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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1권
1. 취건도(聚揵度) ①
10력(力)께서 자비로 세상애 나타나
온갖 법을 밝게 깨달아 아셨네.
나는 지금에 그러하신 부처님과
진리와 거룩한 대중에게 예배합니다.
가장 수승한 좋은 법의 구절을
여러 성현들이 잘 들으시고서
구담(瞿曇) 대중들은
여러 중생들을 잘 도와주시네
[문] 어떤 것을 색상(色相)이라고 하며, 그 색상은 어떤 것인가?
[답] 온갖 법을 그대로 잘 깨달아 아는 것이다.
[문] 어떤 것을 온갖 법을 잘 깨달아 안다고 하는가?
[답] 유계(有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문] 보다 수승한 것이 있게 되는가?
[답] 그에게는 하나의 생각[一想]이 있다.
[문] 그 하나의 생각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 하나의 생각 중에는 애욕의 모든 때[垢]에 집착되어 온갖 경계에 묶인 바가 되었으나 끝내 묶이지 않나니, 때문에 온갖 결박이 곧 약해지게 된다
[문] 그 온갖 결박[結] 중에서도 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 장차 감로(甘露)법에 이르게 되는 그것이 있다.
[문] 그 중에 서로 감로법에 이르게 되는 그것보다 수승한 것이 있는가?
[답] 의생신(依生身)과 의생의(依生意)에서는 온갖 괴로움을 받는 그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몸과 뜻[意]과 온갖 괴로움이 이미 지난 과거가 된다.
[문] 만일 그 중에 색상이 없다고 하자 설령 색상이 없다면 물질 역시 그 모양이 없는가?
[답] 만일 색상이 없으면 또한 저 물질도 없으며, 색상에도 또한 그 모양이 없고 또한 색상이 더럽힐 것도 없다.
[문] 그대에게 색상에 물질이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에게도 색상이 없고 또한 그 모양이 없는가? 또한 색상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차츰차츰 색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문] 하나의 물질 중에서 혹 일어나기도 하고 혹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어떤 이가 “만일 물질이 어느 때에 차츰 쌓인다면 거기에는 색상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차츰차츰 색상을 분별하는 것도 역시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색상을 모조리 통괄했다”고 말했다.
[문]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가장 다르다는 말씀은 없고 곧 무형[無色]이 있다고 말했다.
[답] 어떤 이는 “색상을 껴잡아 매어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온갖 덮임[蓋]과 색상까지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망가지고 없어진 색상이라고 한 그것도 역시 과거와 미래에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색상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볼 수도 있고 상대도 있는 것[可見有對]과 볼 수 없고 상대만 있는 것[不可見有對]과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는 것[不可見無對]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모든 물질이 볼 수도 없고 상대도 없다면 그것을 가지고 색상이 없도록 한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색상이 가고 오고 하는 그것을 색상이라 한다”고 말했다.
[문] 과거와 미래에 대한 내용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가?
[답] 어떤 이는 “색상이 물질이 된다”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4대(大)로 말미암아 물질이 되었다”고 말했다.
세존께서도 역시 “4대로 된 것이니, 저 네 요소로 말미암아 색음(色陰)이 생기고 수음(受陰)이 왕성해진다”고 말씀하셨다.
[문] 그 요점을 들어 말한다면 거기에서는 온갖 물질을 상대로 한 저 온갖 것은 네 요소이고,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답] 그것은 요점을 들어 말한 것이 못 된다.
또 말하기를 “인연이 변경됨으로써 온갖 고통스러운 음(陰)이 생긴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대는 어떠한 색상을 묻는가?
만일 푸른 것이라고 하면 푸른 그것이 색상이 되고, 누런 것이라고 하면 곧 누런 그것이 색상이 된다”고 말했다.
[문] 나는 온갖 색상을 묻는다.
만일 저것이 색상이라면 그 모양보다 더 수승한 것은 없는가?
빛깔에는 동일한 하나의 모양만이 아니니 그 중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답] 설령 모양과 모양이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그 내용만은 곧 그러하지 않으니, 마치 땅은 굳은 모양이 되나 지금에 땅이 다르고 굳음도 다른 것과 같다.
[문] 온갖 물질이 동일한 모양인 것은 마치 무상(無常)한 것과 같다.
제 모양[自相]이 모양 없음을 물을 적에는 땅이 제 모양이 되나니 그러므로 그러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제가 제 모양이 없음’을 물을 적에는 저는 온갖 모양을 묻는다.
[답] 어떤 이가 “상대가 있는 물질[有對色] 모양은 바로 빛깔이니 색상이 되며, 상대가 있는 모양[有對相] 그것은 마치 화살이나 회초리를 잡는 것과 같나니 그것은 빛깔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곡식의 종자를 땅에 심어두고 수시로 적당한 수분을 공급하면 거기에는 곧 및깔이 생겨나게 되는 것과 같나니 무엇을 색상이 아니라 말하는가?
[답] 위에서 말한 내용과 정반대이다. 담마다라(曇摩多羅)존자는,
“온갖 물건으로서 상대가 없는 것은 빛깔이 아니니 그것을 색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대가 없는 물건은 그것 또한 나지 않나니 그를 상대가 없다[無對]고 말한다.
마치 상대 없는 것은 그 상대의 자취인 것과 같아서 그는 곧 상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색상이 아니다. 4대(大)로 만들어진 물질에는 어떠한 다름이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다름이 없나니 온갖 네 요소가 바로 만들어진 물질이다”라고 말했다.
[문] 세존께서 “온갖 빛깔이 있는 저 온갖 것들은 곧 네 요소이니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 경에 어김[違]이 있다.
[답] 만들어진 소리가 다시 딴 감관[根]에서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를테면 여섯 갱락(更樂)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를 탐내고 있으나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참는 수행이 그에서 생긴다. 그 낙이 생긴 이후로부터 그 중간에 이르기까지 여섯 갱락 밖에 다시 일곱 갱락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만든 자도 없다.
[문] 만일 소리를 만든 것이 없다면 또한 애욕과 형색을 변경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내 물질인가?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인가?
[딥] 어떤 이는 “굳음ㆍ축축함ㆍ따뜻함ㆍ움직임 그것이 곧 네 요소의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땅의 빛깔은 빛깔로부터 만들어진 물질이 아닌 것과 같다.
[문] 네 요소가 이리저리 그 우열이 있고 물질은 언제나 만들어지지 않는데 그것들을 만들어짐이 있는 물질이라 보려고 하는가?
[답] 비록 저 네 요소가 이리저리 그 우열로 네 요소의 모양이 있게 되었으나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은 네 요소의 모양이 되지 않나니, 그는 거기에서 일어난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온갖 인연은 저 네 요소와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이다”라고 했다.
[문] 네 요소가 또한 네 요소를 인연하는데 그것에서 일어난 물질인가?
[답] 그것들이 비록 네 요소를 인연하기는 하나 약간의 인연하는 바가 있고 네 요소가 곧 색상을 일으킨 것이다.
[문] 물질이 색상에 인연하여 그 물질이 더욱 물질을 내는 것인가?
물질이 더욱 물질을 내고 다시 네 요소를 인연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아는가?
[답] 어떤 이는 “유루(有漏)의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은 또한 유루이기도 하고 또한 무루(無漏)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문] 온갖 유루의 것에서 만들어진 물질은 저 네 요소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온갖 무루의 것에서 일어난 물질은 어떤 네 요소로 만들어진 것인가?
[잡] 어떤 이는 “무기(無記)인 네 요소에서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만들어진 물질이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이는 “저 네 요소에 의하여 일어나게 된 물질이다”라고 말했다.
[문] 마음과 마음이 생각하는 법도 역시 네 요소에 의해서 그것들이 물질을 일어나게끔 하는 것인가?
[답] 네 요소에 의한 것은 모든 감관[根]인데 모든 감관 역시 마음과 마음이 생각하는 법에 의하나니 그러므로 그것들이 네 요소에 의하지 않는다.
[문] 이름과 물질[名色]이란, 이러나 저러나 서로 의지하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증가하는 네 요소이기에 네 요소가 증가하여 물질을 일으킨다”고 했다.
[문] 그것은 약해서 줄어듦과 증가함을 말하는가? 그것은 증가하고 나지 않음을 말하는가?
[답] 마치 온갖 법이 이리저리 증가하여 서로 생기는 것과 같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그것들은 나지 않는다.
승가다라(僧伽多羅)존자가 “네 요소인 큰 사실이 일어나는 인연에서 물질이 생긴다고 말하였다.
[문] 네 요소가 각각 서로 떠나지 않으며 또한 큰 사실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만일 떠나지 않게 된다면 혹 네 요소는 물질이 아닐 것이니, 바람이 허공에서 떠돌아 다님과 같고 물질에 냄새와 맛이 없는 것과 같다.
네 요소는 물질이 아니면서도 물질에 들어가 만드는 작용을 한다.
바수밀(婆須蜜)존자가 “갱락(更樂)은 역시 네 요소에서 일어난 물질이니, 땅의 빛깔ㆍ땅의 냄새ㆍ땅의 맛과 같다”고 말했다.
존자 담마다라존자는 “마치 미묘한 물질을 네 요소가 해산시킬 수 있고 그 밖의 물질까지도 그러하나니 그것을 물질을 일으킴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어떠한 내용에서 신식(身識)이 받아들이매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데 혹 네 요소이기도 하고 네 요소가 아니기도 하는가?
[답] 어떤 이는 “저것은 인연이 없으니, 빛깔을 분명하게 인식함에 혹은 푸른 것, 혹은 푸른 것이 아닌 것이라고 함과 같나니, 그를 신식이 받아들일 때에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는데 혹 네 요소이기도 하고 혹 네 요소가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사대의 모양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온갖 가늘고 윤활한 것으로만 된 것이 아니니, 네 요소의 모양이 동일하지 않고 축축함과 딴딴한 모양도 또한 같지 않으며, 굵고, 가늘고, 가볍고, 무겁고, 차갑고, 굶주리고, 목마름 따위가 같지 않다.
저 가늘고 윤활한 것이 굵은 땅에서 생긴 것인데, 가벼운 것은 불과 바람으로 만들어졌고, 무거운 것은 땅에서 생긴 것이며, 차가운 것은 물에서 만들어졌고, 굶주림과 목마름은 불과 바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땅의 견고한 것보다 더한 것은 있지 않나니 가늘고 윤활하고 굵은 것은 바로 땅의 처소이니, 이것을 증가함이 있다고 말한다.
땅의 평탄하고 바른 것과 같기 때문에 가늘고 윤활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며, 땅의 평탄치 못한 것과 같으면 굳고 굵은 것이라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굵음과 가늘고 윤활한 것이 없다.
설령 굵고 가늘고 윤활한 것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온갖 것이 항상하면 될 수 있는 사실이나 푸른 빛깔을 언제나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그가 성립되지 못한다.
저것에 혹 가벼울 원인이 있다가도 저것이 다시 무거워질 수 있나니, 그러므로 가벼움과 무거움도 성취될 수 없다. 만일 차가워졌다면 어떻게 푸른 연꽃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저 사대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니, 그러므로 차가움도 성취될 수 없다.
만일 불이 성하면 굶주리고 바람은 목마름의 근본이 된다.
어떤 이는 “온갖 신식(身識)이 가늘고 윤활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사대라고 말해야 하나니, 사대를 떠나지 않고 신식이 있기 때문이다. 사대가 더욱 증가함을 제각기 말한다”고 말한다.
[문]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답] 어떤 이는 “무지(無智)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 어찌하여 무지를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는가?
만일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면 저것은 곧 무명이다.
풀과 나무와 장벽(牆壁)은 모두가 지혜롭지 못하니 그것들을 무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답]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은 법과 서로 상응한다.
[문]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은 많고 마음 법[心法]의 모양은 무지인데,
어찌하여 미사색(彌沙塞)에서는,
“아직 무명(無明)을 깨닫지 못하여 무명을 수행하니, 저 밝음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을 무명이라고 이른다. 마치 소금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을 소금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고 했는가?
[답] 만일 저 밝음이 있지 않을 적에 그것이 밝음을 일으키면 곧 무명이 있는 것이, 마치 저 그릇에 소금이 없으면 저 그릇에는 소금이 없다고 말함과 같다.
만일 밝음이 있지 않으면 저 무명은 공연히 무명만 있을 뿐이다.
[문] 만일 밝은 물건이 곧 무명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행(行)의 인연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5개(蓋)가 곧 무명이다”고 말했으며,
세존께서도 역시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명에 덮인 바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문] 결(結)은 중요한 자리가 없는가?
[답] 어떤 이는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 곧 무명이다”고 말했다.
세존께서 또한 “비구가 부정을 생각하면 아직 생기지 아니한 애욕의 번뇌[欲漏]가 곧 생기게 되고, 이미 생긴 애욕의 번뇌는 갑절이나 더 많아지며,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또 “무명습(無明習)은 곧 유루습(有漏習)이니, 그러므로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은 곧 무명이라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문] 부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곧 무명인가?
[답] 그것도 부정을 생각한 것에 관련되므로 역시 무명이다.
또 세존께서 “그와 같이 비구가 부정(不淨)을 생각하므로 그 무명(無明)에 관련되어 그 무명이 애(愛)에 관련되나니, 그러므로 그런 부정을 생각함이 없어도 곧 무명이다”고 말씀하셨다.
[문] 만일 무명이 무명에 관련되면 그 뜻은 어떠한 어긋남이 있는가? 무명이 어리석음에 관련된다고 말함과 같은가?
[답] 어떤 이는 “네 가지 전도(顚倒)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 괴롭다고 보는 것으로 전도를 끊나니, 그러므로 그가 무명이다. 괴로움을 보고 소견의 결[見結]과 무명의 결[無明結]을 끊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중요한 자리가 있지 않겠는가?
[답] 어떤 이는 “온갖 결이 곧 무명이요, 지혜로움은 곧 밝음[明]이다. 온갖 결 때문에 깨달아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온갖 결이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 사(使)는 중요한 자리가 있지 않은가?
[답] 만일 열 가지 현색(現色)이 있으면 중요한 자리에 드나니, 그와 같이 사(使)는 중요한 자리가 있다.
어떤 이는 “진실로 무명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삿됨이 무명을 낸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무명이라는 명칭은 무지(無智)와 의혹과 삿됨[邪]을 따르는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명에는 여섯 가지 모양이 있으니 어리석음ㆍ순종ㆍ삿됨ㆍ의혹ㆍ희망ㆍ중요함이 없는 것을 얻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무명이란, 거룩한 진리[聖諦]에 대하여 행하려 들지 않는 무지(無智)이니, 삿됨을 따르는 그것을 곧 무지라 말한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자기의 조작으로 중생이 있나니, 그것은 아소(我所)의 무명이요, 내가 조작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무명의 모양은 어떠한가?
[답]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이 중생의 어리석음이 무명의 모양이다.
[문] 어찌하여 무명의 인연이 있는가?
[답]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다시 나라는 물건이 있음과 무명이 있음과 무명의 네 가지 전도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소견이 곧 전도이니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하며,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 있다고 하며,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며, 무아(無我)인 것을 내가 있다고 하여 그와 상응하는 것과 그 밖의 결사(結使)와 상응하는 무지(無智)가 있는 그것이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것과 상응하는 무지는 무상한 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여기며, 괴로움을 즐거움이 있다고 여기며, 나아가서는 무아(無我)인 것을 내가 있다고 하여 한 곳에서 전도된 소견을 갖나니, 그 무지는 곧 전도인지라,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진리를 보는[見諦] 데서 끊을 바는 전도이고 진리를 보고 생각하는 데서 끊을 바는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약 무명을 진리 보는 데서 끊는다면 저 전도와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차별이 없나니 전도가 곧 무명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그렇다면, 수다원(須陀洹)도 또한 무명이 있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무명이란, 무너지거나 없어짐이 없나니, 무너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곧 전도다”라고 말했다.
[문] 상응하는 것은 혹 무너짐도 있고 혹 무너짐이 없기도 한다는데,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어떤 이는 “무도(無道)한 것을 무명(無明)이라 이르고, 사도(邪道)인 것을 전도(顚倒)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요함이 없는 것을 무명이라 이르고, 중요함을 전도라 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결사(結使)가 곧 무명이요, 무명에서도 아주 작은 것을 전도라 이른다”고 말했다.
다시 온갖 결(結)은 곧 전도이고, 전도 중에서 아주 작은 것은 또한 무명이다.
[문] 어떤 것을 내상(內相)이라 하며 어떤 것을 외상(外相)이라 하는가?
[답] 모든 법의 제 모양[自相]이 내상이고, 무너지는 것은 외상이다.
[문] 내상과 외상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이는 두루하지[普遍] 않는 것은 곧 내상이고, 두루한 것은 곧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두루하다면 허공도 또한 두루하다. 만일 내상이 껴잡아 유지하면 내상이 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내상도 있고 외상도 있는가?
[답] 어떤 이는 “무너지지 않는 것은 외상이고, 무너지는 것은 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 두루한 것도 역시 무너지며, 그 밖의 무상함과 괴로움도 역시 무상한가?
[답] 5음(陰)이 이미 무너지되 하나는 무너지지 않나니, 무상함도 두루하다.
[문] 만일 제 모양이 무너지고, 두루하는 모양[普遍相]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와 같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제 모양이요, 무너지는 것은 외상(外相)인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이 서로 같지 않다”고 말했다.
[문] 푸른 것은 푸른 것과 같고 누런 것은 그와 서로 같지 않은데, 그것을 내상이다, 외상이다 하려는 것인가?
[답] 푸른 것과 누런 것이 서로 같지 않은데도 푸른 것은 내상이고 외상이 아니라고 하려 드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나타난 것은 곧 내상이요, 알지 못한 지혜는 곧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가 혹 알지 못한 지혜가 있으면 그것을 내상이다 외상이다 하려 들며 더 나아가서 알지 못한 지혜는 구경(究竟)에는 제 모양이라고까지 하려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의지 그것은 곧 제 모양이고 의지함은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 이름[名]과 물질[色]이 각기 서로 의지하는데 그 역시 내상인가? 외상인가? 만일 외상에 의지한다면 제 모양[自相]과 외상은 외상에 의지하고 무상함이 무상함에 의지함은 없는가?
[답] 어떤 이는 “공통되지 않는 것은 제 모양이요, 공통된 것은 외상이다”라고 말한다.
[문] 외상도 역시 공통되지 않음이요, 무상함과 괴로움이 다른가?
[답] 5음(陰) 중에 어찌 무상함과 외상이 공통되지 않음이겠는가?
[문] 저 무상함과 같아서 물질이 무상하며, 사실대로 생각해보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인식까지도 무상한가?
[답] 어떤 이는 “자연(自然)과 상응하는 것은 곧 내상이고, 그와 상응하지 않는 것은 외상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외상이 진실함이 없다면 지금도 역시 없다. 만일 외상이 있다면 거기에는 또한 제 모양이 있겠는가?
[답] 어떤 이는 “외상이 있지 않고 모두가 제 모양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외상이 없다면 모든 법에도 또한 외상이 없겠는가?
[답] 어떤 이는 “이미 제 모양은 분별했으니 외상은 분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깨달음은 곧 제 모양이요, 깨닫지 못한 것은 외상이다”라고 말한다.
두루 무너지지 않는 모양 있는데
지혜가 의지한 바를 알지 못하네.
공통됨도 저절로 있음도 아니요
말도 지어냄 아님 있지 않네.
이것이 있는 것처럼, 3유(有)는 유위상(有爲相)이요, 그 밖의 것도 역시 유위상이다.
마하승기(摩訶僧耆)는 “이 무상한 다른 모양을 말할 적에 무위상(無爲相)과 다르며, 지금 또한 유위상(有爲相)에 대하여 그러한 말을 할 적에 한량없이 유위법문(有爲法門)에 미치고 낱낱 모든 모양이 세 상(相)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이리저리 서로 생기는데 생기는 것은 이미 없어지고, 또한 다시 머무르지도 않는다.
[문] 나에게 두 가지로 일어나는 것 등이 생기고 이리저리 서로 생기는 것이 있으니, 그러므로 그 중에 다르지 않는가?
[답] 어떤 이는 “말하고 나서 마땅히 다시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유위상과 무위상이 하염이 있는 것인가?
[답] 어떤 이는 “이도 아니고 그도 아니며 유위법(有爲法)일 뿐이니, 또한 마땅히 그 밖에 그를 유위법 모양으로 보지 아니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생기고 멸함과 항상 머무름은 변역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면 무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땅히 항상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항상함이 있는 모양은 유위(有爲)가 되는가?
[답] 어떤 이는 “무상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유위법에 속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고 말하고, 항상 함이 없다고 말하며 일어나 항상 머무름과 그것에 대해서도 무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무위상이 있더라도 지금 유위라고 해야 하는가?
[답] 어떤 이는 “항상함이 있다.
[문] 항상함이 없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무슨 이유인가?
[답] 모든 법의 행(行)이 성립되기 때문에 그가 무상함이고, 저 법의 행(行)이 성립되니, 그러므로 무상한 축에 들지 않으며, 모든 법에 묶이고 집착하니 그러므로 항상함이 있는 것도 아니요, 항상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첫 게품(偈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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