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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과 수용의 영화 언어 찾기 40년/邊仁植論
장석용(영화평론가)
한국 최초의 본격적 영화이론서를 내었던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邊山 변인식의 평론작업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영화이론의 정착과정과 그 미래를 살펴본다. 그와의 대화는 20년이 넘게 동참, 참여, 관찰과 동지애 등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개인적으로 영화 평론가들 중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어 그의 구술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이 원고를 마련해 본다.
이 글은 변인식과(의) 1. 영화 평론 입문 2. 『영화예술』3. 소형·단편 영화 운동 4. 동서영화 연구회 5.‘현대영화비평가그룹’활동 6. 계간 『영상시대』7.『영화평론』발행인 8. 복간 『영화예술』9. 저술 10. 연보 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고유명사나 당사자가 붙인 제목이 요즘과 달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그대로 사용한다.
영화평론가 안병섭은‘영화 평론가의 등용문- 영화평론가의 등단제도를 중심으로’(1993년 5월 격월간 『영화』 30∼32쪽)라는 글에서
(前略) - 「영화 평론의 필요성이 절실하던 60년대 몇 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영화평론 부문을 모집했다. 일부의 경우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으나 서울신문은 제 1회인 1968년 변인식이 《한국문예 영화의 허점》으로 등단했다. 그 후 洪 波도 이 관문을 통해 데뷔했다.
이영일이 발행하는 『영화예술』은 그 보다 앞서 추천 식으로 신인평론가를 등단시켰다. 1965년 변인식이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론》, 곧 이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으로 추천완료 후 서울신문에 도전한 것이다. 그 후 『영화예술』은 몇 명 더 신인 평론가를 배출했다.
그러다가 서울신문사 발행의 스포츠서울이 신춘문예에 영화평론 부문을 신설했다. 서울 신문 본지의 것이 폐지되고 스포츠지로 바뀐 것이다. 80년대의 1회에 지금 동아일보기자 박제균이 당선되었고, 88년 박평식의 《사랑, 그 인간 구원의 미학-배창호론》이 당선되었다.
『영화예술』복간 후 다시 2회 추천제를 실시하여 90년 4월 장석용이 《뉴 저먼 시네마의 형성과 그 작가들》로, 92년 8월 채명식이 《때깔 하얀자들이 벌인 전쟁 - 하얀전쟁론》을 추천 받았으나, 이미 영화 비평 활동을 하고 있어서 1회 추천으로 평론계에 등단했다. 그리고 조혜정이 91년 9월 《알렝레네, 영화 시간 개념》과 11월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실존의 영상,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2회 추천을 마쳐, 영화 평론계에 등단했다. 이 두 개의 정식 등용문이 영화 평론가가 되는 관문인 셈이다.」라고 한국의 영화평론 등단에서 변인식의 위치를 자세히 적고 있다. 결국 변인식은 전문지 추천과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으로 양수겸장(兩手兼將)의 행운을 거머쥔 셈이다.」라고 한국의 영화평론가 등단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1.영화평론가 입문시절
○ 성장 배경과 영화 평론가 데뷔
변인식은 1938년 4월 24일 서울 혜화동에서 변태순과 구복길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혜화 유치원을 거쳐 혜화 초등학교 6학년을 다니던 열 세살 소년 시절 6.25 동란을 맞게 된다. 1951년 1.4 후퇴때 그는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피난, 그곳의 남부민 피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복 중학교에 입학, 중3때 서울로 환도, 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53년 여름. 그는 3년 간 부산 피난시절을 끝내고 그립던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열 여섯 짜리 소년이었다. 마침 어렸을 적부터 살던 동리인 혜화동에 위치한 보성 고교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 학교의 위 운동장은 산기슭을 깍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사흘 간격으로 밤마다 영화가 한 두 편 씩 상영되었다.
미군들을 위문하기 위해 본토나 일본에서 직송해온 필름들이어서 시중에서는 개봉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불청객들이 운동장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이 아니라 철조망 밖 산언덕에 백 여명이 죽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물론 번역 자막이 있을 리 없었건만 액션 영화의 경우 대강 줄거리를 더듬을 수는 있었다. 대부분이 액션영화 아니면 멜로드라마였다. 이때 본 영화들이 100편 가까이에 달하였다. 변인식과 혜화 유치원, 혜화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이충한도 단골 관객이었는데, 그는 후에 중견언론인이 되어 서울 YMCA 영상문화 위원장직도 맡아서 일했다.
그 때 사춘기를 갓 넘겼거나 아직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6.25 전쟁이 가져다 준 정신적 폐해는 오랫동안 정서적 공동 현상을 가져왔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컴컴한 도서관인 극장을 찾아가 열심히 영화를 봤다. 그것은 현실의 아픔을 꿈이라고 불리는 영화로 대체하고자 하는 일종의 도피 기회였기도 했다.
이 때 그가 본 영화가 『애수』, 『망향』, 『폭풍의 언덕』, 『카사블랑카』, 『역마차』, 『황색 리본』, 『황야의 결투』, 『싱고아라』등 이었고, 영화라는 대중 오락매체에 대한 개안을 시작한 시기였다.
그가 더욱 정진하여 영화에 매료되어 영상의 세례까지 받은 시기는 경복 고교 시절이었다. 故 박판길 교수가 당시 음악 교사로 부임 이따금 영화이야기를 들려주던 때였다. 장 콕도 의 『비련』, 『미녀와 야수』를 비롯한 프랑스 영화와 『자전차 도적』, 『종착역』같은 이탈리아 영화들을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는 소질이 있었다. 전국 아동 미술 실기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 2등 상을 탄 적도 있었기에 자연히 화가를 지망했었는데, 결국 ‘움직이는 그림’ 인 영화 쪽과 관련을 맺게되었다. 경복고 시절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허리우드 키드’로 개봉 첫날 첫 회에 영화를 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던 지독한 영화광이었다. 이 때 키드들은 앉은 자리에서 영화제목과 영화감독 100명 외우기 등 매니아를 자부했다.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배상덕 (미국명 마이클 배)은 1988년 미국 직배사인 UIP 한국 지사장이 되어 신토불이 對 할리우드産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는 고려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1958년 최초의 영화 서클인 <영상> 동인회를 조직 활동했다. 이 무렵 『영화예술』에 영화평 『열쇠』(캐롤 리드감독)를 기고했다. 그는 대학신문에 영화 평론을 기고하는 한 편 유현목, 이강천 등 현역 감독과 이 영일, 노 만 등 영화평론가를 초청해서 진지하게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었다. 그 후 이들 동인들은 사회에 진출 각기 영상 매체와 연관을 맺었다. 이 유황과 박 성조는 시나리오, 유 호석은 다큐멘터리 영화, 유길촌은 연기와 연출, 그리고 변인식은 대학졸업 후 이 영일이 주간으로 있던 영화 전문지 『영화예술』을 통해 평론 ≪영화 현실과 포토 제니-이탈리안, 네오 리얼리즘과 한국영화≫(1965년,6월호),≪침식당한 사랑의 신화-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1965년, 7월호)
이 추천되어 영화 평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1968년 서울신문사 주최 신춘문예 제1회 영화 평론 부문에서 논문 '한국 문예 영화의 허점' 이 당선되었다.
변인식의 신춘문예 제1회 영화평론 당선 축하연이 1968년 1월 18일 서울 무교동 소재 호수그릴에서 성황리에 베풀어졌다. 이 날 모임에서 고대 박성의 교수(국문학자)와 평론가 이 영일이 축사를 했다.
○ 변인식과 ‘영화 『화분』 논쟁’(1972년 3월 9일∼4월 1일)
영화 『화분』 논쟁은 제 9회 청룡영화상 심사에서 이 작품이 ‘한국 영화의 보수성에 눌려 본격적인 검토도 받지 못한 체 밀려났다’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심사위원 유한철씨의 ‘청룡 영화 심사이론에 답한다’, 하길종 감독의 반론 ‘영화를 보는 눈’, 그리고 영화 평론가 변인식의 ‘영화적 색맹성’으로 이어지는 『화분』 논쟁은 현대영화를 둘러싼 보기 드문 영화 논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한국논쟁사』,편자 손세일,1976년)
○ 첫 번째 평론집 < 영화미의 반란> (1972년) 발문
※ 아래 글은 1970년대 말 지독한 영화 불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안고, 영화예술화 운동인 ‘영상시대’를 주도했던 하길종 감독이 동인이던 평론가 변인식의 첫 번째 평론집 『영화미의 반란』 의 발문 ‘인식과 스핑크스’를 통해 표현된 끈끈한 우정과 영화사랑에 대한 獻呈辭 이다.
「인식을 대할 때마다 나는 스핑크스를 생각한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 인 것이 무어냐라는 수수께끼를 내고 바른 대답을 주지 못하면 죽이곤 했던 고대 테베시의 괴마 같은 인상을 그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그의 참 모습은 테베시의 괴마처럼 우악스럽거나 이질적인 형상만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시선은 냉정하며 예지에 가득차 있으며 그러나 우울한 것이다. 인식은 항시 침묵하나 그의 스핑크스적 침묵 밑에 도사린 번뜩이는 비평정신은 점차로 메띠에 의식 속에서 넓고 곧바르게 성장한다.
내가 인식을 처음 만난 것은 여름비가 죽죽 내리는 1970년 여름, 지나가는 행인들이 넓고 큰 유리창을 통해 환히 보이는 명동의 코지코너 찻집이었다. 그때 그는 창가에 혼자 앉아 꼭 스핑크스 같은 표정을 하고 창문을 통해 행인들을 고독하게 들여다보고 있었고, 승옥이 나를 소개하자 그는 눈을 끔벅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창 밖으로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인식은 불쑥 하형은 바른 답을 압니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스핑크스 같은 친구.
그 날 우리 셋은 의기투합하여 맘껏 떠들어 대고, 서로가 감추어 둔 얼굴을 조금씩 공개했다. 나는 줄곧 인식이 무엇인가 짙게 갈구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토해내지 못하는 아픔을 읽었다. 후에야 그의 모습이 바로 시네마 부재의 한국 영화계에 대한 유능한 젊은 평론가의 부조리한 표정이며 동시에 방화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한 비평가의 고뇌의 초상임을 알게 됐다. 인식은 과묵하고 성실하다. 그가 유능하고 젊은 영화평론가라는 이유만이 아닌 그의 책임감과 끈질긴 집념은 인식을 좋아하는 그가 『映畵美의 반란』이란 한국 영화비평계의 유일한 평론집을 소리 없이 엮어냈다. 외국어로만 된 비슷한 책들을 대해 온 나는 인식이 그저 고맙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이 낯설은 영화 비평집이 내게 주는 감흥은 고마움과 그리고 그의 가장 의젓이 서 있는 불꽃같은 정신의 고귀함 같은 것이다. 이 책자에 알알이 담겨져 있는 투박한 시 정신, 번뜩이는 비평정신은 분꽃을 피우는 피리소리마냥 면면히 흘러 다시 뜨거운 사랑을 우리 모두가 주게 한다.
나는 이제 그가 옛날의 찻집에서와 같이 스핑크스와 같이 스핑크스의 질문을 한다면 쉽게 답할 것이다. 답변의 하나는 ‘여자’,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계가 이 엄청난 허상의 테두리에서 과감히 벗어나지 않는 한 인식의 질문에 아무도 하나의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변인식은 《내가 가는 이 길 - 영화, 그 감성과 이성의 오버랩》(1990년,4월『현대해상』)에서 “내가 영화 비평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은 미국 영화의 오락성과 유럽영화의 예술성이 감수성이 강했던 10대시절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첫 번째 영화 평론집 『映畵美의 反亂』(1972,태극 출판사)의 서문 《영화 아웃사이더의 변》에서“마침 그 해(1960년)에 제 3집을 꾸민 이 영일(평론가)씨 주재의 『영화 예술』誌에 글이 실릴 기회가 있었다. 캬롤·리드에 대한 몇 줄의 평문이 나로 하여금 ‘영화 비평의 길’에 오르는 비자 구실을 할 줄은 그 당시 몰랐던 것이다.”라고 적고있다.
변인식의 영화평론은 1960년대부터 2001년 현재까지 40년에 걸쳐 대략 5기로 분류된다.
①제1기/1965년~1972년 (8년) ②제2기/1972년~1979년 (8년) ③제3기/1979년~1985년 (7년)
④제4기/1986년~1994년 (9년) ⑤제5기/1995년~2001년 (7년)
◇ 제1기
변인식은 한국에서 발행된 영화전문지 『영화 예술』이 최초로 실시하는 ‘영화 평론’모집에서 제 1회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 같은 해 창립(1960.11.10)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창립회원으로 참가하였다.
창립회원은 이영일(회장), 김종원(총무간사), 노 만(기획간사), 김정옥, 최일수, 황운헌, 허 창, 이진연, 변인식, 최성규 등 10명이었다.
이 기간 중 서울신문 신춘문예 제 1회 영화평론 당선 (심사위원 김정옥) 되었다.이 기간에 발표된 평론 중 《영화 평단은 자유항인가-비평의 모랄과 순수성》(1965년 『영화 예술』 12월호) 는 당시 기성평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평론 II부 ‘단장의 마술사들’은 국내 일간지들의 리뷰나 단 평에 대한 비판, III부 ‘영화상과 품명위원제씨’는 국·내외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자격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 글로 인해 일부 일간 신문 영화평 담당기자와 껄끄러운 관계가 한동안 유지되기도 하였다.
◇ 제2기
한국영화 평론계의 첫 번째의 본격적인 평론집 『映畵美의 반란』(1972년 태극출판사刊)을 출간한 것과 1972년∼1973년 『소형영화』(1권,2권) 주간을 맡아 발행한 것.
현대영화비평가그룹의 뉴스레터 『영화비평』(창간1호 1973.1.10) 『영화비평』(제2호 1973.12.10)을 발행한 것. 1976년 일간 스포츠 영화평 고정 집필,1977년 季刊 『영상시대』 (창간호), 1978년 『영상 시대』(제 2호)를 발행한 것.
◇ 제3기
1979년 『동서 영화 동우회 회보』(1호∼3호,1979년 4월∼12월) 발행과 동인지 『프레임 24분의 1』( FRAME ONE-TWENTY FOURTH) 에서 祝辭 ‘새 지평을 향해 떠나가라’게재 및 발행. 1980년 일간 스포츠 《인물 영화사》연재.
◇ 제 4기
1985년 『세계 영화배우 평전』(전 20권), 1986년 일간 스포츠에 ‘영화평’고정집필, 1989년 ‘한국 영화 70년 대표작 200선’선정위원, 1991년∼1992년 『영화 평론』(3호∼4호) 발행인
◇ 제 5기
1995년 제2평론집『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발간, 1995년 청룡영화제 제2회 정영일 영화상 수상. 1995년∼2001년 『예술 평론』발행 겸 편집인, 2000년 9월호 월간 『키노』 서른 명의 영화 평론가들로부터의 화두, 「90년대 한국영화의 화두,‘조랑말’」 집필. KAFAI에 영화평 『섬』(2000년 9,10월호) 게재, 국제 비평가연맹 한국 본부 회지 『영화 비평』에 영화평 박하사탕 게재(2001년).
변 인식은 영화평론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몇 가지 영화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고려대재학 시절 <영상> 동인을 통해 동아리에 참여하면서 [고대신문] 영화 동인지 등에 영화평론을 기고하였다.
변인식의 영화 평이 처음으로 기성 영화잡지에 게재된 것은 1960년 4월호 『영화 예술』 (主幹 이영일) 독자투고란에 실린 외화 『키이』(The key) 평이었다. 고대 <영상> 동인인 유호석이 같은 란의 외화 『흑과 백』평을 나란히 게재했다. 초기의 그의 비평 경향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비평을 여기에 옮겨본다.
「캬롤·리드의 신작 『키이』는 화란의 인기 작가 할도호의 베스트셀러인 『스테라』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국의 가장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디렉타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캬롤·리드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예리한 터치로 인간성의 탐구와 성격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2차대전의 풍설 속에 몸을 담은 바다의 사나이들. 대서양을 횡단하여 오는 수송선단의 끊임없는 S.O.S…. 독일 공군과 잠수함 U보트의 습격을 받아 항해 불능에 놓여 있는 화물선을 구출하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임무를 띈 예인선의 역할은 해양 적십자사라 할만하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예인선의 선장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에게 아파트 12호실의 열쇠와 함께, 한 아름다운 여인을 넘겨준다.
선장 필립·할바가. 그리고 크리스의 순서로 나타나는 이들에게 거의 중용에 가까운 태도로 봉사하고 있는 스테라. (소피어 로우렌扮)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의혹감. 어쨌든 스테라는 전투에서 시달려 온 사나이들의 휴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첫사랑인 필립의 환영을 떨구지 못하는 스테라에게 네 번째로 나타난 데이비드(월리엄 홀덴扮)에 대한 것도 예외 없이 무감각하였으나, 끝내는 새로운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이 풀롯이다.
이 스테라라는 여인의 절묘한 심리적인 상태는 『제 3의 사나이』에서의 봐리의 중용적인 애정관에도 통한다고 하겠다.
다큐멘타리에 수련을 쌓은 바 있는 캬롤·리드의 빈틈없는 쇼트처리는 구도의 정확성을 기
하고 있으며 특히 격렬한 해상 전투 신의 촬영은 박력을 더한 바 있다.
『공중 트라피즈』 이후 리드 작품에 나타나는 아메리카 적인 타협 성이 군데군데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전체적인 짜임이 스릴러 영화에서 느끼는 것 같은 긴장감속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보여주었다. 견습생의 과정을 지나 처녀 지휘를 하는 풋내기 선장. 홀덴의 약간 거북스러운 위엄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고 소피어 로우렌은 그의 밑천인, 그래머걸로서의 본령을 아끼면서(?) 오히려 심리적인 연기에 노력한 듯 하다.
스테라가 교회당에 찾아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선 훼리니의 『카리비아의 밤』에 나오는 창녀의 기도 같은 아름다움이 페이소스 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스(트레봐.하와드扮)의 호탕한 연기가 좋았고, 스릴러물의 범인 같은 표정을 짓는, 케인(키론 무어扮)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슬픈 심경의 스테라가 웨스트포트를 떠나는 차중에서 마지막으로 믿었던 이가 주고 간 ‘맞열쇠’를 좌석 아래로 밀어 넣는 거의 체념적인 표정과 꼭 스테라를 찾고야 말겠다고 프렛 홈에서 중얼대는, 데이빗드의 안타까운 표정의 콘트라스트한게 그려져 여운을 남기고 있다. 세련된 영화감각에 의한 캬롤·리드의 연출은 이 작품의 3요소를 이루고 있는 시나리오,카메라,몬타쥬의 우수성과 함께 높이 평가돼야겠다. 전쟁이라는 혼돈된 상활속에서 진실된 애정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이 작품은 타이틀이 상징함과 같이 해결의 암시성을 띄우고 있다.」
2. 변인식과 영화전문지 『영화 예술』
영화 평론가 입문에 있어서 변인식은 1965년 6월호 『영화 예술』誌에 평론 《영화 현실과 포토 제니-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 한국 영화》, 1965년 7월호 『영화 예술』誌에 평론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미켈란젤로·안토니오니론》이 추천되어 영화평단에 등단하였다. ※이영일의 신인평론 추천기
「먼저 달에 제 1회로 논문이 추천되었던 邊仁植군의 두 번째 논문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를 제2회 추천 논문으로서 내보낸다. 이번 논문은 전작 《영화현실과 포토 제니》보다도 훨씬 문장도 부드럽고 읽기에 시원스럽다. 이 말은 그 내용이 가볍다거나 테마가 소규모의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한 비평가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 일 것이다.
안토니오니론으로 쓰여진 이번 논문은 전작의 발전이라고도 볼 수 있고, 독립된 한 사람의 영화작가론이라고 보아서 손색이 없다. 길지 않은 논문이었지만 거기에서 필자는 안토니오니의 영화작가로서의 문제성과 그 방법론을 아주 간명하면서도 포인트를 눌러가며 다루었다. 이로서 『영화예술』誌는 영화 평론가가 드문 이 땅에 한 사람의 유능한 신인평론가를 동인으로서 맞아드리게 된다. 현재 균명 중고등학교의 교사인 변인식군은 오로지 영화 이론의 분야에 끊임없는 이론과 비평활동으로서 영화논단에 업적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965년 7월호 『영화 예술』誌)
故 이 영일 평론가가 필생의 업적으로 남긴 영화전문지 월간 『영화 예술』과 평론가 변 인식과의 인연은 자그만치 40년전부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월간 『영화 예술』이 고고의 성을 말하면서 이 땅에 태어난 해는 지금부터 42년전인 1959년 12월이었다.
당시 유일무이한 영화전문지인 『영화 예술』은 4*6배 판형으로 표지에는 잉그리드·버그만의 단아한 모습을 게재하였다. 이 잡지는 5·16 군부 쿠데타의 와중 속에 폐간되었다.
『영화 예술』은 불사조처럼 1965년 4월에 국판 사이즈로 옷을 갈아입고 복간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동결시켰던 유신정국과 불황 기를 맞아 1972년에 또 다시 좌초되어 발행을 중단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8년간 변인식은 고정 필자 겸 편집자문위원으로 『영화 예술』과 고락을 함께 나누었다.
그 후 이 영일은 17년이라고 하는 긴 시간을 침묵하면서 저술과 국제적인 비평활동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이 영일의 끈덕진 집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변인식의 『영화 예술』게재 원고
(1) 영화현실과 포토 제니 - 이탈리안 리얼리즘과 한국영화-(논문) 1965.6월호
(2)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 - 미켈란제로.안토니오니론-(논문) 1965.7월호
(3) 옥쇄를 택한 서부의 투혼 『아라모』 (작품평) 1965.8월호
(4) 움츠린 사자들의 분노 - 『가슴을 펴라』를 중심한 대학가의 생태-(작품평) 1965.9월호
(5) D데이 - 그 운명의 교두보 『사상최대의 작전』 (작품평) 1965.9월호
(6) 중화된 사실 감상 『흑맥』 (작품평) 1965.11월호
(7) 영화평단은 자유항인가 (논문) 1965.1월호
(8) 절망과 허망에서 탈출 - 캬롤 리드론- (논문) 1966.1월호
(9) 전과(戰果)로 상쇄된 전과(前科) 『침략전선』 (작품평) 1966.1월호
(10)탄피뿐인 서부식 휴머니즘 『간 화이터의 초대』 (작품평) 1966.2월호
(11)빗나간 탄착점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작품평) 1966.4월호
(12)감상 없는 혈맥의 증언 『군번 없는 병사』 (작품평) 1966.5월호
(13)한국전쟁영화의 허점 - 인간이 부재한 화면 (논문) 1966.6월호
(14)현대적 신파-기타 『하숙생』 (작품평) 1966.9월호
(15)폭력과 도전의 함수관계
- 침묵의 나팔수 (喇叭手) 몬티를 추모하며 - 1966년 10월호
(16)에레베타 인생의 한계점 『회전의자』 (작품평) 1966년 10월호
(17)소문난 잔치 같은 멜로물 『소문난 여자』 (작품평) 1966년 12월호
(18)시정과 토속의 영상 『물레방아』 (작품평) 1967년 1월호
(19)한(恨)-비원과 환상의 세계 『한(恨)』 (작품평) 1967년 9월호
(20)우수의 여인상-문정숙론- (인물평) 1967.4월호
(21)영점하의 타작 『밀월』 (작품평) 1967.4월호
(22)반역-실험-연출 『기적』 (汽笛) (작품평) 1967.7월호
(23)위장된 영과 육의 갈등 『종야』 (작품평) 1967.8월호
(24)반공을 국시로 한 영화 『돌무지』 (작품평) 1967.11월호
(25)욕망이라는 이름의 이 창 『욕망』 (작품평) 1967.11월호
(26)황야의 스크린-1967년의 외화총평,1967년 11월호
(27)윌리엄, 와일러의 예술적 모반(논문) 1968.4월호
(28)속. 폭력과 도전의 함수관계 (논문) 1968.9월호
(29)설향,혁명,인간 - 대형 스크린에 비친 인간의 원형 『의사지바고』 (작품명) 1969.4월호
(30)한국영화 어디로 가는가 (논문) 1971.1월호
(31)70밀리 『춘향전』의 시말 (대담) 1971.2월호 이성구 : 변인식
(32)오소독스한 성서의 영상화 『위대한 생애』 (작품평) 1971.2월호
(33) 전장의 그린 구원의 카라가츄어 『매쉬』 (작품평) 1971.3월호
(34)레이션상자속의 상황윤리 『옥합을 깨뜨릴 때』 (작품평) 1971년,4월호
(35)스크리에 묻는 역사의 허와 실 『사상최대의 작전』 (작품평) 1971.7월호
(36)돈과 문명의 난무 『매드매드 대소동』 (작품평) 1971.10월호
(37)이르마 - 상처 입은 비너스의 변신 『당신에게 오늘밤을』 (작품평) 1972년 1월호
월간 『영화 예술』에는 1965년부터 1972년까지 7년 동안 총 37편이 실렸는데, 작품평 24편, 논 문 10편, 대 담 1편, 총 평 1편, 인물평 1편이 실린 것이다.
3. 변인식과 소형·단편 영화 운동
변인식은 1970년부터 현재까지 만 31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영화를 사랑하는 한국 영상 작가 협회’를 통해 소형·단편 영화 운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가 ‘한국소형영화동호회’라는 명칭으로 출발할 당시 영화감독 유현목, 하길종, 촬영감독 정일성, 유영길, 평론가 변인식, 최일수가 발기인이 되어 이끌어 왔다.
창립일 1970년 7월 23일 미국 공보원 강당에서 유현목 준비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개회사를 했다.
“영화는 복잡한 기계공정을 통한 집단 예술의 산물이기 때문에 여태껏 특정한 전문가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사진 과학의 발달로 인한 기계 조작의 간편화와 소형카메라의 보급은 집단이 아닌 개인,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도 손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보편화되고 있는 <취미로서의 영화제작>이 매력 있는 작업이 곧 8밀리 영화요, 16밀리 영화입니다. 누구나 카메라의 샷터만 누른다면, 누구나 창조하고 즐길 수 있는 시나 소설처럼, 회화나 음악처럼 영화 창조의 즐거움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변인식은 1972년에 교육문화영화 『신일, 우리 여기서 자란다』(SHIN-IL,A PLACE TO GROW,30분), 『신일, 백구의 제전』(30분) 등 2편의 소형영화를 각본 감독하였다.
이 단체를 통하여 배출된 영화감독은 배창호, 이미례, 신승수 등이고 실험·단편영화작가는 한옥희, 이공희, 고창수 감독 등이다.
4. 변인식과 동서영화연구회
1978년 12월 8일 영화계의 기성인 학생 등 회원들이 모여 ‘동서영화동우회’를 발족시켰다. 초대회장은 유현목, 부회장은 변인식, 사무국장은 장석용이 맡았다. 이 회의 출범 동기는 1978년 9월 중대에서 Reiner Wecker 교수와 연극연출가 장석용 사이에 한국 영화의 질적인 향상을 기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영화 감독 유현목, 평론가 변인식 등의 호응에 힙 입어 1차로 1978년 10월 25일 장충동 독일문화원의 문화원장인 브로이어 박사가 베푼 피로연에서 유현목 이외 20여명이 참석하여 회 출범을 위한 합의를 보아 한국과 독일영화의 가교를 잇는 단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동서영화동우회’의 경우 독일문화원 중심으로 해서 주로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인 『칼리가리박사의 밀실』등을 비롯 당시 현대영화인 『사계절의 상인』등을 정기적으로 감상·토론하면서 동·서양 영화에 대한 연구와 실험영화의 제작을 꾀하였다. 영화제작 경험은 홍기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장길수가 감독하였다.
이 모임은 회 명칭을 ‘동서영화연구회’로 바꾼 후 회장을 변인식이 맡았다. 1980년 회지
『프레임 1/24』봄호를 발간했는데, 편집인은 전양준,강한섭,정성일,홍기선 등 네 명이었다. 이들은 당시 대학생들로 열혈영화청년의 필 봉을 세워 영화계 전반을 매섭게 진단하였다. 결국 이 모임에서 전양준, 강한섭, 정성일, 정유성등 영화평론가를 배출하였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장석용은 1990년대 영화평론가로 데뷔, 영화학회 총무,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 본부 초대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장길수, 홍기선, 이미례는 영화 감독, 신 철은 『결혼이야기』, 『미스터맘마』, 『엽기적인 여자』를 제작한 신씨네 대표가 되었다.
5. 변인식과 ‘현대 영화비평가’ 그룹
각 대학에서 영화론을 강의하는 젊은 교수들과 영화평론가, 그리고 영화 저널리스트 등 약 20명으로 구성된 ‘현대 영화 비평가 그룹’은 1972년 12월 18일 문화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변인식씨 (한양대강사)를 회장으로 선임, 발족했다. 「영화의 예술성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올바른 작품평가. 창작 정신의 고무적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창립취지를 밝히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영화 관계 심포지엄, 세미나, 합평회, 우수영화추천 등을 계획하고 있다. 이 모임은 첫 계획으로 72년도 한국영화 베스트 텐을 선정하기로 결정. 작품으로는 『무녀도』(최하원), 『석화촌』(정진우), 『소장수』(김효천), 『의사 안중근』(주동진), 『충녀』(김기영), 『화분』(하길종) 등 20작품을 리스트에 올렸다.
‘현대 영화 비평가’그룹의 발기인은 변인식 (고려대 강사),양동근 (한양대 부교수),하길종 (영화 감독),김윤수 (서울대 전임강사),정규웅 (중앙일보 기자),박한식 (조선일보 문화부).강대형 (한국일보 기자),김종원 (주간조선, 시인),조관희 (선데이서울 기자),임창수 (MBC. TV 영화부장)이고,73년 보강된 회원은 윤 흥렬 (서울대 강사. 제1회 동아일보 영화평론 당선자)
최재웅 (일간스포츠 기자. 도미),홍 파 (감독, 서울신문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자),김양삼 (신아일보),장윤환 (동아일보 문화부. 후원 회원)이다.
1974년 12월 5일 6시 남산 한양스튜디오 지하 1층에서 같은 해 11월 13일 작고한 이태리의 거장 ‘빅토리오·데시카 감독의 밤’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영화평론가 변인식의 ‘데시카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었나?’라는 주제발표와 유현목, 김기영, 이성구, 하길종, 정일성, 유영길, 김승옥, 백결, 권옥연 등이 질의에 참가했다.
1974년 12월 28일 ‘현대 영화 비평가 그룹’주최 한국 영화진흥공사 협찬의 ‘제2회 영화논단’이 서울 남산 한양스튜디오에서 열린다. 제1부는 ‘영화와 현실’(유현목) ‘74년도의 방화총평’(변인식), ‘74년도 외화총평’(정규웅) 등에 대한 논단을 열고 제2부는 ‘74년도 영화 베스트 1 에 대한 시상식, 송년 칵테일 파티도 갖는다.
비평가 그룹이 선정한 영화계 베스트 1은
△ 남우상 = 신성일 △ 여우상 = 안인숙 △ 신인상 = 이장호 △ 기술상 = 정일성
△ 감독상 = 이만희 등이었고 작품상과 각본 상에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1975년 12월 2일 하오 6시 남산 한양스튜디오 C룸에서 ‘송년의 밤’행사를 가졌다. 제1부 세미나 ‘76년의 영화계전망’(호현찬),‘75년 방화총평’(변인식),‘75년의 외화총평’(강대형)과 제 2부는 다음과 같이 75년도 베스트 10개 부문 수상자(작)를 선정하였다.
△ 남우상 = 김진규 (삼포 가는 길) △ 여우상 = 김지미 (육체의 약속) △ 신인상 = 문 숙 (삼포 가는 길), 임예진(여고졸업반),하재영 (바보들의 행진) △ 기술상 = 정일성 (불꽃, 바보들의 행진) △ 음악상 = 강근식 (바보들의 행진) △ 감독상 = 하길종 (바보들의 행진) △ 각본상 = 해당작 없음 △ 작품상 = 바보들의 행진 △ 특별대상 = 삼포 가는 길 △ 특별
상 = 이규환 (남사당)
이 단체의 특별행사로 【故 이만희 감독 추모의 밤】은 1975년 4월 29일 단성사 시사 실에서 열렸었다. 제1부는 변인식의 강연 ‘필름의 순교자 이만희론’, 제 2부는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시사였다.
1977년 11월 17일 영화 진흥공사 시사 실에서 ‘현대영화비평가그룹상’이 발표되었다. 이번 시상의 특징은 배우기근으로 주연여우상과 신인남우상은 해당자가 없어 수상자를 뽑지 않은 점이다.
△ 작품상 = 겨울여자 (화천공사) △ 감독상 = 김호선 (겨울여자) △ 남우상 = 신성일 (산불) △ 신인여우상 = 김영란 (처녀의 성) △ 각본상 = 홍파 (야행) △ 기술상 = 장석준 (겨울여자) △ 음악상 = 최창권 (처녀의 성) △ 특별상 = 윤정희 (야행), 석래명 (고교얄개), 문여송 (처녀의 성)
6. 변인식과 계간 『영상시대』
‘영상시대’가 ‘한국영화의 예술화 운동’의 하나로 기획했던 동인지 문제는 1977년 정식으로 문공부의 등록 (1976년 1월 27일, 마 405호)을 거친 계간 『영상시대』로 1978년까지 4호(시판된 것은 1977년 여름호와 1978년 여름호 2권이었다)를 발간하였다. 1977년 7월 20일자로 창간호를 낸 계간 『영상 시대』(1977/여름)의 발행인 겸 편집인 변인식, 편집장은 이장호 이었다.
출판은 한진 영화사 (사장 한갑진) 부속인 한진 출판사에서 했다. 책의 표지는 소설가 김승옥의 레이아웃으로 이루어졌다. 표지그림은 ‘뱀과 해골과 전쟁의 아픔’을 담은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 작가 스탠 밴더비크의 1963년도 작품 『Breath Death』를 왼편으로 돌려서 실었다. 이 사진은 바로 놓고 보면 신기하게 마릴린 먼로의 얼굴 형태에 뱀과 해골이 모자이크되어 있었다. 이 사진을 표지에 실은 뜻은 불황과 침체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한 한국영화계를 상징하는 얼굴을, 밝고 해맑은 본래의 얼굴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영상시대』 창간호에서 변인식은 발행인 자격으로 ‘영상시대를 내면서’를 썼고, 특집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100장’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선계의 소리와 시각의 오소독소한 대위법] 『문』(유현목), [이화, 황량한 겨울에 핀 에델바이스] 『겨울여자』(김호선), [민속과 드라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홍파), [영상이 지닌 현재성과 윤희적 공간] 『한네의 승천』하길종) 등이었다.
1978년 여름(제2호)호에서는 논문 《영화와 사회-최근에 발표한 작품을 중심 하여》와 신인 영화 평론 1차 추천 논문 선평,《그 순수한 시심에서의 정열-데이빗드·린論》(김정남)을 게재하였다.
7. 변인식과 영평이론지 『영화평론』발행인
한국 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변인식은 1991∼1992년에 『영화 평론』誌 제3호와 제 4호를 발행인 자격으로 발행하였다. 『영화평론』지에는 1989년 창간호부터 2000년 제 12호 까지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원고를 게재하였다.
1989년 제 1호 [임권택. 이두용 영화의 주제 비교 분석시론]
1990년 제 2호 [『남부군』론]
1991년 제 3호 [유현목 영화에 나타난 안티코뮤니즘]
1992년 제 4호 [임권택· 이두용 영화의 주제 비교 분석시론(2)]
1993년 제 5호 [영화의 이름으로 아프로디테의 이름으로] -강수연론-
1994년 제 6호 [인본주의라는 깃발 있는 기수 -임권택-]
1995년 제 7호 [1980년대의 한국영화]
추모의 글 [평론가 최일수의 삶, 혹은 페미니스트의 삶]
1996년 제 8호 [70년대 한국 영화에 있어서 '영상시대'와 하길종의 역할]
1997년 제 9호 [저주받은 영상작가 김기영의 초상]
1998년 제10호 [한 카메라맨의 뜨거운 영화 사랑과 장인 정신]
1999년 제11호 [유현목 영화에서 영상으로 표출된 '인간의 운명론']
2000년 제12호 [명 카메라맨의 대명사, 혹은 피닉스 적인 삶 -촬영감독 정일성론-]
추모의 글 [영원한 시네마 천국으로 간 허창선생, 안병섭 교수]
8. 변인식과 복간 『영화예술』
1989년 11월 25일, 말쑥한 용모로 코딩된 『영화예술』 복간호 (12월 창간호)가 선보였다. 평론가 이영일은 21세기의 길목인 시점에서 또다시 세 번째 『영화예술』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변인식은 죽었던 자식 다시 만나는 감회로 새롭게 태어난 영화 전문지에 작품평, 논문, 연재물 등을 기고하였다. 그가 1989년부터 1972년까지 복간 월간 『영화예술』에 쓴 총 57편은 ①논문 4편 ②작품평 29편 ③현장리포트 1편 ④서평 1편 ⑤연재물 22편으로 되어있으며, 복간 『영화예술』에 게재된 변인식의 글의 제명은 다음과 같다.
① 논문 4편
‘검은 대륙 그 핏빛의 영상과 언어-오늘의 아프리카 영화계의 변모’, ‘캐롤. 리드론’, ‘絃에 건 중국 감독들의 영화혼-중국 감독론’, ‘다섯 감독의 다섯 가지 성묘사’,
②작품평 29편
『붉은 수수밭』, 『굿바이 칠드런』, 『캄 앤씨』, 『마루타』, 『우묵배미의 사랑』,『남부군』『시네마 천국』,『모스키토 코스트』, 『카르멘』,『신문,訊問』,『좋은 친구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서울에비타』, 『베를린리포트』,『잃어버린 너』, 『강시와 부시맨』,『수잔 브링크의 아리랑』,『특종』,『스무 살까지만 살고싶어요』,『명자, 아끼꼬, 소냐』,『사랑과 추억』,『퐁네프의 연인들』,『현위의 인생』,『미스터 맘마』,『그대 안의 블루』,『크라잉게임』, 『화엄경』, 『사선에서』, 『금홍아! 금홍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카루나』, 『학생 부군 신위』
③현장 리포트 1편
1991년, 제4회 동경 국제 영화제
④서평 1편
『영상적 사유, 영화적 인생』 김사겸 영화 평론집
⑤연재물 22편(한국 여배우 70년사)
이월화· 이채전· 김정숙, 복혜숙, 전 옥, 신일선, 김소영, 현순영, 김연실, 김신재, 한은진, 문예봉, 김소진, 노경희, 조미령,유계선, 도금봉, 윤인자, 전계현, 황정순, 문 희,김지미
(上),김지미(中),김지미(下)
9.변인식의 저술
평론가 변인식은 지금까지 저서 2권, 편저서 20권, 공저 10권, 총 32권의 저술활동을 하였고, 그의 대표논문을 간추려 본다.
●영화관련 저서(著書)를 2권
(1) 1972년, 제1 영화평론집, 『영화미의 반란』 (태극 출판사·간)
(2) 1995년, 제2 영화평론집,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공간미디아·간)
●1985년 변인식은 예일사 간행의 20권 짜리『세계영화배우평전』편·저(編·著)를 맡았다. 그는 (1)제임스 딘 (2)알랭 들롱 (3)해리슨 포드 (4) 클린트 이스트우드 (5) 로저무어 (6) 실버스타 스텔론 (7) 맷 딜런 (8) 成龍 (9) 李小龍 (10) 잉그리드 버그만 (11) 비비안 리 (12) 마릴린 먼로 (13) 오드리 헵번 (14) 파라 포세트 (15) 소피 마르소(16) 브룩 쉴즈 (17) 다이안 레인 (18) 실비아 크리스텔 (19) 나스타샤 킨스키 (20) 피비 케이츠를 다루었다.
●변인식의 공저 (共著) 10권
①『한국 영화사(현대영화)』-한국 현 문화사대계(I)-1975,8,14-고대 민족 문화 연구소 간행
②『映畵 100 年史』-현대 예술의 이해-1973,12,31-독서출판사 간행
③『나운규와 윤봉춘』-이 땅 이 사람들-1978,9,1-뿌리깊은 나무 간행
④『반원의 영상을 위한 에스프리』-공연예술연구총서(I)-1976,6,1(쇼트 시나리오)-문성출판사
⑤『혁명·사랑·죽음의 대로망』-의사 지바고-1979,5,28-을지출판사
⑥『지적 오만을 내연하는 불새』-윤정희론, 『다재다능한 문단의 귀재』-최인호론-1979년 10월 15일-도서출판 「맥」(脈)
⑦『아버지를 닮기 위하여』-나의 아버지- 2000년 3월 27- 문학사상사
⑧『고노와 저항의 리얼리스트』 - 유현목 영화 인생 - 1995년 6월 15일- 혜화당
⑨『저항과 고뇌를 선택한 리얼리스트』-유현목론-유현목, 한국 리얼리즘의 길 찾기』 - 1999년 10월 14일 도서출판 큰 사람.
⑩ 『결혼론』 - <결혼론> (H.A 보우먼) 번역 - 세계인의 생론대전집 ④-1971년 2월 1일 - 태극출판사
●변인식의 주요 논문 25편 (1965년∼2001년)
1) 1965년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론」 (『영화예술』)
2) 1965년 「미켈란제로 안토니오니론」 (『영화예술』)
3) 1968년 「한국문예영화의 허점」 (서울신문 신춘 문예 당선 논문)
4) 1972년 「누벨바그에서 뉴시네마까지」 (『영화미의 반란』)
5) 1981년 「미국 영화가 한국인에게 끼친 영향」 (중대언론 연구소)
6) 1982년 「미국 영화 문화 수용에 관란 연구」 (중대 신방대학원 학위 논문)
7) 1983년 「미국영화와 대중문화」 (청주대학 학회지)
8) 1989년 「임권택·이두용 영화주제 비교분석시론 I 」 (『영화평론』)
9) 1989년 「임권택 영화에 나타난 인간회복의 테마론」 (영화학회지)
10) 1990년 「남부군론」 (『영화평론)
11) 1990년 「유현목 영화에 표출된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영화학회지)
12) 1991년 「유현목 영화에 나타난 안티.코뮤니즘」(『영화평론』)
13) 1992년 「임권택·이두용 영화주제 비교분석시론 II」(『영화평론』)
14) 1993년 「강수연론」 (『영화평론』)
15) 1994년 「'인본주의'라는 깃발 있는 기수·임권택」 (『영화평론』)
16) 1995년 「1980년대의 한국영화」 (『영화예술』)
17) 1996년 「70년대 한국영화에 있어서 '영상시대'와 하길종의 역할」 (『영화평론』)
18) 1997년 「저주받은 영상작가 김기영의 초상」 (『영화평론』)
19) 1998년 「한 카메라맨의 뜨거운 영화사랑과 장인정신」- 유영길론 (『영화평론』)
20) 1999년 「유현목 영화에서 영상으로 표출된 '인간의 운명론'」(『영화평론』)
21) 2000년 「명 카메라맨의 대명사, 혹은 피닉스 적인 삶」- 정일성론 - (『영화평론』)
22) 2000년 「시나리오를 문학의 경지로 이끌어낸 작가」 -오영진론 - (『한국예술총집』)
23) 2000년 「다재다능했던 문화예술계의 큰 별」 - 유한철론 - (『한국예술총집』)
24) 2000년 「'작가주의' 실천한 영상스타일리스트」 - 김기영론 - (『한국예술총집』)
25) 2000년 「작가의식 강한 언어의 연금술사」 -김지헌론- (『한국예술총집』)
10. 변인식 연보
1938: 4월 24일 아버지 변태순, 어머니 구복길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아버지 변태순은 연희전문학교 상대 시절 야구 선수였으며 바이올린 연주 등 음악에 조예가 깊었음. 아버지는 남선 전기 주식회사 (현재의 한국전력)등 전기 관련회사에서 간부로 일하였고, 어머니는 전형적인 충정도 여자로서 온화한 성품을 지녔음.
1943: 서울 혜화 유치원 입학
1945: 서울 혜화 초등학교 입학.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부산으로 피난. 부산 남부민 피난 초등학교 졸업.
1955: 경복 중학교 졸업.
1958: 경복 고등학교 졸업.
1958: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고대 신문>에 영화 평론 기고.
1959: 고대 최초의 영화 서클인 <영상> 창립. 이유황 (전 KBS TV-PD), 유호석 (전 TBC TV-PD), 박성조 (시나리오. 방송 작가), 유길촌(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등 과 활동. 이 무렵 유현목, 이강천 감독, 이영일, 노만 평론가 등과 교류.
1960: 4·19 민주 학생 혁명 시위에 참가 후, 군에 입대. 1962년 학보 병으로 제대.
1964: 고대를 졸업하고 균명고(환일고) 교사로 4년간 근무함.
1965: 영화전문지 『영화예술』에서 논문 ‘영화현실과 포토 제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이 추천 평단 데뷔.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회원.
1968: 서울 신문 신춘 문예 제 1회 영화평론부문 당선. 신일고 교사로 부임. 일요신문사 영
화 합평 위원. 월간 ‘영화 예술상’ 심사위원. KBS-TV 영화상 중계해설자
1969: ‘영화 예술상’ 심사위원
1970: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 심사위원. 유현목, 하길종, 정일성, 유영길 감독 등과 <한국 소형영화 동호회> 창립. 초대 총무 역임. 한양대 연극 영화과 강사.
1971: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 심사위원
1972: 현대 영화 비평가 그룹 회장. 제 1영화 평론집 『映畵美의 반란』 출간. 8밀리 교육 영화 『신일, 우리 여기서 자란다』 (SHIN-IL A Place To Grow>, 『신일-백구의 제전』. 각본, 감독, 박정희 정권 유신체제와 관련 중앙 정보부에 강제 연행 심문 받음.
1973: ‘현대 영화 비평가 그룹상’ 집행 위원장. 고대 정경대 신문방송학과 강사.
1974: 서울 예술 전문대 영화과 강사.
1975: 하길종, 김호선, 이장호, 홍파 감독 등과 ‘영상시대’ 결성 활동함.
1976: 일간스포츠 영화평 고정집필. 계간 『영상시대』 발행인 겸 주간. 『영상시대』 신인 배우 선발 심사위원. 쇼트 시나리오 ‘ 반원의 영상을 위한 에스프리’ 발표
1977: 월간 『세대』 영화평 집필. 월간 『신동아』 영화칼럼 집필.
1979: 이혜경(이대 국문과 출신)과 결혼. ‘동서영화연구회’ 회장. 동서 영화 연구회 회보 회지 ‘프레임 24분의 1’ 발간.
1980: 아들 승빈 출생. 일간 스포츠사 ‘인물 영화사’ 연재
1981; 동아일보사 LA, 뉴욕 임시 취재원. 제 1회 LA 견본시 참관. 제 10회 대종상 본선 심사위원 중앙대 신문 방송 대학원 입학. 파라마운트영화사 초청 미국 영화계 시찰
1982: 전국 소형 단편 영화제 심사위원장.
1983: 딸 승연 출생. 중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1984: 일간 스포츠 ‘은막의 여신들’ 연재.
1985: 조선일보 ‘一事一言’ 칼럼 집필.
1986: 일간 스포츠 영화평 고정 집필. 『세계 영화배우 평전』 (전 10권) 출간.
1987: 한국 외국어대 한국어과 강사. 『세계 영화배우 평전』 (후 10권) 출간. 월간 『객석』, 월간 『조선』에 영화 칼럼 집필
1988: 제1회 서울 국제 아마추어 소형 영화제 심사위원장.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MC 이문세) 고정 출연.
1989: 월간 『조선』에 영화 칼럼 집필.
1990: ‘한국 영화 70년, 대표작 200선’ 선정위원. 제 2회 서울 국제 아마추어 소형 영화제 심사위원장. 제 1회 춘사 영화 예술상 심사위원, 제 1회 대한민국 영상. 음반상 심사위원. 중대 신문 방송 대학원 강사. ‘스포츠조선’ 편집 자문 위원.
1991: 한국 영화평론가 협회 회장, 제 29대 대종상 영화제 집행 위원. 제 2회 춘사 예술상 심사위원. 제 2회 대한민국 영상. 음반상 심사위원. 중대 신문 방송대학원 강사.
1992: 제 30회 대종상 영화제 집행위원. 제 3회 대한민국 영상.음반상 심사위원. 중대 신문방송 대학원 강사. 한일 문화재단 초청 일본 영화계 시찰. 제 37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한국 대표
1993: 제4회 춘사 영화 예술상 심사위원. 한국소형 영화 작가 협회 고문. 중대 신문 방송 대학원 강사. 제 4회 대한민국 영상. 음반 대상 심사위원.
1994: 제5회 춘사 영화 예술상 심사위원. 동아출판사간 ‘세계 대백과 사전’ 영화 부문 집필.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FIPRESCI) 한국 본부 이사.
1995: 제6회 춘사 영화 예술상 심사위원. 한국 예술 평론가 협의회 회장. 제 2 영화평론집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출간. 95년 청룡 영화제 제 2회 정영일 영화 평론가상 수상. ‘영화 정의 실천을 위한 모임’ 상임 이사. 『예술 평론』 발행 겸 편집인.
1996: 제34회 대종상 영화제 본심위원. 동국대 문화 예술 대학원 강사. 파키스탄 영화 진흥공사 초청 파키스탄 영화계 시찰.
1997: 한국 영화 학회 이사. 상설 예술·실험 영화 심사위원장
1998: 동국대 문화예술 대학원 강사
1999: '20세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60인' 선정 위원회 위원장. 사단 법인 ‘영화인 회의’ 지도 위원. 한국 영상 문화학회 회원. 한일 장신대 부설 한일 연극 영화 연구소 자문위원. 제 7회 춘사 영화제 영화예술상 본선 심사위원.
2000: 동국대 대학원 영화영상학과 강사. 38년간의 교직을 신일 고교 교감을 끝으로 명예 퇴임. 홍조근정훈장 받음. 2001년 영화 단체 사업 지원 심사위원장. 영상물 등급 위원회 상근 영화 심의위원. 제 28회 오스트리아 에벤세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2001; 명지대학교 철학과 강사. 영상물 등급위원회 상근 영화 심의위원. UNESCO 산하 유니카 공인 국제 아마추어 영화 심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