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장현종론 제1권
2. 변본사품(辯本事品)①
2.0. 서설
1) 서분(序分), 귀경게(歸敬偈)
일체종(一切種)의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신 모든 이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如理師]께 공경 예배하고서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1)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모든 이[諸]’라는 말은 비록 [부처님] 전체[總]를 나타내는 말일지라도 개별적으로 관찰해야 할 바가 있다.
개별적으로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라는] 이익의 공덕이 모두 원만함을 말한다. 즉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자리의 공덕이 원만하며,2) 은덕(恩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타의 공덕이 원만하니, 이는 곧 일체지(一切智)로써 능히 유정을 구제하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일체종(一切種)의 어둠’을 모두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지덕이 원만하였으며, ‘온갖 경계의 어둠’도 역시 영원히 멸하셨기 때문에 단덕이 원만하였다.3)
또한 정법(正法)의 손길을 뻗쳐 중생을 생사의 늪에서 건져 올려 빠져 나오게 하셨기 때문에 은덕이 원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의 경우, 비록 온갖 어둠은 깨트렸을지라도 필경 염오무지(染汚無知)만을 끊었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결여되어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를 능히 영원히 멸한 것은 아니다. 즉 [일체종지는] 수승한 지혜이기 때문으로, 그래서 일체지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능히 유정을 건져 올릴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어둠’이라 함은, 이를테면 백태의 막이 청정한 눈을 가리듯이 무지는 참된 견해[眞見]을 장애하기 때문에, 어둠이나 캄캄한 밤은 색상(色像)을 차단하듯이 무지는 진실의 뜻[實義]을 은폐하기 때문에 [무지를 ‘어둠’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든 유정에게 뛰어난 대치도(對治道)가 생겨날 때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멸하였다’고 일컬은 것으로, 이를테면 일체의 품류 (즉 種)와 온갖 경계의 어둠을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본송에서] ‘일체종(一切種)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였다’고 함에 있어, 그와 같은 생사는 바로 모든 유정이 무시(無始)이래 빠져 있는 곳으로, 헤어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늪에 비유하였다. 즉 중생이 그러한 늪 속에 빠져있어도 구하는 자 없었으나 교묘한 지혜와 대비(大悲)를 성취하신 분이 있어 진리에 부합하는 말씀을 설하여 거기서 건져 올려 빠져 나오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에게 공경 예배한다’고 함이란, 앞에서 설한 자리이타의 공덕을 모두 갖추시고, 능히 참다운 성교(聖敎)를 설하신 위대한 스승께 머리를 조아린다는 말이다. 즉 성문과 독각은 의요(意樂) 수면(隨眠)의 지혜(智) 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참다운 스승이 아니며,4) 오로지 불세존만이 이와 같은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앞서 언급한 [부처님] 전체를 나타내는 ‘모든 이[諸]’라는 말에 의해 관찰되는 바로서, 그가 제시한 가르침을 올바로 유통시키기 위해 먼저 참다운 가르침의 스승을 찬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곧 ‘찬탄 예배한다’는 말은 온갖 나쁜 장애를 소멸하고 뛰어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서 논의를 시작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對法藏)을 설하리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5)
2)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의 본질
대법(對法)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혜(淨慧)와 이에 수반되는 행(行)을 대법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능히 이를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와 ‘논’을 말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정(淨)’이란 무루(無漏)의 뜻이며, ‘혜(慧)’란 택법(擇法)의 뜻으로,6) 이는 바로 무루 혜근(慧根)에 모두 포섭된다.
‘오로지 무루의 지혜를 일컬어 대법이라고 한다’는 사실은 어떠한 근거에서 알 수 있는 것인가?
불세존께서 천제석(天帝釋) 등에게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나에게는 매우 심오한 아비달마(阿毘達磨,abhidharma, 論)와 비나야(毘那耶,vinaya, 律)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청하여 물어라”라고 설한 바와 같다.7) 이는 즉 성도(聖道)라든지 이러한 성도에 의해 증득되는 과보에 관해 천제석이 묻고 싶은 대로 청하여 묻는 것을 허락하는 말이다. 벌차(伐蹉,Vatsa) 종족들에 대해 마음대로 [청하여 묻게 하였던] 계경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무루의 지혜만을 일컬어 ‘대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것에 의해 제법(諸法, 모든 존재)의 실상을 현관(現觀)하는 경우 다시는 미혹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제법실상에 대한] 현관이 오직 ‘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겠는가? 그러한즉 대법은 오로지 ‘혜’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이치를 올바로 깨닫는 것을 설하여 ‘현관’이라 부른다. 따라서 현관의 작용은 오로지 ‘혜’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현관 중의 ‘혜’가 가장 뛰어나 세 가지 공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유독 그것만을 대법이라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8) 그렇지만 이러한 대법(즉 혜)은 그 밖의 다른 법과 관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혜’에 수반되는 행(行) 즉 수행(隨行) 역시 대법이라 이르니, ‘혜’의 권속을 일컬어 ‘수행’이라 한다.
[‘혜’의] 권속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혜’와 함께 일어나는 색[隨轉色]과 수(受)ㆍ상(想) 등의 온갖 심소법(心所法)과 생(生) 등과 심(心)을 말한다.9) 곧 이와 같은 무루의 5온(蘊)을 모두 설하여 대법이라 데, 이는 바로 승의(勝義)의 아비달마이다. 그리고 만약 세속(世俗)의 아비달마를 설할 것 같으면, 능히 이것을 획득하게 하는 온갖 혜(慧)와 온갖 논(論)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이것’이란 앞서 언급한 무루의 혜근을 말하며, ‘온갖 혜’란 (무루혜근을) 능히 획득하게 하는 세간의 세 가지 ‘혜’, 즉 세간의 뛰어난 지혜인 수혜(修慧)ㆍ사혜(思慧)ㆍ문혜(聞慧)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隨行)의 법을 말하는데,10) [무루혜근을] 획득하는데 가깝고 먼 것에 따라 세 가지 혜를 이 같은 순서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세간]‘혜’와 이에 수반되는 수행의 법을 떠나서는 무루혜근을 능히 증득할 수 없다. 이는 바로 무루혜근을 획득하는 뛰어난 방편이 되기 때문에 무루혜와 마찬가지로 대법(對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자비의 방편도 역시 자비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온갖 논’이란 능히 이러한 무루혜근을 획득하게 하는 『발지론(發智論)』 등의 온갖 논을 말한다.11) 이는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資糧, 자재와 식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대법(對法)이라 부르니, 이를테면 업의 이숙(異熟)과 같은 번뇌[漏]의 자량도 역시 업이라고 것과 같다.12)
그리고 앞서 언급한 ‘온갖 혜’라는 말에는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生得慧]도 포함된다. 즉 오로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지혜가 있어야 대법론(對法論)을 능히 올바로 외워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대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 대법장(對法藏, 아비달마코샤)의 의미
그렇다면 이 논(즉 『구사론』)도 바로 무루혜의 뛰어난 자량이 되는 것인데, 어찌 역시 대법이라고 이르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대법이라고 별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13) 『구사론』의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대법)의 승의를 포섭하고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법구사(對法俱舍)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장(藏,kośa, 즉 俱舍)’이란 핵심[堅實]을 말하니, 마치 수장(樹藏) 즉 ‘나무의 속 줄기’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대법론 중의 온갖 핵심적인 뜻이 모두 여기에 포섭되어 들어있어 바야흐로 이 논(즉 『구사론』)은 그러한 대법의 장(藏)으로, 이는 바로 ‘대법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혹은 ‘장’이란 근거[所依]의 뜻이니, 마치 도장(刀藏) 즉 ‘칼의 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그러한 대법이 이 논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거기서의 내용과 말을 인용하여 이 논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논은 그 같은 대법을 장(藏)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법장’이라 이르는 것으로, 이는 바로 ‘대법을 근거로 삼았다’는 뜻이다.14)
4) 아비달마의 목적과 설자(說者)
그렇다면 그 같은 대법은 어떠한 이유에서 설하게 된 것이며, 또한 누가 가장 먼저 설한 것인가?
마땅히 대법을 설한 이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미 물었기 때문에 대법을 설한 이유와 그것을 설한 이에 대해 마땅히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번뇌를 능히 소멸할 만한 뛰어난 방편으로
택법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로 말미암아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는 것
그래서 적대사(寂大師)께서는 대법을 설하셨던 것이다.15)
논하여 말하겠다.
택법(擇法, 법의 간택 분별)을 떠나서는 세간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온갖 번뇌[諸惑]를 능히 소멸할 만한 그 어떤 뛰어난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약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거나 알지 못하는 법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나는 괴로움을 능히 바로 멸진(滅盡)하였다’고 끝내 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간의 사람들은 아직 온갖 번뇌를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가지 존재(有,욕유ㆍ색유ㆍ무색유)의 바다에서 태어나고 죽으며 윤회한다. 곧 (아비달마를 설한 것은) 세간의 사람들로 하여금 택법을 닦고 익혀 세 가지 존재를 낳는 원인인 번뇌를 영원히 적멸(寂滅)하게 하기 위함이니,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스승께서는 일찍이 스스로 아비달마를 설하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만약 (아비달마를) 설하지 않으셨더라면 사리자(舍利子) 등의 여러 위대한 성문(聲聞)들 역시 제법의 실상에 대해 참답게 사택(思擇)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곧 불(佛)ㆍ대사(大師)께서는 교화될 자들의 본성의 차별에 따라 곳곳에서 산설(散說)하였고, 이를 존자(尊者)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등의 위대한 여러 성문들이, 마치 위대한 존자 가섭파(迦葉波) 등이 함께 모여 율(律)과 계경(契經)을 결집하였듯이 미묘한 원지(願智)로써 과거불께서 설하신 [대]법의 가르침을 관찰하여 그에 감응한 바대로 안치 결집하였던 것이다.16)
그런데 율장과 경장 두 가지는 말[文]에 따라 결집한 것이지만, 오로지 대법장만은 뜻[義]에 따라 결집한 것으로, 모든 이들이 결집의 의의에 대해 말하기를 경과 율에 비해 그것(즉 대법)이 수승하다고 설하고 있듯이, 대법은 부처님의 성교(聖敎)에 따라 결집되었기 때문에 이는 바로 부처님께서 인정하신 바로서 불설(佛說)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