으로 지어 집주인의 부와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사랑채는 궁궐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런 장식물로 꾸몄다. 잘 다듬은 커다란 돌로 쌓은 받침돌[長臺石]과 기둥을 받친 주춧돌 위에 설치한 기둥자리[柱座] 등은 조선 중기 이전에는 벼슬이 높은 양반 집안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밖에 안채와 그 건물을 둘러싼 크고 화려하게 지은 부속 건물들도 집주인의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채의 늘어난 방 수, 좁아진 대청, 집안에 들어선 화장실 등은 전통의 격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20세기 초 실용성을 중시하던 가옥의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에 지어진 이 가옥은 격식의 해체, 실용성의 증가, 심화된 경제적 계층화 등 복합적인 사회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농산리 석불입상
낮은 야산에 위치한 석불은 신체 각 부분의 조화로운 비례와 생동감을 잃지 않은 조형성(造形性)과 그리고 전형적인 우드야나(Udauana)식 옷주름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광배와 받침대[臺座]를 모두 갖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석불(石佛)이다. 바위를 원추형(圓錐形)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었다.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는 동일석으로 조각하였으며, 머리는 소발(素髮)에 둥근 형태의 육계가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알맞은 이목구비를 갖춘 둥근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으나 마멸되어 상호(相好)가 불분명하다.
당당한 가슴과 함께 부드러운 경사를 이룬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날씬한 다리, 얇은 옷자락[法衣]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는 불상의 뛰어난 입체감을 더해 준다. 여기에 양쪽 어깨에 걸친[通肩] 옷자락은 가슴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다가 허리부분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두 다리에 살짝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렸다가, 종아리부분에서 큰 V자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옷자락의 표현법을 인도의 우드야나(Udyana)왕 여래상 형식이라 부른다. 그 유래는 석가모니가 성불(成佛)한 후 한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往生] 어머니에게 설법하였는데, 그때 밧사(Batsa) 국의 우드야나왕이 부처가 잠시라도 지상에 없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 크기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불상이 최초의 부처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여래상의 옷자락의 조각 형식이 이 석조여래상과 같은 형태였다고 한다. 이 같은 옷자락의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몸 전체를 감싼 광배[擧身光]에는 불꽃무늬를 새겼고,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받침대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광배의 불꽃무늬나 원추형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비록 마멸되었지만 통일신라의 무르익은 사실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며, 불상 전체 높이는 270㎝이다.
거창 농산리 입석 음각선인상(居昌農山里 立石 陰刻仙人像)
약 350여 년 전 문화 류씨가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경작지의 논 한가운데 선돌이 있어 경작시 마다 불편하여 빼어냈더니 그 이후에 마을에 재앙이 계속되어 다시 원래 위치로 옮겨 놓았더니 마을에는 계속하여 풍년이 들고 재앙이 사라졌다고 하는 유래가 있다.
그 이후 마을에서 돌 이름을 입석이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선돌, 입석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사시대의 선돌에 선인상(仙人像)을 조각하여 큰 바위에 부처를 새긴 불상으로서 입석의 좌측하단에 성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00. 11월 문화재보수사업으로 마을회관 1m 앞쪽에 있던 것을 현 위치(13m 이격)로 축대를 조성하여 이건하였다.
입석(立石)은 고인돌과 함께 큰 돌 문화의 일종으로, 선돌이라고도 한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 주변에 세워져 묘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고, 역사시대에 접어들면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며, 토착 신앙과 합쳐져 장수를 비는 칠성바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농경 사회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의식이나 인간과 가축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식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입석은 커다란 바위를 길게 다듬은 후 신선(神仙)의 모습을 새긴 것이다. 입석의 높이는 2.2m 정도인데, 가장 넓은 쪽의 너비는 1.5m, 두께는 약 30㎝ 정도이다. 정면에 새겨진 그림의 크기는 약 1.8m이다. 입석의 왼쪽 아래 면에는 알구멍[性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는데, 농경 사회 당시 사람들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흔적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태양을 숭배하는 제사 의례와 관계있는 주술적 의미로 보기도 한다. 한편 이곳 농산리를 흐르는 냇물을 가로질러 서 있는 높이 6m, 길이 11m의 ‘높은 다리’[高梯, 여기서 고제면의 이름이 유래]를 지나는 옛 길이 삼남대로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입석은 길의 방향이나 이수(里數)를 알려주는 이정표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리장서
1919년 봄 3·1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로 파리 평화 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서를 보낸 것이 탄로되어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게 피체, 박해를 받은 사건으로,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 또는 파리장서 사건이라 하며 청원서를 파리장서라 한다. 3·1 운동이 국내 시위에 주력했다면 파리장서 운동은 세계 언론을 환기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하겠다. 이 운동은 거창에서 곽종석(郭鍾錫)이 주도 하였으며, 또 거창 출신 김재면(金在明), 변양석(卞穰錫), 이승래(李承來), 윤인하(尹寅夏), 박종권(朴鍾權), 윤철수(尹哲洙) 등 6명이 연서하였으므로 거창이 그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장서 운동(長書運動)의 동기
경술년(1910) 8월, 나라를 빼앗긴 후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며 10년을 겪는 동안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18년 윌슨 미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 주의의 물결이 고조되는 가운데 1919년 정월 파리에서 국제 평화 회의가 개최되고 약소민족들이 신생국을 세워 독립하는 등, 전후 자유 평화 사상이 팽배하였다.
일제는 1918년 11월 전후 국제회의에 대비하여 이완용(李完用)을 조선의 정당 대표로 김윤식(金允植)을 유림 대표로 삼고 소위 독립 불원서라는 것을 조작하여 일본 정부에 제출케 한 일이 있었다. 1919년 정월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자 서울 유림들 사이에 일제의 간계를 봉쇄하기 위한 파리 평화 회의에의 독립 청원서 제출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 무렵 곽종석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에서의 움직임을 보고, 1919년 2월 19일 다전(茶田) 으로 곽종석을 찾아와, 세계정세와 서울 유림의 동정을 상세히 전하고 곽종석이 선두에 나설 것을 요청하였으며, 고종 인산일을 기하여 전국 유림의 서명을 받기로 논의하였다. 곽종석은 이미 80을 바라보는 노구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곽연, 김황(金榥) 두 사람을 2월 26일 서울에 파견하여 윤충하와 회동하였다.
이보다 앞서 한용운(韓龍雲)은 거창으로 곽종석을 찾아와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여 동의 받았으나, 그가 상경한 2월 24일에는 이미 인쇄가 끝난 후였다.
이와는 별도로 성태영(成泰英)과 김창숙(金昌淑)도 서면 연락으로 장서운동을 꾀하다가 곽연, 김황을 만나 합류하였고, 김창숙이 모친 병환으로 2월 25일에야 상경하니 역시 선언서의 인쇄가 끝난 후였다. 이러한 이유로 3·1 독립선언서 서명 민족대표에 유림이 참여치 못하였는바, 이것이 오히려 장서운동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당초 장서운동은 전국 유림을 총망라할 계획이었으나 3·1운동이 일어남으로서 일제의 감시가 삼엄하였고, 또 시일이 촉박하여 부득이 영남과 기호에만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장서 운동의 전개
경향간의 거리와 시일 관계로 유림 대표들이 3·1 독립선언서 서명의 기회를 잃었으나 3월 1일 파고다 공원 시위에 참가한 성태영, 김창숙은 숙소로 돌아와 장서운동 전개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3월 2일 김창숙은 곽연의 숙소인 북창동에서 김황, 곽연, 윤충하(尹忠夏)와 만났다. 김창숙도 곽종석의 문인이었으므로, 평소 잘 아는 사이였다. 이 자리에서 곽연으로부터 곽종석의 뜻을 전해들은 김창숙은 사제 간의 의향이 같다는 것을 알고 더욱 용기와 자신을 갖게 되었다. 3월 4일 그동안에 규합된 유림의 유망 인사들이 성태영의 집에 모여 전국 유림을 총망라할 계획을 세우면서 지방분담 책임자를 뽑으니 강원, 충북을 이중업(李中業), 충남을 김정호(金丁鎬), 경기, 황해를 성태영(成泰英), 전남북을 유준근(柳濬根), 함남북을 윤중수(尹中洙), 경남북을 김창숙(金昌淑), 평남북을 유진태(兪鎭泰)가 각각 맡게 되었다. 이들은 즉시 행동하여 3월 15일 다시 서울서 만나기로 하였다.
한편 김창숙은 곽연, 김황을 독립청원서 문안 작성을 위해 곽종석에게 보내고 자신은 3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성주에 들렀다가 곽종석을 찾아왔다. 김창숙을 반가이 맞이한 곽종석은 "전국 유림 이 일어나 대의를 세계만방에 천명하게 된 것으로 이 몸이 참답게 죽을 곳을 얻었다."하고, 독립청원서 문안 작성은 성주에 사는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에게 이미 부탁했으니, 거기에 가서 찾으라 하였다. 김창숙은 몇몇 사람을 만나 자금 조달과 서명을 받기위해 김천과 영주에 들렀다가 정석영을 찾았는데, 이 때 청원서 문안은 곽종석에게 보낸 후였고, 그 사본을 받아보니 약간 미흡한 곳이 있어서 곽종석과 상담하기 위해 다시 거창으로 왔다. 김창숙을 만난 곽종석은 정석영이 지은 문안을 보고, 자신이 별도로 작성한 초고를 내어 주었는데 이것이 오늘에 전하는 장서이다.
곽종석은 김창숙으로 하여금 청원서 전문을 외우게 하고 곽연에게 세필로 다시 쓰게 하여 그것을 가지고 신총을 만들어 미투리 한 켤레를 쌌다. 김창숙에게 중국에 가면 우리 독립투사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데 특히 당대의 석학이며 중국 참의원 의원인 이문치(李文治)를 만나면 손문(孫文)을 움직여 줄 것이다 하였다. 이문치는 몇 해 전 곽종석을 내방, 같이 기거하면서 정치, 사회, 문학 등에 흉금을 터놓고 사귀었던 친우다. 끝으로 김창숙의 협조자로 이현덕(李鉉德)을 며칠 안에 상경시키겠다고 하였다. 그 날 밤 일본헌병들이 김창숙을 찾고 있다는 전갈이 있어, 이웃집에 피신하여 밤이 새자 곧 출발하여 3월 14일 서울에 돌아왔다. 전국 각지를 분담하여 활동해 오던 사람들은 기약했던 3월 15일 일제히 성 태영의 집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추진 방법을 수의한 결과, 일헌의 경계가 날이 갈수록 엄하므로, 이 이상 지연시키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니 국내 활약 은 여기서 그치고 파리행 출발 준비를 서두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거창에서 상경할 이현덕을 기다리던 김창숙은 유진태의 소개로 기호 유림의 영수인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문인 임경호(林敬鎬)를 만나게 되었다. 김복한은 승지로서 1895년부터 여러 차례의 병을 일으킨 바 있었고, 을사조약 때는 이완용 등을 참수하라고 상소하다가 옥고를 겪기도 하였는데, 그도 역시 17명의 연서로 된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임경호(林敬鎬)로 하여금 파리 평화 회의에 발송하도록 시켜 임경호는 같은 문인들과 함께 그 발송 준비를 획책하고 있는 참이라 하였다.
유진태는 서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으나 같은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이룩된 독립 청원서를 휴대한 양인이 우연히 동석하게 된 것은 우리의 독립을 기필코 성취시키려는 천지신명이 도운 기연이라 하면서 손을 굳게 잡고 공동 행동을 합의하였으니, 3백여 년간 반목해오던 기호와 영남의 유림이 조국 광복이라는 대의 앞에 대동단결을 한 것 이다.
두 사람은 곧 기호본과 영남본의 문안을 검토하였는데, 그 내용이 비슷하였지만 영남본이 보다 간명하였으므로 영남본을 채택하기로 하고, 서명자 명단은 지역의 구별 없이 열기하기로 했는데 모두 137명 이었다. 그리고 파리에 파견할 대표로는 임경호의 제의로 김창숙으로 정하였다.
장서의 발송
장서를 갖고 갈 수석대표 김창숙, 차석 이현덕, 중국어 통역 박돈서(朴敦緖)가 정해지자 유진태, 이득년(李得年), 조중헌(趙重憲), 이정수(李貞秀), 윤중수(尹中洙) 등은 상해의 애국지사들에게 감창숙에 대한 소개장을 발송하였고, 중국대사관 지구언인 장관군(張冠軍)의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화상(華商) 동순태(東順泰)의 본점을 통하여 봉천(奉天)의 지점으로 여장과 장서 그리고 모금한 다액의 돈을 장관군이 신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철도편으로 탁송하였다. 이렇게 출발 준비가 되었는데도 이 현덕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김창숙은 박돈서(朴敦緖)만 대동하기로 하였다.
3월 23일 동지 10여인이 베푼 조촐한 송별연에 이어 이득년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밤 10시발 봉천행 기차를 탔다. 3월 24일 새벽 안동역에 내린 김창숙은 옛 친구 박광(朴洸)을 만나 국내외의 연락을 부탁하고, 동순태 지점에서 화물로 가장한 자금을 인수하고 봉천의 서탑에서 이조연(李造然)으로부터 노령과 중국에 있는 동포들의 활약상의 들은 다음 3월 28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는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신규식(申圭植), 조완구(趙琬九), 손진형(孫晋衡), 신채호(申采浩)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그동안의 활동 상황화 국제 정세를 듣고, 3·1 운동 이후의 국내 정세와 독립 청원서의 작성 경위를 설명하고 파리고 갈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김창숙의 파리 파견을 통역과 여비 등을 감안하여 중지하도록 하고, 그곳에 주재하고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수송하여 그로 하여금 직접 평화 회의장 에 제출하기로 결의한 후, 청원문을 윤충현(尹忠顯)에게 위촉, 독어, 불어, 영어 등으로 번역케 하였다. 각국 번역문을 수천 부씩 인쇄시켜서 김규식에게 보낸 다음 김창숙은 그것과도 별도로 파리 평화 회의 의장 및 각국 대표들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 중요 기관, 언론계, 그리고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어 국제 여론을 크게 환기 시켰다.
유림(儒林)의 수난
4월 2일 경북 성주에서 일어난 만세 소동으로 장석영(張錫英), 송준필(宋浚弼), 성대식(成大湜) 등 독립 청원서에 서명한 인사들이 구속됨으로써 장서 운동이 처음으로 일헌에게 탄로되었다. 연이어 4월 18일 곽종석이 구속되어 21일 대구 감옥으로 수감되고, 5월 15일의 공판에서 곽종석, 장석영은 2년, 송준필은 1년 6월, 성대식은 1년 징역이 각각 언도되었다. 이 자리에서 재판관이 공소 의견을 묻는데 대하여 곽종석은"우리 국법의 범법자가 아 니라 포로가 된 것이니 공소할 곳이 없으며, 원수들에게 구구하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뿐 더러 호소할 곳이 있다면 다만 하늘뿐이다."라고 대답하여 의연한 기상을 보였던 것이다. 이 이외에도 많은 유림들이 검거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일제는 소위 유화 정책을 편다 하여 곽종석 이외에는 모두 집행 유예로 석방하였다. 그러나 6월 상해에서 발송한 장서가 우편으로 각 향교에 배달되기 시작하자 배달 즉시 일헌에 의해 압수되고, 유림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검거된 인사들이 8월 초 대구에서 첫 공판을 받았는데, 당시 일제는 3·1 운동에서 보인 민족의 억센 투지와 자유주의 사상으로 팽배한 세계 조류에 못 이겨, 무단 정책에서 이른바 문화 정책으로 전환한 참이라 대개의 인사들은 미결 3개월의 옥고 끝에 2∼3년간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곽종석은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10월 27일 74세로 다전(茶田)에서 별세하였다.
한편 김복한(金福漢)은 6월 초 검거 당시 중병으로 구속은 면했다가, 건강이 회복되어 8월에 사건이 일단락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 감옥으로 이송, 12월 까지 옥고를 치루었다. 김창숙은 계속 상해에 머무르면서 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925년 국내로 잠입, 8개월간 활동하다 일제에게 체포됨으로써 제2차 유림단 사건이 일어나 게 되었다.
장서의 시작부터 발송까지 큰 역할을 한 많은 인사들이 장서에 서명치 않았던 것은 만약 서 명 인사들이 모두 투옥되더라도 국내외에서의 활동과 연락을 계속하기 위한 제2진으로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1925년의 제2차 유림단사건도 이 같은 기성조직을 토대로 삼았던 것이니 김창숙, 곽연, 김황 등을 비롯하여 이미 말한 바 있는 많은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장서의 내용
한국 유림 대표 곽종석 등 137명은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이 글을 올립니다.
천하 만물이 같이 나서 자라는 것이 진리인데 쟁탈과 권력으로 남의 목숨을 해쳐 나라까지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드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많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만국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 등을 누리게 하는데 만일 원통한 마음을 호소할 기회와 혜택을 주지 않는다면 어찌 여러분의 사명을 다한다 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피맺힌 심정을 호소 하니 자세히 살피십시오.
한국도 만방의 하나로 삼천리강토와 2천만 겨레에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명국임은 세계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강제적인 조약으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행위를 말해 보겠습니다. 조약에서는 한국 독립을 지키겠다고 늘어놓고, 실은 협박과 기만으로 독립은 보호로, 보호는 합병으로 되어 이것이 마치 한국의 소원인 양 꾸몄으니 이는 한국은 물론 만국을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조국 독립을 잊지 않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아가며 십 년을 견디어 왔습니다. 마침 여러분이 파리에서 회의를 열고 만방을 평화롭게 이끌어 폴란드가 독립되었으니, 한국의 독립에도 협조해 주신다면 언제나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회의 결과 독립되었다는 기쁜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종 임금님이 승하하셨다고 하니, 이 슬픔과 원통함을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3월 1일 국장일에 온 국민이 독립만 세를 부르며 임금님의 영혼을 위로할 때 일본의 총칼 앞에 맨손으로 맞서 죽음을 돌보지 않았음은 우리의 원한과 충정의 터짐이요, 또한 여러분이 우리에게 기회와 용기를 준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 후 아무런 변화 현상이 보이지 않음은 일본의 간사한 꾀가 여러분의 이목을 흐리게 한 것 같아 다시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하늘은 모든 사물에게 자유와 활동력을 주었거늘 하물며 우리 삼천리강토에 자치 능력이 없겠습니까. 일본은 우리의 풍속을 바꾸려 하나 이는 말이 아니며, 물론 대신 다스린다는 것 도 혼란만 있을 뿐 입니다. 거짓으로 한국은 일본에 붙이기를 원한다 하나, 우리 민족의 주체성은 우리만의 사 상과 문화에서 얻어진 것이므로 비록 일시적 억압에 굽힐지언정 민족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알면서, 세계 여론을 억압하려 함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존폐가 이번 회의에 달려 있음을 알고 나라 없는 삶보다 나라 있는 죽음에 떳떳하기를 십 년 억울한 마음을 호소하고자 하오니 너무도 슬프고 야속하여 말문이 막힙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여론에 따라 이를 순조롭게 처리한다면 우리도 나라를 찾을 것이요, 세계 인류도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우리 이천만 생명만이 삶과 평화 속에서 버림받아야 되겠는지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오.
거창군 출신 서명자들
곽 종석 (郭 鍾錫 :1846∼1919)
선생의 자는 연길(淵吉) 또는 명원(鳴遠)이요, 호는 회와(晦窩) 또는 면우(傘宇)이고, 본관은 현풍이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준수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한주(寒洲) 이 진상(李 震相)에게 배웠다.
1867년에 거창 신원으로 이사했으며 1880년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함에 밤에도 상복을 벗지 않고 온돌방에 들지 않았다. 1883년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태백산중의 학산(鶴山)이 은둔하기에 알맞다고 생각되어 이듬해에 그 곳으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 1895년 조정에서 경국(經國)할만한 재질이 있다고 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그 해 8월의 민비 시해와 일본의 횡포에 분개하여 이듬해 봄에 상경하여 천하대의를 밝히라는 포고문을 지어 열국 공관에 보냈고 1896년 겨울에 거창 가북의 다전(茶田)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1899년 고종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에 임명되어도 취임하지 않았다. 1903년 7월 통정대부 비서원승(通政大夫 秘書院丞)을 제수했으나 이를 사양했으며 다시 칙임의관(勅任議官), 칙임비승(勅任秘丞)을 내려도 다 사양하였는데 고종 황제는 비성랑(秘書郞)을 보내어 같이 입궐하라고 하였다. 이에 아무 직명없이 산야에 있을 때처럼 관복도 입지 않은 채 알현(謁見)하기를 고집하니 고종 황제도 마침내 그 뜻을 받아들여 그 해 8월 28일 유건(儒巾) 도포 차림으로 함녕전(咸寧殿)에서 배알하였다. 이 때 고종 황제는 치국(治國)하는 길을 하문하였고 29일에는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을 제수하였으며, 9월 3일 다시 궁정에 불러 당장 급한 시무(時務)를 하문 받자 올바른 학문을 숭상하고(崇正學), 민심을 수습하며(結民心), 군사 체제를 옳게 정하며(定軍制) 재정을 행함에 절약할 것(節財用) 등 시무사조(時務四條)를 말하니 고종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한양에 그가 거처할 저택을 하사하게 하였으나 청빈한 원로대신에게만 있었던 전례를 들어 완강히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을 들은 선생은 10월에 상경하여 매국 5적을 참할 것을 상소 했고 11월에 고종 황제와의 대면을 청했으나 관리들이 임금께 알리지 않아 3일간을 기다려 도 아무런 통지가 없으므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선생은 가북의 다전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조국 광복의 지름길은 옺기 민족의 자주독립만이 있을 뿐이 라는 일념으로 이를 세계만방에 선포하기 위해 전국 유림 대표 137인을 대표하여 1919년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파리정서(巴里長書)를 내게 되었다. 선생은 퇴계선생의 학문을 이어 받은 스승 이 진상에게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워 계승했고, 조선 예학자(朝鮮禮學者)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유(巨儒)로 문장에도 능숙하여 방대한 면우집(傘宇集)을 남겼다. 1963 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후손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와 거창에 거주하고 있으며 거창 가조면 원천의 다천서당(茶川書堂)과 산청군 단성면의 이동서원(泥東書院)에 제향 되었고 그의 신도비는 김창숙(金昌淑)이 지은 것이다.
김 재명 (金 在明)
자는 호현(晦賢), 호는 일산(一山)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1852년 남상면 대산리에서 출생하였고, 독립 우동 당시 68세로 후손은 남상면 대산리에 살고 있다.
윤 인하 (尹 寅夏)
자는 경여(敬汝), 호는 심산(心山)이며 1855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 파평이다. 장서 운동 당시 65세로 후손은 남하면 양항리에 살고 있다.
이 승래 (李 承來)
호는 숙관(肅觀)이며 1856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전주이다. 장서 운동 당시 64세로 후손은 서울과 대전에 살고 있다.
변 양석 (卞 穰錫)
자는 명원(鳴遠), 호는 구당(苟堂)이다. 1859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士屛里)에서 출생하였 고 본관은 밀양이며 장서 운동 당시 61세로 후손은 가조면 병산과 경북 금릉군 감천면 양천동에 살고 있다.
박 종권 (朴 鍾權)
자는 치종(致宗), 호는 회우(晦宇)이며 1861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밀양이다. 장서 운동 당시 59세로 후손은 남하면 양항리에 살고 있다.
윤 철수 (尹 哲洙)
자는 순명(舜明), 호는 해관(海觀)이며 1868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파평이다. 장서 운동 당시 59세로 후손은 남하면 양항리에 거주하고 있다. 파리장서의 발상지인 거창에서는 군민이 대동단결하여 파리장서비 건립 거창군 추진 위원회를 결성하고 거창읍 상림리 옛 침류정 자리에 비를 세워 선인들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고 애 국 애족의 정신을 가다듬게 하고 있다. 비 건립은 1977년 9월 23일이고 10월 8일에 제막하였다.
[함께 공부해요]
한국의 마애불(磨崖佛)
1.시작하는 글
마애불은 인도의 석굴사원의 벽면에 새긴 불상을 시초로 한다. 석굴사원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후부터 조성되기 시작되었으며 매우 빈번하게 조성된 시기는 5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대승불교시대에는 석굴사원이 대표적인데 그 예를 들자면 아잔타 석굴인 초기 석굴과 후기 석굴 그리고 후진의 주불 등이 주로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다. 오랑가바드 석굴 등에서는 각 벽면마다 불·보살상을 빽빽히 새겼으며 여기에 마애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석굴의 석주기둥에도 돋을새김이 나선각으로 불상을 새겼는데, 석굴 아닌 절벽이나 바위면에 감실을 파고 새긴 간다라 스와트 지방의 마애불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마애불은 경주 남산 마애불과 거의 비슷해서 우리나라 마애불의 선구임을 알 수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 있는 석굴은 수십 미터나 되는 초대형 석굴이며 돈황석굴 등에도 마애불이 새겨지고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돋형 마애불이 새겨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약수계와 삼릉계에 있는 마애대불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옛 장안인 서안 일대에도 맥적산 석굴이나 장안의 각 감실에 마애불들이 수없이 조성되었으며 운강, 용문, 천룡산, 타산 등은 물론 사천 각 지역마다 수많은 마애불이 새겨졌다. 특히 산동 지방의 운문산석굴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마애불의 조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은 간다라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 각지의 수많은 석굴에 조성되었으며, 인도 중국의 마애불은 우리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도와는 달리 지리적 환경적인 것을 감안해 완전한 석굴이 아닌 대형 바위나 절벽 또는 돌기둥 등에 크고 작은 감실을 파고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마애불은 기법, 재료, 주체 등에 따라 구분 짓는 방법이 있다. 여기서 잠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애불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은 조각 기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오목새김인 음각은 바위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뒤 깊이 파는 방법으로 새긴 것을 말하며 바위면을 그대로 둔 채 깊이로 새기는 방법이다. 여기는 조각칼로 선을 그어 형태를 만드는 선각기법과 조각정으로 두드려서 형태를 이루는 점각기법이 있다. 돋을새김인 양각은 불상의 외형을 그대로 둔 채 주위 바위면을 제거함으로써 불상의 형태가 두드러지게 하는 기법이다.
우리나라에는 양질의 화강암지대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애불은 화강암 절벽이나 화강암으로 된 큰 바위에 새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화강암 마애불이라는 명칭을 얻을 만큼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데, 화강암이 다른 석재에 비하여 풍우에도 오래 견디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마애불을 크게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삼국 가운데 고구려 마애불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다루기 어려우므로 통일이 이루어진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서울과 경주 편집부는 각기 지역적 특징을 감안하여 '우리나라 마애불을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 마애불의 실태와 상황 등을 탐방하였다.
1) 백제시대의 마애불
서산 마애 삼존불
백제시대의 마애불은 예산 사방불, 태안 마애불, 서산 마애불 3점이 있다. 이 세 마애불은 백제불상의 대표적이자 우리나라 불상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애불들 가운데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산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 마애삼존불입상은높이가 2.8m이며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산 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산세가 우선 유려하고 아름드리나무와 돌들로 장엄되어 마애삼존불로 오르는 길은 마치 극락정토를 오르는 길처럼 여겨진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마애삼존불이 왜 이곳에 성립되었는가, 그 시기와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서산군 운산면의 위치는 기원전 600년 당시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인 길의 어귀가 되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이곳에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마애삼존불을 살펴보기로 하자. 마애삼존불의 석가모니불에 해당하는 본존은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로 머리는 보주형 두광이 있으며 소발의 머리의 육계는 비교적 작은 편이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은 만연한 미소가 있고 눈은 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자세히 본존 상호를 보면 체구보다 큰 얼굴에 코가 제법 상호를 차지하는 비중이 넓으며 콧구멍도 크게 뚫려 있어 귀족적이고 고귀한 인상보다는 두툼하고 넉넉한 시골아저씨 같은 인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본존의 목에는 三道가 없고 법의는 두껍게 표현되었고 체형이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만큼 평면적이다.
옷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고 옷자락은 말발굽형 주름이 나 있다. 手印은 施無畏와 與原印으로 왼손 끝 손가락 두 개를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 연화좌가 있고 光背 중심에는 연꽃이, 주변에는 火焰문이 陽刻되어 있다. 우협시보살로 제화갈라보살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있고 상호는 본존과 같이 도톰하게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이 얼굴 전체를 차지하면서 滿面에 흐뭇한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으로 U자형으로 늘어져 있고 상체는 벗은 형이다.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고 발 밑에는 복련 연화좌가,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으며 중심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좌협시보살은 통식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으로 배치되었다.
이 보살상은 두 팔이 크게 훼손되어 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두툼한 눈과 입술로 원만형이다. 우협시보살과 마찬가지로 짧은 목걸이와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이 고식의 주름으로 나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光背 형식과 똑같다. 이 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 삼존불인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삼존불로써 법화경 사상이 당시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자료라 볼 수 있다
2) 신라시대의 마애불
신라는 삼국 가운데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러나 신라문화는 당나라의 국제적인 문화와 서역 내지 인도의 찬란한 문화, 그리고 서방의 호화로운 문화 등도 수용하여 삼국 가운데 가장 화려한 문화를 이룩하게 된다. 신라시대의 중심 사상이자 구심점이었던 불교는 종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각 종파들은 예배하는 주존불이 서로 달랐으며 이들 각 종파는 서로 다른 주존불상을 다투어 조성함으로써 불교조각은 더욱 그 번성을 자랑하게 된다. 당대의 수많은 불상들은 모두 인체의 형태로 이상화시킨 사실주의적 불상을조성하여 이러한 사실주의 양식은 盛唐양식과 인도 굽타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신라화시킨 것으로 생각되며, 당대의 조각들로서 감산사 불상들, 굴불사 불상, 칠불암 불상, 용장사 불상, 석굴암 불상 등 우리 나라 역사상 최고의 불상들이 출현하게 된다.
통일신라 때에는 수도 경주의 남산을 중심으로 선도산, 금강산, 낭산 등지의 절벽에 마애불을 많이 조성했고, 태백산, 지리산. 팔공산, 계룡산 등 전국의 명산대찰에도 많은 마애불이 조성되었다. 특히 경주 남산은 골짜기, 절벽, 바위마다 불상을 새겨 세계적인 성지로 추앙 받고 있다. 중대 신라에는 신라 고토에 주로 많이 조성되었으며 하대 신라에는 점차 확대되어 전국 각지의 모든 곳에까지 마애불이 만들어졌다. 이들 중대와 하대의 신라의 마애불은 당대 불상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 위치한 칠불암 옆 바위와 석주에 새겨진 불상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상군으로 보물 제200호이며 바위면에 부조한 삼존불상과 그 앞의 돌기둥에 부조한 4구의 불상 등 모두 7구의 불상이 새겨져 있어서 칠불암으로 부르고 있는데 유구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영을 벽면에 세운 일종의 석굴사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존불상은 426cm 높이의 바위면에 꽉 차게 부조한 마애불로서 거의 환조에 가까운 고부조로 되어 있다. 본존은 높이가 260cm나 되는 거대한 좌상이며, 두 협시보살도 210cm로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본존은 머리가 둥글고 큰데 소발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전체적으로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며 부풀고 곡선적인 선과 면으로 자비로운 표정과 어떻게 보면 약간 장난스런 미소를 흘리고 있는 듯하며 부풀고 두껍게 처리한 눈두덩과 쌍꺼풀진 눈, 부드러우면서도 양감 있게 처리한 코, 세련된 입, 어깨까지 닿은 긴 귀 등 자비롭고 원만한 佛眼을 성공적으로 묘사하였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넓고 강건하여 건강하게 다듬은 가슴, 가는 허리와 더불어 당당하며 수인 항마촉지인으로 두 손이 유난히 큼직하고 법의는 우견편단인데 상체의 옷주름은 곡선적인 계단식 주름이며 옷깃이 반전되었다. 하체의 옷주름은 큼직한 선으로 처리되었는데 두 다리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규칙적인 지그재그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좌는 앙련과 복련의 2중 연화좌로서 단판 7엽은 잎들 사이의 잎에 중간선을 그은 특이한 형태로서 9세기에 나타나는 독특한 연화문의 조형으로 주목된다. 광배는 보주형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협시보살은 좌우 모두 동일한 모습에 비슷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풍만한 얼굴,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육감적인 체구, 유연한 삼곡자세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왼쪽 보살은 꽃을 들고 있고 오른쪽 보살은 정병을 들고 있으며 모두 본존쪽을 향해 몸을 약간 비틀고 있다. 이 삼존불 앞의 돌기둥에 새겨진 사방불은 252cm 내지 242cm 정도로 바위모양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고 있는데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동면상은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으로 통견의 법의가 약간 둔중하나 신체의 윤곽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로 생각된다. 남면상은 여러 면에서 동면상과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군의의 띠 매듭은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무릎 위의 옷주름, 짧은 상현좌의 옷주름이 상당히 도식화되었다. 서면상은 동면상과 남면상과 서로 비슷하나 북면상은 다른 세 불상과 달리, 특히 얼굴이 작고 갸름하여 수척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네 상의 명칭을 확실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방위와 수인, 인계에 의해 볼 때 일단 동면상은 약사여래상이며 서면상은 아미타여래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조각한 이의 의도적인 표현이라고도 본다.
이 불상군의 성격은 사방 석주 각 면에 한 불상씩 사방불을 새기고 그 앞의 바위에는 삼존불을 새겨 삼존불이 중앙 본존불적인 성격을 띤 오방불로서의 배치 형식을 하고 있다. 이 불상군의 성격은 사방 석주 각 면에 한 불상씩 사방불을 새기고 그 앞의 바위에는 삼존불이 중앙 본존불적인 성격을 띤 오방불로서의 배치 형식을 하고 있다. 양식적으로는 풍만한 얼굴 모습, 양감이 풍부한 사실적인 신체표현, 협시보살들의 유연한 삼곡자세 등은 경주 남산 삼릉계 석불좌상 (보물 제666호)이나 석굴암 본존불좌상(국보 제24호), 굴불사지 석불상(보물 제121호) 등의 불상양식과 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군의 조성 연대는 통일신라시대 최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3) 고려시대의 마애불
고려시대는 관료적 귀족사회였다. 유교에 의하여 현실적인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문화를 창조한 고려는 심오한 정신문화인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이런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인 배경에 힘입어 불상들도 대형으로 조성되었는데 그 모습이 당당하고 귀족적이며 교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애불도 이런 조류에 더욱 거대해지는 경향을 띠었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 파주 용미리 마애불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러나 서울 편집부에서는 고려시대의 마애불로 법주사 마애불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법주사 磨崖佛倚像은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법주사 경내에서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암석 절벽면에 부조되어 있다. 이 마애대불의 높이는 5m이고 문화재관리국에서 보물 제216호로 지정하고 있다. 이 불상에서 나타난 의상은 경주 삼화령 석고 미륵불 의상과 함께 희귀한 의상에 속한다.
낮은 육계와 규칙적이면서도 특이한 나발, 계주 또한 기하학적이고 두 손은 說法印을 짓고 있으며 불상의 상호는 갸름하면서 원만하지만 두 눈두덩이는 두껍고 눈꼬리는 치켜 올라갔으며 약간 빈약한 코와 작은 입을 가졌다. 정면향의 도식적인 큰 귀가 있으며 군살진 턱 등에서는 마치 군살보다는 옷주름처럼 보이는 추상적인 면까지 보이고 있으며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어깨와 직선적인 다리 사이에 몸에 비하여 유난히 잘록한 허리를 가졌다. 상체는 삼각형이고 수평인 무릎과 직선적인 다리 사이의 옷주름은 매우 규칙적이고 도식적으로 옷주름을 처리했으며, 날카롭지만 섬세한 연꽃형태의 대좌 위에 두 다리를 걸쳐 내린 자세이고 두 다리는 한껏 벌리고 앉아 있어서 각지게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매우 편한 자세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직각에 가까운 형태는 어깨와 무릎에서 팔로 이어지는 선을 연장하면 직삼각형이 되어 기하학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고 매우 능숙하고 숙달된 조각기법을 선보인다. 이 불상은 1350년에 제작된 미륵화생변상도의 불상 표현과 친연성이 강하며 이 불상이 새겨진 암석 바로 앞 바위면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미륵불이 바로 옆에 새겨진 說話圖들은 이들 불상이 법상종의 신앙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귀중한 자료로 볼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마애불
조선시대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대불보다는 아담하고 훌륭하게 조성되었다.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으나 세종, 세조, 중종 때의 왕실이나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민중들의 믿음에 힘입어 불사나 불상조각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과 더불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불교의 발언권이 신장되었고 숭유억불정책으로 폐사된 사찰과 전쟁으로 소실된 사찰을 복원하는 불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조선의 마애불상들도 당시의 시대적 양식과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예산 예당 신라 마애불 입상(1465)과 조선 전기말 내지 후기에는 관악산 마애 미륵불좌상을 들 수 있고 후기에는 관악산 삼막사 삼존불좌상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관악산 삼막사 삼존불좌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삼막사 칠성각 안의 절벽 바위면에 새겨진 조선시대 마애삼존불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이다. 바위에 마애삼존불상을 새기고 전면에 걸쳐 누각식 목조 전실을 수축하여 법당을 삼았다. 현재 1층의 전실에는 아무 것도 모셔져 있지 않고 2층에 마애삼존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이런 구조는 석굴 사원의 전실로 흔히 사용되고 있으므로 석굴사원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너비 220cm, 깊이 200cm를 파고 여기에 삼존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본존상의 높이 150cm와 협시보살상의 높이는 93cm이며 등신대보다 큼직하게 새겨졌지만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본존상 머리의 육계는 뾰족하게 표현하고 있고 얼굴은 방형이면서 평판적이고 다소 양감을 나타내고 있다. 좁은 어깨와 방형체구 등도 역시 평판적으로 처리되어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통견의 법의는 두껍게 나타내어 불상의 부피감을 감소시키고 있으며 간결한 옷주름선은 도식적으로 처리되어 불상의 형태와 잘 대비되어 있다. 두 손을 배에 대어 보주를 올려놓았는데 이것은 치성광불의 寶輪으로 보여진다.
좌우 협시보살들은 일광과 월광이 표현된 삼산관을 머리에 쓰고 있고 머리나 두손을 합장하고 있는 수인 등이 보살상의 특징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다. 삼존불은 날카로운 듯한 연꽃 무늬 대좌가 받쳐주고 있으며 본존불의 보륜수인과 좌우보살상인 일광·월광상의 특징은 칠성각에 본존으로 봉안된 형식과 더불어 칠성의 본존불인 치성광 삼존불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본존 뒤 치성광 후불탱화는 별로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으며 마애불상으로서는 희귀한 예이므로 크게 주목되는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1763년에 조성되었고 전각은 1764년에 창건되었으며 1881년에 중건되었다는 銘文이 불상 밑에 새겨져 있다.
3.나가는 글
이상과 같이 시대적 구분으로 마애불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탐방한 마애불은 전국에 걸친 마애불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탐방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느낌을 전달받았다고 생각한다. 마애불은 일단 절벽이나 바위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옮기거나 세월의 흐름에도 쉽게 마모되는 일이 적어 매우 역사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마애불은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이라는 장구한 역사와 시대를 끌어안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마애불은 우리와 함께 살아온 동반자적인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반자라면 바로 누구인가. 그것은 민중이다. 아름답고 화려하다기보다는 단순하고 담백한 모습을 선조들은 부처님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애불의 상호를 보라. 모든 상호마다 고결하고 귀족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순박하고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는 순수한 미소로 우릴 대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난 마애불을 탐방하며 마애불의 편안한 얼굴이 곧 부처의 모습이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것이 우리가 속한 가정, 사회, 국가가 불국토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불국토는 카리스마적인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민중이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것을 마애불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선조들처럼 바위나 절벽에 마애불을 새기는 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마애불은 미래의 마애불이 된다고도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마애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참으로 무관심하고 이해도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마애불을 탐방하면서 진정으로 마애불을 보존하는 길은 어떤 길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콘크리트로 전각을 세운다고 마애불이 보존될까? 마애불을 진정으로 보존하는 것은 마애불 앞에서 우리가 겸허한 자세가 되어 마애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는 길이다. 그것만이 마애불이 수백, 수천 년 동안 바위나 돌에 새겨진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된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현)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3 |
6월22일(화) |
두메산골 길을 가다 보면 소슬바람이 가슴을 시원케 하고 이름 모를 산꽃이 반겨주는 평창 |
진부장 → 신기리 → 새재 → 봉산리 → 봉산리 양지마을 → 대광사와 봉산계곡 → 자개골 → 구절리역 → 대기리 노추산과 이율곡 선생 → 안반데기 |
4 |
7월27일(화) |
신비함과 순수함을 간직 화천 |
평화의 댐 → 꺼먹다리 → 파로호 → 위라리칠층석탑 → 화천향교 → 계성사지석등 → 화음동정사지 → 인민군사령부막사 → 화천수력발전소 |
5 |
8월24일(화) |
자연에 심취해 정작 깊은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을 소홀히 했던 고성 |
건봉사 사리탑 → 간성향교 → 화진포 (금구도, 화포리 고인돌) → 문암리 선사유적지 → 화암사 수바위 |
6 |
9월28일(화) |
산삼과 산약초가 유명한 고장 함양 |
학사루 → 함양상림 → 함양석조여래좌상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안의광풍루 → 용추사 → 심원정 → 농월정 → 동호정 → 군자정 → 거연정 |
7 |
10월26일(화) |
청정한 자연과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괴산 |
각연사 → 미륵산성 → 우암송시열 관련 유적 → 산맥이옛길 |
8 |
11월23일(화) |
풍요롭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 |
관촉사 → 계백장군묘소 → 돈암서원 → 개태사 → 상계사 → 성삼문묘 → 견훤왕릉 → 강경젓갈시장 → 명재고택 |
9 |
12월28일(화) |
서해안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당진 |
당진면천읍성 → 면천향교 → 영탑사 → 영랑사 → 안국사지 → 필경사 → 김대건신부생가지 |
10 |
1월25일(화) |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금산 |
개삼터 → 태고사 → 보석사 → 남이자연휴양림 → 육백고지전승탑 → 백령성지 → 서대산 → 칠백의총 |
11 |
2월22일(화) |
북부에는 궁예, 남부에는 이 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은 포천 |
포천향교 → 구읍리석불입상 → 구읍리미륵불상 → 반월산성 → 청성사 → 용연서원 → 채산사 → 인평대군묘 → 성석린 선생 묘 |
12 |
3월29일(화) |
치악산과 섬강이 휘감아 흐르며 유구한 전통과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원주 |
강원감영 → 박경리문학공원 → 원주시립박물관 → 충렬사 → 국형사 → 보문사 → 입석사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