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 상권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아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시고 부처님께서 다시 홀로 90일 동안 앉아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 사람 및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려 하신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안반수의[=들숨과 날슘의 사띠]의 뜻]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고 돌이켜서 안반수의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안(安)은 몸이고, 반(般)은 숨[息]이며,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수(守)는 금함[禁]이고, 또한 계(戒)를 범하지 않음을 말한다.
금(禁)은 또한 보호함[護]이니, 호(護)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의(意)는 숨[息]이요, 또한 도(道)가 된다.
안(安)은 생겨남[生]이고, 반(般)은 멸함[滅]이며, 의(意)는 인연이 되고, 수(守)는 도가 된다.
안(安)은 셈[數]이고, 반(般)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止]이 된다.
안(安)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고, 반(般)은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안(安)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안(安)은 정(定)이고, 반(般)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안(安)은 유(有)이고, 반(般)은 무(無)가 되니,
뜻으로 유(有)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無)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有)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無)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다.
유(有)는 만 가지 물건을 말하고, 무(無)는 의(疑) 또는 공(空)이 된다.
안(安)은 본래의 인연이고, 반(般)은 처소가 없음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온 바가 없음을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수의(守意)가 된다.
안(安)은 청(淸)이고, 반(般)은 정(淨)이며, 수(守)는 무(無)가 되고, 의(意)는 위(爲)라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것이다.
무(無)는 활(活)이라 하고, 위(爲)는 생(生)이라 하니, 다시 고(苦)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活)이 되는 것이다.
안(安)은 미(未)이고, 반은 기(起)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문득 뜻을 지킬[守意] 수 있지만, 만약 이미 뜻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뜻을 지켜야 하니,
만일 이미 뜻을 일으켰다면 곧 달아나서 지키지 못하므로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셨다.
안(安)은 5음(陰)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般)은 5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곧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니, 뜻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道)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되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뜻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生]으로 인하여 죽음[死]이 있으므로 뜻을 지킬 수 없으며,
뜻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이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道)가 된다.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숨을 세고[數息] 서로 따름[相隨]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과 4제(諦)를 말한다.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비유컨대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며,
둘째 밝음을 보이는 것처럼,
수의(守意)도,
첫째 어리석음[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이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뜻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된다.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와 의(意)는 각기 다르다.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대경(對境)을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守)가 되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意)가 되니,
이것이 수의이다.
수의(守意) 가운데 네 가지 즐거움[樂]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上]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可]을 아는 즐거움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다.
법(法)은 행(行)이 되고, 얻음[得]은 도(道)가 된다.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 일]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 일에 안과 밖이 있다.
숨을 셈[數息]과 서로 따름[相隨]과 멈춤[止]은 밖[外]이 되고,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안[內]이 되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함과 서로 따름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뜻을 익혀서 도(道)에 가까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뜻을 거둠이 되며,
지(止)는 뜻을 정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여읨이 되고,
환(還)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정(淨)은 뜻을 지킴이 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일을 행할 뿐이다.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선(禪)을 얻지 못하는가?
습(習)을 다 버리며 도(道)를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지(止)는 멍에가 되고,
관(觀)은 씨앗이 되며,
환(還)은 비가 되고,
정(淨)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
숨을 세어서 바깥을 끊고,
서로 따라서 안을 끓으며,
지(止)는 죄를 멈추는 것이고,
관(觀)을 행하여 뜻을 제거하며,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還)이 되고,
생각이 끊어짐은 정(淨)이 된다.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뜻을 정하려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뜻을 끊으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도의 뜻을 얻으려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5음(陰)을 향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돌이킬[還] 것이요,
소유가 없으려면 마땅히 청정[淨]해야 할 것이다.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가가(家家)의 뜻을 다하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세간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 환(還)이 되며,
생각이 끊어지면 정(淨)이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5음(陰)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서로 따르는가?
5음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지(止)하는가?
5음을 관(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5음을 관하는가?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가?
고(苦)를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환(還)하는가?
생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정(淨)하는가?
5음(陰)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곧바로 지혜를 따르면 여덟 가지 도(道)를 얻고 따로 소원을 얻으니,
숨을 행할 때는 세는 것을 따르며,
서로 따를 때는 생각을 따르며,
멈출[止] 때는 정(定)을 따르며,
관(觀)할 때는 정(淨)을 따르며,
돌이킬[還] 때는 뜻을 따르며,
정(淨)할 때는 도(道)를 따르고 또한 행(行)을 따른다.
숨을 세는 것은 4의지(意止)가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4의단(意斷)이 되며,
멈춤[止]은 4신족념(神足念)이 되고,
관(觀)은 5근(根)과 5력(力)이 되며,
돌이킴[還]은 7각의(覺意)가 되고,
정(淨)은 8행(行)이 된다.
숨을 세는 것을 얻고도 서로 따르지 않으면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얻고도 멈추지[止]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멈춤을 얻고도 관(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고,
관(觀)을 얻고도 돌이키지[還]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돌이킴을 얻고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니,
청정함을 얻고 다시 청정해야 마침내 수의가 된다.
이미 숨을 생각하여 악(惡)이 생겨나지 않는데도 다시 세는 것은 함께 뜻을 막아 6쇠(衰)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 따름을 행하는 것은 6쇠의 행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고,
멈춤[止]은 6쇠의 행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관(觀)은 6쇠의 행을 끊으려는 것이고,
돌이킴[還]은 6쇠의 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며,
청정함[淨]은 6쇠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미 소멸하여 다하고 나면 문득 도(道)를 따르게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으려고 하는 것인데,
숨 가운데는 길고 짧음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이 길고 짧은 뜻을 막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의(守意)는 악(惡)을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니, 악은 또한 가히 지킬 수도 있고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악이 이미 다하면 마땅히 다시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