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경 상권
2. 염불품(念佛品)
[선지식과 악지식]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 가운데서 무엇을 악지식(惡知識)이라 하고, 무엇을 선지식(善知識)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비구가 있어서 다른 비구를 가르치는데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를 염(念)하고 법을 염하고 승(僧)을 염하고 계를 염하고 보시를 염하고 하늘을 염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몸을 관하여야 하고,
취(取)는 이 몸의 상으로서 이른바 부정(不淨)한 것이며,
마땅히 일체의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모두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일체의 법은 공하여 아(我)가 없다고 관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반연하는 바의 상을 취하여 마음이 반연하는 것 가운데 묶어 오로지 공의 상을 염하여야 한다.
마땅히 선근(善根)을 원해야 한다.
마땅히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이다.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일 뿐이라, 끊기 위한 까닭에 관(觀)하고 염(念)하는 것을 닦아라.
말하자면 탐욕을 끊기 위해서는 부정(不淨)한 상을 관하고,
성냄을 끊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관하고,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서는 인연의 법을 관하여라.
항상 깨끗한 계를 염하여 깊이 공의 상을 취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4선(禪)을 얻는다 한다.
마음을 다하여 도를 구하고 선하지 않은 법은 이 모두가 손해를 가져오는 고뇌라고 관하여라.
선한 법을 관하는 것은 곧 가장 안온한 것이다. 일심으로 수도하여 분별해서 밝게 관찰하라.
선하고 선하지 않는 법은 취의 상일 뿐이라고 밝혀라.
오직 열반을 관하면 안온하고 적멸하다.
오직 열반을 사랑하면 필경은 청정하다고 이와 같이 가르치면 이름하여 삿된 가르침이라 한다.
이를테면 이는 바른 가르침이면서도 곧 삿된 가르침인 것이다.
[악지식]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악지식(惡知識)이라 한다.
이 사람을 이름하여 나를 비방하고 외도(外道)를 돕는 자라 한다.
또 남을 위하여 삿된 길을 설하는 자라 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나쁜 사람에게서 내가 한 그릇의 마시는 물을 받았어도 그것으로 스스로 공양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받은 것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나의 법 가운데에는 이와 같이 많은 증상만(增上慢)의 가르침이 있다.
사리불아, 만약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계를 받고, 다섯 해 동안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을 남김 없이 버리지 못하고,
이 가르침 중에 마음을 부지런히 정진하여 스스로 소득 없음[無所得]을 얻는 일이 있어도, 비구가 와서 스스로 묻지 않으면,
나는 이 사람에게 다섯 해가 있었지만 아직도 삿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고 외도의 법에 섞여 악마의 가르침을 순행(順行)하는 자라고 설한다.
[청정한 범행을 얻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서 이 가르침을 받기를 마치고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을 듣고서 곧 스스로나 먼저 받는 자는 이 모두가 삿된 견해라고 깨달아 알고,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에 있어서 의심이 없고 뉘우침이 없고 깊이 통달하여, 일체의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에 의지하지 않으면,
사리불아, 나는 이 사람을 설하여 청정한 범행(梵行)을 얻었다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이와 같은 소득이 없는 인가를 성취하면 지금은 아직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 생사의 괴로움을 여읜 진여(眞如). 번뇌의 장애를 끊고 이숙(異熱)의 보과(菩果) 현재(現在)의 몸까지도 멸하여 없어진 곳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이름함을 얻지 못하였다 하여도 나는 이 사람에게,
미륵부처님 때 마땅히 첫 모임에 있게 되고
그 때 미륵부처님께서 환희하기를 세 번하고 이 사람이 석가모니부처의 가운데서 소득이 없는 인가를 성취했다고 말하도록 수기할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기를 마치고서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無所得]을 듣고, 곧 그 때 놀라고 두려워하면 이 사람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구해 주는 자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어서 곧 지옥에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놀라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자, 이 사람은 곧 나쁜 길을 구족한 자라고 한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스스로 설하기를 소득이 있음[有所得]은 곧 나쁜 길의 분[惡道分]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부처가 얻는 법에는 차별이 없다.
이것이라든가 소견이 아니라든가 혹 차별하지 않으면 이는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리불아, 사람은 5역죄(逆罪)의 무거운 악을 범하기보다는, 모름지기 아견(我見)ㆍ인견(人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견(壽見)ㆍ명견(命見)ㆍ5음견(陰見)ㆍ12입견(入見)ㆍ18계견(界見)ㆍ지계에 탐착하고,
지계에 탐착한 견해와, 삼매에 탐착함과 삼매에 탐착한 견해와, 부처의 생각에 의지하고 법의 생각에 있어서 얻음과 승(僧)에 있어서 끊어야할 일을 성취한 몸에 대한 견해를 성취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불법 가운데에 신견(身見)을 성취함은 승(僧)의 일[事]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부처의 제자 무리는 마음에 분열이 없어야 한다.
사리불아, 부처의 제자 무리는 착하지 않는 자가 없고 계를 깨트리는 자가 없으며 견해를 깨트리는 자가 없으며 위의를 깨트리는 자가 없다.
[악하며 착하지 않은 것, 분별]
사리불아, 무엇을 악(惡)이며 착하지 않은 것이라 하는가?
불법 가운데에 승(僧)의 상응한 행에 있지 않는 것을 악이며 착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마음과 마음에 상응한 행의 법의 온갖 인연과 합하고 진실이 없는 일에 다만 분별할 뿐이다.
분별을 까닭으로 해서 얻음이 있는 것을 헤아린다.
이 사람은 모든 언설(言說)까지도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선(善)과 선이 아닌 법도 거룩한 법 중에서는 악하고 선하지 않다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모든 즐거운 곳 안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여래의 법은 이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다.
사리불아, 여래의 얻는 것, 이 중에는 욕심도 없고 욕심이 아닌 것도 없다.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생각[思]도 없고 생각[想]도 없고 닦음도 없다.
내지 또한 공(空)이라는 생각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공의 생각을 헤아리면 곧 이는 아상(我想)이며 중생상(衆生想)이다.
이는 상상(常想)이고 이는 단상(斷想)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온갖 생각에 따르게 되면 곧 온갖 생각을 낳는다.
이는 모두가 삿된 것에로 떨어지는 것이다.
[공]
사리불아, 공은 생각이 없음에 이름한 것이며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 한다.
공이라는 생각까지도 역시 공한 것이며,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공중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내지는 역시 공이라는 생각도 없다.
이런 까닭에 공의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유위의 법은 알고 이해할 수 있다.
공은 알 수 없고 또 이해할 수가 없다. 사량(思量)하는 것이 아니다.
이 까닭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공은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공은 생각이 없는 까닭이며 이 까닭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무슨 까닭에 공의 행을 공하다고 설하는가?
일체의 모든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또 공이라는 생각까지도 역시 생각하지 않는 이것을 공의 행이라고 이름한다.
[생각]
사리불아, 생각이라고 하는 이름은 내지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곧 이름하여 생각이라 한다.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을 곧 생각이 없다고 이름한다. 모든 생각을 떠났기 때문에 이름하여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취(取)하는 바의 생각에 따르면 이 모두는 삿된 소견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거룩한 법 가운데서 적멸(寂滅)을 얻는 것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말과 설(說)함이며, 하물며 설하는 자이겠느냐? 이와 같은 공의 법을 무엇으로써 설하겠느냐?
[언어]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은 무슨 까닭에 온갖 언어를 설하여 삿되다고 이름하는가?
일체의 법에 통달할 수가 없는 것은 이는 곧 모두가 언설(言說)을 덮는 것이다. 이 까닭에 여래는 모든 언어(言語)는 이 모두가 삿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언어가 있으면 그 실(實)을 얻지 못한다.
[무념무상]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모두가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법에 있어서 체성(體性)을 얻지 않고 또 생각을 얻지 않는다.
[염처]
사리불아, 여래는 무슨 까닭에 염처(念處)가 있다고 설하는가?
사리불아, 경(經)에 설하기를
‘만약 사람이 4념처(念處)를 얻으면 이 사람은 능히 모든 법의 체성(體性)을 얻고 능히 스스로의 몸을 얻고 자아[我]를 얻고 사람으로 나는 것을 얻는다. 이에 속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법의 다른 상(相)은 공임을 나타내지 않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하는 것이다.
4념처의 성품은 무성(無性) 무처(無處)이다.
생각이 없고 설함이 없어 탐착함도 없다.
생각의 성품은 더욱 없다.
하물며 염처(念處)이겠느냐?
이 까닭에 여래는 설하여 염처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법에 만약 결정적인 체성(體性)이 머리털을 끊어 그 100분(分)의 일이라도 있다면, 이에 곧 모든 부처님은 세상에 나지 않는다.
또 끝내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다고 설하지도 않는다.
사리불아, 모든 법은 실로 공하여 성품이 없는 그 하나의 상(相)뿐이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으로서 여래는 남김없이 본다.
여래는 이로써 염처가 있다고 설한다.
사리불아, 염처를 이름하여 무처(無處)ㆍ무비처(無非處:속한 대상이 아닌 것도 없음)ㆍ생각이 없음[無念]ㆍ생각의 업도 없음[無念業]ㆍ생각이 없음[無想]ㆍ분별이 없음ㆍ뜻이 없음ㆍ뜻의 업이 없음ㆍ생각[思]이 없음ㆍ생각[思]의 업이 없음ㆍ법이 없음ㆍ법의 상이 없음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합하고 흩어짐이 없다.
이 까닭에 현성(賢聖)을 이름하여 분별이 없는 자라고 한다.
이것을 염처라고 이름하는 것은 여래가 이것으로써 염처가 있음을 설하고 소유가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염처라고 함은 염불(念佛)에 수순하는 것을 염처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염불]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염불이라 하는가?
소유 없음을 보는 것을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은 무량(無量)하여 불가사의하고 칭량(稱量)할 수가 없다.
이 뜻 때문에 소유가 없음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염불(念佛)이라고 한다.
실로 분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분별이 없음이다.
이 까닭에 말하기를 분별이 없음을 염하는 것, 이가 곧 염불이라고 한다.
또 다음으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법은 필경은 공하여 소유가 없다.
이 필경은 공하여 소유가 없는 법으로써 염불하는 것이다.
또 다음으로, 이와 같은 법 가운데는 내지 작은 생각까지도 더욱 불가득이다.
이를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이 염불의 법은 언어의 길이 끊기고 모든 생각을 지나쳐 나온 것이다. 불가득인 생각, 이를 염불이라 한다.
사리불아, 사리불아, 일체의 모든 생각[念]은 모두가 적멸의 상이다.
이 법에 수순하면 이를 곧 이름하여 염불을 닦고 익힌다고 한다.
색(色)으로써 염불하지 말아라.
무슨 까닭인가?
색을 생각하면 상(相)을 취하고 맛을 탐하여 알음알이[識]가 되기 때문이다.
모양도 없고 색도 없고 반연도 없고 성품도 없다.
이를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분별함이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것, 이것이 참다운 염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