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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누림
(인생과 교회 안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신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장>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우리가 누리는 문제에 대해 말씀 드리겠다. 우리 인생과 교회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다. 교회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교리를 통일하면 되는가? 인류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종교를 통일하면 되는 것인가? 제도나 의식을 통일하면 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이런 것에 고심해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 길을 벗어나면 모두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분쟁 때문에 나온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파가 있어서 이 사람 파, 저 사람 파가 나뉘어서 분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질문보다 더 큰 해답이 나왔다.
분쟁이라는 것은 성질이 바벨에 속한 것이다. 바벨은 혼자되어서 갈라졌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떠나서 나온 결과가 마지막으로 열매 맺은 것이 바벨이다. 가인과 아벨의 살인 사건을 지나서 또 네피림들의 강포를 지나서 여러 가지 과정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열매 맺은 것이 바벨이다.
결국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종국은 바벨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또 다시 증명이 되었는데 새 예루살렘이 출현하기 전에 큰 성 바벨론이 등장하게 된다. 큰 성 바벨론은 창세기 11장의 바벨과 같다. 같은 원리에 속한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결국은 바벨이 된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모두 다 거기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뭉치자. 힘을 합하자.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오르자고 했다. 이것이 오늘 세상의 표어(슬로건)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대권주자들이 갈라지는 바람에 이파 박파 손파로 갈라져 있는 실정인데 세상에서는 파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어느 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다 거세되기 마련이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에 속하거나 자유민주주의에 분명하게 속한 사람은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에 속한 사람은 북한에 가면 살았고, 자유민주주의는 남한에 있으면 살았는데, 중도파라는 것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 멸망했다. 세상은 파가 없으면 망한다. 그래서 모두 파를 찾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도 큰 교파, 작은 교파라고 해서 큰 교파는 작은 교파를 항상 멸시하고 핍박해왔다. 큰 종교는 작은 종교를 핍박해왔다. 이것이 역사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죽지 않으려니까 커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조 500년 역사에서도 보면 파 때문에 많은 정란이 일어나고 사변이 일어났다. 거기서 어느 파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했다. 줄을 잘 서면 살고, 줄을 잘못 서면 죽었다. 거기서 정직한 길을 걸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한다. 이번에 드라마를 보니까 세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사이에 김종서라는 충신이 끼어있다. 김종서는 자기가 왕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단종을 어떻게든 보필하여 큰 왕이 되게 하려는 세종시대 충신이고 단종시대의 충신이다. 안평대군도 왕이 되려고 김종서를 제거하려고 하고, 수양대군 역시 마찬가지로 왕도정치라는 명분 아래서는 김종서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쪽에서 다 제거하려고 했던 것인데, 세조가 먼저 제거했다. 중간에서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은 패망한다. 어느 편에 속해서 세력이 큰 사람이 살아남기 마련이다. 결국은 수양대군 편에 속한 사람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것이 세상이다.
세상의 결말은 결국은 바벨론이다. 그리고 그 바벨론의 상태를 이야기하기 전에 땅에서 올라온 짐승,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전부 왕들을 이야기한다. 왕들을 인간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짐승이라고 표현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왕들은 짐승이다. 지금은 왕이 없어서 이런 말을 자유롭게 하지만 왕들은 짐승이다. 짐승 아닌 왕은 없다. 아주 선한 왕이나 성군이라 해도 짐승이다. 만일 자기의 보위를 넘보거나 역모를 꾸미거나 반대를 하면 가차 없이 아주 무자비하게 능지처참을 하고 3족을 멸하고 그 집은 파서 웅덩이를 만드는 잔학한 행위를 했다. 왕들은 누구든지 다 짐승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육지에서 올라온 짐승은 다 왕들이다. 왜 이 왕들이 생기는가? 바벨 때문에 생긴다. 바벨을 유지하기 위해 왕들이 바벨을 만든다. 분쟁은 바벨론이다. 교회 안에도 우리 교회를 제외하고 다른 교회들을 많이 보면 분쟁이 참 많다. 그것이 모두 파 때문이다. 우리 교회도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홍원선파, 나는 정한선파, 나는 이효용파, 심지어 나는 이현래파라고 하면 바로 이것이 고린도 교회다. 뭔가 소속감을 가지려고 하거나 그 소속감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담의 본성이이다. 아담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이런 것이 있다. 없는 곳이 없다. 교회라고 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역시 있다.
죽고 부활한 생명이 아닌 곳에는 어디든지 마찬가지다. 분쟁이 고린도전서에서 맨 먼저 취급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 사건들을 보면 더 심한 사건들도 있다.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더 나쁜 사건도 있다. 심지어는 아비의 아내를 취해서 살았다는 것은 분쟁보다 훨씬 더 악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에서 파당을 나누어 싸우는 것은 고상한 것으로 보이고,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놈 같이 보인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는 맨 먼저 분쟁을 취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분쟁이 아담의 종말이고 꽃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종말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분쟁 속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증상들은 아담의 종말적 병의 증후군이다. 이런 현상도 있고 저런 현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대책은 유일하게 하나 분이라는 것이다. 십자가 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동산에 있었으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동산을 나와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생명나무를 먹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된다. 왜냐하면 화염검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화염검을 통과하려면 죽어야 된다. 이 화염검은 바로 십자가다. 이것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생명나무 세계에 에덴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분파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 속에 깊이 들어있는 아담 때부터 들어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 혹시 나는 누구만 좋고 다른 사람은 싫다거나 나는 이런 구름만 좋고 저런 구름은 싫다는 것 속에 전부 그런 의식이 들어있다. 자기는 모르지만 은연 중에 들어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세세하게 감추어져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죽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불거져 있는 것만 몇 개 있으면 그것만 치료하면 되는데, 그 생명 안에 내장된 아주 세밀한 것, 아주 깊은 것, 아주 은밀한 것이 들어있다. 겉으로는 분파지만 겉으로는 이파 저파 내 모임 네 모임 하지만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들어있다. 이것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잡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 필요하다. 병균도 눈에 보이는 병균,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병균은 잡기가 쉽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잡기 어렵다. 바이러스는 옛날에는 볼 수가 없었고, 세균만 겨우 발견했다. 이제는 전자현미경이 나와 바이러스까지 보게 되었다. 눈으로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이 바이러스다. 그러니까 바이러스를 처지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보다 더 작은 것이 있다면 더 어렵다.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것, 보이지도 않는 것, 자기도 모르는 것이 있다. 자기가 알면 그렇게 하겠는가? 자기도 모른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필요하다. 나도 30여년 전에 파를 갈라 싸웠다. 물론 중도파도 있었다. 처음에는 선한 싸움을 한다고 싸웠는데, 내 속에 그런 것이 들어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 번도 누구와 싸워본 일도 없고 파당을 지어본 일도 없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옳지 않는 일에 항거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내 속에 그런 것이 있을 줄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파를 갈라 싸우다보니까 내 속은 온갖 것이 다 드러난다. 내가 모르던 것이 다 드러났다. 그것을 통해 나는 하나님은 절대로 싸우는 곳에는 계시지 않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평강 중에 화평 중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이름이 화평이다. 그때 아기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집안은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짓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나 혼자 다른 이름을 지으려고 하니까 고민이 되었다. 여러 번 고민을 하다가 내 일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교훈이므로 이것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주는 것이 좋지 항렬이 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격식을 깨고 화평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이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그 다음에 다른 곳에 가보니까 사람 속에 그런 것이 많이 들었는데 그것이 터져 나오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옳고, 또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으로 들렸는데, 저것이 바로 아담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느 파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싸운다하더라도 사람이 어느 편을 들게 마련이다. 싸우다보면 두 편이 생기게 마련이다. 길을 가다가 내가 모르는 사람끼리 싸워도 나도 모르게 그 중의 한 편이 된다. 본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 본성을 수양을 통해서 처리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죽음만이 유일한 대책이다.
1. 사도의 사역의 유일한 주제와 중심과 내용과 실질(고전2:2)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사도들의 유일한 주제이고, 유일한 중심이고, 유일한 내용이고, 유일한 실질이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그 말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은사 때문에 갈라진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방언하는 사람이냐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냐 병 고치는 사람이냐 예언하는 사람이냐로 또 갈라졌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결국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분파를 만든다. 자칭 하나님께 받았다는 은사도 다 그렇게 파가 생기게 된다. 방언한 사람들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방언 통역 못하는 사람을 시시하게 생각한다. 병 고치는 세계에 가도 마찬가지로 배탈을 치료하는 사람도 있고 암을 치료하는 사람이 있다. 실제로 병이 나은 사람도 있다. 그러면 배탈을 치료하는 사람은 별 것이 아니다. 암을 치료하는 사람과는 자연히 파가 갈라질 것이다. 좋은 것도 갈라지고 나쁜 것도 갈라진다.
교회를 건축함에 있어 가장 결정적으로 나쁜 것이 바로 이 분파다. 다른 것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다른 것은 그 속에서 헤어날 수가 있는데, 분파주의는 고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한다.
나도 이것 외에는 모르는 것이 참 감사하다. 왜냐하면 나도 다 하고 싶었다. 지식도 많이 가지고 싶었고 은사도 많이 가지고 싶었고 능력도 많이 가지고 싶었다. 젊었을 때는 다 그런 욕심이 있다. 그것을 자기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서 아주 절실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욕심이다. 그런 것을 다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허락해주지 않아 못하게 되었다. 하고 싶어 애쓰는 것도 안된다. 그때는 상당히 속으로 하나님이 섭섭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모르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행사하지 않기는 참 어렵다. 주먹 센 사람이 주먹 참기는 참 어렵다. 나 같은 사람은 주먹이 없으니까 참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주먹이 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참기가 참 어렵다. 알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우므로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한다. 아마 사도 바울은 은사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 같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아는 것이 많다. 지식도 많고 은사도 많고 능력도 많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1.1. 모든 문제들과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고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 23-24)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모든 것들, 아담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애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없어져야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 건축자라도 헌집으로 좋은 집을 지으라고 하면 절대로 어렵다. 지금 우리 교회는 기둥이 많은데 여기에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서 별 다른 건축을 해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차라리 다 헐고 새로 지으면 아주 쉽지만 헌집 고쳐서 새집을 만든다는 것은 아주 어렵다. 그래서 기술자들을 데리고 오면 수리하려고 하지 않고 부수고 새로 짓자고 한다. 그것이 휠씬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무엇이 방해가 되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이 방해가 된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으면 아주 쉬울 텐데 뭔가 아는 것도 많고 뭔가 능력도 많고 뭔가 받은 것도 많은 것들이 아주 방해거리가 된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면 모르면 차라리 받기가 쉽다. 그런데 이것저것 어중간하게 알면 대단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 제일 답답한 것은 너무 아는 것이 많다. 자세히 들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말을 듣지 않는다. 들을 수가 도저히 없다. 그것은 헌집이나 마찬가지다. 뜯어 없애야 집을 새로 지을 수 있지 그냥 놔두고는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들을 특별히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고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이 되게 된다. 십자가를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일하기가 수월해진다. 어떤 인간에게도 십자가가 지나고 가면 일하기가 쉽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전에는 일하기가 아주 어렵다. 설득하고 달래고 아무리 해도 안된다. 한쪽을 맞추어 놓으면 저쪽이 틀리고, 이쪽을 맞추어 놓으면 저쪽이 또 틀리고 계속 삐져나오므로 일하기가 너무 어렵다.
하나님의 계획이 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을 머물고 있는가? 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지금까지가 언제이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도 지금이 언제인가? 그것만 하더라도 2000년이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되지 못하는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 버릴 수 없는 그것 때문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지금이라도 당장 일이 수행되어 새 예루살렘이 당장 하늘로부터 내려올 텐데 그것이 안되기 때문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면 십자가의 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일 뿐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바로 내 능력이 됨을 경험하게 되면 아주 세상이 쉬워져버린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가 항상 미련하게 보이고 항상 짜잔하게 보이고 항상 시원잖케 보이고 비참하게 보이므로 내가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라는 것만 알면 직행할 수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비참하고 희망이 없고 가능성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지금 난리인데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있는 사람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것을 쳐다보고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갔다고 속으로 욕했는데, 속으로 욕할 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모든 인류가 가는 길이다. 그것을 보면 아무도 그것을 원할 사람이 없다. 아무도 좋아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다 버리고 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만 일을 하실 수가 있다. 이것이 비밀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 했다. 아주 유명한 말이다. 이 유대인 속에는 기독교인이 다 포함되어 있다.
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라고 했는가? 이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적을 행해주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적을 행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십자군 행렬을 할 때도 하나님이 불을 내려주어서 적군을 물리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유대인들은 항상 이적을 원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해서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무슨 힘을 주어서 도와주기를 바란다. 내가 4년의 싸우는 동안 하나님 내 편을 들어달라고 했고, 하나님 저 악한 무리들을 처치해 달라고 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상대방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을 보고 저 남편을 하나님께서 빨리 십자가에 매달아달라고 한다. 왜? 내가 편하고 싶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를 두고 기도하는데,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내를 빨리 십자가를 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적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이적을 구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어떤 능력으로 해결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해결되면 십자가가 필요하지 않다.
지금 분쟁이 문제가 되는데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잡아다가 족치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 두목들을 잡아가면 다 해결된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아블로에게, 이 사람들은 나는 저 바울만 없으면 어떤 사람은 저 아블로만 없으면 저 게바만 없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해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표적을 구한다는 말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유대인들은 옛날에 표적을 많이 보았다.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많은 기사와 이적을 경험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이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 기독교인들이다. 물론 다른 종교도 그럴 것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 능력으로 다 해결되면 십자가가 왜 필요하겠는가? 나는 죽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만 죽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다. 세상의 원리는 왜 왕들을 짐승이라 했는가? 저 역적이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짐승이라는 것이다. 남의 피를 흘려서 세상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였다. 스탈린이 자기가 죽어서 하겠다고 했는가? 레닌이 자기가 죽어서 유토피아를 하겠다고 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막스가 자기가 죽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고 했는가? 남을 죽여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십자가는 남을 죽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죽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과는 완전히 반대다. 정반대다. 우리가 분명하게 이 사실을 알아야 기독교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일 이것을 모르면 기독교인이라고는 하는데, 매일 기도하기도 하고 매일 성경말씀을 보기도 하고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데 원리는 세상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네가 죽으면 내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싸워보면 저쪽만 아니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문제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라는 뜻이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하는데, 지혜는 철학이다. 이방세계의 최고의 영광은 지혜다. 소피스트(Sophist)는 지혜자라는 뜻이다. 지혜와 철학이라는 말이다. 불교 같은 종교를 철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108번뇌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지혜로 해결한다고 한다. 가시 없는 지혜로 무변한 지혜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도덕경도 마찬가지다. 지혜가 있으면 다 해결된다. 이것이 세상의 교훈이다. 지혜롭게.
만일 이 지혜가 사람에게 있다면 십자가가 없어도 된다. 지혜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피해가는 것이 지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지혜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피해가는 길일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다. 지혜로 되어야지 십자가로 되겠느냐는 것이다. 왜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는가? 바로 어리석은 길로 가기 때문에 멸시한다. 십자가의 길은 어리석은 길이다. 그래서 멸시하게 된다.
왜 사람들이 그쪽을 찾아가는가? 지혜롭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고 독경을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참 지혜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지혜는 아담의 지혜다. 즉 하나님의 지혜와 다르다는 말이다. 아담의 지혜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다. 자기 없는 지혜라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참된 지혜가 될 수 없다.
지혜가 만일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면 십자가는 참 부끄러운 것이고 무용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는 유대인이 볼 때도 미련한 것이고 헬라인이 볼 때도 미련한 것이다. 유대인이 볼 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이 볼 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표적만 있으면 될 텐데 이적만 있으면 될 텐데 왜 십자가가 필요 하느냐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가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왜 저런 길을 가야 되느냐고 생각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던 분이 이적을 행하면 될 텐데 왜 저 길을 하필 가야 되느냐는 것이 제자들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모른다. 당장 지금 밖에 예수를 잡으려고 온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판에 지혜를 발휘하든지 아니면 표적을 내놓을 판인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졸리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그래서 졸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세상에 도망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다가 달아난 것이다. 너무나 미련한 짓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속으로 한번만 나타내주기를 바랬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후까지라도 기대를 가졌다. 저기서 만일 뛰어내리기만 한다면 저기서 만일 천둥번개가 치기만 한다면 저 반대자들이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표적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래서 모두 달아날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는 뜻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는 아주 중요한 말이다.
1) 인간적 방법은 협상이나 하나님의 방법은 관련된 인간을 종결시키는 것임(갈2:20,롬6:6 참조)
인간적인 모든 방법은 다 협상이나 흥정이다. 누구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둘이 적당히 협상해야 된다. 서로가 흥정하여 나는 이만큼 너는 저만큼 하자고 하여 화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인간을 종결시키는 일다. 방법이 아주 다른 방법이다. 협상이 아니라 종결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는 종결됐다는 말이다. 종결되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종결된다. 하나님 방법은 종결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당했을 때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협상이냐 종결이냐는 두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인간의 방법은 지혜를 통해서 협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종결시키는 것이다.
2) 온 우주를 잠잠케 했고 극도로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었음(롬6:10)
그래서 십자가는 온 우주를 잠잠케 했다.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복잡한 상황들을 단순하게 만들어놓았다. 우리가 만일 십자가를 안다면 잠잠해지게 된다. 지혜도 잠잠해지고 표적도 잠잠해진다.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면 죽는다. 어떻게 죽기 않겠는가? 거기서 이적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 비정상적이다. 반드시 죽을 것인데 이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런 경험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홍해바다에서 이적을 보았다. 그들은 그런 순간에도 그 이적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보면 할 말이 없다. 잠잠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옛날에 당신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런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들이신 그분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니까 죽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모든 입이 잠잠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상황도 왜 복잡하게 되었는가? 앞에서 우리가 단순한 세계, 생명의 세계를 떠났기 때문에 복잡해진 것이다. 동산 안은 아주 단순하다. 생명나무가 있고 물이 있다. 흐르는 물이 있었다. 단순하다.
그런데 아담의 세계는 복잡하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것이고,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네가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며, 너는 종신토록 수고해야 될 것으로 아주 복잡해졌다. 인간의 문제는 한 없이 복잡해졌다. 이것을 깊이 생각한 사람들이 불교에서 하는 말이 108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108이라고 하는 말이 꼭 108개라는 뜻이 아니고, 무한대하다는 말이다.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한없는 번뇌가 있다. 왜 그런가? 단순한 세계를 떠났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단순화시킨다. 죽기 아니면 사는 것밖에는 없다. 그러니 단순해진다.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면 단순해진다. 젊었을 때는 사람이 복잡한데 늙으면 단순해진다. 왜냐하면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단순해진다. 나도 젊었을 때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생각이 복잡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일도 많고 손 볼 것도 많은 복잡한 사람이었는데 시간이 점점 촉박해져 오니까 단순해진다. 그 복잡한 것을 다 하고 갈 시간이 없다. 성경을 읽어도 복잡한 것은 제쳐놓고 가야 된다. 왜냐하면 다 하고 갈 시간이 없다. 옛날에는 골골이 글자 하나라도 찾아보아야 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큰 것만 보아도 이것도 시간이 없다. 단순화되어 버리고 만다.
복잡한 상황들이 단순해지게 된다. 그런데 늙어서도 복잡한 사람은 정말 곤란하다. 그 사람은 구제불능이다. 늙으면 단순해져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눈도 좀 멀게 만드시고, 왜냐하면 눈이 침침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여러 가지가 많이 보이지 않으므로 대충 보고 살도록 했다. 귀도 어두워지는데 대충 들으라는 말이다. 세밀한 것은 듣지 말라는 것이다. 많이 보지 않고 많이 듣지 않으면 단순해진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고 한다. 죽고 사는 것밖에 없다. 협상을 하려면 굉장히 복잡하다. 지금 6자회담을 하는데 끌고 있는 것이 몇 년째다. 계속해서 한다고 했다가 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한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북조선도 어떻게 하면 여기서 이익을 더 챙길까하니까 시간을 계속 연장하고 핑계를 대는 것이다. 다음 주에 열린다고 했다가 무슨 일을 만들어버린다. 협상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고 해버리면 단순하다. 지금이라도 비정치적인 사람들 같으면 연변에 있는 시설에 중성자탄을 하나 때려버리면 시원하게 될 일을 저렇게 시간 끌고 하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미국이 하려면 단숨에 한방에 없애버린다. 그런데 협상을 하자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꼭 된다고 하는데 며칠이 걸리지 또 모르겠다. FTA 협상하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협상을 많이 하고 복잡한가.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은 죽고 사는 아주 단순한 길에 놓여있다. 아담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는 것이 복접한 일이다. 아담이 끝나버리면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은 단순해진다. 쉬워진다. 단순해지면 쉬워진다. 단순하면 쉬워지는데 파워가 생기게 된다. 복잡하면 파워가 없어진다. 단순하면 파워가 생긴다. 물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퍼져있는 물은 소용이 없다. 그런데 철판을 자르는데 물로 자른다고 한다. 아주 가는 물을 강한 압력으로 쏘게 되면 철판이 잘라진다.
단순하면 능력이 생기게 된다. 예수님은 단순한 분이었다. 그래서 온 인류를 구원할 파워가 생기게 된 것이다. 우리가 많은 것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하나라도 완전한 것을 가지면 된다.
1.2.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의 모든 어떠함, 소유한 모든 것,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완전히 종결되고 부활생명의 문이 열림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착착 수행됨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누리면 우리의 모든 어떠함, 또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이 종결되게 된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떻다가 되겠는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게바파다, 아블로파다가 되겠는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장로교파다, 나는 감리교파다가 되겠는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기독교다, 불교다가 되겠는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정통이다, 너는 이단이다가 되겠는가? 안된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 다 멀리 있으니까 하는 소리들이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한다. 우리가 소유했다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 소유가 아니고 빌려 쓰는 것들이다. 우리 생명도 빌려 쓰는 것이다. 빌려 쓰고 두고 간다고 생각하면 쉬운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긴다. 무덤으로 어떻게 갖고 가겠는가? 가지고 갈 방법이 없다. 아무리 돈이 많고 소유가 많고 지식이 많아도 가지고 갈 방법이 없다. 빌려 쓰는 것이다. 렌트(rent)다.
우리 모든 것은 다 종결되고 부활생명의 문이 그때 열린다.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생명이 무엇인가? 이론적으로는 증명할 방법이 없다. 무엇이 부활이라고 할 수가 없다. 종결되면 딱 문이 하나 열리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의 문이다. 끝나면 열리는 문이다. 이것은 끝나지 않으면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부활을 유리인간이 되는 것인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인가, 연기인간이 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고, 꼭 종결될 때만 열리는 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수행되는 문이다. 이 문이 딱 열리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착착 진행된다. 착오 없이 복잡한 것이 없이 진행되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사도들의 사역의 중심이었다. 주제였다. 그리고 내용과 실질이었다. 오늘날 교회 사역에 주제와 중심과 내용과 실질이 무엇인가? TV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주제가 무엇인가 하면 이것과는 관계가 없는 다른 주제다. 능력도 있고 말씀도 다 잘하지만 주제가 아니다. 우리가 말을 좀 못하더라도 우리가 좀 힘이 없더라도 주제는 분명해야 된다. 주제와 중심과 내용과 실질이 분명해야 된다. 천천히 가더라도 이것이 분명해야 된다. 빨리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주제가 확실하고 중심이 확실하고 내용과 실질이 확실해야 된다.
사도들은 이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된 것이다.
2.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생명주는 영으로 누릴 때 인생과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며 교회 건축을 위한 생명이 성장됨(1:23, 2:2, 15:45, 6:17, 8:6 참조)
두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가 누릴 때, 인생과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교회 건축을 위한 생명이 성장하게 된다. 우리가 십자가 따로 있고 부활 따로 있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다. 문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해결되고 성장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성장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 없이는 성장되는 것이 아니고 빗나가는 것이다.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천당까지 가서도 내 파, 네 파 할 줄로 생각한다. 빗나갔다는 말이다. 앞에 날 뿔이 엉덩이에 났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당에 가서 피켓 들고 이 파, 저 파하거나 나는 천주교이고 너는 기독교이고 하고 서겠는가?
이 문 하나 때문에 빗나가서 다른 길로 가려면 한없이 가버리고, 옳게 가려면 옳게 가는 것이다. 화염검으로 가려진 길은 하나뿐이다. 다른 길로 갈 수가 없다.
2.1.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무교병으로서 우리에게 명절이 됨(고전5:7)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무교병이다. 누룩 없는 떡이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떡을 누리는 잔치가 무교절이다. 이것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해서 일주일간을 축제를 벌인다. 페스티발(festival)이다. 잔치를 가보면 여러 가지 잔치가 많다. 생일파티도 있고 명절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잔치 뒤끝이 대부분 이상하게 별로 좋지 않다. 왜냐하면 아담들이 모이니까 잔치 뒤끝이 별로 좋지 않다. 동창회를 하고 나면 뒤끝이 별로 좋지 않다. 왜냐하면 모두 자기 잘났다는 소리를 하니까 돌아올 때 씁쓸하다. 여고생 동창회 가면 시집 좀 잘갔다고 비죽거리면 나오므로 잔치가 아니다.
미국사람들 문화는 파티 문화 같다. 학생 때부터 파티를 한다. 처음에 파리, 파리해서 불란서 파리인가 하고 가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파티인데 파리한다. 좋은 옷도 준비하고 파티복도 준비한다.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하다 보니까 아마 그런 사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학생 때부터 그런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우리는 겨우 결혼식 잔치가 있지만 결혼식도 가면 먹고 와버리지 노는 것이 없다. 미국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통해 재미있게 논다. 전번에 결혼식에 참석해보았는데 친구들이 밤새 놀고 새벽 4~5시에 들어온다. 힘도 좋으니까 그렇게 하겠지만 진짜 잔치다. 우리는 먹는 것이 잔치인데, 그 사람들은 노는 것이 잔치다.
잔치보다 규모가 좀 큰 것이 페스티발이다. 그런데 사전을 찾다보니 재미있는 말이 있다. Party는 사교모임인데, Parting하면 분열이라는 뜻이다. 서로 헤어진다는 뜻이다. 같은 어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을 보니까 party가 parting이 되면 분열이 되고 헤어짐이 되는 것인가? 나는 영어를 잘 몰라서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이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 절기가 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수장절, 나팔절 등 여러 절기가 많이 있다. 이런 절기들은 온 민족이 함께 모여 즐기는 날이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어떤 은혜와 관련된 절기들이다. 그러니까 민족적인 축제다.
우리는 8.15 해방기념일도 유야무야해버렸다. 무엇 때문에 유야무야했는지 잘 모르겠다. 좋은 날인데 외세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생각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것은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서라도 동성로 4거리에서 북을 칠 일인데, 이런 것이 다 없어지고 말았다. 미군이 점령해서 됐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리니까 사상 자체가 달라져서 8.15 해방도 이제 퇴색되어 별로 재미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정말 좋은 명절이 없다. 정월 보름, 가을 한가위 정도이지 특별한 의미가 없다. 태극기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의미가 없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한다. 이 잔치는 그리스도 자신이 잔치가 된다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희생 제물이 되어서 잔치가 되었다. 멧돼지 잡아놓고 바비큐하면서 잔치하듯이 예수님이 그런 것이 되었다.
1) 그리스도는 누룩 없는 분이심
예수님께서는 누룩 없는 분이다. 누룩이란 부패하고 퍼져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아담은 근원적으로 부패했다. 동산을 나올 때 이미 부패했다. 왜냐하면 생명나무만 먹어야 할 사람이 다른 것이 들어갔다. 그래서 부패한 것이다. 우리 속에도 먹을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가면 배탈이 난다. 아담은 이미 부패했다. 선악과로 부패한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순전하고 진실하다.(5:8) 왜 그런가? 십자가는 사람을 순전하고 진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죽을 때 하는 말은 진실하다고 한다. 죽을 때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법원에서 재고를 해보아야 되는 일이다. 사람이 죽을 때는 다 진실해진다고 한다.
십자가는 우리를 순전하고 진실하게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 더 순전하고 더 진실한 분은 없다. 성현군자도 많고 다 훌륭한 분들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순전하고 진실한 분이란 수양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이다. 수양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자기를 닦는 것이니까 자기 여유를 항상 남겨두고 있다. 전적으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와서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부인이 되지 내가 스스로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항상 누룩이 밑에 들어있다. 혹시 자기가 자기를 희생했다거나 자기를 부인했다고 한 사람을 보면 그 밑에 무슨 누룩이 깔렸는가? 자기 의라는 누룩이 깔려있다. 그런데 그 누룩이 굉장히 독하다. 그 누룩을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독사처럼 독하게 나와 버린다. 자기 의라는 것이 그렇다. 그것을 완전히 비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석가모니의 고행상을 보면 완전히 뼈와 가죽만 남아있다. 고행을 통해서 모든 인생의 누룩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뼈와 가죽만 남는다고 해서 누룩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40일 금식기도 한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40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고 한다. 욕심도 없어지고 아주 순전하고 진실해진다고 한다. 그 상태로 계속 살면 좋은데 그 상태로 살 수가 없다. 나와서 물마시고 미음 먹어서 살이 좀 찌면 다시 또 생겨나는 것이다. 다 없어졌던 것이 또 생긴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비울 수가 없다. 누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한은 내가 나를 못 박을 수가 없다. 자기가 자기 몸에 주사 하나를 놓으려고 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옛날에 나는 내 손으로 주사를 많이 맞았다. 왜냐하면 매일 맞는 주사라서 엉덩이에 내가 매일 놓는데 놓을 때마다 그렇게 어려운지를 모르겠다. 할 수만 있으면 하지 않고 싶지 누가 하고 싶겠는가. 다 비웠다거나 뭐에 들어갔다고 해도 다 소용없다. 순전하고 진실할 수가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만 순전하고 진실하다.
2) 교회생활은 누룩 없는 잔치를 누리는 것
교회생활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누룩 없는 잔치를 누리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고 했다. 이 누룩 없는 떡은 그리스도를 말한다.
하나님께 소제물을 드릴 때 누룩을 절대로 넣을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런데 허용된 것은 감사제와 초실절 제물에는 누룩을 허용하도록 되어있다. 이것은 내 생각으로는 감사제와 초실절은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니까 누룩을 넣어 부풀릴수록 좋다는 뜻인 것 같다. 감사는 부풀릴수록 좋다는 말 같다.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것을 받아도 굉장히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저것이 거짓말인가 참말인가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물 한 모금 먹고도 감사하다고 하고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하고 다음에 만나도 또 그 이야기하면, 어쩌면 푼수 같지만 입 닦아버리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아마 감사제나 수확하는 초실절에는 누룩을 넣으라고 한 것 같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무엇인가를 수확한다면 누룩을 넣어 부풀려야 된다. 초창기에 간증하는 사람이 부풀려서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 얼굴을 찌푸렸다. 말만 큰 소리 친다고 생각하고 비아냥거렸다. 조금 부풀려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더 낫다. 나는 부풀리는 것을 좋아한다. 감사와 수확에 대해서는 부풀리는 사람이 더 좋다. 나도 들어보면 하나인지 둘인지 다 알지만 하나를 열 개처럼 말하는 사람이 좋다. 그래서 감사제와 초실절에는 누룩을 넣도록 한 것 같다.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수확에 대해서는 부풀려야 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설 때는 누룩이 없어야 된다. 순전해야 된다.
무교절의 규례(출12:15~20 참조)는 온 집에 누룩을 집에서 제하라고 한다. 첫날에도 성회를 열 것이고, 제 7일 마지막 날에도 성회를 열 것이다.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대대로 지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규례가 전해졌다.
이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운명을 우리 평생 동안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은 우리의 구속을 이야기하지만 무교절은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평생 동안 음식으로 누린다는 뜻이다. 유월절을 하루뿐이지만 무교절은 7일이다. 우리가 단번에 구원받지만 주님이 행하신 일은 영 단번에 행하신 일이지만 우리가 그분을 누리는 일은 평생을 통해 누리는 것이다. 단번에 이루셨다고 해서 우리가 만일 누리지 않는다면 아무 효과가 없다. 그분이 이루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을 내 운명으로 누릴 때만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a.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하신 생명주는 영(종결과 발아를 포함)(고전 15:45 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하신 생명주는 영이시다. 종결과 발아를 포함한다. 끝내고 새싹이 나게 한다. 생명주는 영이라고 한다. 우리를 새롭게 살려주는 영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는 그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 안의 생명주는 영, 살려주는 영이다.
b.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잔치로 누림으로 생명의 방식으로 그분과 동화됨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잔치로 누리면 생명의 방식으로 그분과 동화된다. 이 생명의 방식이라는 말을 우리가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 운명을 즐거워하는 동안에 그것이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냥 겉으로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파티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즐거워하는데, 파티에 가면 별로 즐거워할 재료가 없어 농담이나 하고 오는데, 그리스도를 누리는 파티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페스티발은 그분과 우리와의 생명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생명의 방식으로 그분과 동화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이 먹어지게 되고, 마셔지게 되고, 맡아지게 된다.
우리가 교회잔치에 와서 우리는 그 향기를 맡고 있다. 어떤 잔치의 향기를 맡고 있다. 말은 못하겠지만 어떤 잔치의 향기를 맡고 있다. 뭔가 좋고 뭔가 신선하고 향기롭다는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 맡는 것이 우리 속에 깊이 들어가서 우리가 그분과 동화작용을 일으킨다. 이런 것이 없이는 우리가 그분과 동화되기가 어렵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7)고 했다. 우리가 그분을 마시고 맡고 먹으면(누리면) 우리는 그분으로 살아지게 된다. 딴따라 판에 가서 한참 딴따라를 듣다가 나오면 나올 때 딴따라가 흥얼거려진다. 한참 있다가 나오니까 동화되어 벌써 그렇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페스티발의 향기를 맡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나온다. 맡아놓은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각이 냄새다. 가장 동물적인 감각이다. 연어가 어떻게 찾아오는가?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우리도 페스티발의 냄새를 맡아야 된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잔치의 향기를 맡게 되면 나도 모르게 사이에 동화된다.
2.2.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맞아서 갈라져 우리가 마시도록 흘러내리는 영적인 반석이심(고전10:4, 요19:34 출 17:6, 민20:8-11)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맞아서 갈라져서 우리가 마시는 생수와 나왔던 옛날의 반석과 마찬가지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물이 없어서 분쟁이 일어나고 원망이 일어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했더니 모세가 화가 나서 2번 때렸다고 되어있다. 그 일로 인해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석이 갈라져서 생수가 나와서 온 백성이 먹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맞았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유태인들에게 부랑당들에게 버림받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이 버린 것은 왜 버렸나?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면 거기서 물이 안나온다. 생수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생수인가? 우리가 먹을 생수가 안나온다. 만일 그분이 마지막 자리에서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분과 영원히 하나될 수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구나. 거기에 비교하면 도저히 안된다. 내가 버림받지 않을 방법이 없다. 예수님께서 만약 버림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 생활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가서 버림받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그분이 되었다. 우리와 하나 될 수 있는 그분이 되었다. 깨진 반석으로부터 맞았으매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다.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다. 이사야서에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그가 고통을 받음으로 그가 형벌을 받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왔던 것이다. 왜 그가 고통을 받았는데 나한테 뭐가 오는 것인가? 그분과 우리를 동화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동화가 된 것이다.
1) 생수의 원천이 되심
생수의 원천이 되었다.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한 영이 됐는가? 그분이 매 맞아서 터짐으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모든 것이 다 터짐으로 인해서 우리와 하나되게 되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2,3)라고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먹어야 된다. 그분에서 흐르는 물을 우리가 마셔야 된다.
그분이 버림받은 것이 나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다. 그분이 버림받음으로서 흘러나온 물, 그분이 버림받음으로서 터져 나온 그 운명이 우리가 먹을 양식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똑같았다.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전까지는 나와 달랐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할 때 까지도 우리와 다르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하겠는가? 못한다.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 그리고 또 옮겨 주십시오. 그리고 또 꼭 옮겨 주십시오. 꼭 절대적으로 옮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은 내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사람이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이 말이 쉬운 말이 아니고 우리는 못할 말이었다. 거기 가서도 우리는 그분과 하나될 수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니까 그분과 우리사이에 담이 없어졌다. 깨져서 물이 나왔다는 말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넘칠 것이라고 한다.(요4:10,14)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 물을 못 먹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도 못 먹을 사람이 없다. 이 물을 먹는 한 우리가 갈증이 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흘러나온 물을 먹고 우리가 갈증 날 일이 없다. 인생의 불만이 날 일이 없다. 목이 탈 일이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내 인생의 불만이 날 일이 없다. 불만 할 일이 없다. 모든 게 감사하다. 숨 쉬고 있다는 것 까지도 감사하다. 요즘에 매일 누워서 살고 주일에 나오고 또 누워서 산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밥 먹고 누워야 되고 밥 먹고 누워야 되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2~3시간씩 누워있어야 맥박이 가라앉으니까 뭐하는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것도 감사하지, 주일에 가서 말씀할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하다. 나는 무엇이 되더라도 하여간 말씀할 수 있도록만 된다면 참 감사하다. 사람들이 멀리서 목소리만 들은 사람은 40대냐고 묻고 화면을 본 사람들은 멀쩡하다고 한다. 우리 목사님은 100살까지 살 거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목 위쪽만 살아있다. 그런데 그것만 살아있게 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것만 살아있다면 다른 것은 다 죽더라도 상관없다.
2.3.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어떤 종류의 환경에서도 살 수 있게 하고 각종 미덕을 살아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고전1:18,24, 엡1:20,23)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어떤 종류의 환경에서도 살 수 있게 하고 각종 미덕을 살아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어떤 환경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보면 그를 마시면 우리는 못 살 일이 없다. 그것을 다 살아내게 만든다. 최소한도의 것이라도 다 살아내게 만든다. 숨만 있을지라도 다 살아내게 만든다. 나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문제가 있어서 지금 나는 간증을 할 수 없다거나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문제가 있어서 찬양할 수 없다면 평생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문제가 언제 끝나는가? 무덤에 가야 끝난다. 그런데 무덤에 가서도 끝나지 않는단다. 우리말 속담에 ‘할 말 없는 무덤 없다’고 한다. 지금 무덤에 계신 수많은 사람이 할 말이 없어 자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할 말이 너무너무 많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는 십자가가 없으면 한밖에 남을 것이 없다. 사람이 이상하다. 좋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나쁜 것만 기억한다. 참 이상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살려낸다. 아담은 산혼으로 지어진 것을 가지고 살려냈어야 된다.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 우리가 숨만 붙어 있어도 그것을 살려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찬양할 수 있다. 내가 걸음을 걷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찬양할 수가 있다. 그것을 찾아내야지 나는 걸음 걷지 못하니까 어떻게 찬양 하겠느냐, 걸음이나 걷게 하고 찬양하라고 하지 걸음도 걷게 해주지 않고 찬양하라고 하는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앉아있으면 평생 못한다. 걸음을 걷든지 못 걷든지 찬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못 걷는다고 찬양 못 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발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찬양을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 것을 보면 찬양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숨만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그것을 살아내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불평하려면 끝이 없다. 누가 자기보고 세상에 태어나라고 했는가? 왜 태어나서 불평하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아파서 문제가 많았다. 그렇다고 불평은 해보지 않았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았다. 그때 내가 불평했더라면 하나님이 부르시겠는가? 안 부른다. 너 불평하고 있어라. 누가 너에게 태어나라고 했느냐고 하지 않겠는가?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쓸 수가 없다. 아무리 쓰려고 해도 불평과 불만에 싸여 있으면 어떻게 쓰겠는가? 나는 다리가 없어서 안된다고 하는데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인들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잘못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면 우리는 망하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한테 와서 미안하다, 내가 폐를 좋게 만들어주었어야 할 텐데 못 만들어줘서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죽하면 그 말을 하겠는가? 하나님이 오죽하면 나한테 와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겠는가? 하나님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라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살려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그 능력이 돌을 던지는 그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그 능력이 살게 했다. 어떤 좋은 환경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정반대인데 우리가 살게 하는 능력이 있다.
1)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게 함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게 된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고 말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사용하는가 하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사업도 잘 할 수 있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력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할 수 없는 불평밖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모든 미덕을 다 살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모든 축복을 다 살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큰 힘을 행사해서 네로를 잡아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생에게 부여하신 그 모든 축복을 내가 다 살려낼 수 있다는 말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그 능력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미덕을 다 살아낼 수 있다. 다리 하나 없기 때문에 못한다는 말은 말이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살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살아내는 것은 다 마음이다.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마음이지 발이 아니다. 두 발로 살아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내가 누구한테 갈 때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마음은 있는데 발이 없으면 마음이 못 가는가? 발이 없어도 마음은 갈 수 있다. 하나님에게 살려내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발로 걸어 다닌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살려 낼 수 있다.
2) 하나님의 평강을 누림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한다. 이것도 잘못 사용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사업에 있어서 뭐에 있어서 심지어는 시험공부를 앞에 두고도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신학교에는 시험에는 성령도 어떻게 못하더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시험공부를 못해서 다급해서 기도를 했다. 성령 충만하게 기도를 했는데 시험지를 보니 뭐가 보이겠는가? 검은 것은 글씨고 흰 것은 종이다 .시험에도 성령은 맥을 못 추더라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이 말은 세상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감사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찬양을 하게 되면 내 처지가 무엇이냐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내 처지는 무엇이냐는 것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내가 또 무엇이냐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 사도바울이 너희 구할 것을 쌀을 말했겠는가? 빵을 말했겠는가? 그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이 우리의 쌀이나 빵을 해결해 주려고 온 분이 아니다. 너희 구할 것이라는 구할 것이 바울의 수준에서 한 말이니까 바울이 무엇을 구했겠는가? 매일 빵 달라고 구했겠는가? 떡 달라고 했겠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마음을 나타낼까, 어떻게 그리스도를 살아낼까를 구했을 것이다. 바울의 말이니까 바울로 알고 들어야 된다. 어떤 사람의 말로 들으면 안된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한다. 내가 소원하는 세상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기도를 해놓으면 기도를 하고나도 불안하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해줄지 안 해줄지 불안하다. 안 해주면 안 해준 대로 불안하고, 해주면 해준 대로 불안하다. 다 불안하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구하면 우리 마음에 평강이 오게 되어 있다.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2.4.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와 거룩케 함과 구속이 되심(고전1:30)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와 거룩케 함과 구속이 되셨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한다.
1) <지혜>-인생을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게 함
지혜는 인생을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게 한다. 지금 아담을 보면 하나님의 실패작이다. 아담을 보면 하나님이 왜 인간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지혜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참 잘 만들어 놓았다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진짜 지혜다.
우리가 지혜롭게 살려면 우리의 목표를 거기에 두어야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말 잘 만들어 놓았네. 그렇게 보여지도록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일이다.
2) <의>-인생 본연의 위치로 회복케 함
의는 인생 본연의 위치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위치로 인생의 위치로 회복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의다.
3) <거룩>-생각, 감정, 의지를 변화케 함
거룩은 무엇인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변화된다는 뜻이다.
4) <구속>-신성한 생명과 몸으로 바꿈
구속은 뭔가? 신성한 생명과 몸으로 변화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가 바꿔진 것이다.
5) <연합>-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합 되게 함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자세히 말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씀드린다.
2.5.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료자, 치료하는 나무이심(출15:22-26, 벧전2:24, 요11:25, 계2:7)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치료자고 치료하는 나무이시다.
출애굽기 15장(출15:22-26)에는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물이 썼다. 그런데 어떤 나무를 갖다 넣으니까 물이 달아졌다. 이 나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다. 인간의 쓴 사람을 달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쓰다는 말은 괴롭다는 말이다. 써서 괴로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무엇으로 달게 하겠는가? 지금 돈이 없어서 괴로우면 돈을 한 보따리 갖다 주면 우선 해결된다. 그 사람 또 괴롭다. 밥이 없어서 괴롭다. 밥이 없어 괴로운 사람은 밥 한 그릇 주면 우선 해결된다. 그렇지만 또 괴롭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고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쓴물을 달게 했다.
우리 죄를 담당하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베드로전서에서는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라고 했다. 우리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막힌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담당하신 나무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것을 열어주는 유일한 대책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다. 누구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표로 보여주었다. 제물을 가지지 않고는 피를 가지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 십자가에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가 내 운명이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요11:25) 못 박힌 그리스도는 바로 부활이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다.
생명나무의 과실이신 그리스도가 된다. 계시록 2장에 가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겠다고 나와 있다.(계2:7)
2.6.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깊이, 곧 깊은 것들이심(고전2:6-10)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깊이, 곧 깊은 것들이기도 하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한다. 무엇이 감추어진 것인가? 하나님의 깊은 것이 감춰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은 것이 어디서 공개가 되었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공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라. 이방인과 유태인 이것은 해결할 수 없는 길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까? 구약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은 오직 유태인만 아신다고 되어있다. 내 백성만 아신다고 되어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방인은 모른다는 말이다. 이런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 섬겨온 백성과 이방인을 어떻게 하나되게 하겠는가? 사람의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다. 지금 팔레스타인하고 이스라엘하고 싸우는 것을 보라. 저것은 영원히 해결이 안된다. 어떤 협상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 유태인과 이방인도 똑같다.
그런데 저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두 벽을 헐더라는 것이다. 두 벽을 헐어서 화목하게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이러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는 것도 십자가 앞에 가니까 소용없고, 야만인으로 살던 이방인도 십자가 앞에 가니까 소용없다.
오직 거기는 인생의 본연의 운명만 있는 곳이다. 이런 비밀한 것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나올 다른 자리가 없다. 거기서 나도 너도 다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다.
또 한 가지가 있다. 긍휼을 베푸심에 있어서 죄를 지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푼다. 이것은 말이 안된다. 율법 안에서는 말이 안된다. 율법이라는 것은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원칙이기 때문에 잘 한 놈은 상을 주고 못 한 놈은 벌을 주는 게 율법이다. 이 원칙이 딱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잘못한 놈한테 은혜를 베푸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 할 수가 없다. 자기가 임금이라도 할 수가 없다. 임금이라도 자기 자식이 법을 범하면 죽여야 된다. 역모를 꾸민다든지 하면 죽여야 된다. 살리면 온 나라가 다 뒤집어진다.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을 사사로이 살렸다고 하면 임금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긍휼을 베풀었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긍휼을 베풀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다. 깊은 비밀이다. 감추었던 비밀이다. 우리 영광을 위해서 만세전에 미리 정해 놓았던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니 하나님 안에는 그 마음이 미리 있었는데 우리가 몰랐을 뿐이고 이제서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들어난다는 말이다.
1) 우리의 영원한 분깃
그는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생명나무밖에 준 일이 없다. 동산에 두시고 생명나무를 주었다.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우리의 영원한 분깃으로 준 것이다. 그것만 먹었으면 우리는 그 동산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고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는 그 동산에서 아름다운 건축으로 조성되었을 것인데, 이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 하나가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화염검 바깥의 세계로 나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인생을 위한 영원한 분깃이다. 내 분깃이다. 재산이 많고 자식들이 여럿이면 누가 서로 몫을 많이 가지느냐가 싸움이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유산을 주지 않아야 편하다. 사회에 환원시키든지 교회에 환원시키고 가든지 빈손이라고 하면 자식들이 싸울 일이 없다. 원망하려면 하나님 원망하라고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어줍잖은 논밭을 남겨놓았더니 이것을 가지고 서로 싸운다. 싸우지 않는 집이 거의 없다. 그것을 자기의 기업이요 자기의 분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 나가면 왜 사람들이 싸우는가? 그 분깃 때문에 싸운다. 자기 몫 때문에 싸운다. 왜 내 몫을 안주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내 몫을 안주느냐는 것으로 싸운다. 왜 내 몫을 덜 주느냐는 것이 불평이다. 내가 100원어치 일을 했는데 150원을 주면 다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일을 150원어치 했는데 100원밖에 안주면 모두 불만이다. 들어올 때는 써주시기만 하면 내가 뭐든지 다하겠다고 들어와서 며칠 일하다보면 일하는 만큼 돈 주는 것은 적다고 생각한다. 분깃이 적다는 것이다. 전부 세상은 자기 분깃 때문에 싸운다. 형님과 동생 간에도 분깃 때문에 심지어 아내와 남편의 사이에도 분깃 때문에 싸운다. 내 못이냐 네 몫이냐 이것이다. 당신만 영광 받으면 되냐? 당신만 편하면 되냐? 이것이다. 내가 고생하면 너도 고생해야지. 내가 울면 너도 울어야지. 이런 심보다. 밤에 잠을 못 자고 있는데 옆에서 마누라가 쿨쿨 자고 있으면 그것도 밉다. 남 아픈 것 속도 모르고 저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나도 잠 잘 몫이 있는데 내 몫을 못 찾아 먹는 것이다. 이것이 억울한 것이다. 옆에서 안 잔다고 도움이 될 것도 아닌데 내 몫이 나간다는 것 때문에 괴롭고 억울하다. 억울한 모든 귀신 들은 자기 몫 때문이다.
우리가 억울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가 내 분깃이 되면 억울한 것이 없어진다. 수양을 통해서 억지로 참으면 참아질 수도 있다. 형님이 좀 더 많이 가져가라고 하고 나는 좀 적게 가져가겠다고 할 수 있다. 동생이 좀 많이 가져가고 나는 좀 적게 가져가겠다고 말하면 속은 씁쓸하다. 그것도 형님 동생 사이면 괜찮은데 그 뒤에 마누라가 있다. 마누라는 남남이다. 동서는 많이 가져가는데 왜 나는 적게 가져가느냐고 생각해서 불만이 생긴다.
참된 분깃이 없는 인생은 모든 것이 자기 분깃인 것으로 생각한다. 직장에 가면 직장의 자기 분깃을 찾아 먹으려고 생각하고, 집안에 가면 집안의 자기 분깃을 찾아먹으려고 한다. 어디든지 자기 분깃을 찾아먹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내 분깃이 되면 찾아먹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처음 C.C.C.에서 대구에 왔을 때 간사 3명이 있다가 셋이 싸워서 파면이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왔다. 셋이 다 똑똑한 사람이다. 다 자기대로 잘난 사람이다. 알고 보면 자기 몫이 문제가 되어서 싸운 것이다. 네가 대학부를 맡느냐, 내가 대학부를 맡느냐, 네가 경대를 맡느냐, 내가 경대를 맡느냐, 이런 것이다. 기왕이면 영대 맡는 것 보다 경대 맡는 사람이 좋을 것이다. 거리도 가깝고 좋다. 이래서 싸우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 몫 때문에 싸운 것이다. 그래서 가버리고 한 사람만 남았다. 그 사람도 파면이 됐는데 내가 올 동안 수습을 하기 위해서 있었다. 그 사람도 참 똑똑한 사람이었다. 오니까 나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을 챙긴다. 그래서 내가 자기 몫 챙기는데 가만히 두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가만 두었다. 사실은 내가 책임간사고 자기는 곧 나갈 사람이다. 나이로 봐도 내가 많고 경력으로 봐도 내가 많은데, 자기가 주장을 하려고 했다. 자기가 계획을 가지고 이렇게 하라고 배정을 해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자기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나, 내가 자기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런 생각이 없다. 그때 오직 그리스도만 나의 분깃이었고, 그것만이 나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되고 저래도 되어 자기 보고 다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보고 체면상 대학부를 하라고 했다. 자기는 고등부를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행사할 때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너무 편하고 좋다. 다 자기가 기획 세워서 해주니까 내 몫만 안챙기면 너무 편하다. 직장이고 어디고 가서 자기 몫을 챙기는 생각만 안하면 딴사람이 다 해준다. 자기 몫 챙기기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사람이 잠 안자고 다 계획 가져온다. 나보고 하라는 것만 하면 된다. 아무 손해 볼 것이 없다. 왜? 그리스도가 내 분깃인데 손해를 보겠는가? 그래서 이거하라면 이거하고 저거하라면 저거하고 자기 하라는 대로 했다. 몇 달 같이 있다가 헤어지게 되었다. 자기 집에 저녁초대를 해서 갔더니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한다. 자기가 목사님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갔다. 지금 그분이 큰 교단의 목사가 되었다. 어디서 목회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능력이 있으니 아마 잘할 것이다. 자기가 다해주는데 내가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 말라면 놀면 된다. 하지 말라 해서 노는 것은 내가 잘 못 한 것이 아니다. 너무 편하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에서 스트레스 받거나 어렵거나하면 잘 생각해보라. 여러분 몫을 찾으려고 하다보니까 어렵다. 나는 이 정도인데 내가 연도도 높고 내가 자기보다 먼저 들어왔는데 자기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병이 생긴다. 그럴 필요가 없다. 난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왜? 우리는 분깃이 따로 있으니까 영원한 분깃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것 없으면서 그렇게 하려면 어렵다. 공자님이 와도 어렵다. 정말 어렵다. 자기 자존심 다 눌러놓아야 되지 자기 생각 다 눌러놓아야 된다. 이것 하려면 정말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참 좋은 분깃이 있으면 그 분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쉽다. 나라고 성인군자겠는가? 나도 마찬가지로 영원한 분깃이 없었으면 내 분깃이 생각된다. 양보하면 양보할 수도 있지만 속이 편하겠는가? 속이 안 편하다. 주고 와서 뒤에서 고민하고 잠 못 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느니라.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처음에 우리 인생을 창조할 때 우리의 영원한 분깃으로서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것을 우리가 시시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버리고 나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다시 우리에게 회복해 주신 것이다. 지금 봐도 아담은 그것이 시시한 것이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눈을 열어줘서 그 분깃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은 너무너무 축복이다. 놀라운 축복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내 분깃이다. 이것이 자기에게 감사가 된다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신 그리스도!
2)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바로 그에게 있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고전11:33) 우리 생각 같으면 분명하게 이 사람은 긍휼을 베풀어야겠고, 이 사람은 못 베풀어야 하겠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니까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다. 그렇다고 해서 법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내놓고 긍휼을 베푸시니까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지혜다. 죽으면 모든 문제가 끝나고, 다시 살면 모든 문제가 소망이 생긴다.
교회 안의 문제나 인생의 문제나 문제의 근원은 전부 그리스도가 없는데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없는데서 자기의 운명을 모르는데서 자기 주제를 모르는데서 일어난 일이다. 유일한 대책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뿐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가도 가도 바벨로밖에 갈 수 없는 인생들인데 주님께서 유일한 대책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 되시고 그 분깃되신 당신을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여주셔서 우리가 당신을 사모하고 당신을 누릴 수 있게 하신 은총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분깃 하나로 우리 인생을 완전하게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이 분깃 외에 어느 것도 우리의 분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