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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왕보살경 상권
2. 신통자재
부처님께서 자재왕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신통자재(神通自在)라고 하는가? 천안(天眼)ㆍ천이(天耳)ㆍ타심지(他心智)ㆍ숙명지(宿命智)ㆍ여의족(如意足)을 말한다.
[천안 자재]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의 천안자재(天眼自在)라 하는가?
보살의 안근(眼根)이 벽이나 산림이나 수미산이나 철위산이나 세계 어느 곳에든 막히고 걸리지 않는다면 이것을 천안이 자재하다고 한다.
보살은 이 걸림 없는 안근으로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불국토를 하나의 불국토로 본다. 왜냐 하면 빈 모양은 구별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불국토가 이곳과 저곳으로 구별되나 합하지도 않으며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에워싸여 계신 것을 보고 한 부처님으로 여기는데, 법의 성품은 파괴되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부처님의 깨끗함을 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깨끗함을 보며,
모든 부처님의 깨끗함을 보기 때문에 자기 몸의 깨끗함을 보며,
자기 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깨끗함을 보아
자기 몸의 깨끗함과 모든 법의 깨끗함에 대해 두 모양을 내지 않는다.
또한 모든 부처님 제자를 부처님의 깨끗함과 다르지 않게 보며,
보살이 제자를 보는 바른 견해로 부처님을 보며,
부처님을 보는 바른 견해로 제자를 본다.
또한 보살이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서 무색계를 제외한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천상의 모든 중생이 나고 죽는 갈래와 선악을 행하는 곳을 천안으로 볼 수 있으며,
중생이 업을 짓고 보를 받는 것을 안다.
보살은 중생을 본다 할지라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데, 나라는 테두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중생이 업을 짓고 보를 받는 것을 본다 할지라도, 보살은 모든 법에 업도 없고 과보도 없는 줄을 안다.
보살은 이 천안으로 모든 색이 색의 상이 없음을 보는 것은 모든 법이 있다고 할 것이 없음을 믿기 때문이며,
모든 형색이 다 허망하여 본래 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의 천안이라 이름한다.
보살은 이 천안의 지혜력을 얻었기 때문에 수량을 갖는 색이나 수량을 갖지 않는 색이나 무엇을 보든지 간에 보지 않는 바가 없다.
보살은 백천만 종류의 중생 속에 있더라도 선정과 배사(背捨)와 삼매에 들어 내지는 한 중생이 있는 것도 보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보살은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 여여하다는 것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색계(色界) 모든 하늘의 깨끗하고 미묘한 형상 앞에 그 몸을 나타내어 모든 천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이 보살도 모든 하늘의 몸을 본다.
보살이 모든 하늘에게 자신의 몸을 보게 하지만 모든 하늘은 스스로 몸을 보지 못하며,
혹은 모든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 그 몸을 보게 하지만 보살의 몸을 보지 못한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천안(天眼)이 자재하다고 한다.
[천이 자재]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천이자재(天耳自在)라 하는가.
보살이 이 천이(天耳)를 얻었다면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 있는 모든 소리, 즉 하늘 소리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등의 사람인 듯 하면서 사람이 아닌 것들의 소리를 모두 듣는다.
보살은 이 소리를 들을 때 모든 소리에 대해 분별이 없는데, 그 어떤 소리도 형상을 통해 설명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이다.
또 이 소리를 듣고 나라는 생각ㆍ중생이라는 생각ㆍ음성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그 어떤 소리도 본래 형상을 통해 설명하지 못함을 통달하여 이 소리는 머무는 때가 없음을 믿고 아는데, 보살은 이성(耳性)ㆍ이식성(耳識性)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들을 때 소리의 실제 뜻을 이해하는 자는 모든 소리를 설명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멸하는 특성 때문에 실제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뜻에 의지하고 소리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모든 법에 생겨나는 특성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방의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에서 현재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데 걸림이 없으며, 들은 것을 간직하며 간직하고 나서는 잊지 않는다. 왜냐 하면 보살은 한 구절도 알지 못하고서 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들은 법이 있다.
즉 유루와 무루ㆍ유위와 무위ㆍ세간법과 출세간법ㆍ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ㆍ죄 있는 법과 죄 없는 법ㆍ성문승(聲聞乘)과 벽지불승(辟支佛乘)과 불승(佛乘)을 말한다.
보살은 이들 법을 한 성품의 맛에 들게 하는데, 자기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다.
들은 바가 있다 할지라도 여섯 가지 대상[六塵]에 집착하지 않으며, 법을 듣는다 할지라도 어떤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다.
보살은 법을 귀하게 여기므로 법에 의지하며, 법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법인가?
물듦을 떠난 것을 법이라 하며,
모양 없음을 법이라 하며, 함이 없음을 법이라 하며,
돌아 갈 곳이 없음을 법이라 하며,
생겨남도 일어남도 얻음도 없음을 법이라 하며,
견줌이 없음을 법이라 한다.
이러한 법 가운데 모양으로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며 희론한다면 이 것을 법이 아니라고 한다.
자재왕아, 보살은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으며, 말을 여의지 않고 뜻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
무엇을 뜻에 들어가는 마음이라 하는가?
빈 뜻에 떨어지지 않는 뜻의 견해며, 모양 없는 뜻의 견해며, 조작 없는 뜻의 견해니
이것을 뜻에 들어가는 마음이라 한다.
보살은 뜻에 들어가는 이 마음으로 법을 들으며 뜻에 의지하는데, 이 뜻은 얻을 수 없으며 얻지 못한다는 그것도 얻지 못한다.
또 자재왕아,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을 듣는다면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며 불요의경(不了義經)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경이란 뜻을 끝까지한 모든 경이니, 뜻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하면 요의경에 의지했다고 한다.
반면 어떤 사람이 모든 경에 있어서 이와 같이 뜻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을 불요의라 한다.
무엇 때문에 불요의라 하는가?
이 사람은 뜻을 끝까지하지 못해서 때묻고 더러운 길에 항상 끌려가기 때문이다.
무엇에 끌려가는가?
소리에 끌려간다. 뜻을 끝까지한 자는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뜻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법을 알아서 요의의 모습이 아닌 갖가지 치우침을 떠난다.
자재왕아, 이와 같이 뜻에 의지해서 법에 나아가는 자는 보는 경이 다 요의경이 되며, 이와 같이 의지하지 않는 자는 모든 경이 다 불요의가 된다.
또한 자재왕아,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을 들을 때 식(識)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 의지한다.
왜냐 하면 보살은 식이 허망하여 허깨비와 같은 줄 알고, 모양을 떠났으므로 성품도 없고, 빛깔도 없고, 형체도 없고, 상대적인 것도 없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의 특성을 이렇게 안다면 그것을 식이라 하지 않고 지혜라 한다.
보살이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에 식을 따르지 않으면, 저 식 또한 식이 아닌 줄 안다. 그러므로 식여(識如)에 집착하지 않고 따라서 지여(智如)라고 말한다.
자재왕아, 지혜에 의지하는 보살은 식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식을 알아서 법을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재왕아, 보살이 법을 설할 때 중생의 이름을 설하나 법에 의지하고 중생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나와 법 가운데 실제로 중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마침내 깨끗함도 없고 이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재왕아, 모든 법에는 끝내 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여래께서는 세간법에 따라서 중생이 있다고 설하시지만 모든 법에는 실제로 중생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법에 의지하고 중생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법이란 법의 성품을 뜻한다. 법의 성품이란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필경에 일어나지도 않으며 조작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뜻이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 하면 말로 법을 설명하지만 법은 말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로 뜻을 보이지만 보이고 설명할 바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말이 아니고 설명이 아니다.
분별할 바가 있고 설명할 바가 있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니,
분별이 없고 설명할 바가 없다면 이것이 부처님 법이다.
그러므로 설함 없는 이것을 부처님 법이라 한다.
만일 부처님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들어가야 하고 말로써 중생을 설해야 한다.
법을 설한다해도 견해를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둘이 있다면 부처의 말씀이라 하지 못하며, 둘도 없고 분별도 없다면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말소리가 있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며, 의논이나 설명이 있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다.
말소리도 없고 의논이나 설명이 없다면 이것을 부처님 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재왕아, 보살이 부처님 법 가운데 들어가면 이와 같은 천이(天耳)를 얻어 모든 소리로 제법의 실상에 따라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천이(天耳)가 자재하다고 한다.
[타심지 자재]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타심지자재(他心智自在)라고 하는가?
타심지자재를 얻은 보살은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서 가는 곳마다 대중을 위해 법을 설한다.
먼저 대중의 마음을 관찰하여 이 중생이 얼마나 깊은 마음을 가졌는지, 어떤 행을 닦는지, 어떤 원인을 심었는지, 어떤 모양이 있는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 설하는데, 보살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깨끗한 마음에 들어간다.
자재왕아, 마치 밝은 거울이 모든 형상과 빛깔을 비출 때 길든 짧든, 크든 작든, 거칠든 미세하든 더하거나 덜함 없이 본래 모양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거울은 분별하는 일 없이 밝고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모양을 나타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살도 깨끗한 자기 마음의 법성으로 밝게 비추기 때문에 중생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마음법을 걸림 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중 가운데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보살은 그 마음을 알고 욕심을 여의는 모양도 본다. 왜냐 하면 마음의 모양은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 가운데 화가 많고,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보살은 그의 마음을 알며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는 모양을 본다. 왜냐 하면 마음의 모양은 성내지도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중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보살은 그가 실천하는 도의 법성(法性)이 소승이 되지 않음을 알며,
대중 가운데 벽지불(辟支佛)의 도를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실천하는 도의 법성이 중승이 되지 않음을 알며,
대중 가운데 대승(大乘)을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실천하는 도의 법성이 대승이 되지 않음을 안다.
보살은 중생의 심성을 알아서 그에 맞게 법을 설하나 마음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승(乘)을 알아서 법을 설하나 법의 성품을 파괴하지 않으며,
법의 성품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품을 파괴하지 않고 그리하여 중생이 행하는 바를 안다.
보살은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되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맞고 안 맞는 것이 없으며, 또한 중생의 마음이 끊임없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안다.
또한 마음의 성품이 바로 법의 성품인줄 안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타심지자재(他心智自在)라고 하며, 이 자재를 얻었기 때문에 하늘 위나 사람 가운데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숙명지 자재]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숙명지자재(宿命知自在)라고 하는가?
숙명지자재를 얻은 보살은 기억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定)을 얻은 근(根)이 날카롭기 때문에, 자기 일이든 남의 일이든 전생에 겪었던 갠지스강 모래와 같은 겁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하여 남에게 자신이 저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었고, 얼마나 오래 살았으며 어떤 고락을 받았는지를 설명해준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상[宿世]에 선근을 심은 중생, 인(因)의 힘이 있는 자, 연(緣)의 힘이 있는 자를 알며,
이 사람은 성문의 인(因)이 있고, 이 사람은 벽지불의 인이 있고, 이 사람은 대승의 인이 있는 줄을 안다.
보살은 그 중생이 지난 세상에 뿌린 씨를 알고 그에 맞게 법을 설한다.
보살은 숙명지(宿命智)를 얻었기 때문에 전생에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 태어나 모든 선근을 심은 줄을 스스로 안다.
만일 지난 세상에 선근을 심고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그 선근을 보리에 회향한다.
보살은 숙명을 안다 할지라도 지난 세상의 법이 오는 일이 없음을 안다.
법이 지난 세상으로부터 뒷세상에 이르는 것을 보지 않으며, 지금 세상이 지난 세상에 이르는 것도 보지 않는다.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 가는 바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를 생각하지만 먼저라는 견해를 내지 않으며, 뒷 시간에 대해서도 중간[中]이라는 견해나 끝[邊]이라는 견해를 내지 않으니, 모든 법은 끝이나 중간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보살은 중생의 숙명을 기억하지만, 과거의 색(色)이 모양을 떠난 줄 알며 과거의 수ㆍ상ㆍ행ㆍ식이 모양을 떠났음을 안다.
과거 5음(陰)이 모양을 떠난 것이 바로 뒤의 5음이 모양을 떠난 것이며, 뒤의 5음이 모양을 떠난 것이 바로 현재 5음이 모양을 떠난 것이다.
보살은 과거 모든 법의 성품이 빈 줄을 알고 현재 모든 법의 성품이 빈 줄을 알며, 미래 모든 법의 성품이 빈 줄을 안다.
자재왕아, 보살이 이와 같이 숙명을 알 때 선근이 자라나서 지난 세상의 죄업인연(罪業因緣)을 다 멸한다. 왜냐 하면 보살은 모든 법에 새로운 모양도 낡은 모양도 없음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지혜를 이루고서는 모든 유위법이 다 공하여 꿈과 같은 줄 이해하고 믿는다.
자재왕아, 꿈속에서 나고 죽고 괴롭고 즐거운 것을 보듯이, 보살이 유위법을 이해하고 믿는 것도 그러하다.
이렇게 믿고 이해하는 자는 생사에 오가면서도 피곤하다거나 권태롭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중생 속에서 자비심을 내며, 모든 법에서 짐짓 모양을 지어낸다.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몇천만억 겁토록 생사에 오가지만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도 생사에 오가지만 그 역시 허망하여 실제가 아니다.
실제의 이름은 4대(大)를 일으키지 않으니 4대란 허망한 법이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보살이 숙명을 볼 때는 모든 유위법이 다 허망함을 본다.
어째서 그런가.
보살은 과거 전륜왕(轉輪王)의 즐거움도 모두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제석(帝釋)의 즐거움도 다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장엄하고 깨끗한 모든 부처님의 세계와 장엄하고 깨끗한 성문들의 세계와 장엄하고 깨끗한 보살들의 세계와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의 장엄함과 깨끗함을 보며,
또한 색신이 구족하신 모든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는 것도 모두 다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으로 본다.
이렇게 생각할 때 유위법에 탐내고 아까워할 것이 없다. 왜냐 하면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국토와 모든 부처님의 색신도 덧없이 다 없어지는데 하물며 내가 집착하는 것들이겠는가.’
그리고는 바로 나가 없는 가운데, 나의 것이 없는 가운데 들어가 덧없이 변화하는 모양에 의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유위법은 다 덧없는데 중생이 여기에서 항상하다는 생각을 내는구나.’
그리고는 중생에게는 큰 자비심을 내며, 모든 법에 대해서는 놓아버려야한다는 생각을 낸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이 숙명지자재(宿命智自在)를 얻었다고 한다.
이 자재를 얻은 보살은 모든 법이 덧없다는 사실을 믿지만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몸을 받는다.
그러나 받지 않기 위해 받으며, 취하지 않기 위해 취하니, 다만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의족 자재]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여의족자재(如意足自在)를 얻었다 하는가?
여의족자재를 얻은 보살은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에 성인의 모양을 따라서 여의족(如意足), 하고자 하는 힘, 정진해 나아가는 힘, 결탄코 실천하며 믿고 이해하는 힘을 낸다.
보살이 이 여의족을 이해하고 믿으면 조작하거나 일어나지 않아도 갠지스강 모래와 같은 세계 어디에든 가고자 한다면 한 생각 사이에 갈 수 있으며, 그곳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다 그가 오는 것을 본다.
자신은 본래 있던 곳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저들은 그가 설법하는 것을 보며, 이곳에서도 여전히 설법을 계속한다.
자재왕아, 이것을 보살의 여의족이 자재하다고 한다.
보살은 이 여의족의 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에 여의족으로 제도할 중생이 있으면 여의족으로 제도하며,
항상한 모습에 집착하는 하늘중생이 있으면 겁(劫)이 타는 것을 보여주어 이 모든 중생에게 삼천대천세계가 다 타서 없어져도 이 세계는 손상되거나 줄어든 일이 없음을 보게 한다.
교만한 마음을 스스로 키워가는 중생이 있다면 보살은 금강을 잡은 신이 되어 불꽃이 타오르는 금강저(金剛杵)를 잡아 그들에게 보여주므로써 두렵게 하여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스스로 귀의하여 공경히 예를 올리게 한다.
전륜왕의 형상을 즐기는 중생이 있으면 전륜왕의 몸으로 법을 설하고 석제환인(釋帝桓因)의 형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석제환인의 몸으로 법을 설하며,
범천왕의 형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범천왕의 몸으로 법을 설하며,
마왕의 형상을 즐기는 자가 있으면 마왕의 몸으로 법을 설한다.
부처님 몸을 보기를 즐기는 자가 있으면 부처님 몸으로 나타나 법을 설한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혹은 허공 속에 머물며 가부좌를 맺고 몸에서 빛을 내며 법을 설하기도 한다.
엄숙하고 깨끗한 세계를 즐기는 중생이 있으면 삼천대천세계를 장엄하여 비단 번(幡)과 일산을 달며, 모든 기를 세우고 보배 그물로 그 위를 다 덮고 이름 난 갖가지 향을 사르며 모든 음악을 연주한 뒤에 법을 설하기도 한다.
중생을 위하여 삼천대천세계를 하나의 바다 물로 만들어 나타내고 그 위를 푸르고, 빨갛고, 붉고, 흰 갖가지 연꽃으로 덮고, 그 물 중간에 설법좌를 나타내어 자기 몸을 그 위에 앉히고 법을 설하기도 한다.
중생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나타내어 수미산 꼭대기에 앉아서 법을 설하는데 그 소리가 범천에 이르기도 하며,
중생을 위하여 몸은 나타내지 않고 음성으로만 법을 설하기도 하며,
중생을 위하여 건달바 몸을 나타내어 여러 음악소리로 법을 설하기도 하며,
중생을 위하여 용왕의 몸을 나타내어 구름과 우레를 일으켜 큰 번갯불을 놓으며, 또는 큰비를 적셔 법을 설하기도 한다.
배고프고 목말라 매우 궁핍한 중생이 있으면 하늘 음식을 주어 몸을 충만케 하고 부족함 없이 기쁘게 하여 법을 설하기도 하며,
고뇌에 쫒기고 시달리는 중생이 있으면 신통한 힘으로 지옥의 불을 끄고 하늘의 정기로 그들의 털구멍까지 모두 안락을 얻게 하고 법을 설하기도 한다.
눈 먼 자가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그에게 천안(天眼)을 주어 밝게 보게끔 하고 법을 설하며,
귀머거리가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그에게 이근(耳根)을 주어 소리를 듣게 하고 법을 설하며,
갖가지 병에 든 자가 있으면 신통한 힘으로 그의 병이 낫게 하여 법을 설한다.
죄를 짓고 죽을 곳에 이른 자가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사람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죄를 면해 마음을 편케 하고 법을 설한다.
손발이 잘려졌거나 귀와 코가 잘려나가 남은 몸이 추하고 더러워 항상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마음이 물러난 중생이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불구를 복구시켜 법을 설한다.
피ㆍ똥ㆍ오줌 등 깨끗하지 못한 태 속에 들어앉은 중생이 있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보배 집과 누각을 지어 그를 그 속에 거처하게 하며, 또한 의식(意識)을 이루게 하여 법을 설한다.
처음 태어나서 모든 근(根)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으로 다 갖추게 하여 그가 법을 들을 능력을 가진 뒤에 법을 설한다.
자재왕아, 이것을 두고 보살이 여의족(如意足)을 성취했다고 하며, 이렇게 불가사의한 갖가지 신통력으로 법을 설한다.
보살에게는 뜻대로 하는 신통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일월중생(日月衆生)을 섬기고 받들어 제도하기 위하여 삼천대천세계를 그의 오른 손바닥에 놓고 멀리 타방(他方)의 한량없는 세계로 던져 모든 중생이 다 그것이 가는 것을 보게 하지만 그러나 이 세계는 움직이지 않게 한다.
또한 갠지스강 모래수와 같은 세계를 한 털구멍에 들어가게 하여 범천까지 들고 가서 타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던져 놓지만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게 한다.
갠지스강 모래와 같이 무량한 세계가 겁이 다하여 불에 탈 때 한 입에 불을 끄기도 하고, 두 손으로 해와 달을 가리고 몸에서 빛을 내어 모든 세계를 비추고서 법을 설한다.
자재왕아,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 앞에 앉아 부처님께 공양하고자 하여 한 움큼의 꽃을 수미산 같이 하여 부처님의 몸 위에 뿌리면 꽃이 몸의 반에 이르며,
또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초목으로 모두 횃불을 만들어 세계에 가득 채우면 그 불이 비오듯 떨어진다.
자재왕아, 이 보살은 모든 중생이 귀하게 여기는 형상을 따라 제석이나 범천이나 성문의 형상이나 벽지불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보살의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즉 천안(天眼)을 얻어 보는 것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천이(天耳)를 얻어듣는 것이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일체 마음과 마음에 관계된 법을 통달했기 때문이며,
숙명지(宿命智)을 증득하여 과거의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여의족(如意足)을 얻어 모든 형색에 있어서 마음대로 보여주고 나타내기 때문이다.
자재왕아, 신통이 자재한 자는 모든 부처님의 일을 모든 중생에게 보이며,
모든 중생의 근기가 날카로운지 둔한지를 잘 알고 분별한다.
성문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며, 벽지불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며, 대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 대중이 그를 알며,
중생을 성숙시켜주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착한 법 가운데 출가하여 도를 실천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안다.
보시바라밀로 회향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과 정진바라밀과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로 회향하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알며,
모든 마군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이 착한 뿌리를 심게 하기 때문에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재왕아, 보살은 이 자재한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몸의 힘과 명예와 칭송과 좋은 가문ㆍ좋은 성씨ㆍ재물ㆍ권속과 백성들이 다 뛰어나 대중이 그를 알므로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재왕아, 보살이 이 자재한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대중이 그를 안다.
즉 모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긴나라ㆍ가루라ㆍ마후라가 등의 사람인 듯 하면서 사람이 아닌 것들ㆍ제석ㆍ범왕ㆍ세상을 보호하는 모든 이들ㆍ바르게 깨달은 모든 부처가 그를 알기 때문에 많이 안다[多識]고 한다.
자재왕아, 보살은 이 신통한 힘 때문에 근본 맹서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 많은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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