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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계경 제1권
1.2. 선행성품(善行性品)
[보리의 도리에 열 가지 법]
보살마하살이 성행(聖行)을 수집(修集)하여 선과(善果)를 행하는 보리의 도리에 열 가지 법(法)이 있으면 곧 모든 선법(善法)을 섭취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 법인가?
첫째는 지(支)이며, 둘째는 익(翼)이며, 셋째는 정심(淨心)이며, 넷째는 행(行)이며, 다섯째는 유(有)이며, 여섯째는 인(因)이며, 일곱째는 기(器)이며, 여덟째는 지(地)이며, 아홉째는 방편이며, 열째는 주(住)이다.
[편자 주] 1. 1.2에서는 지(支)만 서술되어 있다. |
1) 지(支), 보살성
무엇을 지(支)라 하는가?
보살성(菩薩性)을 이르는 말이다.
보살성이란 초발심(初發心) 및 삼십칠품(三十七品)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이 보리심을 내는 것에서부터 이것은 모든 선법(善法)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支)라 한다.
이렇게 발심한 것으로 인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데 이 때문에 인(因)이라 하며,
초발심으로 인하여 결정되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므로 이 때문에 성(性)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초발심에 인연하기 때문에 단(檀)바라밀ㆍ시(尸)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離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ㆍ반야(般若)바라밀을 닦아 행하며,
이 육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지혜장엄과 복덕(福德)장엄을 닦아 행하여 삼십칠 조도법(助道法)을 닦는다.
이 때문에 보살이 보리심을 내는 것을 지(支)라 하며,
보살마하살이 발심(發心)을 따라 구족(具足)하게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데 이 때문에 지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만약에 보살성이 없는 자라면 아무리 다시 발심하여 열심히 닦아 정진하더라도 끝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발심하여 열심히 닦아 정진하는 데 따라서 보살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보살성을 지라 한다.
그러나 보살이 아무리 보살의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발심하여 열심히 닦아 정진하지 않는다면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가 없다.
보살성이 있고 보리심을 내어 열심히 닦아 정진해야만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보살성을 지라 한다.
그리고 지(支)는 또한 인(因)이라 하며, 또한 제(梯)라 하며,
또한 증장(增長)이라 하며, 또한 장엄(莊嚴)이라 하며,
또한 의빙(依憑)이라 하며, 또한 차제(次第)라 하며,
또한 진행(進行)이라 하며, 또한 실택(室宅)이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성(性)을 지(支)라 하는 것이다.
[성(性)]
무엇을 성(性)이라 하는가?
성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본성(本性)이며 둘은 객성(客性)이다.
본성이란 음계(陰界)의 육입(六入)이 차례로 상속(相續)되면서 처음도 끝도 없이 법성(法性)이 저절로 그러한 것인데, 이를 본성이라 한다.
객성이란 이른바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여 보리성을 얻는 것이니, 이를 객성이라 한다.
그래서 이 경(經)에서는 이 두 가지를 성이라 한다.
이 두 가지 성을 지(支)라 하는데 또 성을 다시 자(子)라고도 하며, 다시 계(界)라고도 한다.
또한 성이라고 하는 데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細)이며, 둘째는 추(麤)이다.
세란 인(因)이 없이 얻는 것인데 인이 없이 과를 얻기 때문에 세라고 하는 것이다.
추란 인이 있어서 얻는 것인데 인을 따라서 과를 얻기 때문에 추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두 가지 성을 구족하면 모든 성문과 연각을 이길 것인데 하물며 그 밖에 다른 외도(外道)이겠는가?
이러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승(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승(勝)]
어째서 이름을 승이라 하는가?
청정하기 때문이다.
청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지장(淨智障)이며 둘째는 정결장(淨結障)이다.
성문과 연각은 정결장이기 때문에 정(淨)이라 하나 정지장은 아니다.
그러나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 정을 충족하게 갖추었다. 이 때문에 보살성이 승(勝)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보살의 네 가지 일]
보살마하살은 또한 네 가지 사(事)가 있어 성문이나 벽지불 등을 이긴다.
그 첫째는 근승(根勝)이며, 둘째는 행승(行勝)이며, 셋째는 방편승(方便勝)이며 넷째는 득과승(得果勝)이다.
근승이란 보살마하살은 본성이 매우 예리한데 연각성은 중간[中]이고 성문성은 둔하므로 이를 근승이라 하는 것이다.
행승이란, 성문이나 연각은 자신의 제도를 위하기 때문에 선법(善法)을 수행하지만 보살 수행을 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중생을 위하여 선법을 수집해서 중생에게 안락을 베풀며 크게 애처로워하고 안타까워하므로, 이를 행승이라 한다.
방편승이란, 성문이나 연각은 단지 음계(陰界)의 온갖 입(入)만을 잘 알 뿐 십이인연과 처(處) 및 비처(非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에 반해 보살의 방편은 모든 법을 잘 알 수 있으므로 이를 방편승이라 한다.
과승이란, 성문은 스스로 성문보리를 얻고 연각은 스스로 연각보리를 얻고 보살은 스스로 보살보리를 얻으므로 이를 과승이라 한다.
[보살성의 여섯 가지 인, 6바라밀]
보살성에는 여섯 가지 인(印)이 있는데 이 인 때문에 모든 중생이 식지(識知)를 얻는 이것이 보리이다.
그 여섯 가지가 무엇인가?
이른바 단(檀)바라밀에서 반야(般若)바라밀까지이다.
어째서 단바라밀을 보살성인(菩薩性印)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본성이 능히 이처럼 마음을 버릴 수 있으니, 모든 재물에 있어 그것이 많든 적든 마음에 탐착(貪箚)하지 않으며 보시를 하고자 할 때나 보시를 마친 뒤에 모두 기쁜 마음을 가진다.
때마다 재물을 보시하되 많든 적든 마음에 의혹이나 후회가 없으며, 소량을 보시할 때도 부끄러움이 없고 재물이 없을 때에는 늘 보시를 찬탄한다.
욕심 많고 인색한 자를 보면 능히 그 아끼는 마음을 깨뜨리고, 보시를 하는 자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하여 경하하되 마치 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펄쩍펄쩍 뛴다.
찾아와 무엇을 구하는 자를 보면 매우 다행으로 여겨, 만일 재물이 없으면 신업(身業)으로써 장로(長老)와 부모와 스승들께 바치고 희어(喜語)ㆍ연어(軟語)ㆍ법어(法語)ㆍ실어(實語)ㆍ정어(正語)로써 중생들의 망어(妄語)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 및 무의어(無義語)를 깨뜨려 없앤다.
혹시 누가 묻더라도 남의 장단점이나 과실을 말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묻지 않는데 스스로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중생이 왕이나 적으로부터, 또한 물과 불의 재난을 걱정하면 이를 구제하여 풀어주고, 은혜를 알고 은혜를 생각하여 받은 은혜를 보답하며, 남의 기부를 받더라도 남들이 의심하지 않게 한다.
아무리 귀중한 보배라도 마음속에 탐내지 않고 자신의 재물이라 하여 아까워하지 않으며, 먹을 만한 음식과 입을 만한 옷으로 남에게 베푼다.
욕심과 탐면(耽)하는 마음, 조롱하고 장난치는 마음, 기악(伎樂)을 탐하는 마음을 조복하여 참괴함을 수집(修集)하고, 아무리 큰 보배를 얻더라도 탐내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단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한다.
시(尸)바라밀 보살성인이란 무엇인가?
보살마하살의 신(身)ㆍ구(口)ㆍ의(意) 업은 그 성품이 본래 깨끗하고 부드러워 중생 속에서 악심(惡心)이나 에해(恚害)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일 객진(客塵)의 갖가지 번뇌 등으로 인하여 중생의 죄를 지으면 짓는 즉시 마음으로 뉘우쳐서 깊이 부끄러워하여 참회하고, 중생들에 대해서는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생각하듯 결코 어디에든 손이나 돌이나 몽둥이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참된 선지식을 구하며, 뜻은 기꺼이 부모와 사장(師長)과 장로[耆舊]와 숙덕(宿德)을 공양한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먼저 생각해서 물어보며 은혜를 알고 은혜를 생각한다.
걸구(乞求)하는 자가 있으면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여 달래고, 환술(幻術)을 써서 중생을 속이거나 미혹시키지 않는다.
결코 법(法)이 아닌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으며, 언제나 일체의 공덕을 수집(修集)하는 것을 기뻐한다.
중생들을 가르쳐서 널리 복업(福業)을 닦고, 중생들이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그 명근(命根)을 끊어서 기갈과 춥고 더움을 묶어서 막아버린다.
보살은 이와 같이 저들이 고통 받은 것을 보면 자신이 받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생각한다.
부처님 계율을 지녀 수호함에 있어 비록 경미한 것이라도 이를 깨뜨릴 수 없는데 하물며 중대한 것이겠는가?
십선(十善)으로 일체를 교화하되 악한 중생들의 욕하고 싸우는 것을 듣고 보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삼업(三業)을 가지고 항상 중생을 위할 뿐 끝내 스스로를 위하지 않는다.
만일 중생이 구족계를 지켜 인욕하고 지혜로우면 기꺼이 함께 동행하여 유연한 마음을 얻는다. 해코지하는 마음이 없으며 무엇에든 인내한다.
마음은 언제나 가지고 있는 모든 계(戒)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겨 중생을 속이지 않으며 이간하는 말을 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도 오히려 남의 착한 것을 칭찬하는 법인데 하물며 물어보는 데도 말하지 않겠는가? 올바르고 진실한 말을 존중하고 높이며 공경한다.
이런 것을 시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한다.
어떤 것을 찬제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볼 때에 이렇게 마음을 낸다.
‘혹시 내 몸을 때리는 자가 있더라도 나는 당연히 이를 악으로 갚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내 몸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몸이란 진실이라 하는데 진실한 몸은 때릴 수가 없다.
나의 이 몸은 화합으로 이루어진 몸인 바, 화합으로 이루어진 몸은 소위 부정(不淨)이라는 것이다.
화합으로 이루어진 몸이라 조금 맞았다 하더라도 별로 손상될 것이 없다. 별로 손상될 것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기뻐하지 않겠는가?
조금 성을 낼지라도 많이 성내지는 않는다. 많이 성을 내지 않는데 어떻게 성낸다고 이름하겠는가?
만일 화합한 것이 때리고 화합한 것이 맞는다면 누가 때리고 누가 맞은 것인가?
비유하자면 두 물건이 서로 마주쳐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인데 내가 성내는 것은 당연히 스스로 성내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업연(業緣)으로 해서 이 몸이 얻어졌는데 이 몸 때문에 이 같은 초독(楚毒)을 받으니, 비유하자면 과녁이 있기 때문에 화살이 와서 박히는 것과 같다.
내가 만일 이 성내는 마음을 증장(增長)시킨다면 선악 등의 법을 볼 수 없으며 선악 등의 법을 볼 수 없으면 기필코 삼악도(三惡道) 속에 떨어지게 된다.
이러하기 때문에 얻어맞거나 욕을 먹더라도 상대방에게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자신을 보기 때문에 이를 찬제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한다.
다시 때리거나 욕하는 이를 보면 그에 대하여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생각을 일으켜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 이것을 찬제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비리야(毘梨耶)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열심히 닦아 정진하되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누워 잠자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끝내 추위ㆍ더위ㆍ기갈ㆍ공포ㆍ환희를 보지 아니한다.
세간사이든 출세간사이든 무릇 모든 짓는 일이면 끝까지 마치어 결코 중간에 그만두지 않으며, 일이 설사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중간에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타인으로부터 공경이나 공양을 받더라도 자신이 닦는 일을 쉬지 않으며 자신의 몸에 대하여 가벼이 하는 마음을 일으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록 세간의 행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결코 후퇴하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비리야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한다.
어떤 것을 선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지극한 마음으로 모든 법의 진실한 뜻을 기꺼이 관(觀)하며, 적정(寂靜)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 기꺼이 머물며, 즐겨 중생으로부터 악을 제거하고 선법(善法)을 증장하며, 적정을 즐기는 자를 보면 기뻐하여 공경한다.
비록 번뇌가 있더라도 그 본성은 경미하므로 가진 선심(善心)은 결코 모든 악한 각관(覺觀)에 의하여 파괴되지 않는다.
자비심을 수집(修集)하여 원수를 자식처럼 대하여, 중생들이 큰 고뇌를 당하는 것을 보면 비심(悲心)을 일으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이를 끊어 없애준다.
모든 중생이 다 안온하기를 바라며, 설사 몸이 고통을 받더라도 근심하거나 고뇌하지 않고, 신명(身命)이나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묶이고 얽매이고 얻어맞고 떠밀린다 하더라도 스스로 깨달아서 정념(正念)을 잃고 걱정과 고뇌[憂苦]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전심하여 법을 듣고 글씨로 쓰고 수지ㆍ독송ㆍ해설하며, 만일 남들이 이를 잊어버리면 가르쳐서 보여준다.
이와 같은 지극한 마음의 인연으로 해서 뒷세상에 법계(法界)를 잊지 않게 되는 바,
이를 선(禪)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한다.
어떤 것을 반야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모든 세간의 일을 환히 알고, 온갖 방술(方術)과 중생들이 가진 언설(言說)을 안다.
그러나 비록 이런 것들을 알더라도 그 마음은 오류가 있거나 미혹되지 않고 방일(放逸)하지도 않으며, 외도(外道)에게 속거나 홀림을 당하지 않고 삿된 견해로 말하는 의리(義理)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것을 반야바라밀 보살성인이라 한다.
내가 지금 대략 조잡한 인[麁印]의 상(相)에 대하여 말하였거니와 그 다음의 세밀한 인[細印]의 상에 대해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아시는 바이다.
보살성은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 모든 공덕의 일을 성취하여 충족하게 갖추었으며 청정하고 진실하여 구족한 정법(淨法)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상(上)이라 하고 또한 부동(不動)이라 하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악법의 과환(過患)을 보지 못하면 모든 선법을 닦을 수 없다. 보살마하살이 상선(上善)을 닦을 때에 비록 객진번뇌 인연으로 하여 삼악도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악도(惡道)의 중생보다는 낫다.
어째서인가? 보살성 때문이다.
만일 객진번뇌 인연으로 하여 악도에 떨어진 자가 속히 이를 깨뜨리고 빨리 벗어나오기만 한다면 악도를 벗어나오지 못하여 무거운 고통을 받는 것과는 같지 않다.
고통을 받을 때에도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아직도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는 바, 성(性)의 인연 때문에 비심을 얻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보살이 모든 삼악도의 중생보다 나은 것이다.
[정법(淨法)을 깨뜨리는 네 가지 번뇌인연]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번뇌인연 때문에 정법(淨法)을 깨뜨린다.
어떤 것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이중상항(利重常恒)이며,
둘째는 이 둘을 가지고 맺어서 나쁜 벗을 친근히 하는 것이며,
셋째는 스승의 처소에서 왕주(王主)가 원망하고 도적으로 여겨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 선심(善心)을 잃고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며,
넷째는 신명(身命)을 위하기 때문에 온갖 악법을 짓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법이 비록 보살마하살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게 한다.
[보리를 얻지 못하게 하는 네 가지 일]
또한 네 가지 사(事)가 있어 비록 보살마하살의 성품이 있어도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게 한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선우ㆍ부처님ㆍ보살로서 이치를 잘못 설하지 않는 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며,
둘째는 비록 선우ㆍ부처님ㆍ보살을 만났더라도 내용을 잘못 풀이하여 보살이 가진 금계(禁戒)를 배우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비록 선우ㆍ부처님ㆍ보살을 만나 순리대로 뜻을 풀이한다 하더라도 보살의 금계를 배워서 지니지 못하는 것이며,
넷째는 비록 선우ㆍ부처님ㆍ보살을 만나 순리대로 뜻을 풀이하고 보살의 금계를 배운다 하더라도 선근(善根)이 미숙하여 구족한 장엄 보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렇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다.
보살이 비록 보살의 성품을 갖고 있더라도 만일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을 충족하게 갖추지 못하면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이 같은 네 가지 일을 충족하게 갖춘다 하더라도 보살의 성품이 없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는 자는 여기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