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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자량론 제1권
【문】
존자(尊者)는 이미 자량의 가르침에 대한 연기(緣起)를 바르게 설명하였다.
이제 마땅히 자량의 체(體)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반야바라밀]
【답】
이미 보살의 어머니라면
또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기도 하나니,
반야바라밀은
깨달음의 첫 자량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의 어머니이므로, 보리의 첫 자량이다. 왜냐하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체의 감각기관 중에서 안근(眼根)이 가장 수승하고,
모든 신체의 부분에서 머리가 가장 수승한 것처럼,
모든 바라밀(波羅蜜)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가장 수승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반야바라밀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첫 자량이 되는 것은 앞선 행[前行]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 중에서 믿음을 앞선 행으로 삼는 것처럼,
모든 바라밀 중에서 반야바라밀이 앞선 행인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저 다나(陀那: 布施)를 가지고 보리에 회향하지 않으면 곧 다나바라밀이 아니다.
이와 같이 시라(尸羅: 持戒) 등을 보리에 회향하지 않으면 또한 시라바라밀 등이 아니다.
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곧 반야(般若: 智慧)이다. 반야의 앞선 행을 말미암기 때문에 회향할 수 있다.
이렇게 앞선 행이므로 모든 바라밀 중에서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또 이 모든 바라밀은 3륜(三輪)의 청정한 인체(因體)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모든 바라밀의 3륜의 청정한 인체(因體)로 삼는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3륜이 청정하다는 것은 보살이 반야바라밀 중에서 보시를 행할 때에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취하는 것을 여의기 때문에 받는 자의 차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일체의 처소에서 분별을 단절하기 때문에 보시의 과보를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모습이므로 이와 같이 보살은 3륜의 청정한 보시를 획득한다.
청정한 보시처럼 청정한 계(戒) 등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반야바라밀은 그 모든 바라밀의 3륜의 청정한 인체(因體)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또 큰 과보[大果]이므로 반야바라밀의 큰 과보는 모든 바라밀보다 수승하니, 경전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보리심의 복덕과
섭수하는 법[攝受法]으로써
공(空)에 대하여 믿고 이해하면
가치의 수승함이 16분(分)이 된다.
비마라경(鞞摩羅經: 維摩經) 가운데 큰 과보의 인연을 이 중에서 마땅히 설명하나니, 이것이 큰 과보이므로 반야바라밀을 보리의 첫 자량으로 삼는다.
【문】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이 보살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
【답】
능히 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방편에 포섭되는 반야는 모든 보살을 낳아서 위없는 보리를 추구하게 하지 성문과 독각을 추구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을 출생하는 인체(因體)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
또 다섯 바라밀 중에 안치하기 때문이니, 명발라이파저(冥鉢囉膩波低)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명(冥)은 성품[性]이 되고 발라이파저는 읽음[誦]이 되니, 바로 이 성상(性相)이 마다(摩多)가 된다.
[마다는 번역하면 어머니가 된다. 자성론(字聲論) 중에서 마다의 글자는 명발라이파저의 언어 속에 나온다. 명은 마다의 자체 성품[體性]이고, 발라이파저는 마다의 뜻을 읽는 것이다. 발라이파저는 바르게 번역하면 안치하다가 된다. 그러므로 안치하다는 것으로써 어머니의 의미로 삼는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낳으면 때로 상부(床敷)에 안치하기도 하고 혹은 지상(地上)에 안치하기도 하듯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마찬가지다.
저 보리를 구하는 보살을 출생할 때 보시 등의 다섯 바라밀 중에 안치하나니, 보리를 구하는 보살을 안치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또 헤아리기[量] 때문이니, 망마니(茫摩泥)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망(茫)은 성품[性]이 되고 마니(摩泥)는 읽음[誦]이 된다. 바로 이 성상(性相), 이것이 마다(摩多)가 된다.
[자성론(字聲論) 중에서 마다의 글자는 또 망마니의 언어 속에서 나온다. 망(茫)은 또한 자체 성품이고, 마니는 그 의미를 읽는 것이다. 마니는 바르게 번역하면 헤아림이 되니, 이 때문에 헤아림으로써 어머니의 의미로 삼는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출생하고 나서 때에 따라 내 자식은 이것을 먹음으로써 몸이 증대하고 이것을 먹음으로써 몸이 감소한다고 주량(籌量; 헤아림)하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다.
반야바라밀로써 스스로 그 몸을 헤아리면서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하고,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스스로 헤아리는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또 짐량(斟量)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건을 측량할 때 발라살타(鉢邏薩他: 突嚧拏의 16분의 1)가 있고, 아택가(阿宅迦: 돌로나의 4분의 1)가 있고, 돌로나(突嚧拏: 1斛)가 있고, 거리저(佉梨底: 돌로나의 16배) 등이 있어서 분량을 짐작하는 것처럼,
[... 등: 이곳의 합(合)ㆍ승(升)ㆍ두(斗)ㆍ곡(斛)이라는 부류와 같다.]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다.
즉 이것은 초발심이고, 이것은 수행이고, 이것은 득인(得忍)이라는 등의 짐량하는 인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또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염송[誦]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러 경전에서 모체로 짓는 것을 염송이라 이름한다.
그들 경전 중에 모든 불국토에 두루 퍼진 보살의 명칭이 있는데 비마라길리제(毘摩羅吉利帝)라고 이름하는데,
[예전에 유마힐(維摩詰)이라고 한 것은 바르지 않다]
가타(伽陀: 偈頌)를 설하여 말한다.
반야바라밀은
보살 인자(仁者)의 어머니이다.
훌륭한 방편을 아버지로 삼고
자비를 여식으로 삼는다.
다시 그 밖의 경전에서도 이와 같이 염송한다.
수다라로써 헤아리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한다.
【문】
어찌하여 반야바라밀은 또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가?
【답】
장애가 없는 지혜를 출생하고 현시(顯示)하기 때문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아함(阿含)을 말미암기 때문에 번뇌를 이미 다했고 마땅히 다할 것이며 지금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출생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 삼는다.
장애가 없는 지혜를 현시한다는 것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모두 반야바라밀에서 장애가 없는 지혜를 현시하는 것이며, 이렇게 장애가 없는 지혜를 현시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도 또한 반야바라밀을 어머니로 삼는다.
여기에 수로가(輸盧迦: 偈頌)가 있다.
큰 자비에 상응하는
반야바라밀을 말미암아서
무위(無爲)의 험난한 언덕을
불자(佛子)는 능히 넘을 수 있어서
무등(無等)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포섭하고
지도(智度)를 어머니로 삼기 때문에
대인(大人)은 능히 이와 같으며
지도(智度)의 획득을 말미암기 때문에
비로소 부처님의 본체[佛體]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수승한 선인[勝仙: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어찌하여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가?
성문이나 독각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위[上]를 더 알아야 할 바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이 지혜가 일체의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이 반야바라밀 외에 수승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삼세(三世)에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허공이 가없이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
와 같은 수승한 인연은 반야바라밀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으며,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문】
이미 보리의 첫 자량을 대략 설명했으니,
두 번째의 자량을 이제 마땅히 설명해야 한다.
【답】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
이 다섯 가지 외에는
모두 지도(智度)를 말미암기 때문에
바라밀에 포섭된다.
[다나바라밀]
이 중에서 다나바라밀(陀那波羅蜜)이 두 번째 보리의 자량이 되니, 반야의 앞선 행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보리를 이루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니, 이 때문에 보시를 두 번째 자량으로 삼는다.
그 중에서 타인의 몸과 마음에 즐거움을 생기게 하므로 이름하여 보시라고 하지 괴로움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다.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이다.
재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공식(共識)과 불공식(不共識)이다.
공식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안[內]과 밖[外]이다.
자신의 지절(支節; 사지)을 보시하거나 몸 전체를 보시하는 것, 이것은 내시(內施)가 된다.
남자와 여자, 아내와 첩, 두 다리[二足], 네 다리[四足] 등을 보시하는 것, 이것은 외시(外施)가 된다.
불공식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가식(可食)과 불가식(不可食)이다.
이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몸 안에 수용하는 반식(飯食) 등의 물건을 보시하는 것,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可食]이 된다.
몸 밖에 수용하는 향과 만[香鬘]에 포섭되는 금ㆍ은ㆍ진귀한 보배ㆍ의복ㆍ땅과 전답ㆍ재물ㆍ동산과 연못ㆍ유원지 등을 보시하는 것,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不可食]이 된다. 그러나 수용할 수는 있다.
법시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이다.
법시로 인하여 유전(流轉)중에서 애호할 만한 신근(身根)의 경계를 낳는 것, 이것은 세간이 된다.
[유전(流轉): 예전에 나고 죽음이라고 말한 것은 바른 번역의 명칭이 아니라서 이제 유전이라고 고친다. 이후에 모든 유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 의미이다]
법시로 인한 과보가 유전을 초월해 벗어나는 것, 이것은 출세간이 된다.
그 재시와 법시에는 각각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유착(有着)과 무착(無着)이다.
자신을 위하거나 자생(資生)을 위하거나 수승한 과보를 위해서 상속을 희망하여 재물이나 법을 보시하면, 이것은 집착이 있는 것[有着]이 된다.
혹은 일체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하거나 혹은 장애가 없는 지혜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집착이 없는 것[無着]이 된다.
그밖에 다시 두려움이 없는 보시[無畏施] 등은 또한 재시 속에 수순해 들어간다. 저 두 가지 보시의 과보 및 여분의 기[餘氣][진액(津液)을 말한다.]는 자세하게 대승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여기에서는 마땅히 요약하여 게송으로 말한다.
반식(飯食)과 피복(被服)은
필요에 따라서 모두 보시하며
또한 화만(花鬘)ㆍ등(燈)과
말향(末香)ㆍ음악(音樂)을 보시한다.
혹은 모든 맛있는 것과
약물(藥物) 및 의침(猗枕)과
질병을 요양하는 데 필요한 것과
아울러 의료인과 급시(給侍; 시중)를 보시한다.
남녀와 아내와 첩
노비 및 창고와
장식한 모든 채녀(婇女)를
필요에 따라서 보두 보시한다.
소유한 모든 보물과
갖가지 장엄구(莊嚴具)와
코끼리ㆍ말ㆍ수레와 타는 것 등과
미묘한 물건을 남김없이 보시한다.
원림(園林)의 수도하는 처소와
연못과 우물ㆍ집회당(集會堂)과
토전(土田)과 아울러 잡다한 물건과
객사(客舍) 등을 모두 보시한다.
혹은 두 다리[二足]와 네 다리[四足]
혹은 다시 하나의 주저(洲渚; 모래톱)와
촌락과 국도(國都)와
그리고 왕의 영역을 전부 보시한다.
완호(玩好)한 물건을 보시하여
희망하는 자를 이롭고 즐겁게 하며
모든 중생의 의지가 되어서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두려움 없음을 보시한다.
그 버리기 어려운
손ㆍ발ㆍ눈ㆍ귀ㆍ코를 보시하고
또한 심장과 머리를 보시하며
온몸을 다 능히 버린다.
보시를 수행할 때에는
항상 받는 자의 입장에서
마땅히 복전(福田)의 생각을 내고
또한 친한 권속처럼 대하여야 한다.
보시하는 모든 과보에
선한 취집(聚集)을 구족하여
자신과 타인에게 회향하여
부처와 정토를 성취한다.
보살이 행하는 보시는
올바로 불체(佛體)에 회향하니
이 보살의 다나(陀那)를
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이 언덕이든 저 언덕이든
능히 설하는 자가 없지만
보시의 과보가 피안에 도달하면
보시의 저 언덕[施彼岸]이라고 말한다.
이제 시주(施主)의 차별을 말한다.
애욕의 과보를 탐내지 않고
자비롭기 때문에 삼륜(三輪)이 청정하니,
정각(正覺)은 저 보시를 말하여
이것이 보리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미 이 일을 지었다고 하고
바르게 짓고 마땅히 짓겠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 베풀었다고 한다면
용임(傭賃: 품삯)이지 보시가 아니다.
보시의 과보가 증대되기를 탐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즉각 능히 희사하는 것을
식리인(息利人: 이자나 배당금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지혜로운 자는 시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익되는 과보를 탐내지 않고
오직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시하면
이것을 진정한 시주라고 하며
나머지는 모두 상업적[商販]이다.
큰 구름이 두루 비를 뿌리는 것처럼
모든 곳에서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이것을 큰 시주라고 이름하며
나머지는 모두 적은 부분일 뿐이다.
보시 및 보시의 과보는
연민으로 필요한 자에게 주나니,
시주는 뭇 사람에게
마치 그 부모와 같다.
보시하는 물건과 받는 자
및 보시하는 자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항상 기쁘게 보시하는,
이것을 이름하여 시주라고 한다.
만약 부처님과
보리와 보살을 분별하지 않고서
보리를 이루기 위하여 보시하면
그는 마땅히 속히 성불할 것이다.
[시라바라밀]
【문】
이미 다나바라밀을 해설하였다.
이제는 마땅히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설명해야 한다.
【답】
바라밀의 의미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시라(尸羅)의 의미를 이제 설명해야겠다.
시라이기 때문에 시라라고 말한다. 시라라고 말하는 것은 익혀서 가까이하는 것[習近]을 이르는데, 이것이 체상(體相)이다.
또 본성(本性)의 의미이니, 마치 세간에 즐거운 계[樂戒]나 괴로운 계[苦戒] 등이 있는 것과 같다.
또 청량(淸凉)한 의미이니, 후회하지 않는 인(因)이 되어서 마음의 뜨거운 걱정과 고뇌를 여의기 때문이다.
또 안은(安隱)의 의미이니, 능히 다른 세상에서 즐거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안정(安靜)의 의미이니, 지관(止觀)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또 적멸한 의미이니, 열반의 즐거운 원인을 얻기 때문이다.
또 단엄(端嚴)의 의미이니, 장식하기 때문이다.
또 정결(淨潔)의 의미이니, 나쁜 계[惡戒]의 더러움을 씻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두수(頭首)의 의미이니, 무리 속에 들어가서도 겁약(怯弱)이 없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 찬탄(讚歎)의 의미이니, 명칭을 능히 낳기 때문이다.
이 계(戒)는 몸ㆍ입ㆍ마음의 선한 행위가 굴러서 생겨난 것이다.
그 가운데 생명을 살해하는 것ㆍ주지 않는데 취하는 것[不與取]ㆍ음욕의 삿된 행위[欲邪行] 등을 멀리 여읜 것, 이 세 가지는 신계(身戒)이다.
망령된 말[妄語]ㆍ파괴하는 말[破壞語]ㆍ추악한 말[麤惡語]ㆍ잡되게 희롱하는 말[雜戱語] 등을 멀리 여읜 것, 이 네 가지는 구계(口戒)이다.
탐욕[貪]ㆍ성냄[瞋]ㆍ삿된 견해[邪見] 등을 멀리 여읜 것, 이 세 가지는 의계(意戒)이다.
몸ㆍ입ㆍ마음의 선한 행위가 굴러서 생겨난 이와 같은 열 가지 계는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서 생겨난 열 가지 나쁜 행위에 대치(對治)하는 것이다.
그 열 가지의 악한 행위를 하(下)ㆍ중(中)ㆍ상(上)으로 항상 가까이하여 습득하기 때문에 지옥ㆍ축생ㆍ염마(閻摩)의 세계 등으로 떨어진다.
앞에서 헤아린 열 가지의 선한 행위에 대한 계는 깨달음의 분수[覺分]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하ㆍ중ㆍ상으로 항상 가까이하여 익히기 때문에 복(福)의 상상(上上)의 차별에 따라 마땅히 하늘나라와 인간의 차별을 얻을 것이다.
깨달음의 분수와 상응하는 열 가지 선한 행위의 계는 상상(上上)으로 항상 익히고 가까이해서 자주 행하므로 마땅히 성문지(聲聞地) 및 보살지(菩薩地) 중에 굴러서 수승한 차별을 얻을 것이다.
또 이 보살계(菩薩戒)의 모임에는 다함이 없는 예순여섯 종류가 있는데,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는 바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요약하여 말하면 두 가지의 계가 있으니, 이른바 평등종시계(平等種蒔戒)와 불평등종시계(不平等種蒔戒)이다.
평등종시계란 이 선한 몸ㆍ입ㆍ마음의 행위를 쌓아 모음으로써 세세생생 혹은 영역[界], 혹은 부유함과 즐거움, 혹은 성문과 독각, 혹은 상보(相報), 혹은 정토, 혹은 성숙한 중생, 혹은 정변각(正遍覺) 등의 종자를 이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여 평등하게 종자를 이식하는 계[平等種蒔戒]라고 한다.
이것과 서로 위배되는 것을 평등하게 종자를 이식하지 않는 계[不平等種蒔戒]라고 한다.
다시 두 가지의 계가 있으니, 이른바 유작계(有作戒)와 무작계(無作戒)이다.
작위 하는 가운데 작위 하는 바가 있는 것을 작위가 있는 계[有作戒]라고 하며,
이것과 서로 어긋나는 것을 작위가 없는 계[無作戒]라고 한다.
다시 아홉 가지의 계가 있으니, 범부계(凡夫戒)ㆍ외도오통계(外道五通戒)ㆍ인계(人戒)ㆍ욕계천자계(欲界天子戒)ㆍ색계(色界)천자계ㆍ무색계(無色界)천자계ㆍ모든 학(學)과 무학(無學)의 성문계(聲聞戒)ㆍ독각계(獨覺戒)ㆍ보살계(菩薩戒)이다.
범부계는 태어나는 처소에 들어가므로 다한다. 외도오통계는 신통이 물러나므로 다한다.
인계는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를 다하므로 다한다.
욕계천자계는 복이 다하므로 다한다.
색계천자계는 선나(禪那)가 다하므로 다한다.
무색계천자계는 삼마발제(三摩鉢帝)가 다하므로 다한다.
모든 학과 무학의 성문계는 구경(究竟) 열반하므로 다하고,
독각계는 큰 자비를 결여하므로 다한다.
그러나 보살계는 다함이 있지 않으니, 이 계가 능히 모든 계를 드러내서 밝히기 때문이며, 종자가 상속하여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보살이 상속하여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여래의 계[如來戒]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보살계를 다함이 없다[無盡]고 말한다.
모든 보살계는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에 계바라밀(戒波羅蜜)이라고 말하는데, 이 가운데 수로가(輸盧迦)가 있다.
마치 아버지가 공력(功力)이 있는 아들을 애호하듯이
또한 스스로의 몸이 수명을 애호하듯이,
출리(出離)를 애호하는 계도 마찬가지이니
큰마음이 굳건한 자[大心健者]가 애호하는 바이다.
이 계는 모니(牟尼)가 익혀서 가까이 한 후에
욕망을 해탈하고 애욕을 여의었으니
까마귀와 비슷한 범부는 버리지만
지혜로운 자는 항상 이 계를 애호해야 한다.
이 계는 자신과 타인을 이익 되게 하고
몸을 단정히 장엄해 근심과 결핍을 여의게 해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수승한 장엄이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계를 애호해야 한다.
이 계는 타인의 힘을 말미암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구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두 자신의 힘으로 인하여 그것을 얻기에
그러므로 상인(上人)은 이 계를 애호한다.
재물과 국경(國境), 아울러 토지와
자신의 살갗과 살 및 머리를
모두 능히 버려도 계를 버리지 않으니
저 수승한 보리를 청정케 하기 위함이다.
가령 하늘나라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설령 지상에서 하늘로 승천하여도
더러움을 여의고 물듦이 없는 경지를 채우기 위하여
응당 결정해서 이동하지 말 것이다.
이미 계의 방편을 만족하면
이때 바로 제2지(第二地: 離垢地)를 얻으며
이미 더러움을 여읜 청정지[離垢淸淨地]를 얻으면
이때에 마음이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다시 하늘나라ㆍ인간 세계ㆍ아수라의 세계와
축생 중에서 교화해야 할 자는
교화하는 방편을 잘 알고 나서
생각에 따라 그에게 가서 이롭게 한다.
혹은 보시로써 중생을 거두고
혹은 애어(愛語)로 그의 마음에 들어가며
혹은 다시 그에게 안온한 이로움을 주고
혹은 일을 함께하며 그 힘을 돕는다.
혹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 그 주인이 되고
혹은 하늘나라 무리에 기거하면서 자재하며
각각의 방편으로 그를 인도하여
전부 마땅히 백법(白法: 선한 법, 바른 법)에 안치시키네.
참다운 계의 신통을 구족하므로
문득 큰 바다를 마르게 하고
세간이 다할 때 불길이 더욱 치성하여도
찰나에 전부 소멸시킬 수 있네.
세간의 갖가지 고뇌를 관찰하건대
고뇌로 병이 생기는 것은 친한 이를 여읜 탓이니
지혜로운 자에게는 계에 통달한 방편이 있어
세간의 친한 의지가 되어 수승한 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