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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_0. 개관
【論】 이 경은 간략히 네 부문으로 나뉜다.
처음은 대의(大意)에 관한 서술이고,
다음은 경의 종지[宗]에 대한 설명이며,
셋째는 제목에 대한 해석이며,
넷째는 본문에 대한 풀이이다.
① 대의를 서술함[述大意]
일심(-心)의 근원은 유(有)ㆍ무(無)를 떠나 독자적으로 청정하며 3공(空)의 바다는 진(眞)ㆍ속(俗)을 융합하여 밝고 고요하다.
밝고 고요하다는 것은 둘을 융합했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요,
독자적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양 극[邊]을 여의었다해서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양극도 여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不有之法]이라 해서 무(無)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不無之相]해서 유(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애당초 속(俗)이었던 적이 없으며,
속(俗) 아닌 이(理)가 처음부터 진(眞)이었던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도 아니니 진ㆍ속의 성품은 그것대로 다 성립하고, 염(染)ㆍ정(淨)의 모양은 그것대로 다 갖추어진다.
양 극[邊]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ㆍ무의 법(法)이 제각각 다 이루어지고 시(是)ㆍ비(非)의 뜻이 제각각 다 완전하다.
그러므로 깨뜨림[破]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며,
세움[立]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가히 아무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이며,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不然之大然]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이 이 경에서 밝히려는 큰 의도[大意]이다.
참으로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런 것이기 때문에 경의 말씀[能說]이 묘하게도 진리에 들어맞고,
없는 이치[無理]이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므로 경의 취지[所詮]가 시공(時空)의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대승을 망라한 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하며,
모든 취지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량없는 뜻을 지닌 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의미들 중에서 우선 하나를 들어 제목을 붙였으므로 『금강삼매경』이라고 말한다.
② 경의 종지를 설명함[辨經宗]
이 경의 종요(宗要)를 나누어서 말할 수도 있고 종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점이 되며,
나누어서 말하면 열 가지 중층적인 법문[十重法門]이 종취[宗言]가 된다.
관행(觀行)에서 관(觀)이란 횡적인 논리로서 대상[境]과 지혜[智]에 공통되는 것이고, 행(行)은 종적인 논리[竪望]로서 인과(因果)에 걸치는 것이다.
과(果)는 다섯 가지 법[五法]이 원만함을 말하고,
인(因)은 이른바 6행(行)이 다 갖추어짐을 말한다.
지(智)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하고,
경(境)이란 즉, 진(眞)과 속(俗)이 다 없어짐을 말한다.
진과 속이 모두 없어진다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각과 시각이 있다 해서 생겨남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생겨남이 없는 행이라 관념이 없는 데[無相]에 그윽하게 합하게 되며, 관념이 없는 법이라 본래적인 이익을 순조롭게 이룬다.
‘이익[利]’에다가 기왕에 ‘본래적[本]’이라는 말을 붙였을 때는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실제(實際)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際)’에다가 기왕에 ‘실답다[實]’는 말을 썼을 때는 그것이 자성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제(眞際) 또한 공(空)하다.
모든 부처님들도 여기에 들어 있으며 모든 보살도 따라서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간다’ 하며,
이것이 바로 6품(品)의 대의(大意)이다.
관찰해서 들어가는 문[觀門]에서, 믿고 이해하는 첫 단계로부터 등각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6행(行)을 세운다.
이 6행이 만족하게 성취될 때 9식(識)이 전환하여 때 없는 의식[無垢識]을 드러내어 깨끗한 진리의 세계[淨法界]를 이루며,
나머지 8식(識)을 전환시켜 4지(智)를 이룬다.
또한 5법(法)이 이미 원만해졌으므로 3신(身)을 구비한다.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는 대상과 지혜를 떠나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지혜는 둘이 아니고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미의 관행(觀行)을 이 경의 종취[宗]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대승의 법상(法相)이 없고,
한량없는 취지 중에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관(觀)에 대해 종합해서 논(論)한 것이다.
이를 다시 열 가지 문[十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종취로 삼는 것을 일문(一門)에서부터 하나씩 늘여 10문(門)까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 ‘일문(一門)’이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 일념(一念)이 움직여 하나의 실다운 것[一實]에 순응하여,
하나의 행[一行]을 닦고 일승(一乘)에 들어가 하나의 도[一道]에 머무르며,
하나의 각[一覺]을 사용해서 일미(一味)임을 깨닫는 것이다.
‘2문(門)’이란 무엇인가?
두 언덕[二岸]에 머무르지 않고서,
두 무리[二衆]를 버리고 두 가지 아집[二我에 집착하지 않고,
양 극단[二邊]을 떠나 2공(空)의 이치를 통달하여 2승(乘)에 떨어지지 않고,
두 가지 진리[二諦]를 융화하여 두 가지 깨우쳐 들어가는 길[二入]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3문(門)’이란 스스로 3불(佛)에 귀의하여 3계(戒)를 받으며,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 순응하여 3해탈(解脫)과 등각의 세 경지[等覺三地]와 묘각삼신(妙覺三身)을 얻고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애는 것이다.
‘4문(門)’이란 4정근(正勤)을 닦고 4신족(身足)에 들어가 네 가지 큰 연력[四大緣力]에 의지하여 4의(儀)로 항상 이롭게 하고 4선(禪)을 벗어나며 네 가지 오류[四謗]를 멀리 여의어서 네 가지 큰 서원[四弘地] 가운데서 네 가지 지혜[四智]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5문(門)’이란 5음(陰)이 생함에 따라 50악(惡)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근[五根]을 심고 5력(力)을 길러 다섯 가지 공의 바다[五空海]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에 서서 다섯 가지 청정한 법[五淨法]을 얻고 다섯 갈래의 중생들[五道生]을 제도하는 것이다.
육ㆍ칠ㆍ팔ㆍ구 등의 문이란 무엇인가.
6바라밀[六度]을 두루 닦아 여섯 경계[六入]에 다시는 빠지지 않게 하며 7각분(覺分)을 행하여 일곱 가지 장애되는 마음[七義科]을 끊으면, 8식(識)의 바다가 밝아져서 무구식[無垢識]인 9식(識)의 흐름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수행의 처음 단계인 10신위(信位)로부터 보살의 열 가지 경지[十地]에 이르도록 온갖 행(行)이 갖추어지고 모든 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문(門)이 이 경의 종지(宗旨)가 된다.
경문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해당 문구가 나올 때 설명하겠다.
그러나 이 뒤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문이 모두 한 가지 문에 포섭되며 한 가지 문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하나의 관(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펼쳐 보여도 하나인 문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요,
종합해 보아도 열 가지 문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이 경의 종요(宗要)가 된다.
③ 제목을 해석함[釋題目]
이 경의 제목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하고,
둘은 금강삼매(金剛三昧),
셋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한다.
처음과 나중의 두 이름은 다음에 해석할 것이고, 우선 중간의 제목을 해석하겠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 하나만을 이 경의 첫머리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금강이라는 말과 삼매라는 말의 두 가지가 있으므로,
먼저 금강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 삼매의 뜻을 해석하겠다.
금강이라는 말에 다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말뜻을 해석하고[先釋],
다음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겠다[後簡].
금강이란 사물에 비유해서 말한 것인데, 견실(堅實)함으로 그 바탕을 삼고, 깨뜨릴 수 있는 힘으로 공용(功用)을 삼는다.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뜻도 이와 같아서, 실제(實際)로 체(體)를 삼고, 뚫고 꿰뚫는 것으로 그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체를 삼는다 함은 이치를 증명하고 근원에 끝까지 다다른다[窮究]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말하기를,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정(定)이다’ 라고 하였다.
뚫고 꿰뚫는 것으로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선정(禪定)을 꿰뚫는 것이다.
의혹을 깨뜨린다 함은 설명을 통하여 의심을 끊기 때문이니,
아래 본문에서, ‘결정코 의심과 후회를 끊는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정을 꿰뚫는다 함은 이 (금강의) 선정이 다른 삼매(三昧)들을 유용하게 하기 때문이니, 마치 값진 구슬들을 꿰뚫어서 유용하게 쓰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금강삼매라 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 했는데,
그 논(論)에서 해석하기를,
“금강삼매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 금강석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삼매도 모든 법 가운 데 통달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모든 삼매들을 다 유용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자거[硨磲]ㆍ마노[碼𥓲]ㆍ유리(瑠璃)는 오직 금강석만이 뚫고 들어갈[穿入]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대품경』에서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고 했는데 이 말은 꿰뚫는다[穿]는 뜻이다. 그 논에서 뚫고 들어간다 함은 경에서 깨뜨린다 하는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즉, 모든 삼매가 다 자성(自性)이 없음을 통달하여 저들 여러 가지 삼매로 하여금 스스로의 집착에서 떠나게 할 수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금강삼매’라는 말뜻을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簡別]에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정(定)과 혜(慧)로 간별하겠다.
【문】 금강반야와 금강삼매를 모두 금강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전자는 지혜요, 후자는 선정(定)이니 이것으로 차별이 된다.
또한 금강반야는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데 반해, 금강삼매는 그 위상이 과지(果地)에만 해당한다.
또 반야금강(般若金剛)은 세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그 체(體)의 견고함,
그 작용의 날카로움,
그리고 특성의 넓고 좁음이다.
그러나 삼매금강(三昧金剛)은 이 중에 견고함과 날카로움만 취한 것이므로 이렇게 차별이 된다.
다음은 그밖에 다른 선정과 구별하겠는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요,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이며,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대품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강륜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삼매를 부분적으로 간직할 수 있다.
여금강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법을 꿰뚫어 통달했어도 스스로 통달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저 논(論)에서 문답의 형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문】 세 가지 삼매를 어째서 모두 다 금강이라 말하는가?
【답】 처음에는 금강이라고만 말했고, 중간에는 금강륜(金剛輪)이라고 말했으며, 뒤에는 여금강(如金剛)이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금강삼매라 함은 모든 법을 꿰뚫었어도 꿰뚫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고,
“금강삼매는 모든 삼매를 통달할 수 있다” 하셨으며,
“금강륜삼매는 모든 삼매의 바퀴[三昧輪]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다.
논(대지도론)에서 이를 해석한 자의 의도는 이렇다.
“‘여금강삼매’는 모든 번뇌와 얽매임을 끊어 다시는 나머지가 없게 한다.
마치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손에 금강을 잡고 아수라의 군대를 부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학인(學人)이 공부해서 마지막에 얻는 마음과 같으니, 이 마음으로부터 점차 세 가지 깨달음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는 모든 법을 깨뜨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니,
마치 진짜 금강이 모든 산을 깨뜨려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금강륜(金剛輪)’이란,
“모든 불법(佛法)을 깨뜨려 막힐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음을 뜻한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모든 불법을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輸寶)로 모든 왕들을 쳐부수어 다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다른 두 가지 금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섯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비유가 다르다[喩別].
이른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는 군대를 쳐부순다는 비유를 사용했고,
금강삼매는 산을 깨뜨린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법이 다르다[法別].
여금강은 번뇌를 깨뜨리고, 금강은 다른 모든 법을 깨뜨린다고 하였다.
셋째는 지위가 다르다[位別].
전자(여금강)는 아직 배워 익히는 지위[學位]에 해당하고, 후자(금강)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지위[無學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름이 다르다[名別].
전자의 이름은 여금강삼매이니 다른 곳에서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저 금강삼매라고만 할 뿐, 여(如)나 유(喩)가 없다.
그 까닭은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있어서 두 가지 정(禪)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인지에는 힘들여 닦아나가는 일[功用]이 있지만 과지에는 공용이 필요치 않으니, 덜고 덜어서[損之又損之] 무위(無爲)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금강은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번뇌만 깨뜨렸을 뿐 나머지 법은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예리하다는 측면에서 금강과 동일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금강은) 깨뜨리지 못할 사물이 없으니, 삼매의 쓰임도 이와 같아서 깨뜨리지 못할 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설이 다르다[敎別].
이른바 유학위(有學位)의 금강삼매는 『금강삼매본성청정부증불감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에서 설하였고, 무학위(無學位)의 금강삼매는 바로 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에서 설하고 있다.
이제 이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정은 모든 법을 깨뜨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라 한다.
여섯 가지 해석 가운데 이것은 지업석(持業釋)이요,
비유를 취해서 이름한 것은 인근석(隣近釋)이다.
이것으로 이 경의 제목을 삼은 것은 의주석(依主釋)이니, 그것은 정(定)이 중심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두 번째로 삼매라는 이름을 해석한 것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석이요,
둘째는 간별이다.
옛 스승이 말씀하기를,
“저기에서 쓰는 삼매라는 명칭은 여기 말로는 바른 생각[正思]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설을 인용하는 이유는 본문의 이치[文義]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었을 때, 대상이 되는 경계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유가론(瑜伽論]』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삼마지(三摩地)란 인식하는 대상[所緣]에 대하여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한 경계에 집중된 성품[心一境性]을 가리킨다.
【문】 정(定)이란 고요함[靜]이어야 하고, 고요하다 함은 한 경계[一境]에 머무름을 뜻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세히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한다[審正思察]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은 마땅히 심사(尋伺)인데, 어떻게 정(定)을 설하면서 생각하고 살핀다고 할 수 있는가?
【답】 만약 하나의 경계[一境]를 지키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면, 흐리멍덩[惛沈]한 채로 경계에 머무르는 것도 정(定)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심사(尋伺)라고 한다면, 삿된 지혜[邪慧]로 사물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심사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思察) 즉 생각하고 통찰한다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삿되고 바른 것에 관계없이 말과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사찰(思察)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심사이므로 다만 분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올바르게 그리고 명료하게 대상[緣境]을 아는 것에 한해서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는 바르다는 말이 정(定)의 작용[用]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사는 아니다.
정(定)은 분별과 무분별에 두루 통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핀다는 것을 기준으로 저 심사를 가려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경계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물기는 하지만 마음이 혼미하고 어두워서 자세히 살필 수 없다면, 이는 흐리멍덩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은 채로 바르고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를 정(定)이라 이름할 수 있다.
때문에 생각해서 통찰한다는 점에서 혼침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머물러 있거나 또는 옮겨가거나 하는 특성을 가지고 마음이 정(定)에 들었다거나 산란하다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빠른 변론은 비록 빠르게 바뀌어 가지만 그 가운데 정이 있고, 느린 생각은 비록 오랫동안 경계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산만한 것이다.
여기서 금강삼매를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거기에는 바르다던가 바르지 못하다던가 하는 관념이 없고,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생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다만 그릇된 분별과 삿된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
또 아무 생각도 없는 허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부득이 정사(正思)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삼매라는 이름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간별(簡別)을 통해 삼매의 뜻을 밝히는 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여러 가지 이름의 뜻을 하나씩 구별해 보는 것이요,
다음은 여러 가지 이름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간추려 보는 것이다.
정(定)에는 대략 여덟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 번째는 삼마혜다(三摩慧多)로서, 여기 말로는 등인(等引)이라 한다.
흐리멍덩한 것[惛沈]과 들떠 있는 것[掉擧]의 치우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등(等)이라 하고,
신통 등의 여러 가지 공덕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인(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등인은 후회 없는 기쁨과 안락에서 끌어내 지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욕계(欲界)의 정(定)과는 다르다.
두 번째는 삼마지(三摩地)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持)라 한다.
등의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마음을 제어하고 잘 지켜서[護持] 밖으로 치달려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이름한다.
또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한다.
예전에는 삼마제(三摩提)라고 했는데, 이것 또한 등지를 뜻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至)라 한다.
등지(等持) 가운데서 뛰어난 지위[勝位]에 이르게[至] 되기 때문에 등지(等至)라 이름한다.
네 번째는 타연나(駄演那)로서, 여기 말로는 정려(靜慮)라 한다.
고요하게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흐트러진 생각을 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나(禪那), 혹은 지아나(持阿那)라고 했는데, 이는 지방이나 습속에 따라 말이 다를 뿐 모두 정려를 가리킨 것이다.
다섯 번째는 사마타(奢摩他)로서, 여기 말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마음을 경계에 멈추게 하므로 지(止)라고 이름한다.
여섯 번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마음을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심일경성이라 이름한다.
예전에는 일심(-心)이라 했는데 이는 심일경성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정(定)이니, 대상을 살펴서 정착하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다.
여덟 번째는 정사(正思)이니,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논사는,
“삼매(三昧)라는 이름과 삼마제(三摩提)라는 이름은 단지 등지를 뜻하는 것일 뿐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예컨대 『금고경(金鼓經)』에서 열 가지 선정을 설명한 가운데, 앞의 3지(地)에서는 삼마제라 이름하고 뒤의 칠지(七地)에서는 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이름이 만약 같은 등지(等持)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름을 고쳐서 앞과 뒤에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이름이 어째서 같지 않은가?
만약 지방이나 습속의 차이 때문이라면 한곳에서 두 가지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해도,
하나의 경에 삼마제(三摩提)와 삼마지(三摩地)라는 말처럼,
(하나의 개념에) 두 가지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른 것이지 실상은 같은 말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매라는 이름과 삼마제라는 이름은 같은 경[本] 속에 있으니,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삼매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밝힌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네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 정(定)과 등지(等持)의 두 가지 이름이 가장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두루 통하며, 또한 삼계에 통하며, 더 나아가서는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도 통한다.
6위(位)의 심소(心所) 가운데 다섯 가지 별경[五別境] 중에도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 역시 정(定)이라고 이름한다.
둘째, 심일경성 (心一境性)과 삼매(三昧)라는 두 이름은 다음으로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욕계에는 통하지만 한결같이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주삼매(船舟三昧)와 욕계에 결박된 아홉 가지 마음가짐[心住]의 심일경성 역시 욕계의 방편심에만 통하기 때문이다.
셋째, 삼마혜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라는 두 이름은 좁은 의미가 있다.
욕계의 마음에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가볍고 편안한 마음[輕安]에 들어가는 경지만을 취해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라는 두 이름은 가장 협소한 의미를 가진다. 즉, 정(定)의 경지 안에도 구별이 있기 때문인데,
사마타는 네 가지 지혜로운 수행 가운데 심일경성에 통하지 않고,
삼마발제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세 삼마지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넓고 좁은 이름에 대해 대강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제목해석을 마친다.
금강삼매경론_1. 경서품 (經序品)
④ 과문해석(科文解釋)
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서분(序分)이고,
둘째는 제2품부터 이어지는 여섯 품까지의 글들이 정설분(正說分)이고,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으로서, ‘그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하로 두 장 남짓 되는 글이 유통분이다.
또한 서분에도 두 가지 서문[序]이 있으니 통서(通序:모든 경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항)와 별서(別序:해당 경의 서문에만 있는 사항)이다.
【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큰 비구승 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이름은 사리불ㆍ대목건련ㆍ수보리이니 이들은 아라한이었다. 또 보살마하살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 이름은 해탈보살ㆍ심왕보살ㆍ무주보살 등이었다. 또 장자(長者) 8만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범행(梵行)장자ㆍ대범행(大梵行)장자ㆍ수제(樹提)장자 등이요, 또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 육십만억과 함께 있었다.
【論】 통서에는 여섯 가지 일이 들어 있다.
앞의 셋은 직접 들어서 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요, 뒤의 셋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은 내가 들었다[我聞]이며, 셋은 어느 때[一時]이다.
뒤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교주(敎主)요, 둘은 머문 곳이요, 셋은 대중들이다.
그 대중들 속에도 네 가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 대중이요, 둘은 보살 대중이요, 셋은 장자 대중이요, 넷은 잡다한 무리이다.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통설과 같다.
【經】 그 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에는 없으나 한국 불교 전서에 있는 원본주이므로 표시해 둔다. 이하 모두 같다]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리행(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듣고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게 되며,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별서(別序)인데,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의분(威儀分)이고,
둘째는 설경분(說經分)이고,
셋째는 입정분(入定分)이며,
넷째는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이란, 경에 ‘그 때 존자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라고 한 부분이고,
설경분이란, 경에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경의 문세(文勢)는,
“그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무량의(無量義)였다”라고 한, 『법화경(法華經)』의 서론과 비슷하다.
그 경[법화경]을 해석한 논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두고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의도는 그 제목이 본격적인 설법에 앞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서분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이 경[金剛三昧經]의 글의 형태를 보면 모두 경전을 서술하는 자의 일반적인 서문과 같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다른 경을 앞에서 자세히 설하고, 다음에 정(定)에 들고, 정에서 깨어나 다시 『금강삼매경』을 설했을 것이다.
경의 주된 요지를 설한 연후에 경의 이름을 설하였으니,
‘일미진실(一味眞實)…’이라는 이 경의 앞에 자세히 말씀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의 대의가 비록 같다고 하지만 글 모양[文相]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법문을 자세히 설하여 당시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 설한 것은 법문을 요약하여 말세(末世)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설한 자세한 경이 간략한 경의 바탕이 된다.
이 설경분(說經分)의 글 형태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경의 이름에 대한 서언이고 뒤에는 경의 덕에 대한 찬탄이니, ‘만약 이 경을 듣고[若聞]’ 이하가 뒷 부분에 해당한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다음 가부좌하여 앉으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論】 이는 세 번째, 입정분(入定分)이다. 경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선정[定]에 드신 까닭은, 오직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성현께서 때에 맞게 침묵과 설법을 사용하여 그 두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陀)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論】 이것은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一味之經]과 뒤에서 설할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간략한 게송으로써 앞의 자세한 경을 송(頌)하여 뒤에 간략히 경을 일으킨 것이다.
문장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앞은 서언(序言)이고 뒤는 게송이니, 이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으로써 뒤의 게송을 일으킨 것이다.
아가타(阿伽陀)란 여기 말로는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는 뜻이다. 이는 약(藥)의 이름으로서 모든 병을 남김없이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무거’라고 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모든 번뇌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약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앞의 일곱 수 게송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세 게송은 전체를 밝힌 것이고, 네 게송은 따로 드러낸 것이다.
【經】 큰 자비로 가득하신 세존이시여.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도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려
한 가지 진실한 이치를 설하셨는데
모두 일미의 도(道)로써 하고
끝내 소승으로써 하지 않으셨네.
설하신 뜻[義]과 맛[味]과 곳[處]은
모두 다 부실(不實)함을 떠나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로운 경지에 들어가
결정코 참 실제(實際)에 들어갔네.
듣는 자가 모두 세간을 벗어나
해탈치 못함이 없으리.
【論】 총괄적으로 위의 세 게송을 밝혀보면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구절은 말씀하신 이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도구가 되는 교설[能詮敎]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所詮義]을 찬탄한 것이고,
넷째 두 구절은 가르침의 훌륭한 이익을 찬탄한 것이다.
두 번째 송 중에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한 것은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이 오직 하나의 진실[一實]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하였다.
‘일미의 도[一味道]’란 유일한 승[一乘]을 말한다. 나머지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께서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려고
못 사람들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법의 적멸한 특성을 알게 하여
결정적인 곳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論】 이 아래로 네 게송은 문답을 따로 찬탄한 것이다. 위의 다섯 구절은 물음이 넓고 깊어서 적멸을 알아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經】 여래의 지혜 방편으로
실제에 들도록 설하시니
모두 다 일승만을 따르기에
다른 잡다한 맛이 없다네.
마치 한 차례 비가 적셔주어
온갖 풀이 다 무성해지듯이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서
한 맛[一味]의 법으로 적셔주어
두루 모든 것에 충만케 하니
저 한 차례 비가 적셔주듯이
보리(菩提)의 싹 모두 자라게 하네.”
【論】 이 둘째 부분은 부처님의 답에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 법(法)ㆍ유(喩)ㆍ합(合)의 셋이 있으니 차례대로 보면 네 구절ㆍ두 구절 ㆍ다섯 구절이 그에 해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금강의 맛[味:다른 본에는 昧로 되어 있다]에 들어갔으니
법과 진실한 선정을 증득한 것이라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니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듯하네.
【論】 이는 둘째로 입정하심을 노래한 것이다. 위의 반은 앞에서 입정한 것을 노래하고, 뒤의 반은 뒤의 설법 일으킴을 노래한 것이다.
뒤에 설하신 교리에 두 가지 훌륭한 힘[勝能]이 있다.
하나는 마치 금강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결단코 의혹과 뉘우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마치 금강이 파괴되지 않듯이, 일승(一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래 반의 두 구절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냈다. 이상 서분의 글이 끝났다.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앞 6품은 관행을 각각 나타낸 것[別顯觀行]이요, 끝의 총지 일품은 의심을 통틀어 없애는 것[總遣疑情]이다.
이 별현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서 무생행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는 입실제품(入寶際品)으로서 허(虛)에서 실(實)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空)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서 무량한 문[無量門]으로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문(門)으로 관(觀)과 행(行)이 두루 다 포괄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망상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유전(流轉)하게 된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형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무상법(無相法)을 관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할지라도 관하는 마음을 남겨 두면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서 본각(本覺)에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무생행(無生行)을 밝혔다.
이미 무생을 행하면 바야흐로 본각에 계합하게 되니, 이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로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셋째로 본각리(本覺利)의 문(門)을 밝혔다.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은 허망함으로부터 실제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넷째로 실제에 들어감[入實際]을 밝혔다.
안으로의 행은 형상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본각의 이로움을 써서 실제에 들어가게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로움으로 온갖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는 참된 성품에서 나와 모두 진정한 공에 순응하나니 다섯째로 참된 성품인 공[眞性空]을 밝혔다.
이 참된 성품에 의해서 온갖 행이 구비되어 여래장 일미의 근원[如來藏一味之源]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섯째로 여래장(如來藏)을 밝혔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고 나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없다. 지어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길을 설하여 대승을 다 거두는 것이다.
한편 이 여섯 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이른바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은 관의 대상이 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인데, 그 법이란 이른바 일심 (一心)인 여래장의 체(體)이다.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관하는 자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인데, 이른바 6행(行)이라고 하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다.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은 일심(一心) 가운데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로 입실제품(入實際品)은 일심 가운데 진여문(眞如門)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한꺼번에 떠나되 그 두 가지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여러 가지 문을 거두어 들여 모두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이중(二重)의 6문(門)으로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두루 포섭하였다.
그런데 이 6품(品)은 세 문으로 간추려질 수 있다.
즉 앞의 두 품[無相法品ㆍ無生行品]은 관(觀)과 행(行)의 시작과 끝을 포섭한 것이고,
다음의 두 품[本覺利品ㆍ入實際品]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枝末)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두 품[眞性空品ㆍ如來藏品]은 원인을 포섭해서 결과를 이룬 것을 보인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품은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참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지막 두 품은 근본에 돌아가는 것과 근본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둘씩 합쳐놓은 세 가지로써 대승(大乘)의 뜻을 모두 포섭한다.
이 6품은 또 두 가지 문(門)으로 요약된다.
형상과 생함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본각(本覺)의 이로움이요, 실제와 참된 공은 여래장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세 가지 품)은 허망한 것을 버려서 바른 인(因)을 나타낸 것이고,
뒤의 문은 참된 것을 드러내어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두 문으로 역시 대승을 두루 포섭한다.
이 6품을 또 오로지 일미(一味)로 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형상과 일어남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본각이라고 하지만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실제라고 하는 것도 그 테두리를 한정할 수 없으며, 참된 성품이라고 하여도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인들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여래장품」에서,
“이 식[是識]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다는 생각마저도 적멸한 것이다”라고 했다.
「총지품(總持品)」에서도,
“제7식과 전5식이 발생하지 않고[七五不生],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九相]도 공해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얻을 수 없는 이 일미(一味)가 이 경의 근본(宗)이며 요지가 된다. 다만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슨 문이든지 열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무량한 뜻을 지닌 근본이 된다. 사실 일미(一味)이기는 하지만, 여섯 가지 문[六門]을 열어 놓는 까닭에 이 여섯에 의하여 과문(科文)을 나누어 해석하였다.
먼저 품명에 대하여 해석하겠다.
‘무상’이라고 한 것은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관념[諸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다음에 ‘법(法)’이라고 한 것은 관찰할 법[所觀法]으로서, 일심법을 의미한다. ‘무상관’이란 것은 먼저 품(品)전체를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첫 분[第一分]의 뜻이며,
‘소관법’이란 뒤에 6문(門) 가운데 첫 문(第一門)의 법이다. 여기 첫 품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무상법품’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