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한국가요(韓國歌謠)<1>
Ⅰ. 1920~30년대의 유행가요
이정숙 / 이정숙과 김서정 / 이애리수 / 고복수 / 황금심
1. 장한몽가(長恨夢歌)(1925/일본가요 번안, 고복수와 황금심 노래)
<1절> 대동강변 부벽루하 산~ 보하난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악수 논정하난 것도 오날 뿐이요 보보행진 하난 것은 오날 뿐이라.
<2절> 수일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 엇지하야 심순애야 못 참았드냐.
남편이 부족함이 있난 연고냐 불연이면 금~ 전에 탐이 나드냐
<3절> 낭~ 군이 부족함은 없지요마는 당신을 외국유학 시키려~ 고
숙부님의 말삼대로 순종하여서 김중배의 가정으로 시집을 가요.
<4절> 순~ 애야 반병신된 이수일도 이 세상에 당~ 당한 의기남아라
이상적인 나의 처를 돈과 바꼬아 외국유학 하려하난 내가 아니다.
<5절> 순애야 반~ 다시 내년이 오면 금일 금야 돋아있는 저기 저 달을
사나이의 피눈물로 흘리게 하여 보이도록 하리로다 남자의 기상.
<6절> 여~ 자란 절개가 제일이 되고 금~ 전은 이 세상의 돌고 도는 것
다이야몬드 반~ 지에 눈이 어두워 반기어서 타지마라 신식자동차.
<7절> 연~ 애에 실망 당한 이수일도 옷깃 잡는 심순애를 탁 차 버리고
줄줄흐르는 피~ 눈물 눈을 가리며 맥~ 없이 걸어간다 부벽루 아침
장한몽(長恨夢)은 1913년 조중환(趙重桓)이 일본 소설 ‘곤지키야사(金色夜叉)’를 번안하여 이수일과 심순애를 주인공으로 해서 쓴 애정 소설로 당시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일본소설 원작자는 오자키 고요(尾崎紅葉).
1925년, 기생 김산월(金山月)과 도월색(都月色)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취입한 축음기판이 등장하는데 ‘시들은 방초’와 ‘장한몽가’이다. 이 두 곡 모두 일본의 연극 주제가들인데 ‘장한몽가’가 바로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대유행을 일으켰고 신유행가가 되었다. 고복수(高福壽)와 황금심(黃琴心)은 부부사이이다.
언뜻 중국의 장한가(長恨歌)와 혼동되는데 중국 당나라시대의 이야기인 장한가(長恨歌)는 중국 백거이(白居易)가 쓴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중국 시안(西安/옛 長安)은 아테네(그리스), 로마(이태리), 카이로(이집트)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꼽히는 곳으로, 장한가(長恨歌)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화청지(華淸池)가 있고 멀지않은 곳에 진시황릉(秦始皇陵)도 있다.
이곳에는 마오저뚱(毛澤東)이 친필로 쓴 장한가(長恨歌) 원문이 비석으로 세워져 있는 것을 내가 더듬던 기억이 난다.
2. 강남달(낙화유수) (1927년/김서정 작곡, 이정숙 노래) 무성영화(無聲映畵)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주제가
<1절>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 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울까
<2절>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가에 물새가 우니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3절>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의 잎사귀엔 벌레가 우네
차라리 이 몸이 잠들리로다 님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이 노래 ‘강남달(낙화유수)’은 1928년에 개봉된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으로 김서정(金曙汀:본명 김영환)이 작사, 작곡을 하고 가수 이정숙(李貞淑)이 처음으로 불렀는데 이 후, 박남포가 개사하고 이봉룡이 곡을 손보아 남인수가 불렀다고 한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李鳳龍)의 어릴 때 이름은 이봉용(李鳳用)으로 1914년 전남 목포(木浦) 출생.
당시 주로 일본의 유행가가 주로 번안(飜案)되어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강남달(일명 낙화유수)’은 우리나라 창작 대중가요 제1호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시 서민들의 감정을 드러낸 곡으로 무성영화와 더불어 인기 절정이었고, 장안의 기방(妓房)에서 많이 불리었을 뿐 아니라 젊은 층의 학생들도 많이 불렀다고 한다. 이정숙은 윤극영의 동요 반달(1924년)도 불렀다. 박남포는 가수로, 작사가로 일세를 풍미한 반야월(半夜月·1917~2012)인데 본명 박창오(朴昌吾)이다.
1939년 가수로 데뷔할 때 진방남(秦芳男), 그 후 추미림(秋美林), 남궁려(南宮麗), 금동선(琴桐線), 허구(許久), 고향초(高香草), 옥단춘(玉丹春), 백구몽(白鷗夢) 등 수많은 가명(假名)도 사용했다.
3. 황성옛터(1928/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1절>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절>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3절> 나는 가리오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 깊이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1928년 발표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의 대중가요.
일제 강점기의 작곡자인 전수린(全壽麟)은 본명이 전수남(全壽南)으로, 대표곡으로는 ‘알뜰한 당신’ 외에 ‘황성옛터’(皇城의 跡:이애리수 노래), ‘나는 열일곱살’(박단마), ‘외로운 가로등’(황금심) 등이 유명하다.
황성옛터의 가사(歌辭)는 왕평(王平)이 일제강점기 만주 흥안령(興安嶺)으로 가 있을 때 개성 만월대(滿月臺)를 생각하며 쓴 글이라고 한다. 1907년생 왕평은 일제 강점기 대중가요 작사가이자 연극배우였다.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애리수(李愛利秀, Lee Alice)의 본명은 이보전(李普全)으로, 1911년 개성 출생.
4. 타향살이(1934/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
<1절>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 보니 고향 떠난 이십 년에 청춘만 늙어
<2절>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 쪽
<3절>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호드기를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
1934년 봄, 전조선 명가수선발 음악대회에서 23세의 고복수가 2등으로 입상하였고 몇 달 뒤 자기보다 두 살 아래인 청년 가요작곡가 손목인의 처녀작품 ‘타향살이’를 첫 취입하였는데 고복수의 대표곡이 되었다.
‘호드기’는 봄에 버드나무가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가지를 잘라 살살 비틀어 껍질과 속 줄기를 분리시킨 다음 살살 비틀어 속 줄기를 빼면 껍질만 관(管)이 되는데 여기에 칼로 구멍을 내고 한쪽 끝을 칼로 껍질을 벗겨 물고 불면 바로 ‘호드기’이다. 무슨 노래였던가... ‘임자도 없이 호드기 부는 청노새~~’ 푸른 털색의 노새가 코로 푸르르 떠는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손목인 / 전수린 / 이난영 / 김영춘 / 남인수
5. 목포의 눈물(1935/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절>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절>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작사자와 가수가 모두 목포 출신인 이 곡은 일본식의 곡풍을 지녔으나 지금도 끊임없이 불리는 곡 중 한곡이다.
이 곡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이 목포의 눈물은 1936년 일본에서도 「와카레노후나우타(別れの船歌)」라는 제목으로 번안(飜案)되어 발매되었다고 한다.
6. 홍도야 우지 마라(1936/ 김준영 작곡/ 김영춘 노래)
- 1936년 연극의 주제가로, 1939년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곡으로 쓰인 노래
<1절>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절>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내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 주는 바람이 분다
<비하인드 스토리> 1938년 서울 동양극장에서 전속 극단이었던 청춘좌(靑春座)팀이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공연했는데 이 연극의 주제곡이 바로 ‘홍도야 우지 마라’이다. 오빠의 공부와 출세를 돕기 위해 여동생이었던 홍도는 스스로 자청하여 기생이 된다. 화류계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며 돈을 벌어 오빠를 졸업시키고, 동생 힘으로 학업을 마친 오빠는 순사가 된다. 홍도는 화류계를 빠져나와 결혼을 하지만 홍도의 과거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온갖 학대로 홍도를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 정신상태가 실성해진 홍도는 어느 날 시어머니에게 칼을 휘두르다가 살인미수로 잡혀가는데 홍도 손에 수갑을 채운 순사가 바로 오빠였다. 홍도가 통곡을 하며 쓰러지자 오빠가 홍도를 위로하며 부른 노래가 ‘홍도야 우지 마라’이다. 이 연극을 보고 어느 기생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한강에 투신자살했다고 하며, 또 이 연극을 보려고 서울 장안의 기생들이 손수건을 준비하고 한꺼번에 모여들어 서울 장안의 권번(券番)이 텅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