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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옥산)장씨 대종손[(大宗孫: 종통(宗統)] 내력(來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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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시조공(始祖公) - 휘(諱) 금용(金用) 부군(府君)
인동(옥산)장씨(仁同, 玉山張氏) 시조(始祖), 고려(高麗)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神號衛) 상장군(上將軍)역임. 시조공께서 역임하신 벼슬인 '신호위'는 고려 군사조직인 2군(軍)6위(衛) 중 하나며 정규군 1,000명으로 조직됐으며 수도와 국경 방위임무를 맡았다.
'상장군'은 군사조직의 최고 사령관으로 정3품(正三品)벼슬이다.
처음으로 옥산(玉山) - 현재 경북 구미시 '인동'의 옛 지명은 '옥산'이었다가 조선후기 인동으로 바뀌어 본관(本貫)을 인동으로 함 - 에 터를 잡음.
이후 천년을 자손대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재 37세 대종손(大宗孫)이신 석원(碩源)님이 옥산고택(玉山古宅)을 지키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어느 문중에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인동장문만의 큰 자랑이다. 유허지(遺墟址)인 인동에 옥산사(玉山祠)를 세워 해마다 청명(淸明)일에 제향(祭享)하며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2세 대종손 - 휘(諱) 선(善)
시조공(始祖公)의 아들. 벼슬이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금오위는 6위(衛)의 하나로 치안을 담당했으며, 상장군(上將軍)은 6위(衛)의 최고 사령관(司令官)이다.
3세 대종손 - 휘(諱) 진(震)
高麗初(고려초)의 武官(무관), 金吾衛(금오위) 上將軍(상장군)의 아들.
校尉(교위)를 歷任(역임) 하였다. 校尉(교위)는 高麗(고려)때 從(종)6品(품)부터
從(종)9品(품)의 武官(무관) 品階(품계)의 이름이다.
4세 대종손 - 휘(諱) 국신(國伸)
고려 때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책록 되었으며, 내사령(內史令)·직사관(直史官) 등을 역임하였다.
5세 대종손 - 휘(諱) 신원(信元)
내사령공(內史令公)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하였으며 관직은 전(傳)하지 않는다.
6세 대종손 - 휘(諱) 세림(世林)
고려(高麗)때 봉어(奉御)·직장(直長)·동정(同正)을 지냈다.
7세 대종손 - 휘(諱) 효우(孝友)
고려(高麗)때 官人(관인), 휘(諱) 세림공(世林公)의 아들.
선의랑(宣議郞) 위위사(衛尉寺)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역임하였다.
위위사는 나라의 의식(儀式)때 쓰는 각종 무기(武器)와 기구(機具)를 맡던 官廳(관청)이며 主簿(주부)는 從(종)7品(품) 벼슬이다.
8세 대종손 - 휘(諱) 위(偉)
고려 때 군기감사(軍器監事)를 지냈다.
9세 대종손 - 휘(諱) 인숙(仁淑)
고려 때 판통례원사(判通禮院事)를 지냈다.
10세 대종손 - 휘(諱) 순(純)
고려후기 문신(文臣). 인숙공(仁淑公)의 아들.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역임.
밀직사는 나라의 명령을 받아 하달하며, 궁을 지키고 군사관계를 맡아보던 관청.
부사는 부책임자며 봉익대부는 종2품(從二品)이다.
11세 대종손 - 균(均)
고려후기 문신, 순공(純公)의 아들. 문과(文科) 관직(官職) 3品(품)을 역임(歷任)하였으며
벼슬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2세 대종손 - 충정공(忠貞公) 송은(松隱) 휘(諱) 안세(安世)
우리 인동(옥산)장문을 대표하는 인물
고려 말의 충신(忠臣)이며 절신(節臣),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중 한 분.
호(號)는 송은(松隱). 시조(始祖) 金用府君(금용부군)의 11세손이며 문과 3품(文科 三品) 균공(均公)의 아들이다.
고려말 연경궁(延慶宮)의 정7품(正七品)인 제공(提控)을 역임하고,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 덕령부윤(德寧府尹)-충렬왕비(忠烈王妃)의 부(府)의 윤(尹)-에 이르렀다. 함주(咸洲)(지금의 함흥)에 있는 함경산맥에서 내려오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氾濫)하여 재해가 극심하였으나 해당 수령들이 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자 조정에서 그를 발탁하여 함주부사(咸洲府使)로 임명하였다. 공(公)은 함주부사로 10년 동안 재임하면서 치수(治水)에 진력하여 목판(木板)으로 만세교(萬世橋)를 놓았는데 그 길이가 70간이나 되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공의 업적을 옛날 중국의 우(禹)임금의 치수(治水)에 비유하였으며, 지금까지 만세교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함흥 낙민루(樂民樓)에 공의 업적을 기록한 현판 및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공은 모든 관직을 물러나 인동에서 은거(隱居)하며 절의(絶義)를 지켰다.
공(公)이 부임했던 함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 이 때의 교분으로 여러 차례 어찰(御札)을 보냈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다-불사이군(不事二君)-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麗運之否因寓感詩(여운지부인우감시)”란 시(詩)가 전한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이 기록한 두문동72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중 16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지은 유허비문(遺墟碑文)을 보면 공(公)의 업적과 애국충절을 잘 알 수 있다.
공의 생애와 업적은 고려사(高麗史), 순조실록(純祖實錄),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인동읍지(仁同邑誌), 옥산지(玉山志),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 이행(李行) 선생의 기우자집(騎牛子集), 김집(金集) 선생의 신독재집(愼獨齋集) 등에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송은실기(松隱實記) 1권이 전하며 개성(開城)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의 순절실(殉節室), 금구(金溝)의 서강사(西岡祠), 인동(仁同)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하고 있다.
기제(忌祭)는 매년 곡우(穀雨)에 유림향사(儒林享祀)로 지내며 묘는 실전(失傳)되었다.
1834년(순조 34년)에 충정(忠貞)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시호(諡號): 조선시대 때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해 임금의 명령(御命)으로 붙인 이름. 고인(故人: 죽은 사람)으로는 최고의 영예.
13세 대종손 - 김해공(金海公) 휘(諱) 중양(仲陽)
고려 말의 절신(絶臣), 충정공(忠貞公)의 아들.
충정공과 함께 부자(父子)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실천한 고려의 충신(忠臣).
고려 때 김해부사(金海府使)를 역임했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한 뒤 태조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좌윤(漢城左尹)(종2품) 벼슬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임종 때 유언으로 묘비에 고려 벼슬 기록을 요구했다.
“성천로중감구시(成川路中感舊詩)”란 시(詩)전하며, 묘소는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소성동(韶城洞)에 있고, 묘제(墓祭)일은 매년 음력 10월 5일이다
배(配) 숙인(淑人) 성산이씨(星山李氏)
14세 대종손 - 장령공(掌令公) 휘(諱) 수(脩)
충정공(忠貞公)의 손자. 김해공(金海公)의 아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선개국 후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세종 때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집의(執義), 호조정랑(戶曹正郞), 장령(掌令),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선공감 판사(繕工監 判事)를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불의에 굽히지 않았으며 임금께 바른 말로 정언(正言)하였다. 관직 퇴임 후 옥산에서 여생을 마쳤으며, 태종 때 시를 지어 인동의 인풍루벽(仁風樓壁)에 걸었다.
묘소는 성주군(星洲郡) 선남면(船南面) 도흥리(道興里) 내동(內洞)에 있다.
비문에 적힌 내용이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인동읍지(仁洞邑誌), 옥산지(玉山誌)에 실려 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
15세 대종손 - 휘(諱) 보(俌)
김해공(金海公)의 손자, 장령공(掌令公)의 아들. 세조 때 풍저창승(豊儲倉丞)을 지냈다.
배(配)는 숙인(淑人) 남양홍씨(南陽洪氏), 숙인(淑人) 문화유씨(文化柳氏)
16세 대종손 - 휘(諱) 맹저(孟儲)
충정공(忠貞公)의 후손, 풍저창승공(豊儲倉丞公)의 아들, 성종 때 통례원(通禮院) 통찬(通贊)을 역임했다. 이 사실이 성종실록(成宗實錄), 인동읍지(仁同邑誌), 옥산지(玉山誌)에 실려 있다. 묘소(墓所)는 칠곡군(漆谷郡) 석적면(石積面) 반계동(磻溪洞)에 있다.
배(配)는 의인(宜人) 성산이씨(星山李氏)
17세 대종손 - 휘(諱) 적손(嫡孫)
자(字)는 자장(子長), 통찬공(通贊公) 맹저(孟儲)의 장남. 성종 때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순위(忠順衛)를 역임했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 아우 신손(信孫: 진평파 분파조)과 3년 동안 시묘(侍墓)했으며 평생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朔望祭)를 올렸다.
이때부터 칠곡군(漆谷郡) 석적면(石積面) 반계리(磻溪里)를 삭제동(朔祭洞), 소학산(巢鶴山)을 삭제산(朔祭山)으로 불렀다.
배(配)는 의인(宜人) 화순최씨(和順崔氏)
18세 대종손 - 휘(諱) 혼(渾)
풍저창승공(豊儲倉丞公)의 손자, 충순위공(忠順衛公)의 장남.
자(字)는 심원(深源), 문장이 뛰어났다.
배(配)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자(字)는 헌지(獻之), 충순위공(忠順衛公)의 아들.
선무랑(宣務郞) 제용감(濟用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배(配) 의인(宜人) 김해허씨(金海許氏)
20세 대종손 - 휘(諱) 사영(士瑛)
자(字)는 경온(景溫), 주부공(主簿公)의 차남. 형[휘 사옥(士玉)]이 일찍 사망하고 자손이 없어 종통(宗統)을 이어 받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 숙부인(淑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21세 대종손 - 휘(諱) 내범(乃範)
유학자(儒學者), 자(字)는 정보(正甫), 호(號) 극명당(克明堂), 판결사공(判決事公)의 아들.
공(公)은 타고난 성품이 후중(後重)하여 어릴 때부터 범상(凡常)한 아이보다 행실(行實)이 달랐다 한다. 9세 때, 내간(內艱)을 당하니 비애(悲哀)하고 곡읍(哭泣)함이 성인과 같았다 한다.
여헌(旅軒), 한강(寒岡)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그 행의(行誼)가 드러났고, 오직 학문에 전심(全心)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공은 한 가정에 처함에 있어 화평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족당(族黨)간에 돈목(敦睦)하게 하니 향인(鄕人)들이 열복(悅服)하지 아니 함이 없었다 한다.
평생 사엽금단을 복용하였으니, 그 법에 가로되 「분노를 징계하고, 기호와 욕심을 끊고, 언어를 적게 하고, 심기를 화평하게 함이라」 이를 좌우명으로 하였으니 이로 인해 양생금단계란 저술이 있다. 공은 당대(當代)의 유학자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초야(草野)에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호를 극명(克明)이라 하였다.
인조 18년, 향년(享年) 78세에 졸(卒)하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戶曹參判)에 증직되고, 옥계사(玉溪祠) 및 소암서원(嘯巖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공(公)의 사후(事後)에 이르기를「공은 유학에 쫒아 사람이 자리위의 보배를 기약했고, 풍류는 독후라 일컬었고, 덕위는 향린에 꽉 찾더라」하였다.
칠곡군(漆谷郡) 석적면(石積面) 반계리(盤溪里)에 묘비(墓碑)가 있으니, 아들 경우(慶遇)가 비문을 지었고, 평산인(平山人) 신의균(申意均)이 글씨를 썼다. 문집이 있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정부인(貞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晉洲姜氏)
22세 대종손 - 휘(諱) 경우(慶遇)
학자(學者), 의병장(義兵將). 자(字)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당(晩悔堂), 극명당(克明堂) 내범(乃範)의 아들.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진위장군(振威將軍) 운배(雲培)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종숙(從叔) 문강공 휘 현광(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는 10여세의 나이로 할머니를 모시고 금오산·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1608년 임란 뒤, 학교를 부흥시키고자《학교의식》을 지어 학교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듬해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시행하는 식년과(式年科)에는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정구(鄭逑)가 반대파의 모해로 관직이 삭탈(削奪)당하자 경상도내 유생들을 권유하여 함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2년(광해군 4년) 어지러워 가는 조야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저법육설(著法六說)》을 지어 시행하였고, 1621년 이이첨(李爾瞻)의 행패가 심해지자「청참이이첨소(請斬李爾瞻疏)」를 올려 이이첨을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영남 유생(嶺南儒生)들과 함께 상소(上訴)하여 이를 반대했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영릉(英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동의병장에 차정되기도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喪)에 3년간 시묘(侍墓)하였고,《여헌문집(旅軒文集)》을 간행하고 제선의절(祭先儀節)》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권장하였으며,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효종 7년(1656년)에 향년 76세로 졸(卒)하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겸 경영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인동의 구포(龜浦洞)동에 묘소(墓所)가 있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선생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족후인(族後人) 청천당(聽天堂) 휘 응일(應一)이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다.
인동의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종향(從享)되고 문집(文集) 2권이 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 광산이씨(光山李氏), 숙부인(淑夫人) 수원백씨(水原白氏)
23세 대종손 - 휘(諱) 해(每+水)
자(字)는 거원(巨源), 호(號)는 삼우당(三優堂), 만회당(晩悔堂)의 아들.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여헌(旅軒)의 문하생(門下生).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 만회당(晩悔堂)과 스승인 문강공(文康公)의 엄령(嚴令)에 따라 인동 의병장으로 창의(倡義)하였다.
1642년(인조 20년)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에 등제(登第)됐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력했다. 이후 향약장(鄕約長)이 되어 후학(後學)을 가르치다가 1677년(숙종 3년) 향년 68세에 졸(卒)하였다.
배(配)는 의인(宜人) 광주이씨(廣州李氏)
24세 대종손 - 휘(諱) 우한(宇翰)
자(字)는 홍거(鴻擧), 호(號)는 삼당헌(三當軒), 三憂堂(삼우당)의 아들.
효행이 지극했으며 학행(學行)으로 추중(推重)받았다. 세작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을 역임하고 효행(孝行)으로 의가방(擬佳坊)에 천거(薦擧)되었다.
배(配)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곤산유씨(崑山柳氏)
25세 대종손 - 휘(諱) 고(暠)
생부(生父)는 휘 우원(宇遠)이나 종통(宗統)이음. 자(字)는 자완(子完).
통덕랑(通德郞)으로 통훈대부(通訓大父)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배(配)는 공인(恭人) 선산김씨(善山金氏)
26세 대종손 - 휘(諱) 석주(錫疇 )
생부(生父)는 휘 진벽(晉壁)이나 종통(宗統)이음, 자(字)는 극수(極壽).
극명당(克明堂)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광주안씨(廣州安氏), 숙부인(淑夫人) 선산김씨(善山金氏), 숙부인(淑夫人) 곤산유씨(崑山柳氏),
27세 대종손 - 인묵(忍默) 휘(諱) 광표(光表)
자(字)는 수명(秀明), 호(號)는 인묵(忍默).
극명당(克明堂)의 후손,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서천(西川) 김성용(金聖鎔)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풍산유씨(豊山柳氏)
28세 대종손 - 휘(諱) 동윤(東潤)
자(字)는 화숙(華淑), 호(號)는 옥서(玉西),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광표(光表)아들
문장과 행의(行誼)로 이름이 높았다.
배(配)는 의성김씨(義城金氏)
29세 대종손 - 휘(諱) 일섭(一燮)
자(字) 경원(景元) 통덕랑(通德郞)역임.
배(配)는 공인(恭人) 광산김씨(光山金氏), 선산김씨(善山金氏)
30세 대종손 - 휘(諱) 세목(世睦)
자(字) 성극(聖克), 배(配)는 함안조씨(咸安趙氏)
31세 대종손 - 휘(諱) 형진(衡鎭)
자(字)는 南仲(남중), 배(配)는 광주노씨(光州盧氏)
32세 대종손 - 휘(諱) 영하(永河)
생부(生父)는 휘 화진(華鎭)이나 종통(宗統)이음, 자(字)는 순약(舜若), 호(號)는 성은(城隱).
일찍부터 유계당(柳溪堂: 휘 주목疇睦)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배(配)는 풍산유씨(豊山柳氏)
33세 대종손 - 휘(諱) 무식(武植)
생부(生父)는 휘 영호(永鎬)이나 종통(宗統)이음. 자(字)는 근필(根弼)
배(配)는 광주이씨(光州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34세 대종손 - 휘(諱) 성우(性愚)
자(字)는 경안(景顔), 배(配)는 광주이씨(廣州李氏)
35세 대종손 - 휘(諱) 인규(仁圭)
생부(生父)는 휘 성균(性均)이나 종통(宗統)이음. 자(字)는 택여(宅汝)
배(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화순최씨(和順崔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