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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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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관 스크랩 `다반향초(茶半香初)` 차시에 관한 연구
지리산문학관.계간시낭송 추천 0 조회 65 16.11.16 05: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반향초(茶半香初)' 차시에 관한 연구 다전의 다정(茶亭)

2011/05/13 17:00

 http://blog.naver.com/gohongik/8013017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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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반향초(茶半香初)’ 차시에 대한 연구

 

                                                            다전 조석현(茶田 曺錫鉉)

                                2011.5.10.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차시로 많이 애용되고 있는 차시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의 시. 한자 원문을 보아도 무언가 심오한 듯하고 멋진 표현인 듯 하지만 잘 다가오지 않는다. 한글 해석도 천차만별이고 그 뜻도 사뭇 다르게 해석하고 있어 과연 진정한 뜻은 무엇인 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2. 연구의 방법

 

   이 시는 한시(漢詩)이면서 차시(茶詩)인 바, 한시의 요건과 차와 관련된 내용 등을 참고로 하여 구조적,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전체적으로 통찰하여 좀더 올바른 해석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Ⅱ. 시문의 원작자와 인용에 대하여

 

1. 추사가 지었을까?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의 시라는 설이 많으나 확실치 않다. 다만 추사가 글씨를 쓴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원작자가 있고 일부를 추사가 그대로 인용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시들을 참고하여 추사가 지어 쓴 것인가?

원작자가 있고 시 중에 일부를 떼어내 쓴 것이라면 한시의 정형률에 따른 운()과 평측(平仄) 정도는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서 검토한 대로 이 시는 전혀 한시의 운율을 지키지 않고 있다. 따라서 원작자가 있는 정통 한시를 인용하여 추사가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운율을 지키지 않는 고시(古詩)를 인용할 수는 있다. 실제 제일 마지막 구는 실제 창작한 귀절이 아닌 인용글로 밖에 볼 수 없다. 당송의 ‘유건’이나 ‘소동파’, ‘사공도’ 등이 이미 “수류화개(水流花開)”의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2. 황정견의 시는 아니다.

 

   추사의 시라고 단정 짓는 것도 잘못이지만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의 시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 황정견은 그의 스승 소동파(蘇東坡 : 1036.12.19-1101.7.29)와 함께 북송4대가의 한 사람이다. 차를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한 시가 백 여편에 이른다한다.

 

   황정견의 차시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시에는 이 ‘다반향초’의 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만리청천 운기우래 공산무인 수류화개’(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시를 황정견이 썼다하나 그 근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반향초’의 시를 황정견의 시라고까지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Ⅲ 시의 형태에 대하여

 

1. 한시의 운율을 맞춘 근체시(近體詩) 형태가 아니다.

 

    아래에서 살피듯 한시의 운율을 전혀 무시한 것으로 ‘수류화개’ 등 유명한 문장을 고시(古詩)에서 인용하거나 짜 맞추어 7언시 형태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평측[낮은 소리 평운은 ○, 높은 소리 측운은 ●으로 표시] 과 운을 보자.

 

●● ● ○● ○○

①② ③ ④⑤ ⑥⑦

정좌처다반향초(靜坐 處 茶半 香初)......... 1구

 

●● ○ ●○ ○○

①② ③ ④⑤ ⑥⑦

묘용시수류화개(妙用 時 水流 花開)...........2구

 

   각운(脚韻)은 개(開)자가 ‘회()운’일 수 있으나 이 시가 전혀 평측을 맞추지 않고 있어 운()자로 썼는 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과 측기식(仄起式)의 평측은 다음과 같다.[◑은 평측(平仄) 모두 가능, ◎은 운()]

                         평기식                  측기식

                 ①② ③④ ⑤⑥ ⑦    ①② ③④ ⑤⑥ ⑦

기구 起句   ◑○ ◑○ ●○ ◎    ◑● ◑○ ◑● ◎

승구 承句   ◑● ◑○ ●◑ ◎    ◑○ ◑● ●○ ◎

전구 轉句   ◑● ◑○ ○● ●    ◑○ ◑● ◑○ ●

결구 結句   ◑○ ◑● ●○ ◎    ◑● ◑○ ◑● ◎

 

칠언율시(七言律詩) 평기식(平起式)과 측기식(仄起式)의 평측은 다음과 같다.

 

                                    평기식                  측기식

                         ①② ③④ ⑤⑥ ⑦     ①② ③④ ⑤⑥ ⑦

수련 首聯  1행    ◑○ ◑● ●○ ◎     ◑● ○○ ●● ◎

                2행    ◑● ○○ ●● ◎     ◑○ ◑● ●○ ◎

함련 ?聯  3행    ◑● ◑○ ○● ●     ◑○ ●● ○○ ●

                4행    ◑○ ◑● ●○ ◎     ◑● ○○ ●● ◎

경련 頸聯  5행    ◑○ ●● ○○ ●     ◑● ◑○ ○● ●

                6행    ◑● ○○ ●● ◎     ◑○ ◑● ●○ ◎

미련 尾聯  7행    ◑● ◑○ ○● ●     ◑○ ◑● ○○ ●

                8행    ◑○ ◑● ●○ ◎     ◑● ○○ ●● ◎

 

   위의 칠언절구, 칠언율시 평기식이나 측기식의 평측보(平仄譜) 어디를 보아도 이 시와 일치된 운율은 찾을 수 없다. 1구는 ②와 ⑥의 평측이 달라 ‘②⑥동()’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2구는 ②와 ④의 평측이 달라야 하는데 같아 ‘②④부동(不同)’을 지키지 않았고 ‘②⑥동()’도 지키지 않고 있다. 더구나 2구는 아래의 평성이 세 번 연이어 계속(○○○)되는 하삼평(下三平)으로 위격(違格)이다. 이 시는 결국 근체시(近體詩)가 아니며, 고시(古詩) 형태이거나 운율을 전혀 맞추지 않는 한시이다.

 

   단지 이 운율을 맞추지 않는 것은 이 시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지 시의 내용을 훼손하거나 엉터리라 말할 수는 없다. 한시의 아름다움이 비록 정형시와 평측 등 엄격한 운율에 있으나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익, 박지원 같은 실학자들은 중국의 한시가 아니라 우리나라 한시를 짓겠다했다. 그 중에 다산(茶山)은 이렇게 당당히 외쳤다.

 

나는 조선 사람 이기에 我是朝鮮人

달게 조선 시를 짓노라 甘作朝鮮詩

 

도치문(倒置文)인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정치(正置)하여 보아도 역시 운율은 맞지 않는다.

 

                        ○● ○○ ●● ●

                        ④⑤ ⑥⑦ ①② ③

다반향초정좌처(茶半 香初 靜坐 處 )......... 1구

 

                        ●○ ○○ ●● ○

                        ④⑤ ⑥⑦ ①② ③

수류화개묘용시(水流 花開 妙用 時 )...........2구

 

2. 한시의 기본문형이 아닌 도치문(倒置文)이다.

 

   보통 한자도 ‘주어 + 술어 + 보어’의 순인데, 이 시에는 ‘보어(①② ③) + 주어(④⑥) + 술어(⑤⑦)’ 순으로 보어가 매우 강조되었다. 도치문 형태이다 보니 일반 한시의 정형 운율과는 더욱 더 거리가 멀다. 대신 원래 영어와 비슷한 어순(語順)을 갖는 한문(漢文)이지만 이제 우리말의 어순과 비슷해졌다.

 

   이렇게 도치됨으로써 이 차시는 그 주인인 다인(茶人)의 행위인 ‘정좌(靜坐)’와 ‘묘용(妙用)’이 매우 강조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강조로 인해 선다시(禪茶詩)의 멋을 더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도치의 형태가 시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도치로 말미암아 한시로서의 운율은 평측 뿐만 아니라 리듬조차도 달라지게 하고 있다. 즉 칠언시의 한시가 일반적으로 2221로 전개하다가 ⑤의 자리에서 ‘무릎’자로 꺾어 2212 등으로 전개하여 맛을 더한다. 그런데 이 시는 도치가 되어 2122, 2122형태가 되었다. 이런 한시는 매우 드물거나 없다.

 

   이 시는 한시의 정형적인 평측, 운 등 운율과 리듬 등을 무시한 “파격(破格)”의 시다. 그러나 뒤에서 밝히겠지만 한시의 꽃인 대구(對句)가 빛나고 그 내용이 심오하고 아름다워 사랑받는 차시가 된 것 같다.

 

   이 시는 한시의 가장 기본 형태인 7언절구의 4구에도 못미치는 2구만 있는 시다. 한시의 연구(聯句)로 구성된 대련(對聯), 주련(柱聯) 등의 글귀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야외 다정(茶亭)의 주련으로 쓰일 경우 내용과 잘 어울린다.

 

3. 대구(對句)의 분석

 

   칠언율시의 함련과 경련은 대구를 이루게 된다. 대구는 한시의 아름답게 만드는 한시의 꽃이다. 이 꽃이 이 ‘다반향초’의 시에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①② ③ ④⑤ ⑥⑦

정좌처다반향초(靜坐 處 茶半 香初)......... 1구

                         ↕↕  ↕  ↕↕  ↕↕

                        ①② ③ ④⑤ ⑥⑦

묘용시수류화개(妙用 時 水流 花開)...........2구

 

   먼저 1구의 ①과 2구의 ①과 같이 1구와 2구의 각 위치에 있는 시어가 정확히 대구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1,2구의 보어인 ①② ③ 은 ‘이류대(異類對)’를 이루고 주어, 술어로 이루어진 ④⑤ ⑥⑦은 ‘동류대(同類對)’를 이루고 있다. 같은 구에서도 동류대가 발견되는데 1구의 ④ ⑥인 차()와 향(), 2구의 ④ ⑥인 수()와 화(花) 등이다. 주어 뿐만 아니라 술어인 ⑤와 ⑦도 대구다. 또 각 구에서 ④⑤와 ⑥⑦이 동류대를 이루고 있다.

 

   이런 주어, 술어가 각 구간에, 또는 구 안에서 서로 동류대를 이루는 가운데 보어가 이류대를 이루어, 1,2구는 같으면서 다른 묘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보어가 앞에 나오는 도치문의 형태를 띠어 전반적으로 주어, 술어를 이루는 후반부 가 보어의 이류대에 전반적으로 지배를 받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그래서 1구는 정적(靜的) 분위기요, 2구는 동적(動的) 분위기다. 그리고 2구의 동()은 1구의 정()이 뒷받침하여 정중동(靜中動)으로 그 묘함이 빛나는 것이다.

 

1구는 정적인 공간(空間)을 나타내니 ③자에 처()로 표시되고 2구는 동적인 시간(時間)이니 ③자에 시()로 표시된다. 그래서 1구의 술어는 명사나 동사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나 부사를 사용했다. 2구의 술어는 당연히 시간을 나타내는 동사다.

 

   이 ‘공간과 시간’은 ‘시공간(時空間)’으로 우주(宇宙)를 뜻하거니와 이 시 하나에서 우주 전체의 요소를 느낄 수 있다. 또 1구는 한 순간의 단면(stock)을 그려 정적이 흐르고(시간의 축=0, 공간의 축=∞ ) 2구는 공간을 배제(0)하고 시간이 흐르고(flow) 있다.

 

   이 시의 주제나 조어(造語)로는 ‘다반향초’가 시안(詩眼)이지만, 이시의 미묘함은 각 구의 첫 자인 정()자와 묘()자의 미묘한 대()로 긴장감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 정()만 있다면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고 동()만 있다면 번거로울 뿐이다. 그러나 고요한 가운데 미묘한 움직임과 작용이 있으니 이 차시의 묘미(妙味)다.

 

   이와같은 느낌을 적확(的確)한 대구와 도치법으로 첫 자에 크게 강조됨으로써 강한 느낌과 여운을 주고 있다. 센 박자가 앞에 오는 것(‘이 세상 많다’가 아니라 ‘~많은 이 세상’)이 우리 가락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시도 기존 한시의 정형률을 깨고 빛나는 대구만은 크게 강조하고 우리 리듬을 써 우리의 몸에 맞추었다.

 

   순간에 포착되어 공간에 잡혀 있는 ‘다반향초’는 2구의 ‘수류화개’로 흘러간다. 1구가 정적(靜的)인 집중(集中)의 지혜인 ‘사마티’라면 2구는 동적(動的)인 알아차림의 지혜 ‘위빠싸나’다. 정좌의 자리가 묘용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정좌가 진공(眞空)이라면 묘용은 묘유(妙有)다. 그래서 정좌묘용(靜坐妙用)은 불가에서 보는 우주의 모습,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닮았다. 이 정좌묘용을 다인은 차를 통해 얻으니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할 만하다.

 

Ⅲ. 시문의 해석

 

1. 문법 분석에 따른 해석

 

① 정좌처(靜坐處)

   정좌(靜坐)는 불가의 좌선과 같이 지관(止觀)을 하기 좋은 자세다. 차를 끓여 마시는 데 다정(茶亭)에서 고요히 앉아있다. ‘고요히 앉은 곳’. 여기에 다인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배제된다. 따라서 다음 구에서도 다인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보다 수동적으로 오관으로 수용하게 된다. 다음의 ‘다반향초’에서 보듯 차끓이는 소리를 듣고 고요한 다정에 퍼지는 차향을 맡게 된다.

 

② 다반향초(茶半香初)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위 두 구를 다음과 같이 띄어 쓰고 번호를 붙여, 1구 1자인 정(靜)자를 ‘1-①’과 같이 번호를 붙여보자.

 

                             ①②  ③  ④⑤  ⑥⑦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1구

 

                             ①②  ③  ④⑤  ⑥⑦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2구

 

   각 구의 전반부 보어(補語) 3자는 ①은 ②를 수식하고, ①,②는 ③을 수식하는 구조이다. 각 구의 후반부가 주어(主語)와 술어(術語)의 구조로 ④와 ⑥이 명사(名詞)가 되고 ⑤와 ⑦이 동사(動詞)나 형용사(形容詞)가 된다. 이와 같다보고 한 번 해석 해보자.

 

정좌의 곳, 차는 반이고 향은 처음

묘용의 때,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그런데 ‘1-⑤’와 ‘1-⑦’을 명사의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보고 ‘다반향초’를 직역하면 ‘차는 반이고 향은 처음’과 같이 해석되어 어법이 잘 맞지 않다. ‘1-⑤’와 ‘1-⑦’을 사물의 동작에 붙여서 그 상태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부사(副詞)로 보고 동사가 생략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반()’은 ‘절반이라는’ 분량의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이고, ‘초()’는 ‘처음’이라는 시간의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이 ‘다반향초’는 다른 번역이 많은데, 이는 차를 어떻게 보느냐와 술어의 품사와 쓰임을 잘못해 생긴 것이 많다. 이는 차생활의 실제 모습과 연결짓고 이 시의 전체 구조와 함께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좀 더 정확한 해석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茶半香初

 

[해석1] □ : 숙(), 팽() ○ : 생() 출()

[해석2] □ : 포() ○ : 생() 출()

[해석3] □ : 주어잔(注於盞) ○ : 생() 출()

[해석4] □ : 음(), 끽() ○ : 출여전(出如前)

 

   후술하겠지만 필자가 제목으로 삼고 있는 이 ‘다반향초(茶半香初)’가 이 시의 새 조어로 볼 수 있다. ‘정좌처’나 ‘묘용시’나 다 쉽게 인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고(정좌, 묘용이라는 낱말이 이미 존재) ‘수류화개’도 멋진 표현이지만 널리 시어로 이미 쓰인 용어다. 필자는 이 시에서 ‘다반향초’만이 새로운 표현으로 본다.

 

   문제는 이 ‘다’를 다사(茶事)중에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먼저 ?차 끓이기 ?차 우리기 ?찻잔에 따르기 ?차 마시기 중의 하나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이 시에 위의 다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실제 차생활에서 차의 첫 향기가 어느 때 나느냐’로 볼 수 밖에 없다. 가장 먼저 차향기는 차를 만들면서 차를 덖고 비빌 때 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첫 향기를 맡을 때는 차를 끓일 때다.

 

   다음엔 위 ?~?의 ‘여러 단계의 찻일[茶事] 중 절반 쯤 진행될 때 첫 향기가 나는 찻일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의 차우리기에서는 차가 우려져 차주전자의 뚜껑을 열면 짙게 차향기가 나고, ?의 찻잔에 따르기는 차를 따르는 순간 차향기기 난다. ?의 차마시기도 코에 가까이 대고 차를 마실 때, 혹은 마신 뒤 입안에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오로지 ?의 차 끓이기에서 차가 끓기 시작할 때(차가 완전히 익기까지 중간에) 차 향기 처음으로 (뚜껑을 열지 않아도) 배어나온다. ?의 차 우리기에서는 차향기를 직접 맡기가 어렵고 중간 이후에 차주전자의 뚜껑을 열을 때이만 실제 다사에서는 차전자의 뚜껑을 중간에 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례로 본다.

 

   현재 주로 잎차를 마시는 경우에는 ?과 같이 차를 끓이지 않고 ?와 같이 차를 우려 마시므로 ?의 차 우리기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가 써졌을 당시에는 단차(團茶)를 끓여 마신 예가 더 많았다. 옛 문헌에 포다(泡茶:차우리기)보다 팽다(烹茶:차끓이기)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1)차 끓이기로 보면 [해석1]로 가고, 4)차 마시기로 보면 필연 [해석4]로 간다.

 

[해석1] 차 반 (끓여) 향기 처음 (나니)

[해석4] 차 반 (마셔) 향기 처음 (같아)

 

   필자는 [해석1]로 본다. 실제 차를 마실 때 차향기의 특성상 차를 반 마실 때까지 나지 않는다. 물론 입안에 도는 향은 다 마시고 몇 시간도 돌 수 있으니 ‘반 마셔 향기가 처음과 같다’는 표현도 걸맞지 않다. 그리고 [해석4]는 대구가 정확한 시어 구조상 술어가 앞에는 부사인데 뒤에는 억지로 상태 형용사를 억지로 만들어 ‘향기가 처음같다.’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해석4]는 [해석1]과 같이 ○을 생()으로 하여 ‘향기 처음 나니’라 해야 맞다, 그런데 ‘차 반 마셔 향기 처음 나니’는 실제 차생활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향기가 처음과 같다’로 억지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문법적인 분석이나 천착(穿鑿)없이 해석이 막히자 마음대로 만들어 의역(意譯)이라고 미명(美名)을 붙이는 것으로 한문이나 한시 해석에 가장 잘못된 것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문법을 검토해 번역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좌의 곳, 차 반 끓여 첫 향 나고

묘용의 때,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지금같이 ‘차’와 ‘차의 향기’로 해석하는 것 말고 향()을 향불을 피우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실제로 분향하고 차를 마시는 사례가 있다는 한시 여러 개를 근거로 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별도로 있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이 ‘다반향초’가 ‘차’와 ‘향불’이 되어야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를 반쯤 마시다가 (생각난 듯이 일어서서) 향을 처음으로 피운다.’의 해석? 참 어색하다. 향을 피운다면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는 것이 순서에 맞을 것이다. 물론 차를 마시다 향을 피우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고요히 앉아 있다고 했는데 일어나서 향불을 피우고 부산을 떠는 것이 맞는가?

 

   이 부분은 앞에서도 살폈듯 ‘차를 끓이는 일’로 보면 쉽게 풀린다. 실제 차를 끓일 때는 찻물이 막 끓을 때 물이 뒤집어지며 용솟음치고 이때 차향이 저절로 풍겨 나온다. 이때가 차를 끓이기 시작하여 완전히 차가 익고 마시기 좋도록 적당히 식을 때까지 약 절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차를 끓여 마시지 않고 우려 마시면서 잃어버린 정취와 멋이 있다. ‘차끓이기’의 경험이다. 지금처럼 전기로 간단히 끓이지 못한 상황에 장작준비, 풍로준비, 풍로 돌리기 등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이윽고 불이 잘 붙으면 이제 정좌를 하고 쉴 수 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차 끓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난다. 이른바 ‘송풍회우’(松風檜雨)의 소리다. 그리고 처음으로 차의 향기가 난다. 곧 ‘다반(茶半)’(차를 절반 끓이는 데)의 ‘향초(香初)’(처음으로 나는 차향기)이다.

 

   향초(香初)의 ‘초()’는 다인에게는 경이로운 ‘첫’ 즐거움이다. 차생활에 서 가장 큰, 첫 기쁨이다. ‘송풍회우’소리를 들으며 기대하다 얻게 되는 첫 열매다. 그 설렘과 달콤함이 첫사랑과 같다할까? 첫 아이를 본 기쁨이라할까? ‘다반향초’는 바로 그런 ‘차의 첫 경험’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다사(茶事)에서 차향기가 없지는 않다. 다관의 뚜껑을 열 때, 찻잔에 따라 코 끝에 댈 때에도 차향기는 난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 째, 세 번 째 사랑과 같으니 어찌 처음과 같을까? 추사가 ‘다반향초’를 쓴 이후 많은 이들이 이 시어를 다투어 인용하였다. 이 다반향초는 첫 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하듯 차생활 즐거움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어 오고 있다.

 

2. 시의 구조에 따른 해석

 

   근체시는 5언이든 7언이든 가장 최소단위가 기승전결(起承轉結) 4구로 이루어진 절구(絶句)이다. 그러나 이 시는 전부가 2구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 시가 절구(絶句)의 최소 단위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완전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를 구조적으로 분석해 가면서 감상해 보자. 우선 크게는 물론 1구와 2구의 두 부분으로 나뉘고, 각 구는 보어와 주술부로 나뉘어져 4구분을 할 수 있다.

 

①② ③

Ⅰ.靜坐 處 정좌의 곳, (起)

④⑤ ⑥⑦

Ⅱ.茶半 香初 차 반 끓여 첫 향 나고 (承)

①② ③

Ⅲ.妙用 時 묘용의 때, (轉)

④⑤ ⑥⑦

Ⅳ.水流 花開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結)

 

 

 

 

 

 

   위 표에서 보듯 의미 구조상 기승전결 형태를 띄고 있다. 정좌의 곳이라 면서 먼저 장소와 분위기를 띄운다.[] 다음에 이어 차를 끓이고 향기가 온 다실을 감싸고 있다.[] 에서는 묘용의 때라 하면서 이 정적을 깨고 조용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마지막으로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고 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이를 4구로 해서 단을 달리해 다음과 같이 재배열해 보면 각 구에 기승전결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

 

정좌처(靜坐處)             (기) 정좌의 곳,

다반향초(茶半香初)       (승) 차 반 끓여 첫 향 나고

묘용시(妙用時)             (전) 묘용의 때,

수류화개(水流花開)       (결)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3. 시의 전체적인 해석

 

三才

時空

代表

代表語

茶事

內外

主客

認識

感覺

遠近

①② ③

Ⅰ.靜坐 處

④⑤ ⑥⑦

Ⅱ.茶半 香初

空間

烹茶

靜觀

聽嗅

①② ③

Ⅲ.妙用 時

④⑤ ⑥⑦

Ⅳ.水流 花開

時間

飮茶

妙覺

味視

 

 

 

 

 

 

   위의 표에서 보듯 이 시는 한시의 대구(對句) 이외에도 1, 2구가 여러 가지로 대()가 되고 있다. 이 시의 주인은 물론 다인(茶人)일 것이다. 장소는 어디일까?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이 훤히 보이는 강가의 다정(茶亭)이 아닐까?

 

   우선 다인은 다정에 고요히 앉아서 차를 끓이고 있다. 차기 반이나 익었을까 차향이 첫사랑의 향기인양 다가온다. 이 기쁨은 다인들만이 느끼는 희열이다. 아마 차 끓이는 송풍회우(松風檜雨)의 소리도 들리겠다.

 

   이윽고 차를 내어 차를 마신다. 차의 묘한 작용으로 선정(禪定)은 더 깊어진다. 다정 밖을 그윽이 바라보니 물은 흐르고 꽃은 피어있다. 언제나 똑같이 물은 흐르고 꽃은 피지만 더욱 깊이 마음속에 다가온다. 어느덧 다인은 흐르는 물, 피는 꽃과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 “묘용시(妙用時)”

 

   묘용(妙用). 이 단어가 이 시를 어렵게 하고 있다. 조금은 외연이 넓고 추상적이다. 일단 ‘차의 묘한 작용’으로 본다. 차는 차를 마심으로써 다사가 일단 완성되므로 좁은 의미로 음다(飮茶)로 해석하였다.

 

   용(用). 용은 일반적으로 체(), 성()과 함께 일컬어진다. ‘체’를 통해 그 ‘성’은 드러나 쓰이니 그것이 ‘용’이다. 그래서 성(性)은 ‘용’은 통해 발현되니 그 정(靜)이 동()으로 나타난다.

 

   차를 예로 들면 차가 본래 가지고 있는 신령(神靈)한 성()을 다인(茶人)이 다사(茶事)를 통해 잘 발현시켜 작용을 일으키니, 그것이 곧 묘용(妙用)이다. 묘()는 통상의 것, 보통 예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특별한 것이다.

 

“(차를 마셔서) 묘하게 차의 기운이 작용할 때”로 새길 수 있겠다. 여기 ‘묘용시’에서는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곧 객관에서 주관으로, 차에서 차인으로 옮겨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도라 하면 ‘다사 자체를 제대로 진행하는 것’이 1차이다. 그러나 더 한 단계 나아가면 이 다사를 통해서, 또는 차를 마심으로써 차의 신묘한 기운을 받아 ‘다인이 거듭나는 것’을 뜻한다.

 

   여기 ‘묘용시’도 마찬가지다. ‘차의 신묘한 작용이 다인에게 일어날 때’, ‘다인이 차를 통해 그 신묘함을 얻어 묘각에 이를 때’의 뜻이다. 선승(禪僧)이 참선(參禪)을 통해 깨우친다면 다인은 차를 통해, 차를 마심으로써 그 신묘함을 얻는다.

 

② “수류화개(水流花開)”

 

   그러면 다인이 차의 묘용을 통해 얻은 세계는 어떠한가? 그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도다.’

 

인식과 깨침을 단계를 3단계로 보면

제1단계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山是山 水是水]

제2단계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아니다.” [山非山 水非水]

제3단계는 “산은 역시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다.” [山是亦山 水是亦水]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수류화개(水流花開)는 단순히 피상적으로 보이는 물질세계만을 의미하는 것(제1단계)이 아니라, 인식의 대전환과 묘각(妙覺)에 따른,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일체의 세계(제3단계)를 말한다.

 

   수류(水流). 물은 흐른다. 이것이 자연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며, 살아 움직여 생명이 가는 길이다. 물은 평등이며 겸손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로 뭉쳐 끊임없이 나아간다. 노자가 말한 ‘참 좋은 것’[上善]이다. 수류(水流)는 물의 흘러감이니 예로부터 시간(時間)을 상징한다.

 

   화개(花開). 꽃이 피어남은 진리가 펼쳐짐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 우주에 던지는 미소이다. 꽃은 미()이며 진()이다. 꽃은 사랑이며 행복이다. 모든 것을 밝게 하고 모든 것을 유혹하여 결실을 맺게 한다. 화개(花開)는 삼라만상의 펼쳐짐이니 공간(空間)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류화개’는 삼라만상의 ‘참’과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 곧 진선미(眞善美)의 세계이며, 자연과 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여준다. ‘수류화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다함없이 베푸는 아미타불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아미타불의 별칭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니 이 수광불(壽光佛)은 시공간인 우주 자체를 가리킨다. 곧 ‘빛의 변화’인 시간은 수()이며, ‘빛의 모습’인 공간은 광()이기 때문이다.

 

다인의 득도(得道)에 나타난 도과(道果)인 ‘수류화개’가 상징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표로 정리해 보자.

 

수류(水流)

時間

無量壽佛

平等

自由

大行(普賢)

화개(花開)

空間

眞 美

無量光佛

平和

幸福

大智(文殊)

大慈(觀音)

 

‘수류화개’의 수()를 찻물로 보고 화()를 향기로 보아 ‘차를 마시니 향기가 난다’라는 세간의 해석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몸속의 운기(運氣)의 모습으로 보아 ‘기가 순환하고 오르내리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필자는 다 지나친 의역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시는 허구가 아니고 실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강가에 있는 다정(茶亭)에 조용히 차를 마시고 나니 차의 묘한 작용이 일어난다. 이윽고 바라보니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1차적인, 직접적인 실재하는 모습, 실상(實相)은 그러하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은 위와 같은 상징을 가지고 있다하나 실재하는 현실의 세계이며, 이를 담담히 그려낸 시로 본다. 차를 마시든 안 마시든 물은 그대로 흐르고 꽃은 핀다. 그러나 차와 일체가 된 다인은 다시 객관적인 물()인 수류화개(水流花開)와 일체(一體)가 된다.

 

   수류화개(水流花開)라는 용어 자체는 당송시절부터 써왔던 진부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1구의 다반향초(茶半香初)와 적확하게 대구를 이루고 전체적으로 어울려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수()를 일반 물이 아닌 찻물[茶水]로, 화()를 차향기로 해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실재하는 현상인 수류화개(水流花開)를 보고 이를 다인이 차를 마시고 새롭게 인식하는 깨침의 경지를 그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이 시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Ⅳ. 결어

 

   지금까지 자료나 연구에 따르면 이 다반향초(茶半香初)의 시의 원작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단지 추사(秋史)가 초의(草衣)에게 보낼 때 쓴 글에서 보이므로 추사가 쓴 것은 확실하고, 직접 지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시의 운이나 평측을 전혀 맞추지 않는 것으로 근체시의 일부를 인용했다 볼 수 없다. 그리고 당시에 실학파들 사이에서 중국의 한시를 배제하여 우리글로 한시를 짓겠다는 자각이 일어난 바, 그 정신에 의해 추사가 직접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도치문 형태로 한시의 리듬조차 무시되고 한시의 정형률은 철저히 무시된다. 대신 우리말 어순으로 바뀌었고 우리의 리듬 우리의 가락이 살아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즉 처음에 센 박자가 와서 매우 강조된 것이다. 그 첫 자가 바로 “정()”이다. 이 한 글자가 이 시의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래서 “정좌묘용(靜坐妙用)”이 불가의 ‘진공묘유(眞空妙有)’처럼 빛난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파격(破格)”과 철저한 “대구(對句)”이다. 1,2구가 글자 하나하나 적확한 대구, 그 것도 이류대(異類對)와 동류대(同類對)가 어울려 정중동(靜中動)의 묘미를 보여준다.

 

   ‘다반향초’는 ‘차를 반 (끓여) 향기 처음 (나고)’로 해석함이 가장 적절함을 밝혔고, ‘수류화개’는 실제로 차를 마시고 나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을 새롭게 보고 느끼는 것으로 해석했다. 차를 마시고 차의 기운이 묘하게 작용하면서 차인은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이 수류화개로 표현되니 시공간이 새롭게 인식되는 깨침의 경지인 것이다.

 

   이 다시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이를 다시 종합하면서 고찰하였는 바, 정확한 대구와 은유, 상징 등이 매우 놀랍게 잘 정제되어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동다송에 언급된 다도를 ‘다사를 통해 깨치는 도’로 해석한 바 있다. 그 핵심이 이 14자의 시에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그 부분도 하나하나 분류하여 함축된 내용을 풀어 보았다. ‘다도’를 감각적으로 함축하여 이렇게 멋진 시어를 표현한 것을 이 시 밖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애용하는 이 차시가 비록 한시로 지어졌지만 한시의 틀과 운율을 깨고 주체적으로 우리 가락화해서 우리 가슴속에 스미었다는 것은 우리차를 과감히 동다(東茶)로 표현한 초의(草衣)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 매우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끝.

 

   ㅡ 네이버 블로그 < 차와 이야기 >  뜻대로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naver.com/gohongik/80130176067

 

 

 

 

 

[스크랩] ◀완당(阮堂)추사(秋史)선생 초상과 친필▶| ─‥‥‥ 소중한자료실

최동일 | 조회 0 |추천 0 | 2013.10.26. 16:01

 

 

 

 

허련(許鍊) 작 / 완당선생 초상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외에
차를 무척 좋아하여 다로(茶老). 고정실주인(古鼎室主人).
승설차 이름을 본 딴 승설학인(勝雪學人) 등 많은 호를 가지고 있는
서화가이자 문신인 김정희.
추사는 30살에 다산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동갑인 초의를 만나
친교를 두터히 하며 지내며 초의로 부터 해마다 차를 얻어 마셨다 한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을 갔을 때
초의가 제주도로 찾아가 같이 지내며 차나무도 심고 참선을 하였다.
추사는 쌍계사의 만허스님에게서 차를 얻곤 했는데
추사의 차 끓이는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차를 즐기던 그는 차로 인해 학문과 예술의 경지가 한층 더 승화되었다.
 
신위가 추사와 자주 왕래를 했는데
추사는 이름난 차를 새로 끓일 때 마다 시동을 시켜
신위에게 차를 한 사발씩 보내고 했는데
어느날 차를 보내준 뒤 뒤따라 신위에게 갔다.
 
추사가 소매에서 시가 적힌 글을 꺼내 신의에게 보여주자
 
" 당신의 시상이 민첩하고 기묘하여 차를 끓이는 사이에
시 한수를 짓는구려.."
 
추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 정말 그렇습니다.
풍로에 부채질 하는 동안 갑자기 지은 시랍니다.."
 
이렇듯 추사의 시를 짓는 재능 또한
차 끓이는 솜씨에 못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추사의 행서 대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靜坐處茶半香初 [정좌처다반향초]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하고

 

妙用詩水流花開 [묘용시수류화개]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듯하네.
 
靜座處(정좌처)란 고요히 앉아 명상을 하는 자리요
妙用詩(묘용시)란 靜(정)에서 動(동)으로 바뀐 상황을 말하며
水流花開(수류화개)란 물 흐르고 꽃이 피듯 자연스러움을 말함이다.
 
이때의 꽃이란 석가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꽃을 화두로 제시했을 때
많은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끙끙대는데
오직 가섭이라는 제자 혼자 미소로서 답을 대신하는지라
법통을 잇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꽃이 열림은 득도의 경지를 뜻한다고 한다.
 
이 시는 정좌처와 묘용시,

그리고 다반향초와 수류화개가 서로 대를 이룬다.

 

대라 함은 대귀, 또는 대구를 말함인데

근체식 한시에 적용이 되는 것으로

홀수구와 짝수구가 서로 반대가 되거나, 비슷하거나

또는 공통점이 있는 것을 말한다.

 

차와 향기를 물과 꽃에 비유를 하였는데
앞 구절은 道(도)의 體(체)에 해당이 되어
차가 있어 향기가 나는 마음상태를 말함이요,
 
뒷 구절은 道(도)의 用(용)에 해당이 되어
道(도)를 실현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경지와 같음을 말한다.
 
물은 가만히 두어도 낮은 대로 흐르고
꽃은 때가 되면 피는 것으로
도라는 것은 억지로가 아닌 자연의 순리 그대로 흐르는데 있다는 것이 된다.
 
추사는 차생활을 통하여 지고한 예술의 세계를 창조하여
걸출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고
나름대로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여진다.

 

 

 

 

 

 

 

 

추사 김정희의 다반향초 (茶半香初) | 錦史文學世界

 

염생이 병수 2012.04.07 03:39

 

  

 

 

                               다반향초 (茶半香初)

                               黃山谷의 詩(宋 詩人)



        萬里靑天               구만리 푸른 하늘
        雲起來雨               구름 일고 비 내리네
        空山無人               사람 없는 빈 산
        水流花開               물 흐르고 꽃이 피네
        靜坐處 茶半香初    고요히 앉은 자리에 차를 반이나 마시도록   향은 처음과 같고
       妙用時 水流花開     고요히 흐르는 시간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더라 

                                         

 

    차한잔이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평소 '茶半香初'란 글귀를 보고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모처럼 시간도 좀 있고 해서 찾아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참 어느분은 윗 글귀가 얼마나 좋았으면  아이디로 사용하기도 하더군요.
우선 싯구를 보도록 하지요.

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이 시에 관한 얘기를 두 가지 하겠습니다.
첫째는 누구의 작품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시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밝히자면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1. 누구의 작품인가

   저는 전부터 저 시가 누구의 작품인가 궁금했습니다.
우선 이 시는 추사 김정희의 "다선송(茶禪頌)" 이라고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추사가 "다반향초"라고 쓴 다음 글씨(그림화일 첨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추사는 자신을 완수(阮?; 호 阮堂과 늙은이 수자를 합한 것)로 쓰고 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추사는 차(茶)에 대해 명문을 남긴 초의(艸衣)선사와도 우정이 돈독했다고도 하며
윗 시가 황산곡 즉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자 노직(魯直), 호 산곡(山谷)]의 시로
소개되는 곳 도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모른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2. 시의 내용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 시의 번역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고요히 앉은 자리에
차를 반 넘게 마시도록 타는 향은 처음과 같고
고요히 흐르는 시간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더라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면 향기는 언제나 처음 그 맛.
신묘한 마음(지혜)의 작용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고요한 자리에 앉아, 눈으로는 색깔을
코로는 향기를 입으로는 맛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니 어느 때인지
물 흐르고 꽃피는 곳에 와 있구나.

고요한 좌선실에 차 맛은 반잔의 맛, 향기는 첫 향기
묘용을 쓰는 시간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나니.

등등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저자를 추적하다가 인터넷에서 본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에서는 이렇게 풀어놓았더군요.

고요히 앉아있는 것은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오묘하게 행동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과 같네.

또 어딘가에는,

고요히 앉은 이곳 차는 반이 되고 향기는 여전하네
신묘한 작용이 일어나니 물 흐르고 꽃 피어나누나

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애란인 여러분
어찌되었든 차 한잔이 생각나는 시간에 한번 음미하며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차의 향이 배가 될 듯 싶습니다.

 

 

[이상 조재만님의 글입니다]

 

 


1. 누구의 작품인가

난 전부터 저 시가 누구의 작품인가 궁금했습니다.

우선 이 시는 추사 김정희의 "다선송(茶禪頌)"이라고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글씨를 보면 말미에 "추사선생의 다시(茶詩)를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사가 "다반향초"라고 쓴 다음 글씨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을 완수(阮?; 호 阮堂과 늙은이 수자를 합한 것)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추사 선생의 시집을 살폈으나 저 글은 찾지 못했으며,

시 다른 글 속에 나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사와 차(茶)에 얽힌 우정으로 유명하고

차에 대해 명문을 남긴 초의(艸衣)선사의 작품인가 해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관한 어떤 책에 보니 황산곡 즉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자 노직(魯直),

호 산곡(山谷)]의 시라고 나오더군요. 저 문장이 정형 한시는 아니기에 황정견의 시집인

 황산곡집에는 나오지 않으며, 혹시 사(詞)나 다른 글의 형태로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정좌처'와 '다반향초'를 키워드로 해서 일어와 중국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특히 후자는 의미 있는 검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로서는 이런 추적에도 불구하고 확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위의 추사의 글씨는

완당평전(전3권, 유홍준 저, 학고재, 2002)에서 찾은 것인데, 추사에 대해 철저하게 파고들고

 있는 이 책에서도 '다반향초'라는 구절이 위 시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 뿐,

시 자체는 누구의 작품인지는 명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론이 없으니 싱겁네요.

 

[혹시 명확한 자료를 갖고 있는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쩌면 추사는 남의 글을 글씨로 쓰기만 했을 것도 같습니다. 하여간 황정견은 차를 좋아해서

차를 주제 내지는 소재로 한 시가 백여 편이 된다고 하며,

차를 "雲?"(수 = 여윌 수: 嫂의 女대신 月) 즉 ' 구름을 여의다 '이라고 불렀답니다.

참 낭만적인 명칭입니다.


2. 시의 내용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 시의 번역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고요히 앉은 자리에
차를 반 넘게 마시도록 타는 향은 처음과 같고
고요히 흐르는 시간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더라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면 향기는 언제나 처음 그 맛.
신묘한 마음(지혜)의 작용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고요한 자리에 앉아, 눈으로는 색깔을
코로는 향기를 입으로는 맛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니 어느 때인지
물 흐르고 꽃피는 곳에 와 있구나.

고요한 좌선실에 차 맛은 반잔의 맛, 향기는 첫 향기
묘용을 쓰는 시간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나니.

등등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저자를 추적하다가 본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에서는

이렇게 풀어놓았더군요.


고요히 앉아있는 것은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오묘하게 행동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과 같네. 



   우선 靜坐處의 뜻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다반향초'라는 말은 십인십색으로 다르게

풀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풀어도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시의 전체와 가장 어울리는 풀이일까를 두고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위의 한 번역에서처럼 '차 맛은 반잔의 맛, 향기는 첫 향기'라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해석 문장이 주장하는 내용['차 맛은 반잔의 맛...']이 누구에게나 인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확대 해석의 위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水流花開 구절과 대비해보면 '茶는 半이고 香은 初이다'라는 말이 확실해 보이는데

문제는 앞뒤의 인과관계입니다. 차가 반이 되려면, 차는 우려내는 것이니 졸여서 그

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마셔서 그렇게 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半에는 '한창, 절정'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나 일이 반쯤 되면 무르익은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도 절반이라는 뉘앙스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香은 初'라는 말은 향기가 처음이라는 말인데, '향기가 처음 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고, '향기가 처음과 같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차가 반이 되어서야 향기가 처음 나기 시작했다는 말은 논리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혹시 다도(茶道)의 분위기에 휩싸여 차를 한창 마시게 될 때 비로소 마음속에 향기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일까요. 하지만 이런 해석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차의 중요한 요소인 색(色), 향(香), 미(味) 중 하나가 완전치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음 줄의 해석은 다 다릅니다. '묘용'이라는 것은 불교나 선가에서 즐겨 쓰는 용어로서 '신묘한 작용, 불가사의한 작용, 극히 뛰어난 작용'을 말합니다. 예로서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蓋己者卽本來之虛靈, 動者爲意, 靜者爲性, 妙用則爲神也.
대개 "자기(己)"라고 하는 것은 본래 허(虛)의 작용으로서, 움직이면 "의(意)"가 되고, 고요하면

 "성(性)"이 되고, 신묘하게 작용하면 "신(神)"이 되느니라.
그러니까 妙用時 水流花開는 "'묘용'의 때에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말이 됩니다.

위에서 妙用時 부분의 해석은 다 의역이고 어떤 것은 그 정도가 심하게 보입니다.


이상을 종합하여 저는 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고요히 앉은 이곳 차는 반이 되고 향기는 여전하네
신묘한 작용이 일어나니 물 흐르고 꽃 피어나누나

[류주환 역]


   '靜坐處'는 그 뒤의 구절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차가 가져다주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그것은 바로 '정좌한 그 곳'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 앉아'라고만 해석하면 그 의미와 뉘앙스를 잃는 것이 많을 겁니다.

   '水流花開'의 구절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기가 막히게 멋집니다.

아마도 이미 주위는 물이 흐르고 있고 꽃이 피어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묘용시' - '정(靜)'과 '차(茶)'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신묘한 경지의 순간에

그 물과 꽃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똑같은 물과 똑같은 꽃을 봐도

우리의 마음 상태 여하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종의 득선(得禪)과 득선(得仙)의 순간에 통상의 자연이 새로움의 자연으로

창조되어 피어나는 것이겠지요. 전체적으로 보면, '정좌처'는 외적 공간이며 '묘용시'는

내적 시점입니다. 외적 공간, 즉 이곳에서는 여전히 깊은 향기 속에 차를 향유함이 있고,

내적 시점, 즉 지금이라는 시간에는 심상(心象)의 드높은 고양(高揚)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바로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는 시공간인 것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

-중국 송나라 황정견

茶禪一味(다선일미)를 알아야 위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정좌처에 차는 반이고 향은 시작되는데,

 묘용시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네"

재해석하면

"고요히 앉아서 차를 마시면 감로향이 시작되는데

 묘하게 운용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茶半香初는 차를 마실때 먼저 코를 사용하여 차의 향을 음미하고,

찻잔의 반정도를 마시고, 마신 차의 반정도는 목으로 흘려보내고,

나머지 반으로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면 입안에 감로가 고이고,

감로의 향이 혀 끝에 느껴지는데 이 향이 다반향초의 향초입니다.

그래서 茶半이라 하고 香初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반향초는 "차를 마시면 감로향(다반향)이 시작되는데" 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선을 할때 혀끝을 입천장에 붙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혀끝은 임맥과 독맥을 연결하는 스위치 역할을 합니다
이윽고 화두를 들어서 몰입하면 몸이 이완되고 몸이 이완되면 기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혀끝을 타고 감로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감로는 쉽게 말해서 침이 고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감로의 맛과 향을 무엇으로 표현할가요, 이 세상에서 이 처럼 맑고 깨끗하고

달콤한 맛과 향기는 달리 없을 겁니다.

아무튼 감로가 고이면 꼴깍 꼴깍 침을 삼키게 되고, 감로수가 경락을 따라 흐르게 되고,

감로수가 흐르는 곳에 기혈이 열리면서 생명력의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마치 봄비에 시냇가의 버들강아지가 피어나 듯이 감로수가 흐르는 곳에 기혈이 열리면서 우리 몸에 생명의 꽃이 피어나게 됩니다.

 

이 것을 수류화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녹차를 마시면 녹차가 막혔던 경락을 이완시키고 유통시켜 줍니다.

또한 차를 마시면서 혀끝으로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노라면 혀끝을 타고 감로가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속 차를 마시면서 감로를 음미하고 감로수를 흐르게 하면, 역시 기혈이 열리면서

 우리 몸에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것을 다선일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묘용시 수류화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하는 정민교수의 세설신어에서 옮긴 글입니다]

   고요히 앉은 곳, 차 마시다 향 사르고, 묘한 작용이 일 때, 물 흐르고 꽃이 피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추사(秋史)의 대련(對聯)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반 한시의 구문과 달리 3,4로 끊어 읽는다. 중국의 선원(禪院)이나 다관(茶館)의

기둥에 적혀 있던 글이지 싶다. 두어 해 전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를 집필할 때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이 글씨의 원본을 배관(拜觀)할 기회가 있었다.

이 중 다반향초 네 글자에 대한 풀이를 두고 여러 주장이 분분하다.

흔히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신위(申緯)와 홍현주(洪顯周) 등 19세기 문인의 시 속에서

이 네 글자는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한다.

   한결같이 차를 반쯤 마신 후에 향을 새로 피운다는 뜻으로 썼다.

뒷구절이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난다'고 했으니, 차와 향도 구분해 읽는 것이 옳다.

허균(許筠)이 '누실명(陋室銘)'에서 "차를 반쯤 따라놓고, 향 한 심지 살라보네.

酌茶半?, 燒香一炷"라 한 바로 그 뜻이다. 이덕무도 "맑은 창 정갈한 책상에서,

향 사르고 차 달이네. 明窓淨?, 焚香 茗"라고 했다. 차와 향이 한 세트로 묶여야지,

차와 차의 향을 말한 것이 아니다.

   서재에 홀로 앉아 차를 달인다. 샘물을 길어와 화로에 끓여, 최적의 상태에서 찻잎을 넣는다.

알맞게 우러났을 때 찻잔에 따른다. 빛깔을 눈으로 마시고, 향기를 코로 마시고,

이윽고 입으로 한 모금 마신다. 책을 읽느라 지친 눈을 가만히 감는다.

찻물을 머금어 내리면 식도를 타고 냇물이 흐르고 꽃잎이 피어난다.

   이때 향 한 심지를 꺼내 화로에 남은 불씨에 불을 붙인다.

조용한 빈방에서 향연이 곧장 위로 솟다가 문득 흔들리더니 긴 머리채를 비끄러맨 것처럼

매듭을 엮고는 풀어지며 흩어진다. 정신이 비로소 개운해진다.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는 사이에 마음속에 일어난 묘용(妙用), 즉 오묘한 작용은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냇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었다. 얼마나 분명한가.

우리는 그동안 너무 시끄러웠다. 징징대는 소음의 언어는 너무도 피곤하다.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고 물끄러미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누군가? 여기는 어딘가?

 

 

    ㅡ 다음 브로그 < 염생이> 염생이 병수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prk4183/1689342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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