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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2권
1. 분별계품 ②
다시 다음으로 앞에서 설한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유견(有見)이고, 몇 가지가 무견(無見)이며,
몇 가지가 유대(有對)이고, 몇 가지가 무대(無對)인가?
또한 몇 가지가 선(善)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1)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를테면 색 한 가지가 유견이고
열 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며
이 중의 색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이고, 그 밖의 것은 세 가지(선ㆍ불선ㆍ무기)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견과 무견]
18계 중에서 색계가 유견(有見)이니, 이러한 색과 저러한 색의 차별을 드러내어 나타낼[示現]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밖의 것은 무견이라고 설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견과 무견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유대와 무대]
오로지 색온에 포섭되는 10계만이 유대(有對)인데, 여기서 ‘대’란 바로 장애[礙]의 뜻이다.
유대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장애(障礙)와 경계(境界)와 소연(所緣)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애유대란 열 가지의 색계(즉 유색처)를 말하는데, 그 같은 색 자체는 다른 색이 있는 곳에서는 장애 되어 생겨나지 못하니, 이를테면 손이 손을 장애하고, 혹은 돌이 돌이 장애하며, 혹은 손과 돌이 서로를 장애하는 것과 같다.2)
경계유대란 12계(6근ㆍ6식)와 법계 일부(심상응의 심소)를 말한다. 즉 경계를 갖는 모든 법[有境法]은 색 등의 경계를 [취하는 공능이 있기 때문으로](경계가 부재하면 장애 되어 생겨나지 않음),3)
그래서 『시설론(施設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눈은 물에서는 장애 되어도 육지에서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물고기 따위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육지에서는 장애 되어도 물에서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대개의 경우에 따라 설하자면 사람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물이나 육지 모두에서 장애 되는 경우가 있으니, 필사차(畢舍遮, piśāca, 아귀의 일종)나 실수마라(室獸摩羅, śiśumāra, 악어를 말함), 그리고 물고기 잡는 사람[捕魚人]과 하마(蝦蟆)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물이나 육지 어디에서든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눈(예컨대 맹인의 눈)이 그러하다.4)
또한 어떤 눈은 밤에는 장애 되어도 낮에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모든 박쥐나 올빼미 따위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낮에는 장애 되어도 밤에는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대개의 경우에 따라 설하자면 사람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낮과 밤 모두에 장애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개ㆍ여우[野干]ㆍ말ㆍ표범ㆍ승냥이ㆍ고양이ㆍ이리 등의 눈이 그러하다.
어떤 눈은 밤과 낮 모두에 장애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눈(예컨대 맹인의 눈)이 그러하다. 이러한 등등의 것을 일컬어 경계유대라고 한다.
소연유대란 심ㆍ심소법이 자신의 소연에 대해서만 [현기(現起)하는] 것을 말한다.5)
그렇다면 경계와 소연에는 다시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법(즉 색등의 경계)에 대해 이것(즉 6근ㆍ 6식과 심소)이 공능을 갖게 되면, 그것은 이러한 법의 경계가 되었다고 설한다.
그리고 심ㆍ심소법의 경우 그러한 법을 집취하여 일어나므로 그러한 법은 심 등에 대해 소연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6)
어떠한 까닭에서 안(眼) 등이 자신의 경계나 소연에서 일어날[轉] 때를 설하여 ‘장애를 갖는다[有礙]’고 일컫는 것인가?
이것들은 그러한 것(즉 경계와 소연)을 초월한 다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여기서 ‘애(礙)’란 바로 화회(和會, nipāta, 낙하의 뜻. 구역은 到)의 뜻으로, 말하자면 안 등의 법은 자신의 경계나 자신의 소연과 화회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여기(게송)서는 오로지 장애유대에 대해서만 설하였기 때문에 다만 ‘열 가지 유색(有色)이 유대이다’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유색법은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그 밖의 것은 무대(無對)라고 설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법이 경계유대라면 그것은 또한 장애유대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7심계와 법계의 일부인 모든 상응법은 바로 제1구(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가 아닌 것)이며,
바로 색 등의 5경은 제2구(장애유대이면서 경계유대가 아닌 것)이며,
안 등의 5근은 바로 제3구(경계유대이면서 장애유대인 것)이며,
법계의 일부인 비(非)상응법은 바로 제4구(양자 모두 아닌 것)이다.7)
만약 어떤 법이 경계유대라면 그것은 또한 소연유대인가?
마땅히 순후구(順後句)로 분별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만약 소연유대라면 그것은 결정코 경계유대이다.
그러나 어떤 법은 비록 경계유대이지만 소연유대가 아닌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5근이 바로 그러하다.
이에 대해 대덕(大德) 구마라다(鳩摩邏多)는 다음과 같이 설하니,8) 이는 바로 인정[許]할 만한 것이다.
그곳(소연)에서 마음이 생기하려 하나
다른 것이 장애하여 생기하지 않게 하면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것이 바로 유대(有對)이고
무대(無對)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임을.9)
이와 같이 유대와 무대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선ㆍ불선, 무기]
여기서 설한 열 가지 유대 중에서 색(色)과 성(聲)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기(無記)이니,10)
말하자면 5색근(色根)과 향ㆍ미ㆍ촉경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것들은 선ㆍ불선의 성질이라고 기표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숙과(異熟果)는 능히 [선ㆍ불선으로] 기표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무기라 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루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무기여야 할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 10계는 선 등의 3성(性)과 통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7심계(心界, 6식계와 의계)로서 무탐(無貪) 등과 상응하는 것을 선이라고 이름하고,
탐 등과 상응하는 것을 일컬어 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법계의 경우, 이러한 무탐 등의 자성과, 상응하는 것과 등기(等起)한 것과 택멸을 선이라고 이름한다.11)
혹은 탐 등의 자성과, 상응하는 것과 등기한 것을 불선이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것을 무기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색계와 성계의 경우, 선ㆍ불선심의 힘에 의해 등기한 신ㆍ어표업에 포섭되는 것을 바로 선ㆍ불선이라 하며,
그 밖의 것은 바로 무기이다.
선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
18계 중의 몇 가지가 욕계의 계(繫)이고, 몇 가지가 색계의 계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의 계인가?12)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계(繫)는 열여덟 가지이고
색계의 계는 열네 가지이니
향ㆍ미와 두 가지 식(識)을 제외한 것이며
무색계는 뒤의 세 가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繫)라고 하는 것은 계속(繫屬), 즉 속박된다는 뜻으로, 욕계에 계박되는 것은 18계 모두이다.
색계에 계박되는 것은 오로지 열네 가지로서, 향경(香境)ㆍ미경(味境)과 함께 비식(鼻識)ㆍ설식(舌識)이 제외된다.
향경과 미경을 제외한 것은, 그것이 단식(段食)의 성질이기 때문으로,13) 단식에 대한 욕망을 떠날 때 비로소 거기(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비식과 설식을 제외한 것은 거기에는 그것의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마땅히 촉계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촉)은 향경ㆍ미경과 마찬가지로 단식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존재하는 촉은 단식의 성질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향ㆍ미의 종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향ㆍ미는 식(食)을 떠나 별도로 수용되는 일이 없지만 촉은 별도로 수용되는 일이 있으니, 그곳에서는 근(根)과 의복 따위를 갖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서는 식욕(食欲)을 떠났기에 향ㆍ미가 수용되는 일이 없지만 근과 의복 따위는 존재하기 때문에 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곳(욕계)에 머물면서 그 같은 색계의 정려(靜慮)와 등지(等至)에 의지하여 [천안통을 일으켜 색계의] 색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경안(輕安)과 함께 일어나는 수승한 촉이 있어 소의신을 섭익(攝益)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색ㆍ성ㆍ촉)는 그러한 정려에서 생겨나 서로 수축(隨逐)할 수 있지만, 향ㆍ미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기(색계)에는 존재하는 일이 없다”14)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색계에서는 향ㆍ미가 수용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응당 마땅히 비근과 설근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향ㆍ미의 경계가 그러한 것처럼 그것도 쓰임새가 없기[無用]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이 두 근은 그곳에서 쓰임새가 있으니, 말하자면 언설을 일으키고 아울러 소의신을 장엄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것이 소의신을 장엄하고 언설을 일으키는 용도라고 한다면 다만 의처(依處)만이 있으면 될 것으로, 이러한 두 ‘근(根)’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15)
그곳에서는 남근(男根)이 없으며 또한 역시 그 의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두 근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의 의처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다.16)
그곳에서는 가히 남근의 의처가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근과 설근의 의처는 그곳에서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근’을 떠나 응당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쓸모가 없다 할지라도 근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포태(胞胎) 속에 있으면서 응당 죽어야 할 자의 경우가 그러하다.17)
비록 쓸모가 없다고 할지라도 근이 생겨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자(포태 속에 있으면서 마땅히 죽을 자)에게 어떠한 까닭에서 근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인가?
근에 대한 애착[愛]이 있어 수승(殊勝)한 업(業)을 일으켰기 때문이다.18)
그러나 만약 [향ㆍ미 등의] 경계에 대한 애착을 떠났다면 근에 대해서도 결정코 그러해야 할 것이다. 즉 그곳(색계)의 유정은 경계에 대한 애탐[貪]을 떠났으므로 [근에 대한 애착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생겨나게 할 원인이 없으므로] 마땅히 비근과 설근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마땅히 그곳의 유정에게도 남근이 역시 생겨난다고 인정[許]해야 할 것으로,
만약 ‘남근은 생겨나지 않으니, [생겨날 경우 소의신이] 누추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음장(陰藏)은 은밀한데 어찌 그 용모가 누추하다고 하겠는가?19) 또한 온갖 근이 생겨나는 것은 쓸모가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니,
만약 원인의 힘[因力]만 있으면 쓸모가 없더라도 역시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그곳에서의 남근이 비록 누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생기하게 할] 원인이 있다고만 인정되면 그곳에서도 마땅히 생기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남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럴 경우 비근과 설근도 응당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2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어긋나게 될 것이니,
“그곳(색계)에서는 4지(支)가 결여되는 일도 없고 온갖 근도 감소되지 않는다”고 논설하고 있기 때문이다.21)(비바사사의 힐난)
그 같은 온갖 근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들에 따라 설하여 ‘감소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인데,22)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비근과 설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남근도 응당 존재한다고 해야 하리라.
여시설(如是說)은 이러하다.23):
‘그곳(색계)에는 비ㆍ설 2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향ㆍ미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즉 6근의 애탐은 내신(內身)에 의해 생겨날 뿐 경계에 의해 현기(現起)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남근의 애탐은 음촉(婬觸)에 의해 생겨나는데, 그곳에는 음촉이 없기 때문에 남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24) 그러므로 색계에는 18계 중에 오로지 열네 가지 종류만이 있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무색계의 계(繫)에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 있을 뿐이니,
이른바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색욕(色欲)을 떠나야 그곳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무색계에는 열 가지 색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소의와 소연[依緣]이 없기 때문에 5식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로지 뒤의 세 가지만이 무색계의 계(繫)인 것이다.
3계의 계(繫)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유루와 무루]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루이고, 몇 가지가 무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의계ㆍ법계ㆍ의식계는 모두에 통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오로지 유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의계와 의식계로서 도제(道諦)에 포섭되는 것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그 밖의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또한 법계의 경우, 만약 그것이 바로 도제와 무위라고 한다면 그것을 일컬어 무루라 하고, 그 밖의 것을 유루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그 밖의 15계는 오로지 유루라고 이름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유루와 무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유심유사ㆍ무심유사ㆍ무심무사]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심유사(有尋有伺)이고, 몇 가지가 무심유사(無尋唯伺)이며, 몇 가지가 무심무사(無尋無伺)인가?25)
게송으로 말하겠다.
5식(識)에만 오로지 심(尋)ㆍ사(伺)가 있고
뒤의 셋은 세 가지이며, 그 밖의 것에는 아무것도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 등의 5식은 유심유사이니, 심과 사와 더불어 항상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5식신은 그 행상(行相)이 거칠고 [색 등의] 외문(外門:외적 감각기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이 결정적인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이다.
‘뒤의 셋’이란 바로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각기 제일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한다.
즉 의계와 의식계, 그리고 심ㆍ사를 제외한 상응의 법계(상응법 중 심ㆍ사를 제외한 44심소)로서,
만약 욕계와 초정려 중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유심유사이고,
정려중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유사이며,
제2정려 이상의 온갖 경지 내지 유정천정(有頂天定)에 존재하는 것은 무심무사이다.
법계에 포섭되는 비상응(非相應)의 법과 정려중간의 사(伺)도 역시 이와 같다.26)
그리고 심(尋)의 경우 모든 때에 무심유사이니, 제2의 또 다른 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사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伺)의 경우, 욕계와 초정려 중에서는 세 품류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는데, 마땅히 무엇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인가?
이는 마땅히 무사유심(無伺唯尋)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제2의 또 다른 ‘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만 심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심ㆍ사를 갖는 경지[有尋伺地, 즉 욕계 미지정과 초정려지]에는 네 품류의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바,
첫째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이니, 이를테면 심ㆍ사를 제외한 그 밖의 상응법이 바로 그것이며,
둘째는 무심유사(無尋唯伺)이니, 이를테면 바로 ‘심’이 그러하며,
셋째는 무심무사(無尋無伺)이니, 이를테면 일체의 비상응법이 바로 그러한 것이며,
넷째는 무사유심(無伺唯尋)이니, 이를테면 바로 ‘사’가 그러하다.
그리고 나머지 열 가지 색계에는 심과 사 모두가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심ㆍ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5식신이 유심유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27)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식을 무분별이라고 설한 것은
계탁(計度)과 수념(隨念) 때문으로,
그것은 의지(意地)의 산혜(散慧)와
의지의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전설(傳說)에 따르면 분별에는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분별(自性分別)이고,
둘째는 계탁분별(計度分別)이며,
셋째는 수념분별(隨念分別)이다.
즉 5식신은 비록 자성분별을 갖을지라도 나머지 두 가지를 갖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설한 것으로, 이를테면 다리가 한 개 밖에 없는 말[馬]을 일컬어 다리가 없는 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28)
여기서 자성분별은 그 본질이 오로지 바로 심(尋)일 뿐으로, ‘심’에 대해서는 뒤(권제4와 권제12)에 심소를 설하는 도중에 응당 자연히 분별 해석하게 되리라.
그 밖의 두 가지 분별은 순서대로 의지(意地)29)의 산란된 혜[散慧]와 온갖 염(念)을 본질로 한다.
여기서 ‘산란’이란 말하자면 정(定)이 아닌 것으로,30) 바로 의식상응의 산란된 혜를 일컬어 계탁분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정에 있든, 혹은 산란에 있든 의식과 상응하는 온갖 염을 일컬어 수념분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심유사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유소연ㆍ무소연, 유집수ㆍ무집수]
18계 중의 몇 가지가 유소연(有所緣)이고, 몇 가지가 무소연(無所緣)인가?
또한 몇 가지가 유집수(有執受)이고, 몇 가지가 무집수(無執受)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곱 가지의 마음과 법계의 반은
유소연이고, 그 밖의 것은 무소연이며
앞의 여덟 가지 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무집수이며, 그 밖의 것은 두 가지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6식과 의계, 그리고 법계에 포섭되는 온갖 심소법을 유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능히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열 가지의 색계와 법처에 포섭되는 불상응법을 무소연이라고 이름하니, 뜻에 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소연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아홉 가지는 무집수이니,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7심계와 법계의 전부 등 이러한 8계와 아울러 성계(聲界)는 모두 무집수이다.
그 밖에 나머지 9계(5색근과 색ㆍ향ㆍ미ㆍ촉)는 각기 두 가지 갈래와 통하니, 유집수이자 무집수이기 때문이다.
즉 안 등의 5근으로서 현재세에 머무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며,
과거세ㆍ미래세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색ㆍ향ㆍ미ㆍ촉의 경우, 현재세에 머무는 것으로서 5근을 떠나지 않은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만약 현재에 머무는 것이면서도 근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닌 것과 과거ㆍ미래에 머무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이를테면 소의신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면서도 근(根)과 화합하는 것을 제외한 머리카락ㆍ수염ㆍ손톱ㆍ이빨ㆍ대소변ㆍ눈물ㆍ침ㆍ피 등과 소의신 밖에 존재하는 지(地)ㆍ수(水) 등의 색ㆍ향ㆍ미ㆍ촉과 같은 것은 비록 현재세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무집수인 것이다.
유집수,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심ㆍ심소법이 함께 집지(執持)ㆍ포섭하여 의처(依處)로 삼게 되는 것을 유집수라고 이름하니, [심ㆍ심소는 그러한 의처에] 손해와 이익을 끼치면서 일어나고[展轉], 다시 서로가 서로를 따르기 때문이다.31)
즉 온갖 세간에서 [고ㆍ락 등의] 감촉의 느낌[覺觸]이 있다고 설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연(緣)이 감촉되어 즐거움 따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무집수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유집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대종성ㆍ소종성, 가적집ㆍ비적집]
18계 중에서 몇 가지가 대종성(大種性)이고, 몇 가지가 소조성(所造性)인가?
또한 몇 가지가 적집될 수 있는 것[可積集]이고, 몇 가지가 적집되지 않는 것[非積集]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계 중에는 두 가지가 모두 있고
나머지 아홉 가지 색은 소조이며
법계의 일부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열 가지 색만이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촉계는 두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를테면 대종(大種)과 소조(所造)가 바로 그것이다.
즉 대종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견고한 성질[堅性, 즉 地] 따위가 바로 그것이며,
소조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매끄러운 성질[滑性] 따위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소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32)
그 밖의 나머지 아홉 가지의 색계는 오로지 소조성이니, 이를테면 5색근과 색 등의 네 경계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법계의 일부인 무표업색(無表業色)도 역시 오로지 소조일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7심계와 무표색을 제외한 법계 일부는 두 가지 종류(대종과 소조색) 모두가 아니다.
그런데 존자(尊者) 각천(覺天)은 ‘열 가지 종류의 색처는 오로지 대종성일 따름이다’고 설하고 있다.33)
그러나 그의 설은 옳지 않으니,
계경에서는 오로지 견고성 등의 4상(相)만을 설하여 대종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34)
나아가 이러한 4대종은 오로지 촉처에 포섭되[고 색ㆍ성ㆍ향 등의 처에는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견고성[堅]ㆍ습윤성[濕] 등은 안근 등에 의해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근에 의해 취해지는 대상이]고,
색ㆍ성 등의 경계는 [안근ㆍ이근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지] 신근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종과 색 등의 조색은 그것을 취하는 근(根)도, 포섭되는 처소도 다르기 때문에] 그의 설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苾芻)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처(眼處)는 이를테면 내처(內處)로서 4대종의 소조(所造)로 정색(淨色)이며, 유색(有色)ㆍ무견(無見)ㆍ유대(有對)이다. 내지는 신처(身處)의 경우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
또한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색처는 이를테면 외처(外處)로서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ㆍ유견ㆍ유대이다.
성처는 이를테면 외처로서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ㆍ무견ㆍ유대이고, 향ㆍ미의 2처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촉처는 이를테면 외처로서, 이는 바로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이며, 유색ㆍ무견ㆍ유대이다”35)고 하였다.
이처럼 경에서 오로지 촉처만이 4대종을 포섭하고 그 밖의 유색처는 모두 대종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현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 중에서,
“안(眼)의 살덩이[肉團] 중에 내적으로 각기 다른 견고성[堅性]과 견고한 종류[堅類]가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36)
그 경에서는 안근을 떠나지 않은 살덩이(즉 승의근이 아닌 부진근) 중에 견고성 따위가 있다고 설한 것으로서,37) 앞의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다.
즉 『입태경(入胎經)』 중에서 오로지 6계(지ㆍ수ㆍ화ㆍ풍ㆍ공ㆍ식)를 설하여 사부(士夫, puruṣa)로 삼은 것은 바로 그것이 능히 사부를 구성하는 근본 실체[本事, mūla sattva dravya]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부를 구성하는 실체는] 오로지 그것만이 아니니, 그 경에서는 다시 6촉처(觸處)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각천이 ‘4대종 이외 별도의 소조색이 없으니, 경에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러한 『입태경』에서 6계 중 오로지 식(識)만을 설하고 심소를 설하지 않았으므로] 온갖 심소도 응당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기 때문에 [앞의 경증(經證)은 옳지 않은 것]이다.
또한 마땅히 ‘심소는 바로 심이다’고 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니,38)
계경에서 ‘상(想)ㆍ수(受) 등의 심소법은 심에 의지(依止)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39)
또한 유탐심(有貪心) 따위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40)
이에 따라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온갖 계(界)의 대종과 소조가 차별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종성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에서 5근과 5경의 열 가지 유색계는 바로 적집될 수 있는 것이니, 극미의 취집(聚集)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8계는 적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극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능작ㆍ소작, 능소ㆍ소소, 능칭ㆍ소칭]
이와 같이 적집될 수 있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능히 쪼개는 것[能斫]이고, 몇 가지가 쪼개지는 것[所斫]인가?
몇 가지가 능히 태우는 것[能燒]이고, 몇 가지가 태워지는 것[所燒]인가?
몇 가지가 능히 재는 것[能稱]이고, 몇 가지가 재어지는 것[所稱]인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界)만이
능히 쪼개는 것이고, 아울러 쪼개어지는 것이며
역시 태워지는 것이고, 능히 재는 것이나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쟁론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색ㆍ향ㆍ미ㆍ촉의 4계는 도끼와 장작 등을 성취하니, 이것을 일컬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이라고 한다.
어떠한 법을 ‘쪼갠다’고 일컫는 것인가?
장작 등의 색취(色聚)로서 서로 핍박하며[相逼] 계속 생겨나는 것[續生]을 도끼 따위가 나누어 잘라 각각의 부분으로 하여금 계속 생기하게 하는 것, 이러한 법을 일컬어 ‘쪼갠다’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신(身) 등의 색근은 ‘쪼개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완전히 절단되어 두 개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신근 등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4)지(支)의 부분이 몸을 떠나게 되면 감관으로서의 기능[根]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신근 등은 또한 역시 ‘능히 쪼개는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참으로 청정 미묘하기 때문이다.42)
능히 쪼개고 쪼개어지는 것이 오로지 외적인 4계(색ㆍ향ㆍ미ㆍ촉)에 해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워지는 것[所燒]과 능히 재는 것[能稱] 그 자체도 역시 그러하다.
말하자면 오로지 외적인 4계만을 태워지는 것이라 하고, 능히 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 등의 색근은 보배로운 구슬의 빛처럼 그 상이 청정 미묘하기 때문에 역시 두 가지 사실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계(聲界)는 이 모든 사실(능절 등의 여섯 가지 사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니, 상속하지 않기 때문이다.43)
능히 태우는 것[能燒]과 재어지는 것[所稱]에는 이설(異說)의 쟁론이 있다.
즉 어떤 이는 설하기를,
“능히 태우는 것과 재어지는 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외적 4계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다시 설하기를,
“오로지 화계(火界)만을 능히 태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재어지는 것은 오로지 무거움[重:촉의 성질 중 하나]뿐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능히 쪼개는 것과 쪼개지는 것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숙생ㆍ소장양ㆍ등류성ㆍ유실사ㆍ일찰나]
18계 중의 몇 가지가 이숙생(異熟生)이고, 몇 가지가 소장양(所長養)이며, 몇 가지가 등류성(等流性)이고, 몇 가지가 유실사(有實事)이며, 몇 가지가 일찰나(一刹那)인가?44)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다섯 가지는 이숙생ㆍ소장양이며
성(聲)으로서 이숙생인 것은 없다.
여덟 가지 무애(無礙)에는 등류와
역시 또한 이숙생의 성질이 있다.
나머지는 세 가지이고,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며
일찰나는 오로지 뒤의 세 가지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내적인 다섯 가지’란 말하자면 안(眼) 등의 5계로서, 이것들은 바로 이숙생이며 아울러 소장양이다.
그리고 게송에서 등류성을 설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이숙생이나 소장양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5)
즉 이숙인(異熟因)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이숙생’이라 이름한 것으로,
이를테면 소에 의해 멍에 지워진 수레를 일컬어 우차(牛車)라고 이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간의 말을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46)
혹은 소조(所造)의 업이 결과를 획득할 때에 이르게 되면 변이[異]하고 능히 성숙[熟]하기 때문에 ‘이숙’이라 이름하였으며,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을 ‘이숙생’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그것에 의해 획득된 결과는 원인과는 다른 존재[別類]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원인이 성숙된 것이기 때문에 ‘이숙’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원인에 대해 일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하고, 결과에 대해 일시 원인의 명칭을 설정한 것과 같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지금의 6촉처(觸處)는 바로 옛날의 지은 소조업이다”고 하였던 것이다.47)
음식과 자조(資助:몸을 이롭게 하기 위한 塗油나 洗浴)와 수면(睡眠)과 등지(等持) 등의 뛰어난 인연으로서 이익되게 하는 것을 ‘소장양’ 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범행(梵行)도 역시 능히 장양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감손(減損)시키는 일이 없을 뿐으로 별도의 이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장양의 상속이 항상 이숙의 상속을 능히 지키는 것[護持]이니, 이는 마치 외곽이 내성을 방호하는 것과 같다.48)
성계에는 등류나 소장양은 있지만 이숙생은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욕망하는 바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4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추악어(麤惡語)의 원리(遠離)를 잘 닦았기 때문에 대사(大士)는 범음성(梵音聲)의 상을 감득하였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50)
그러나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소리는 세 번째 전해진 것[第三傳]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그 같은 업에 의해 생겨날지라도 이숙과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업으로부터 온갖 대종이 생겨나고, 온갖 대종의 인연에 따라 소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51)
또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소리는 다섯 번째 전해진 것[第五傳]에 속하기 때문에 비록 그 같은 업에 의해 생겨날지라도 이숙과는 아니다.
이를테면 그러한 업은 이숙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전해져 장양의 대종을 낳았으며, 이것이 전해져 다시 등류의 대종을 낳고, 이것이 바야흐로 소리를 낳게 된 것이다.”(이상 유부의 해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수(身受)는 업에 의해 생겨난 대종으로부터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이숙과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수(受)가 소리[聲]와 마찬가지로 이숙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올바른 이치[正理]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세친의 비평)
‘여덟 가지 무애(無礙, 礙性 즉 공간적 점유성을 갖지 않는 것)’란 7심계와 법계로서, 여기에는 등류와 이숙생의 성질이 있다.
즉 동류인(同類因)과 변행인(遍行因)에 의해 생겨난 것은 바로 ‘등류성’이다.
그러나 만약 이숙인에 의해 인기(引起)되어 생겨난 것이면 이숙생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온갖 무애의 법은 적집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극미소성(極微所成)이 아니기 때문에 소장양이 아니다.
‘나머지’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네 가지인 색ㆍ향ㆍ미ㆍ촉으로서, 그것들은 세 가지 모두와 통하니, 이숙생이기도 하고, 소장양이기도 하며, 등류성이기도 하다.
‘실(實)은 오직 법계뿐이다’고 한 것에서, ‘실’이란 바로 견실(堅實)의 뜻이기 때문에 무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법계에 포섭된다. 그래서 오로지 법계만을 단독으로 ‘유실사(有實事)’라고 이름한 것이다.
나아가 의(意)와 법과 의식을 일러 ‘뒤의 세 가지’라고 하였는데, 여섯의 세 가지(6근ㆍ6경ㆍ6식) 중에서 가장 뒤에 설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이러한 3계에만 1찰나가 있으니, 말하자면 첫 번째 무루지(無漏智)인 고법인품(苦法忍品)은 등류가 아니기 때문에 ‘일찰나’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구경(究竟)으로서 등류가 아닌 것을 설한 것으로, 여타의 다른 유위법으로서 등류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고법인(즉 무루혜의 심소)과 상응(相應)하는 마음을 일컬어 의계(意界)ㆍ의식계라고 하며, 그 밖의 구기(俱起)하는 법을 일컬어 법계라고 한다.52)
이와 같이 이숙생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안계(眼界)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得]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식(眼識)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또한 만약 안식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었다고 한다면, 안계도 역시 획득 성취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지금 마땅히 간략하게 답변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안식계는 단독으로 획득되기도 하고,
함께 획득되기도, 그렇지 않는 등의 경우가 있다.53)
논하여 말하겠다.
‘단독으로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혹 안계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식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태생ㆍ난생ㆍ습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점차 안계를 획득할 때와,54) 그리고 무색계에서 몰(歿)하여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5)
혹은 안식으로서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더라도 안계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현기(現起)할 때와,56) 그리고 거기서 몰하여 하지(下地)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7)
‘함께 획득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안과 안식의 두 계로서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 획득 성취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무색계로부터 몰하여 욕계나 범세(梵世,즉 초정려)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58)
‘그렇지 않다’고 함은 두 가지가 모두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등’이라고 함은 [아직 설하지 않은 그 밖의 다른 사실도 포섭한다는 말로서,] 이를테면 만약 안계를 성취하면 안식계도 역시 성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등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59)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60)
제1구는 말하자면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안식이 생기하지 않는 경우이다.
제2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아직 안근을 획득하지 않았거나, 획득하였어도 이미 상실한 경우이다.
제3구는 말하자면 욕계에 태어나 안근을 획득하여 상실하지 않았거나 범세에 태어나거나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 바로 색을 볼 때가 그러하다.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온갖 상을 제외한 때가 그러하다.
이와 같이 안계와 색계, 안식과 색계의 획득ㆍ성취에 대해 응당 마땅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이와 같이 아직 설하지 않은 교의를 포섭시키기 위해 게송 중에서 전체적으로 다시 ‘등’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획득과 성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내적인 것[內]이고, 몇 가지가 외적인 것[外]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내적인 것은 열두 가지로 안계 등이며,
색계 등의 여섯 가지를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61)
논하여 말하겠다.
6근과 6식의 열두 가지를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하며, 외적인 것이란 이를테면 그 밖의 색 등의 6경을 말한다.
아(我)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내외가 있을 것인가?
아집(我執)의 의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일시 마음을 설하여 ‘아’라고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를 능히 잘 조복함으로 말미암아
지자(智者)는 하늘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로다.
즉 세존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를 ‘마음을 조복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계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마땅히 마음을 능히 잘 조복해야 할 것이니
마음을 조복해야 능히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단지 마음을 일시 가설하여 ‘아’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 등은 이것의 소의(所依)가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친근(親近)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색 등은 이것의 소연(所緣)이 되는 것으로 그 관계가 소원(疏遠)하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외적인 것’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6식은 응당 마땅히 내적인 것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아직 의계(意界)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것은 마음의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62)
의계의 단계에 이를 때에도 6식계[의 체상(體相)]을 상실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의계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의계[의 체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의계는 오로지 응당 마땅히 과거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고, 6식은 오로지 현재ㆍ미래세에만 존재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18계는 모두 삼세와 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종(自宗)에 위배되고 말 것이다.63)
또한 만약 미래와 현재의 6식에 의계의 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세의 의계도 역시 마땅히 설정될 수 없을 것이니, 체상은 삼세에 걸쳐 바뀌거나 변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등분ㆍ피등분]
18계 중의 몇 가지가 동분(同分, sabhāga)이고, 몇 가지가 피동분(彼同分, tat-sabhāga)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니
자신의 작용[自業]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법은 동분이다’고 함은, 이를테면 어떠한 하나의 법계도 오로지 동분이 된다는 말이다.
즉 동분이란, 만약 [6]경이 [6]식에 대해 결정적으로 소연이 될 때 식은 그 중에서 이미 생겨났거나(과거ㆍ현재) 생겨날(미래) 법이 되니, 이러한 식의 소연이 되는 경계를 설하여 동분이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어떠한 법계라도 그것에 대해 과거[已]ㆍ현재[正]ㆍ미래[當]에 무변(無邊)의 의식을 낳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든 성자는 결정적으로 일체의 법에 대해 마음을 낳아, 그것은 모두 무아(無我)라고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그러한 무변의 의식은, 그 자체와 그것과 구유(俱有)의 법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외된 것도 역시 제2찰나 마음의 소연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찰나의 마음은 일체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으로, 두루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64) 그렇기 때문에 법계를 항상 동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두 가지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그 밖의 나머지 17계는 모두 동분이 되기도 하고 피동분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피동분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신의 작용[自業]을 짓고, 자신의 작용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하니,
자신의 작용을 짓는 것을 일컬어 동분이라 하고,
자신의 작용을 짓지 않는 것을 일컬어 피동분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이(17계) 가운데 안계로서 볼 수 있는 색[有見色]을 이미 보았거나 지금 보고 있거나 당래(미래)에 볼 것을 ‘동분안(眼)’이라고 이름한다.
이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는 의계의 경우도 각기 자신의 경계에 대해 자신의 작용(곧 知)을 행하는 것을 ‘동분의(意)’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피동분의 경우]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Kāśmira)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피동분의 안에는 단지 네 가지 종류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색을 보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不生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방(西方,간다라)의 여러 논사들은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앞의 불생법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 것이 바로 그것으로,
첫째가 유식속(有識屬)이며,
둘째가 무식속(無識屬)이다.65) 내지는 신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며,
의계의 피동분은 오로지 불생법뿐이다.66)
색계의 경우는 안(眼)을 위해 이미 보여졌거나 지금 보여지고 있거나 당래 보여질 것을 ‘동분색’이라 이름한다.
피동분의 색에는 역시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眼)에 보여지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이 바로 그것이다.
널리 설하여 내지는 촉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각기 자신의 근에 대해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 [‘동분촉’이고, 신(身)에 감촉되지 않고 이미 멸하였거나 지금 멸하고 있거나 당래 멸할 것과 불생법을 ‘피동분의 촉’이]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동분안(眼)이나 피동분의 안으로서 만약 어떤 한 대상에 대해 동분이 되면 여타의 다른 일체의 대상에 대해서도 역시 동분이 되며,
피동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나아가 이같이 널리 설하여 내지는 의계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색은 그렇지가 않다.
즉 [어떤 하나의 색은 그것을] 보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동분이 되지만 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바로 피동분이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색에는 이 같은 사실이 있다. 즉 그것이 어떤 한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보여지는 것이니, 이를테면 달이나 춤이나 씨름 따위의 색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안(眼)에는 이 같은 사실이 없으니,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의 안근으로써 두 사람이 능히 색을 보는 일이 없다.
즉 안근은 공동으로 쓸 수 없기[不共] 때문에 한 사람의 상속(소의신)에 의지하여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하지만,
색은 바로 공동의 대상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의 상속에 근거하여 동분과 피동분을 건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색계에 대해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ㆍ향ㆍ미ㆍ촉 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성계(聲界)의 경우, [한사람에게 들리는 소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들리기 때문에] 색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 계는 근에 이를 때 비로소 취해지는 것이니, 이는 바로 공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 만이 취하지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67)
따라서 이치상으로 볼 때 응당 마땅히 안계 등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색계와 같은 것이라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그 같은 이치가 있을지라도 공동의 대상[共]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향 등의 3계는 [그것이 아직 근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 모두에 대해 비식(鼻識) 등을 낳게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공동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안근 등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향 등의 3계는 색계의 경우와 같은 경우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 등 6식의 동분은 [자신의 작용을 행하여] 생겨난 것이고, 그것의 피동분은 (필경)불생법이기 때문에 의계(意界)의 경우와 같다고 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분과 피동분의 뜻은 무엇인가?
근ㆍ경ㆍ식 세 가지는 서로 교섭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분(分, bhga)’이라고 하였다.
혹은 다시 ‘분’이란 바로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것이며,
혹은 다시 ‘분’이란 바로 생겨난 촉[所生觸]을 말한다.68)
즉 [근ㆍ경ㆍ식 3자가] 동일[同]하게 이 같은 ‘분’을 갖기 때문에 동분(同分)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피동분이라고 이름하니, 동분은 아니지만 그러한[彼] 동분과 비교할 때 종류와 ‘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피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69)
동분과 피동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견소단ㆍ수소단ㆍ비소단]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소단(見所斷, darśanaheya)이고, 몇 가지가 수소단(修所斷, bhāvanāheya)이며, 몇 가지가 비소단(非所斷, aheya)인가?70)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고
뒤의 세 가지 계는 세 가지 모두와 통하며
불염법(不染法)과,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열다섯 가지의 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열 가지의 색계와 5식계를 말한다.
‘오로지 수소단이다’고 함은 이러한 열다섯 가지의 계는 오로지 수소단이라는 것이다.
‘뒤의 세 가지 계’란 의계와 법계, 그리고 의식계를 말하며,
‘세 가지와 통한다’고 함은 이러한 뒤의 세 가지 계는 각기 세 가지 종류(견소단ㆍ수소단ㆍ비소단)와 통한다는 말이다.
즉 여든여덟 가지 수면(隨眠)과, 그것과 구유(俱有)하는 법과, 아울러 수행(隨行)하는 득(得)은 모두 견소단이고,71) 그 밖의 나머지 온갖 유루법은 모두 수소단이며, 일체의 무루법은 모두 비소단이다.
어찌 견소단의 법이 더 이상 없다고 하겠는가?
이를테면 이생성(異生性)과, 악취(惡趣)를 초래하는 신(身)ㆍ어업(語業) 등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법은 성도(聖道)와 지극히 상위하기 때문이다.72)
비록 그렇다할지라도 이러한 법은 견소단이 아니다.
그러한 법들의 상을 간략히 설할 것 같으면, 이를테면 염오하지 않은 법[不染法]과, 제6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법[非六生]과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닌데 [하물며 이 가운데 염오하지 않은 법의 일부인 이생성이 견소단일 것인가.]73)
즉 그러한 이생성은 바로 불염오 무기성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미 이욕(離欲)한 자도, 선근을 끊은 자도 오히려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생성이 만약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고법인(苦法忍)의 단계에서도 응당 이생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6이란 이를테면 제6 의처(意處)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의처와는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제6처가 아닌 것에서 생겨난 법’이라고 하였다.
곧 이는 바로 안(眼) 등의 5근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니, 바로 5식 등을 말한다. 그리고 색법이란 일체의 신ㆍ어업 등을 말하니,74)
앞서 언급한 제6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법과 이러한 색법은 결정코 견소단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는 4제의 이치[諦理]에 미혹하여 직접 발기(發起)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5)
이와 같이 견소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건ㆍ비견]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見, dṛṣṭi)이며, 몇 가지가 비견(非見, adṛṣṭi)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을 의지처로 삼는 식(識)이 아니니
전설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분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이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여기서 다섯 가지 염오견의 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설하게 될 것이다.76)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의식상응의 선인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유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무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이를 비유하자면 한밤중과 한 낮과 구름이 끼었을 때와 구름이 없을 때에 온갖 색상(色像)을 관찰하면 밝고 어둠의 차이가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간의 온갖 ‘견’으로서 염오함이 있거나 염오함이 없는 것과, 유학의 견과 무학의 견, 그 같은 온갖 견의 법상(法相)을 관찰하면 그 밝고 어둠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77)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정견은 오로지 의식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78)
이를테면 먼저 심려(審慮,심사숙고의 뜻)하고 결탁하는 것을 일컬어 ‘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하는 혜는 이와 같은 공능이 없으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상응의 혜는] 비견(非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준하여 그 밖의 염오하거나 염오하지 않은 혜와, 아울러 그 밖의 온갖 법도 비견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도 능히 결탁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견’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識見家의 물음)80)
능히 밝고 날카로워[明利] 온갖 색을 관조(觀照)할 수 있기 때문이다.(根見家, 즉 유부 비바사사의 답)81)
그러나 만약 안근이 본다고 한다면 그 밖의 식(識)이 작용할 때에도 역시 마땅히 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식견가의 再難)82)
일체의 안근이 능히 현견(現見)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어떠한 안근)이 능히 현견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동분(同分)의 안근이 식과 화합할 때 능히 보는 것으로, 그 밖의 안근은 보는 것이 아니다.8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그것의 능의(能依,주체)인 식이 색을 보는 것이지 안근이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안식은 결정코 능히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감추어진 색[障色]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 바로 보건대,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으니,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은 무대(無對)이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으므로 마땅히 감추어진 색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
안식은 [무대로서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는데]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만 ‘안근이 보는 것[見]’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우리의 경우, 안근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보는 공능이 없다.
나아가 식과 소의(즉 안근)는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오로지 ‘안식이 보는 것’이라는 사실만을 인정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이 생기하지 않는 것인가?
눈이 어찌 몸(피부)처럼 근(根)과 경(境)이 화합할 때 비로소 대상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파지가(頗胝迦, 수정을 말함), 유리, 운모(雲母), 물 등에 장애 된 것은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8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가 주장하는 안식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이러한 처소(어떤 한 대상)에 광명만 차단되지 않으면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역시 생겨나겠지만, 그러나 만약 이러한 처소에 광명이 차단되어 있으면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즉 안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經)에서 ‘안근이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한 것은 그것이 바로 견(見)의 소의이기 때문에 ‘능히 본다’고 설한 것이다.85)
또한 그 경에서 ‘의근이 능히 법을 인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근이 능히 인식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능히 인식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의식이니, 의근은 바로 의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능히 인식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소의(所依, 안근 또는 의근)에 대해 능의(能依, 안식 또는 의식)의 업을 설한 것이니, 세간에서 ‘평상이나 의자의 소리’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86)
또는 경에서 ‘안근이 인식한 색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고 참으로 즐길 만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듯이,
실로 이같이 참으로 애호할 만하고 즐길 만한 색이라는 것은 안근에 의해 인식되는 바가 아닌 것이다.87)
또한 경에서 “범지(梵志)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을 문(門)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안식이 안근의 문[眼門]에 의지하여 색을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역시 또한 문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88)
그러니 어찌 경에서 ‘안근으로 보는 것이니, 그것으로 오로지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만약 식(識)이 능히 ‘보는 것[見]’이라면, 무엇이 다시 요별(了別)하는 것이며, ‘견’과 요별의 두 작용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89)
즉 식이 색을 보는 것을 일컬어 ‘색을 요별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러한 허물은 없다.] 비유하자면,
일부의 혜(慧)를 일컬어 능히 보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한 역시 능히 간택(簡擇)하는 것이라고도 하듯이,90)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의 식도 능히 보는 것이라 이름하지만, 또한 역시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근견설을] 힐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안근이 능히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안근은 바로 보는 주체[見者]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다’고 하는 작용자체가 주체와는 별도로 상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바로 보는 작용[見用]인가?”91)
이러한 말은 힐난이 될 수 없으니, 이를테면 식(識)이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요별의 주체[了者]와 요별의 작용[了用]에 어떠한 다름도 없듯이 보는 것[見] 역시 응당 마땅히 그러함을 함께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식이 능히 보는 것이다. 다만 이것(안근)은 바로 견(見)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안근 역시 능히 보는 것이라고 일컬은 것이니, 이는 마치 울림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또한 역시 ‘종(鐘)이 능히 울린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은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능히 인식한다’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세간에서도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다 같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생겨날 때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하지 ‘색을 인식한다’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비바사론』 중에서도 역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안근이 획득한 바를 안식이 요별함을 설하여 ‘보여진 것’이라고 이름한다.”92)
그렇기 때문에 다만 안근을 설하여 능히 보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이지 능히 인식하는 것이라고는 일컫지 않는 것이다.
오직 식이 현전(現前)할 때만 ‘능히 색을 인식한다’고 설하니,
비유하자면 태양을 설하여 능히 낮을 만드는 것, 다시 말해 태양이 뜨면 낮이 되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93)
[이상의 논의에 대해] 경부(經部)의 여러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어찌하여 함께 모여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을 서로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는 것인가?
안근과 색경 등을 반연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을 ‘견(見)’에 대한 주체[能]라 하고 객체[所]라 하겠는가?
그것은 오직 법(法)으로서 인과(因果) 관계일 뿐, 그것들 사이에는 실로 어떠한 작용도 없는 것이다.
다만 세간의 관습[世情]에 따르기 위해 일시 언설을 일으켜 ‘안근을 능히 보는 것’이라 일컫고, ‘안식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 일컬은 것뿐이니,
세존께서 “지역에 따른 언어적 습관[方域言詞]에 마땅히 견고히 집착해서도 안 되며,
세속의 언어개념[世俗名想]을 견고히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설하신 것처럼,
지자(智者)는 응당 마땅히 여기에 크게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4)
그렇지만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宗義)에서는,
“안근이 능히 보고, 이근이 능히 들으며, 비근이 능히 냄새 맡고, 설근이 능히 맛을 보며, 신근이 능히 느끼며, 의근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한다.
색을 볼 때 하나의 눈으로 본다[一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두 눈으로 본다[二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95)
여기에는 일정한 기준은 없다.96)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 두 눈[二眼]으로 함께 볼 경우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여러 위대한 논사(論師)들은 모두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함께 본다’고 말하고 있으니,97) 두 눈을 뜰 때는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지만 한 눈만을 뜰 때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쪽 눈을 뜨고 한쪽 눈에 뭔가를 접촉시킬 때에는 바로 현전에 두 개의 달 등을 보게 되지만, 한쪽 눈을 막고 한쪽 눈에 뭔가를 접촉시키면 그러한 일도 없다.98) 그렇기 때문에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의가 다르다고 해서 인식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니, [심법은] 방처(方處)가 없이 머무르기 때문에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색[礙色]과는 다른 것이다.99)
[직접 접촉하는 것ㆍ직접 접촉하지 않는 것]
만약 이 종(宗, 유부종)에서 안근이 보고, 이근이 들으며, 내지는 의근이 요별한다고 설하였다면, 근이 바로 그 같은 소취(所取)의 경계를 취할 때 직접 접촉해야 하는 것[至]인가,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되는 것[不至]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ㆍ이근ㆍ의근과 그 대상은
접촉하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이 반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다시 말해 그것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대상[非至境]을 취한다. 즉 안근은 능히 먼 곳의 온갖 색은 볼 수 있어도 눈 속에 넣은 약 등은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근 역시 먼 곳의 소리나 음향은 능히 들을 수 있어도 이근을 핍박하는 것은 능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안근과 이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면 선정을 닦는 자는 응당 마땅히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의 근을 낳지 못하게 될 것이니, 비근(鼻根) 등의 경우와 같다.100)
만약 안근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색만을 능히 볼 수 있다면, 어째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장애를 갖는[有障, 감추어진] 등의 온갖 색을 능히 널리 볼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석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철(鐵)을 끌어당기는 것이면서도 직접 접촉하지 않은 일체의 철을 끌어당기지 않는 것인가?101)
또한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본다고 주장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힐난이 적용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일체의 안약이나 눈에 약을 넣는 산가지[籌, 솔] 등 눈과 직접 접촉한 온갖 색을 두루 보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비근(鼻根) 등은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근과 구유(俱有)하는 일체의 향 등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이 비록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볼지라도 그러한 일체의 대상을 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의근의 경우, 무색근(無色根)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간적인 방처(方處)를 갖지 않는 근이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이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과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 두 가지 모두를 취하니, 자신의 귓속에서 나는 소리(이를테면 耳鳴)도 역시 능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 밖의 비(鼻) 등의 세 가지 유색근(有色根, 비근ㆍ설근ㆍ신근)은 앞의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
어떻게 비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향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가?
숨을 멈출 때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러 ‘직접 접촉하는 것[至]’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를테면 무간(無間)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102)
그렇다면 또한 제 극미(極微)는 상호간에 접촉[相觸]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접촉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遍體]으로 상호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實物]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된다.
또한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낳게 된다. 그러나 제 극미는 세분할 수 없는 것이다.10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제 극미는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극미와 극미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만 극미의 무간에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상호간에 접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돌을 치거나 손뼉을 칠 때 극미 자체는 응당 마땅히 서로 뒤섞여[相糅] 버리고 말 것이다.104)
극미는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취색(聚色)이 서로 부딪칠 때 어떻게 흩어지지 않는 것인가?
풍계(風界)가 섭지(攝持)하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105)
그러나 혹 어떤 경우 풍계는 능히 허물고 흩어지게[壞散] 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겁(劫)이 허물어질 때에 그러하다.
그러나 혹 어떤 경우 풍계는 능히 이루고 포섭하게[成攝] 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테면 겁이 이루어지는 때에 그러하다.106)
[제 극미가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세 가지 근(비ㆍ설ㆍ신 근)은 [대상과 어떠한 간격도 없는] 무간이 생겨남으로 인해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즉 무간으로 말미암아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말하자면 그 중간에 어떠한 조그마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화합색(和合色)은 부분을 지니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한다 하여도 여기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107)
이러한 이치를 인정되기 때문에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의 문의(文意)는 잘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논에서 물어 말하기를,
“온갖 ‘이러한 접촉된 존재[是觸物, 곧 화합색]’는 바로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접촉되지 않은 것[非觸, 곧 극미]’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해야 할 것인가?”고 하였다.108)
그리고 온갖 ‘접촉되지 않은 존재[非觸物]’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109)
그 논에서는 이러한 이치에 대해 일정하게 답하고 있지 않다.
즉 어떤 때에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삼아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된 물건이 이산(離散)할 때가 그러하다.110)
또 어떤 때에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이산되었던 것이 바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된 물건이 다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향유진(向遊塵)이 동류로 상속하는 때가 그러하다.111)
그런데 존자(尊者) 세우(世友)는 설하기를, “제 극미가 상호 접촉하게 되면, 이는 즉 응당 마땅히 후념(後念, 후찰나)에 이르도록 지속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112)
그러나 대덕(大德)은 설하기를,
“일체의 극미는 실로 상호 접촉하지 못하며, 단지 그 사이가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113)
이러한 대덕의 뜻은 참으로 애락(愛樂)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러한 제 극미는 응당 마땅히 간극(間隙, 틈)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중간이 이미 비었다면 무엇이 그러한 법(5근과 5경)의 작용[行]을 장애하길래 유대(有對)로 인정하는 것인가?114)
또한 극미를 떠나 화합색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화합색이 상호 접촉한다고 하는 즉, 그것은 바로 [화합색 중의] 극미가 접촉하는 것이니, 변애(變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115)
또한 극미가 만약 방분(方分, 부피)을 지닌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접촉하거나 접촉하지 않거나 간에 그것들은 모두 마땅히 방분을 갖는 것이며,
만약 방분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면 설혹 상호 접촉을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116)
다시 또한 안 등의 근은 자신의 대상에 대해 오로지 같은 양[等量]만을 취하여,
이를테면 횟불을 빨리 회전시키면 마치 불바퀴[旋火輪]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빨리 전전(轉傳)하기 때문에 큰 산 따위를 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대상에 대해 같은 양과 같지 않은 양[不等量]을 모두 취하는 것인가?117)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근 등의 세 가지는
오로지 같은 양[等量]의 대상만을 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은 비(鼻) 등의 세 가지 근이라고 설한 바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은 또한 오로지 능히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
즉 [비ㆍ설ㆍ신] 근의 미(微, aṇu)의 양과 마찬가지로 [향ㆍ미ㆍ촉]경의 미의 양도 역시 그러하니,
서로 대칭적으로 화합하여 ‘비’ 등의 식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근과 이근은 일정하지 않다. 즉 안근은 색에 대해 어떤 때에는 보다 적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털끝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보다 큰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잠시 동안 눈을 떠 큰 산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어떤 때에는 같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포도나 대추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근도 모기나 구름 등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작거나 큰 음성(音聲)을 들으니,118) 그것이 응하는 바에 따라 작거나 큰 양의 소리를 취하는 것이다.
의근의 경우은 질애(質礙:즉 공간적 점유성)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취하는 대상의 형태와 양의 차별을 분별할 수 없다.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어떻게 안포(安布:분포 배열의 뜻)되어 차별되고 있는 것인가?
안근의 극미는 눈동자[眼星] 위에서 횡으로 배열되어 머물고 있으니, 마치 향직화(香荾花:미나리과 식물로, 꽃이 한방면으로 향하고 있음)와도 같다. 또한 맑고 투명한 막에 덮여 있어 분산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겹겹이 쌓인 둥근 알[丸]과 같은 모양으로 머물며, 그 자체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마치 파지가(頗胝迦:수정)처럼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있으면서 나선형으로 머무니, 마치 돌돌 말린 자작나무 껍질[樺皮]과도 같다.
비근의 극미는 콧줄기 안에서 뒤쪽[背]을 위로 하고 안쪽[面]을 아래로 하고 있으니, 마치 손톱을 쌍으로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상의 앞의 세 가지 근은 횡으로 행도(行度)를 짓고 있기 때문에(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마치 화만(花鬘)을 쓴 것과 같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퍼져 있으며, 그 형태는 반달과도 같다.
그런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혀 중앙에 털끝의 양 만한 곳이 [따로] 있어 설근의 극미가 혀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19)
신근의 극미는 몸의 부분 부분에 두루 머물며, 신체형태[身形]의 양과 같다.
그리고 여근(女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장구와 같고, 남근(男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골무와 같다.
또한 안근의 극미는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동분이며,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피동분이며,
또 어떤 때에는 일부는 피동분이고 그 나머지는 바로 동분이다.
내지 설근의 극미도 역시 그러하다.
신근의 극미로서 모두가 다 동분이 되는 일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 내지 극열날락가(極熱捺落迦:날락가는 지옥을 말함) 중에서 맹렬한 불길이 몸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무량한 신근의 극미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동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설(傳說)에 따르면,
“만약 신근의 극미가 두루 신식을 낳는다면, [그곳에 떨어진] 몸은 응당 마땅히 산괴(散壞)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고 하였다.120)
그러나 신근과 촉경은 각각 하나의 극미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 능히 신식을 낳는 일은 없다. 왜냐 하면 5식은 결정적으로 다수의 극미를 적집하여야 비로소 그것을 소의와 소연의 존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에 따라 역시 또한 극미를 설하여 무견(無見)을 본질로 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볼 수 없는 것[不可見]이기 때문이다.121)
[식]
앞에서 설한 것처럼 식(識)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식계 내지 의식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5식은 오로지 현재만을 소연(所緣)으로 삼고,
의식은 삼세과 삼세 아닌 것[非世:즉 무위법을 말함]을 모두 소연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여러 식의 소의(所依)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뒤의 것(즉 제6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과거(즉 의근)뿐이며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俱]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의식은 무간(無間)에 멸한 의근을 소의로 삼는다.122) 그러나 안(眼) 등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이다. 여기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은, 이것도 역시 과거[의 의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안근은 이러한 안식과 구생(俱生)하는 소의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 신근은 바로 이러한 신식과 구생하는 소의이니, 그것들은 다 같이 현재세(現在世)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간에 멸한 의근은 바로 과거의 소의이다.
이렇듯 5식신의 소의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안 등의 다섯 가지 근은 바로 바로 개별적인 소의[別所依]이며,
의근은 5식 모두에 공통하는 소의[通所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바로 안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이면, 이것은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인가?
만약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 다시 이것은 바로 안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구생(俱生)의 안근이며,
제2구는 말하자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며,
제3구는 말하자면 과거의 의근이며,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법을 제외한 것이다.123)
내지 신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4구 각각에다 마땅히 자신의 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앞의 구(句)에 따라 답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의식의 소의성이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서도 의식의 소의성이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다.
식(識)은 동시에 두 가지의 연(緣:根과 境)에 의탁하여 생기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근만이 소의(所依)라는 명칭을 얻게 되고, 경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根)의 전변에 따라 식(識)도 변이하니
그래서 안(眼) 등의 근을 소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안(眼) 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안 등의 6계를 말하는 것으로, 안 등의 근에 전변(轉變)이 있기 때문에 온갖 식도 변이한다. 곧 근이 증장(增長) 감손(減損)함에 따라 식에 밝고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 등이 변화하더라도 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니, 식은 바로 근에 따르지 경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의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안 등의 근에 해당하는 것이지 다른 것(즉 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알려지는 것[所識]은 바로 색 따위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이라 이름하고, 색식(色識) 내지 법식(法識)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과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근(根)에 따라 식(識)을 설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것’이라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안 등을 소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근은 바로 소의이기 때문에 근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한 것이다.
‘아울러 불공(不共)’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안근은 오로지 자신의 안식에만 소의가 된다는 것(즉 不共法)이다.
그러나 색은 다른 이의 안식에도 역시 통하고, 아울러 자신과 다른 이의 의식에도 모두 수용되는 것(즉 共法)으로, 내지 신(身)과 촉(觸)의 관계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소의는 수승(殊勝)하고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 되기 때문에 식의 명칭은 근에 따르는 것이지 경에 따르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마치 북소리나 보리의 싹 따위로 이름하는 것과 같다.124)
소의신이 머무는 바에 따라 안근이 색을 본다고 할 때, 소의신과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지(地)는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125)
마땅히 이러한 네 가지는 어떤 경우에는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만약 자지(自地)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 네 가지는 모두 자지에 속한다.
만약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그 밖의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한다.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그러나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고,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하며,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하지(下地)의 색이나, 혹은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초정려에 태어나, 만약 자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도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지에 속한다.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에는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지만 색은 욕계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안식은 초정려에,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안식은 초정려에,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이나 혹은 하지(下地) 상지(上地)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2, 제3정려에 태어나 자지(自地)나 타지(他地)의 눈으로써 자ㆍ타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근 등을 제외한] 그 밖의 계(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법의 결정적인 상]
이제 마땅히 이러한 제법의 결정적인 상(相)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은 소의신보다 하지(下地)가 아니며
색과 안식은 안근보다 상지(上地)가 아니다.
색은 안식의 일체 지와 통하며
소의신에 대한 두 가지(색ㆍ안식)도 역시 그러하다.
안근과 마찬가지로 이근도 역시 그러하며
다음의 세 가지는 모두 자지(自地)이다.
그리고 신식은 자지이거나 하지이며
의근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과 안근과 색의 세 가지는 모두 다섯 지(地)와 통하니, 이를테면 그것들은 욕계와 4정려 중에 존재한다. 그리고 안식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안근을 소의신이 생겨난 지(地)와 비교해 본다면, 혹 어떤 경우 등지(等地)이기도 하고,126) 혹 어떤 경우 상지(上地)이기도 하지만,127) 소의신보다 하지에는 끝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과 안식을 안근과 비교해 본다면, 등지나 하지에는 존재하지만 그 상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128) 즉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상지의 식은 하지의 안근을 소의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129)
색을 안식과 비교해 보면, 등지ㆍ상지ㆍ하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130)
그리고 색과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해 보면, 색을 안식에 비교하는 경우와 같다.
이계(耳界)에 대해 널리 설하자면 이 또한 안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근은 소의신보다 하지에 존재하지 않으며, 성(聲)과 이식은 이근보다 상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성은 이식에 대해 일체 즉 상ㆍ등ㆍ하지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두 가지(즉 성과 이식)를 소의신과 비교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이 대응하는 바에 따라 안근과 마찬가지로 널리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비근과 설근과 신근의 세 가지 경우에는 모두 다 자지(自地)에만 존재한다.131)
그런데 여기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은, 신근과 촉경은 그 지(地)가 필시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신식을 촉과 신근에 비교해 보면, 혹 어떤 경우에는 자지에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에 존재한다.
여기서 자지란 말하자면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이며, 위의 세 가지 정려에 태어나는 그것을 일러 하지라고 하였다.132)
그리고 의계(意界)의 네 가지는 일정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의근은 어떤 때에는 소의신과 의식과 법과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地)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때에는 상지와 하지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소의신은 오로지 5지(地:욕계와 4정려)에만 존재하며, 나머지 세 가지(의근ㆍ법ㆍ의식)는 일체(무색계를 포함하는 3계 9지)에 존재하니,
등지(等至)에 노닐거나 수생(受生)할 때 각기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 혹 어떤 경우 동일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다르기도 하다.133)
이에 대해서는 뒤의 「분별정품(分別定品)」에서 마땅히 널리 분별하는 바와 같다.
지금은 번거로운 말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분별하지 않을 것으로, 앞뒤에서 거듭 논술하는 것은 소용도 적을 뿐더러 공만 많이 들기 때문이다.
방론(傍論)을 두루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19계와 식, 영원ㆍ무상, 근ㆍ비근]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18계는 오로지 6식 중의 몇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가?
몇 가지가 영원한 것[常]이며, 몇 가지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몇 가지가 근(根)이며, 몇 가지가 비근(非根)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외계는 두 가지 식(識)에 의해 인식되며
영원한 것은 법계인 무위이며
법계의 일부는 바로 근(根)이며
아울러 내계의 열두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의 색(色) 등의 5계는 그 순서에 따라 안(眼) 등의 5식이 각기 하나씩 인식하며, 또한 이것들은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된다.
이처럼 5계는 각기 6식 중의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13계는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은 5식신의 소연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18계 가운데 어떠한 계도 그 전부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법계의 일부인 무위법만이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본다면, 무상한 것은 무위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계와 다른 여타의 [17]계이다.
[22근]
또한 경에서는 22근(根)을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ㆍ의근ㆍ
여근(女根)ㆍ남근(男根)ㆍ명근(命根)ㆍ
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ㆍ
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들은 모두 경에서 설하고 있는 6처의 순서를 뛰어넘어 명근 다음에 비로소 의근을 설하고 있으니, 유소연(有所緣)이기 때문이다.134)
이상에서 설한 22근은 18계 중 내적인 12계(6근과 6식)와 법계의 일부에 포섭된다.
여기서 법계의 일부란 명(命) 등의 11근과 뒤의 세 가지 중의 일부를 말하니, 이것들은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135)
내적인 12계란, 안 등의 5근은 자신의 명칭과 같은 계에 포섭되고,
의근은 7심계에 모두 포섭되며,
뒤의 세 가지(즉 3무루근을 말함)의 일부는 의계와 의식계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근과 여근은 바로 신계(身界)의 일부에 포섭되니,
뒤(본론 권제3)에서 응당 분별하는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은 뜻에 준하여 본다면, 그 밖의 나머지 색 등의 5계와 법계의 일부는 모두 그 본질이 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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