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보리심경론 상권
2. 발심품(發心品)
보살은 어떻게 보리심을 일으키며, 어떠한 인연에 의해 보리를 닦고 쌓는 것인가?
보살은 선지식과 가까이하고,
모든 부처님들에게 공양하며,
선근을 닦아 쌓고,
수승한 법[勝法]을 바라고 추구하며,
마음이 항상 유화(柔和)하고,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능히 참아내며,
자비가 두텁고 깊으며,
마음이 평등하고,
대승을 믿고 즐기며,
부처님의 지혜를 추구하니,
만약 어떤 이가 이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을 갖추었다면 마침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발심하여 무상(無上)의 보리를 닦고 쌓게 된다.
무엇을 일컬어 네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사유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신체의 허물을 관찰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셋째는 중생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넷째는 최승의 과보를 희구함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사유하는 것에는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시방(十方)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처음으로 발심하셨을 때에는 지금의 나와 같이 번뇌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끝내 정각을 성취하여 무상존(無上尊)이 되었다’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두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대용맹을 일으킴으로써 각기 능히 위없이 높은 보리를 증득할 수 있었으니,
만약 이러한 보리가 바로 증득할 수 있는 법이라면 나도 역시 마땅히 증득하게 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세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크고 밝은 혜(慧)를 일으켜 무명의 알 속에서 뛰어난 마음[勝心]을 건립하고 고행을 쌓음으로써 능히 스스로 삼계(三界)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도 역시 이와 같이 마땅히 스스로 삼계에서 벗어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네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인간 가운데 위대한 영웅이 됨으로써 모두 생사 번뇌의 대해를 건넜으니,
나도 역시 대장부가 되면 능히 생사 번뇌의 대해를 건널 수 있게 되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다섯 번째는
‘일체의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대정진을 일으켜 신명(身命)과 재물을 버리고 일체지(一切智)를 추구하였으니,
나도 역시 지금 마땅히 모든 부처님을 따라 배우리라’고 사유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
신체의 허물을 관찰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나의 몸은 오음(五陰)과 사대(四大)로 이루어져서 능히 헤아릴 수 없는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들을 여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나의 몸은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부정한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에 대한 염리(厭離)를 낳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나의 몸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헤아릴 수 없는 번뇌가 있어서 선심(善心)을 태워 버린다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그것들을 소멸하고 제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나의 몸은 물거품과 같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이는 버릴 수 있는 법[可捨法]으로 버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나의 몸은 무명에 덮여 항상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니,
육취(六趣)를 윤회하여 이로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의 과보를 희구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상호(相好)의 장엄이 빛나고 청정하고 명철해서 만나는 이의 번뇌를 제거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법신(法身)이 상주하고 청정하여 물듦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ㆍ해탈지견(解脫知見)ㆍ청정법취(淸淨法聚)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네 번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보리심을 닦아 쌓으셨기 때문에 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대비(大悲)ㆍ삼념처(三念處)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모든 여래는 일체지(一切智)로 중생을 가련히 여기고 자비를 두루 펼쳐서 일체의 어리석고 미혹한 이를 능히 올바로 인도할 수 있으니, 이는 닦아서 쌓기 때문이다.
나아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에도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무명에 속박되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여러 가지의 괴로움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불선업(不善業)을 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극히 무거운 악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정법을 닦고 있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무명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에는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어리석음과 애욕[愛癡]에 미혹되어 매우 극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인과를 믿지 않고 악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올바른 믿음[正信]을 버리고 삿된 도를 믿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이 번뇌의 강에 빠져 네 가지 흐름[四流]에 표류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괴로움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생ㆍ노ㆍ병ㆍ사를 두려워하면서도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또다시 업을 짓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항상 업을 조작(造作)하며 쉬는 일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방편을 깨닫지 못하고 물들어 집착[染着]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미워하고 증오하는 이와 만나는 것을 괴로워하면서도 항상 혐오하고 질투하며 또다시 미워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불선업을 쌓고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애욕으로 인해 악업을 조작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욕망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즐거움을 욕구하면서도 계(戒)를 구족하지 않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괴로움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괴로움을 조작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극히 무거운 악업을 짓고 있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중계(重戒)를 범하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방일(放逸)하게 지낸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극악의 오무간업을 짓고 서도 사납고 모질게 스스로 그것을 숨기며 부끄러워[慚愧]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대승의 방등(方等)의 정법을 비방 훼손하고서도 오로지 어리석음에 스스로 집착하여 오히려 교만심을 일으킨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비록 총명함을 지녔을지라도 선근을 모두 끊고 도리어 스스로 자만하면서[貢高] 영원히 참회하여 고치는 일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정법을 닦고 있지 않다는 것에도 다시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8난처(難處)에 태어나 정법을 듣지 못하고 선(善)을 닦을 줄 모른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을 때 태어나 정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도 능히 수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외도에 물들거나 외도의 법을 익혀 신체를 괴롭히는 업만을 닦을 뿐 출요(出要:出離의 要道: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깨달음의 도)를 영원히 여의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온갖 중생들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닦아 증득한 것을 바로 열반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선한 과보가 다하면 다시 3도(塗)에 떨어지게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온갖 중생들이 무명에 의해 업을 짓고 기나긴 밤의 괴로움을 받으면서 정법을 여의고 출로(出路:해탈도)를 미혹한다고 관찰하니, 이러한 것들 때문에 대자비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지향해 추구하는 것은 예컨대 머리가 타는 이[頭燃]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체 중생으로서 고뇌가 있는 자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남김없이 구제해야 하리라.
모든 불자들이여, 나는 지금까지 초행(初行) 보살의 인연과 발심에 대해 간략하게 설하였는데, 만약 널리 설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끝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