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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왕반야바라밀경 제1권
2. 현상품(顯相品)
그때 승천왕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머리와 얼굴을 땅에 대며 예를 올리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은데 어떤 것이 이 반야바라밀의 모습[相]입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땅ㆍ물ㆍ불ㆍ바람의 모습[相]과 같이, 반야바라밀의 모습도 그와 같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땅의 모습[地相]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루 넓고 광대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것을 땅의 모습이라 한다. 반야바라밀의 모습도 그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여여하게 두루 넓고 광대하여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모든 약초가 다 땅에 의지하여 살 듯이, 모든 선한 법은 다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땅이 늘어도 기뻐하지 않고 줄어도 성내지 않는 것처럼,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어 서로 다른 모습[二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반야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아, 찬탄하여도 늘어나지 않고 헐뜯어도 줄어들지 않느니,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어 서로 다른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가고 오고 발을 들고 내림이 다 땅에 의지하듯,
만약 선도(善道)를 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려면 마땅히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야 하느니라.
또한 대지에서 갖가지 보배가 나오듯,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출세간의 가지가지 공덕이 생겨난다.
또한 대지에 벌레ㆍ개미ㆍ모기ㆍ등에가 갖가지로 고통을 주어도 능히 기울어 흔들리지 않듯,
반야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이,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어 기울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느니라.
또 대지가 사자ㆍ용ㆍ코끼리의 소리를 들어도 끝내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듯,
반야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아, 하늘의 마와 외도의 설에도 능히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사람이 있다고 보지 않고 법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물[水大]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오듯,
모든 선한 법은 다 반야바라밀을 향하여 나아간다.
또한 물이 초목을 적시어 꽃과 과실을 생겨나게 하듯,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삼매를 윤택하게 하여 도를 돕는 법[助道法]이 생겨나게 하여 온갖 지혜의 나무를 이루어 불법(佛法)의 과실을 얻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느니라.
또 물이 초목의 뿌리를 잠기게 하여 기울여 뽑아내어 물을 따라 흘러가게 하듯,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견해ㆍ번뇌ㆍ습기(習氣)의 근본을 소멸하게 하여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게 하느니라.
또한 물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때가 없고 탁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본체가 번뇌가 없는 까닭에 청정이라 하고,
모든 의혹을 여읜 까닭에 때가 없다[無垢]고 하며,
한 모양으로 다르지 않은 까닭에 혼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라.
사람이 여름더위에 물을 만나면 맑고 시원함을 느끼듯이,
중생이 타는 듯한 번뇌[熱惱]에 시달리다가 이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즉시 맑고 시원해지며,
사람이 목말라 애가 탈 때 물을 얻으면 곧 목마름이 멈추듯이,
세간을 벗어나는 법을 구하고자 하여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생각하던 서원이 또한 멈추는 것이니라.
또 샘물이 아주 깊으면 들어가기 어렵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매우 깊어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니라.
또 웅덩이에 고인 물은 다 평등하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성문과 벽지불 및 모든 범부에게 다 평등하다.
또 물이 땅을 씻어 깨끗하게 하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통달하면 모든 번뇌를 여의고 곧 청정함을 얻게 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자성이 청정하여 모든 의혹을 여읜 까닭이니라.
또 불[火大]이 모든 나무와 약초를 태우고도 스스로 물질을 태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번뇌의 습기를 소멸하고도 스스로 멸하여 없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니라.
또한 비유하면 불은 모든 물건을 익혀버리듯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또 비유하면 불이 모든 습한 물건을 말리듯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흘러나오는 번뇌를 말리어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며,
설령 맹렬한 불덩이가 설산(雪山)의 꼭대기에 있어 일 유순(由旬)에서 십 유순에 이르기까지 다 비추어도 스스로 멀리 비춘다는 생각이 없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성문과 연각 및 보살을 다 비추어도 스스로 그들을 비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니라.
또 금수가 밤에 불빛을 보고 두려워서 멀리 피하듯이,
박복한 범부와 이승(二乘)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두려워 멀리 여읠 것이니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도 듣기 어려운데 하물며 다시 배우고 닦으리오.
밤에 먼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을 때, 만약 불빛을 보면 마을이 있는 것을 알고 기뻐하며 빨리 이르려 하고, 도착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생사의 광야에서 복덕이 있는 사람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큰 기쁨이 생겨 나아가려 하고, 받아 지녀 영원히 번뇌를 여의고 마음에 안락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세간의 불[火]은 귀하고 천함이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범부나 성인의 구별 없이 평등하게 있는 것이다.
또 바라문이나 찰리가 다 불을 공양하듯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다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느니라.
또한 작은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태우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만약 한 구절을 듣더라도 한량없는 번뇌를 태우느니라.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번뇌를 여의어 집착함이 없고 끝없이 고요하며 끝없는 지혜로 평등하게 법성을 통달하니,
마치 허공과 같아 성품이 머무는 곳이 없고 모양과 경계를 여의며,
모든 감각과 감관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의 법[心數法]으로 분별할 수도 없으니,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세상에 드문 일이라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니,
마치 해와 달이 일체를 수용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달이 뜨거움의 고통을 없애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번뇌의 뜨거운 독을 없앤다.
또 비유하면 세간에서 달을 즐겁게 보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성인이 즐거이 보는 바이다.
또한 초승달이 날로 자라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도 반야바라밀을 가까이하면 초발심에서부터 나아가 보리에 이르기까지 점점 자라나며,
검은 달[黑分:달이 줄어가는 下半月] 이후로는 달이 나날이 기울어져 마침내 없어지듯,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번뇌의 얽매임이 차례로 다 없어진다.
세간의 달을 바라문과 찰리(刹利) 종족이 다 찬탄하는 것과 같이,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가까이 하면 모든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가 다 칭찬한다.
달이 두루 사천하를 유행하듯이,
반야바라밀도 색(色:물질)과 마음에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다.
세간의 달이 항상 스스로 장엄하듯이,
반야바라밀도 성품을 스스로 장엄한다.
왜냐 하면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일체법에 두루 하여 자성을 여읜 까닭이다.
세간의 태양이 모든 어둠을 깨뜨리면서도 스스로 어둠을 깨뜨렸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비롯함이 없는 모든 번뇌를 깨뜨리되 스스로 번뇌를 깨뜨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비유하면 태양이 연꽃을 피게 하되 스스로 연꽃을 피웠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보살심을 열게 하고도 그런 생각도 없다.
또 비유하면 태양이 시방을 두루 비추어도 스스로 두루 비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끝없이 비추면서 비춘다는 상(相)이 없다.
또 동쪽이 붉은 것을 보고 해가 오래지 않아 뜰 것임을 알 듯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마땅히 부처님이 머지않아 오실 줄을 알게 된다.
염부제(閻浮提)의 사람이 만약 해가 뜨는 것을 보면 크게 기뻐하듯이,
만약 세간에 반야바라밀의 이름이 있으면 모든 성인들이 다 크게 기뻐한다.
또 해가 뜨면 달과 별이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승(二乘)이나 외도의 덕(德)은 또한 나타나지 못한다.
또 해가 뜨면 비로소 구덩이의 깊고 얕은 곳이 보이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세간의 그릇되고 바른 도리를 안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의 자기 모습은 평등하여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공행(空行)을 많이 닦았기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이 없고, 도를 닦아 장애를 여의었고, 악지식을 멀리하고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한다.
또한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법계에 수순하며,
시방의 국토를 신통으로 노닐면서도 본래 있던 곳에서 전혀 동요하지 않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법을 보는 것은 마치 현전하는 것과 같고,
비록 세간에 있더라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아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은 생사에 처해 있어도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으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반야바라밀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자기 모습이 평등하고 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느니,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또 연꽃에 물방울이 맺혀 있지 않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는 하나의 착하지 않은 법이라도 잠시도 머물지 않느니라.
또 연꽃이 있는 곳은 다 향기가 있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만약 성읍이나 취락에 있으면 인간세상과 천상이 다 계(戒)의 향을 갖추게 되느니라.
또 연꽃의 체성이 청정함을 바라문ㆍ찰리ㆍ장자ㆍ거사가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사람과 사람 아닌 이들과 보살과 모든 부처님들이 다 사랑하고 공경하느니라.
또 연꽃이 처음 피어나려고 할 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항상 웃는 얼굴로 찡그림이 없어서 중생을 기쁘게 하느니라.
또 세상 사람이 꿈에 연꽃을 보면 이것을 좋은 징조로 여기는 것처럼,
모든 사람과 하늘이 꿈속에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을 보거나 들어도 이것을 길상(吉相)으로 여기는데 하물며 실제로 보는 것이겠느냐?
또 연꽃이 처음 피어날 때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가 다 애호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처음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제석천ㆍ범천과 모든 하늘들이 보호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 이치대로 모든 바라밀을 통달하고, 부처님 법을 만족히 하며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보리수 아래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여서 바른 법륜을 굴리니, 세간의 사문ㆍ바라문과 하늘ㆍ악마ㆍ제석ㆍ범천도 굴리지 못하는 바이다.
시방의 끝없는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평등하게 하며, 생사의 바다에서 건져내어 다 반야바라밀 가운데 안치하고, 돌아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으며 구호해줄 이 없는 자를 모두 구호한다.
부처님을 뵙고자 하는 자에게는 곧 사자후를 지어서 보여주며 신통에 자재[遊戱]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중생이 우러러 사모하게 한다.
마음은 청정하여 바뀌지[轉移] 않고, 뜻은 아첨하거나 왜곡됨이 없으며 삿된 생각을 멀리 여의니, 이른바 성문과 벽지불의 법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더러움이 없어져서 다시는 번뇌가 없으며 몸은 거짓스런 행이 없고 삿된 위의(威儀)를 여의며, 입으로는 교묘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말한다.
받은 은혜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가벼운 은혜라도 두텁게 갚으며, 마음속에 한을 품지 않고 입으로는 항상 부드럽게 말하며,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닦고 익혀서 더러움을 보지 않고 물드는 것을 보지 않으니,
둘이 없고 다름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여래의 세 가지 청정함을 믿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수다라(修多羅)에서 여래의 법신(法身)ㆍ고요한 몸[寂靜身]ㆍ같음이 없는 몸[無等等身]ㆍ한량없는 몸[無量身]ㆍ같이하지 않는 몸[不共身]ㆍ금강과 같은 몸[金剛身]을 말씀하셨다.’
여기에 대해 마음에 미혹됨이 없이 결정하면, 이것을 여래의 몸이 청정함을 믿는다고 하느니라.
또한 생각하기를,
‘수다라에서 여래의 입[口]은 청정하여 범부를 위하여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듯이 또한 보살을 위하여 성불의 수기를 주셨으니, 이와 같은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믿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영원히 모든 과실을 여의어 아무런 번뇌가 없고 번뇌의 더러움이 없어 고요하고 청정하다.
하늘이나 마귀나 사문이나 바라문, 혹은 범천[梵]이 만약 여래께 구업(口業)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이치는 없으니, 이것을 여래의 입이 청정함을 믿는다고 하느니라.
또 수다라에서 여래의 뜻이 청정함을 설하셨으니,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마음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ㆍ보살ㆍ하늘ㆍ사람이 알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마음은 매우 깊어서 들어가기 어려우며, 모든 감각과 감관으로도 알 수 없으며, 생각하여 헤아리는 경계를 여의어서 끝을 헤아릴 수 없으니 허공계(虛空界)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알고 믿어서 마음에 의혹됨이 없는 것을 능히 여래의 뜻이 청정함을 믿는다고 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두려워하지도 않고 피로해 하지도 않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도 그 마음이 견고하여 일찍이 물러남이 없느니라.
모든 바라밀을 차례로 닦고 익히어 부처님의 법을 성취하니, 장애가 없고 끝이 없으며 같음이 없고 함께할 수 없는 법이다.
말한 것을 결정함에 그 성질이 용맹하여 여래의 광대한 일을 성취하느니라.’
이러한 보살마하살은 그 일 가운데서 의심하지 않고 의혹을 일으키지 않으며 깊은 마음으로 받아서 믿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도량에 있을 때는 막힘 없는 청정한 천안(天眼)ㆍ천이(天耳)ㆍ타심지(他心智)ㆍ숙명지(宿命智)ㆍ누진지(漏盡智)를 얻어서 한 찰나에 삼세가 평등한 지혜를 통달하여 여실하게 모든 세간을 관찰한다.
그리하여 중생이 악행을 저지르고 입으로 악행을 짓고 뜻으로도 악행을 하며, 성인을 비방하여 헐뜯고 그릇된 견해로 삿된 업을 짓는다면, 마침내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칠 때는 반드시 악도에 떨어지게 되며,
중생이 몸으로 선행을 하며 입으로 선행을 하고 뜻으로도 선행을 하며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마침내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칠 때는 반드시 선도(善道)에 들게 되리라.’
여실하게 중생계를 관찰하고 나서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옛날에 보살도를 행하기를 발원하기를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리라 하였는데, 이 원을 응당 원만하게 하리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는 이와 같은 일을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아 여실하게 받아 믿느니라.
대왕이여, 보살이 성불하는 곳을 학처(學處)라고 하고, 스스로 깨치는 것을 정각(正覺)이라 하며, 중생을 성취하게 하는 것을 정변각(正遍覺)이라 하느니라.
대왕이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여래가 나오시어 세상을 일으키는[出興] 것을 알고 믿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일승의 설법을 들으면 곧 받아 믿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가지 다른 승(乘)은 다 불승(佛乘)에서 나온 것이니 염부제의 가지가지 성읍과 취락의 이름은 다르나 다 이 주(洲)에 속하여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승의 여러 가지 이름을 설하였으나 다 불승에 속한 것이니라.
또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래 세존께서는 훌륭한 방편[善巧]으로 갖가지 설법을 하시나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세존의 설법은 중생의 근기[根性]에 따른 것이므로 분별하여 삼승(三乘)을 설하셨으나 그 실상은 한 길[一道]이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다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래의 설법은 음성이 깊고 멀리 들리며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제석천과 범천(梵天) 등의 적은 공덕도 오히려 음성이 깊고 멀리 들린다고 하는데, 하물며 여래께서 한량없는 억겁 동안 익히고 쌓은 공덕이겠는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여래의 설법은 중생의 근기를 어긋나지 않느니, 상ㆍ중ㆍ하의 근기(根機)를 다 성취하게 하되 중생은 각각 오직 나를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하지만 모든 부처님은 본래 설함도 없고 보인 것도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일에 의심하지 않고 믿고 이해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마음이 미세하여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세간은 맹렬한 큰 불덩이가 모여 있으니 말하자면 탐욕의 불과 성냄의 연기와 어리석음의 어둠이다. 이 불구덩이 속에서 어떻게 마땅히 모든 중생을 다 벗어나게 할까?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함을 통달하면 벗어난다 한다.’
여실하게 법이 환상(幻相)과 같음을 알고 인연을 잘 관찰하여 분별하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법은 본래가 없으나 업보는 있다. 무릇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말씀하신 뜻을 나는 안다. 이에 뜻을 알고 나서 그 뜻을 헤아려 생각하고, 뜻을 헤아려 생각하고 나서는 곧 진실함을 보고, 진실함을 보고 나서 중생을 제도하리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선교방편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니,
말하자면 모든 법은 다 ‘내가 없고 중생도 없고 양육함도 없고 남도 없고 짓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견해도 없고 공하여 있는 것도 없고 자재한 성품도 아니며 허망하게 분별함이요,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다.’
대왕이여, 만약 모든 법이 다 내가 없고 나아가 견해도 없다고 설함은 이치에 부합하는 말이며, 공하고 소유함이 없고 나아가 생기는 인연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왕이여, 그 설법이란 법의 모양을 수순할 따름이니 이것을 이치에 부합한다고 이름하고,
법의 모양을 어기지 않고 법과 같이 상응하여 평등함에 들어가서 뜻과 이치를 나타냄을 교묘한 설법이라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걸림없는 변재를 얻으니, 말하자면 집착이 없는 변재ㆍ다함이 없는 변재ㆍ이어지는 변재ㆍ끊어지지 않는 변재ㆍ겁내고 약하지 않는 변재ㆍ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변재ㆍ같이하지 못하는[不共] 변재ㆍ하늘과 사람이 소중히 하는 변재ㆍ끝이 없는[無限] 변재 등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청정한 변재를 얻으니, 말하자면 목이 쉬지 않는 변재ㆍ정신이 헷갈리지 않는 변재ㆍ두려워하지 않는 변재ㆍ높고 거만하지 않는 변재ㆍ뜻이 구족한 변재ㆍ맛을 구족한 변재ㆍ서툴고 껄끄럽지[拙澁] 않은 변재ㆍ때에 맞는 변재 등이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대중의 위덕의 두려움을 여의는 까닭에 목이 쉬지 않으며,
굳게 머물러 겁내지 않는 지혜에 힘입어 정신이 헷갈리지 않고,
보살은 대중 속에 있어도 사자왕과 같은 까닭에 두려움이 없으며,
모든 번뇌를 여읜 까닭으로 높고 거만하지 않고.
뜻이 없는 것은 설하지 않고 법의 모양을 통달한 까닭에 뜻을 구족하며,
글과 논(論)과 문자와 세상의 지혜를 잘 아는 까닭에 맛을 구족하고,
무량 겁 이래로 교묘하고 편안한 말을 익힌 까닭으로 서툴고 껄끄럽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설법을 사계절 수순하여 봄에는 봄과 같은 설법을 하고, 가을과 겨울도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앞에 말할 것을 중간이나 끝에 말하지 않고, 마땅히 끝에 말할 것을 앞이나 중간에 말하지 않으며, 마땅히 중간에 말할 것을 앞이나 끝에 말하지 않으니, 때를 잘 아는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얻은 변재로 중생을 기쁘게 하니,
말하자면 항상 웃는 얼굴로 고운 말을 하며 일찍이 찡그리지 않고,
뱉은 말에는 뜻이 있어 참되게 부합하며,
말한 것은 결정적이어서 남을 속이거나 업신여기지 않으며,
갖가지 요설(樂說)로 부드럽게 말하며 중생을 기쁘게 하여 준다.
또한 안색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남으로 하여금 정이 들어 따르게 하며 뜻에 따라 말하면 듣는 자가 깨달아 알며 법의 모양을 일컬어 말하며 이익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평등하게 설하여 마음에 편당(偏黨)이 없으며, 결정하여 말함에 허망한 말이 없으며, 가지가지 요설로 중생의 근성을 따라 설하여 기쁨을 얻게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큰 위덕을 이루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그릇[器]이 아니면 듣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그때 승천왕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그 마음이 평등하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그릇이 아닌 자를 위하여 설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성품이 스스로 평등하여 그릇임을 보지 않고 그릇이 아님을 보지 않으며 설하는 자와 설하는 것도 보지 않으나, 중생은 허망하게 설하고 설하지 않음을 본다.
무슨 까닭인가? 반야바라밀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相)의 분별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모든 것에 두루 차 있느니라.
중생도 그러하여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성문ㆍ벽지불ㆍ보살 및 부처님도 이와 같아,
이름[名字]이 없는 법이지만 임시로 이름을 빌려 세운 것[假立]을 중생이라 말하고 이것을 반야라고 말하며,
설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고, 설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며, 듣는 자가 있다고 말하나, 제일의(第一義)에는 같은 하나의 모양이다.
말하자면 모양이 없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위덕이 중한 까닭에 그릇이 아니면 듣지 못하게 되느니라.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그릇이 아닌 중생을 위하여 설하지 않고 외도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으며, 존중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고 바르게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느니라.
법을 구하여 무역(貿易)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고 이익[利養]을 탐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으며, 질투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고 눈이 어둡고 귀 먹고 말 못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마음에 인색함이 없고 깊은 법을 숨기는 것도 아니며 중생에게 대해 대자비가 없음도 아니고 중생을 버리지도 않지만 중생은 지난 세상의 선근으로 여래를 뵙고 정법을 듣는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본래 설하시는 마음에 이것과 저것이 없지만, 번뇌[障]가 두터운 자가 비록 그 가까이 있으나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설법을 듣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바른 믿음을 갖추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설법하니, 근성이 완전하게 익어야 법의 그릇이 될 수 있다.
과거 부처님께 일찍이 선근을 심어서 마음에 아첨하거나 비뚤어짐이 없고, 위의가 정돈[齊整]되어 명리를 구하지 않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며, 근성이 날카로운 사람은 말과 글의 뜻을 알며 법을 위하여 정진하여 부처님의 뜻을 어기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이와 같은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법사가 되어 교묘하게 설법[善巧]한다.
무엇을 교묘히 설법한다고 하는가?
부처님의 법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말하나 부처님의 법을 끝내 볼 수 없고,
바라밀을 말하나 바라밀을 끝내 얻을 수 없으며,
보리를 말하나 말한 보리를 끝내 얻을 수 없고,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하나 말한 번뇌를 끝내 얻을 수 없으며,
열반을 위하여 말하나 말한 열반을 끝내 얻을 수 없고,
수다원향(須陀洹向)ㆍ수다원과(須陀洹果)에서부터 아라한향(阿羅漢向)ㆍ아라한과(阿羅漢果)를 위하여 말하나 4과(果)와 4향(向)를 끝내 얻을 수 없으며,
벽지불과(僻支佛果)를 위하여 말하나 벽지불과를 끝내 얻을 수 없고,
‘나’라는 견해를 끊어 없애기 위하여 말하나 ‘나’라는 견해를 끝내 얻을 수 없으며,
업보가 있다고 말하나 말한 업보를 끝내 얻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름으로 얻는 것은 진실한 법이 아니니, 법은 이름이 아니고 말의 경계도 아니며, 법은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름은 법이 아니고 법은 이름이 아니되 다만 세상의 진리로 허망하게 이름을 빌려서 설하는 것뿐이니라.
이름이 없는 법을 이름으로 설하나 이름은 바로 공한 것이다.
공한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제일의(第一義)가 아니고 제일의가 아닌 것은 곧 이 허망한 범부의 법인 것이니라.
대왕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교묘한[善巧] 설법이라고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 무애변재를 얻어 중생의 근성에 따라 이러한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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