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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한국기독교 역사
제1장 한국기독교 전래
1. 천주교의 한국전래
1) 임진왜란과 천주교
한국이 최초로 천주교와 접촉한 것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6세기 중엽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수입해온 신무기에 의해 강력한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내적 불만의 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독실한 불교신자인 가토 기요마사 장군이 이끄는 22,800명과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끼나가 장군이 이끄는 18,300명이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들은 조선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의 민초들은 의병을 조직하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여 일본군을 반격하였다.
할 수 없이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경상도 울산에서부터 웅천에 이르는 지역에 방어진을 치고 조선의 항복을 기다렸다. 이 무렵 웅천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장군 부대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 신부를 초청하였다. 그는 일본인 수사 에이온(F.Eion)을 대동하고 1594년 웅천에 상륙하였다.
전쟁에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서 다시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세스페데스 신부는 열심히 미사를 집례하면서 아울러 조선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다. 감정이 좋은 분위기가 아니어서 조선인들은 그의 선교에 대해 냉담하였다. 그러나 전쟁 미망인들과 고아들은 상당히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때 불교 신자였던 가토 장군이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장군에 대해 음해하는 보고서가 도요토미에게 알려져 세스페데스 선교사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8년 도요토미가 갑자기 사망하자 7년이라는 긴 전쟁이 종결되고 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은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고 2천여명이 영세를 받았으며, 조선인들의 신앙심에 놀란 천주교 선교사들이 더 열심히 전도활동을 편 결과 7천여 명이 또다시 영세를 받았다. 그후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군이 정권을 잡자 철저하게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였는데, 이때 조선인 포로들도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일본인과 함께 규슈 남단 시마바라 반도와 나가사키에서 처형을 당했다.
2)천주교회 창설과 초기박해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우리나라는 중국을 자주 왕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역 서학서와 서구과학의 새로운 학문들이 국내에 유입되었다. 이 일로 서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학파가 조성되었다. 서학이 조선에 유입된 경로는 17세기 초 조선과 중국을 정기적으로 오고가는 외교사절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때쯤 천주학을 연구했던 이 벽(李 蘗)은 그의 절친한 친구 이승훈(李承薰)의 부친 이동욱을 따라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자네가 북경을 가는 것은 참된교회를 알리라고 천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참 성인들의 교회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님을 공경하는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이승훈은 정기 외교사절이었던 부연사행의 일원이 되어 1783년 북경을 향해 떠났다. 그는 1784년 3월에 천주교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그라몽(J.J.de Grammont)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귀국하였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의 첫 출발이 되었다. 이승훈은 귀국 길에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가지고 와서 이 벽에게 넘겨 주었다. 이 벽은 너무 기뻐서 그의 절친한 친구 정약종(丁若鐘/정약용(丁若鏞)형제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며 참된 도(道)다.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들로 하여금 세계를 구원시키고 죄를 속하는 은혜에 참여시키고자 하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니 우리들은 그의 부르심에 귀를 막을 수가 없다. 모름지기 기독교를 널리펴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 이 벽(李 蘗)과 권일신(權日新)은 곧바로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여기에 뜻을 같이한 신자들이 서울 명례동(현,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여 미사(예배)를 드렸다. 이 일이 발각되자 김범우는 관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후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의 열기는 식지 않고 계속 이승훈의 지도를 받으면서 새 신도들이 생겨났으며, 이들 중에서 전라도 진산(현 충청남도 진산)출신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앙을 접하고 고향 전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윤지충은 모친의 위폐를 소각하였다. 이것이 관가에 알려지자 그는 곧 전라감사가 머물고 있는 전주로 압송되어 “국왕에게 반역했다”는 죄목으로 1791년 전주 풍남문 밖 단두대에서 순교하였다.
사건이 한국에서는 첫 번째 순교의 역사로 남아있다. 그후 천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신유박해(辛酉迫害)를 만나고 1839년에는 을해박해(乙亥迫害)를 만났다. 박해 속에서도 신자는 계속 증가하여 1만 여명이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충청도 합덕 출신 김대건(金大建)은 중국 천주교의 혐력을 얻어 마카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도 역시 184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새남터(현, 용산역 근방)에서 장엄한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의 일생은 짧았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는 싹이 트고 꽃을 피워 암흑 속에서 방황하는 백성을 구원하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 신도들은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으며,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기까지 근 1백 여년간 숱한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던 이들의 피가 헛되지 않아 선교의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최초로 김범우(金範禹)의 집터 위에 현 면동성당을 신축하기에 이르렀다.
2. 만주에서의 성경출판과 선교사업
1)구츨라프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사람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네델란드 선교회 소속 구츨라프(K. F. A. Gutzlaff)였다. 그는 1827년 네덜란드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쟈바(Java)와 스마트라(Smartra)섬을 위한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후에 그는 타일랜드(Thailand)로 갔다가 1831년 마카오로 선교지를 옮겨 자신의 소원인 중국인 상대로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구츨라프 목사는 배를 타고 해안을 순회하는 선교여행을 좋아하였다. 그는 1831년에 중국 동해안 전역을 항행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일이 있었거니와 1832년에는 그 방향을 한국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백령도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남하하여 21일에는 군산만에 도달하였다.
그는 배가 군산만 북편의 창선도에 정박하자 곧 상륙하여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리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교사인 모방(Piere Philibert Maubant,)신부보다 4년 앞서 구츨라프 목사는 한국에 들어왔다. 배는 25일에는 홍주 고대도 안항으로 항행하였다.
구츨라프 목사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고 병을 고쳐줌으로써 전도에 착수하였고 또한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영수를 통하여 국왕 순조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헌상하였다. 구츨라프 목사는 홍주목사의 서생으로 있는 양씨(Yang Chich)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한글 성경 번역의 최초의 사실로서 실로 한국 성서 번역사상 특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구츨라프 목사는 주민들에게 감자 종자를 주고 그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 호감을 샀거니와, 복음 전달하는 사명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구츨라프 목사는 귀로에 올라 한국 땅이 안계에서 사라질 그때까지,'예수 기독교'라고 쓴 깃발이 휘날리는 로드 암헐스트(Lord Amherst)호의 돛대 아래 갑판 위에 꿇어 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계속하였다.
"나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반드시 열매 맺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것을 믿음으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한국 국왕이 성경을 받아보게 될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이미 성경을 받고 있으니 저들을 통하여 복음이 한국 온 땅에 펴짐으로 광명의 아침이 찾아 오도록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 구츨라프 목사의 한국 방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과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지만, 그의 한국 선교를 위한 개척정신은 만강의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어 마땅하다 하겠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토마스 선교사는 다시 한국에 복음을 전할 뜻을 갖고 여러 경로를 찾던 중 지푸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만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A. Williamson)으로부터 한국에 전달할 성경을 기증받아 승선한 후 1866년 8월 9일에 지푸를 떠났다.
망망한 황해를 거슬러 대동강 입구에 있는 여러 포구를 지나면서 성경을 배포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그를 환영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런데 제너럴 셔면호가 1866년 9월 2일 대동강의 양각도(羊角島)에서 그만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았다. 평양성을 지키던 병사들은 곧 상부에 보고했고 지체없이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화공을 퍼부었다.
“이를 본 토마스 목사는 자기가 복음을 가지고 이 백성에게 왔으나 형편이 좋았으면 더욱 좋겠지만 형편이 좋지 못하여도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업을 성취하실 터이니 불가불 가지고 온 목적을 끝까지 관철 하여야 겠다는 굳은 의지가 그 마음 가운데 힘있게 뻗치어 마침내는 포연탄우(砲煙彈雨)의 위험을 무릎쓰고 한 손에는 백기를 잡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어 강변에 있는 군중을 향하여 성경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을 지키던 군병들이 이들을 모두 체포 살해 함으로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9월 2일 27세의 나이로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후일 그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평양의 대동강가에서 피를 흘리며 순교 하였다.
2)로스, 매킨타이어와 한국인 개종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1862년 중국 선교를 개시했고 1872년에는 매킨타이어(J. McIntyre) 에 이어 로스(J. Ross)선교사가 파송되어 왔다. 이들은 윌리암슨의 지도를 받으면서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 선교기지를 마련하고 토마스 선교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1874년 10월 로스는 영구를 출발하여 고려문[(高麗門, 동부 공정정책에 의해 홍위병들이 헐어 버렸으며, 1995년 그 자리에 ‘변문진’(邊門鎭)이란 비석을 세웠음)]여행에 나섰다. 고려문은 조선과 중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터로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곳이었다. 로스는 한족에게 조선인 어학교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뜻하지 않게 의주 청년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어, 그와 함께 영구에서 봉천으로 이동하여 한글 성경 번역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로스는 곧 봉천으로 이동하여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이응찬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877년에 한국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를 상해에서 발간 할 수 있었다. 이 무렵부터 로스는 한글성경 번역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응찬과 한국인 한 두 명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의주 청년 서상륜(徐相倫)과 서경조(徐景祚)형제가 홍삼 장사차 영구에 왔을 때 서상륜이 열병에 걸려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그때 친구들의 도움으로 영구 미션병원에 입원하여 헌터(J. M. Hunter)의사의 진료를 받고 병이 완쾌되자 로스를 소개 받았다. 이때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고 만주에서 새로운 신앙의 공동체가 만들어 질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879년 한국교회사에 길이 기억될 해이다. 이 해에 백홍준(白鴻俊)과 이응찬을 비롯하여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의주를 왕래하면서 절친한 친구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백홍준은 중국 심양에서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발간되자 수입하는 폐지(廢紙)속에 복음서를 숨겨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의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후 서상륜 형제도 쪽복음을 가지고 평안도 의주, 철산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눈치 챈 관가에서 이들을 체포하려고 하자 서상륜 형제는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松川)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가 주도하여 1884년 첫 예배를 드린 ‘소래교회“가 한국 최초의 자생적 개신교 교회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여기에 백홍준은 1883년 로스 역 성경책 수십권을 등에 지고 평안도 의주를 비롯하여 위원, 강계, 구성 등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제2장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1. 선교사의 입국과 초기선교활동
미국 남 장로교의 한국선교는 언더우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언더우드는 성공적으로 한국선교에 임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잠시 귀국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1891년 9월, 미국 시카고 소재 멕코믹 신학교에서 때마침 신학생 선교대회가 열리고 있어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강연을 들은 남 장로교 소속 신학생 테이트(L. B. Tate)가 한국선교사로 지원하게 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테네시 주 내쉬빌(Nashville)에서 신학생 선교대회가 열렸으며, 이때도 강사는 언더우드였다. 그리고 벤더빌트 대학에 유학중이던 한국인 윤치호도 이 집회의 연사로 초청을 받고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회에서 테이트는 물론 리치먼드 유니온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레이놀즈(W. D. Reynolds), 존슨(C. Johnson)도 큰 감동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특히 열정적이었던 테이트는 즉시 미국 남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지원하였다. 존슨과 레이놀즈는 방과 후 기숙사로 돌아와서 같은 반의 전킨(W. M. Junkin)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고 전킨도 한국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미 한국 선교사로 지원서를 냈던 테이트에게는 검은 그림자가 앞을 가리고 있었다.“한국은 잘 모르는 나라이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만한 재정이 없기 때문에 보낼 수 없습니다.”테이트가 이 사실을 다른 신학들에게 알리자 이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미국 남 장로교 구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한국 선교의 긴박성을 알렸고 신학생들은 (선교잡지)에 “왜 우리가 한국 선교를 원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미국 남 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공문이 날아들었다.
2. 미국 남 장로교 7인 선교사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유보하고 있던 미국 남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언더우드의 형인 언더우드 장로가 일부 재정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또 언더우드가 가는 곳마다 한국 선교를 역설하자 여기저기서 선교기금이 모아졌다. 이때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지원서를 제출했던 전킨(W. M. Junkin), 전위렴)부부, 레이놀즈(W. D. Reynolds, 이눌서)부부, 테이트(L. B. Tate, 최의덕)와 그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테), 데이비스(Miss L. Davis)등 7인이 선발되어 1892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송별예배를 드리고 일본 요코하마 항을 거쳐 1892년 11월 3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잠시 서울 서대문 밖에 조그마한 주택을 마련하고 어학 훈련과 한국 문화 및 역사를 배웠다. 나라와 나라 간에 또 교단과 교단 간에 선교 구역의 중복을 피하기 위하여 제정된 1892년의 “교계예양협정(敎界禮讓協定)”에 의해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전라도 지방과 충청남도 서남부 일부 지방의 선교를 맡게 되었다.
1893년 2월에 호남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할당받은 한국의 남 장로교 선교부는 이눌서의 조사인 정해원을 그 해 6월에 전주에 파송하여 주택을 마련하게 하는 등 준비에 착수하였다. 같은 해 9월 전위렴과 최의덕 선교사가 전주선교부의 부지를 시찰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 6일간의 긴 여행 끝에 전주에 도착하였다.
선교부 부지와 선교사가 거처할 처소에 대해 보고하자 남 장로교 선교부는 전주선교부의 초대 선교사로 최의덕과 최마태 남매를 파송했고, 남매는 전주 외각의 은송리에 자리를 마련하고 첫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전킨 부부와 의사인 드루(Dr. A. D. Drew. 유대모)선교사가 군산선교부를 설치하고 군산 개복교회와 구암교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전킨은 김제 서남부 지방과 익산, 부안 지방을 맡아 사역에 임하였다. 불(W. F. Bull, 부위렴)선교사가 합세하면서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별히 충남의 서남부 지역인 장항, 서천, 부여, 보령 지역을 맡기도 하였다.
3. 전라도 선교부 설치
초기 7인의 선발대 가운데에서 조직적이며 분석적인 행정력이 있는 사람은 레이놀즈 목사였다. 그는 전라도 지방을 선교하기로 작정하고 전라도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였는데, 그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가옥으로 인구조사를 하는데 한 가옥 당 5명으로 계산한다. 충청도는 244,080 가옥에 인구는 약1,220,400명이다.
전라도는 290,550 가옥에 1,452,750명이므로, 총계는 2,673,150명이다. 이 지역은 전적으로 처녀지로서 개신교 선교사가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 활동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방문하지도 않았다. 서남쪽 해안은 아름다운 섬으로 둘러 있으며 인구가 아주 많다. 전라도 해안으로부터 60마일 떨어진 곳에 큰 섬 제주도가 있는데, 거기에는 3개의 성곽이 있는 도시와 마을이 있어서 많은 과일과, 곡물과 가축을 생산한다.
그리하여 ”한국이 동양의 이탈리아라고 한다면 제주도는 시실리아 다“ 전라도 서쪽 해안에 목포는 좋은 항구도시이며 무역이 성행한다. 이곳이 머지않아 개항될 전망이 있으며, 이로써 우리 선교회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다. 기후는 캐롤리나와 매우 흡사하여 겨울에도 혹독하게 춥지 않고 여름에도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쾌적하다.”
1894년 당시만 하더라도 동학이 창궐함에 따라 서울에서 한국에 대한 선교를 계획 중이었으나 문제는 광활한 지역에 선교사 인력이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레이놀즈 목사는 드루 의사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맡은 두 지역의 인구는 3백만 명인데 우리에게는 3명의 안수 받은 설교자뿐이다.
즉 설교자 한 사람에게 백만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개신교 선교회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그리하여 남 장로교 선교회는 레이놀즈 목사와 드루 의사를 전라도 전역에 대한 사전 탐사여행을 맡겼다. 이들 두 사람의 여행은 레이놀즈 목사의 여행일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1)레이놀즈의 전라도 답사여행
레이놀즈는 어학선생으로 임시 고용한 서(Saw)선생과 식사 및 심부름을 맡은 옥선(소년)을 대동하고 4 사람이 전라도 여행에 나섰다. 이들은 1894년 3월 27일 서울을 떠나서 5월 12일 서울에 돌아오는 장기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기간동안에 지나온 지방은 서울-제물포-군창(산)-임피-전주-대장촌-쌍강-선돌-연주원-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무안-목포-우수영-완도-녹동-흥양-벌교-순천-좌수영-남해-부산-제물포-서울 이었다. 이러한 경로를 밟으면서 진흙길에서 허우적 거리기도 하고, 배가 고장나서 기다리기도 하고, 동학군들과 함께 다니기도 하였으며, 푸대접을 받기도 하였고 때로는 융숭한 환대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이놀즈는 전라도 선교의 거점 지역으로서 군산, 전주, 목포, 우수영과 순천을 선발하여 선교회에 보고하였고, 이렇게 5개 도시를 추천하게 된 배경에 대해선 여행에 동행하였던 드루 의사의 보고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인구의 집중도, 둘째는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 셋째는 바다를 통한 접근성, 넷째는 내륙과의 연계성, 후보지 토지 구입의 가능성, 다섯째는 이상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으로서 전주, 군산, 목포와 좌수영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전라도 답사 여행에서 선교부 후보지로 선발한 곳은 군산, 전주, 목포, 좌수영과 순천이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좌수영을 제외한 4곳에는 선교부가 세워졌으며, 좌수영을 대신하여 광주에 선교부가 세워짐으로써 레이놀즈와 드루가 전라도에 5곳의 선교부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은 성취한 셈이다.
2)전주 선교부 개설
남 장로교 선교회 소속으로 1892년 11월에 한국에 도착한 “7인의 선발대” 가운데에서 레이놀즈만이 어학실력이 가장 좋았다. 그는 1892년 12월에 북 장로교 선교회의 마펫(Samuel A. Moffett)과 공주와 청주까지 전라도 여행에 나섰다. 1893년 1월 “장로교 합동 공의회”가 결성된 이후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어학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어의 진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자, 선교회는 “어학위원회”를 결성하여 어학공부의 가장 빠른 진전을 꾀하는 한편 한국어 선생들을 관리하였다. 어학위원회는 “전도위원회”와 손을 잡고 1893년 봄과 가을에 모두 6차례의 순회 전도여행을 계획하였다.
그렇지만 1893년에는 우리의 친구 정 서방이 우리가 가르쳐 준 사항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중략) 가장 주된 일은 장래의 바람직한 장소에 현지인의 집을 구입할 수 있도록 확답을 얻는 일이다....정 서방은 서울에 있는 집을 팔아서 남쪽으로 가서 자신의 사업을 하려고 한다.... 그는 선교와 연결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가장 크게 돕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말하듯이 레이놀즈는 1893년 6월 11일 어학선생 정해원(Cheng Hai Won)을 전주로 보내어 두 가지 일을 마무리 짓게 하였다. 하나는 장차 선교사들이 살게 될 집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사들이 도착할 수 있도록 사전의 정리 작업이었다.
1893년 9월에는 전킨과 테이트가 전주로 내려가서 2주간 조용하게 머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배드리면서 선교의 가능성을 살피기도 하였으며, 11월에는 테이트가 혼자서 내려가서 선교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살피기도 하였다. 그리고 1894년 2월에 서울에서 제2회 선교회 연례대회를 개최하면서 전주 선교부 개설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이번 모임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테이트씨와 그의 여동생에게 전라도의 수도인 전주에서 금년 봄의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가을에는 선교부를 개설하고 그곳에 영속적으로 사는 것이다.” 라고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테이트 남매는 전주에서 내려가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선교의 가능성을 알아보기도 하였다.
한편 동학혁명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선교사들은 4월에 전주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테이트에게 이미 구입한 집주변의 토지를 추가 구입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구입 금액중 일부인 미화25달러를 지급하고서 매매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5월에 들어서면서 전주 인근까지 동학혁명군이 진군함으로써 미국 공사관의 명령으로 선교사들이 모두 서울로 소환되었으며 1895년 봄에는 내려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들이 보낸 보고서에는 “이제 전주와 군산에서 토지를 구입하고, 한국 집을 개축하고, 집을 신축하는 등에 대한 문제는 전혀 없다. 현장은 열려있으며 장애는 제거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돈과 사람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한국인들의 마음이 열려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1895년 봄(5월)에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전주를 찾아가서 2달간 예전에 사두었던 집에 있으면서 예배를 드리다 여름이 되어 서울로 잠시 돌아와, 가을에 테이트는 거의 모든시간을 전주에서 지냈으며,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교사들은 모두 서울로 철수하였다. 단발령 이후 지방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과 반-외세 감정이 고조되자 지방으로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은 잠정적으로 폐쇄하였다.
그 후 1896년 1월부터 민심이 풀려서 전킨과 드루는 군산으로, 테이트 남매는 전주로 향했으며, 레이놀즈와 벨은 목포 토지 구입을 위하여 2월 11일 아관파천이 있던 날 목포로 향하였다. 그리고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친일세력에 대한 정부와 민간차원의 단죄가 가해짐으로써 민심이 풀리자 3월부터는 전주와 군산에서 장기 체류를 위한 땅 구입과 가옥 건축에 박차를 가하였다. 전킨은 드루와 함께 군산에 머물면서 전주로 향하는 테이트 남매를 배웅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주 선교부는 1893년에 집을 구입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1895년부터 테이트 남매가 거주하면서 선교에 전념하였으며, 1896년에는 해리슨이 가세하고, 1897년에 여의사 잉골드가 도착하여 전주에 체류함으로써 전주 선교는 일대 진전을 보게 되었다.
3)군산 선교부 개설
1893년 1월 “장로교 합동 공의회”가 결성된 이후로 남 장로교 선교사들은 1894년 2월에 서울에서 제2회 선교회 연례대회를 개최하면서 전주 선교부 개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대하여 말한 다음에 군산에 대하여는 “...드루와 그의 부인은 길이 열리는 대로 남쪽에 상주하게 될 것이지만, 다음 봄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산 선교부 개설에 가장 큰 과너심을 가진 사람은 전킨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드루였다. 전킨과 드루는 1895년 가을에 군산에 다녀와서 그곳의 정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이 두 사람은 군산이 입지적 호조건을 갖춘 곳으로서 ㅂ재가 정기적으로 입항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또한 전주로 통하여 초입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며, 지방관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같이 호의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이렇게 1895년 가을에 군산에서 보낸 전킨과 드루는 1895년 12월 9일자로 군산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편지를 보냈으며, 의사 드루는 자신과 전킨의 가족은 선교회에서 자신들의 뜻을 따라만 준다면 오는 봄부터 이곳에서 영원히 살겠노라고 하였다. 또한 드루는 이 지역에서의 사역은 희망으로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이해 주며 , 군창의 지방관도 의사 드루에게 감사를 표했다. 전킨은 군창의 외곽 언덕의 땅을 구입했으며 선교사들은 이곳에 집과 병원을 짓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렇게 가족을 데리고 군산으로 가기를 희망하던 전키과 드루는 1896년 3월28일에 서울을 떠나서 4월 5일에 군산에 도착하였으며 자신들의 집을 지을 때 까지는 한국인의 초가집을 빌려 임시로 기거했다.
드루는 군산에 가족이 이사 온지 불과 몇일도 지나지 않은 4월 17일자 보고서에서 “1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윤치호씨의 덕으로 언덕 위의 새로운 선교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라고 보고하였다.
집터를 마련한 것보다 더욱 즐거운 것은 “이곳에 교회의 핵이 될만한 일단의 추종자 집단이 있으며 또한 이 가운데 3명은 세례를 요구했으며 요리문답 과정의 공부를 마친 상태이다. 우리는 매 주일 오후에 만난다.”라고 말하면서 한국인들의 개종의 동기는 순수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손에 부채를 쥐고서”긴 시험의 기간을 거친 다음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정리되어 가는 군산 선교부에는 1896년 가을부터 데이비스 양이 가세함으로써 더욱더 활기를 띠고서 여성과 아동 선교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초기 군산 선교부는 뿌리를 굳건하게 내리게 되었다.
4)나주 선교부 설치
나주선교는 벨 목사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와 동시에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동학혁명이 결국 청일전쟁으로 이어짐으로써 남쪽 지방은 동학군의 잔당을 추적하는 소규모 소탕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5년 9월 평양에서 청국과 일본은 일대 격전을 벌린 결과,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이어서 친일 김홍집 제3차 내각이 수립되고 각종 개혁정책이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개혁파(선교사들은 찬탈내각이라고 하였다)는 춘생문 사건을 수습한 이래로 힘을 얻어 1895년 12월 31일을 기하여 단발령을 발표하였다.
단발령에 대한 가장 큰 반대는 나주에서 일어났다. 나주의 유생들은 단발은 곧바로 국모를 시해한 일본에 협력하는 것으로 간주하고서 지방과인 목사(牧使)를 위협하였다.
그러자 나주 목사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광주로 피신하였다. 이러한 지방관에 대한 위협이 전국적으로 이어지자, 아관파천이후 정부는 단발령에 대한 유예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전국적인 반발은 좀처럼 가라않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은 친러 세력에 휩싸여 갑오개혁 후속조치를 발표하였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전국을 23부(府)로 다스리던 행정조직을 13도(道)제도로 개혁하면서 전라남도의 수도를 광주로 확정시킨 일이다.
고종 건양 원년(1896년) 8월 4일자 칙령 제36조 제1호에 의하여 현재의 전라남도란 행정구역이 정하여졌으며, 도청 소재지를 광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 초대 관찰사에는 윤웅렬을 8월 26일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8월 27일에는 전라남도 재판소를 나주에서 광주로 옮기고 윤웅렬이 판사로 겸직하였다. 더 나아가서 9월 17일자 학령부 제5호에 의하여 지방공립소학교 위치를 광주로 정하고, 1897년 3월 23일에는 칙령 제17호에 의하여 광주에 2등 우체사를 세우고 12월 10일을 기하여 나주 우체사를 광주로 이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겪으면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896년 11월 3일에서 6일까지 군산에서 선교회 연례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전라도의 수도와 군산에 선교부를 개설하였으며, 그 넘어 지방으로 나아갈 계획을 수립중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넘어 지방”이란 전라남도를 말한다. 그렇지만 전라남도 선교를 위한 노력은 1896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전라북도에는 전주선교부와 군산선교부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전남지방에도 선교부 설치가 필요했다. 1896년의 미국 남장로회 연례회의는 전남 나주를 선택하였다. 곧 벨(E. Bell, 한국명 배우지)목사와 이눌서(Rev. W. D. Reynolds)선교사가 나주를 방문하였다. 나주는 전남 내륙지방에 위치한 행정의 중심지이므로 전남지방에 복음을 전할 선교센터로서 매우 적합한 지역이어서 임시 숙소로 사용키 위하여 초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수리하였다.
그러나 나주성 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철저한 유교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가 들어온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만일 나주를 떠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배유지 선교사는 평양과 전주에 선교부를 개설할 때 지역 주민들의 심한 반발이 있었음에도 곧 수그러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유지 선교사의 판단은 빗나가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더욱 강력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할 수 없이 가옥과 토지를 되팔고, 당시 개항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목포로 선교지를 옮겼다.
그러나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면서도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에 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으며,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났다.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 유생들의 반발로 그곳에 선교부를 설치하지 못하고 추방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1908년 서문정교회(현, 나주교회)를 설립하는 기적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던 것이다. 나주는 목사(牧使)가 있는 자역으로서 나주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전남지방의 내륙은 쉽게 복음이 전파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주지역 주민들의 반발은 의외로 완강하였다.
5) 목포 선교부 설치
목포에 최초로 발을 내딛었던 선교사는 이눌서와 유대모였다. 이미 이들은 선교여행을 위해서 1894년 3월 27일 배편으로 경기도 강화를 출발하여 인천을 경유하여 군산, 전주, 김제, 고창, 영광, 함평, 무안을 지나 1894년 4월 18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목포에 도착한 이들은 뜻하지 않게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들었다는 청년을 만나게 되었고, 선교여행 중 목포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졌던 두 선교사는 장차 목포가 좋은 선교기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곳에서 활동하려고 했으나 유대모 선교사는 1895년 군산에 선교부가 개설되자 군산에 안착하게 되었다.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장차 목포가 개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배유지, 이눌서 선교사는 1896년 2월 11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선교부 부지로 좋은 지역은 일본인들이 이미 다 매입해서 할 수 없이 외곽지대의 야산을 51달러에 구입하여 배유지 선교사는 1897년 3월 목포 선교부를 설치함과 동시에 목포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목포에 들어와 布敎運動을 개시하기는 꽤 오랜 시기에 속한다. 현 무안군 이노면에는 천주교회가 창립되어 明治 31년 봄에 시작되었으며, 同年 가을에 開港이 되었는데 약 반 년이 앞섰다. 미국 장로교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배유지(Eugene Bell)는 조선인 邊昌潤을 파견하여 서울에서 목포에 오게 됐으며, 처음으로 布敎에 종사하게 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에 온 이래에 그 머나먼 목포에서 모든 고난을 인내하면서 오직 구령사업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메이지(明治) 31년 가을에 만복동(현재 양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布敎所, 현재 유서백 저택 겸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였다.“
목포에 목포교회가 설립된 것은 194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한“야소교장로회연감”에 의하면 메이지 30년(1897년) 3월이다. 목포교회는 1897년에 설립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의사이면서 목사인 오원(Dr. C. C. Owen, 吳元)선교사 부부가 1898년 11월에 목포로 합류하자 목포진료소를 개소하고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특별히 오원 선교사는 진료를 하면서도 주로 도서지방과 해안지방에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폈으며, 배유지 선교사는 내륙지방을 맡아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목포선교부는 그후 스트레퍼(Miss F. Straeffer, 徐愛溫), 멕쿠첸(L. O. McCutchen, 馬路德), 프레스톤(J. P. Preston, 邊要韓), 맥컬리(H. D. McCallie, 孟顯理), 커밍(D. J. Cumming, 金雅객)부부, 하퍼(J. Hopper, 趙夏橎)부부, 맥머피(Miss A. McMurphy, 明愛多), 하퍼(Miss M. Hopper, 趙瑪具禮)등이 참가하여 무안, 영암, 해남, 진도, 강진, 장흥, 신안, 함평, 영광, 나주지방까지 맡아 교회를 설립하였다.
제3장 광주 선교부 설치와 광주교회 시작
1. 광주 선교부 설치
배유지 선교사는 유생들의 반발로 나주에 선교부를 설립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1896년 행정구역 분할로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양분되었다. 전라북도의 행정수도는 전주가 되었으며, 전라남도의 행정수도는 광주가 되었다. 1904년 2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연례회가 목포선교부에서 모였다. 이때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전라남도 지방의 중심지인 광주에 선교부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부터 광주선교부 설립준비에 들어갔다.
이 무렵인 1904년에 러일전쟁이 한국 땅에서 발발하여 1년간 계속되다가 일본의 완전 승리로 끝나자 한국인들은 나라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일로 호남선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일정한 정책 없이 시행해 오던 사경회에 대한 계획을 일관성 있게 수립하였고,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교회를 중심으로 선교부가 주관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기간은 일주일에서 10일간씩 운영되었으며, 강사는 주로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서 인도하였으며, 여기에 여성반은 여 선교사나 전도부인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또한 호남에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었다.
전북지방에는 이미 전주지방에서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했던 김필수와 최중진 등이 있고, 전남지방에는 배유지 선교사의 조사였던 윤식명이 있었다. 광주 주재 선교사들만으로 전남의 내륙지방과 전남의 동북부 지방을 다 관리한다는 것은 교통수단을 비롯해서 거리상 무리였기 때문에 목포 주재 선교사 일부를 광주선교부로부터 전입케 하여 광주선교부의 선교사역을 확장함으로써 광주선교부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광주에 스테이션회가 설립되기 전에는 이 지방이 목포 스테이션에 속한 동북부 지방인데 교회 있는 데를 가려면 먼 데는 삼사일 길이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이 지방을 순회하려면 몇 주일간 조선집에서 고생이 막심하므로 중앙에 스테이션회를 설립하는 것이 편리한 줄 알고 광주에 스테이션회를 설립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선교의 열정이 불 붙었던 미국 남 장로교 목포 선교부 주재 선교사들은 목포에서 대사경회를 열었다. 이때 사경회에 참가한 인원은 전주에서 25명, 군산에서 21명, 목포에서 29명, 모두 75명이었다. 사경회가 끝날 무렵인 1904년 2월 선교회에서는 선교부 확장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때 교환된 내용의 결론은 전남지방의 중심지인 광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그 임무를 목포선교부의 배유지, 오원, 변요한 선교사에게 위임하기로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새로운 선교전략이 수립되어 전남지방의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광주 선교부 개설을 맡았던 세 명의 선교사들은 1904년 3월 18일 내륙지방의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선교여행을 나섰다. 이들은 나주지방과 광주지방을 둘러보고,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나말교회(현, 장성 보생교회)와 영신교회를 찾아갔다. 이들이 두 교회를 방문한 목적은 핍박 때문이었다. 변요한 선교사의 보고서를 살펴보면 핍박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지난주일 밤에 하나말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깡패들이 습격하였다. 교인들을 무차별하게 두들겨 패기도 하였으며, 종교서적을 찢고 교인들의 집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교인들은 산으로 피신해 숨었다. 우리들은 이 보고를 듣고 두 차례나 지방 관리를 찾아갔으나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지방 현감에게 찾아가서 이 사건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선교사들은 하나말교회 사건을 접하고 난 후, 하루속히 목포보다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나 나주지방에 선교부가 개설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이미 광주는 전라남도 행정수도가 들어설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선교사들은 나주보다는 광주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1901년 뜻하지 않게 배유지 선교사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배유지 선교사는 부인을 양화진에 묻고 두 자녀를 안고 일시 귀국하였다. 1904년 미국에서 재혼한 배유지 선교사는 둘째 부인과 함께 8월에 다시 목포로 와서 광주선교부 개설 임무를 차질 없이 감당하였다. 귀국하자마자 광주선교부가 개설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보고받은 배우지 선교사는 목포교회 김윤수 집사를 광주로 이사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주택을 건축하도록 지시하였다. 광주에 선교사가 거처할 주택들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자 이를 살펴보기 위해 배유지 선교사 부부도 광주를 방문했다.
김윤수 집사에게서 12월 중순이면 주택이 완공된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목포로 내려갔다가 배유지, 오원 선교사는 12월 10일경에 재차 자신들의 선교구역을 돌아보기 위해서 광주에 왔다. 김윤수 집사의 건축보고가 12월 15일이면 완공된다고 하자 선교사들은 목포로 내려가 이삿짐을 꾸려 12월 19일 마침내 배유지, 오원 선교사 가족이 광주로 이사하였다.
“배유지 목사와 오원 목사 두 식구가 광주로 이사하기로 하고 먼저 부지를 사서 사랑 두 채를 짓고 1904년 12월 19일 두 집 식구가 목포에서 떠났습니다. 이때는 기차도 없고 광주로 가는 수로에 기선도 없고 다만 조선 작은 배로 가는 것뿐인데 두 식구가 이 배를 타고 갈 때에 새로 건축한 집에 평안히 이르기를 희망하였더니 의외로 풍랑을 만나 더러는 수질이 나서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 영산포에 하륙하여 교군을 타고 갈 때는 2일이나 고생하였는데, 지금은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습니다.”
목포 선교부를 떠난 배유지 선교사와 오원 선교사는 영산강의 기상이 좋지 않아 1904년 12월 20일에야 광주에 도착하였다. 당시 광주 선교부 위치는 행정구역상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였다. 그들은 임시 주택에 짐을 풀었다. 이미 지역 주민들은 양림리에 서양식 주택이 지어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곳에 왔었다. 이제 그 집에 살 선교사들이 이사 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이날은 더 많이 모여들었다. 두 선교사 가정이 이사 올 때 12상자나 되는 짐도 도착했기 때문에 짐을 날랐던 짐꾼들은 물론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호기심에 찬 모습으로 모여들었다.
2. 광주교회 시작
광주로 이사 온 두 선교사 가족과 김윤수 집사 가족, 협력자들 가족과 구경꾼들이 배유지 선교사 사택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광주교회의 첫 시작을 알리는 예배였으며 광주에 첫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는 동시에 탄생하였다.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광주교회의 시작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 예배는 1904년 눈 내리는 성탄절에 배유지 선교사의 임시주택에서 드려졌다. 식탁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고 의자는 침대 위에 쌓여져 있었다. 예배광고가 붙여지고 누가 올는지 모르지만 선교사들은 기대에 차서 기다렸다. 11시 경에 횐옷을 입고 좁은 길로 올라오는 긴 행렬의 한국인들을 보고 선교사들은 기쁘고 놀랐다. 결국 그들은 왔다. 여자와 남자들이 각각 다른 방에 들어오자 가운데 서있던 배유지 선교사는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간단한 출발에서 광주교회는 성장하게 되었으니 불과 6년 만에 500명을 헤아리는 교인들이 모이게 되었다.”
배유지 선교사 주택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광주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날은 성탄절이면서 주일이었다. 브라운(夫明光)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광주의 첫 교회를 “광주교회(Kwangju Church)"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말하는 ”광주교회“는 예컨대 오늘의 ”永樂敎會“처럼 고유명사적인 의미로 쓰인것이 아니었다. 광주 지역에 세워진 교회라는 보통명사적 의미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었다. 선교사들은 어느 지역에서 교회를 시작하면 그 지역명칭, 혹은 행정구역 명을 붙여 미국의 선교본부에 “목포교회”를 시작했다. 즉, “목포라는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는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고 보고하는 것이다. “광주교회”도 “광주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고 알린 것이었다.
당시 광주군 인구는 5,000명에서 8,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으며, 광주군에 전라남도 행정수도가 건설되었기에 해마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증가되었다. 그 후 인근에 있는 주민들은 호기심 때문에라도 광주교회로 몰려들었다.
“몇 주일이 못 되어 배유지 목사 사랑채가 좁아서 할 수 없이 광주 북문 안에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배유지 선교사 주택에서 출발했던 광주교회는 곧 교인이 점점 많아지고 더 이상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어 광주성 안에 예배당을 신축하려는 계획이 신속히 진행되었다.
광주교회에 사람들이 운집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구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배유지 선교사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이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배유지 선교사의 한 보고서에서 우리는 그것을 엿볼 수가 있다.
“지난해는 나 개인으로서는 한국에서 가장 바빴던 한 해였다. 지난해부터 광주에서 오원 선교사와 주택을 짓느라고 안간힘을 기울였다. 우리는 목포에서 광주로 옮겨와서 성탄절에 맞추어 정착 할 수 있었다. 지난 가을에 나는 목포와 광주에서 집을 짓는데 빼앗긴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도에 바쳤다. 새로운 주택에 안착한 후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미 배유지 선교사나 오원 선교사는 광주교회를 설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광주선교부가 출발하기 전부터 개인 전도를 시작하였으며, 이미 광주선교부가 출발하던 그 다음날부터 광주교회 성장에 정력을 쏟았다. 이러한 결과로 광주교회는 점점 교인이 많아지면서 1906년 6월에 북문 안에 새로운 교회를 준공하였다. 이것이 광주 최초의 예배당 건물로서 “북문안교회”라 불렀다.
“그때에 구경꾼이 많이 와서 구경도 하고 복음 말씀도 들음으로 몇 주일이 못 되어 그 사랑채가 좁아 예배 보는 사람이 용납지 못하여 북문 안에 한 기지를 사서 예배당을 갑절이나 늘리고 또 그 후에 더 늘리고 매주일에 4-5백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본즉 하나님의 권능이신 줄 알고 주께 영광을 돌리 나니라.”
참고자료 : 한국기독교 100년사, 제일교회 100년사, 양림교회 100년사,
제4장 운암교회 태동과 시대적 배경
1. 순국선열들의 신앙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한일합병(1910. 8. 29)이후 대한민국은 일본제국에 식민지(1910. 8. 29~1945. 8. 15)로 전략하여 36년의 노예생활과도 같은 억압통치를 받으며 민족의 수치를 감내해야만 했다.
〔한일합병 의의와 평가〕
한일합병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래부터 무효의 것이었다. 첫째,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게 마땅하다. 둘째, 이 한일합병조약이 한국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일합병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 무효임을 재확인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음은 신앙을 바탕으로 헌신적 생활습관에서 표출된 것뿐일 것이다. 지독한 36년 일제 치하에서 그들의 가장 비열한 행위는 ‘신사 참배’로 우상 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를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고 수많은 순교자와 옥중 성도를 배출하게 되었다.
주기철 목사(1897-1944, 경남 출생)는 1938년부터 6년간 감옥에서도 오직믿음으로 일제의 권력에 맞서 싸우다 혹독한 고문으로 결국 해방 1년 전인 1944년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1902-1950)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1926년 경남 성경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신학교 입학, 1939년에는 나환자들만 모인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1940년 여수 경찰서에 검속되어 6년간 모진 옥고를 치렀다.
1)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기독교계 : 양전백 이필주 김병조 최성모 신석구 유여대 이승훈(목사7명)
이명룡 박희도 이갑성 김창준 정춘수 신홍식 오화영 길선주(신도8명)
천도교계 : 홍기조 권병덕 손병희 권동진 양한묵 이종일 임예환 홍병기 나용환 박준승 오세창 이종훈 최 린 김완규 나인협(15명)
불교계 : 백용성 한용운(2명)
천주교계 : 최남선(1명)
2) 3·1운동 전개과정
1919. 3.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과 외국으로 독립만세가 퍼져 일제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대규모 민족 만세운동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난 운동이긴 하였지만 실상은 대성공을 거둔 운동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수는 한반도 전체에서 1.7%에 불과하였지만 33인중 16명이 기독교 목사 및 기독교 신자였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3.1만세운동이 일본경찰의 무자비한 총칼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간 이후 민족대표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해 4. 10일 상해에 모여 임시 정부안을 발의하였다. 우리선배 크리스천들은 단순히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되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조국 한반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하는 비전과 경륜을 품고 있었다.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 이 아니겠는가?
당시교회는 단순히 교인들을 길러내는 교회가 아니고 민족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교회였기에 믿음의 선배들은 불의 앞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아니었겠는가?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사랑과 겨레사랑, 예수사랑과 동포사랑을 한 가슴에 품고 자신들을 헌신하며 하나님나라건설에 매진한 결과 2015. 8.15일 광복7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은 선교한국으로 변하여 세계 170여 개국에 선교사 3만여 명을 파송하게 되어 세계최강의 나라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됨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이라 생각한다.
2. 독립이후 믿음의 선배들 신앙
독립 운동 세력들의 치열한 독립 운동과 더불어 연합국 세력의 승리로 가까스로 독립(1945. 8. 15)을 쟁취하였으나, 이후 들어온 미·소 양 세력은 한반도를 분할하여 한국에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통치하였으며 이는 결국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전쟁(1950.6.25∼1953.7.27)은 1950. 6. 25일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북한은 남침을 강행하게 된다. 전후에는 정치 경제가 모두 혼란에 빠졌다.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국토가 초토화되며 이산가족과 고아가 발생하는 등의 후유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1902-1950)는 1950년 9월 28일 여수 근교 미평 과수원에서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여 순교할 때까지 나환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만지고 치료해 주며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았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23세), 동신(18세)이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 사건으로 여수가 1주일간 인민 공화국 세상이 되었던 때인 10월 21일 폭도로 돌변한 동급생들의 총에 맞아 손 목사님보다 먼저 순교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두 형제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끝까지 전도하다가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가 493장을 부르면서 죽어 갔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식 날 9가지의 감사문을 읽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
②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런 보배를 주셨으니 감사
③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셨으니 감사
④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감사
⑤ 예수 믿고 자리에 누워 임종하는 것도 큰 복인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했으니 감사
⑥ 미국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
⑦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 ⑧ 아들의 순교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며 감사
⑨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
그러면서 목사님은 두 아들의 상여 맨 앞에 서서 슬픈 기색도 없이 오히려 울고 있는 1,500여명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찬송가 610장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영광 일세 영광 일세 내가 누릴 영광 일세”를 불렀다고 한다.
동인, 동신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은 ‘안재선’이라는 학생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안재선을 아들로 삼으려 하자 가족들이 반대하였고 이에 손목사는 “이번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일제 때 신사 참배 때문에 옥에서 견디기 힘든 고문 중에도 6년간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이 모두 허사가 된다” 며 그들을 설득하였다. 안재선은 손목사가 살아 계실 때 신앙생활을 잘 했지만 손목사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신앙도 잊어버리고 그곳을 떠나 숨어 지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1979년 12월 48세에 편도선 암으로 운명하기 직전 자신의 장남 안경선에게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안경선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현재 강원도 원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한다. 만약 손 목사가 안재선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때 이미 사형당해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하는 바가 있다면 손양원 목사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자 소외된 자를 사랑하고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고 손양원 목사는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한 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養子)로 삼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므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남겼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손양원 목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상기 말씀을 우리들도 늘 묵상하며 실천해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2015. 8. 15일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던 우리 신앙인들은 순국선열들과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순교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믿음의 정조를 지킨 믿음의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 후손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며 아무리 용서하지 못할 원수라도 오늘이 가기 전 용서해서 다시 그들과 화합할 때 대한민국의 앞날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이 영원하리라 믿는다.
전후에도 이승만의 독재는 계속되다가 4.19혁명(1960.4.19)으로 인하여 이승만 정부는 무너지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6.15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의 내각제 기반 공화 헌정 체제가 정착하게 된다. 의원내각제는 참의원(상원의원)과 민의원(하원의원)으로 양원제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통령은 윤보선(1960∼1962), 국무총리는 장면이었다. 1961년 5월 16일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정희 주도하에 일으킨 5. 16군사 정변이 일어난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963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군복만 벗은 채로 출마하여 전직 대통령 윤보선을 누르고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5대∼9대까지(1963∼79)3선 개헌 및 유신헌법제정으로 장기집권을 누리게 되었다가 1979. 10. 26일 (김재규에 의해 피살)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3. 운암교회 태동
운암교회 태동 전 후의 시대적 상황은 매우 혼란스럽고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시절처럼 힘든 삶의 여정이었다. 어렵고 힘든 이러한 시대에 빛 고을 광주 운암동에 하나님의 복음의 씨앗이 1955. 04. 30일 전방교회(현 서림교회) 청년회(청년회장 김홍배집사)주관 어린이확장주일을 맞아 광산군 극락면 운암리 대내부락(현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뒷뜰 소나무 밑에서 어린이들을 불러 모아 “주 예수를 믿으라...”란 외침은 끊임없는 메아리가 되고 메아리가 되어 운암마을 한적한 곳에 십자가를 세우게 되니 운암마을 이름을 따와 “운암교회”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60년이 넘도록 쉼 없이 이 작은 복음의 불길은 험하고 어두운 시대를 넘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싹이 되고 열매가되니 이 지역일대에 복음이 편만해졌고 구원받는 백성이 날로 더해감이 이 보다도 더 큰 하늘의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 출처 : 수집 자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