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조를 찾아 - 1. 이호우의 ‘달밤’
남진원
이호우의 시조는 힘이 있고 또한 그 서정의 울림이 그윽하다.
시조 '달밤'도 그윽한 정취와 그리움을 새길 수 있는 글이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봅니다
아득한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 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 이호우의 '달밤' -
낙동강의 나루에 빈 배가 떠 있는 고적한 모습을 감흥있게 표현하였다. 낙동강에 달빛이 흘러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정취에 잠긴다.
누구나 한 번 쯤 막연한 그리움에 쌓인 적이 있었던 때와 같이 여기서도 무언지 모를 그리움에 빠지는 작자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작자는 지향없이 어디론가 떠나보려고 한다. 낭만적인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삶의 고단함 보다는 동경과 그리움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이호우는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는 조부가 세운 의명학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조부가 학교를 세울 형편인 걸 보면 매우 유복한 환경이었다. 경성제일고보를 다니고 그 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도 입학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감수성이 강한 사색적인 성격이었기에 1928년 맏형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신경쇠약증에 시달린다.
머리맡 탁자 위에 다만 한 개 약병
한 묶음 꽃을 안고 찾아올 사람은 없다
너무도 초라한 삶이 병보다도 설어라
‘병실’이란 시조인데 꽃을 안고 찾아주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병을 이길 생각보다는 주위에 꽃을 들고 병문안을 해 줄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고 있다. 꽃은 오히려 세균을 감염시키는 물건이기에 병실에 꽃을 들고 오는 것을 대체로 꺼린다. 유복한 환경에서 약골인 서생으로 자란 이호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부친이 일제 때에 군수를 지낸 것을 보고 아버지와의 심리적인 갈등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인물이라기 보다 부끄럽게 여겼다. 해방이 될 때 까지 포목상, 정미소 등을 경영했지만 실패한다. 그의 실패는 어찌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그가 사업을 할 인물로는 애당초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해방이 되어 대구에 정착하면서 고등법원 재무부장, 문화극장 사무국장 등의 일을 보다가 대구일보 편집에 참여한다. 이때부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그는 또 불행한 일을 겪었는데 39세의 나이에 남로당 도간부라는 모략을 받아 사형언도까지 받게 된다. 나중에는 무죄로 풀려난다.
생의 고초를 겪은 이호우는 이후 새로운 변모를 한다. 옛날의 감성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격을 강하고 의지있는 인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1955년 현대문학지 3월호에 시조 ‘바람벌’을 발표했는데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필화를 당했고 1958년 KAL기 납북 사건 때 논설이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로 두 번 재 필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부정과 저항의 비판정신이 작품 속에 융해되면서 시세계의 심도를 높여주었다.
1960년 4.19가 일어나고 이호우는 공직생활에서 벗어나 시조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김상훈은 그가 죽자 추도사에서 ‘이호우의 시에는 뜨거운 애국이 있고, 호막(浩漠)한 대 우주의 기식과 생멸하는 만상의 절절한 감격이 넘치고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한마디로 의지와 신념의 소유자였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패에 전염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 * 윤일광의 석사학위 논문 이호우 시조 연구, 1992.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