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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승론 상권
1. 의품(2)
[3장에 대한 오해]
그대가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은 삼장이라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지금 단지 『증일아함』ㆍ『중아함』ㆍ『장아함』ㆍ『잡아함』의 백천(百千) 등의 게(偈)를 일장(一藏)으로 여기고 비니(毘尼)ㆍ아비담의 이백천(二百千)의 게를 이장(二藏)이라 여기며, 이들을 완전히 갖추어 닦아 익히는 것을 삼장(三藏)이라 여긴다.
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삼장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머지 모든 경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러한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함ㆍ비니ㆍ아비담 등이 또한 삼장이라면 『잡장(雜藏)』ㆍ『사두라경(舍頭羅經)』ㆍ『태경(胎經)』ㆍ『간왕본생(諫王本生)』ㆍ『벽지불인연(辟支佛因緣)』 등 이와 같은 팔만사천법장이나 존자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받아 지닌 이와 같은 일체의 경전들이 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만약에 이러한 과실을 없게 하려면 일체가 다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해진 것이 모두 장(藏)이라면 이는 곧 백천여 가지의 장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규정한 삼장이라는 말은 저절로 무너진다.
[성문과 부처님의 법]
또한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20년 후에 바야흐로 승중(僧衆) 속에서 스스로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매우 늙어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법을 공급하여 전해야 하는데 어느 누가 내가 법을 공급하면 그것을 섬길 수 있는지 마땅히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면 말해 보아라.”
그때 대중들 거의 모두가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난은 곧 함께 범행을 닦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여래에게는 팔만사천의 법무더기가 있어서 제가 지금 다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나, 이전의 20년 동안에는 두 사람의 비구만이 받아 지닐 수 있었으니, 저는 그것에 관해서는 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을 다문(多聞)이라 할 수 없다. 부처님께 법을 설하시는 동안에도 아난은 실제로 법을 받아 지니는 일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중아함』에서는 제석환인이 울다라(鬱多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자시여, 내가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염부제의 일체 중생을 관찰해보니 어느 누구도 불법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이 일체의 불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문 제자나 아난은 불법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러 대승경에서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정월장천자(淨月藏天子)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은 양이 적어 ‘받아 지닌 것이 한량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말하지 못하였다. 아난은 내가 설한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지니지 못한다.
선남자여,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시방세계의 범석(梵釋)ㆍ사천왕ㆍ천룡ㆍ야차ㆍ건달바와 그리고 모든 보살이 다 모여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지혜를 밝히는 수다라의 게송ㆍ장구와 중생이 행해야 하는 모든 바라밀을 설하였고,
성문ㆍ벽지불승을 설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찬탄하였으며, 모든 바라밀을 만족하게 하였고,
나아가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자세하게 법을 펴기를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하였다.
설령 염부제를 가득 채울 만큼의 미진수와 같은 다문(多聞)의 지혜가 모두 아난과 같더라도 저 하루의 낮과 밤에 비하면 백천억분의 일만큼도 갖출 수 없으며,
나아가 다시 시방의 미진수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의 다문이 모두 아난과 같다 하더라도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한 법을 받아 지닐 수 없음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곳곳의 경전 가운데서 또한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감당하여 맡을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아난이 일체의 부처님 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 여래ㆍ세존께서는 아난에게 다문 가운데 제일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 부처님께서 성문 대중들 가운데서 짐짓 아난을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보살이라고 일컫지는 않으셨다. 또한 그대들은 아난이 지닌 것도 다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대승이 갖추고 있는 깊은 뜻에 있어서랴.
그대의 생각이 만약 성문승을 보살승이라고 여긴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문승의 인(因)이 대승의 인과 다르지 않다면 과도 응당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과(果)가 다르기 때문에 인(因) 역시 다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단지 번뇌의 장애만을 끊고 무상행(無常行)을 관(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들어야 하지만,
보살은 미세한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고 나아가 일체법이 결국은 공(空)임을 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연지(自然智)ㆍ무사지(舞師智)를 얻어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성문승은 대승과 같을 수 없다.
[성문 해탈과 대승 해탈]
【문】 부처님께서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 성문이 해탈할 때에는 자못 수미산 등으로 하여금 다 도량을 향하게 하고 그것들이 몸을 굽히도록 하거나, 광명이 시방세계의 80유순에 걸쳐 두루 비추어 일체의 악마들이 다 와서 항복하게 할 수 없으나, 보살이 해탈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른 경전에서 비록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대소(大小)에는 실제로 차이가 있다‘고 하셨다.
비유하자면 충치나 겨자씨의 구멍이 비록 구멍[空]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시방세계 가운데의 공간[空]과는 동일하지가 않은 것처럼, 비록 빈 공간[空]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 규모의 크기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 예를 들면 반딧불을 태양이나 달빛에 비교하고자 하는 것과 같고 또한 모기를 금시조와 비교하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사류지(娑留枝)비구가 부처님의 본행(本行)에 대해서 게송으로 설한 것과 같다.
일제의 모든 광명 가운데
등불이나 번갯불
별빛 그리고 달빛의 비춤에는 차이가 있으니
그 가운데 태양빛이 가장 으뜸이고
날아다니는 곤충이나 짐승 가운데
모기나 날개미나 벌,
뭇 새들이 나는 것에는 가기 차이가 있으니
금시조가 가장 으뜸이어서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없네.
이러하기 때문에 비록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 규모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인(因)에 이미 차이가 있다면 어찌 그 과(果)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와 같이 관찰하면 해탈이 똑같지는 않다.
성문해탈을 애진(愛盡)해탈이라 하나니, 이는 일체의 해탈은 아니다. 단지 둔한 근기를 지닌 지혜가 적은 중생을 위하여 짐짓 가명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대승의 해탈은 번뇌의 습기를 끊어 일체를 모두 다하는 것[盡]으로 근기가 뛰어난 보살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설하였다.
가령 그대가 지금 성문해탈이 곧 대승해탈이라고 한다면, ‘여래는 곧 일체종지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몸이 조금 편찮으시자 목련을 파견하여 기국(耆毱)이 있는 처소를 찾아가 어떤 약이 필요한지 물어보라고 하셨다.
이때 기국이 이미 세상을 뜬 지 7일이 지나 도리천에 태어났기에 목련은 그 하늘의 처소에 찾아갔다.
그때 기국이 후원으로 들어오자, 목련이 곧 물었다.
“여래께서 환후가 있으신데 어떤 약이 필요합니까?”
이에 답하였다.
“우유를 발효시킨 소(酥)가 효용이 있을 것입니다.
하온데 여래의 몸은 마치 금강과 같아서 모든 악이 이미 멸하였을 텐데 어찌 병환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기국에게 답하였다.
“예를 들면 바구라(婆拘羅)비구는 90겁 전에 같이 범행을 닦고 있었던 사람에게 하나의 약 열매를 보시한 공덕으로 몸에는 항상 병이 없었고 최후의 몸을 받아 사는 동안에는 그 나이가 80에 이르렀으나 처음부터 조금도 질병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아리륵과(訶梨勒果)를 조금 보시한 인연으로도 질병을 얻지 않았거늘 하물며 여래께서 억백천만아승기겁 동안에 단바라밀(檀波羅蜜)을 구족하고 모든 공덕을 갖추었으며 나아가 몸과 수족을 잘라 골수ㆍ뇌ㆍ피ㆍ살을 병든 이에게 보시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어찌 병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문승과 대승]
경에서 설하는 대로라면 여래는 일체지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여래께서는 또한 어느 때 성으로 들어가 걸식한 후 발우를 비우고 돌아와 제바달다를 제도하여 출가시키셨다.
『고수경(枯樹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큰 불덩어리를 보고 그때 여러 비구들 가운데 퇴전하는 마음을 낸 자가 있자,
여래께서는 말을 부리는 만숙(滿宿)을 제도하기 위하여 바라문 탈뢰자(奪賴闍)ㆍ살차니건(薩遮尼乾)ㆍ손타리(孫陀利) 등을 꾸짖고 90일 동안 말보리죽을 드셨으며 목련ㆍ사리불도 질그릇 굽는 방에 들어가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만약 다른 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여래는 이미 일체의 모든 악을 다하였고 일체의 한량없는 공덕을 가득 구족하셨으니, 다른 악업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커다란 과실이다.”
그대는 일찍이 여러 경 가운데서 여래께서는 일제의 번뇌 업과 번뇌 습기를 영원히 끊었다고 설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
예컨대 마타차리(摩陀遮離)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일체의 번뇌 습기가 다하여
오로지 세상을 구원하실 분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어 지니시고
공덕을 모두 원만하게 이루셨네.
세 가지의 습기가 있으니, 이른바 업습(業習)ㆍ번뇌습(煩惱習)ㆍ위의습(威儀習)이다.
이 세 가지 습기를 여래께서는 영원히 다하였다.
이러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업이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이는 큰 과실이다.
그대가 지금 만약에 이것을 방편이라 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의 생각은 먼저 부처님 몸이 실재한다고 말했지 방편이라거나 응화(應化)라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몸[佛身]은 하나이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다시 방편과 응화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어떤 경전으로부터 방편과 응화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경 가운데서는,
‘오로지 후변신(後邊身)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달리 법신이 존재하여 응화신이나 방편신과는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십주경(十住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니, 달리 법신이 존재하여 방편신이나 응화신과는 같지 않았다.
따라서 대승경 가운데서 ‘부처님은 일체지이시다’라고 설하는 것에는 과실이 없다.
그대가 소승 가운데서 일체지를 말한다면 이에는 커다란 과실이 있으며, 만약에 ‘성문승이 곧 대승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대승은 성은승과는 차이가 있으니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생각하기를 만약에 ‘성문승 가운데서 대승을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성문승이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고 대선(大仙)의 승(乘)은 삼보(三寶)의 종성(種性)을 계승하여 단절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비유리보(毘琉璃寶)는 끝내 수정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 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승은 미묘하고 지극히 깊으며, 그 마음이 광대한 보살마하살이 차례대로 수학하여 초지(初地)로부터 시작해서 나아가 제십지(第十地)에 이르도록 일체의 공덕과 지혜의 업을 완전히 갖춘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마하연승(摩訶衍乘)이라 하셨다.
만약에 성문승이 마하연승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십지를 수학하면 일체의 모든 바라밀을 원만하게 갖추어 삼승(三乘)의 선법(善法)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십지경』에서 금강장(金剛藏)보살이 해탈월(解脫月)보살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문자ㆍ장구는 자본(字本)이 그 근원이니, 모든 문자는 다 자본으로부터 출현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법(佛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地)를 그 근원으로 삼습니다.”
또한 지(地)로부터 구경(究竟)을 얻으면 자연지(自然智)를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대승을 지극히 깊다고 하며, 이는 일체 성문의 공덕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소승이 대승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십지는 마치 금덩어리를 가득 모아 잃어버리지 않은 것과 같으니,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래께서는 자비력으로 둔한 근기를 지닌 이들을 위하여 성문승을 설하셨으니, 그대는 이를 믿고 받아들여 스스로 편집되게 소승법을 받아 행하면서 대승의 평등한 바른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승이란 가장 길상하고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