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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이 글은 정확치는 않지만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때 그러니까 1998년~2003 사이로 아마도 출범하고 2년 쯤 지나서 어딘가에 기고한 글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교산 허균을 그리며
- 교산 허균을 사랑하지 못한 이 시대 -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허균,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허균.
잘 알려진 것은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사람정도이다. 그 이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알고자 하는 것 자체가 체제의 도전으로 받아드려져 감히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를 보냈다. 어찌 허균뿐이겠는가? 꽉 막힌 사회, 한쪽만으로 치우쳐진 정치문화구조에서 고작 할 수 있었던 일은 홀길동에 대한 연구요, 그가 남긴 많은 시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전부였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해방이후 우리는 너무도 많은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그중 가장 뼈아픈 일은 해방된 직후 민족의 정기*1)를 바로 잡지 못했던 일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정부차원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에 소홀히 하는 어처구니 없는 지경에 놓여 있다. 김영삼 정권이 스스로 문민정부를 자처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이라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깊이 없는 자신의 인기몰이에 불과한 처사일 뿐이다. 박물관으로 쓰였던 이 건물을 헐기전에 새로운 박물관건물을 지어 안전하게 옮겨 전시될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라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가? 지금 소중한 유물이 포장된 채로 지하창고에서 햇볕을 못본 채 썩고 있다. 민족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유물을 이렇게 홀대하는 정부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노라는 으시대기에 정신이 팔려 나라의 소중한 유물은 처량한 신세로 포장된 채로 지하에서 언제일지 모를 햇빛볼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보다는 정치쇼를 엄청나게 잘 하는 대통령을 가진 나라, 생각이 깊지 못한 대통령을 가진 나라는 이렇듯 불행하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생각이 깊지 못한 대통령을 뽑은 이 나라의 국민은 지금,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해방후 50년을 넘기면서 아직도 존경받는 대통령을 한사람도 갖지 못한 이 나라는 한심한 정도를 넘어 불쌍하기 그지 없다. 정치꾼에게 계속 이용당하고 시달려야 했던 이 나라 이 땅의 백성들도 이젠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 아쉽지만 차선을 선택하고, 차악을 받아드려 이 나라의 역사를 참방향으로 움직여 나가야 하리라.
얼마전 백범 김구의 살해범인인 안두희가 김구선생을 깊히 흠모하는 박시명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백범 김구를 직접 살해한 범인인 안두희를 다시금 군에서 근무하게 하고 제대후에도 상당한 특혜를 주어 군납업자로 변신하게 한 것은 물론 지금까지 세상에 버젓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똑바로 정신이 박힌 나라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정부에서는 법을 내 세워 시효가 지나서 어찌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나라가 언제부터 그렇게 법에 꺼벅 죽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직무유기에 대해선 마음내키는 대로 사정의 칼을 들어대는 이 나라가 정부의 직무유기에 대해선 한마디도 떠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정부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면 개인이 그렇게 안두희를 살해했겠는가? 안두희를 살해한 박시명씨를 벌주기에 앞서 정부의 직무유기죄를 먼저 심판해야 한다.
심판하는 길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백성의 눈이 떠져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볼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이 나라 이 땅의 백성이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법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닐정도로 타락되어 있다. 이런 나라를 이끄는 정부가 무슨 문민정부라고 떠벌리면서 제 자랑을 해 대고 있는지 한심할 뿐이다. 아직도 문민정부라는 포장된 정부 밑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삶이 안탑깝다. 그래서 더욱더 허균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지면을 아껴 허균사랑하기에 초점을 옮겨 보자.
어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먼저 그가 몸담고 있었던 환경을 하나하나 살펴 보아야 한다. 가까운 데서부터 먼곳까지 그리고 그가 살았던 그 시대의 사회상과 더 나아가 국제관계도 고려해 본후 그가 남긴 말과 글, 행동, 일화 등을 통하여 그의 마음자리에 들어 가야할 것이다. 마음자리에 들어가는 일이 어찌 말처럼 쉬울리가 있겠는가? 잘못하다간 억지가 되기 십상인 점을 감안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객관적인 분석이 끝나면 마음을 접하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다른이는 몰라도 나는 이런 자세로 한 사람, 위대한 혼을 가진 민중의 선구자 허균을 이해하고자 한다.
알려진 대로 교산 허균은 허엽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배 다른 형인 허성을 비롯하여 한배의 형인 허봉, 누이 허난설헌이 있다. 가까이 한 사람으로는 유희경, 이정, 이징, 권필, 이안눌, 이재영, 조위헌, 허적, 기윤헌, 임숙영, 정응운, 조찬한,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김경손, 박응서, 정협, 현응민, 김윤황, 김개, 하인준, 우경방, 김우성, 황정필, 이재영, 이사호, 해안, 옥준, 송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계생, 무옥, 추섬, 이이첨 등이 있고, 스승으로 알려진 손곡 이달이 있다. 허균은 서자출신인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곡은 원주사람으로 일찌기 문장에 뛰어 났지만 서류에게 벼슬길이 막혀 있음을 알고 술과 방랑으로 저려오는 가슴을 달래가며 살았다. 불행한 스승의 삶이 허균으로 하여금 서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했고, 개혁의 의지를 다지도록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희경은 천민출신의 시인으로 특히 상례에 밝은 것으로 알려 졌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나라를 구하는 일에 뛰어 들었고 광해군 때는 이이첨으로부터 인목대비의 폐비상소를 부탁받았으나 거절하고 절교했다고 전한다.
이정은 평민출신의 화가로 옳지 않은 것과는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사람으로 어느날 재상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자 두 마리 소가 재물을 가득 히 싣고 대문을 들어서는 그림을 그려주어 재물에만 눈이 어두운 재상을 통열히 꾸짖었다고 한다. 이징은 이정과 같은 평민출신의 화가.
권필, 이안눌, 이재영, 조위헌, 허적. 이들은 전오자로 불리며 기윤헌, 임숙영, 정응운, 조찬한, 등 이들은 후오자로 불리는데 이들은 모두 모순된 세상을 한탄하고 썩은 권력과 끝까지 타협을 거부한 당당한 선비들이었다. 이들 중 특히 권필은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이 날뛰는 꼴이 더러워 구유시를 지어 비웃음을 던진 것이 알려져 심한 폭력을 당했고, 이어 귀향을 가던 중 귀향길에서 말술을 청하여 마시고 죽었다고 전한다.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허홍인, 박치의, 김경손, 박응서.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서얼금고를 없애달라고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된 후 혁명을 모의하였고, 혁명에 쓰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문경새재에서 은상을 털다 잡히어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고 죽음. 특히 서양갑은 동지들에게 "남아가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죽는다해도 이름는 크게 남을 것"이라고하여 이들의 기개를 짐작할 수 있다.
정협은 칠서들의 거사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했다.
현응민, 김윤황, 김개, 하인준, 우경방, 김우성, 황정필. 이들은 허균과 같이 혁명을 계획하다 남대문 격문사건으로 발각되어 허균과 같이 죽음.이재영, 이사호. 이들은 서류출신으로 허균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냈며 심우영과 같이 거사에 가담했다.
해안, 옥준, 송운, 서산대사, 사명대사. 이들은 중으로 해안은 허균과 동갑이고 사주가 같았으며 허균과 한 열흘을 같이 지내다 헤어지게 되었을 때 허균은 "해안을 산으로 보내면서"라는 제목의 글을 써 서운한 마음을 달랠정도로 둘은 가까웠다. 서산, 사명대사도 허균과 특별히 친했는데 서산대사가 죽자 제자들이 대사의 비문과 문집서문을 허균에게 부탁할 정도로 가까웠고, 사명대사의 비문과 문집발문도 허균이 지었다.
계생, 무옥, 추섬. 게생은 기생출신의 여류시인이요, 무옥은 원부사*2)를 지은 여류작가이며 추섬은 허균의 첩으로 허균과 죽음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 졌다.
교산 허균은 1598년(선조22년) 생원이 되었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세자시 강원설서를 지냈다. 그후 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황해도도사,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을 지냈고, 1602년 사예, 사복시정을 거쳐 전적, 수안군수를 역임했고, 1606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였다. 1610년 진주부사를, 1613년 계축옥사 직후 예조참의, 호조참의, 승문원부제조를, 1617년 좌참찬*3)에까지 지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안으로는 광해군때였고, 나라밖으로는 명나라 후기로 조선과는 거래가 빈번했던 시대였다. 나라안은 매관매직, 부정부패로 탐관오리가 판을 쳤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일은 뒤로 밀려 가치관의 혼동시대를 맞고 있었던 안타까운 세상이였다. 지배지식층은 나태와 안일에 빠져 공리와 공담만 일삼으며 세월을 보냈고 급기야 개인감정과 권력획득을 목표로 하는 훈구와 사림의 떳떳치 못한 대립으로 무오사화는 일어났고 잇달아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사회의 혼란상은 더욱 격심해져 갔고, 도처에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탐관오리들만이 들끓었다. 그야말로 사회상은 극도의 분열과 빈곤,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교산 허균은 널리 알려진 홍길동전을 비롯하여 교산사화, 성소부부고, 성수시화, 도문대작, 한년참기, 비한정록 등을 쓴 것으로 전한다. 홍길동전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한문으로 쓴 것이다. 홍길동전을 교산이 썼고, 그것도 한글로 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홍길동전이 전해 주고자 했던 뜻을 깊이 살펴 보아야 한다.
먼저 가족들을 중심으로 교산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자.
교산 허균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이 살았던 집이 강릉 초당에 있다. 그대로 버려두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초라하게 안내판만이 외롭게 서 있다. 지금 그곳은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데 집을 관리해주는 한 주민이 이웃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가 두고간 순하디 순한 개를 세 마리나 키우면서 덩그렁한 집을 지키고 있다. 호수 바로 옆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당집은 꿈많은 교산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어 철썩이는 파도소리, 솔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된사람으로의 자람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도 동인의 핵심이었던 아버지 허엽에게서 복잡한 나라의 흐름을,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진 큰형 허성에게서 침착을, 일찍 세상을 떠난 바로 윗형인 허봉에게서 학문에 대한 열정과 격렬함을 그리고 밝은 머리를 지녔지만 당시 사회의 몰이해 때문에 행복할 수만 없었던 시집생활로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던 누이인 허난설헌에게서 남녀차별의 극심한 갈등을 체험했던 것이다. 또한 서자 출신인 스승 이달에게서 시를 배우면서 신분차별의 적나라한 현장을 직접 목격했으며 세상를 바로 볼 수 있는 바른 눈을 띄우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학문은 깊이를 더하면서 유학, 불학, 도학, 천주학, 심지어는 단군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학자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는 폭넓은 자세를 보였다.
유교라는 큰 흐름이 사회를 감싸고 있던 시대에 태어나 유교집안에서 자란 허균은 성소부부고*4)의 학론에서 "옛날에 학문(학문)하던 사람은 자기 몸만 착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개 이치를 깊이 공부해서 온 천하의 변고에 대응하고… "라고 밝혀 자기만을 위하는 학문보다는 이웃을 위하는 학문의 길로 그 방향을 잡고 있다. 자신의 안일과 영달만을 일삼던 당시의 유학자들의 학문관을 부정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비리를 바로 잡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학문이 되어야 함을 감조하고 있다. 당시의 사회는 유교사회로의 경직된 틀을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바른 유학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유학을 닦아야만 양반계급로서 최소한의 자격이 주어진 셈이고 나아가 벼슬을하여 지배층으로의 자리를 굳힐 수가 있었던 것이다. 유학 이 외의 어떤 학문도 정통학문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었으며 유학 중에서도 공.맹과 정.주의 학설만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므로 불학과 도학을 한 사람은 물론 유학 중에서도 정통이라 일컫는 것 이 외의 유학을 하면 이단으로 사회에서 격리되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독단은 이황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왕양명*5)이 감히 방자하게 우리 주자를 배척하고 함부로 그럴듯한 여러말을 인용하여 억지로 끌어다 붙이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허균의 학문관은 독특하게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이화는 "허균은 유학도이기는 하나 정통 유학도는 아니였으며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되었으나 유학만이 그의 학구의 대상은 아니였다고 볼 수 있다"라고 평가하여 허균의 학문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당시의 사회적 폐쇄성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반 유교적인 행동과 학문태도는 놀라운 것이고, 필연적인 귀결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유학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유학도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갔으며 그의 본래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에 의하여 본질로의 회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학은 작은 형인 허봉의 영향으로 불교에 접하게 되었으며 그후 그의 본래적 반항의 기질로 인하여 더욱 깊이 불학에 뛰어 든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삼척부사에서 쫒겨난 것도 유학자로서 불교에 열중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탄핵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삼척부사에서 쫒겨난 허균이 벗 최분음에게 자신의 심정을 편지로 띄웠다. 여기서 그의 불학에 대한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제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음에는 조금도 걸림이 없습니다...... 불경을 읽지 않았더라면 거의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뻔했다고 늘 말하였습니다. 거듭 연구하여 그 숨은 뜻을 살펴보니 심성이 저절로 밝혀져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하였습니다. 그때에 내가 배운 정자나 주자의 학설을 조금 취하여 그들의 학설 중에서 심성에 관해 그 같고 다른 정을 견주어 참과 거짓을 헤아려서 분석하고 논증하였더니 자못 저절로 얻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글을 지어 그 뜻을 밝혔는데 부처를 믿었다고 하는 것은 이를 가리킨 듯 합니다. 제가 오늘날 미움을 받아서 여려번 명예를 더러혔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한점의 동요도 없습니다. 어찌 그것으로 즐겨 내 정신들 상하게 하겠습지까?"
허균은 위로는 유학을 높여서 선비의 습속을 밝게 하면서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친다면 그 다스림은 다 같은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교외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불교를 접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진리는 같다)라는 전제 위에서 접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허균의 도학에 대한 태도는 불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개방적 성격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이 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릴때 그냥 읽었다면 성장함에 따라서 도의 깊이를 크게 체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허균이 도를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현묘하고도 어지럽게 얽혀서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면서 주역과 중용에서는 밝히지 못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허균에게 있어 도학의 신선사상은 천상보다는 현실에서 신선의 땅을 이루려는 데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허균에게 있어 천주학은 그의 개혁적인 생각을 구체화 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안정복의 천학고에서, 박지원의 연암집에서 허균이 천주교를 맨 처음 소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믿고 따랐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학에도 깊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천주교인이였는지는 좀더 따져볼 일이지만 천주학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드렸을 뿐만이 아니라 깊이있게 공부한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학문적 탐구열과 본래적 반항의 기질은 자연스럽게 이 새로운 세계관을 담고 있는 천주학에 몰입하도록 했을 것이다. 특히 남존여비와 신분차별이 극심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천주학이야말 그에게는 복음으로 닦아 왔을 것이다. 천주교의 평등과 박애의 정신은 당시의 현실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받아드리는데 그 어떤 주저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배달겨레가 서면서 온 나라 백성을 하나로 묶었던 하늘, 땅, 사람이 하나인 것을 널리 알린 단군*6)의 생각도 그에게는 당연하게 받아 드렸던 우리 사상이었다. 그 어떤 점에 있어서 보다 주체적이고자 했던 허균의 삶은 우리의 문화와 사상을 떼어 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허균이 한 공부는 종교의 본질적인 면들을 섭렵하는 가운데서 허균만이 갖는 독특한 허균사상을 형성시켜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테두리를 그어놓고 그 속에 안주하기 보다는 과감하게 주위의 것을 받아드리는 그의 자세는 열린사고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이러한 학문이 바탕이 되어 때로 그의 행동은 파격을 치달기도 한다. 관직을 잃고 또 임명되었던 것도 그의 깊이 있는 학문과 파격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부는 그의 개혁의지를 표출하는 데에 있어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 있다.
교산 허균의 생각은 그가 지은 호민론에 잘 나타나 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민중뿐이다. 이 민중은 물보다도 더 무섭고, … 그런데 통치꾼들은 제 욕심대로 이들을 천대시하고 혹사하고 있다."라고 하여 민주주의로 표현되는 개혁사상의 일단을 밝히고 있다. 절대의 권력이 임금 한 사람에게만 몰려 있는 당시를 생각한다면 군주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그리는 허균의 생각은 가히 파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의 평등과 박애에 대한 생각은 앞에서 밝힌대로 학문으로, 몸으로 체득한 것으로 그 스스로 실천하려고 몸부림을 쳤으며 이러한 바탕사상이 그를 개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같이 서얼금고의 철폐, 여성의 개가금지에 대한 부당함, 천민에 대한 인권탄압의 부당성이 바로 허균이 시도하게 된 혁명실천의 근본이 된다고 하겠다. 맹목에 젖어있던 당시 선비들의 눈에는 점잖치 못하고, 예의바르지 못한 허균으로 비쳤을 것이고 그의 깊이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사상적인 적과 상대적인 권력의 적으로 몰고가 결굴에는 허균을 이단자로, 역모의 괴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균은 어느 때나 자신은 한점의 동요도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는 국방이론에도 밝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탁월한 국방정책가로서의 허균의 끝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이론가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병론"과 "서변비로고서"에서 주로 자신의 국방정책을 밝히고 있다. 오늘의 역사는 임진왜란*7) 8년 전에 임진왜란을 예언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율곡을 높이 평가하면서 병자호란*8) 20년 전에 병자호란을 예언한 허균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를 하고 있지 않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반역자를 높이 평가해야 하는 부담으로, 두려움을 느껴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병자호란의 예언 뿐만이 아니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을 제시했는데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허균을 다시금 제대로 평가하여 우리 역사, 나아가 우리지역의 귀중한 인물로 되살려야 한다.
1618년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반란을 꿈꾸다 발각되어 사지를 찢기는 참형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꿈꾸어온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의 혼은 아직도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 애닯픈 그 과정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지금으로부터 한 십 수년전에 "민중의 선구자, 허균의 반역"이라는 제목으로 허균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허균을 살리지 않고는 이 땅의 역사는 바로 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 김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우리의 역사는 이제서야 새로운 길로 접어 들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으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고 말았다. 형편없는 김영삼 정권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를 건 것이 아직도 나에겐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또한 김대중 정권에 걸었던 비중있는 기대도 무너진 것은 마찬가지 였다. 비교적 민주주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얼마간의 기대를 걸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실망 또한 한없이 컸었음을 밝히는 바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여했던 두 사람의 인생역정을 결코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이 디디고 섰던 바탕이 민족적이지 못하다는 사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을 늦게 깨달은 나 자신을 책할 뿐이다. 권력을 향해 치닫기만 했던 삐둘어진 그들의 정치관은 알맹이 없는 것이었고, 우리의 국민을 좀더 깨우치기 위한 하늘님의 가르침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그들이 하는 정치는 코메디 수준에 불과하다. 진정, 국민을 감동시키는 정치는 이 땅에서 싹 틔울 수 없는 것인가?
그래서 허균의 꿈은 지금도 꾸고 있다. 깨어진 허균의 꿈, 그러나 언젠가 이루고야말 허균의 꿈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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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1)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하면서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제헌국회내에 두었던 특별위원회.
1948년 9월 22일 제정되어 공소시효를 공포일로부터 2년이 되는 1950년 9월 22일까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은 제정당시부터 친일분자들의 견제를 받았는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관직에 있던 사람을 중용하였던 이승만대통령이 이 법률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시작되자 일제강점기에 헌병, 경찰로 친일행위를 한 경력이 있는 경찰간부를 조사하자 경찰이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에 쳐들어와 직원을 연행하고 서류를 탈취한는 등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친일분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일부 의원들이 이른바 국회푸락치사건으로 구속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후 법률이 개정되어 공소시효가 1948년 8월로 앞당겨지고, 1949년 9월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은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의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참다운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나머지 임무를 검찰에 넘기어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원부사
조선중기의 가사로 원부가, 규원가라고도 한다.
작자는 허난설헌과 무옥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내용은 조선조 봉건제도 아래서 빈 방을 지키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버림받은 여인의 한탄을 노래한 것으로 시름을 이기려는 주인공의 처절한 몸부림이 그려져 있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이 작품에 대하여 평하기를 "홀로 지내는 모습을 잘 묘사하였으며 여성다운 향기와 아름다움을 잘 내포하여 비록 옛 문인의 염체라도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겠는가"라고 격찬하였다. 이 작품은 한문투의 고사숙어를 많이 쓰기는 하였으나 애원하면서도 온아한 맛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3)좌참찬
조선시대에 의정부에 딸려있던 정2품 벼슬.
*4)성소부부고
허균의 시문집.
8책 1책으로된 필사본. 계축년(1613년)에 쓴 이정기의 서문으로 미루어 그해 봄이나 그 전해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됨. 『성소부부고』는 스스로 편집하였고, 체재에 있어서도 참신하여 후대 문집에 모법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5)왕양명(1472∼1528)
중국 명나라 중기의 유학자.
당시의 관학이었던 주자학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않았고 선(禪)이나 노장(老莊)의 설에 심취한 때도 있었으나 학문의 벗인 담감천을 만난 무렵부터 성현의 학을 따르게 되었다. 원래가 몸이 쇄약하여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던 중 어느날 밤 석관(石棺) 속에서 깨우친 것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를 터득하였으니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다. 양명학파로서 명대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토대를 마련했다. 56세 때 묘족이 반란을 일으켜 병든 몸을 일으켜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과로와 고열로 생을 마감했다.
*6)단군
흔히들 고조선의 시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 무식한 것인가를 반증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단군은 왕이나 대통령처럼 한 나라의 임금(요새 말로 최고 통치자)를 가리켰던 직책의 이름이다. 즉 단군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처음으로 연 고조선(단군조선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됨)의 임금들에게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단순히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의 정도를 넘어 우리의 역사, 특히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바른 이해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단군(임금)으로 불려진 임금은 한 사람이 아니고 마흔 일곱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잠시 단군정신선양회에서 펴낸(1986년 2월 28일 발행) "국조 단군"에 관한 기록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옮긴다.
- 단군 한배검(檀君王儉)은 배달나라의 맨 첫째 대(初代) 임금이요, 단군은 단군국(檀君國) 곧 「배달나라의 임금(檀君)」으로서 배달나라의 모든 임금들을 통틀어 가르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배달나라의 맨 첫째 대 임금은 한 분인데, 그분을 「단군 한배검」이라 부른다. 단군 한배검을 비롯해서 이 여러 단군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일반으로 단군(배달)시대라, 또 나라를 단군 조선(檀君 朝鮮)이라, 한배 검 조선(王儉 朝鮮) 혹은 옛 조선이라 하는데 이 시대가 1,048년(서기 앞 2333년∼앞 1286년)동안이다. (중략) 제1대 단군 한배검, 제2대 단군 부루, 제3대 단군 가륵, 제4대 단군 오사구, 제5대 단군 구을, 제6대 단군 달문, 제7대 단군 한속, 제8대 단군 서한, 제9대 단군 아술, 제10대 단군 노을, 제11대 단군 도해, 제12대 단군 아한, 제13대 단군 홀달, 제14대 단군 고불, 제15대 단군 벌음, 제16대 단군 위나, 제17대 단군 여을, 제18대 단군 동엄, 제19대 단군 종년, 제20대 단군 고홀, 제21대 단군 소대, 제22대 단군 색불루, 제23대 단군 아홀, 제24대 단군 연나, 제25대 단군 솔나, 제26대 단군 추로, 제27대 단군 두밀, 제28대 단군 해모, 제29대 단군 마휴, 제30대 단군 나휴, 제31대 단군 등을, 제32대 단군 추밀, 제33대 단군 감물, 제34대 단군 오루문, 제35대 단군 사벌, 제36대 단군 매륵, 제37대 단군 마물, 제38대 단군 다물, 제39대 단군 두홀, 제40대 단군 달음, 제41대 단군 음차, 제42대 단군 을간지, 제43대 단군 물리, 제44대 단군 구물, 제45대 단군 여루, 제46대 단군 보을, 제47대 단군 고열가 -
참고로 태백산에서는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천제를 지낸다. 이 천제는 하늘 제사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은 하늘이신 환인, 환웅, 단군(왕검)님께 올리는 제사이다. 즉 우리 민족이 처음 나라를 세운, 하늘을 연 날을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선계를 다스리는 환인의 뜻에 따라 인간 환웅으로 세상에 내려가 곰(웅녀)과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얻었으며 이후 단군(왕검)이 배달민족의 시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곰을 숭배하는데 "고맙습니다."의 어원도 "곰" 같습니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하늘, 땅, 사람이 하나라는 사상의 이해가 필요하겠다.
7)임진왜란
1592년(선조25년)부터 98년까지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특히 97년의 2차 침입을 정유재란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적을 맞아 당당하게 물리치지 못하고 피난만 가는 나약한 조정(정부)과는 달리 의병이 일어나 침략군과 싸웠으며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당시 지배계급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바르게 이끌기는 커녕 당파로 갈리어 분열과 반목, 질시로 세월을 보냈으며 그 결과 안으로는 국방정책조차 세우지 못하였으며 밖으로는 명나라에만 매달려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8)병자호란
1636년(인조14년) 12월∼37년 1월, 제2차 청나라의 조선 침략 전쟁.
1627년 후금(뒤에 청)의 조선에 대하 제1차 침략(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맹약하고 양국관계는 마무리되 었다. 32년 후금은 만주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의 수도(북경)을 공격하면서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를 요구하고 황금, 백금 1만냥, 싸움말 3,000필 등 정병 3만명을 요구하여 왔다. 그후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사신접견을 거부하는 등 결전할 의사를 보이자 36년 12월, 청 태종은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여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침략하여 조선을 파죽지세로 몰아 붙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월 30일,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어 항복을 하였다.
첫댓글 이 글은 민족예술지인가(?) 어딘가에 이미 발표되었던 글입니다.
히유 한참동안 읽었네요.좋은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읽어 주어 고맙군요. 그냥 제 마음을 옮겼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