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건반이 고장 나고, 기타 줄이 떨어져도 고치지 못하고, 고궁의 기왓장이 부서져도 수리할 여력이 없고, 일정수입이 없어 끼니를 걱정하고, 결혼도 제 때 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을 때, 저급한 예술품들이 흥행이라는 미명으로 예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전시성, 일회성 공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문화행정으로 정책이 바뀌어야한다. 일회용 기분맞추기 잔치보다는 작은 규모의 도서관을 선물하고, 그 많은 지역의 차별화되지 않은 축제 대신 문화재 연구, 보수, 보존에 투자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향유하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자신의 직업에 몰두 할 수 없게 만드는 오케스트라 단원, 영화 종사자들, 화가들, 예술계 종사들, 방송의 엑스트라들의 수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확인해 볼 일이다. 상업적 예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공중파 방송의 제작 행태는 시청료를 납부하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예술성과 흥행성을 높이는 전략, 그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분업화된 작가시스템은 작기 본연의 창작 정신을 말살시키는 행위이다. 만화, 방송,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본 줄거리만 가지고 수하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업적 창작행위는 아연 실색하게 만든다.
다양한 변형, 변주, 퓨전으로의 컨트롤이 가능한 현실에서 예술계의 고질적 매너리즘인 지원제도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 간교한 비선조직의 음모를 깨고, 정교하고 세련된 디지털 시대의 예술 시스템 구축과 아울러 아날로그적 동선, 그 정서를 동시에 살릴 수 있어야 한다.
다급한 예술가들의 외침을 살펴보자. 일정한 과정을 마치고 자신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예술가들이 몇 명이나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지 정부는 파악하고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는가? 그들이 국민의 정당한 권리인 4대 보험에 들어 있는지 걱정해 본 적이 있는가?
가난한 문인들이 자신의 돈으로 시집을 내고, 소설가가 출판사를 걱정하는 일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많은 무용가가 쉴 새 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도 자력으로 공연하기가 벅찬 현실에서 문화 지원책이 뾰족하게 없다면, 그것으로 생계가 불투명하다면 예술, 그 자체가 허망이다.
물감 값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조각에 사용되는 돈이 없어 조각을 구두(말)로 하는 상황은 피아노가 없어 피아노 그림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는 상황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모두를 실업자로 만드는 문화예술 교육과정 무용론이 들어서는 대목이다.
전문 예술가들이 본업이 아닌 알바(Arbeit)에 치중하다 보니 예술의 격상은 요원한 일이 될 뿐이다. 이 일, 저 강의, 저 연출 다 맡아도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선에 머무는 연극, 무 하나를 3등분하여 하루 식사인양 끼니를 해결하던 촬영기사의 사망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신들이 실업자가 되는 코스에 바로 직면하게 되리라는 위험을 모른 채, 어린 숱한 예술 지망생들이 강습과 강의에 매달려 있다. 그들과 예술 기능의 슬기로운 만남은 없는 것일까? 서로가 별 부담 없이 자신의 예술 역량을 키워나가는 해법은 없는 것일까?
예술의 순환을 위한 슬기로운 동맹으로 합리적 진실을 값지게 여기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어울림, 그 무한 잠재력으로 예술 사이 창조 행위는 예술의 한계를 초월할 것이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왔던 예술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정부는 예술생태계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예술가들은 지금까지 많은 좌절과 실험을 거듭해 왔고, 상업과 예술의 양 축의 용광로 속에서 스스로를 용해시켜야 하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혹독한 빙하기를 거쳐 살아남은 예술가들조차도 투사적 용맹성만을 강조당하거나 자신의 진로를 걱정해야하는 지경이다.
예술 환경의 변화로 ‘산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인식이 팽배해 있으며, 예술가들의 아날로그식 사고방식은 대형 마트를 우습게 보는 ‘구멍가게’에 비유된다. 예술가 개개인도 통합을 이루는 유능하고 깨어있는 거대한 유닛이 되어야 한다.
예술가들도 집단에 의해 어울리고 창조되는 예술가의 일원이므로 게임으로서의 축구처럼 각자의 영역에 대한 완벽을 요구한다. 우리는 생산될 작품에 대한 성공과 실패의 아트 라인에 대한 엄격한 지침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최근 많이 목도해 왔다.
우리의 새 예술가들은 현대의 도도한 예술계의 흐름 속에서 신선한 순수의 정신과 예술 부흥에 대한 결연한 각오로서 예술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전복의 가치가 아니라 현상에서 밝혀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고양’ 성취하여야 한다.
나는 예술가들이 각기 다른 자유정신을 존중하고, 이념과 출신을 떠나 국익을 위한 통합과 평화를 추구하며 미적 아름다움을 밝히는 이타적 순환주의 정신을 소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식이 끝나는 흔적 없이 비우는 것이 예술가들의 도리이다. 권력에의 집착은 금물이다.
비빔밥은 고유한 색과 향, 맛을 유지하며 상이한 반찬과 재료들이 어우러져 섞이고 스며야 하나로 뭉쳐지는 음식이다. 이처럼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예술을 나는 지지한다. 만다라 의식처럼 과정이 철저하고 의식이 끝나면 공유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그 느낌이 각인된다.
예술가는 붕괴와 균열의 틈을 메우는 흙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통합에서 이루어낸 작은 행위들은 철조망과 담벼락을 허물어내는 새로운 예술 작품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창의력과 소통의 능력을 지닌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신정부에서는 빛을 보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각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예술가 들이 성직자들의 수양과 같은 마음으로 지금까지 구축해온 예술작업들은 일반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낼 수 있다.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창의력이 살아있는 통합의 성공은 바른 뚫림, 곧 바른 순환의 예술이 될 것 이다.
공감대와 동질감을 느끼는 정부와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새로운 정부는 다양성 인정과 자유로운 어울림으로 새로운 예술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술가도 순수한 감성으로 무조건 지원이 아닌 바른 정책을 유도해내는 혜안으로 문화 창달의 새 예술의 도래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석용(문화비평가,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더 뮤직'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