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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세이레 새벽기도회)
첫째날
1월 1일(화) 1. 미스바로 모이라!
예배의 부름: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이제 주께서 새롭게 열어주신 한 해를 바라보며, 엎드려 베풀어주실 은혜를 갈망합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늘의 평강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실로 이 한해는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찬송: 297
본문: 사무엘 상 7:3-6
요절: 삼상 7:6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설교: "미스바로 모이라"
다 함께 드리는 기도:
두 세 사람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함께 있겠다 약속하신 주님,오늘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형편은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해드리는 아름다운 삶 살게 하옵소서.
앞으로 세 주 동안 열심히 모이도록, 모임 중에 온전한 회개와 용서가 넘치도록, 주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앞으로 21 일 동안 모이는 모든 모임과 만남에 성령
이여 강림하소서.
기도제목 2. 온전한 회개를 통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하소서.
주기도:
설교:
잘 타는 장작도 불속에서 꺼내 놓으면 금방 꺼져 버립니다. 하지만, 덜 마른 나무 토막도 화력 좋은 불 속에 던져 놓으면, 말라가면서도 불꽃이 되어 타오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홀로 떨어져 있으면 쉽게 지치지만, 믿음이 조금 약해도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힘과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가 "잘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 앞에 모일 때에 힘도, 지혜도, 믿음도, 사랑도 모여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역사도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모이기 힘들어도, 아무리 모이는 일에 장애물이 많아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며, 밤을 살면서, 기도와 찬양으로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수많은 박해를 경험했고, 또 다시 그보다 더 엄청난 박해가 다가올 것을 느끼고 있었던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간곡하게 권면한 것입니다.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참패를 당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리고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언약궤는 겨우 돌려왔지만, 그마저도 시골구석 기럇여아림으로 옮긴 후로 20년을 방치된 상태로 버려질 만큼 백성들은 신앙적으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여전히 블레셋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곤경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갈망하자,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3, 5)
그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체 없이 우상들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미스바로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종일 금식을 하며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9)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잃었던 땅들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이스라엘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지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삼상 7:12-14)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13)
온 역사와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모이는 족속마다 그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그 아버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모여 그 이름 부르며 은혜를 구하는 무리들 가운데 하나님은 다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미스바 언덕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던 것처럼, 2,000 년 전 마가 다락방에 120문도가 모였던 것처럼,
100년 전 조국의 멸망 앞에 절망에 빠졌던 이 땅의 백성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구했던 것처럼,
이제 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2007년의 신년 벽두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민족의 위기 가운데 절망하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언약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오늘 우리가 이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들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랍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정황이 결코 쉽지만은 않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니, 우리가 반드시 그 분 안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 분 안에서 반드시 위대한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 물을 길어 제단에 부으라.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고 말씀했습니다.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제단에 물을 부었던 것과 같은 상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세 주 동안 우리들의 눈물이 제단 앞에 뿌려져야 하겠습니다. 땀방울이 뿌려져야 하겠습니다.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처럼 되셨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이번 세이레 동안 하나님 앞에 우리를 통해서 드려져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살고 가족이 살고 민족과 나라가 살기 위해 특별히 구별하여 정한 세이레 새벽기도회입니다.
나 자신을 바쳐 드리는 아름다운 헌신의 기도회가 될 때, 주께서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우리에게도 똑같이 부어 주실 것입니다.
2. 금식하라.
민족의 위기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했습니다. 추악한 죄악을 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기 위해 금식했습니다.
조국의 멸망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경건한 일꾼들은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죽음을 각오한 결단의 표현입니다.
생명과 에너지의 원천인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은, '오직 주님 당신만 믿습니다.'는 철저한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쫓아내시면 나는 갈 데가 없고, 다만 죽을 뿐입니다.'는 배수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금식은 위대한 것입니다. 2013년, 민족사상 이만큼 중차대한 시기가 없었을 만큼 위기와 전환의 해를 맞으면서, 지금이야 말로 금식할 때입니다.
멸족의 위기 앞에서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던 에스더의 기도를 본받을 때입니다.
3.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분명한 고백을...
비우지 않은 잔에 새 물을 채울 수 없듯이, 비우지 않은 심령에 성령이 임하실 수 없습니다. 더럽고 추한 오물로 가득한 심령에는 성령의 기적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100 년 전 대부흥 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1903년 8월 로버트 하디 선교사님의 개인적 회개, 그것도 철저하고 구체적인 죄의 공개적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무능함을 철저하고도 구체적으로 고백했습니다. 그 자신이 표현했듯이 이것은 참으로 괴롭고 창피한 일(painful and humiliating)이었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적당히 두루뭉수리로 고백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분명하고 똑똑하게 무엇을 어떻게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를 온전히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세이레 새벽기도회에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제 2 의 대부흥운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00 년 전 마가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 100년전 장대현 교회에 임하셨던 똑같은 성령님, 이제 절체절명의 민족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우심을 갈망하는 우리 가운데 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놀랍고 위대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온전한 회개와 아름다운 헌신을 통해서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문:
존귀하신 주님, 절망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기도의 영을 더하시고, 모일 수 있는 끈기와 용기와 기대감을 주시며, 성령으로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둘째날
1월 2일(수) 2. '너는 이제 끝났다.'
예배의 부름: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잊지 않고 매순간 의지하며 살도록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 안에 참된 구원을 경험하기를 원하오니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177 장
본문: 다니엘 5:17-28
요절: 다니엘 5:27
설교:
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와 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삶이 온전한 삶이 되게 하시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거룩한 삶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제목 1. 성령이여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하소서.
기도제목 2.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기회를 잃지 않게 하소서.
주기도:
설교:
"너는 이제 네 인생은 끝났다. 세상을 떠나라.'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당신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청천벽력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상 하나님께서 한 황제에게 내린 말씀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황제 벨사살 왕이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들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서 진탕 놀 때에, 공중에서 나타난 손가락들이 왕궁 촛대 맞은 편 석회 벽에 글자를 쓰자 얼굴빛이 변하도록 놀라며 번민했지만, 마땅히 그 뜻을 풀어 설명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그에게 밝히 그 뜻을 드러내 설명하는 데, 그 말씀이 본문 17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글은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인데, 뜻은 '네 시대가 끝났다. 너를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다. 그래서 너의 나라를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다니엘에게 의해 해석되어 뜻을 알고난 바로 그 밤에 벨사살 왕은 암살을 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세상에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는 죽는다는 사실이요, 가장 불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들의 삶만큼 불확실한 것이 있을까요?
오늘도 이 좁은 땅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평균 50여명이 넘을텐데, 그 중 어느 한 사람도 아침에 출근하면서, 자신이 다시는 집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것을 생각조차 해 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든 이들은 다 어제처럼 오늘도 나는 분명하게 집으로 살아서 퇴근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중에 50여명은 교통사고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가장 확실한 사실인 죽음에 대하여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임이 분명합니다.
윌리암 글래드스톤이 영국의 수상이었을 때 하루는 아주 가까운 친구의 아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저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할 것입니다.’
그 때 수상이 대답했습니다.
‘훌륭하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예, 저, 그 다음에는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그래? 좋군. 그 다음에는’
‘예, 그 다음에는 국회의원에 입후보해서 의원이 되겠습니다.’
‘좋네. 아주 좋아. 그 다음에는...’
‘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대로 내각의 일원이 되어 일하겠습니다.’‘아주 좋네. 암. 야망이 있어야지. 그 다음에는’
그러자, 청년은 우물쭈물 하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수상각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 다음에는 각하처럼 수상이 되어 나라와 여왕페하를 위해 혼신을 다 해 살겠습니다.’
‘
그래? 아주 좋네. 그 다음에는...’
‘
그 다음에는 뭐 나이가 늙으니까 은퇴를 해야 하겠지요.’
‘그래. 아마 그래야겠지. 그 다음에는...’
자꾸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묻는 수상의 질문에 당황하면서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언젠가 저도 죽어야겠지요.’
‘맞아. 죽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 그 다음이라니요? 그 다음에는 모르겠는데요. 아직 생각 안 해 보았습니다.’
그 때, Gladstone 수상이 말했습니다. ‘이 보게 젊은이, 자네 어리석은 사람일세. 집에 가서 자네 인생을 끝에서부터 다시 한번 더 잘 생각해 보게.’(Young man, you are a fool. Go home and think your life through from its end.)
2,000년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식 설교에서 Gillespie 전 총장은 앞의 예화를 든 후에 다음과 같이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2000 학년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는 여러분들 또한 이 어리석은 젊은이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Ph.D 학위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느 학교의 교수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책도 여러 권 쓰고 존경받는 학자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뭡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D.Min 학위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뭡니까? 훌륭한 목사님이 되시겠지요. 그 다음에는 존경도 받으실 거구요. 그 다음에는 일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은퇴하시겠지요. 그 다음에는... 잊지 마십시오. 그 다음에는 And what then?'
인생을 나의 종말에서부터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 앞에서 어떤 모습일 지를 생각하며 오늘의 삶의 의미와 자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죽음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을 저울질 해 보시라 그 말입니다.
벨사살 왕은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교훈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우주의 황제이신 하나님이 주신 시간, 재물, 건강, 권력, 그 모든 것을 그 주인 앞에서 겸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그는 결국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보니, 너무도 모자라서 '이제 그만' 을 선고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평양대부흥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하디 선교사의 개인적 회개는 바로 이 본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합니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남감리교 한국선교회 제 7차 연례회의 회의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나의 사역을 돌아보고, 도표화한 결과물들을 내가 기대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모든 것 위에 'TEKEL'(데겔)이라는 한 단어가 기록되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측량해 보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오늘 아침 새벽, 여러분의 삶을 한번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사랑은? 여러분의 인내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은? 여러분의 거룩한 삶은? 혹시 주께서 여러분의 삶을 달아보신 후에 '이제 그만' '너의 삶을 달아보니, 너무 모자라는구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디 선교사가 그 때, 그냥 후회하는 마음으로 지나쳐 버렸다면, 평양 대부흥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경고하심 앞에 철저하게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교만과 사랑의 부족을, 영적 능력의 부족을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참회의 고백'을 회중 앞에서 했을 때, 성령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이 땅에 일으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 우리는 바로 그 중요한 오늘을 다시 시작합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이 만나는 바로 그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일'입니다.
그 일이 과연 하나님께서 저울질 하실 때에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까?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침 이제 다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그 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십시다.
그 분의 저울에 달릴 때 어떤 평가를 받을 지 진지하게 우리 자신의 인생과 삶을 평가해 보며, 그 분께서 '이제 그만' 하시기 전에, 눈물 뿌려 회개하며, 그 분의 긍휼을 구하십시다.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마지막 선고와 함께 그 밤에 암살당해 죽은 벨사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하심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회개하여 이 소망을 잃어버린 조선 땅에 엄청난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하디 선교사님처럼, 위대한 출발을 시작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돌아보며, 기회 주실 때에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 드리며 회개함으로 자신도 복되지만, 나로 인하여 역사와 민족 앞에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문: 회개하는 자를 멸시키 않으시는 하나님, 주님의 저울에 달릴 때, 나의 삶이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령님이여,
주님의 마지막 선고를 듣기 전에 내 삶에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죄악들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영적 민감성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허물과 죄들을 고칠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셋째날
1월 3일(목) 1. 돌아오라, 내가 고치리라
예배의 부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만큼 망가져 버린 인생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은혜 주실 줄 믿는 마음으로 엎드리오니, 주여,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찬송: 331
본문: 예레미야 3:19-22
요절: 예레미야 3:22
설교:
다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의 배신을 용서하소서. 우리의 영적 망각을 용서하소서. 이제 주 앞에 나아가오니, 우리를 온전한 당신의 자녀 삼아 주옵소서.
기도제목 1.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한 구체적인 죄가 생각나게 하
소서.
기도제목 2. 이제 그 사랑 안에 온전히 살게 하소서.
주기도:
설교:
"모함 받아 본 적 있습니까? 친구에게 배신당해 본 적 있습니까? 혹시 사기 당해 본 적은 있습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혀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느분이 겨우 열 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꽤 많은 유산을 남겨 주셨는데, 삼촌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와 우리를 속이고, 모든 재산을 갈취했습니다.
3년이 못 되어 우리는 알거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 년 동안이나 우리는 만져 보지도 못한 그 엄청난 부채를 갚기 위해 고생을 다 해야 했습니다.
자그만치 20 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삼촌이 우리에게 저지른 그 비정한 일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내 평생에 결코 삼촌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는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forgiving and forgetting'라는 글에 나오는 일부분입니다.
여러분 정말 배신당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도 믿었던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 때의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우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뼈아픈 배신을 당했다고 선포합니다.
멸망해 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울부짖던 맨발의 선지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던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심판과 정죄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배신당한 이의 뼈아프고도 간절한 사랑의 고백이요,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간곡한 초청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배신한 이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가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조건 없이 용서할 테니,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1. 너희는 나를 속이고 떠나 배신한 아내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이라.'(14)
여호와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은 그들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떠나, 세상으로 나아간 간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기에 주었던 모든 선물들을 가지고 오히려 세상의 찰나적인 것들과 짝하며 간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탄식하며 외칩니다.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20)
2. 너희는 배역한 자식들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내 자녀로 삼고 허다한 나라들 중에서 아름다운 기업인 이 땅을 네게 주리라'(1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놀라운 특권을 저버렸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과 은혜의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헛된 세상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저 헐벗은 산에서 애곡하면서도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21).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토록 처절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 애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내인 너희에게 버림 받은 남편이다.' '나는 자식에게 버림 받은 불쌍한 아버지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저주과 심판을 퍼붓지 않으시고 오히려 간절한 심정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22)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이 만났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상상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몇 백 번 멸망시켜도 마땅할 타락한 유대백성들 앞에서도 계속해서 당신의 그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을 고백하시면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호소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고, 기꺼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의 품에 안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언제까지 제멋대로 사시겠습니까?
언제까지 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을 외면하면서 세상의 소리에 끌려서 찰나적인 것들만 추구하면서 사시겠습니까?
언제 돌아와 그 사랑의 아버지 앞에 엎드리시겠습니까?
전 한국 대학생 선교회 총재이셨던 김준곤 목사님 고향마을에 6.25 사변 때, 공산당이 난동을 피워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마침, 목사님은 마을 뒷산에 피신해 화를 면했다가, 후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돌맹이로 머리를 맞아 쓰러지셨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입술 사이로 "준곤아, 도망하라" 는 음성이 들리는데, 뇌는 헤어져 버린, 거의 반쯤은 다 죽어 버린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도망가라고 외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장면 앞에서 김 목사님은 심한 전율을 느꼈답니다.
청년 시절 제가 이 간증을 들을 때마다 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맺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않으시랴? 입을 만드신 자가 말씀하지 않으시랴? 귀를 만드신 자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랴? 아버지의 그 끔찍한 사랑을 만드신 그 하늘 아버지께서 어찌 우리를 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으시랴?"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그 끔찍한 사랑을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어버이들의 마음속에 만들어 주신 그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인생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지으신 하나님, 그 사랑의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죄물로 죽이실 때에, 어찌 그 가슴이 터지지 않으셨을까?
그 아들이 예수께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실 때에, 어찌 그 가슴이 녹아내리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이 손과 발에 못 박히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가슴에 못을 박고 계셨다."
사도요한은 선언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한 일서 3.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 일서 4.9-10)
이제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가 탕자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로 그 남편의 사랑을 배신한 간부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아버지 사랑을 배역한 자식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돌아가십시다.
그 분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 그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백하십시다.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22)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기도문: 아버지의 사랑을 잊고 떠났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라도 돌아가오니, 아버지여 저희를 받아 주시고, 더 이상 헐벗은 산에서 울부짖는 유리방황하는 영혼들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넷째날
1월 4일(금) 4.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예배의 부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그 사랑의 품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며,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복된 시간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332
본문: 요나서 3:1-10
요절: 요나 3:10
설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다 함께 드리는 기도: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 가장 절망적인 선고 앞에서도 하나님 안에는 여전히 소망이 있음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매순간 주님의 은혜만을 붙잡고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신실한 자녀들이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늦었다고 생각될 때에도 철저하게 회개하게 하소서.
기도제목 2. 분열된 한국 사회가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기도:
설교:
선고 이후에 내리시는 은혜
하나님의 심판은 선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법에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 판결한 문제에 대하여는 재론할 수 없는 것이 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다릅니다. 분명코 죽음을 선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돌이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선고 자체를 무효로 돌리실만큼,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엄청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니느웨 성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원수의 나라 니느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명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고기 뱃속에서 억지로 3일 동안 회개를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원수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흘을 걸어야만 다 돌 수 있는 그 큰 성 니느웨를 하루 동안만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단 한 마디도 '하나님의 긍휼이나 용서'에 대한 힌트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이미 확정된 심판의 선고만 준엄하게 외칠 뿐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가능성도 전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나의 메시지에는 '성의'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다만 멸망에 대한 절망적 선고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니느웨 성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사흘을 걸어야 할 큰 성 니느웨 성을 하루만 다니면서 심판선언을 했던 그 성의 없는 메시지, 도성의 한쪽 귀퉁이에서 선포되었던 그 적대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 사람들은 말씀 앞에 엎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도자들은 더욱 회개에 간절하고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일반백성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들까지, 먹을 것만 금한 것이 아니라, 마실 물까지도 금했습니다.
그리고는 회개의 표현인 베옷을 입히되, 사람들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입히고, '힘써 부르짖어 기도하고 구체적인 죄악에서 떠날 것을 호소'했습니다.
놀랍고 철저한 회개, 개인적 감정을 뛰어 넘어서서 공동체적, 집단적, 구체적 회개였습니다. 지도자들의 간절한 신앙은 더욱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9절 상)
이들의 간절하고도 철저한 회개를 보시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리라 하셨던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10)
하나님은 결코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필귀정'이니 '인과응보'니 하는 사람들의 말이나 논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의미에서는 공평이나 공의가 아닙니다. 유대인 라비이자 구약신학자인 아브라함 헤셀은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사람들의 행한 그대로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서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죽음의 선고장을 받은 후에도 그 분 안에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소망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니 무덤 앞에 가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이제 지난 날 어떻게 살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이제라도 돌이키면 됩니다. 이제라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면 됩니다.이제라도 그 분의 은혜의 가슴팍으로 뛰어 들면 됩니다.
귀신들린 딸을 데려온 가나안 여인을 예수님은 너무도 박절하게 냉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여인의 울부짖음 자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다음에는 그 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냉정하게 뿌리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하신 말씀, '자녀들의 떡을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란 말씀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없는 엄청난 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토록 철저하게 박대하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외쳤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태복음 15:27)
이 한 마디가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마태복음 15:28)
사실 이 가나안 여인은 겉으로는 냉대하시지만, 예수님의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음을 믿는 확신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이방인을 차별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큰 사랑이 그 안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겉을 보고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속에 있을 사랑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그 사랑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 여인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어떤 이가 이 이방여인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해할 수도, 불평할 수도, 항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오히려 개로서 자족했고, 당연한 권리에서가 아니라,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겸손과, 그 부스러기로도 넉넉하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러면서도 결코 낙심하여 후퇴할 수 없는 인내를 갖추었다.
진실로 이 여인의 믿음은 위대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의 추악한 죄악을 보시고 견디다 못해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지만, 그들의 눈물과 회개를 보시고 생각을 바꾸신 그 사랑의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가나안 여인을 차갑게 냉대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막무가내로 그 품속으로 뛰어 들어 그 은혜를 구할 때에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라' 축복하시던 그 주님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100 여 년 전, 우리의 선배들이 그토록 처절한 민족적 위기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을 온전히 내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임하셨던 그 성령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체적으로 죄악을 쏟아 놓으며, 도우심을 구하십시다.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구하며 철저하게 죄에서 떠나기를 결단하십시다.
나부터,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구체적으로 공동체의 거룩성을 회복하기를 갈망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악한 길을 떠나 의의 삶을 살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문: 사형언도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온전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영원토록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할 죄악까지도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음을 믿고, 언제든지 주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바로 설 용기와 결단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섯째날
1월 5일(토) 5. 말씀을 사모하라.
예배의 부름: 살아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도 주님의 임재를 온전히 느끼며, 주님 안에서 하루를 출발할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241
본문: 느헤미야 8:1-12
요절: 느헤미야 8:9
설교: 말씀을 사모하라.
다 함께 드리는 기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도 그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먹여 주시고, 치료하여 주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제목 1.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켜 주소서.
기도제목 2. 한국교회들이 다시 말씀으로 부흥하게 하소서.
주기도:
설교: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보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 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들 앞에 펼쳐진 조국은 형편없이 망가진,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서 재건을 해 보지만, 해도 해도 일은 줄어들지 않고, 힘은 부쳤습니다.
겨우겨우 성벽을 중수하고 지도자들을 임명한 후에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새벽부터 내내 읽어 내려가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고, 그 뜻을 새기다가 보니,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앞에서 그만 감정이 북받쳐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9)
하나님의 말씀은 어둠을 비치는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마음을 고치는 양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을 변화시키는 소망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을 강건케 하는 신령한 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을 수술하는 날선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못과 죄를 훈계하는 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지팡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곳에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납니다.
어둠이 밝혀집니다. 부패한 것이 드러나고 더럽고 추한 것들이 잘려 나갑니다.
상처 난 심령이 치료를 받고, 절망한 영혼들이 소망을 얻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망적인 상황 중에 말씀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용기를 얻고 감격해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 상 위대한 신앙적 부흥운동은 언제나 말씀 연구로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는 시편연구와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깊이 연구하다가, '의신칭의'의 위대한 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종교개혁자들은 그래서 중요한 개혁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sola scriptura.(오직 성서로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4)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48:18)
인류가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 그 뜻대로 온전히 지켜 살았더라면, 결코 오늘의 자연이상의 문제, 질병의 문제, 불화와 전쟁과 고통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가 자신이 우주의 주인인 줄 착각하고 제멋대로 우주를 파괴하고 자연질서를 어지럽히다가 보니, 우리 인생들의 삶이 오늘날과 같이 피폐해진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제멋대로 살아가겠다는 인류의 오만과 잘못된 이기심이 우리 자신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와 고집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였고, 그래서 이 지구는 온통 이상기온과 이상현상들로 가득 차 인류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연계만이 아니라, 아름답게 지으신 이 세상 모든 삶을 추하고 악한 죄악이 관영한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겸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우려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겸손히 내 썩어질 육체의 건강만이 아니라, 내영혼의 깊은 소원에 귀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이제 민족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들으며 그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함께 모여야 하겠습니다. 레란드 왕이라는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세 가지의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첫째, 어디를 가든지 성경을 가지고 다닌다.
둘째, 매일 아침 성경 10 장씩 읽는다.
셋째, 성경을 읽지 않은 날은 식사도 하지 않는다.
미국의 글리브랜드 대통령은 취임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다 합니다.
“방탕했던 한 청년이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오직 성경의 위대한 힘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현명하게 되기 위하여 성경을 읽어라.
안전하게 되기 위하여 성경을 믿어라.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성경을 실천하라.
두려워 떠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7~8)
또, 시편기자는 고백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주님은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요8:51)
이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그 능력의 말씀으로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을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그 은혜를 갈망하십시다.
그 은혜의 말씀을 매순간 사모하며,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겨가는 위대한 말씀의 사자들이 되기를 노력하십시다.
그 말씀이 내 가정을 든든히 세워가며, 그 말씀이 이 땅, 이 백성을 온전하게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다.
어린 시절 여교사가 성경을 말할 때마다 ‘그것은 모두 우화이고 거짓말’이라고 믿으며 자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적이 좋아서 오뎃사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결국 1941년 19세에 장교로 임관되었는데 전쟁 수행 중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고통을 당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고국인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 뮤니히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휴지를 주워 난로불을 피우려다가 휴지에 인쇄된 문장을 읽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그 순간부터 그 짧은 말은 그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고, 결국은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들어가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작은 한 구절로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 말씀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도록 마음을 열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씀이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삶을 시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문: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영혼과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굳세게, 강건케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심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말씀의 역사 가운데로 인도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섯째날
1월 6일(주일) 6. 피 묻은 손을 씻으라
예배의 부름: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도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운 것은 저희들의 삶이 온전치 못한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럼 무릅쓰고 엎드리오니, 오늘도 은혜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187 장
본문: 이사야 1:15-18
요절: 이사야 1:16-17
설교:
다 함께 드리는 기도: 무한히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은혜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엎드리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다시 인쳐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제목 1.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온전히 믿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제목 2. 사죄의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주기도:
설교:
왜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 데도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왜 그리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실까?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열심히, 그리고 많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기도응답의 비결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무는 일입니다.
죄악의 담이 가로막혀 있어, 소통하지 못하는데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관계가 끊어졌는데 무슨 일인들 제대로 될 일이 있겠는가 그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죄의 담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먼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입니다.
진흙바닥에서 놀다가 온통 흙투성이가 된 개구쟁이가 집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엄마 밥 줘.’ 그런다고 어머니가 그냥 그대로 밥을 줍니까?
아무리 그 아들이 귀여워도 그 아이를 주방보다 먼저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손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야 비로소 밥을 차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삶을 온통 범벅 해 놓은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놓고는 결코 복을 부어주시지는 않는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9.1절 이하에서도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하나님이 무능하셔서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관심이 없으시고, 매정하셔서 나를 이대로 두고 보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의 담이 가리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죄악의 피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이사 왔을 때에 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고생을 했습니다. 주방에서 물을 받으면 화장실에서 세수를 못하고, 화장실에서 어쩌다가 물을 받으려면, 설거지를 못했습니다.
본래 이 동네에 물 사정이 본래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그냥 참고 몇 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다른 집들은 물이 아주 잘 나온다는 말을 듣고, 마당에 묻힌 수도관을 파 내보았더니, 수도관이 녹이 슬어 꽉 막혀 있었습니다.
마당의 수도관이 막히니까 대문 앞까지 넘치도록 물이 와 있었는데도 집 안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졸졸 흐르게 됩니다.
집 수도관이 녹이 스니까 대문 앞까지는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데도 저희 집 수도에서는 시뻘건 흙탕물만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는 수도관을 막고 있는 녹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내게 복을 부어 주시기를 원하셔도, 내 믿음의 수도관이 죄로 꽉 막히면, 내게 오는 축복은 그저 쫄쫄 흘러 들어올 뿐인 것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쳐도, 내 심령에는 오직 흙탕물 같은 절망과 두려움만 그득할 뿐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죄는 인생의 모든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 시켜 원수지간이 되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우리를 자기 노예로 삼아 버립니다.
죄는 우리에게 잠깐 동안 달콤한 쾌락을 주고는,
평생을 대가를 치루며 고통 속에서 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놀라운 행복을 가로막은 모든 허물과 죄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과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허무십시오.
마음속에 숨겨진 찜찜한 부분들, 부끄러운 숨겨진 죄들을 십자가 앞에 다 내어놓고 용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생수가 삶 속에 넘치시기를 빕니다.
성군 다윗은 국가의 기틀을 어느 정도 다 닦은 후에 이제 변방의 작은 전쟁들은 막강한 군대에게 맡기고 오랜만에 혼자 왕궁에서 평화와 안식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왕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그를 불러들여 범하고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어도 그 마음 속 심령이 어떠했겠습니까? 어찌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어찌 그가 가슴을 찢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 혼자 고통당하던 그 심정을 다윗은 고백합니다.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편 32:3-4)
스위스의 의사 폴 뜨르니에르의 임상보고에 보면, 한 여인이 만성 류마티스에 걸렸는데, 어렵게 고쳐도 계속 재발이 되자, 여인에게 묻습니다.
‘당신 속에 뭔가 숨기는 문제가 없는지요?’
그 때 여인이 고백합니다. ‘결혼 전에 남자 친구와의 비밀스러웠던 관계가 지금의 남편에게 알려질까 봐, 두렵습니다.'
뚜르니에르는 그 여인에게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성경에서 자세히 공부하게 한 후에, 함께 기도했을 때, 그 여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게 되고, 후에 남편에게도 고백하고 남편의 용서를 받은 그 순간 그 지긋지긋하던 만성 류마티스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죄는 단지 마음과 정신에만 상처를 내지 않습니다.
마음과 몸을 아울러 피폐하게 만듭니다. 뼈를 녹아내리게 하고, 진액을 마르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울부짖은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 주께 아뢰지 않고 숨길 때에 내 뼈가 녹아내리고 마음은 괴로워 온종일 신음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양심을 하루 종일 내리 누르시고, 밤낮으로 나를 책망하시니 나는 여름 가물에 땅 메말라 바싹 타들어 가는 들풀 같았었습니다."
죄를 속에다가 감추고 뼈가 녹아내리며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툭 터놓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다윗은 너무나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이 엄청난 용서, 이 놀라운 속죄의 은혜를 받은 다윗은 감격해서 외칩니다.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하나님은 인생들을 심판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힙 8.12)
손에 묻은 피를 씻으십시오. 그리고 사랑의 아버지의 품속으로 뛰어 드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기도문: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습니다. 죄 많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그 넓으신 아버지의 사랑의 품속만 바라봅니다. 나를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일곱째날
1월 7일(월) 7.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예배의 부름:
찬송: 177 장
본문: 시 51:10-18
요절: 시 51:11
설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다 함께 드리는 기도: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기보다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긍휼의 하나님, 우리 속에 숨겨진 죄악을 온전히 내어 놓기를 원합니다.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받아 주옵소서. 용서하여 주소서.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구체적으로 허물과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기도제목 2. 북한 동포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기도:
설교:
독일에 한 꼬마가 있었습니다. 장차 자라서 목사가 될 꿈을 꾸면서 가끔씩 빈 의자에 올라가서 목사 흉내를 내며 설교도 했습니다.
노래에도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서 전혀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수도원 합창단원이 되었고, 음악 감상에 대한 열의도 대단해서 앉은 자리에서 바그너의 작품 로엔그린을 계속해서 열 번이나 들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 철학 예술 등 각 방면의 책을 즐겨 읽었으며, 재능 또한 대단했습니다.
동물들을 사랑해서 군대에 있을 때에는 참호를 파고 은폐하여 있는 곳으로 작은 강아지가 한 마리 다가 왔는데, 그 강아지를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고 위했는지, 어느 날, 누군가 그 강아지를 훔쳐 가자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도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한번은 가난한 사람에게서 달걀 두 개를 받아 쥐고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고, 어린 꼬마가 의자에 머리를 부딪쳐 울자, 자신도 그 의자에 머리를 부딪치며 어린이를 위로할 만큼 자상한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랑에 충만했던 사람,
도저히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사람이 나중에, 600만 명의 유태인을 죽이고,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세계 제이차 대전의 도발자, 저 악명 높았던 아돌프 히틀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을 못했을 것입니다.
악마 같은 삶을 살았던 히틀러의 뒤에는 그렇게도 아름다운 한 인간의 선한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속에는 선과 악이 언제나 공존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선해 보여도, 우리 속 삶의 깊은 내면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죄악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습니다.
유대 역사 속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앙인이었던 다윗이, 남의 아내를 겁탈하고는, 그 엄청난 죄를 어찌할 줄 모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회개할 때 쓴 시가, 오늘 본문인 시편 51 편으로 시편에 나오는 7 개의 참회시 중에 가장 대표적인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청년 다윗을 택하실 때에,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자기보다 서너 배 더 큰 골리앗을 향해 돌맹이 몇 개를 들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싸우러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종, 사울 왕을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 다녔습니다.
다윗이 평생에 수많은 시편들을 남겼지만, 그 모든 시들의 주제는 언제나, 자신의 인생을 이끌고 계시는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자기 지위가 높아지고 살기 편해지고, 만사가 제 뜻대로 잘 되어가자, 그 순수함을 상실했습니다. 열심을 잃었습니다. 사랑이 식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인간이 그 순수와 순결을 잃을 때 반드시 나타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죄악 된 삶입니다.
불순종과 거짓과 간음과 타락과 부패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간통사건입니다.
이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고 난 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 본 다윗이 통회하며 자복하며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님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주님의 크신 자비하심을 따라 나의 죄를 없애 주소서. 내 죄를 말갛게 씻기시며, 내 죄를 깨끗이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아돌프 히틀러가 우리와는 전혀 질이 다른 어떤 특별한 악당이라고 생각지 마십시다. 다윗과는 달리 우리는 순결하고 선한 사람들이라, 적어도 간통을 범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자만하지도 마십시다.
우리 속에도 히틀러가 저지를 수 있었던, 죄의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다윗같이 더럽고 추한 성적 유혹과 죄악의 씨앗이 우리에게도 숨어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함과, 깨끗하고 순결한 생각을 잃어 버리기 시작할 때, 그런 엄청난 죄악의 뿌리들은 우리들을 금방 타락의 자식으로 바꾸어 놓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수많은 부정부패들이 들쳐 지고 있습니다. 다 못 되고, 심판받아야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렇게 손가락질 하는 우리가, 만일 그들의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우리는 그들과는 달리 완전히 깨끗했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것입니까?
개혁하지 말자는 말이나 부정부패를 철저히 뿌리 뽑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만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의인인체 하며, 자신들 속에 들어 있는 더럽고 추한 모습은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 속에 감추어진 더럽고 추한 모습들을 돌아보며, 우리 모두가 그 모든 부패와 사회악의 공범자들이었음을 철저히 회개하며 바로 서야 하겠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죄를 안 지은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한 것을 깨닫는 순간, 철저히 회개하고 바로 서려고 온 힘을 다 기우린데 있습니다.
또한 그의 위대함은 죄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고백한 데 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범죄하고 나니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도 내 힘으로 될 수 없음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이미 더렵혀진 마음은 악하고 더러운 생각만 가득 찰 뿐입니다.
이미 거짓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영에는 아무리 정직한 생각을 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만들어 주옵소서.'
이로 보건대, 참된 회개는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외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님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11)
그리고는 처절하게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14)
고훈 목사님의 '고백'이라는 시입니다.
세상이 이토록 슬픈 것은 내 안에 슬픔이 가득한 탓이다.
세상이 이토록 괴로운 것은 내 안에 괴로움이 가득한 탓이다.
세상이 이토록 험한 것은 내 안에 험악함이 가득한 탓이다.
세상에 이토록 분열하는 것은 내 안에 분열이 가득한 탓이다.
세상이 이토록 미운 것은 내 안에 미움이 가득한 탓이다.
세상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은 내 안에 사랑이 가득한 탓이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내 안에 아름다움이 가득한 탓이다.
실로
미움과 사랑, 불행과 행복은 너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내 마음의 투영입니다.
오늘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 지 정직하게 돌아보며, 이 마음속의 죄악들을 주님 앞에 온전히 정리하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새 마음을 가지는 것도 우리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니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주 앞에 나아가 긍휼을 구할 때, 주께서 우리 속에 새 마음, 정직한 영을 만들어 주시고, 그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다시 한번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인을 쳐 주옵소서.
기도문:
우리 마음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내 속에 있는 죄의 뿌리들을 살펴 주옵소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뿌리들을 뽑아 주시고, 온전한 마음, 정직한 영으로 주님을 섬기게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