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야바라밀다경 제584권
서지 -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dongguk.edu)
12. 계바라밀다분서(戒波羅蜜多分序)
서명사 사문 현측 지음
무릇 청정한 법[淨法]을 쌓고자 한다면, 먼저 신기(身器)를 깨끗이 닦아야 하고,
애욕의 바다[愛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에 앞서 수행[行楫]을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선택한 것에, 특히 계바라밀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다시 이름난 곳[名區]을 지정해서, 거듭 진리의 모임[玄集]을 가진 것이니,
행과 말을 간절하게 하여 가르침을 전하면,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이 모두 불법의 일인 것이요,
일상생활[動靜]에서도 기틀을 연구하면, 발을 올리고 발을 내리는 모든 것이 바로 도량(道場)인 것이다.
진실로 계바라밀은 험한 길을 평탄하게 오르게 해주는 것이고,
어두운 방을 비추는 환한 등잔[凝釭]이며,
역병에 걸린 사람을 구제하는 신선의 환단[仙丸]이고,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막는 신묘한 수단[神馭]인 것이다.
또한 덕(德)을 비추는 밝은 거울이고,
마음을 삼가게 하는 보배로운 장식[寶鬘]이며,
상법의 말기[象季]를 건너게 해주는 큰 스승[大師]이고,
세속에 함께 머무는 훌륭한 벗[善友]인 것이다.
비록 그것을 보아도 뚜렷하게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것을 빚어내도 그 실체에 닿지 못할지라도,
그윽하고 진한 향기는 널리 퍼져나가니,
꽃 향기[迷迭]가 공중에 가득찬 것과 같고,
청아한 빛은 맑고 화려하게 빛나니,
제호(醍醐)가 색을 투명하게 비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중생[含靈]이 계바라밀을 빚는 이유이고, 법계(法界)가 두루 다스려지는 근거인 것이다.
선서법왕(善逝法王)은 이것 높이는 것을 지혜로운 실천[明足]으로 여겼고,
구수존자(具壽尊者)도 이것 기르는 것을 청정한 명령[淨命]으로 삼았다.
그러나 너무 간략하게 대상을 정하면, 혹 그 대상이 아닌 곳에서는 따르기 어렵고,
아주 바른 것으로만 정승(正乘)을 삼으면, 더러 승(乘)이 다르다고 하여 잘못된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17군[十七群] 비구들의 야단스러운 목욕이 왕사성에서의 비난을 일으킨 것이었고, 오백생(五百生))의 긴 시간에도 흔들리는 모습에 부처의 경계하는 말씀이 이르렀던 것이다.
하물며 거듭 연꽃의 향기를 맡고서도 도둑질을 하고,
옥 팔찌의 소리를 나누고도 음행을 하는데 있어서랴.
열반(涅槃)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여, 마음에 흐트러짐 없이 정진하다가도 오히려 계율을 범하고,
보리(菩提)에 들기를 원하여 욕망과 쾌락의 마음을 거두어들이다가도 오히려 집착에 빠진다.
그래서 가벼운 질투[輕嫌]와 두터운 성품[重性]이 차이가 없는 것이요,
뜻으로 막는 것[意防]과 몸으로 가리는 것[身遮]도 등급이 같은 것이니,
연고를 깨달은 것[諦故]이 연고에 머무르는 것[住故]이요,
행위의 주체[能行]가 행위의 객체[所行]인 것이다.
수희(隨喜)로써 인도하고, 법성(法性)으로 융합하니,
어찌 풀을 가엾게 여기는 것[草繫]처럼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과 바라제목차[木叉]의 계율을 지켜 의로움이 지극한 사람들에게만 머물겠으며,
독을 품은 용[毒龍]의 독을 거두게 하는 신통력이 있는 사람과, 두려워하는 비둘기[怖鴿]의 두려움을 잊도록 해주는 부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머물겠는가.
어리석은 중생[黎蠢]에게도 교화가 미쳐서,
늘 즐거움에 머물도록 하여,
팔한(八寒)에도 따뜻함이 흐르고,
오열(五熱)에도 서늘함이 돌게 하니.
벽려(薜荔)는 그 곳에 있는 뜨거운 강[炎河]을 잃게 되고,
윤위(輪圍)는 그 가운데서 깊은 물[闇渚]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수행의 문[行門]이 진실로 갖춰진 것이고,
부처의 지혜[種智]가 지극히 원만해진 것이다.
모두 다섯 개의 축[五軸]으로 이루어졌고 단일한 번역이며, 한결같이 보시의 분[施分]이다.
모든 마음을 다스리는[息心] 보살이 어찌 이것을 의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