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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보는 서울성곽
나 각 순(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연구간사)
1. 숙정문이 열리면 도성 안의 부녀자가 바람난다.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숙정문을 열어 놓게 되면 음기(陰氣)가 번성하여 장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게 되고, 따라서 도성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가 일쑤로 항상 문을 꼭꼭 닫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가뭄이 들 경우에는 숙정문이 물의 기운을 받아 비를 부르는 만큼, 양기가 높은 남문을 닫고 음기가 높은 북문을 열어 불기운〔火氣〕을 막고 물기운〔水氣〕을 청하면서 기우제(영제)를 올렸다고 한다.
중앙의 보신각 시설을 합하여, 서울성곽이 지나는 내사산과 도성 4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한성의 도시계획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중앙의 보신각은 토(土)․황(黃)․신(信)이요, 북쪽의 백악과 숙정문은 수(水)․흑(黑)․지(智)․동(冬)이요, 동쪽의 낙산과 흥인문은 목(木)․청(靑)․인(仁)․춘(春)이요, 남쪽의 목멱산과 숭례문은 화(火)․적(赤)․예(禮)․하(夏)요, 서쪽의 돈의문은 금(金)․백(白)․의(義)․추(秋)를 상징하고 그 의미를 새긴 것이다. 그리고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의 상생(相生)과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의 상극의 오행운행이 이루어지는 자연 순환의 관계를 적용하여 생명력 있는 도시설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를 보면 북대문은 수(水)․흑(黑)․지(智)․동(冬)의 뜻을 갖지 못하고 숙청문(肅淸門)이라 하였다. ‘숙청’의 뜻을 풀어보면, 엄격히 다스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다. 즉 어지러운 세상의 잘못을 고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인을 처단하여 세상을 맑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숙청문과 관련하여 어떠한 사실이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숙청문과 창의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려 두 문은 폐쇄되었다. 세종 4년(1422)에 도성이 수축되자, 수축공사를 총괄하였던 상왕 태종은 도총제(都摠制)를, 세종은 총제를 보내어 제조(提調)를 위로하고, 숙청문과 창의문을 열어 군인들의 출입로를 통하게 하였다. 그 후 세종 연간에 조정에서 이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으며, 문종 때 천주(天柱)의 지기를 보전하기 위해 계속 폐쇄되었다.
한편 이후에는 숙청문은 오행상 물의 기운과 관련된 좌향으로, 가뭄에 기우(祈雨)를 위해 열리고, 비가 많이 오면 닫히는 일이 거듭되곤 하였다. 세종 10년 가뭄이 들자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종 1년(1506)에 다시 열렸고, 중종 4년(1509), 한재(旱災)로 인해 숭례문을 폐쇄하고 숙청문을 열게 하고, 저자를 옮기고 피고(皮鼓)을 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숙청문은 가뭄과 관련하여 개폐가 반복되었다.
그런데 숙청문은 북청문(北靑門)․숙정문(肅靖門) 등과 혼용되기 시작하는데, 중종 4년 북청문 밖의 도둑을 추적해서 체포하였다는 기록에서는 북청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어 중종 18년 이후 가뭄에 비를 기원하며 숙정문을 열었다는 내용 이후 북정문(北靖門)․숙정문(肅靜門)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기록과 광해군 4년(1612) 6월 4일 남소문과 성균관 뒤 숙정문의 곡성(曲城)이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군보(軍堡)를 설치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했다는 기록 등에서는 숙정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중종 이후 북대문의 이름이 줄곧 숙정문으로 표기되었고, 숙종 38년(1703) 6월 28일 기사에 숙청문이라는 기사가 보이기도 하지만, 19세기 《대전회통》에 숙정문으로 표기되는 등 북대문의 공식명칭은 대체로 숙정문으로 이어져 왔다.
이렇게 표기가 변하게 된 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단지 대개 연산군 10년(1504) 7월 숙청문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연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기 2년 전의 내용으로 이후 혼란했던 정치상황으로 보아 실행 여부가 의심스럽지만, 그 시대상황에서 새로운 문루 이름의 등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연산군 말기의 난세를 살다간 연산군으로서는 어지러운 세상의 잘못을 고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인을 처단한다는 숙청의 의미가 불편할 수도 있었으리라. 곡절 끝에 북대문은 숙청문에서 숙정문으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숙정(肅靖)’의 뜻을 풀어보면 ‘엄격하고 단정히 한다.’는 의미이니, 어지러운 국정을 안정시키고 왕에게서 멀어진 민심과 여론을 진정시킨다는 의미가 된다.
바로 숙청을 대신한 숙정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전근대사회 민심 이반과 국정의 혼란은 자연재해로 나타난다고 했다. 숙정문의 기능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군사들의 통행보다도 절기의 가뭄에 비를 비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물과 음기의 북문인 숙정문을 열고 불과 양기의 남문인 숭례문을 닫아 비를 기원하였으니, 양기를 누르고 음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기우제를 지낼 때 가죽으로 만든 북을 치지 않고 쇠붙이로 만든 징을 치게 하는 것 또한 같은 의미이다.
또한 북쪽은 음양오행상 차가운 북풍이 음기를 몰아서 도성 안으로 불러오면 부녀자가 음란해 진다는 것이다. 또 물의 속성 중 성적 상징에 있어서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풍기문란에 이른다는 것이니, 문을 폐쇄하고 북대문의 이름을 바꿔 엄중하게 다스렸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음양오행사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부족할 때 채워주고 넘칠 때 덜어주는 상호 보완관계 즉, 상생과 상극에 의해 아름다운 조화를 꾀할 수 있는 방식이다. 문의 열고 닫음을 통해 국정의 안정과 민심을 진정시키고자 했던 숙정문의 의미를 재음미해 볼 수 있다.
한편 숙정문 안쪽의 삼청동 계곡은 도성 내 경치 좋기로 첫손가락 꼽히는 곳이었으니, 어느 덧 방탕한 남정네와 음탕한 여인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니, 이규경의 숙정문 기사가 나올 만 하였다. 조선 세조 4년 5월에 백악 정상에 중이 들어와 머물면서 매일 밤 불이 환하게 켜진 채 날이 밝았고, 그 동북쪽 산턱에는 초암(草庵)․연굴암(衍窟庵) 등 비밀 암자가 있어 탕부와 음녀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또 중종 3년 3월에는 높고 그늘진 성벽아래 으슥한 밀덕(密德, 도성의 돌산 굽이로 가장 높은 곳)이라는 곳에 선비 집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났다고 한다.
이처럼 북악에 중이 들어와 살고, 양가의 부녀자들까지 놀이터로 삼아 꾀어든 것은 숙정문 아래 삼청동 계곡이 수석이 아름다운 경승지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백악 정상에 백악신사와 성황당이 있어 사대부집 아낙네들까지 치성을 드린다는 핑계로 숙정문 인근을 왕래하게 되었던 것을 말해준다. 나아가 숙정문이 열리면 도성 내 부녀자가 바람난다는 일화는 이러한 풍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오성 이항복이 약관의 나이로 산신을 가장하여 삼청계곡에 드나들던 부정한 부녀자들을 혼내주었다는 일화와 석주 권필의 백악신사 정녀부인의 초상화를 찢어 그 원한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 등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 도끼 한 자루에 열린 창의문
서울성곽 즉 한양 도성의 둘레는 9,975보(步)로 약 18㎞로, 북쪽 백악마루에 있던 백악신사(白嶽神祠)에서 남쪽 남산마루에 있던 목멱신사(木覓神祠)까지의 지름이 6,063보(약 15㎞), 동쪽 흥인문(興仁門)에서 서쪽 돈의문(敦義門)까지의 지름이 4,386보(약 9㎞)가 되었다. 4대문과 4소문이 세워졌는데, 4대문은 정동 흥인문(興仁門), 정서 돈의문(敦義門), 정남 숭례문(崇禮門), 정북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라 하였으며, 4소문은 동북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동남 광희문(光熙門), 서북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서북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서울성곽은 백악․낙산․남산․인왕산의 내사산의 능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청계천 위를 오간수문으로 연결하였다. 따라서 성문은 산줄기의 안부와 고갯길에 위치하여 교통로가 되는데, 대표적으로 창의문은 백악과 인왕산의 경계에, 서대문은 인왕산의 남쪽 기슭 끝에, 남대문은 남산 북쪽 끝에서 청계천과 만초천의 분수령에, 광희문은 남산의 동쪽 끝에, 동대문은 낙산의 남쪽 끝 청계천 옆에, 혜화문은 낙산과 백악 줄기의 분기점에 축조되어 서울과 지방은 잇는 주요 교통로가 되었다.
여기서 현존하는 4대문․4소문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유일하게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은 숭례문의 석축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작은 규모로 쌓고, 그 위에 세운 단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어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리고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에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물매는 완만한 하며, 문루 안의 빗물을 배수하기 위한 누조(토수)가 전후 두 개씩 마련되어 있는데, 앞의 누조에는 ‘壽(수)’ ‘福(복)’이 새겨져 있고, 안의 누조는 화분과 같은 연꽃 모양의 받침으로 조각되어 이채롭다. 아울러 창의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문루 안에 걸려있는 1623년 인조반정 공신인 靖社功臣(정사공신) 명단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는 것이다.
창의문은 일명 자하문이라고도 불렸다. 깊은 계곡과 맑은 물과 바위 등 창의문이 자리한 근방의 경관이 고려의 왕도였던 개성의 자하동 만큼이나 아름다워 ‘자하골’이라 불리던 것에 기인한다. 즉 청계천이 발원하는 백운동․청풍계․유란동의 경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왕실을 비롯한 권문세가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풍광이 좋았던 곳이지만 경복궁을 지키는 서쪽 날개(우백호)가 되어 풍수지리학상으로 거의 닫혀 있는 곳으로, 이 성이 열릴 때는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즉, 창의문은 파란의 역사 속에 개폐를 반복하는 불운을 겪었다.
본래 창의문은 북한(北漢)과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태종 13년(1413)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청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려 두 문은 계속 폐쇄되었다. 그 후 세종 연간에도 조정에서 이 두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으며, 문종 때 천주(天柱)의 지기를 보전하기 위해 계속 폐쇄되었다. 이후 중종 1년(1506)이 되어서야 다시 열어놓았는데, 선조 39년(1606) 도성 수축공사가 방만하게 관리되어 심지어 창의문 아래에 혈도(穴道)를 뚫어 잡인들이 평지처럼 왕래하는 일이 빈번하니 대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폐를 거듭한 창의문 관련 역사적 사실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선명하고 크게 나타난다. 능양군을 주축으로 김류․이귀․김자점․이괄 등 서인 반정군들이 홍제원에 집결하여 세검정을 지나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에 들어가 성안을 장악하였다. 이어 광해군과 이이첨 등 대북세력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인조정권이 성립된 것이다. 이때 인조가 친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창의문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는 도성 안에 주모의 유혹에 넘어가 반정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어 반정군이 창의문에 이르렀을 때 한 자루의 도끼로 성문의 빗장을 부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문의 이름이 ‘창의’ 즉,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이고, 반정군을 그들 스스로 ‘의군(義軍)’이라 칭하였으니, 성문의 이름과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일치하는 것일까? 당시 광해군의 정치를 패도 또는 인륜을 저버린 행태로 규정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인조반정은 왕도정치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맹자의 혁명론에 일치하는 것일까? 당시 반정의 정당성이 오늘날 쿠데타․정변 등으로 재해석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들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후 전개된 정치상황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김자점의 역모가 전개되면서 정사공신의 권위와 정당성은 크게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영조 16년(1740)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의군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마땅히 개수하여야 한다고 아뢰자, 내년 봄에 개수하라고 명했다. 창의문 문루는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때까지 중건되지 못하고 폐쇄된 문이었으므로 중건을 청하는 것이었다. 영조 17년(1741) 정월에 창의문에 초루(哨樓), 즉 문루를 설치하도록 명해 중건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1956년 창의문 보수공사 때 ‘乾隆六年辛酉六月十六日午時 上樑(건륭육년신유유월십육일오시 상량)’이라고 기록된 묵서명이 발견되어, 문루공사가 영조 17년 6월 16일에 상량되어 이때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영조 19년(1743)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길에 영조가 이곳에 들러 인조반정의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시를 짓고 정사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게 하니, 이 현판은 창의문 문루 안 서쪽에 걸려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사공신은 1등 10인, 2등 15인, 3등 28인으로 모두 53인인데, 창의문에 걸려있는 계해거의정사공신 현판에는 1등 7인, 2등 13인, 3등 27인으로 모두 47인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즉, 1등공신은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최명길(崔鳴吉)·이흥립(李興立)·구굉(具宏)·심명세(沈命世) 등 10명인데, 이 가운데 김자점․심기원은 역모로 이흥립은 이괄의 난 때 경기방어사로 반란군에 투항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여 공신에서 삭제되었다.
2등공신은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신경인(申景禋)·이중로(李重老)·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신경유(申景裕)·박효립(朴孝立)·장돈(張暾)·구인후(具仁垕)·장신(張紳)·심기성(沈器成) 등 15명인데, 이괄은 이괄의 난 수괴로, 심기성과 같이 공신에서 삭제되었다. 그리고 김경징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죄로 탄핵을 받아 사사되고 삭탈되었는데, 현판에 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 신원된 것으로 보인다.
3등공신은 박유명(朴惟明)·한교(韓嶠)·송영망(宋英望)·이원(李沅)·최내길(崔來吉)·신경식(申景植)·구인기(具仁墍)·조흡(趙潝)·이후원(李厚源)·홍진도(洪振道)·원우남(元祐男)·김원량(金元亮)·신준(申埈)·노수원(盧守元)·유백증(兪伯曾)·박정(朴炡)·홍서봉(洪瑞鳳)·이의배(李義培)·이기축(李起築)·이원영(李元榮)·송시범(宋時范)·강득(姜金)·홍효손(洪孝孫)·김련(金鍊)·유순익(柳舜翼)·한여복(韓汝復)·홍진문(洪振文)·유구(柳饓) 등 28명인데, 이 가운데 김련의 이름은 삭제되어 있다.
인조반정 이후 정치상황은 서인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반정에 참가한 공서(功西)와 김상헌(金尙憲) 등 직접 참여하지 못한 청서(淸西)로 나누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정사공신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창의문에 걸게 했던 영조의 경복궁 서쪽에 있던 잠저 이름이 또한 창의궁(彰義宮)이었으니, 영조는 인조반정에서 표방한 ‘의(義)’의 정신을 정치철학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문의 본래 안과 밖의 소통과 교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방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마을로, 고을에서 이웃고을로 통하는 관문이자 많은 사람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묘의 칠사당(七祀堂)에도 문(門)․호(戶)의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닫혀있는 문은 존재이유가 유명무실한 것이다. 그런데 창의문은 열리기보다는 닫혀있을 때가 더 많았던 문이다. 그렇지만 명당이 혈인 경복궁을 지키는 우백호의 지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성문으로서의 의미보다 큰 구실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창의문은 ‘창의(彰義)’, 즉 옳고 의로움을 마땅히 드러내어 세상을 밝히고자 했던 선조들의 바람을 읽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 된다. 이것은 인조반정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으나, 창의문을 둘러싼 파란의 역사를 통해 창의문의 열리고 닫힘은 의(義)와 불의(不義)의 역사적 심판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활짝 열린 창의문은 도로 옆으로 밀려나 실용성을 잃고 비록 문화재로서의 서울성곽과 창의문으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더욱이 지하에 자하문터널이 뚫려 도성 안팎을 더욱 많은 사람과 물자가 교통하는 보다 넓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소통의 의미로서의 창의문은 그 옆에 있는 한국현대사의 중심무대인 경무대․청와대로 이어져 민주화와 문화 발전의 창구로 더욱 넓혀진 공간을 상징하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성곽축조, 백성의 고통인가? 왕의 애민인가?
조선 태조 이성계는 천명을 받아 조선왕조를 열고 개시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여 왕업의 기초를 다졌다. 그런데 명목상으로는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서 쉽게 공사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국가의 대공사에 동원될 백성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왕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392년 도성 천도를 명하자 신하들이 앞 다투어 도성과 성곽이 완공되지 않았고, 개국 초기에 안팎으로 번거로움이 많아 안위가 걱정됨으로써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아를 마련하한 뒤에 천도할 것을 간언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개국공신세력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개경에 있어 신도로 이사 가는 일을 꺼려했음이 작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어 신하들은 태조 3년(1394) 아직 종묘와 궁궐을 짓지 못하였고 성곽도 쌓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서울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다지지 못한 것으로, 비록 백성들을 소중히 여겨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으나, 이 세 가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속히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담당한 관청에 명령하여 공사를 독촉하여 종묘와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아, 효성과 공경을 조종에게 바치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존엄성을 보이며, 또 국가의 세력을 길이 굳건하도록 해야 한 나라의 규모가 마련되고 만세에 길이 전할 계책이 서는 것이라 하여, 국가의 기반시설 마련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신하들은 조종(朝宗)을 받들어 모셔 효를 드높이기 위해 종묘를 세우고, 국가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궁궐을 짓고, 안팎을 지키기 위해 성곽을 쌓을 것을 지속적으로 간한다. 그런데 당장의 노역에 고단할 백성을 생각하는 왕의 마음이나 국가의 만세를 위해 성곽 축조를 간언하는 신하의 마음은 한결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이에 태조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새 도읍의 산수의 형세를 관찰하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배편으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의 편의 여부를 살피면서, 성곽 축조를 통해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세력을 보전할 계책을 마련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대공사를 일으킨다.
그러면서도 태조는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넉넉하게 구휼하도록 명하고, 근래에 도읍을 옮겨 부역이 많았던 만큼 그 외의 건축하는 일은 모두 정지하고 파해서 다시 백성의 힘을 곤하게 하지 말 것이며, 부역하다가 죽는 자가 있으면, 그 맡은 관청에서는 그 집을 복호(復戶)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복호는 공사에 동원되는 요역과 전세(田稅)를 면제해주던 일로,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위정자가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으로서, 백성을 하늘로 삼아 나라의 근본이자 정치의 으뜸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던 정치술의 하나였다. 따라서 자연재해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휼하는 민본정책의 하나였다.
세종 또한 도성의 축성과 궁궐 수축 등 국가적인 토목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깊고 큰 애민(愛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 3년(1421) 도성의 창축과정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도성 수축 논의 또한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따라서 백성들의 휴식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상왕인 태종이 현왕인 세종을 대신하여 모든 비난을 감내하고 백성의 수고로움이 안타깝지만 국사를 위해 수축공사를 일으킬 것을 거론하였으며, 그 결과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이 설치되고 팔도의 여러 고을 장정 30여만 명을 징발되었던 것이다. 또 세종 12년(1430) 공사 감역관들이 공사를 빨리 끝내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백성들을 혹사시켜 병을 얻거나 횡사하는 자가 속출하자, 불시에 현장을 감찰하여 이를 시정하고 환자를 치료하여 구제하도록 명령한다.
이처럼 성곽의 창축과 수축은 국가의 근본을 세우고 국운을 튼튼히 하고자 했던 만년대계를 세우고자 했던 나라의 안위를 위한 대역사였다. 따라서 백성들과 군사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던 왕의 애민에도 실질적인 노동력 동원과 상호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백성들의 민심동향과 왕권강화 및 국가운영의 실체가 역시 불가분의 양면성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토목공사는 점차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였던 것이니, 군주의 애민과 백성들의 애환은 동전의 앞․뒤면을 이루며 동시대의 역사상이었던 것이다. 권위 있는 방어시설물의 성곽 축조보다 여러 신분층의 단합과 화합하여 결집된 백성의 저력으로 이루어진 사회구조와 생활 자체가 무엇보다도 큰 방어력인 것이다.
이는 1409년 태종 9년(1409)년 예조 좌랑 정효복이 “부귀와 숭고함, 갑병(甲兵)과 성곽의 견고함, 산세와 형세의 험악함을 믿지 말고, 항상 조심하는 마음으로 천명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간언한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이전의 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에게 당나라 세력을 축출한 뒤에 성을 쌓는데 대한 의견이 전한다. 즉 “나라의 정교(政敎)가 바르면 비록 풀만 난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하여도 인민들이 감히 이것을 넘지 못하기에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실로 밝지 못하면 장성(長城)이 있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성곽이 외적 방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란이나 기층민의 반란에 대비하여 왕권을 상징하고 이를 지키지 위한 수단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나라를 지키는 진정한 힘은 정교를 밝게 하여 백성들이 평안하고 풍요롭게 산다면 그 자체가 국력이고 방어력이 되는 것이지, 백성들의 노역을 강요한 시설물 축조에 의해 국가와 왕권이 지켜지는 아님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4. 성곽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애환
서울성곽은 태조 5년(1396) 처음으로 백악산신과 오방신에게 개기제를 올리고 경상도․전라도․강원도 및 평안도 정주 이남과 함경도 함흥 이남 민정(民丁) 11만 8,070명을 징발하여 쌓게 되었다. 1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쌓은 도성의 길이는 5만 9,500척(약 18㎞)로 1만 9,200척의 높고 험한 곳은 15척 높이의 석성(石城)을 쌓았고, 4만 300척의 평탄한 산지에는 높이 25척의 토성(土城)을 쌓았다. 그리고 개천과 남소문천이 흘러 도성을 빠져나가는 수구(水口)에는 구름다리(홍예, 운제)를 쌓아 양쪽에 높이 16척, 길이 1,050척의 석성을 쌓았다. 이는 1구간 600척씩 총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천자문의 ‘天’자에서 ‘弔’자까지 자호를 붙여 구분하였다. 그리고 세종 3년(1421) 다시 토성은 모두 석성으로 고쳐 쌓게 되었는데, 경기․함길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평안도․황해도 민정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성곽 보수공사를 위하여 수시로 지방민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원된 민정들은 식량과 의복을 자기가 조달하여야 했고, 농한기 겨울철에 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여러 고초를 겪어야 했다. 더욱이 역군의 동원에 시간을 다투고, 할당된 지역간의 경쟁이 과열되어, 감독관들의 감역(監役)은 공명심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혹사시키니, 허기에 지치기도 하고, 병을 얻어 횡사하기도 하고, 추위에 얼어 죽기도 하는 등 동원된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1396년 1월 20일 태조는 성을 쌓은 민정들이 혹독한 추위로 얼어 죽을까 염려하여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날에는 역사를 시키지 말도록 유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에는 농사짓는데 씨 뿌릴 때를 놓치지 않게 아직 흥인문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음도 불구하고 경상도 안동과 성산의 백성을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3월 4일에는 도승통 자은(慈恩) 종림(宗林)이 전 판사 윤안정(尹安鼎)과 더불어 삼남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판교원(板橋院)을 짓고 성 쌓는 사람으로 왕래하다가 병을 얻은 자에게 의원을 청하여 병을 구료하고, 음식을 제공하면서 병이 나으면 식량을 주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왕은 쌀과 콩 및 염장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3월 4일에는 축성과 관련하여 효녀 도리장(都里莊)에게 면포를 내려주고 있다. 즉, 전라도 진원군(珍原郡) 백성의 딸 도리장이 그 부친이 성 쌓는 역사에 갔다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는 말이 “나에게는 아무 형제도 없으니 내가 가서 돌보아야 혹시나 살아 돌아오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남자 옷으로 바꿔 입고, 즉일로 길을 떠나 길가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꼭 들어가서 보았다. 판교원에 이르러 그 부친을 보게 되었다. 이때 부친의 병이 위태하므로 마음껏 구료해서 부축하고 돌아오니, 고향에서 효녀라고 칭찬하였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리게 되어 도리장에게 면포를 내려 주었다고 한다.
한편 태조 6년(1397) 1월 15일 풍해도(황해도)가 풍수재(風水災)와 병충해로 흉념이 들어 배고픔과 곤궁함에 시달리게 되자 도성축조의 부역자에게 도내의 좁쌀과 묵은 콩을 지급하였다. 이렇게 황해도관찰사가 임금에게 건의하여 성역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고, 설상가상으로 각자 식량을 가지고 부역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재고하게 하였던 실정을 통하여 공사 동원으로 인한 백성들의 애환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1월 20일에는 역군 중에 상(喪)을 당한 자와 병에 걸린 자, 노약자를 놓아 보내고 있다. 그리고 8월에는 경기 안의 백성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처럼 농한기를 고려하지 않은 노동력 동원은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백성들에게는 생존과 관련된 일이었으며, 왕으로 대표되는 위정자의 눈높이에서 시행되는 일부 식량을 내려주고 감독관에게 술을 내려 주는 등의 애민과 구휼은 실상 유명무실한 포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태조 7년(1398) 3월 3일 임금이 궁성을 쌓는 인부를 놓아 보냈는데, 이때 병들어 죽은 자가 54명으로 출신 지방의 관리로 하여금 각각 쌀과 콩을 주고 그 집을 3년 동안 복호(세금 면제)하게 하였다. 이렇게 최소한의 복지정책도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에서 사간원은 태종 17년(1417) 1월 19일에 성곽은 폭도를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라 완비해야 하지만 민정의 노동력을 사용함은 반드시 그해의 풍흉을 보아야 할 것이며, 풍년이 들어 민간의 식량이 넉넉해진 뒤에 축성해야 할 것이라고 시무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거의 자연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던 시절에 해마다 풍작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울러 조선 초기에 짧은 시기에 많은 부분을 토성으로 쌓았던 서울성곽은 보다 견고한 방위시설로 석축으로 개축해야 했고, 무너진 곳과 성문․수구 등의 보축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노력 동원은 세종 연간에 또 한 번 있었고, 이에 따른 백성들의 생활고와 애환은 깊어만 갔다.
즉 세종 4년(1422) 병조에 명하여 의원을 거느리고 공사 지역을 순시하면서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과 매장되지 않은 주검들을 두루 찾게 하였다.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할 구료소를 4개소 설치하였다. 그렇지만 감독관에게 어사주를 내리고 인부에게 음식을 내려 격려한다거나, 사후약방문격의 구료와 구휼․복호는 백성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도 없었다. 따라서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이나 군사들은 공사에 충실하기보다 생계를 위해 목숨을 걸고 법을 어기는 일을 감행하기도 했다.
특히 지역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동원령으로 인해, 백성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까운 곳은 100리, 먼 곳은 2천 리 거리에서 서울성곽 축성하는 곳까지 오고가는 노정은 고역의 연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되는 까닭에 고향 소식을 알 길이 없었던 만큼 이탈자가 생겨났으며, 점차 고된 노역과 흉년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세종 3년(1421) 도망하는 군사에 대해 초범(初犯)은 곤장 100대를 치게 하고, 재범(再犯)은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세종 3년의 축성공사는 불과 38일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각도에서 동원된 역군 30여만 명 가운데 872명이 사망한 것으로 1천명 당 3명꼴이 된다. 이에는 축성을 감독하던 제조가 병사하기도 한 것으로 역군들의 고생이 그 만큼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수축공사에는 역군의 수효가 많아져 서울에 미곡이 귀해지고,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소․말․배 등을 쌀로 바꾸어 먹어도 굶주려 병이 났다. 또 이른 봄철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공사기간 중에도 죽은 사람이 많았지만, 공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에도 병에 걸려 죽은 자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그해 6월 전라도관찰사 하연(河演)의 보고에 의하면 전라도 인부만 14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경사도 울산의 역군 중에는 부자가 함께 공사에 나왔다가 아버지가 죽으니 아들이 시체를 업고 돌아가면서 도중에 조석으로 상식(上食)을 드리며 집에까지 무사히 돌아가 안장하였다고 하여 세상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축조 당시 성벽의 성돌에 동원된 백성의 책임 구역에 출신지 이름을 새겨 넣어 공사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였다. 지금도 그 각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으니, 그들이 새겨 넣은 것은 국가적 대공사에 후세에 길이 남을 문화유적을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시대권력에 의해 삶의 한편을 맡겼던 민초들의 역사적 흔적인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서울의 역사를 상징하는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는 서울성곽의 실체는 당대의 역사(役事)가 역사(歷史)로 남아 있는 것으로, 거대한 국가권력과 당대를 살아간 실질적인 역사의 주인공인 민초들의 저력이 어울러져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산물로서의 서울성곽은 우리문화의 독특한 양식과 가치로 축조․보존된 것이지만,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고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5. 성곽 축조의 공사실명제
서울성곽 축조는 태조와 세종 연간에는 지방의 민정과 군정, 숙종 연간 이후에는 삼군문 군사들이 동원되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 성벽의 성돌이나 성가퀴(여장) 부분에 공사를 책임진 감독관이나 축성 기술자 및 재정담당자 그리고 노동력으로 동원된 민정․군정의 출신지 이름과 군문 이름을 새겨 넣어 공사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였다.
지금도 그 각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으니, 그들이 새겨 넣은 것은 국가적 대공사에 후세에 길이 남을 문화유적을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시대권력에 의해 삶의 한편을 맡겼던 민초들의 역사적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사실명제는 모든 국가사업에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여 부실 공사, 감독 부실, 물자조달의 부정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울성곽의 축조는 600여 년의 유구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실명제로 이루어진 축성 공사의 책임 소재 규명은 서울성곽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연간의 축성공사는 1차․2차 합하여 98일간 진행되었는데, 이때는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하여 높이 15척 총 연장 19,200척이었고, 낮고 평탄한 곳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는데 높이 25척, 총 연장 40,300척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실제 성곽 축조구간은 58,200척이 된다. 따라서 1,300척은 자연 암반지역을 그대로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사구간은 당시 성의 길이 59,500척을 1구간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어서 축성하였다. 2개 구간에 판사․부판사 각 1인, 1개 구간에 사․부사․판관 등 12인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였다. 그리고 각 구간마다 천자문의 글자 순서대로 순번을 정하였다. 즉 백악 동쪽의 제1구간을 ‘천(天)’ 자로부터 시작하여 낙산 - 남산 - 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는 97번째인 ‘조(吊)’ 자에서 끝나게 되었다. 또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자를 두어 임무를 부여하는 등 철저한 계획 아래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의 도성 축조에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와 서북면(평안도)의 안주 이남, 동북면(함경도)의 함주(함흥) 이남의 민정 11만 8,070명을 동원되었다. 이 당시 서울의 인구를 약 5만명 정도로 추정하면, 약 12만명의 인부를 동원한 대단히 큰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각 도별로 동원된 인부를 살펴보면 동북면 10,953명, 강원도 9,736명, 경상도 49,897명, 전라도 18,255명, 서북면 29,208명이다.
한편 공사의 실명 책임을 지우기 위하여 600척 구간 이름과 더불어 구간 책임자와 감독자의 성명과 동원된 민정의 출신 지명 등을 성벽에 새겼다. 태조 때의 석축인 남산 동측 성벽에는 경상도 구역 표시인 ‘生字六百尺(생자육백척, 천자문 42번째, 경상도 27번째)’ ‘麗字六百尺(려자육백척)’ ‘水字六百尺(수자육백척) ‘崑字六百尺(곤자육백척)’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 ‘巨字終闕○百尺(거자종궐육백척)’ ‘李字終柰字(이자종내자)’ 등의 문자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구간을 세분하여 공사를 진행했음을 알려주는 ‘十三受音(13수음)’ ‘十四受音(14수음)’ 등의 각자를 볼 수 있다. 즉 수음은 받음․쉼의 이두식 표현으로 보고 작은 구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구간 이름과 감역관이 동시에 새겨지기도 하였는데, ‘第十三受音使邦祐○(제13수음사방우○)’ ‘第五○一百判官陳○吉(제오○일백판관진○길)’ ‘第七受音判官辛用道(제칠수음판관신용도)’ ‘監役判官崔有遠一百五十尺(감역판관최유원일백오십척)’ 등의 각자가 남아있다. 또 감역관의 존재를 알리는 ‘監役沈之○(감역심지원으로 추정)’ ‘第三 金仁○(제3 김인○)’ 의 각자도 확인된다. 여기서 사․감역․판관이 축성 실무책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원된 민정의 출신지명을 알려주는 ‘星州(성주)’ ‘慶州(경주)’ ‘軍威(군위)’ ‘靑寶(청보, 청송과 진보를 합한 지명)’ ‘盈德(영덕)’ 등의 경상도 군현 이름을 새긴 각자가 장충동 남산기슭에 남아 있다. 그리고 흥인문 지역의 낮은 웅덩이 지역의 축성을 담당했던 안동과 성산 지방에서 동원된 민정들은 공사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기도 하였다
한편 세종 4년(1422) 1월에서 2월까지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대수축공사가 38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공사는 상왕인 태종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세종 3년(1421) 10월 29일 도성수축도감에서 수축 대상을 조사 보고하였다. 이때 석성이 붕괴된 곳 3,952척, 토성 24,535척으로 합계 28,487척이었으니, 도성의 절반 정도가 붕괴된 상황이었다. 이에 공사기간을 40일로 잡고 인원 40만여 명을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12월에 징발 인원이 너무 많다는 의견을 따라 32만여 명으로 결정되었다. 이외에 공장(工匠) 2,211명, 지방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올 경력(經歷)과 수령이 115명이었다.
여기서 지금 남아 있는 각자와 연계해 볼 때 혜화문 일대의 낙산 구간은 충청도 군정, 낙산의 끝부분과 동대문을 거쳐 장충체육관 바로 뒤까지는 전라도 군정, 신라호텔 뒤에서 남산 기슭은 경상도 군정, 남대문과 서대문 일대는 평안도 군정, 인왕산 구간에서 북악에 이르는 구간은 황해도 군정이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지금 남아 있는 각자를 통하여 동원된 지명의 실체를 살펴보자. 혜화문 동남쪽으로 ‘大川(대천)’ ‘烏山(오산, 예산의 옛 이름)’ ‘丹陽(단양)’ ‘結城(결성)’ ‘平澤(평택, 당시는 충청도에 속함)’의 충청도 지명이 보인다.
이어 낙산 동남쪽 기슭의 성곽 아래 부분에서 ‘同福(동복)’ ‘咸悅(함열)’ ‘金提(김제)’ ‘井邑(정읍)’ ‘扶安(부안)’ ‘沃口(옥구)’ ‘務安(무안)’ ‘海珎(해진, 해남과 진도의 합성지명)’의 전라도 지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남산의 동쪽 줄기인 신라호텔 뒤편에서 타워호텔 쪽으로 가면서 ‘咸安(함안)’ ‘宜寧(의령)’ ‘慶山(경산)’ ‘延日(연일)’ ‘興海(흥해)’ ‘基州(기주, 풍기)’ ‘順興(순흥)’ ‘河陽(하양)’ ‘己長(기장)’ ‘蔚山(울산)’ ‘禮泉(예천)’ ‘星州(성주)’ ‘善山(선산)’ 등의 경상도 지명의 각자가 남아있다.
그리고 인왕산 기슭이 시작되는 경희궁 서쪽 성벽에 ‘兎山(토산)’이라는 지명을 새긴 성돌이 성곽 발굴 복원과정에서 확인 정비되었으며, 사직터널 위를 지나 성벽을 따라가다가 ‘鳳山(봉산)’ ‘瑞興(서흥)’ 등 황해도 지명을 새긴 각자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남대문 남쪽에서 퇴계로 위 힐튼호텔 아래 복원 정비된 성곽 성돌에 ‘通海下末(통해하말)’ ‘○○上末(○○상말)’ 등의 각자가 남아있어, 상말․하말 등 평안도 주민이 축조했던 구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글자와 더불어 통해라는 평안도 지명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상말․하말은 황해도 축성지역에서도 보인다.
한편 세종 때 도성을 크게 수축한 이후 280여 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다시 도성 수축공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때 약 5년간에 걸쳐 3군영이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 7,081개를 축조하는 대대적인 도성 수축이 있었다. 특히 숙종 31년과 32년 사이에 공사 진척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사방 2척(약 60㎝)의 정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벽돌 쌓듯이 치밀하게 축조하였고, 보수하는 곳은 그 부분 전체를 반듯한 돌로 새로 쌓았다. 이때 축조된 성벽은 축성시기와 축성 담당자의 소속과 이름을 새겨놓은 성벽의 각자가 지금도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동대문 바로 북쪽에 ‘訓局 策應兼督役將十人 使韓弼榮 一牌將折衝成世珏 二牌將折衝全守善 三牌將司果劉濟漢 石手都辺首吳有善 一牌辺首梁六賢 二牌辺首黃承善 (三牌辺)首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改築(훈국 책응겸독역장십인 사한필영 일패장절충성세각 이패장정충전수선 삼패장사과유제한 석수도편수오유선 일패편수양육현 이패편수황승선 삼패편수김정립 강희사십오년사월일개축)’라고 새겨져 있어 강희 45년 즉 숙종 32년(1706)에 훈련도감에 소속된 사․패장․석수도편수․편수 등 공사 참여한 책임자를 알 수 있으며,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한 공사실명제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퇴계로 위 남산 초입의 성벽에도 같은 해에 수축공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康熙四十五年丙戌三月日 訓局 牌將全守善 石手吳有善(강희사십오년병술삼월일 훈국 패장전수선 석수오유선)’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이로써 남대문 지역을 동대문 지역보다 한 달 앞서 수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숙정문에서 혜화문 쪽으로 ‘禁營 牌將李山龍 戊戌八月日(금영 패장이산룡 무술팔월일)’이라는 각자가 있어 이곳은 숙종 44년(1718)의 금위영 군사에 의한 공사구간도 확인된다.
한편 ‘排始(배시)’ ‘始面(시면)’ ‘始(시)’ ‘造(조)’ ‘上末(상말)’ ‘下末(하말)’ 등 세종 연간에 공사구역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각자만 남아 있는 곳이 있으며, 마모되어 읽을 수 없는 부분은 부지기수이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에는 동원된 민정의 출신지와 감독관, 조선 후기에는 축성 책임 군정들의 직책과 성명을 성벽에 새겨 남겨 놓았다. 즉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도성의 축조와 수축 과정에서 모두 공사실명제를 실시함으로써 그 책임소재를 엄격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사실명제의 정신은 오늘날 좋은 전통으로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6. 서울성곽 구간별 민정 동원지역
1. 태조 연간
태조 연간의 축성공사는 1차․2차 합하여 98일간 진행되었다.
1차 축성공사는 태조 5년(1936)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동안 이루어졌다.
이때 공사구간은 당시 성의 길이 59,500척을 1구간 600척씩 총 97구간으로 나누어서 축성하였다. 즉 백악 동쪽의 제1구간을 천자문의 첫 글자인 ‘천(天)’ 자로부터 시작하여 낙산~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는 97번째인 ‘조(弔)’ 자에서 끝나게 되었다. 또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자를 두어 임무를 부여하는 등 철저한 계획 아래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의 도성 축조에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와 서북면(평안도)의 안주 이남, 동북면(함경도)의 함주(함흥) 이남의 민정 11만 8,070명을 동원되었다. 이때 각 도별로 동원된 인부를 살펴보면 동북면 10,953명, 강원도 9,736명, 경상도 49,897명, 전라도 18,255명, 서북면 29,208명이다. 이때에 동원된 지역별 담당구역은 다음과 같다.
○ 동북면 함흥 이남 : 백악 마루에서 숙정문까지 ‘天~日’ 자까지 9개 구간 5,400척
○ 강원도 : 숙정문에서 동소문까지 ‘月~寒’ 자까지 8개 구간 4,800척
○ 경상도 : 동소문에서 숭례문까지 ‘來~珍’ 자까지 41개 구간 24,600척
○ 전라도 : 숭례문에서 돈의문까지 ‘李~龍’ 자까지 15개 구간 9,000척
○ 서북면 안주 이남 : 돈의문에서 백악 마루까지 ‘師~弔’ 자까지 24개 구간 14,400척
또한 동원된 민정의 출신지명을 알려주는 ‘星州(성주)’ ‘慶州(경주)’ ‘軍威(군위)’ ‘靑寶(청보, 청송과 진보를 합한 지명)’ ‘盈德(영덕)’ 등의 경상도 군현 이름을 새긴 각자가 장충동 남산기슭에 남아 있다. 그리고 흥인문 지역의 낮은 웅덩이 지역의 축성을 담당했던 안동과 성산 지방에서 동원된 민정들은 공사가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돌아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동소문에서 숭례문 사이의 경상도 민정이 동원된 구간이 축성구간에 지명이 새겨져 전함으로써 그 실제를 알 수 있다. 이때 흥인문 공사에 있어 공사기간을 마치지 못하게 되자 경상도도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10일간의 공기 연장을 청하였다가,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가 농사철에 차질이 없게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공사 책임지역의 목민관이 공사 인력동원의 책임을 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이어 1396년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경상․전라․강원도의 민정 79,400명을 동원하여 2차 축성공사를 진행하였다. 또 그해 8월에는 경기 백성을 불러 도성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한편 2차의 도성 축조공사가 끝난 뒤에도 태조 6년(1397) 1월에 풍해도(황해도)의 민정을 동원하여 도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동대문 좌우에 옹성을 신축하고, 8월에는 경기도 민정을 동원하여 또 다시 무너진 곳을 보수하였다. 이렇게 서울성곽 축조공사는 대공사 후에도 토성의 결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부분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태조 7년(1398) 5월부터 서울성곽의 보전관리 책임을 경기좌도와 충청도 주군에게 맡겨 7월 27일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정 3,700명이 동원되어 도성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2. 세종 연간
세종 4년(1422) 1월에서 2월까지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대수축공사가 38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공사는 상왕인 태종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세종 3년(1421) 10월 29일 도성수축도감에서 수축 대상을 조사 보고하였다. 이때 석성이 붕괴된 곳 3,952척, 토성 24,535척으로 합계 28,487척이었으니, 도성의 절반 정도가 붕괴된 상황이었다. 이에 공사기간을 40일로 잡고 인원 40만여 명을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12월에 징발 인원이 너무 많다는 의견을 따라 32만여 명으로 결정되었다. 이외에 공장(工匠) 2,211명, 지방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올 경력(經歷)과 수령이 115명이었다. 이때의 지방별 인원배치와 구간은 다음 <표>와 같다.
세종 3년(1421) 도성수축계획
도 별 |
담당 구간 |
석성 붕괴처 |
토성 붕괴처 |
동원인원 |
경기 |
天~辰 13구간(백악에서 동쪽) |
397 |
1,545 |
20,188 |
함길도 |
宿~列 2구간 |
144 |
386 |
5,208 |
강원도 |
張~來 3구간 |
110 |
1,730 |
21,200 |
충청도 |
署~歲 10구간 |
867 |
4,389 |
56,112 |
전라도 |
律~麗 15구간 |
570 |
3,902 |
49,104 |
경상도 |
水~海 22구간 |
260 |
7,094 |
87,368 |
평안도 |
鹹~翔 7구간, 西箭門 옹성 포함 |
626 |
3,391 |
43,392 |
황해도 |
龍~弔 25구간 |
978 |
2,098 |
39,888 |
합 계 |
97구간, 28,487척 |
3,952척 |
24,535척 |
322,460명 |
여기서 보이는 8도의 공사구간을 지금 성벽에 새겨 남아 있는 지방 이름과 연계해 볼 때 혜화문 일대의 낙산 구간은 충청도 군정, 낙산의 끝부분과 동대문을 거쳐 장충체육관 바로 뒤까지는 전라도 군정, 신라호텔 뒤에서 남산 기슭은 경상도 군정, 남대문과 서대문 일대는 평안도 군정, 인왕산 구간에서 북악에 이르는 구간은 황해도 군정이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왕조실록》 등 기본사료에는 전하지 않지만, 지금 남아 있는 각자를 통하여 동원된 지명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다. 혜화문 동남쪽으로 ‘大川(대천)’ ‘烏山(오산, 예산의 옛 이름)’ ‘丹陽(단양)’ ‘結城(결성)’ ‘平澤(평택, 당시는 충청도에 속함)’의 충청도 지명이 보인다.
이어 낙산 동남쪽 기슭의 성곽 아래 부분에서 ‘同福(동복)’ ‘咸悅(함열)’ ‘金提(김제)’ ‘井邑(정읍)’ ‘扶安(부안)’ ‘沃口(옥구)’ ‘務安(무안)’ ‘海珎(해진, 해남과 진도의 합성지명)’의 전라도 지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남산의 동쪽 줄기인 신라호텔 뒤편에서 타워호텔 쪽으로 가면서 ‘咸安(함안)’ ‘宜寧(의령)’ ‘慶山(경산)’ ‘延日(연일)’ ‘興海(흥해)’ ‘基州(기주, 풍기)’ ‘順興(순흥)’ ‘河陽(하양)’ ‘己長(기장)’ ‘蔚山(울산)’ ‘禮泉(예천)’ ‘星州(성주)’ ‘善山(선산)’ 등의 경상도 지명의 각자가 남아있다.
그리고 인왕산 기슭이 시작되는 경희궁 서쪽 성벽에 ‘兎山(토산)’이라는 지명을 새긴 성돌이 성곽 발굴 복원과정에서 확인 정비되었으며, 사직터널 위를 지나 성벽을 따라가다가 ‘鳳山(봉산)’ ‘瑞興(서흥)’ 등 황해도 지명을 새긴 각자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남대문 남쪽에서 퇴계로 위 힐튼호텔 아래 복원 정비된 성곽 성돌에 ‘通海下末(통해하말)’ ‘○○上末(○○상말)’ 등의 각자가 남아있어, 상말․하말 등 평안도 주민이 축조했던 구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글자와 더불어 ‘통해’라는 평안도 지명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상말․하말’은 황해도 축성지역에서도 보인다.
3. 숙종 연간
세종 때 도성을 크게 수축한 이후 280여 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다시 도성 수축공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때 약 5년간에 걸쳐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영이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 7,081개를 축조하는 대대적인 도성 수축이 있었다. 특히 숙종 31년과 32년 사이에 공사 진척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에 남아있는 각자를 보면 흥인문 바로 북쪽에 훈련도감을 의미하는 ‘훈국(訓局)’이 보이며, 숙정문과 혜화문 사이에 금위영을 뜻하는 ‘금영(禁營)’이 보여, 북악산 좌우에는 금위영 군사가, 낙산과 남산 일대는 훈련도감 군사가, 인왕산 일대는 어영청 군사가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4. 4대문 4소문의 축조 담당자
도성을 축조하기 위해서 태조 때는 도성조축도감, 세종 때는 도성수축도감 등 임시기구가 설치되었다. 이 기구에는 도제조 이하 제조․사(使)․부사․판관․녹사 등 종사원을 비롯하여, 석수․목수․미장․철공 등 각종 기술자인 공장(工匠)들이 배정되었다. 그리고 각도의 인부는 갑사․별패․시위패․진군․수군․수성군․익정군(翼正軍) 등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는 자를 제외하고 봉족(奉足:장정으로 군대에 나가지 않고 정규 군인의 여비를 부담하고 그 집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사람)과 잡색군을 뽑아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한편 성곽의 통로가 되는 성문은 기단부를 이루는 홍예(월단)와 목조 2층(남대문․동대문) 또는 단층의 문루, 경우에 따라서는 옹성으로 이루어진다. 아울러 성문 축조는 성벽 쌓기와 달리 많은 시일이 필요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남대문 문루는 태조 7년 2월에 준공되었고, 흥인문 옹성은 도성축조가 이미 끝난 태조 6년 1월에 쌓게 되었다.
또 숭례문의 경우는 세종 30년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다시 축조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성문 축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곳이었던 것을 1962년 남대문개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나타는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즉 세종 때의 숭례문 개건공사에 목수․석수․관정장(串錠匠)․노야장(爐冶匠)․조각장․안자장(鞍子匠) 등의 각종 기술자는 물론 많은 지방군과 서울 각 관청의 하인들이 동원되어 공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성문은 이러한 많은 기술자와 인부들이 장시간에 걸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4대문․4소문 축조에 동원된 인부의 구체적인 출신 지방을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사료를 통하여 살펴볼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그렇지만 서울성곽의 성문 축조는 모두 태조 연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문 축조는 태조 연간에 정해진 축성구간에 동원된 지방의 민정들이 참여하고, 도제조 이하 축성책임 관리를 비롯한 특히 축성 전문기술자인 각종 공장들이 별도로 동원되어 이들이 중심이 되어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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