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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엄법문경 상권
2. 보리와 보살
[금색녀가 보리심을 일으키다]
이때 승금색녀(勝金色女)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였고, 마음이 청정해졌다.
그녀는 5체(體)를 땅에 던져 문수사리의 발에 예배하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法]에 귀의합니다. 승가(僧伽)에 귀의합니다.”
3보(寶)에 귀의한 다음 범행(梵行)인 5계(戒)를 받고, 계법(戒法)을 받은 다음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 마음을 낸 다음에 문수(文殊)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게 되었으니 일체 중생이 안온(安穩)함을 얻게 하기 위해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부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킵니다.
문수사리께서 저를 위해 이 보리의 법을 설하심과 같이 저도 마땅히 따라 행하며 또한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해 이와 같은 법을 설하겠습니다.
[불법은 적멸이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불법은 적멸(寂滅)하고 대적멸(大寂滅)합니다.
저는 알지 못한 까닭에 나쁜 각관(覺觀)에 따라 전도(顚倒)된 마음을 일으켜 신견(身見)을 집착하고, 스스로 육신을 탐착하며 또 남들로 하여금 탐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지극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일체의 죄업(罪業)을 참회합니다.
문수사리의 말씀처럼 탐욕은 적멸의 법이며, 일체의 화합한 법들도 또한 이와 같이 적멸합니다.
만약 이 법을 알지 못해 탐착(貪著)을 일으키는 중생이 있다면 제가 그를 탐착에서 멀리 벗어나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편안히 머물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번뇌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으며, 단지 전도된 망상(妄想)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도된 온갖 망상이 없다면 번뇌는 곧 사라집니다.
[번뇌는 실답지 않은 것이다]
저는 이제 문수사리께서 말씀하신 법요(法要)를 듣고 일체의 번뇌가 구름이나 안개처럼 그 체성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번뇌는 번개와 같아 한 생각도 머물지 않고, 번뇌는 바람과 같아 체성이 불생(不生)입니다.
번뇌는 허공에 그린 그림과 같으니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번뇌는 물에 그린 그림과 같으니 그리자마자 곧 없어지기 때문이며,
번뇌는 야차귀(夜叉鬼)와 같으니 나쁜 각관(覺觀)을 낳기 때문이며,
번뇌는 열병(熱病)과 같으니 헛소리를 지껄이기 때문이며,
번뇌는 체성이 없는 것이니 나쁜 각관이 생기기 때문이며,
번뇌는 버리기 어려우니 ‘나다.’, ‘나의 것이다.’ 하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물(物)이 없는데 망령되게 객진(客塵)을 취하는 것이니, 번뇌가 망령되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생각[想]을 따라 나타나니 나쁜 각관(覺觀)으로 취하기 때문이며,
번뇌는 눈[眼]과 같으니 온갖 경계가 일어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그 체(體)가 다함이 없으니 마음이 탁함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이며,
번뇌는 체성이 없으니 화합의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번뇌는 둥근 덩어리와 같으니 음ㆍ입ㆍ계가 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알 수 없는 것이니 명색(名色)이 없기 때문이며,
번뇌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좋은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번뇌는 씨앗과 같으니 보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번뇌를 원인으로 해야만 보리를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를 보는 것을 보리라고 한다]
문수사리님, 보리는 금강궐(金剛橛)과 같으니 중생의 번뇌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보리는 금강적(金剛跡)과 같으니 일체의 번뇌가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법계(法界)는 방편으로 깨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님, 번뇌를 보는 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경계는 보리를 순응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리는 머무는 곳이 없고, 일체의 번뇌도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生)은 곧 멸(滅)이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님. 이처럼 마음의 체성은 설명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또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설할 수도 없습니다.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체성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번뇌를 알기 때문에 탐욕이 많은 중생과 성냄이 많은 중생과 어리석음이 많은 중생을 잘 교화하며, 그렇다고 그 중생들을 괴롭히거나 혼란스럽게 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평등한 부류의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역시 괴롭히거나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문수사리님, 저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처럼 일체 중생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의 번뇌처럼 일체 중생의 번뇌도 또 이와 같습니다.
또 문수사리님, 비유컨대 사나운 불길은 어떤 풀과 나무에도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모든 번뇌에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태양이 어둠과 함께 머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미혹(迷惑)과 함께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큰 바람은 어떤 산과 나무도 막을 수 없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 세간의 번뇌와 경계가 막을 수 없습니다.
비유컨대 허공은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모든 번뇌의 불길이 또한 태우지 못합니다.
비유컨대 철애(鐵愛)라는 보살은 더러운 것에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마다 일체가 청정해지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의 번뇌에 또한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허공은 땅과 합하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번뇌의 온갖 결박과 화합하지 않습니다.
철위산(鐵圍山)은 바람이 움직일 수 없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의 번뇌가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물과 젖이 섞여 있어도 창곡(倉鵠)은 젖만 빨아먹고 물은 취하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롭게 행하는 보살은 일체의 번뇌와 화합할지라도 지혜만 취하고 번뇌는 취하지 않습니다.
울단월국(欝單越國:北俱盧洲)에서는 남녀가 화합할 때 모두 나무 아래로 가는데, 만약 친족(親族)이 아니면 나무 가지가 아래로 쳐져 그 몸을 가려 준다고 합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 근기(根機)가 미숙한 중생에게는 지혜를 드리워 교화하지 않습니다.
또 문수사리님, 저는 지금 이 일체의 번뇌에 대해 놀람과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번뇌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며,
보살의 두려움 없는 투구를 잘 썼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용맹한 사람이 싸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음과 같으니, 만약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곧 용맹한 사람이 아닙니다.
보살 또한 그와 같습니다. 모든 번뇌에 대해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곧 보살이 아닙니다.
또 사람이 싸움터에 들어가 서로 싸울 때 남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남에게 해침을 당한다면 용맹한 남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보살이 번뇌로부터 해침을 당한다면 보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문수사리님, 물을 맑히는 구슬을 흐린 물에 던지면 물이 곧 깨끗해지고 그것은 흐린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처럼,
보살은 비록 번뇌와 화합한다 하더라도 번뇌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보살은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
이때 승금색녀는 이 말을 하고나서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은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만약 보살이 번뇌의 생(生)을 알고, 번뇌의 멸(滅)을 안다면 그것은 번뇌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유컨대 밝은 등(燈)이 온갖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으니, 만약 어둠과 함께한다면 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보살이 번뇌의 생을 보고 번뇌의 멸을 본다면 곧 번뇌를 벗어난 보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번뇌를 벗어난 보살은 번뇌를 보지 않고 청정함도 보지 않으며, 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저런 곳에 대해 마음으로 분별하고 나아가 열반을 염(念)한다면 그것을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心]이나 심수(心數:心所)가 생겨 죄와 복을 반연하기 때문입니다.
이 반연을 일체의 행을 지음[作行]이라 하고 행을 짓고 나면 이것을 유전(流轉)이라 하며,
만일 유전하는 법이라면 이를 실다운 유전이라고 하고 일체의 유전을 번뇌라고 합니다.
또 화합하는 것을 번뇌라고 합니다.
무엇이 화합하는가?
눈과 빛깔이 화합하고, 귀와 소리가 화합하며, 코와 향기가 화합하고, 혀와 맛이 화합하며, 몸과 감촉(感觸)이 화합하고, 뜻과 법(法)이 화합하며,
삼매(三昧)와 번뇌가 화합합니다.
왜냐하면 삼매에 들고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번뇌라고 합니다.
나쁜 각관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며,
마음의 작용[心行]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며,
공용(功用)이 없는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며,
수량(數量)을 벗어난 것을 번뇌를 벗어남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스스로 번뇌를 벗어나고 또 남도 번뇌를 벗어나게 하며,
일체 중생의 결박을 풀어주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여래(如來)께서는 이런 사람을 번뇌를 벗어나 정진하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
이때 승금색녀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이라고 합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공법(空法)을 증득하지 않아 신견(身見)을 가진 중생에게 비심(悲心)을 버리지 않으며,
무상(無相)을 증득하지 않아 악견(惡見)을 가진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원(無願)을 증득하지 않아 소원하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작(無作)을 증득하지 않아 지음이 있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생법(無生法)을 증득하지 않아 태어나 늙고 죽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무출법(無出法)을 증득하지 않아 생멸하는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으며,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의 과(果)를 증득하지 않고 보살의 지위에 머물면서 일체 중생에게 비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을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비유컨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려우니, 왜냐하면 좋은 방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문과 연각(緣覺)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에 들어가면 방편이 없는 까닭에 스스로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나게 정진하는 보살은 방편이 있기 때문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싸움터에 뛰어들어 전투를 벌인다면 몸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에 들어도 방편이 있는 까닭에 곧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곧 보살의 방편이라 합니다.”
[보살의 방편]
승금색녀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보살의 방편이란 무엇입니까?”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방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생사(生死)를 버리지 않는 것이고 둘은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공문(空門)이며 둘은 악견문(惡見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상문(無相門)이며 둘은 상(相)을 각관(覺觀)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원문(無願門)이며 둘은 원생문(願生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작문(無作門)이며 둘은 선근(善根)의 행을 심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생문(無生門)이며 둘은 시생문(示生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출문(無出門)이며 둘은 음입계문(陰入界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적멸문(寂滅門)이며 둘은 출생문(出生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정문(定門)이며 둘은 교화문(敎化門)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법계문(法界門)이며 둘은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문(聲聞門)이며 둘은 깊은 마음으로 보리를 행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벽지불문(辟支佛門)이며 둘은 4무애문(無礙門)입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두 가지 법문(法門)에서 남들을 위해 시현(示現)하고 집착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법문에서도 또한 그와 같이 한다면, 이를 방편이라 합니다.
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탐욕의 문이며 둘은 탐욕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냄의 문이며 둘은 성냄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어리석음의 문이며 둘은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나는 번뇌의 문이며 둘은 번뇌를 벗어나는 문입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일체가 생하는 문이며 둘은 생을 벗어나는 문입니다.
이것을 보살의 방편문(方便門)이라고 합니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일체 범부(凡夫)가 행하는 문이며,
둘은 일체의 학(學)과 무학(無學)과 성문과 벽지불과 부처와 보살과 여래(如來)의 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문을 알 수 있다면 이를 보살의 가장 뛰어난 방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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