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덕군 살펴보기 |
1. 개황 (槪況)
우리의 고향 양덕은 평안남도에서도 몇 번째 안가는 산간오지이다. 양덕군의 연혁을
문헌에서 찾아보면 고려 태조 왕건이 북부지방에 창궐하는 여진족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태조 21년(서기 938년)에 현 양덕군 동양면 상석리에 양암산성 (※일명 양암성이라고도 함)을 축성하고 양암진을 설치하였고, 고려 성종 2년 (서기983년)에 현 양덕군, 양덕읍, 수덕리에 토성을 축성하고, 수덕진을 설치하여 북방에서 창궐하는 글안(契丹)과 동북지방에서
침탈의 기회를 노리는 여진족의 침입을 저지하거나, 격퇴·추격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한편 지방민을 다스리는 행정을 관장하는 행정 관서였던 것을
조선 태조 5年(1396) 양진을 통합하여 양암진의 양(陽)자와 수덕진의 덕(德)자를 조합(調合)
하여 양덕현(陽德縣)으로 개편하고 감무(監務)를 두고 행정체계를 확립한 것이
오늘의 지명이고 군명(郡名)의 시초가 되었다.
가. 위치(位置)
지명은 평안남도 양덕군으로서 평안남도 동쪽 끝의 재령산맥(載靈山脈) (북에서는 北大峯 山脈이라고 함) 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였으며 지리좌표로 표시하면 아래 표와 같다.
위 치 (地名) | 위 도 (緯度) | 경 도 (經度) |
남쪽 끝 (무직산 남쪽 솔골) | 북위 39도 02분 03초 | 동경 129도 59분 00초 |
동쪽 끝 (두류산 정상) | 북위 39도 11분 15초 | 동경 127도 05분 00초 |
북쪽 끝 (영봉 정상) | 북위 39도 33분 18초 | 동경 126도 40분 00초 |
서쪽 끝 (회암산 정상) | 북위 39도 24분 15초 | 동경 126도 20분 36초 |
주요 도시와의 이정을 살펴보면 양덕에서 평양(平壤)까지의 거리와 양덕에서 원산(元山)
까지의 거리가 각각 112Km로 평원선의 정 중앙에 위치하였으며 그 이정표(里程標)는 양덕역전(陽德驛前)에 설치되어 있고,
양덕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47Km 떨어진 산간오지(山間奧地)의 소도시이다.
남으로는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서쪽으로는 본도 성천군(成川郡과) 북쪽은 역시 본도 맹산군(孟山郡), 그리고 동으로는 함경남도(咸鏡南道) 영흥군(永興郡) · 고원군(高原郡) · 문천군(문천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함경남도와의 경계에는 재령산맥으로 황해도와는 무직산· 현내봉· 하람산· 박죽산 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면적은 1,342 平方 Km의 광대한 면적으로 된 산간오지
(山間奧地)의 황량(荒凉)한 산촌(山村)이 우리들의 고향(故鄕)이다.
나. 산세(山勢)
본군의 산세는 한마디로 거봉준령(巨峰峻嶺)으로 꽉 찬 산 높고 골 깊은 심산유곡으로 산 짐승이 주야로 들끓는 고장이다.
동쪽에서부터 도계(道界) 및 군계선(郡界線)상을 따라 고봉(高峰), 거악(巨嶽)을 살펴보면 영봉(1,135m), 백산(1,452m), 백두산(1,370m), 함지령(1,116m) 맹령(1,032m), 평산덕산(1,159m), 재령산1,208m), 두류산1,324m), 덕곡산(1,207m)남쪽으로는 무직산(1,206m), 현내봉(1,068m), 하람산(1,486m), 박죽산(949m), 서쪽으로는 자하산(1,215m), 아미산(892m), 회암산(793m), 북쪽으로는 사악산(827m). 등의 고봉 · 준령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지(盆地)로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군지역내(郡地域內)의 고산으로는 북대봉1 (1.327m), 북대봉2 (1.274m),
(※ 郡內에는 北大峰이 2곳에 있음) 와룡산(1.024m), 고성산(1017m), 조개덕산(1.075m), 백산(1.119m), 남대봉(960m)등의 고봉이 즐비하기는 하나 인심 좋고 후덕한 백성들이 사심 없이 모여서 오손 도손 살아가는 고장이다.
다. 온천(溫泉)
군내에는 온천수가 용출하는 곳이 많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온천은 양덕읍
용계 5리에 있는 대탕지(大湯池)이다, 자연 조건(※미개발 상태)하에서 지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광천수는 섭씨(攝氏) 57도(度)이상의 고온인데다 빼어난 주변경관(周邊景觀)으로 인해 1930년대에 경성일보가 주관한 전국 명승지 인기투표에서 전국 1위(250,687표)를 획득(獲得)하리만큼 뛰어난 명승지이다.
왜인(倭人)들도 이곳의 풍광과 온천수의 효능에 매료(魅了)되어 1930년대 후반에 이곳
(양덕읍 용계 5리)에 구룡각(九龍閣)이라고 명명한 고급호텔을 건축하여 성황을
이룬바 있었으며 특히 이 호텔은 고급자재(高級資材)를 사용한다는 구실하에 일본
본토로부터 고급목재를 수입하여 건축할 정도로 정성을 드린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은 해방과 더불어 호텔로서의 기능은 폐지되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위해 사회보험으로 운영되는 휴양소(休養所)로 개조(改造)하여 모범 노동자 · 사무원 · 소시민(小市民)을 선발하여 무료(無料)로 쉬는 제도(制度)를 국가가 보장한다며 설치(設置)하고 휴양소는 설립목적(設立目的)과는 상반(相反)되는 정치적(政治的) 목적을 달성(達成)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산당기반(共産黨基盤) 구축(構築)과 공산당원(共産黨員) 확장(擴張) 및 당원 교양사업
(黨員敎養)에 활용(活用)하는 한편 세뇌공작(洗腦工作)을 통한 열성당원(熱誠黨員)을 양성하고,
자진(自進) 월북자(越北者)들의 위로휴양(慰勞休養)을 가장한 세뇌공작요원(洗腦工作要員)양성 등 공산화(公産化)의 전위병(前衛兵)을 양성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가.
남침당시에는 인민군 장령들의 요양소(療養所)로 둔갑하였다는 정보도 있었으며 70년대
말에는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 우상화를 위한 기념관을 설치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 된 바도 있었다.
온천면에는 돌 탕지(石湯池) · 집 탕지(院湯池) · 벌 탕지(野湯池) 등이 있으며 이들도 인공적
으로 개발하지 않은 자연 상태로 섭씨 60 ~ 77도에 달하는 고온의 유황성분(硫黃成分)의
광천수가 샘솟는 고장으로 용출량이 풍부한
귀중한 자원의 고장이다.
특히 벌 탕지의 온천수는 계란을 집어넣고 약 15분이면 완숙될 뿐 아니라
인근주민들이 닭을 잡거나, 개, 돼지를 잡을 때에도 온천수를 활용하리만큼
풍부한 량의 온천수가 시냇물로 흘러가고 있다.
평암리에 있는 벌 탕지는 왜정말엽인 1941년부터 한천(寒天)공장을 설립하기 위한
자료수집과 현지답사 등을 거쳐 1944年 공장을 완공하고 온천수를 이용하여
양산체제를 가추고 생산된 제품은 군수용으로 납품한다는 말이 공장수뇌부인사들에
의해 유포 되었으며 그 공장제품을 해방 전에는 인근주민들도 구경도 못하다가
왜군이 패전이후에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라. 군내(郡內) 하천(河川)
《1》. 군의 북단에 위치한 오강면 쌍용리 뒷산인
영봉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연봉리· 봉암리· 월명리를 경유하여 화촌면· 백석리· 문암리에서 비류강(일명 맹산강이라고도함)으로 합류하여 화창· 장림· 거흥을 거쳐
대동강 북강으로 흘러들고, 북대봉과 함지령 및 하람산에서 발원한 물은
양덕읍에서 합류하여 지수리· 인평리를 거쳐 화창· 장림에서 비류강으로
합수 되어 대동강으로 유입되어 서해로 유유히 흘러든다.
《2》. 양덕읍의 동단(동쪽 끝)인 봉계리, 속새골, 지경동에서 발원한 사천강은
서쪽으로 흘러 사방산에서 박죽산에서 발원한 물과 합수하여 태평리를 거쳐
읍내 용계 2리에서 용계 5리(남대봉)에서 발원한 물과 합류하여 외끼쟁이 어름소에서
북대봉2에서 발원하여 낙천협을 거쳐 온 물과 합류하여 비루강으로 흘러간다.
《3》. 재령산· 두류산의 서남쪽과 무직산의 북. 서쪽의 경사면(傾斜面)과 하람산· 동북
사면(斜面)에서 발원한 물은 동양면 지경리에서 합수되어 황해도 곡산군. 하도면.
신평을 거쳐 언진산 북쪽을 돌아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읍을 거쳐 미림에서 대동강
북강과 합류하는 대동강 남강의 발원지이다.
달리 표현하면 본군동3면(온천면·동양면·대륜면을 말함)에서 발원한 물은
대동강 남강의 발원지가 된다.
두 강은 이곳에서 합류하여 평양시 중심가를 흘러 지남포시에서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양덕군은 대동강의 남강과 북강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2. 인구(人口) 및 산업(産業)
군의 총인구는 47,600名 · 세대로는 7.617(1938년도 통계)세대로 그중 약 85%가
농업에 종사하고 나머지 약 15%가 비농업 인구로 산업 · 광업 · 목재사업 등에
종사하였다.
군내의 울창한 산림과 중석광· 금광 등을 개발하여 농업이외의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적지 않았다.
목재 · 광산업의 활성화는 산간오지인 양덕 군민들에게는 그런대로 소득증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본군 면적의 85%를 차지하는 산지면적의 90% 가까운 면적에서는 특산물이자
자랑인 소나무가 울창한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으며 이 산에서 연중 벌목하는
목재는 도· 소매상들이 우후죽순과 같이 늘어났으나 목재상을 경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향토인의 부침(浮沈)이 심하여 어느 날 갑자기 거상으로 성공하는
이도 있고 때로는 사업의 실패로 야간도주(逃走)하는 사람도 발생하는 등
부작용도 많았던 산간도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소나무 숲에는 일종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 송이(松栮) 버섯이
이 고장의 명물이다 늦은 여름철에 접어들면 평양 · 경성[倭政時代 서울의 지명]
등지에서 송이버섯 수집상 들이 몰려들어 군내 수집상들과 경쟁하느라 법석을 떤다.
뿐만 아니라 군내에 거주하는 일인들은 송이를 수집하여 평양과 경성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에 있는 친· 인척과 친교가 있는 상사에게 선물로 또는
뇌물로도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로 인하여 비농업인 들의 생계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으로 늦은 가을철에는
산간계곡에 활기가 넘치는 고장 이다.
이 산간오지의 중심도시인 양덕읍은 1940년에도 군청소재지이지만벽촌
중(中)에서도 한촌이었던 시골 취락지에 불과하였으나 1941년(年) 4월 1일
평원선(철도)이 ※ 지금 북에서는平¬ 線 이라고 개칭) 개통되자 철로와 육로가 동서를
관통하는 유일한 내륙지방의 교통 요충지로 부상하였다.
※당시 남한(南韓)에도 동서(東西) 횡단(橫斷) 도로(道路)는 서울에서 강능(江陵)으로 가는 육로(陸路)가 유일(唯一)하였음)
이때부터 인구(人口)가 급증(急增)하기 시작(始作)하여 1941년(年) 9월(月) 29일(日)
읍(邑)으로 승격(昇格)하였다. ※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253호(號)
※ 면이 읍으로 승격 요건은(인구 2만 이상)
3. 기상 조건(氣象 條件)
구분 | 평 균 기 온 | 강 수 량 | 천 기 (일) | 비 고 | ||||||
최 고 | 최 저 | 최 고 | 최 소 | 맑음 | 흐림 | 강우 | 강설 | 서리 | ||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 4.0 ℃ 11.5 ℃ 17.5 ℃ 22.0 ℃ 28.5 ℃ 33.0 ℃ 31.5 ℃ 32.0 ℃ 26.3 ℃ 24.5 ℃ 15.1 ℃ 1.6 ℃ | -28.5 ℃ -26.0 ℃ -16.0 ℃ -10.0 ℃ -6.0 ℃ 8.0 ℃ 14.5 ℃ 11.2 ℃ 2.5 ℃ -9.5 ℃ -15.0 ℃ -19.7 ℃ | 3.1㎜ 6.7㎜ 24.9㎜ 60.3㎜ 72.8㎜ 110.5㎜ 319.5㎜ 145.8㎜ 53.4㎜ 40.8㎜ 23.2㎜ 83.4㎜ | 8.0㎜ 3.5㎜ 14.0㎜ 25.5㎜ 15.5㎜ 64.0㎜ 78.0㎜ 22.6㎜ 13.7㎜ 22.5㎜ 5.3㎜ 24.5㎜ | 22 22 19 19 16 21 6 15 16 19 17 10 | 2 1 4 2 4 3 6 5 7 5 22 8 | 2 1 3 6 2 6 19 12 7 5 5 5 | 5 3 4 3 - - - - - 1 6 9 | 4 2 1 4 - - - - - 9 5 7 |
※ 상강(霜降) : 첫 서리 ; 10월 4일. 끝서리 ; 4월 29일
※ 강설(降雪) : 첫 눈 ; 10월 29일. 끝 눈 ; 4월 9일
※ 결빙(結氷) : 첫 어름 ; 10월 11일. 끝 어름 : 3월 21일
※ 이 제원(諸元)은 양덕 군지(陽德 郡誌)에 근거 한 것임
4. 읍 · 면별 면적 및 인구
邑 · 面 | 면 적 (Km) | 인 구 (명) | 비 고 |
陽德邑 | 310 | 11.158 | |
雙龍面 | 166 | 6.277 | |
化村面 | 102 | 4.718 | |
吳江面 | 218 | 6.577 | |
溫泉面 | 254 | 9.550 | |
東陽面 | 110 | 4.279 | |
大倫面 | 182 | 5.041 | |
計 | 1.342 | 47.600 |
※ 인구수는 1938연도 왜정하의 통계에 의거한 것임으로 신빙성은 희박함
5. 이정표(里程表)
가. 군내 읍 · 면사무소 간 이정 ※ 단위 : Km
구 분 | 陽德邑 | 雙龍面 | 化村面 | 吳江面 | 溫泉面 | 東陽面 | 大倫面 |
陽德邑 | 0 | 28 | 40 | 37 | 24 | 32 | 37 |
雙龍面 | 28 | 0 | 20 | 28 | 37 | 48 | 53 |
化村面 | 40 | 20 | 0 | 12 | 49 | 60 | 65 |
吳江面 | 37 | 28 | 12 | 0 | 36 | 44 | 49 |
溫泉面 | 24 | 37 | 49 | 36 | 0 | 8 | 13 |
東陽面 | 32 | 48 | 60 | 44 | 8 | 0 | 5 |
大倫面 | 37 | 53 | 65 | 49 | 13 | 5 | 0 |
나. 기타 도시간 거리(其他 都市間 距離)
양덕읍↔평양시까지 : 112Km이고, 양덕읍↔원산시는 : 112Km
※ 이정표는 양덕읍내 역전(驛前) 삼거리에서 원산가는 방향으로 약
30m 되는 지점에 콩클리트 조로 세워져 있었음.
6. 군내의 철도(平元線)
가. 평원선(平元線) ※ 평양·원산 간 철로
1921年 3月 17日 평양 상의회두(平壤商議會頭)가 발기(發起)하여 1926年에 평원선
철도속성연선동맹회(平元線鐵道速成沿線同盟會) 결성(結成)을 시작으로 26年 평양
근교(平壤近郊)인 서포역(西浦驛)을 기점(起點)으로 착공(着工)하여 27年에 평양
(平壤)↔사인장(舍人場)간이 개통(開通)되었고, 1931年 함경남도(咸鏡南道) 고원역
(高原驛)을 기점(起點)으로 착공(着工)하여 공사(工事)가 진행(進行)되었으며 2차
(次)로 1936年 평양(平壤)↔장림(長林)간을 개통(開通)하여 소위(所謂) 평원 서부선
(平元 西部線)이라고 명명(命名)하고 1937年에는 고원(高原)↔성내(城內)간을 개통
(開通)시킨 평원동부선(平元東部線)도 개통(開通)되었다. 이후(以後) 거듭되는 난공사
(難工事)끝에 재령산맥(載靈山脈)을 동서로 횡단(橫斷)하는 평원선(平元線)이 1941年
4月 1日 東部線과 西部線이 연결(連結)됨으로서 東西兩岸을 連結하는 평원철도선
(平元鐵道線)의 대역사(大役事)가 완성(完成)되었다.
나. 군내(郡內) 철도역(鐵道驛)
(1) 양덕읍 관내 : 서쪽으로부터 인평역 · 지수역 · 양덕역 등 3개역이 있다
(2) 온천면관내 : 양덕역 다음 역인 내동역 · 석탕온천역 · 거차역으로 되어 있음.
※ 역과 역사이의의 거리는 대략 8Km +· - 거리로 추정하면 어림수로 맞을 것임.
(3) 양덕역과 내동역 사이에는 터널이 8개 있고, 내동역↔석탕온천역 사이는 4개, 그리고 석탕온천역↔거차역 간에는 6개의 터널이 있다.
※ 내동역에서 원산방향으로 출발하는 열차는 탄력을 얻기 위해 역구내로부터
약 1Km 정도 역(逆) 경사로(傾斜路)로 후진해서 재출발해서 탈력을 받아야 ‘오류개 고개’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극심한 경사진 터널이 있는 곳이다.
7. 군내 도로망
일반적으로 양덕군의 도로망은 국도와 지방도로로 되어 있으며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된 고장이다.
가. 평양과 · 원산간의 육로.
이 도로는 1911년 1등 도로로 개통되었으며 본도 성천군
대구면 별창리에서 양덕읍· 인평리· 지수리· 읍· 용계리· 온천면· 상신리· 진석리·
창리· 온정리· 평암리· 동양면· 성북리· 상석리· 대륜면· 사기리· 수주리· 통동리를
거쳐 함경남도. 문천군. 풍상면을 경유 하여 원산으로 통하는 1등 국도로서 당시의
북한지역에서는 동서 양안을 연결하는 유일한 화물유통의 대동맥선 이었다.
나. 양·곡선(陽·谷線) ※ 양덕군과 황해도 곡산군의 약칭임
이 도로는 1919年 주민들을 동원하여 개설한 것으로서 황해도 곡산을 기점으로 북상하여 하람산을 남북으로 종단, 양덕읍. 봉계리· 태평리를 거쳐 양덕읍에 이르는
국토 중앙을 종단하는 2등 국도였다.
다. 양·맹선(陽·孟線) ※ 양덕과 맹산군의 약칭임
도로는 미상연도(未詳年度)의 극심한 설해구휼사업(雪害救恤事業)의 일환
으로 주민을 동원하여 개통한 기록이 있으며 이 도로는 양덕읍에서 수덕리, 창리,
운니리, 쌍용면, 중리, 용봉리, 화촌면, 장성리, 백석리, 창개리에서 맹산군, 원남면,
달천리로 북상 맹산군청 소재지인 맹산에 이르는 3등 지방도로 이다.
8. 북측의 행정구역 개편내용
가. 개편된 양덕군 (1949년 1차 개편된{8·15당시 행저구역 중 적색표가})
양 덕 군 | ||
8·15 당시 행정구역(대한민국이 인정하는 행정구역) | 52년 이후 행정구역 | |
읍 / 면 | 리 | |
앙 덕 읍 | 용계 1·2·3·4·5里, 봉계리, 태평리, 용흥리, 수덕리, 운니리, 창 리, 풍전리, 용계6리, 척이리, 사천리, | 양덕읍 태흥리, 봉계리, 운창리, 수덕리, |
지수리, 인평리, 세동리, 청송리, 청계리 | 신양군 | |
온 천 면 | 온정리, 일양리, 평암리, 진석리, 거차리, 상청리, 은우리, 하청리, 창 리, 상국리, 하국리· 상신리 순우리, | 상신리, 삼계리, 거상리, 은하리, 일암리, 온정리, 용암리, |
동 양 면 | 하석리, 수암리, 지경리, 상석리, 성북리, 신흥리, 흘평리, 용산리 | 상성리, 동양리, 용평리, |
대 륜 면 | 사기리, 수주리. 구룡리 괘송리, 양천리, 옥천리, | 추마리, 통동리, 사기리, 구룡리, |
☞적색으로 표시된 지명은 49년 증설하였던 지명임.
나. 49년 개편내용:
(1). 양덕읍
(가). 용계3리 1부를 분리하여 용계6리를 증설
(나). 봉계리를 분리하여 사천리를 증설
(다). 수덕리를 분리하여 척이리를 증설
(라). 청송리를 분리하여 청계리를 증설하였다.
(2). 온천면
(가). 진석리를 분리하여 순우리를 증설하였다.
(3). 대륜면
(가). 통동리를 분리하여 옥천리(玉川里)와 양천리(陽川里)로 개편하고
통동리는 폐지시켰다.
다. 신설된 신양군
신 양 군 | ||
8·15 당시 행정구역(대한민국이 인정하는 행정구역) | 52年 이후 행정구역 | |
읍 · 면 | 리 | |
성천군, 대구면 | 별창리, 원평리, 천동리, 지동리, 화인리, 광산리, 신장리, | 신양읍, 화천리. 지동리 장산리, 덕흥리 |
양덕군, 양덕읍 | 인평리, 지수리, 청송리, 풍전리, 세동리, | 송동리, 평원리 |
양덕군, 쌍용면 | 평창리, 용반리, 용전리, 정옥리, 반성리, 화락리, 관봉리 용봉리, 북창리, 중 리, | 관성리, 송전리, 광흥리 쌍용리, |
양덕군, 화촌면 | 백석리, 장성리 문암리, 용흥리, 여의리, 풍계리 쌍평리, 창개리, 화암리, 평곡리, 문흥리, | 백석리, 사개리, 창계리, |
장성리, 문명리, | ||
양덕군, 오강면 | 월명리, 창 리, 장원리, 봉암리, 신봉리, 신풍리, 신흥리, 용담리, 등암리, 연봉리, | |
용연리, 용운리, 운봉리, |
라. 49년 개편 내용
(1). 양덕읍 ※ ‘가’항 참조
(가). 청송리를 분리하여 청계리를 증설하였다
(2). 오강면
(가). 창리를 분리하여 장원리를 증설하였다.
(나). 신봉리를 분리하여 신풍리를 증설하였다.
다. 쌍용리를 분할하여 용포리(龍布里)와 용반리(龍半里)로 개편하고
쌍용리를 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