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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노래: 사랑의 고백 (1:2-2:7) |
A |
둘째 노래: 신랑의 초청과 신부의 헤어짐과 만남 (2:8-3:5) (1) 신랑의 초청 (2:8-17) (2) 신부의 헤어짐과 만남 (3:1-5) |
B C |
셋째 노래: 혼인식 노래 (3:6-5:1) |
D |
넷째 노래: 혼인 후의 헤어짐과 만남 (5:2-6:3) (1) 헤어짐 (5:2-8) (2) 만남 (5:9-6:3) |
C’ B’ |
다섯째 노래: 깊어진 사랑 (6:4-8:4) |
B’ |
여섯째 노래: 여호와의 불과 같은 사랑 (8:5-14) |
A’ |
아가서의 서론(1절) 아가(雅歌)라는 말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노래들의 노래”, “최상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노래로서 부르고 배우게 합니다. 아가서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들 사이에 친구들의 합창이 두 사람의 사랑을 연결하기도 하고 강화하기도 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성(性)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반대로 금욕주의로 치닫기도 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원하시는 참다운 사랑을 노래합니다.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노래합니다. 자연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책의 이름은 “솔로몬의 아가”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라는 말인데, 솔로몬이 삼천 가지 잠언과 일천 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다는 말을 연상시킵니다(왕상 4:32). 그러나 “솔로몬의 노래”라는 말은 “솔로몬이 지은 노래”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에 대한 노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가서에서는 세 부분에 솔로몬이 나옵니다(1:5; 3:6-11; 8:11-12). 뒤의 두 부분에는 솔로몬을 조롱하고 비판합니다. 솔로몬에 대한 조롱과 비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아가서는 “솔로몬이 지은 노래”라기보다는 “솔로몬에 대한 노래”라고 보는 것이 아가서 전체의 흐름과 잘 맞습니다.
그 솔로몬의 사랑과는 다른 소박한 목동과 처녀의 아름다운 사랑의 목소리를 통해서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다룹니다.
1. 첫째 노래 (1:2-2:7)
1. 여인의 노래(1:2-6)
1) 달콤한 입맞춤(2-절)
여인이 그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 노래를 시작합니다. 입맞춤을 포도주와 같다고 합니다. 포도주에 취하듯이 연인의 사랑에 취한다고 합니다. 포도주의 취함보다 더 달콤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향기는 향기로운 기름보다 아름답습니다. 따라서 다른 여자들이 그의 사랑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른 여인들이 흠모하는 대상이라는 말은 그 남자가 다른 여인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남자가 그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4절) “나를 네 뒤로 끌고 가라. 우리가 빨리 달리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이끌고 달리라고 합니다. 여인은 그러한 남자를 “왕”으로 비유합니다. “왕이 자기 침실로 나를 인도하셨네” 하고 말합니다. 이 왕을 솔로몬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신랑을 왕으로 비유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양치는 목동이지만(7절) 그를 왕으로 비유합니다.
“우리가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4절). “우리”는 다음 장면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딸들”을 말합니다.
2-4절은 아가서의 주요 등장인물 세 그룹을 통해 전체 주제를 보여 줍니다.
1) 여인: 그녀는 처음부터 입을 맞추어 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인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성에 대하여 수동적이라는 생각과도 다릅니다. 반대도 여성이 주도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과도 다릅니다. 여인도 남성과 동일하게 성에 대한 갈망이 있고 그것을 표현합니다.
2) 남자: 자기의 마음을 표시한 여인을 잘 받아주고 인도하는 것이 남자의 책임입니다. 남자는 여인의 방으로 가지 않습니다. 자기의 침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인도해야 합니다.
3) 공동체: 공동체는 사랑을 평가해 줍니다. 여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여인들도 흠모하는 자라고 합니다. 사랑은 주관적이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면도 있어야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감정에 의지하여 결정을 내렸다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아가서는 사랑을 현실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혼인은 매력이 없는 남자(혹은 여자)를 “구제”하여서 누나나 어머니처럼 보호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나서 자기가 해야 할 희생은 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이름을 얻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이 바른 선택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를 세우듯이(디모데전서 3:7), 남편과 아내의 직분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공동체에 의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2)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내 사랑이 나를 흠모하는 것은 당연함(5-6절)
여인은 다른 사람이 볼 때 외모가 좋지 않은 것을 유쾌하게 말하면서 오히려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검다” “보다” “포도원”을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면서 어두운 현실을 밝게 표현합니다.
첫째, 이 여인은 예루살렘 도시의 여인은 하얀 피부를 가졌겠지만, 자신의 피부는 검다고 합니다. 자기의 몸이 태양에 탄 것을 화장으로 가리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유머가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자신은 아라비아에 사막의 모래 바람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천막과 같다고 합니다. 왕궁의 휘장처럼 아름답다고 합니다. 자신의 사랑인 목동을 왕으로 부르면서 자신은 게달의 장막과 왕궁의 휘장처럼 고 사랑하는 사람을 쉬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다”는 말로 유쾌하게 말합니다. “햇볕에 쬐는 것”은 “본다”는 뜻입니다. 태양이 충분히 바라보아서 검게 되었으니까 예루살렘 여자들은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오빠들의 분노를 태양의 열기와 연결해서 말합니다.
셋째, 포도원지기 여인은 자기의 몸을 포도원에 비유합니다. 그녀는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고 해 아래에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기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포도원”은 그녀의 몸(8:12)을 말합니다. 아가서에는 그 여인의 어머니와 오빠만 나오고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제들 사이가 좋지 않고 가족 환경도 좋지 않습니다. 평범한 시골 여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에는 불평이 아니라 유모와 쾌활함과 담대함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외모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이어트나 헬스를 건강 보다는 외모 때문에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 그러한 경향을 건강하게 조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가서에서 참다운 사랑을 배웁시다. 포도원에서 일하느라 검게 된 이 여인과 함께 조작된 미를 비웃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셨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2. 여인과 친구들-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나서는 여인(1:7-8)
여인(7절): 이제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녀의 사랑인 목동을 말합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쉬고 싶습니다. 목자인 그 사람이 양 떼를 먹이다가 한낮이 되면 어디에서 쉬는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굴을 가리고 목자들 사이를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가 쉬는 곳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태양 빛을 가리며 다녀야 합니다. 얼굴을 가리는 여인은 창녀로 취급되었습니다(창 38:15). 집을 떠나 일하는 목자들 곁에 접근하는 것은 창녀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쉬는 곳을 묻습니다.
친구들(8절): 친구들이 말합니다. 그녀를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라고 합니다(1:8; 5:9; 6:1) 예루살렘 여인들이 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비웃기 위해 한 말인지, 진짜 칭찬한 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3. 남자: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찬 (1:9-11)
마침내 사모하던 남자가 등장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검은 외모에 대한 염려가 있었습니다. 목동은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녀를 바로의 마차들 사이에 있는 암말에 비유합니다. 말을 장식하는 금 목걸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준마”는 “암말”을 말합니다. 암말은 병거를 끌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암말처럼 기품이 있고 건강합니다. 후궁처럼 얼굴이 하얗고 힘이 없지 않습니다. 말처럼 근육이 고루 발달해 있고 이목구비가 뚜렷합니다.
그녀는 바로의 준마처럼 장식한 그녀를 칭찬합니다. 귀걸이가 드리워진 두 볼과 목걸이가 드리운 목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은이 박힌 금사슬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여인이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인은 먼저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장식해야 합니다. (벧전 3:3-4), 그 위에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 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크게 합니다.
4. 여인: 내 사랑은 식사 때의 아름다운 향기(1:12-14)
두 사람의 만남은 식사로 시작됩니다. 소박한 목동이지만 그녀에게는 왕과 같은 이 남자의 초대로 식탁에 앉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서로 가까이 마주하면서 음식을 먹었을 것이고 서로에게 향기를 뿜어냅니다.
세 향료, 나도 기름향기, 몰약 향주머니, 고벨화 송이가 나옵니다. 주로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에서 즐기는 냄새입니다. 서로에 대한 매력과 끌림과 함께 있을 때의 기쁨 등을 비유합니다. 앞에서 남자는 여인을 시각적인 측면에서 보았지만 여인은 후각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1) 나의 나도 기름향기: 나도는 인도에서 수입한 값진 향료입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고귀한 향기를 맡습니다.
2) 내 품 속에 몰약 주머니: 몰약 주머니는 인도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여인들이 향기 나는 몰약을 잘게 빻아 가죽 주머니에 넣어 가슴에 넣고 다녔습니다. 여인은 몰약 향낭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습니다. 그 향낭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가슴에 품고 다니는 향료와 같습니다. 이렇게 긴밀합니다. 그 남자와 동침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3)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 꽃송이: 엔게디는 사해 서쪽 지역으로 황무지이고, 오아시스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고벨화는 노란색이고 향기가 좋아서 향료나 염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엔게디의 포도원은 실제 지명일 수도 있고,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엔게디”는 “염소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포도원으로 상징된 여인을 말할 수 있습니다(참조. 1:6). 여인은 자신은 포도원이고 남자는 그 포도원에 핀 고벨화의 꽃다발이라고 표현합니다. 여인뿐만 아니라 남자에게서도 아름다운 향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기쁨을 향기로 표현하였습니다.
5. 남자 (1:15)
남자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먼저 눈의 아름다움을 묘사합니다(참조. 5:10-16; 6:4-12; 7:1-5). 여인의 반짝이는 눈은 저기 날아다니는 비둘기와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눈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만나서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모습과 대조됩니다.
6. 여인 (1:16-2:1)
여인은 남자의 말을 받아서 사랑을 노래합니다. 정원을 거닐며 나무나 꽃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주위의 풀밭, 백향목, 전나무, 수선화, 백합화를 보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집니다.
1) 남자는 아름답다: 바로 앞에서 남자가 여인을 “아름답다”고 두 번이나 말하였는데(1:15), 여인도 그를 아름답다고 합니다(1:16). “화창하다”는 하나님이 주신 교제를 나타냅니다. 성전에서 절기를 함께 지킨 이스라엘 백성의 교제가 “선하고 아름답다”(시 133:1).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 아름답다”(시 16:6, 11)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제가 멋있을 것을 예상하면서 상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2) 침실은 궁전과 같은 자연(16, 17절): 그들의 침실은 푸른 나무 밑입니다. 나중에 사과나무 밑에서 사랑을 깨운다는 말로 연결됩니다(8:5).
그들에게는 주위 자연이 궁전입니다(17절). 우뚝 솟은 백향목은 집의 들보입니다. 향기가 나는 전나무는 서까래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함께 거할 집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인데 자연을 그들의 집으로 여기고 그 집이 궁전처럼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3) 나는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2:1): 여인은 자기를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합니다. 샤론의 수선화는 비가 내리면 무성하게 피는 꽃입니다. 이사야 35:1-2에서는 같은 단어를 “샤론의 백합화”로 번역하였습니다. 수선화는 성전 기둥의 장식으로 나옵니다(왕상 7:19, 22, 26; 대하 4:5). 여인은 샤론의 수선화와 골짜기의 백합화처럼 아름답고 무성합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다운 들판의 백합화입니다(마 6:28-29).
7. 남자(2:2)
여인은 자기를 골짜기에 만발한 꽃들 가운데 하나라고 자기를 낮추어서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말합니다. “아니요, 당신은 가시덤불 사이에 있는 백합화요”. 그 남자에게 다른 여인은 가시처럼 찌르기만 하고 그늘과 안식처를 줄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비록 피부가 검지만 그 남자에게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호화롭게 단장한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이 목동이 보기에는 가시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인은 이 칭찬을 받아들입니다. 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화답합니다.
8. 여인 (2:3-7)
1) 내 사랑은 사과처럼 달콤하다(3절)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가시덤불 사이에 있는 백합화로 비유하자, 여인은 그 남자를 숲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사과나무에 비유합니다. 다른 남자들은 이름도 없는 나무들에 지나지 않지만 자기의 연인은 사과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사과나무는 여인을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고(1:6)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2:5). 여인은 사과나무의 그늘을 간절히 바라고 또한 그 열매를 입으로 맛보기를 원합니다. “사과의 열매가 내 입에 달콤하다.”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입은 달콤하고(5:16) 또한 극상품의 포도주와 같습니다(7:10).
사랑을 목가적인 배경에서 이야기하지만,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도 잘 표시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자기의 몸을 보호하고 양육하듯이 자기와 한 몸이 된 여인을 보호하고 양육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엡 5:28-29).
2)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하는 잔치의 기쁨(4-6절)
2:4-7은 첫번째 노래의 결론입니다. 이 노래는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침실로 인도해 달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1:4, 7). 결론 부분에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잔칫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잔칫집”은 문자적으로 “포도주의 집”입니다. 여인은 남자의 인도를 받아 포도주를 흡족히 마십니다. 앞에서 포도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말했습니다(1:2, 4, 6). 이제 실제로 그것을 흡족히 마실 수 있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남자는 깃발입니다(4절) 깃발은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그는 이 여인을 바라보고, 그녀는 그 눈길에 끌려서 포도주의 집으로 함께 들어갑니다.
여인은 사랑으로 병이 났습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빠져서 병이 나는 것처럼(창 48:1) 이 여인은 사랑으로 심신이 쇠약해져서 병이 들었습니다(5절). 기진하여 생긴 병은 보양식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인 건포도와 사과와 같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먹게 해 달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로 만족하며 힘을 얻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 팔로 나를 안는구나”(6절). 여인은 남자에게 의지하고 남자는 부드럽지만 적극적으로 여인에게 다가갑니다.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가까이하는 것을 그려냅니다.
남자는 여인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처럼 보호하고 양육합니다(엡 5:28-29). 이렇게 보호하고 양육할 때 부부의 관계도 원만하고 풍요롭게 발전합니다.
3)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권고(7절)
예루살렘의 여인들에게 하는 권고로서 첫째 노래는 끝납니다. 이 말은 3:5와 8:4에서도 반복되며 단락을 맺는 역할을 합니다. “부탁한다”고 번역한 말은 “맹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인은 노루와 들사슴을 들어서 맹세하게 합니다. 아가서에서 노루와 들사슴의 이미지는 우아하고 성적 매력이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노루는 여인의 가슴을 묘사합니다(4:5; 7:3) 사랑하는 남자를 말합니다(2:9, 17). 노루와 사슴으로 맹세하는 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가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합니다. 이렇게 사랑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하다가(2:7; 3:5. 참조. 8:4) 결론적으로는 그 사랑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랑임을 말할 것입니다(8:5-6).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 (7절) 때가 되기 전에는 자극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람을 만나서 혼인의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육체적인 사랑을 자극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고 복종할 일
아가서는 사랑을 이렇게 아름답게 말합니다. 요즘은 사랑을 쉽게 육체적인 관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가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전인격적으로 서로를 즐기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서로의 전체를 즐깁니다. 사랑은 피부접촉보다 더 풍요롭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와 노래입니다. 성도들의 가정에 이런 로맨틱한 사랑이 있기 바랍니다.
이런 인격적 사랑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인 아가서에서 배웁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공급받습니다. 이렇게 배우고 공급받아서 서로를 사랑하기 바랍니다.
요즘은 너무 일과 돈 버는 일, 혹은 쾌락에 몰입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감수성이 너무나 약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을 아시고 시와 노래로서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가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사랑의 감수성이 깨어 나기 바랍니다.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이 넓어 지기 바랍니다.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도 참된 로맨틱한 관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혼인을 준비하는 성도도 그 아름다움을 소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성도들도 아가서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아가서의 사랑은 부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성도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배우기 바랍니다.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솔로몬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라는 말인데, 솔로몬이 삼천 가지 잠언과 일천 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다는 말을 연상시킵니다(왕상 4:32). 그러나 “솔로몬의 노래”라는 말은 “솔로몬이 지은 노래”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솔로몬에 대한 노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가서에서는 세 부분에 솔로몬이 나옵니다(1:5; 3:6-11; 8:11-12). “솔로몬의 휘장”(1:5)은 비교적 가치 중립적인 표현이지만 뒤의 두 부분에는 솔로몬을 조롱하고 비판합니다. 솔로몬에 대한 조롱과 비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아가서는 “솔로몬이 지은 노래”라기보다는 “솔로몬에 대한 노래”라고 보는 것이 아가서 전체의 흐름과 잘 맞습니다.
<참고>, 3절 향기름, 향유
그의 이름[셈]만 들어도 값진 향유[쉐멘]의 내음이 쏟아집니다.
<참고> - 읽지 않고 넘어가도 좋습니다.
7절,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
2:7, 3:5, 8:4에서 같은 단어가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직역하면 “사랑[아하바]이 원할 때까지는” 혹은 “사랑이 때가 될 때까지는”이라는 말입니다. “내 사랑” 혹은 “(나의) 사랑하는 자”로 번역하면 그들의 사랑이 충분히 채워지기 전에는 깨우지 말라는 말이 됩니다.
이 해석은 몇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여성이 남성을 부를 때에 사용하는 “도디”라 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부를 때에 “라으야티”라 합니다. 따라서 “사랑”(아하바)을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둘째, “일깨운다”와 “일으킨다”(우르)는 말을 우리 성경은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그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렇지만 “우르”라는 단어의 두 가지 형태(히필, 폴렐)에는 “방해한다”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단어눈 8:5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방해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셋째, 시적인 표현을 문자 그대로 다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아가서는 시가서로서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매우 육감적인 말로 표현합니다. 입맞추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가슴에 있는 향낭 주머니와 같다는 말이 침실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자는 사랑의 내밀한 관계를 묘사한 다음에 “때가 되기 전에는 사랑을 일깨우지 마라”고 하여서 사랑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넷째, 아가서 전체의 구조에서 읽어야 합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사랑을 일깨우지 마라”는 말은 문단의 마지막에 나오는 결론적인 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후렴구입니다(2:7; 3:5; 8:4). 셋째 후렴구 뒤에는 물로도 끌 수 없는 불 같은 사랑을 “어머니가 너를 잉태한 곳” 곧 “사과나무 밑에서” 나누라고 합니다(8:5). 혼인하여 아이를 낳는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사랑을 일깨우지 말라는 것이 이 부분의 가르침입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사랑의 대화를 보면 마치 사과나무가 자라고 사과가 익듯이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익어가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 육체적으로 사랑을 자극하여 일으키는 것을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도 때가 되지 전에는 자극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첫 부분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에덴의 목가적인 배경에서 가르쳤는데, 최초의 사랑을 생각하면 아담과 하와의 사랑은 그들이 추구하여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서는 자기의 짝을 찾지 못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어 그에게 인도하셨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과 같은 장면을 배경으로 사랑을 노래한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람을 만나서 혼인의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육체적인 사랑을 자극하지 말아야 하다는 교훈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