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 진료가 있어 병원에 갔다가 지하 1층의 가톨릭 원목실을 방문했다.
진료를 받거나 환자 방문으로 병원에 가게 되면 의례히 가톨릭 원목실을 찾는 내 오랜 습관이다.
힘 있게 밀어 열었던 원목실 내부에는 한 자매님이 앉아 기도중이셨고,
조용히 사무실을 열려고 보니 잠겨있었다. 수녀님께서 출타 중.
밝지도 컴컴하지도 않은 적당히 어두운 공간.
필요 이상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정갈하고 깔끔한 이 기도실은
내게 삶의 군더더기가 얼마나 많은지를 느끼게 하는,
복잡하고 어수선한 내 삶과 그대로 비교되는 공간이었다.
십자가와 성모상, 탁자와 성경책, 작은 책장 하나와 나란히 놓인 방석들.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온돌방. 이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하느님을 만나기에 전혀 모자라거나 부족할 것이 없는 곳.
무릎 꿇고 낮은 모습으로 다가앉는 내 자신만 준비되면 되는 겸손한 자리.
자매님 옆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자비의 기도’를 바쳤다.
마치자마자 수녀님께서 들어오셨다.
다른 분이셔서 여쭈었더니 두 달 전에 인사이동이 있으셨단다.
또 다시 용건이 있으셔서 바로 나가셔야 되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온 마음으로 사랑으로 대해 주셨고,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였다.
새 수녀님을 반가워하고, 떠나가신 수녀님을 추억하며
수도자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가라고 하면 가고, 남으라 하면 남고.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삶.
고이지 않으면서도 머무르는 삶.
나를 버림과 동시에 즉시 순명하는
겸손과 사랑의 삶.
수도자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순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뵐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편하게 헤어졌던 그 날,
마지막이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질 수 있었을까?
언제나 내일이 있을 것처럼 다음에 또 만나자고 웃으며 손 흔들고는 무심하게 돌아설 수 있었을까?
우리에겐 모든 순간, 모든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어느 한순간도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그리운 수녀님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수녀님과의 아쉬움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수녀님과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되리라.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긴박함, 두려움, 긴장됨, 절박함.
이 모든 어려운 감정들을 상쇄시켜주는 원목실은
내게 안도감, 편안함, 익숙함으로 다가와 나를 이끌어준다.
이곳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반에 환자와 환자 보호자를 위한 특전미사가 있다.
첫댓글 세 종교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곳
작은 궁전 같았던
그곳이었군요
네! 작지만 오히려 작기에 더 집중되는~~~ㅎ ㅎ
고이지 않으면서도 머무는 삶.
그런 삶을 꿈꿉니다.
꿈꾸는 대로 이루시길 함께 마음 모아 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그곳에 남편이 입원했을 때 이 곳에서 큰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 온돌방의 뜨거움과 안도감이 지친 몸을 감싸주었지요.
제가 받은 그 위로를 드립니다.
아버님 기억하겠어요.
참~~아늑한 공간이네요.
절로 기도가 될것 같아요~~충대병원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병원에 갈 일이 없으시길 바라지만
병문안이라도 가시게 된다면 이 작은 공간을 방문해보세요^^
그곳에 가면 늘 계시던 분이 안계셔서 허전했겠어요..
어른이 되면서부터 헤어지는 것이 힘들어요...
곁에 있어주는 친구들..소중히 여겨야겠어요..
있을 때 서로 잘 합시다^^
선배님이 순례를 하고 오신 길이 제가 간 길로 느껴집니다.
마음은 세실도 함께임을 믿습니다.
이 곳은 아니지만,
기도하다가 새벽 1시에 병실로 올라갔더니 난리가 났더군요...
어디 갔다왔나고? 약물 투여관이 심장까지 와 있는데, 밧데리가 나가면
막혀서 재수술 한다고 했어요. 2시간이 넘었기에 아차 싶었지만,
기도했지요. "예수님! 당신 뵈러 갔어요~ 시원하게 관 뚤어주세요"
3시간, 간호사님들의 노력으로 뚤렸지요~~ 감사합니당 예수님!
간호사님들 고생시켜서 죄송했어요..
병원에 가면 기도하고 미사 드릴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감사해요~^^
맞아요. 그 분과 함께 머물러 있을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오렌지님! 놀라셨겠어요. 그분과 함께셨으니 걱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되는 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