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0월 18일
남진원의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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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수상]
1965년, 국민 학교
우등상 수상
문래국민 학교,우등상 수상
문래 국민 학교. 제22회 졸업
(1965. 2.)
** 우등상 수상과 閑談
졸업할 때 우등상을 받다
졸업식장에서 문래 국민 학교장으로부터 우등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일은 국민 학교에 다닐 당시 한 번도 우등상을 받은 적이 없다가 졸업할 때에 우등상을 받았다.
평소 성적이 좋지 않았기에 우등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졸업식장에서 우등상을 받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을 뿐이었다. 당시 우리 학급에서 우등상을 받은 사람은 늘 반장이 받았다. 6학년 졸업식장에서는 예외로 교장 아들이며 반장인 친구와 나까지 받았다.
내가 받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강릉의 경포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강릉의 경포중학교는 수재들만 가는 곳이라 소문이 나 있었고 경쟁이 치열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건 명백한 가짜뉴스였다.
친구의 부친은 3, 4년간 우리 학교의 교장이었다. 교장 아들은 농부의 아들딸들에겐 당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교장 관사는 일본식 집으로 지어졌는데 이미 욕조가 있어 자주 목욕을 하였고 좋은 음식을 먹어서 살결이 우윳빛으로 아름다웠다. 반면에 손발이 흙에 묻고 때에 절어 시커먼 우리들과는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1968년, 경포중학교 3년 개근상 수상
중학교 3년,
3년 개근상 수상
경포중학교. 제6회 졸업 (1968. 2.)
졸업할 때 3년 개근상을 받다
경포중학교장으로부터 졸업할 때, 3년 개근상을 받다.
국민 학교 시절 2, 3 학년 때에는 자주 병 앓이를 하였다. 그래서 6년 동안 한번도 결석을 하지 않아야 받을 수 있는 6년 개근상은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와서는 3년 동안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다. 학교가 집 가까이 있는 것도 한 이유지만 중학교에 와서는 몸이 건강한 편이었다.
성적은 매번 꼴찌를 면하지 못하였다. 시험은 달달 외워서 하는 공부였다. 근본적인 이유나 원인을 선생님들은 해설해 주지 못하였다. 아니, 질문을 하면 권위에 도전을 받는 것처럼 선생님들은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대부분이 지식의 전달자이지 스승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장일섭 미술 선생님과 장택기 상업 선생님을 제외하고 말이다.
경포중학교 성적은 좋지 못하였지만 학교는 열심히 다녔다. 그래서 3년 동안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아서 3년 개근상을 받았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를 가려고 했지만 충치와 치질이 있어서 단념해야 했다. 강릉고등학교 동창 중에 육군사관학를 간 친구가 두 명 있었다. 모두 영관급 장교로 제대를 하였다. 내가 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면 아마 군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 참 아쉬웠다. 하지만 군 장군은 되지 못하였지만 글 장군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1971년, 강릉고등학교 공로상 수상
강릉고등학교장으로부터 졸업식장에서 공로상을 수상하다.
음악이 신기하여 밴드부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트럼펫을 불고 싶어 들어겄는데 선배들이 심벌을 치라고 하였다. 폐활량이 적어서 트럼펫을 불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친구들도 많이 밴드부에 들어갔는데 승적이는 거대한 스자폰을 메고 다녔다. 승우는 내가 부러워하는 트럼펫을 불었고 석명이는 섹소폰을 목에 걸고 있으니 모두들 안의 우상이었다. 실컷 음악실에서 단체 벌을 받고 2학년이 되어서야 드럼을 치게 되었다. 중철이는 드럼을 칠 때 소고채를 얼마나 멋지게 들어올리며 드럼을 쳤다, 나도 흉내를 내보았지만 그렇게 멋져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일로 인해서 우리 밴드부 아이들은 모두 졸업할 때 공로상을 받았던 것이다. 또 있다, 필드학키가 전국 우승을 하고 났으니 나중에 강원대체육과레 들어간 박기동이도 공로상을 받았다.
매일 공부가 끝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음악실에서 연주 연습을 했다. 그런데 엎드려서 손배들에게 맞는 게 매일이다시피 하였다. 하두 공포스러워서 어머니께 강릉농고에 전학시캬달라고까지 하였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농고에 가기도 전에 맞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어는 단체에서 초청을 하면 나가서 연주를 하고 우리는 밧있는 자장면을 얻어 먹었다. 지금의 제일은행 부근의 2층 식당이 중국음식점이었다. 그곳에서 매번 자장면을 먹었는데 그리 맛있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송별식도 그곳에서 했는데 처음으로 컵에 하나 가득 소주를 부어 강제로 먹였다. 억지로 막고나니 뱅뱅 우주가 돌아가서 한동안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매일같이 선배들에게 얻어맞다시피 한 1, 2 학년 밷드부 생활 끝에 받은 게 공로상이다. 상품도 있었는데 펜을 꽂는 색이 빨간 스탠드였다. 내 코 뼈가 약간 휘어졌다. 선배에게 주먹으로 맞은 선물이었다.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는 걸 돌렸다가 코뼈에 주먹이 닿아서 휘어졌다.
1973년, 강릉교육대학 다독상 수상
교육대학, 다독상 수상
강릉교육대학. 제3회 졸업
(1973. 2.)
1학년 후반, 강릉교육대학 학생회로부터 다독상을 수상하다.
대학도서관에 자주 들락거린 것이 원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역사 참고서 한 권을 외울 정도로 무지하게 공부를 하였다.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갈 심산이었다. 예비고사 성적도 그렇고 내 실력이면 서울대학교는 못 가도 중앙대는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아버지!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하시며 서울은 안 된다고 하셨다. 군대도 안가는 대학이 있다고 하면서 강릉교육대학을 말씀하셨다. 서울에 가서 과외지도를 하며 대학에 다니겠다고 하여도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 결국 강릉교육대학에 갔다. 정원이 미달이어서 거의 모두 입학이 허락되었다. 내가 경포중학교 시험 번호가 242번이었고 대학교 학번은 176번이었다. 군번은 84004771번이었다.
가고 싶은 대학에 가지 못했기에 학교에 다니면서도 불만이 높았다. 학교 공부를 하지 않고 도서관에 가서 책만 읽었다. 많이 읽은 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이었다. 그 내용 중에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무명론이었다. 하두 도서관에 들락거리니 총학생회에서 그 모습을 보고 다독상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상하게 받은 상이었다. 말 그대로 책을 많이 읽었다는 상이었다. 그러나 상 받을 만큼 그렇게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