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거울가운데 호한이여. 이 짧은 글은 이능화 선생이 고경법전(古鏡法典) 큰스님을 평한 글이다.
조선 불교통사를 발간 한 해는 1918년.이때 고경큰스님의 나이36세였다. 고경큰스님은 불과
36세의 나이로 전국의 유명 고승들의 대열안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옛거울 가운데의 호한이여(古鏡中之胡漢)" 어떠한 뜻을 지닌 말인가?
옛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대(臺)위에 밝은 거울이 있어
검은 얼굴의 호인(胡人)이 오면 검게 나타나고
붉은 얼굴의 한인(漢人)이 오면 붉게 나타나네.
明鏡當臺 胡來胡現 漢來漢現.
밝은 거울에는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비친다. 밝은것이오면 밝게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둡게 비치고,고운것이 오면 곱게,미운것이 오면 밉게 비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울 그자체는 밝음과 어두움, 곱고 미운 것에 속해 있는것이아니다. 그야말로 거울은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되 비추지만, 거울에 비친 상은 모두가 허허로울 뿐이요 거울 그 자체는
묵묵할 뿐이다.
거울 속에 나타나는 수많은 허상(虛像)들.......
고경스님은 참으로 밝은 거울과 같은 분이셨다. 일대의 대법사(대법사)요 대강사(대강사)요.
대율사(대율사)로서 수많은 후학들을 깨우쳤지만, 인생 그자체가 거울 속의 모습이요 거울속의
그림자(幻影)처럼 온 것임을 깊이 체득하셨던 스님이었기에, 평생을 거울 속의 그림자(幻影)처럼
머물다가 그림자(幻影) 처럼 떠나 가셨던 것이다.
*스님의 비를 제막하고..일타(左),화산(中),일고(右)스님..문중상좌 孫 상좌 스님들....
일타,화산스님뒷 孫사장인 제주도 남국선원 성묵스님...그리고 선조,한우스님도....*
고경스님은 고종20년(1883년)울주군 삼남면 작하리에서 아버지 윤성각과 어머니 申氏로 부터 태어났다.
1896년 스님 나이14세에 고향에서 가까운 대본사 통도사(통도사)로 출가하여 혼응기연대사(混凝琪衍大師)를 은사로 모시고 법전(法典)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산중장로 환담예은대사(幻潭禮恩大師)의 손상좌가 된 것이다.
두분의 고승은 법전에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쳤다. 특히 환담대사의 손상좌에 대한 가르침은 지극하였고
그 가르침 속에서 스님은 들으면 잊지 않고 마음에 담으며 깨우치는 타고난 총명에 힘입어 모르는 바가 없고 통하지 않는 바가 없는 무소부지(無所不知)무소불통(無所不通)의 세계를 열어 갔다.
스님은 경을 보고 배우는 그 자체가 기쁨이었고 크나큰 행복이었다. 그중에서도 스님은 특히 <화엄경>이 좋았다. 부처님의 깨달으신 경지, 그 깨달음의 세계를 곧 바로 나타내었다는 <화엄경>을 외우면 가슴 저 밑바닥 까지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스님은 80권의 방대한 <화엄경>을 모두 외우다시피 하였다.
스님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경과 율을 남감없이 통달하여 불지종가(佛之宗家) 통도사의 대강백(大講伯)으로 추대(推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도사 대중들이 스님을 대강백으로 추대한 대에는 더 큰 까닭이 있다.
경을 통달하기에 앞서 스님의 성실하고 진지한 인생관이 모든 사람을 깨우친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삶의 태도는 홀로 계셨던 어머니에 대한 마음 씀씀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학인시절! 봄철의 보리타작을 할 때가되면 스님은 매년 은사스님께 간절히 허락을 구하였다. 물론 그이전에 은사스님을 위해 김치등 반찬도 준비하고, 빨래도 마치고 나무도 해 놓고,걸래까지 몇개 빨아 놓기를 잊지 않는다.
"스님. 이제 보리타작 할 철이 되었습니다. 집에 계신 노모(老母)혼자서 하시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3일 동안만 보리타작을 돕고 싶습니다." ......."오냐! 다녀오너라." 허락이 떨어지면 스님은 미리 삼아둔 미투리 짚신을 신고 그 시간부터 뛰기 시작한다. 통도사부터 어머니가 계시는 집 언양까지 20리를 쉴 새 없이 달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께 절 한번 올리고 곧 바로 보리밭으로 나가 일을 시작한다.
보리를 베고, 벤보리를 한 웅크씩 새끼로 묶은 다음,땅에다 보릿단을 힘껏 내리치면서 타작을 한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기를 3일, 타작을 끝내고 어머니에게 절을 한번 한다음 통도사까지 뛰어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강백을 하기에는 어린 나이여서 때로는 뜻하지 않는 일화가 생기기도 한데......
스님이 강백이 되였던 1908년은 한글보다는 한문을 더 많이 스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강원의 학인들 중에는 한문에 능한 이가 매우 많았다. 20세가 되기 전에 사서 삼경을 모두 통달하고 온 사람, 한문을 곧 바로 한글로 풀어서 읽는 자도 있었다. 또한 나이가 40세를 넘은 학인도 많이 있었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