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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우백 박사의 <한 성공철학 아카데미>(12월 16일) 주최,
(장소: 대구 매일신문사 민영주차장내 계산문화관 501호)
제30차 지도자철학 강좌, 발표문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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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서 정치철학적 관점의 생성과 전개
- 2021, 12, 13.
* 들뢰즈의 벩송과 연관: - 들뢰즈는 왜 “먼지투성이의 글들”을 끌어냈는가?
벩송의 DI(1889)는 학위논문이자 첫 저술이다 이 논문을 발표했을 당시에 벩송은 심사위원들이 “지속”에 대해 관심 없이 칸트의 비판주의(신칸트주의) 비판에 대해 평가하였는데, 벩송은 발표 후에 자기 논문을 이해해주지 못한 선생님들에게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는 둘째 저술 MM(1896)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었고, EC(1907)을 냈을때는 세계적인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특히 윌리엄 제임스는 셋째 작품이 주지주의에 대한 가장 잘 된 작품이라 찬사를 보내며, 출판된 그해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졸병, 당신은 장군”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프랑스 안에서, 벩송의 직관에 대해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을 때, 엉뚱하게 프랑스 수학자이며 철학자이고, 꼴레쥬 드 프랑스와 프랑스 학술원의 벩송을 계승한 르화(Edouard Le Roy, 1870-1954)가 새로운 철학: 앙리 벩송(1912)을 쓰면서, 벩송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차대전의 전운이 감돌면서 카톨릭 애국자들의 벩송에 대한 반대는 여전했다. 내가 보기에, 벩송은 소크라테스 다음으로 상층과 연관없이 “영혼(pscyche)”에 관한 자기 생성과 자기 창조의 방향으로 사유했다는 것이다.
벩송의 세 작품은 서양 철학사의 주지주의적 흐름을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들뢰즈 표현으로 “전복”을 해 놓았다. 이런 전복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카톨릭 종교 세력과 다투지 않기 위해 프랑스 내에서 암묵적으로 무시되었던 것으로부터, 그가 소르본대학에 두 번이나 지원했을 때, 소르본의 완고한 네오스콜라주의에 부딪혀 좌절하였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벩송에 대한 비판의 시각은 일차 대전 후에 다른 방향에서 나왔다.
사회학과 심리학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의 산물이다. 심리학의 방향을 역전 시킨 것은 벩송이다. 벩송은 당대의 정신병리학의 탐구에 의해 직관을 통한 재인식과 기억을 실재성으로 다루었다. 이런 심리학의 전도 또는 전복적 사유를 진실로 알아채고 계승한 자는 내가 보기에 정신과의사 가타리이다. 이 역전된 방향에서 보면 사회학은 문명론이 아니라 문화론이 될 것이다. 물론 벩송은 사회학과 공동체적 관점을 쓴 것은 비판의 시기를 지나서 MR(1932)에서 썼다.
꽁뜨의 실증 사회학 이후에 프랑스는 현상으로서 사회를 다루었다. 벩송의 영혼에 관한 탐구는 사회학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글에서, 벩송이 사회학 발전에 ‘불쏘시개 역할’(effet repoussoir) 정도를 했다고 여기는 부류가 있었다고 한다. 벩송은 뒤르켕(Durkheim, 1858-1917)을 “자유의 반대자”로 보았는데 비해, 뒤르껭은 벩송 사유를 내던지고 개인을 사회 속에 위치시키면서 “영원의 상하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을 이어받은 뒤르껭의 협력자들은 위베르(Henri Hubert), 알바쉬(Maurice Halbwachs), 모스(Marcel Mauss), 베이예(Albert Bayet) 등이 있다. 이와 다른 방향에서 1925년에 “벩송을 반대하는 연구 모임”이 있었는데 폴 니짱(Paul Nizan),폴리쩌(Georges Politzer),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르페브르(Henri Lefebvre)등이 있다. 1930년대에 나온 소련의 철학 사전에는 벩송을 부르주와 철학의 거장이라 하였다. 이런 평가들은 벩송의 기나긴 철학사적 의미를 간과하고, 당대에 활발했던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의 경향에서 비판한 것이다. 벩송이 마지막 작품(MR: 1932)[일흔셋]을 냈을 때는, 사람들이 아직 그 철학자가 살아있구나 정도 반응이었다고 한다.이미 학문의 방향은 재인식보다 인식의 재현(표상)에 대한 현상으로 바뀌었고, 프랑스는 독일과 더 이상 전쟁하지 않기 위해 독일철학을 제대로 연구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들뢰즈는 형이 레지스탕스로 사살당한 다음해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실패하였으나, 우수한 시험 성적 덕분에 소르본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가 교수 자격시험을 쳐야 할 때가 되어, 벩송의 물질과 기억이 과제였는데, 그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맑스주의 경향의 준비생들은 벩송사상을 낡았다고 비꼬아서 “먼지투성이 정신주의자(spiritualiste poussiéreux)”라고 했다. 당시의 평가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던 그는 시험을 포기하려 했으나, 샤뜰레가 시험을 칠 것을 권하고, 그는 통과하였다. 이 벩송의 사상이 그의 사유에 끝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벩송에 관하여 몇 편의 논문과 두 가지 간단한 저술을 쓴 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격적인 사상을 펼칠 준비서로 의미의 논리와 차이의 반복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사람들은 이 후자의 작품이 앞서서 연구했던 니체의 사상을 풀어놓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의미의 논리에서 전복이라는 관점은 벩송의 것이며, 차이와 반복의 제목과 그 내용은 벩송의 차이와 기억의 8자 도식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들뢰즈 옹호자와 비평가들이 벩송의 연관을 암묵적으로 약화시키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안티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에서 “고른 평면”이라 불리거나 “플라노메네”라고 불리는 용어 등은 물론 플라톤의 아페이론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이질반복하며 차이를 생산하는 지속, 즉 기억과 생명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까지 들뢰즈가 기획한 「집합과 다양체(Ensembles et multiplicités)」에서 주제는 삶(une VIE, 생명)이며, 짧은 마지막 발표문도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 1995)」이다. 벩송은 “사는 것이 먼저다 철학은 다음이라”한다. 이런 방향에서 보면, 들뢰즈는 충실한 벩송의 계승자이기도 하고, 또한 벩송이 철학사에서 전복의 과정을 설명하고 전복을 시행한 개별학문이 심리학이었다면, 들뢰즈는 철학사의 과정 전체를 전복으로 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과 활동성도 전복하려고, 리좀과 다양체의 개념을 창안하였다. 그럼에도 이 다양체 개념은 벩송(DI)의 용법에서 왔다고 하고, 벩송의 다양체는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왔다고 설명한 이는 들뢰즈이다.
* 경험론의 섭렵과 벩송의 총체적 경험.
벩송을 열심히 탐구한 들뢰즈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폴리트와 캉길렘의 지도로 흄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는데(1947년 스물둘), 이를 보완하여 출판한 것이 경험주의와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에 대학 교양서로서 흄, 그의 삶, 그의 저작(1952)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예술, 도덕, 종교를 주제로 하는 흄의 작품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논문으로 「흄(Hume)」(1972)이 있는데, 들뢰즈는 6절과 7절에서, 인식의 오성을 넘어서고 창안의 정열과 새로운 발명을 넘어서 인류의 삶에 합리적인 제도와 그 발견물(문화)을 창안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성(본성)이라 한다. 이런 인성은 개연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합의와 계약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주의 연구는 벩송에서 일탈이라기보다 벩송의 사유에서 경험주의의 강조를 의식하고, 사회 제도와 문화에 접근의 통로를 찾아보려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벩송은 자신의 형이상학을 “총체적(intégrale) 경험”에 근거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인과관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회의라는 것은 흄의 사유 중에 일부를 과장한 것이다. 흄은 관념의 연합과 형성을 다루면서 인접, 유사, 인과 등을 주목하였는데, 경험적 사실들 중에 인과관계는 이런 인식들 중의 일부이다. 인과관계로부터 출발하는 인식은 재현(표상)에 한정하는 것으로 사회 문화에는 응용이 잘 안 된다는 것을 알렸는데도, 이런 편협한 사유가 비판주의자들에게 전수될 것이다.흄은 인간본성에서 사회제도 그리고 신앙에 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우리는 들뢰즈의 경험주의와 주체성(1953)의 뒷 표지에 실려 있는 글로 대신한다. “데이비드 흄에게 경험주의는 더 이상 관념들의 감각적 기원에 의해 본질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들(les relations), 경우들(les cas), 착각들(les illusions) 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발전시킨다.”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는 상상, 환상(공상) 망상, 착란 등이 있는데 상상을 넘어서는 것은 한편으로 교정되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한다. 교정단계를 넘어서는 사고에 대한 비판은 지식의 믿음과 종교적 독단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 당시에는 그가 무신론자로서 간주되어,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벩송이 경험주의에 관한 새로운 관점, 즉 귀납법의 개연성의 주목은 물론 그가 존경했던 쥘 라슐리에의 저서를 통해서이다. 그럼에도 그가 수학의 깊은 이해자로서 또는 물리학의 인용들을 보아, 당대의 과학의 개념들의 형성이 개연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예로서 빛의 파동설도, 특히 전자기장의 영역도, 게다가 수학의 무한도 개연성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개연성에 대한 탐색은 동일성에서 출발했던 형상형이상학을 벗어나 이질성에 대한 탐구인데, 들뢰즈는 이런 이질성의 관점을 차이 대 “차히”로 보게 될 것이다.
들뢰즈가 벩송을 잘 읽었다는 것은 1956년에 발표된 두 글, 「벩송: 1859-1941」과 「벩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 두 글에 앞서서 본능들과 제도들(Instincts et institutions, 1953)을 썼는데, 우리가 보기에, 들뢰즈가 벩송에서 “사실들의 선들”의 발산과 수렴의 과정에서 활동하는 동물들의 차원에서 막시류와 척추동물 사이에 집단 또는 사회형성의 두 차원에 대해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성의 경향성은 외적 환경들과 연관에서 독창적인 세계를 제도화하면서, 주체는 인공적 만족의 수단들을 공들여 만든다고 한다. 이 경향성은 제도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만족되며, 또한 이 경향성은 본능에 의해 직접적으로 만족된다.제도의 형성에서 “경향성”의 개념도 벩송의 EC(2장과 3장)에서 온 것인데, 벩송처럼 인식의 차원과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사유를 전개하기보다, 들뢰즈는 사회적인 것의 형성과 예상참여를 주제로 보았다. 이런 들뢰즈의 관심은 체제와 제도(국가와 정치)를 다루는 후기에 가서야, 가타리의 “가로지르기”와 더불어 벩송 없이도 확장될 것이다.
벩송에서 본능과 지성 사이, 또는 직관과 지성 사이에서 수렴으로부터 인간은 자연의 손아귀에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 경향에서 벩송은 인격성이 자유(liberté)를 획득하는 쪽을 방향을 잡았다면, 불교에서는 고통과 고뇌의 해소라는 해탈(délivrance)의 길로 나아갔다고 보면서 인류의 새로운 모습을 만드는데 부족하다고 한다. 벩송의 주제는 제도 속에서 인간의 해방(libertation)이라기보다, (지속)형이상학적으로 인간이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지, 게다가 자유로운 활동(엘랑비딸)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가치 창조, 새로운 발명,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런 관점에서 동양을 보는 시각도 한정되어 있었다. 벩송은 중국의 군자(현자)들에 대해 출판된 저작 속에서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최근의 유학과 황로학이 곤(坤)괘의 해석에 대해 벩송의 직관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있는데, 여기서 인성과 직관의 대립으로 다루면서, 제도의 협력(포획)과 체제의 이탈(탈주선)로 다루었지만, 서양철학처럼 생리학적 이탈(탈영토화)이나 생산력의 발전(증기기관과 모터)의 연관 속에서 다루기보다, 학자들의 해석과 시대 변역(變易)에 대한 재해석이다. 제도가 본능을 벗어나는 것인지 또는 제도 속에 함몰(포획)된 것인지에 대해, 들뢰즈는 제도에 대해 이 사화집(詞華集)(본능들과 제도들(1953))을 정리하던 시절에는 개념 정립이 미비하였으나, 동물이든 인간이든 집단형성의 경향성은 있다. 그 경향성에 본능보다 지성 쪽에 기운 것이 인간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한 제도와 체제에 머물지 않고, 변역의 경향성을 유지하여 왔다. 그는 가타리를 만나서 생명체로서 기나긴 과정 속에서도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따라서 제도 속에 활동하는 기계로서 코드화와 재코화라는 개념을 안티외디푸스(1972)와 천개의 고원(1980)에서 전개할 것이다.
책을 잘 흔들어서 읽으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권용원)
* 노마드, 그리고 구멍파기.
들뢰즈는 담판(1990)에 실린 「철학에 관하여(Sur la philosophie, 1988)」에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지성인들(les intellectuels)은 굉장한 문화[교양]를 갖고, 그들은 모든 것에 관해(sur tout) 견해를 갖는다. 나는 지성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탄없이 나눌 수 있는 문화[교양]가 없기 때문이다. ... 토인비(Toynbee, 1889-1975)의 구절에 감명을 받는다. 즉 “노마드들은 꿈적이지 않는 자들이고, 이들은 떠나는 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노마드들이 된다.” / “...나의 생애에 마치 구멍처럼, 8년의 구멍들(les trous)이 있다. 나에게 나의 생애에서 흥미로울 것 같은 것이 그러한 것인데, 그 구멍들은 빈칸(les lacunes)들을, 가끔은 드라마 같은 것을 허용하고, 그러나 가끔은 그렇지 않는 그런 구멍들이다. 여러 해에 걸친 강경증(强硬症, des catalepsies, 마비증) 또는 여러 종류의 몽유병을, 나의 생의 대부분은 허용했다. ..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구멍들 속에서이다.> 들뢰즈의 8년은 1953년 경험론과 주관성의 출판 이후, 1962년 니체와 철학(1962)을 말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저자 거리를 생애 절반을 돌아다녔고, 공자는 여러 해 주유하였으며, 싯달다는 6년간 고행을 했고, 예수는 40일간 광야에서 지냈다. 아랍의 야사이긴 하지만 셰헤라자데는 한 참주의 모습을 바꾸려고 ‘천하루밤’(근3년) 이야기도 있다. 들뢰즈의 구멍파기라는 어쩌면 그의 삶의 과정에서 여러 번 은둔으로 지냈고, 이에 혈거인(troglodyte)이란 별명을 얻었다.구멍파기는, 우리말로 잠수는 저항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흐름 속에서 진솔한 노마드를 실행하는 방식일 수도 있었다. 전쟁기계인 권용원에게도.
이 구멍파기의 기간에 들뢰즈는 중요한 관점을 만든다. 그리고 가타리를 만나고(1969) 난뒤에서 리좀과 용출선이란 개념과 더불어 인류사에서 노마드가 무엇인지를 말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만 보태면, 노마드는 기구를 지닌 제도와 체제 이전에도 죽 있어왔고, 그리고 역사시대에도 국가 또는 참주제(동방의 황제제)와 달리 살아가는 방식은 영토화 바깥에서 훨씬 넓게 그리고 많은 민중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 그 노마드의 방식이 국가라는 정주적 체제를 무너뜨릴 힘이 있었던 것은 고트족의 활동과 징기스칸의 활동이 있었고, 그리고 많은 역사적 사건들 중에 20세기에 러시아의 레닌의 레닌그라드 입성도, 마오와 홍군의 대장정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그란마호의 진격도, 호치민의 게릴라(베트콩) 전사들의 활동도 있어왔다. 역사에서 성공한 사례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참주 체제(군사정권)에 저항한 노마드는 인혁당과 남민전에서도 부마항쟁에서도 있었고, 전두환 군대체제에 저항한 광주항쟁에서도 있었다. 그런데 노마돌로지를 말 타고 행동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노마드의 한 형식으로서 몽골족의 역사적 위대한 사건을 만든 것만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들뢰즈의 노마드에는 특이한 성격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자.
들뢰즈의 8년간의 구멍파기 동안에, 사람들이 도덕의 계보학과 지식의 고고학의 관심을 가지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들뢰즈에게는 (역동)형이상학과 방법론을 찾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런 방법론을 벩송에서 찾았으며 앞에서 언급한 두 꼭지가 나왔다. 제도와 체제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인식과 체계에 대한 탐색이 필요했다.
그가 1956년에 먼지를 털어내고 알곡을 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게다가 전후의 지식인이 사회와 국가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한 그 학문적 도구들이 주지주의 또는 플라톤주의에 함몰된 것이라는 푸꼬의 고고학이 자극되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벩송: 1859-1941」에서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찾아낸다. 들뢰즈는 벩송의 독창성이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직관의 방법론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직관을 통하여 벩송이 새로 창안한 지속(la durée), 기억(mémoire), 생명 도약(l’élan vital)을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직관의 성격들을 설명한다. 첫째로 직관은 인격적으로(en personne)으로 주어진다고 한다. 의식에서 인격적 자료이다. 둘째로 벩송이 직관을 발명한 것이라기보다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할 이야기가 많지만, 내가 보기에, 벩송이 재인식을 통해 재발견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고, 게다가 전통 인식론의 전복으로 또는 스콜라주의 전복으로 영혼(psyche, 심리)의 재인식 과정을 탐구했다는 것이다. 직관을 통해서 만이 무매개성, 지속의 상하에 단번에 들어갈 수 있다. 그 지속에서 차이의 생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셋째로 전통철학에서 혼합물의 분석을 통한 차이의 발견과 달리, 본성상 차이에서 두 극단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직관의 방법을 통해서이라 한다. 직관을 통하여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두 경향의 생성을 보았으며, 이는 생명의 두 질서이며 인식의 두 질서로 이전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직관 개념과는 다르다. 벩송에게서는 하나는 수학적 직관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직관이다. 이 두 용어는 서로 방향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들뢰즈는 생명의 직관 쪽을 순수하고 단순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단순성에서, 들뢰즈는 넷째로 생명 또는 의식의 진행과정을 탐색하는 “사실들의 선들”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다음으로 직관 속에서선들의 형성 또는 생성에 이르는 길을 본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다발로 형태로 전개하여 차이화[세분화]를 형성한다. 들뢰즈가 벩송에서 직관의 형이상학과 재인식, 생명에까지 연관을 구슬에 꿰었는데도, 도덕과 종교에 연관해 직관을 연결할 수 있는 신비가에까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제도와 체제에 연관이 재인식과 역동형이상학과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벩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1956)」은 「벩송: 1859-1941(1956)」 다음으로 썼을 것이다. 후자의 중요 철학자 사전의 항목은 일반인을 위해 먼지를 털어낸 소개 정도이라면, 전자의 논문은 높이 평가 받기도 하지만, 들뢰즈가 벩송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산이 차이와 반복과 의미(방향)의 논리이다. 전자의 책에서 차이 개념과 반복개념의 다의성을 잘 설명한다. 그리고 후자에서 “의미”를 방향으로 읽으면, 제도와 체제의 전복이란 내포를 지니면서 철학사 즉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말한다. 이런 사유의 등장은 이 논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논문의 내용은 복잡하고 어렵다. 가타리를 만나서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이 논문은 철학적 사유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탐구이다. 고고학이든 계보학이든 발생론에서 보아, 이데아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벩송이 말하듯이 선전제에 대한 검토를 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사는 인식이든 형이상학이든 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인 이데아 또는 관념은 철학적 사유의 귀결이지 원인이나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러면 원인은 무엇에서 또는 어디에서 찾아야할 것인가? 자연에서 찾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본성상(en nature)로 번역하고 또는 인성(la nature humaine)에서 자연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성이나 본성은 인간의 고유한 것을 착각(l’illusion)하고 있다고 한 벩송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면 본성의 차이 대 차이의 본성은 무엇인가? 실은 전자에서 자연이 스스로 차이를 생산(창조)하는 것이고 후자에서 인간이 차이를 만드는 일반성(류적 개념)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형상론의 인식론 또는 구조주의까지는 후자를 중심으로 철학한데 비해, 후기 구조주의라 불리는 철학에서는 전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사의 인식론(에피스테메)에 견주어보면, 주지주의(인간의 오만이며 광기이라고 한 것은 푸꼬이다)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주체를 설정하는데 비해, 대상의 운동 속에 들어가서 재인식의 방식으로 탐구해야 한는 것이 본성상 차이에서 출발하는 길이라고 한다.
자연은 차이를 생산하는 다발이다. “선의 이데아”나 “부동의 원동자” 또는 “신의 입김”처럼 하나로 추상해서 통일된 단위에서 출발하는 것은 허구이며 우화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서 추상화의 끝에서 하나라는 것을 설정하는 것은 인간이 필요와 유용성에서 만들어 놓은 추상개념일 뿐이다. 이 추상개념을 추상기계로 놓으면, 참주(황제), 국가(평천하), 자본(제국)의 관념적 형태가 있다는 위계적 논리에 빠지게 된다. 이 존재론적 단위에 왜 그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라고 착각하였던가? 지성이 대상을 도구화하는데 편리하고 유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자연)상 존재는 변화하고 발전하고 진화해 왔다. 그 과정이 어떠한 가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기억”에 대한 재인식의 탐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의 발생과정과 존재자들의 생성과정에 대한 탐구, 즉 본성상 차이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을 예고한 것이다. 간단히 본성상 차이는 세분화(diffferenciation, 차히) 라는 개념으로 차이의 분할은 미분화(differentiation, 차이)라는 개념으로 학위논문에서 정립할 것이다.이런 개념작업(la conception)에서 생성과 다양체 대 제도와 체제에 대한 정치론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먼저 그 다음 철학.
인식론의 전복(renversement)과 체제의 전복: 철학은 혁명적이다.
벩송은 전복보다는 도치(l’inversement)는 개념을 썼지만, 들뢰즈는 전복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는 서양철학사의 플라톤주의(플라톤이 아니다)의 전복이다. 그러면 우선 플라톤주의의 기원을 보아야 할 것이다.
도표
폴리테아아도식 교권과 왕정시대 (기계문명: 철기) (디지탈: 규소시대)
선의 이데아 천국(착각, 환상) 국가 자본(제국)
이데아추상화 체재 (통치, 훈육) 통제
도형들체계(위계) 인식 (전쟁기구) AI (빅데이터)
물체들장치(배치) 재인식 (전쟁기계) BTS
그림자다발 생성 (노마드) 문화(예술)
(아페이론) 자연(권능) 다양체 인민(특이성)
간단히 이항대립은 인식론에서 도형들/물체들 사이에서 주관과 객관의 인식론 정립에 있으며, 이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이데아/그림자(질료)라는 형이상학적 배경을 갖추고 있다. 위에 아래로 방향의 사유가 이상하게도 고대 그리스 시대(알렉산드리아학파)에 성립하고 논리학과 유클리트 기하학에 의해 정립된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에 대한 저항은 소크라테스에서부터이다. 그는 동방의 참주제나 신화에서 오는 신앙에 대한 비판으로 사약 처분을 받았다. 민주정 또는 노마드에 의한 정치체의 성립은 어쩌면 이 시기에만 있었던 것으로 철학자들의 향수일 수 있지만, 들뢰즈는 그리스적 사유를 배워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의 견해로는 자유 시민의 합의와 계약에서 인간의 자유와 창발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도표로부터 들뢰즈의 정치적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들뢰즈는 따로 정치학이란 제목으로 저술하지 않았지만, 국가와 제국에 반대하는 안티외디푸스든지, 통치-훈육-통제를 벗어나는 역사적 흔적(고원)들을 제시한 천개의 고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서 그가 대담에서 밝힌 정치론에 대해 다룰 것이다.
들뢰즈는 표면의 인식에서 양면성을 자주 강조합니다. 물론 플라톤의 소피스트편에서 시뮬라크르의 두 종류에서 빌려옵니다. 이데아를 닮은 모방체와 무작위의 생산의 모방체 사이에서 후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한다. 도표에서 도형들/물체들의 양면성인데, 인식론상 도형들에서 출발한다는 쪽을 합리론이라 하고, 물체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쪽을 경험론이라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런 이원성의 심층에는 형이상학적으로 정신과 물질이라는 추상의 극한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의미로서 이데아를 닮은 모방체는 관습과 제도 속에 코드화 된 것인데 비해, 아페이론의 제멋대로의 생산의 모방체를 탈코드화인 셈이다. 이 양자의 우월성은 상층형이상학에서 죽 이어져 온 것이다. 심층형이상학은 새로운 가치의 생산과 되기에서 아페이론의 능동적 권능을 인정하는 쪽이다. 여기서 삼원성에 대한 두 가지 형식을 만들 수 있다. 하나는 표면의 이중성(이항성)에서 변증법적으로 상층의 성립이다. 이런 삼원성을 바울 종교가 더 잘 이용했고, 게다가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헤겔의 절대자에까지 스콜라적 사고에 이른다. 이를 심리 이상현상의 치료를 위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전개했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벩송을 이어받아, 자연이 자기에 의한 자기 생산(창조)를 받아들여, 원형(이데아)없는 모방체가 생물학에서 그리고 종발전에서 있어왔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자연의 자기 생성을 사회학과 정치학에 이용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다. 응집 평면 또는 내재성 평면(le 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인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서, 벩송의 기억이론에서 ‘꿈의 평면’과 창조적 진화에서 생장하는 ‘덩어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평면 즉 덩어리를 인간의 특이성의 발현에 적용하기 위하여, 인간 종의 단위에서 다양체를 사용한다. 그러면, 사회 또는 국가의 최종 심급은 형상론에서는 이데아 또는 천상이 되지만, 질료론에서 다양체또는 리좀이 된다.
사회의 토태가 이런 다양체라는 점에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벩송의 생명 발생론을 설명한 “사실들의 선들”에서 빌려왔다. 고고학적 또는 발생론적 과정에서 다양체(질료)를 발산을 거듭하다가 또 수렴을 하고 수렴 후에 또 발산을 한다는 벩송의 선들의 이야기를, 가타리의 영토화, 탈영토화, 그리고 재영토화와 중첩하여, 역사에서 사회의 변형과 진화로 설명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런 선들의 연구를 응집평면으로부터 심층 삼원성에 근거하여 각 분야에 대한 새로운 과정과 연관을 설명한 것이 분열분석, 미시정치, 리좀학, 지도제작 등에서 전개하였다.
관념론 성부 [삼위격론]
∕ ∕
합리론 ←경험론 성령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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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 생성 포획 (탈주선) 되기(아제인간)
∖ ∕ ∖ ∕
다양체 응집 평면 [삼위상론]
[상하로 나눈 이 도표는 대응, 평행, 대칭이 아니라, 사유의 별개 양식이다.]
이 도표에서 중요한 점은 상층 삼원론에서는 심층을 무화하거나 비하하였고, 칸트에 이르러서는 물자체를 포기하였다. 이에 비해 심층론은 심층의 권능을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보아 현상에 이르는 길로 길을 제시한다. 스피노자는 많은 속성들 중에서 두 가지 속성으로 표현(ex-pression, 응집의 풀림)으로 보았고, 벩송은 동물의 수렴에서 본능과 지성의 갈라치기의 이중성으로 보았는데, 들뢰즈는 응집평면의 전개 방식이 원래 이질성의 변이들로 보았다. 이 변이들을 추려서 세 가지로 보는 방식을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과 그의 생에서 쓴 용어들을 빌려서, 이항대립의 한쪽 편과 단절(la coupure, 짤), 소수자 지위로서 균열(la fêlure, 틈), 노마드로서 결별(la rupture, 절단, 절편, 폐기)이며, 들뢰즈가 생애 마지막까지 주제로 삼은 생명(la Vie)과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학과 정치학이 나올 수 있다. 형상론의 상층은 허구이며, 이러한 허구는 프랑스 혁명에서 왕과 추기경을 제거한 사건에서 보여주었다. 그러면 심층의 등장은 어디서인가? 프랑스 철학사는 인간이 주체로서 자의식의 등장을 갈릴레이의 망원경과 진자 덕분으로, 물리학의 성립을 두 실체로 파악한 데카르트라고 하며, 계몽기의 루소는 심층의 발현을 보았고, 프랑스 혁명은 그 주체가 부르좌였다고 한다. 벩송은 MR에서 인민의 등장을 1830년 이후 모터의 등장으로 또한 재인식의 틀로서 세포의 내면을 보게 되는 현미경의 등장이라 한다. 맑스는 철도의 건설로부터 프롤레타이아 등장으로 공산당 선언을 할 수 있었다. 들뢰즈는, 심층 의식의 등장으로 증기기관의 발명시기에, 인간이 여러 가지 되기(생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물질의 변화와 생산력의 발전이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맑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의식의 변화는 지성의 모방에 의해 바로 생성과 변혁을 가져오기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앞에서 말했듯이, 왜 노마드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가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 또는 국가의 기록들로 되어 있지만, 인민의 이야기는 추억들로 남아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인민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아날학파가, 파리꼬뮨 이후에 프랑스를 움직이는 실체에 대한 고민에서, 혁명재판소에 무수히 쌓여있어 먼지투성이를 읽기 시작하면서 이다. 이런 역사적 실증적 탐구에서 공동체의 실체는 상층이 아니라 심층이라는 사유가 늦게서야 들어서게 된다. 인류사에서 심층의 흐름은 있어왔고, 기록들도 유물도 유적도 있었지만 상층주의자들에 묻혀있고, 단지 추억처럼 여겼으나, 기억은 여전히 현재에 닿아있다.
들뢰즈는 삼원론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었는데, 우리가 오랜 지성의 삼위격에 비유해서 도표를 그린 것이다. 벩송은 비유에 속지 말라고 한다. 들뢰즈가 헤겔의 변증법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항 대립적 사고이며 이는 스콜라적 사고에서 젖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천상(하늘나라) 또는 이데아가 허구라고 보고, 이를 제거하면, 세 가지의 방식이 보인다. 이 3항을 토대로 들뢰즈가 정치론으로 전개할 것이다. 터전으로부터 이야기는 매우 길다. 단지 터전의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는 가타리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데, 인류학과 고고학이 전개해 온 것이다. 유인원의 손이 땅에서 떨어져 나와 걷게 될 때, 손은 다른 동물에 비해 탈영토화인데, 이 손이 나뭇가지를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숲이 재영토화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항 아닌 3항의 길을 가는 것이 탈주선(용출선)이다. 우리는 다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삼항의 최종심급에서 삶의 터전으로서는 토지이며, 공동체로서 인민이며, 자유와 창조로서는 기억(영혼)이다.
현실 정치에 관한 견해를 다루기 전에, 이제 사람들은 “혁명은 더 이상 없다”고 하는데 이런 질문은 이미 상층론에 포획되거나 포로가 된 자들이다. 이들 중에 현실적으로 자본제국의 마름으로 살기로 작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투항한 자이다. 이런 투항자들은 탐욕과 탐음에 빠져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이 투기 범죄와 성범죄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사고에서는 “혁명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는 자들이기도 하다.제도와 체제의 변화에서 이익과 권력을 노리는 미래의 관점은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생태문제와 공동체의 삶이 인류의 자유와 새로운 가치의 생산으로서 새로운 되기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자본의 포획(재영토화)과 인간의 탐욕(탐음)은 먹거리와 성애의 최음제에 홀려 있다고 할 수 있다.인간은 자연의 산물이며 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 통치체제, 훈육체제, 통제체제
들뢰즈가 1953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해 규소의 시대, 즉 반도체 시대라 한다. 이 시기에 생명체에 대해 DNA의 지도가 그려지고, 영화에서 누벨바그가, 소설에서 누보로망이, 또하나 스탈린의 사망으로 우리나라의 전쟁이 끝났지만, 프랑스 공산당이 자성하면서 지식인이 스피노자를 주목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자. 규소의 시대가 인민들 사이에 소통방식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지금처럼 SNS와 스마트폰의 열린 시대를 맞이할 때까지 그가 살아있지 않았다. 살아있었다면 또다는 고원에 대해 글을 썼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치적인 면에서 중요한 변화에 대해 사유했던 흔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는 참주제의 모습을 지닌 통치시대, 그리고 철을 이용한 기계 산업시대의 훈육시대, 그리고 컴퓨터 등을 통한 소통의 시대로 구분했다. 이것을 정치체제에 견주어서 통치체제, 훈육체제, 통제체제라고 한다. 물론 이런 구분은 왕정과 교회 독단이 성립하던 통치체제의 종말 이후로 산업사회에서 기계의 이용와 편리만큼이나 인민이 이들을 다룰 수 있는 교육과 안전을 위한 질서를 필요로 하여 훈육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 대해서 푸꼬는 “장치”라는 개념을 통하여 고고학적으로 설명했다. 푸꼬는 통치체제로부터 그 다음으로 훈육체제로서 학교, 병영, 직장, 감옥, 병원 등으로 개인의 삶에 미세한 부분에까지 지배방식을 공고히 하는 제도의 특성을 잘 다루었다. 이에 들뢰즈는 미세한 권력이 개인 간의 의사소통에까지 재영토하는 데는 자본이 제국화의 길을 간 것으로 본다. 미세권력의 내부에 침투를 “장치”로서 설명이 부족하기에, 들뢰즈는 “선분”과 “배치”라는 개념을 창안하였다. 선분화된 개인은 제도와 기구(책상, 관료제)에 복속될 뿐만 아니라, “배치”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이 달리하는 기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 개별기계가 추상기계의 복속되어 사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이 복속을 벗어나 다른 길들을 가는 구체기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 응집평면에서 솟아나는 여러 기계들은 이분화에 파열을 일으키고 또는 탈주선을 모색한다. 이런 과정에서 물론 파손되거나 소멸(죽음)될 수도 있고, 새로운 되기(생성)와 창안으로 국가체제 또는 제국과는 다른 방향들과 길들을 마련하는 전쟁기계들이 있다고 한다.
훈육시대 장치들의 운용방식에서 이항 대립적 구조가 그물처럼 짜여 있었던 것 같지만, 전쟁기계는 통치체제에도 훈육체제에도 있어왔듯이 통제체제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작동의 방식이 국가기구 바깥에서 또는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또는 제국의 바깥에서 전쟁기계의 작동이 계속되고 있다.
들뢰즈는 규소의 시대에는 전쟁기계의 작동 방식이 국가 간의 전쟁이 있던 시절에 노마드 방식으로 첨점을 통하여 균열을 내고, 지도리를 떼어내는 방식으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거대 공장제의 일률적 노동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의 방식이 인공기능의 제작 과정에서 균열을 내기 어렵고, 미세정치의 포획된 개인이 국가기구 또는 자본의 통제기구에서 저항하는 방식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체제의 그물을 침범하는 하더라도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제국의 그물 속에서 탈주선을 찾는 것은 소수이다. 자본의 통제체제에서 절대다수가 통제의 그물에 걸려 있는 가운데서도, 파생선 상에서 숫적으로 다수이지만 실행하는 소수의 생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상층[주도세력]이 지배하는 기구 속에 들어가기 위해, 제도의 법률과 어용 학문을 열중한다고 해서, 그 책상(뷔로) 또는 칸막이(관료) 속에서 안락과 즐거움으로 살 수 있는가라고, 거꾸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주도세력인 소수의 삶과 변방(노마드)인 절대 다수의 삶에서, 전자에 가치를 두고 열심히 그 속에서 계단을 오르려는 위계사회로 갈 것인지, 후자의 삶에서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삶을 살 것인지는 인격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기에는 후자의 영역(영토화)이 전자의 재영토화에 복속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의 재영토화는 점점 깊어져서 개인의 세포에까지 확장되어가고 있고, 삶의 거의 모든 활동을 0과1로 환원하고 있다. 그러면 이 시대의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명계는 형상론 체제로 이루어지 않았고, 게다가 생태계도 형상론에 따르지 않는다. 인간은 얼굴과 몸이라는 너비와 내면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들뢰즈가 표면의 벽과 내부의 구멍이라고 은유적 표현을 썼는데, 시간을 필요로 하는 구멍 속에서 작업과 수신(학습)은 여전히 전쟁기계의 방식이다. 이 작업으로 연대를 만들고 공감으로 합의와 계약(양도하지 않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서양은 통치체제, 훈육체제, 통제체제를 - 증기가관의 발명을 기점으로 삼으면 – 270년의 과정을 겪었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남북 전쟁이후로 70여년 동안에 한꺼번에 겪고 있어서 인민들이 그 속도에 몸을 맞추지 못하고 몸살을 하고 있다. 현시점에서는 늙은 어제세대가 통치체제와, 젊은 이제세대가 훈육체제와, 새로운 아제세대가 통제체제와 함께 가고 있다. 당연히 아제세대는 탈주선을 생성하고 창안하고 있다. 이런 혼성(composant) 시대에 정치적 작동은 무엇일까? 들뢰즈는 여전히 굴을 넓게 깊게 팔 것을 권하여, - 다양체로서 여러 선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70년의 축약을 녹일 수 있는 시간(학습과 돈수)이 필요하다. 이 시간에는 리좀의 확장으로 노마드가 흐르는 데는 스마트폰의 활용으로 입말과 쓴글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률적 문법도 아니고 의미론도 아니고, 인민이 감화작용을 통해 공감과 공명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창안하며, 리좀의 형식에서 남과 여라기보다 n성을 지닌 방식으로, 게다가 감화작동으로 다양한 생성(되기)으로 살아가면서, 같잖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일 것이다. 새로운 삶, 아리아드네가 디오니소스 만난 삶과 같은 아자르의 삶도 이룰 수 있는 고원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에 우리말의 입말과 쓴글은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인민 각각이 전쟁기계로서 용출선을 만드는 공동체, 주사위가 떠있는 세상과 같은 흐름이 자유로운 세상. - 그 넓고 깊이만큼의 응집평면의 형성은 높이 넓게 새로운 고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응집평면에서 리좀의 흐름의 활성화는 표면의 균열을 내고 탈주선들을 다양하게 만들 것이다. (54W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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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을 떠올릴 때 마다, 남북관계의 이항대립에서 달리 사유하는 방법이 좌절 또는 무화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 ‘같잖은 이야기’ 또는 별종을 탐색하는 길이 회의주의나 허무주의에 닿아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통의 삼족오와 삼색기(빨노파) 또는 묵찌빠를 생각한다. 도식의 비유에 빠지지 말고, 푸꼬를 빌어서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를, 그리고 들뢰즈를 빌어서 다양체의 활동으로서 노마드 또는 전쟁기계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현재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 즉 절대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을, 철학적으로 인식론을 거꾸로, 형이상학을 전복하는 길을 탐구하는 것이다. 인식론과 형이상학에서,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이 먼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인접해 있다. 이 사이에 길을 내는 것보다, 시간의 열림과 지도리의 철거로 확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확산의 여러 가지들은 합의(연대)와 계약(목표)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제도 속에서 또는 정치 체계들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투쟁들은 지성의 대립적 2항 논리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생각으로는 이항이 아니라 우선 인민이라는 다양체의 발현이며, 체제와 연관해서 보면 다양한 가지들이 제기되고 이들 사이에 합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측면에서 수렴이 있다고 본다. 그는 이런 수렴으로 재영토화가 된다고 하더로 다양체로서 가지는 자기의 권리를 양도(aliéner)하지 않고 있었기에 용출선은 여전히 실행 가능성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끊임없는 용출선의 분출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용출선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전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철학은 기존의 형성된 인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원과 발생과정에 대한 성찰이 있기에, 달리 생각하고, 달리 말하고, 같잖은 논의가 전개된다. 이런 달리 생각하기에는 형상형이상학을 전복하는 자연형이상학이라는 측면의 철학이 죽 심층으로 있어왔다. 이러한 뒤집어 사유하기, 전복의 철학은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철학은 소통적이지도 않고 게다가 관조적이지도 또는 반성적이지도 않다. 철학은 창조적이고 또는 심지어 본성적으로 혁명적이다.(186)>고 한다. (12:37, 54WKB) (13:04, 54W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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