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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 하락에 대한 예방대책 2
3. 주님께서 맡기신 아름다운 것을 지킴(딤후1:12-14)
교회가 하락하는 것을 막고 교회를 지키려면 첫째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붙잡아야 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께서 맡기신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한다.
가. 내가 주님께 맡긴 것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는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있고 우리가 주님께 맡긴 것이 있다. 우리가 주님께 맡긴 것은 무엇인가?
1) 나는 주님께 무엇을 맡겼는가?
바울은 그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주님께서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맡겼는가? 재산을 맡겼는가, 생명을 맡겼는가, 인생 자체를 맡겼는가? 재산을 맡겼다고 하면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고 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로 문제가 되었으니까 그런 말은 삼가야 할 것이다.
“내 생명을 맡겼다. 살고 죽는 것을 주님께 맡겼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불가사의하게도 빨리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은 죽는다. 하나님은 왜 지켜 주셔야 할 생명을 지켜 주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자기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목숨을 구해주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새벽 기도를 하러 가다가 차에 치어 죽은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기도하러 가는데 왜 차에 치어 죽는가, 옛날과 달리 차를 타고 다니는 시대라서 그런가 하는 의문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다. 내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언제든지 오라 하시면 오고 가라 하시면 가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만큼 나를 쓰실 것이다.
나는 내 인생 자체를 하나님께 맡긴다. 이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 내 인생이 따로 있고 주님의 계획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 안에 내 인생이 있다. 내 인생은 주님께 맡겨진 것이다. 바울의 인생도 주님께 맡겨진 인생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존재와 영광스러운 장래에 대해서 주님이 맡아주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사니까 주님은 당연히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장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장래의 영광을 보장하실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실적으로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주님이 영화롭게 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존귀하게 하신다. 제사장이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옷을 입도록 해 놓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그대로 된다. 욕을 계속 하면 욕쟁이가 되고 싸움을 계속 하면 싸움쟁이가 된다. 자기가 하는 것이 곧 그 사람 자신인 것이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행하고 말하는 것이 곧 그 사람 자신이다. 개같이 행동하면 개같이 되고 소같이 행동하면 소같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우리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은 저절로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존귀하게 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자체가 존귀한 것이다.
사람들은 의사를 존중한다. 전쟁 중에는 적군이라도 의사를 존중한다. 의사라야 자기 생명을 돌보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적십자 원칙에 따라서 의료인은 죽이지 않게 되어 있다. 의사가 하는 일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니까 의사는 적군이라도 부상당했으면 고쳐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적이라도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다. 옛날에 인민군이 침략해 왔을 때도 의사는 죽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그것이 자기의 영광을 결정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귀중해질 수도 있고 천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즉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에게도 귀중하고 하나님께도 귀중한 사람이 되려면 그런 일을 하면 된다. 엉뚱한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귀중히 여겨 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 당연히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존귀한 것은 없다.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것도 존귀하지만 그보다 더 존귀한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더 존귀한 일을 하면 더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던지 그 일이 존귀한 일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해야 한다.
주님은 무엇을 지켜주실 수 있는가?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 그래서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하였다. 자기가 의뢰한 그분을 알았다.
돈을 맡기려면 그 은행이 신실한 은행인지 아닌지 알아야 한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믿지 못할 곳이 많았다. 새마을금고에 돈을 맡겼다가 날렸거나 투자하라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맡겼다가 날린 사람들이 많다. 그런즉 내가 의뢰한 자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그분이 나의 어떤 것을 지켜주실 것인지 알 수 있다. 무작정 그분이 모든 것을 지켜 주신다고 알다가 새벽까지 술 마시고 다녀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분은 지켜 주실 것을 지켜 주시는 분이니까 그분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무엇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돈은 은행에 맡기면 제일 안전하고 인생은 주님께 맡기면 제일 안전하다.
‘주님’이라는 말이 기독교 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만 쓰는 고유명사로 고정되어 버렸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했고(벧전3:6), 우리말에도 부인이 남편을 주인 양반이라고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어떤 때는 선생이라 했고 어떤 때는 주님이라고 했다. 선생이라는 말이나 주님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주님’은 나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나를 주관하시는 분에게 나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라고 한 것은 “선생님,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존경하는 사람,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보고 한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라고 한 사람을 따랐고 그래서 사도가 된 것이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선생님이 가시는 데가 어딥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교회에 오게 되었을 것이다. 권재훈 형제가 원래는 꽃대 삼촌을 가장 존경했었다고 한다. 얼마나 빠른지 맞은 사람도 언제 맞았는지 모른다는 번개같은 펀치, 마치 초음속 전투기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맞고 난 후에야 안다는 펀지를 날리는 삼촌을 가장 동경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예비군 훈련장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그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구자길이라는 사람에게서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구나.’라고 알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선생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형제는 어디로 갑니까?”라고 했을 것이다. 무어라고 했든 간에 내용은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나도 따라 가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구자길 형제는 “나를 따라 오라. 내가 길이다.”라고 했을 것이고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했던 것처럼 권재훈 형제는 그 길을 따라 대구교회로 온 것이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요즘처럼 연어나 상어나 고래를 잡는 대단한 어부가 아니고 노 젓는 배에서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그래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던 것이고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시니까 그분을 따랐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라고 물으면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교리나 지식을 가르쳐 주니까 교리나 지식을 따라 가고 있다. 그러나 교리도 지식도 아니라 “내가 길이다.”라고 하는 그 사람을 따라야 한다. 그 사람에게 인생의 길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왜 “내가 길이요.”라는 특이한 말을 했을까? 누구에게든지 길을 물으면 이라 가라거나 저리 가라고 하는데 왜 “내가 길이요.”라고 했겠는가? 잘 생각해 보자. 길이 있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길이 없으니까 “내가 길이요.”라고 한 것이다. 길이 없는 사막에서 길을 물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사막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이 어디냐고 물으면 길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사막에는 길이 없다. 그러니까 “길이 여기 있소.”라고 하지 않고 “내가 길이요.”라고 하는 것이고 “나를 따라 오시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말이 나왔고 예수님도 “내가 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처럼 도로가 많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길이 많으니까 이쪽으로 가라거나 저쪽으로 가라고 하고, 좌회전하라거나 우회전하라고 하지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길이 없는 광야에서 길을 물으면 “내가 길이요.”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다. 내가 길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 길이다. 그 사람을 따라와야 한다. 그러니까 주님은 길이 없는 데서 길인 것이다. 여러 길이 있는데 그 중에 또 하나의 길인 것이 아니라 길이 없는 세상, 길이 없는 인생에서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길이신 그분에게 우리를 맡기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사막을 늘 다니는 사람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가 죽음으로 가든지 삶으로 가든지, 그가 가는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를 따라가야 될뿐이지 ‘이 사람을 따라가다가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모르는 것이 인생이니까 나보다 앞서 있는 인생에게 나 자신을 맡겨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이번에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신랑에게 “인생을 어렵게 살 필요가 없다. 네 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사람, 존경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따라가면 그 사람처럼 된다.”고 했다.
사실은 인생은 길이 없다. 도로처럼 길이 나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갔다고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갔다고 하나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인생의 지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공한 사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일에는 길이 있지만 인생에는 길이 없다. 어떤 길을 정해 놓는다 해도 그 길을 가다가 죽을 사람도 있고 끝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일하고 다르다. 그러므로 인생을 아는 사람에게 우리 인생을 맡겨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에게 맡기는 것이다.
무엇을 맡겨야 하는가? 재산인가, 목숨인가? 재산을 맡길 수도 있고 육신의 목숨을 맡기고 갈수도 있으며 인생 전체를 맡길 수도 있고 존재와 영광을 맡길 수도 있다. 각자에 따라 다 다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존재와 영광이다. 내 존재와 영광을 누구에게 맡겨야 내 존재가 영광스러워질 것인지는 뻔하다.
베드로는 5억이 넘는 가톨릭 총수의 머리가 될 정도로 영광스러워졌다. 호숫가에서 물고기나 잡아먹고 살던 사람을 교황이 머리를 삼겠다며 자청하고 있다. 베드로는 가톨릭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그를 자기 머리로 초빙하면서 “나의 머리가 되어 주시오. 그래야 내가 5억 가톨릭 신자들의 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께 자기를 맡긴 사람은 자기의 존재와 영광도 맡겨진다.
주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를 구속하신 분으로서 우리 인격을 책임지신다. 그러므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구속된 인격의 자리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 우리의 주님으로서, 배필로서, 동역자로서 주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 맡으신 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 우리의 인격, 우리의 삶의 기반은 확고하다. 주님은 우리의 운명, 우리의 인격, 우리의 삶의 확실한 보증인이다. 주님은 우리 앞에서 우리의 운명을 사셨고 우리의 인격을 살아내셨다. 하나님의 배필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사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운명의 보증인이다.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시다(딤전2:5). 그가 우리의 보증인이신 것이다. 이 보증인이 있으므로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은행으로 보면 확실한 지불보증인이 있는 것이다. 보험회사는 전부 지불보증을 하고 있다. 우리는 보험회사에 돈을 내고 보험을 드는데 그 보험회사가 망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보험회사는 더 큰 보험사에 재보험을 들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회사가 망해도 재보험사에서 보상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사는 더 큰 보험사에 재보험을 들어 놓는다. 보험가입자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재보험사가 보증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보험을 드는 것이다. 보험회사를 창설한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전 세계 보험회사에 재보험을 받고 있다. 최고의 보증을 서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 세계의 돈을 다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주님은 우리를 보증하시는 분이다. 최후의 보증인이다. 죽음을 통해서 보증하신 분이니까 우리가 죽음에 갈 때까지 보증하신다. 죽음의 밑바닥까지도 보증하신다. 주님은 내가 맡긴 것을 그날까지 지키실 분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씨와 땅을 주셨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해방과 그 백성의 하나님의 백성됨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모세는 그 어려운 중에도 여호와의 보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래서 주 예수님의 보증을 통해서 제자들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보증인은 어떤 분인가? 확실하게 책임질 분인가? 우리의 보증인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상의 어떤 보증인도 이런 보증인은 없다. 가깝게는 우리 앞에 있는 형제가 있다. 그 형제는 나의 보증인이다. 그래서 그 형제를 보고 가는 것이다. 그 형제를 보니까 나도 그렇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형제가 그렇게 된 것이 나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안심하고 가는 것이다.
교리를 가지고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교리로는 불가능하다. 교리를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자기대로 가 버렸다. 교회가 되지 않았다.
2.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
내가 주님께 맡긴 것은 내 인생이고 내 영광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것이 있다. 디모데후서 1장 13-14절에는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하였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가 들은 바 바른 말과 주님께서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가. 아담에게 - 하나님의 동산
아담부터 다시 시작해 보면 아담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동산이다.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는 직분은 가장 아름다운 직분이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직분을 아름다운 직분이라 했는데 동산은 성전의 영원한 실재다. 하나님의 동산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영역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는 일을 맡은 것이다. 이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직분은 없다. 하나님도 동산을 통해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는데 그 동산을 지키라고 맡기셨으니 얼마나 귀중한 직분인가!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동산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한 결과 바벨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뭉치자. 성을 높이 쌓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 하나님같이 되자.”고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지고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이것이 인생고다. 높아지고 커지고 강해지고 하나님같이 되려니까 고통스러운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고통이 없다. 높아지려는 것도 없고 하나님같이 되려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는 아름다운 직분을 주셨는데 아담은 이것을 지키지 않고 자기 위치를 떠나 바벨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힘이 들고 불안한 것이다.
왕은 언제 자기 위치를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방책을 쳐 놓는다. 학문을 통해서 할 수 있으면 학문을 통해서, 사상을 통해서 할 수 있으면 사상을 통해서, 군대를 통해서 할 수 있으면 군대를 통해서, 모든 방법으로 방책을 쳐 놓는다. 조선왕조의 왕들은 특이하게도 학문을 통해서 왕권을 지키려고 했다. 주자학을 통해서, 삼강오륜을 통해서 절대로 역성혁명을 하지 못하도록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뒷받침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면 천년만년 해 먹을 줄 알았지만 일본에게 송두리째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영원히 바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에는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으로 된 거대한 신상이 나온다(단2:31-45). 그것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희랍으로, 로마로 이어지는 고대의 제국들을 의미한다. 그 다음은 영국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머리와 가슴과 배는 금과 은과 놋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발은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다. 흙과 쇠는 붙지 않는다. 겉으로 볼 때는 거대해 보이지만 뜨인 돌 하나가 그 발을 치니까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을 떠난 인간에게는 바벨론 밖에 없는데 바벨론의 운명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 아브라함에게 - 씨와 땅
아브라함에게 맡기신 것은 씨와 땅이다. 이삭이라는 씨와 가나안이라는 땅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대단히 아름다운 부탁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을 낳았고 모리아 산에서 바치고 다시 얻어왔다. 씨는 잘 보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땅은 지키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흉년이 들자 그랄 땅으로 내려갔다가 그랄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찾았다. 그 후로 야곱의 족속 70인은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400년 동안 노예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땅은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다. 이스라엘에게 - 율법과 나라
1) 율법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것은 율법이다. 그 땅을 지키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 율법은 무서운 법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 질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섬겼다. 율법을 지키라고 맡기셨는데 우상을 지켰던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인간의 소원을 추구하다 보면 우상을 섬기게 되어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 하였다(골3:5). 하나님의 소원을 추구하면 우상숭배를 할 필요가 없는데 인간의 소원을 추구하다 보니까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소원을 다 들어줄 대상을 찾는다. 이것이 우상숭배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대로 살면 하나님이 다 지켜주시니까 하나님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과 목적을 이루려고 하니까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또 다른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다. 인간의 소원을 이루려고 하다 보면 우상 숭배를 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목적을 추구하다 보니 율법으로는 안되었던 것이다.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교통사고가 나지 않거나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통사고가 나지 않고 암에 걸리지 않으려면 또 또 다른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우상이다.
2) 나라
두 번째는 나라다. 아담에게는 동산을 지키라고 맡기셨고 아브라함에게는 씨와 땅을 지키라고 맡기셨으며 이스라엘에게는 율법과 나라를 지키라고 맡기셨는데 지키는 원리는 같다.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따라야 그 나라를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국가의 특별한 이념이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군사력이 없어서 멸망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명령만 따랐으면 나라를 지켰을 텐데 그들이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석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율법을 잘 지키면 바벨론 제국이 침략해 올 수 없는가, 율법으로 바벨론 제국의 군사적인 힘으로 이길 수 있는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성벽에 화염검을 두어 바벨론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는가, 화살을 막아 주시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런데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 부름 받은 백성인지 알 수 있다. 제국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그 제국과 맞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백성이 되게 하려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제국 안에서, 바벨론 안에서 하나님의 동산,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다. 이 세상 속에는, 바벨론 제국 속에는 하나님의 거처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제국 안에서 살고 있다. 이 제국 속에서 교회를 또 하나의 국가로 만들어서 세상 국가와 싸워서 이기게 하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는 없는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교회를 지어 놓으신 것이다. 이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보장해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법과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망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 끼어 있어서 바벨론에 항복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파로 갈라져서 어떤 사람들은 바벨론에 항복해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애굽에 항복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벨론에게 무자비하게 점령당해 버렸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바벨론이 볼 때 그들이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고 있는 백성이었으면 무엇 때문에 무자비하게 점령했겠는가? 자기들을 배신하고 배반하니까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 나라를 지키려면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소명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저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라. 예수에게 - 인격
예수님에게 맡기신 것은 인격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격을 지키라고 맡기셨다. 구속은 인격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 먼저 하신 일은 마귀와 싸우신 것이다. 이 싸움은 인격이냐, 능력이냐의 싸움이다. 천사는 능력을 가지고 왔다.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으로,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진 능력으로,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능력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격으로 그것을 대항하셨다. 더 큰 능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인격으로 대항하셨다.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격을 지켜라.’, 이것이 예수님에게 맡긴 하나님의 명령이다.
만약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쇳가루로 떡을 만드셨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계속 싸움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던 것은 인격을 무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격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배가 고픈데 돌로라도 떡을 만들어 먹어야 되지 인격이 밥 먹여 주느냐?”는 것이었다. 아담은 바로 이것 때문에 사탄에게 넘어간 것이다. 아담이 그냥 넘어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40일 동안 굶겨놓고 “돌가루로 떡을 만드는 나를 따라 올래, 아니면 굶어 죽을래?”라고 물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찌 하겠는가? 굶어 죽어도 인격을 지키겠는가, 아니면 인격보다는 우선 먹고 보겠는가? 예수님은 인격을 지키셨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인격을 지키라고 맡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격으로서 인격을 지키셨다.
이것은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인격을 회복한 것이었다. 인류는 지금까지 돌가루로 떡을 만드는 놈에게 무시당해 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천사보다 나으냐? 능력이 있으면 한번 내 놓아 보라.”고 했던 것이다. 인격은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인격이 능력보다 얼마나 더 귀중한지 알았다면 아담은 속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은 인격보다 능력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넘어간 것이다. 능력을 찾으면 인격을 팔아먹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격으로서 인격을 지키고 하나님 아들의 지위를 확보하셨다.
로마서 1장 4절에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하였는데 인정되셨다는 것은 확정되셨다는 것이고 확정되셨다는 것은 경계를 정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인격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정하셨다. 하나님 아들의 지위를, 인격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되었다.
아담 시대에는 이것이 분명하지 않았다. 돌가루로 떡을 만드는 것이 사람인지, 무엇이 사람인지 섞여 있어서 분명하지 않았다. 인격의 경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격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다.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다.’ 이렇게 경계를 정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인가? 사람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인격’, 이것이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경계를 정해 놓으셨다.
예수님 이전에는 천사들이 하나님 아들로 불려졌다. 창세기 6장 2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각기 자기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의미한다. 욥기 1장 6절에도 천사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진짜 아들이 없으니까 가짜 아들들이 판을 쳤던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 되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를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를 확정하셨다. ‘천사는 절대로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 사람 밖에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확정해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후에는 천사를 가리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경계를 확정해 놓으셨다. 무엇이 하나님 아들이고 무엇이 천사인지 갈라 놓으셨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돌가루로 떡을 만들면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천사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런 데 현혹될 이유가 없다. 적어도 대구교회에 오신 분들은 그런 데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마. 교회에게 - 그리스도(교회의 생명)
교회에게 맡기신 것은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그리스도를 지키라고 부탁하셨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이다.
1) 교회 하락의 이유(그리스도를 버림)
교회가 하락한 것은 그리스도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교리다. 교회의 하락을 막으려고 300년 동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논쟁을 해서 나온 것이 교리다. 그러나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쫓겨나고 처단된 사람들이 있다. 300년 이상을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교회가 하락하고 있는데 교리가 없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없어서 교회가 하락한 것이다.
그전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하나님과 아들이 무슨 관계인지 몰랐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께 그런 것을 물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것을 물어본 사람들은 다 가버렸다. “네가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느냐? 네가 사람이 되어서 자칭 하나님이라 하느냐?”며 가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300년 동안 논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교회 하락을 막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로 교회를 지키려고 했다. 로마 가톨릭이 그것이다. 로마는 정치와 제도가 발달한 곳이다. 그 정치제도를 본따서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제도고 생명이 없는 세계의 조직이다. 가톨릭은 아주 완벽하고 튼튼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그 제도를 가르치면서 “우리에게는 이렇게 확고한 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들의 교회 소개 책자에는 “그러면 어떤 교회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통적인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는 문구를 넣어 놓았다. 가톨릭은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장 정통적인 교회고, 가장 정통적이기 때문에 1500년 동안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럴듯하고 실제로 거기에 들어가면 그런 교육을 받기 때문에 ‘가톨릭만한 교회가 없다.’는 의식이 생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가 되는가? 조직과 제도는 될 수 있지만 교회는 안 된다. 조직과 제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
어떤 데서는 실행을 강조한다. 도덕을 지키거나 종교적인 열심이나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교회하락을 막아 보려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교회들은 이 세 가지 종류의 울타리, 교리의 울타리, 제도의 울타리, 실행의 울타리를 쳐 놓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교회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키는 것이 결여되거나 부족하면 교회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전무하면 헛것이 되어 버리고 그리스도가 부족하면 질이 저하된다. 순도가 부족하면 품질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은 순도가 중요하다. 24K나 18K는 금의 순도를 의미한다. 순도가 낮을수록 품질은 저하된다. 금이 전혀 없으면 금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지만 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15K, 10K, 5K 식으로 금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금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금이라고 할 수 없다. 순도가 부족하게 된 것, 이것이 교회가 하락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있다. 확고한 교리도 있고 훌륭한 제도도 있으며 놀라운 실행들도 있다. 그러나 금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염려했던 것이 이것이다.
2) 교회회복의 길 - 그리스도를 지킴
교회의 회복의 길은 그리스도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지키면, 그리스도만 있으면 교회는 저절로 새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어 있다. 교회를 거쳐서 새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희박하면 교회를 거쳐도 새 예루살렘이 안된다. 그래서 비관적인 것이다. 교회가 새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신교는 그런 희망이 없다. 카톨릭은 그래도 그들의 왕국을 유지하겠다는 희망이 있지만 개신교는 아예 희망이 없다. 땅 위에서 교회가 점점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말론이 나온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새로운 나라가 온다는 것이 개신교의 종말론이다. 다른 해답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항상 속으면서도 항상 종말론을 찾고 있다. 한번 실패했으면 안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해답이 없으니까 실패해도 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결여되면 아무리 해 봐야 금이 없는 데 무엇이 되겠는가?
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금색이 나오지 않는다. 물감으로는 금색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토론토에서 본 어떤 건물은 벽 전체를 금으로 칠해 놓았다. 그 건물을 설계할 때 벽을 금색으로 설계했는데 아무리 해도 금색이 나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금을 칠했다고 한다. 금색을 내려면 금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밖에는 길이 없다. 하물며 그리스도는 없이 교회가 되겠는가! 금의 순도가 떨어진 것, 그리스도는 없고 다른 것만 많이 있는 것, 이것이 교회의 하락이다. 부피는 커졌는데 금의 순도가 떨어진 것이다.
요즘 과일들은 굉장히 커졌지만 순도는 적다. 옛날에 산에서 따 먹던 사과는 작았지만 시고 단단했다. 그런데 요즘 사과는 크고 달고 맛있다. 그렇지만 순수한 사과 본래의 성질은 순도가 빈약해졌다. 진짜배기를 먹어야 건강할 텐대 부풀려 놓은 것을 먹으니까 병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과일도 고기도 요즘은 순도가 빈약해졌다. 순도가 낮아지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치한다. 요즘 아이들이 힘은 없고 살만 찌는 것이 다 그런 이유다.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니까 살은 찌는 데 힘이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지키려면 그리스도를 지켜야 한다. 교리가 확고하면 교회가 지켜질 줄로 알고 얼마나 단단히 단속하고 또 단속하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들어올까 봐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가! 얼마나 자기 교회를 지키려고 노력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으면 말짱 헛일이다. 조직은 유지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락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순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번에 형제들이 잭슨빌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 우리 형제들이 순도 높은 그리스도를 내놓은 것을 보고 놀랐다. 원래는 내가 가야 했는데 형편이 못되어서 내가 못간 것이 천만 다행이다. 내가 갔으면 그만한 영향력을 줄 수 없었을 텐데 여러 형제들을 보고 문영 형제님과 케티 자매가 교회를 확실하게 보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다.’라고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나야 원래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별 효과가 없었을 텐데 우리 형제들이 가서 자기들의 모든 삶을 내 놓으니까 놀란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나도 말씀을 듣는데 너무나 뿌듯했고 정말로 만족했다.
디모데후서 1장 14절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하였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들어온 성령으로 지킨다. 밖에 계신 성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하나 된 영이니까 ‘우리 안에 들어온 성령’은 우리와 하나 된 우리의 영이다. 재료는 성령이지만 실제는 우리의 영인 것이다. 변화된 영, 변화된 생명, 변화된 인격이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을 찾아보니 ‘가라앉는다.’는 뜻이 있다. 깊이 가라앉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하수구가 왜 막히는가? 모래가 가라앉아 있으니까 물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모래가 가라앉아서 내려갈 수 없으니까 막히는 것이다. 가라앉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 떠 있는 것은 쉽지만 가라앉아 버리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라앉아 버려서 감당하기 어렵다. 성령이,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와서 가라앉아 버렸다. 이것은 가만히 들어온 것이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들어와서 가라앉은 것이다. 처음에는 모래가 한 개 두 개 왔는데 언제 왔는지 차곡차곡 가라앉아서 굳어지니까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이런 뜻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교회 하락을 막으려면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구속받은 그 인격만이 대책이다. 교리를 확고하게 만들어 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교리는 이미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확고하게 만들어 놓았다. 더 이상 논란을 해 봤자 나올 것도 없다. 너무나 오랫동안 논쟁을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교리를 만들 수도 없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 그렇다고 교회가 되었는가? 제도로 보면 카톨릭만한 제도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는가? 불이 뜨겁게 내린다고 그것이 교회가 되었는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있어야 그리스도의 몸이다.
내 몸은 내 생명의 성분이다. 내 속에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똥도 창자 속에 있을 때는 나와 관계된다고 한다. 내 몸 안에는 내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은 암이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으로 교회 하락을 막으려고 하면 오히려 암이 되고 만다. 교리를 세워 놓으면 교리 때문에 문제 되고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제도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떤 실행들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고 병이 된다. 그런즉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고 다시 난 그 인격만이 교회의 유일한 생명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주님은 우리의 존재와 영광을 지키시고 우리는 주님의 존재인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의 영광을 살아낸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을 맡으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직분인가! 술독을 맡으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는가! “너를 지은 목적은 술독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놓고 “너는 내 동산을 지키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를 지키라고 하셨다. 순도 높은 그 씨를 지키게 하셨다. 그래서 이삭을 낳을 때 아브라함은 그의 상식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소중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성전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맡겨 놓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가치가 없어져 버렸다. 내 소원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 오히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이 가치가 있게 된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는 것이 가치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전락하는 것이다. 너무 가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 말씀만 듣고 있으면 되느냐? 다른 사람들은 천하만국의 영광으로 비까번쩍한데 하나님께 경배만 한다고 되느냐?”고 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탄은 우리를 그렇게 속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찾아 주셨다. 하나님이 가라앉을 수 있는 인격, 하나님이 살며시 들어올 수 있는 인격, 하나님이 자유롭게 들어오셔서 가라앉을 수 있는 인격을 예수님께서 찾아 주셨다.
예수님이 되찾아주신 인격은 굉장한 것이 아니다. 신출귀몰하는 능력도 아니고 천하만국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아주 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자리다. 이것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귀중한 것이지 세상에 나가면 아무 가치가 없다. 바벨론에 가서 인격을 주장해봤자 아무 가치가 없다. 총칼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인격을 주장해 봤자 아무 가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찾아 주셨다. 이렇게 흙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씨를 받아서 밭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비밀이다. 흙만큼 가치 없는 것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거기서 생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인생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달라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찾아주셨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으실 수 있지만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농사를 지으실 수 없다. 바벨론에 가서 하나님이 무슨 농사를 지으시겠으며 광야에 가서 무슨 농사를 지으시겠고 바로의 나라에 가서 무슨 농사를 지으시겠는가? 하나님이 농사를 지으시려면 하나님의 땅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땅에만 농사를 지으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을 회복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다운 곳’으로 표현했다. 그 땅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는지 성경에는 그들이 이를 아름다운 땅에 대해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신8:8),” 하였다. 그 땅의 실재는 사람이고 인격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흙에서 달고 맛있는 큰 석류가 나오고 온갖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리면 그 땅이 얼마나 귀중하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놀라운 비밀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회복해 주셨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지켜야 우리가 영광을 얻는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놓은 축복이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하더니 별 것 아니구나.’ 이렇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이 땅이 회복되면 ‘하나님이 정말 농사를 잘 지으시는구나. 하나님 농장은 정말 풍성하구나!’ 하게 된다. 그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
여리고 성에 보냈던 정탐꾼들이 돌아왔는데 한쪽에서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거대한지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메뚜기입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으며 일어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곳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땅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고 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사람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지켜야 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본 것이나 다른 열 사람이 본 것이나 같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여리고 백성들은 실제로 거인이었고 그들 보다 강성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해석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무슨 말을 하느냐!”고 해석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빼버리고 눈으로만 보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고 하게 된다.
같은 것을 보고도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사신들을 일본에 보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그들은 군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아무 일 없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할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던 것이다. 결국은 그 사람들 말만 듣고 있다가 당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따라서 그분이 부탁하신 것을 지켜야 한다. 잘 몰라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셨으면 지켜야 한다. 아담이 다 알았겠는가? 지금 우리가 겨우 이렇게 알았는데 아담이 그때 하나님 동산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았겠는가? 모르니까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믿고 지켰어야 했다. 아담은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동산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길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보잘 것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귀중한 땅을 맡기시고 당신의 귀중한 영역을 맡기셔서 이것을 지키고 경작하는 아름다운 직분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담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 모세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을 오늘 우리가 지키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회복해 주신 그 인격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기시를 원하고 주님께서 빛으로 비춰주셔서 그 땅에서 나오는 열매들을 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