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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법집경 제1권
[광대한 법집의 법문]
이때에 무소발 보살마하살이 분신혜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매우 깊은 법집(法集)을 물었구나.
선남자여, 이것은 뛰어나고 묘하며 광대한 법집의 법문이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내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과 여래의 가피력(加被力)을 받들어 그대를 위해 말하겠다.
어떠한 것이 광대한 법집의 법문인가?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탄생을 안다]
선남자여, 보살이 열 가지 법행(法行)에 들어가면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탄생을 안다고 하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지어내는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태어나고,
모든 심의(心意)와 의식(意識)의 몸을 바꾸고 여의었기 때문에 적정을 행하며,
모든 것이 나고 죽으므로 나고 죽는 행을 나타내 보이고,
과거의 행을 의지해서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과보의 행을 실천하며,
걸림이 없는 법계(法界)를 얻어 행하고 모으기 때문에 모든 것을 모아 업을 지으며,
열 가지 큰 서원으로써 으뜸을 삼고 백천만 아승기(阿僧祇: 아주 큰 수)의 서원을 만족히 하여 웅장하게 꾸몄기 때문에 장엄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의 가피(加被)를 얻었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가피라 하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선근을 따라 짓기 때문에 모든 업을 지음이 모여 일어나며,
대자대비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때를 따라 중생의 선근에 주지(住持)하여 취심(吹心:마음에 불어넣음)하기 때문에 깊은 마음을 얻으며,
중생의 마음이 행함을 따라 차별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태어남을 나타낸다.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태어나심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여래의 진실한 몸을 안다]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여래의 진실한 몸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진실로 몸을 삼음이니 맑고 깨끗하여 때가 묻지 않기 때문이고,
법계로 몸을 삼으니 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몸을 삼으니 두루 이르기 때문이고,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으로 몸을 삼으니 진실로 적정하기 때문이며,
허깨비나 아지랑이ㆍ메아리ㆍ수중의 달ㆍ건달바성(乾闥婆城)ㆍ돌려서 이루어진 불바퀴[旋火輪: 쥐불놀이할 때 생기는 불의 원(圓)]로 몸을 삼음이니 변화하는 인연으로 이런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 몸을 삼으니 물질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법의 자성으로 몸을 삼으니 자성이 선명하고 결백하기 때문이고, 과거는 오지 않으니 간격이 없기 때문이며,
미래는 갈 수 없으니 형체가 없기 때문이고, 현재는
머물지 않으니 과거와 미래는 없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진실한 몸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른 인연을 위하는 까닭으로 성취함을 안다]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여래께서 다른 인연을 위하는 까닭으로 성취함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방일하지 않게 실천하면 씨앗이 되니 선법의 과보를 성취하고,
지혜의 방편으로써 생기니 허물이나 실수가 없으며, 시바라밀을 행하여 만족하니 선거(善去)하며,
보리심으로 생명의 뿌리를 삼으니 죽거나 없어지지 않으며,
사마타(舍摩他)ㆍ비바사나(毘婆舍那)로 손[手]을 삼으니 선교(善巧:아주 뛰어남)한 업을 지으며,
믿는 업과 과보로 눈을 삼기 때문에 지혜가 나타나고,
수행하여 모든 바라밀을 성취하니 위가 없는 곳에 잘 머물며,
사섭행(四攝行)을 의지하여 머무니 견고함을 실천하며,
공한 지혜를 닦는 것으로으뜸을 삼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이 없고,
수행할 때에 피로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중생과 함께 지어내는 일의 업을 버리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다른 인연을 위하는 까닭으로 성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진실하게 항상 머무르심을 안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진실하게 항상 머무르심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성냄과 원한과 허물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나[我]와 내 것[我所]을 취하지 않으며,
항상 모든 중생을 위하여 좋은 법을 짓고 의지하니 좋은 의사와 같으며,
과거의 좋은 서원이 만족해졌으므로 얻은 것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저 중생을 의지하여 대자(大慈)를 일으키므로 모든 업을 잘 지으며,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일만을 위하여 마음을 일으키니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며,
자기의 이익을 버리기 때문에 다른 이를 대신하여 괴로움을 받으며,
열반을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었으니 세간의 열반으로써 한 가지 맛의 모양[相]을 삼으며,
피곤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행하니 모든 짓는 것이 자연스럽게 성취되며,
모든 구하는 일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뼈나 살로 된 육신이 없으며,
형상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처소에서 열반을 나타내 보이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진실로 항상 머무르심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대열반을 안다(1)]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대열반을 아느니라.
어찌하여 열 가지인가?
마침내 모든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을 여읜 까닭이며,
내가 공하고 법이 공하며 내가 없음을 두루 아는 까닭이며,
의생신(意生身)을 여의고 두루 갖춘 법신을 얻는 까닭이며,
모든 중생에게 불사를 지어 쉬지 않으면 자연히 두루 갖춘 지혜를 얻는 까닭이며,
모든 부처님의 차별이 없는 법신을 얻는 까닭이며,
세간 열반과 상응심과 불상응심[二心]을 멀리 여읜 까닭이며,
일체법의 근본이 맑고 깨끗한 까닭이며,
일체법을 수행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지혜를 얻는 까닭이며,
진여의 법성이 실제로 평등한 지혜를 얻은 까닭이며,
일체법의 자성과 열반성이 평등한 지혜를 얻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法行)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대반열반을 안다고 말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대반열반을 얻은 것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번뇌는 구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구하는 것으로 인해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구함이 없으므로 번뇌를 여의었고,
번뇌를 여의었으므로 대열반을 얻었느니라.
구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는 한 가지 법도 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취하지 않으므로 행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취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여래께서 행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는가?
저 두 법을 여읜 법신은 없어지지 않으니 없어지지 않고 나지도 않는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여래께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는가?
저 부처님 여래를 말할 사람이 없으니 말할 수 없으므로 여래께서 대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내가 없고 중생이 없다는 것이 생멸법이니, 저 의지법(依止法)을 여의었으므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모든 번뇌와 수번뇌(隨煩惱) 등은 오직 이 객진(客塵)뿐, 법의 성품이 고요하여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니,
이런 까닭으로 법의 성품은 손님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며,
법의 성품이 이렇게 평등한 까닭에 여래께서 대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진여는 실체이므로 진여가 아닌 법은 곧 허망하다.
실체는 진여이며 진여는 곧 여래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실제(實際)는 아무 뜻도 없고 이익도 없는 말[戱論]이 아니며 나머지 법은 곧 희론이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는 결국에 실제이니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나지 않는 것이 실제이고 나머지 나고 없어지는 법은 곧 뒤바뀜이며 헛되고 속임이며 잘못된 말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잘못된 말씀은 하지 않으며 헛되고 잘못됨을 여의고 진실로써 몸을 삼으니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실제가 아닌 법은 지을 수 있지만 실제인 법은 지을 수 없다.
여래는 곧 실제인 법신이므로 몸이 나거나 죽지 않으니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 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대반열반하심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대열반을 안다(2)]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대반열반하신 것을 안다고 하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시와 보시의 과보와 내가 없음과 내 것이 없으니,
여래께서는 보시와 보시의 과보를 잘 아시고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뒤바뀜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지계(持戒)와 지계의 과보와 내가 없음과 내 것이 없으니,
여래께서는 지계와 지계의 과보를 잘 아시며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뒤바뀜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인욕과 인욕의 과보와 내가 없음과 내 것이 없으니,
여래께서는 인욕과 인욕의 과보를 잘 아시며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뒤바뀜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정진과 정진의 과보와내가 없음과 내 것이 없으니,
여래께서는 정진과 정진의 과보를 잘 아시며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뒤바뀜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선정과 선정의 과보와 내가 없음과 내 것이 없으니,
여래는 선정과 선정의 과보를 잘 아시며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뒤바뀜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반야와 반야의 과보와 내가 없음과 내 것이 없으니,
여래께서 반야와 반야의 과보를 잘 아시며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뒤바뀜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모든 중생은 중생이 아니고, 모든 법에는 내가 없으니,
여래께서는 모든 뒤바뀐 모양[相]을 멀리 여의었고 법의 모양도 멀리 여의었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아상(我相)이 있는 이는 곧 구하는 것이 있으니 구함이 있기 때문에 번뇌에 물듦이 있지만 아상을 여읜 이는 아예 구하는 것이 없으니,
구함이 없기 때문에 번뇌에 물듦을 여의었으며,
번뇌에 물듦을 여읜 까닭에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모든 나고 죽음이 있는 법[有爲法]은 헤아릴 수 있고 모든 나고 죽음이 없는 법[無爲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여래는 유위법과 무위법을 멀리 여읜 까닭으로 오직 유위와 무위의 법신(法身)은 양을 제한할 수 없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여래께서 만약 공을 여의었다면 중생을 보지 못하고 또한 법도 보지 못하느니라.
공은 곧 법이고 법은 곧 법신이며, 법신은 곧 여래다.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열반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대반열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행을 안다(1)]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행을 아느니라.
어찌하여 열 가지인가?
법으로 유지하면 유지되니 좋고 맑고 깨끗한 법이기 때문이고,
중생으로 유지하면 유지되니 자기의 서원이 만족하기 때문이며,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두 가지는 모양이 없으니 같은 일로써 행하기 때문이고,
맑고 깨끗한 마니(摩尼)가 분별이 없는 것처럼 분별하지 않으니 법계가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며,
편안하고 조용한 곳을 얻으니 모든 많은 괴로움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고,
두려움 없는 곳을 얻으니 영원히 모든 번뇌와 원한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며,
모든 마군(魔軍)과 원수와 도적에게 항복 받으니 모든 중생의 평등한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고,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응화(應化) 등의 몸이 되니 좋고 맑고 깨끗한 신통의 힘을 얻었기 때문이며,
뛰어난 솜씨로 모든 색상(色像)을 나타내 보여도 걸림이 없으니 허공과 같은 좋은 맑고 깨끗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 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행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행을 안다(2)]
“또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행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여래는 ‘세간의 법은 과실(過失)이 많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은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여래는 세간이나 열반에 평등한 마음이 되어 세간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으니,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이 모든 중생이 뒤바뀐 지혜로 여러 가지 번뇌와 수번뇌(隨煩惱)로 물들었지만 내가 이와 같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모든 여래는 과거의 서원과 실천을 의지해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와 성품(性品)과 믿음 따위를 따라저들이 행하는 가운데서 분별함이 없이 자연히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나는 이와 같은 수다라(修多羅)ㆍ이와 같은 기야(祇夜)ㆍ이와 같은 화가라나(和伽羅那)ㆍ이와 같은 가타(伽陀)ㆍ이와 같은 우타나(優陀那)ㆍ이와 같은 니타나(尼陀那)ㆍ이와 같은 이제월다가(伊諦越多伽)ㆍ이와 같은 사타가(舍陀伽)ㆍ이와 같은 비불략(毘佛略)을 말하였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부처님 여래는
‘나는 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를 말했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그러나 모든 여래는 분별함이 없으니 저들 중생이 들은 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부처님 여래는
‘나는 걸식을 위해 아무 나라와 크고 작은 성과 마을과 취락에 들어가 이와 같은 찰리(刹利)ㆍ바라문(婆羅門)ㆍ비사(毘舍)ㆍ수타(首陀)와 국왕ㆍ왕자ㆍ대신ㆍ국민 따위의 모든 중생의 처소에 이른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모든 여래는 지혜로 으뜸을 삼아 몸ㆍ입ㆍ뜻의 업이 자연스럽게 성취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기갈(飢渴)도 없고 대소변도 없으며, 몸이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야위거나 고달프거나 병의 괴로움이 없느니라.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걸식을 나타내어 실천하느니라.
그런데 모든 중생은 ‘여래께서 먹는다’고 말하느니라.
그러나 모든 여래는 실제로 잡숫지는 않느니라.
나타내어 보이는 것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니 모든 일에서 분별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이 모든 중생은 하(下)ㆍ중(中)ㆍ상(上)의 근기가 있다. 나는 이 하ㆍ중ㆍ상 근기의 모든 중생의 등류를 위하여 하ㆍ중ㆍ상에 따라 법을 널리 말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그러나 모든 여래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말한 법이며 자연스럽게 성취되어 증가하지도 않고 덜어서 줄어드는 일도 없으니 그릇을 따라 받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만약 모든 중생이나에게 공양을 주지 않고 나를 공경하지 않고 나를 헐뜯고 꾸짖는다면 나는 이와 같은 중생은 교화시키지 못한다.
또 어떤 중생은 공양ㆍ공경ㆍ존경ㆍ찬탄하며 나에게 공양을 주고 시중들면 나는 이와 같은 중생은 알맞게 교화시킨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모든 여래는 적정삼매(寂靜三昧)와 자비로 널리 저 중생을 덮어 주어 자연스럽게 평등한 법에 머물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여래는 높다는 마음이 없고 낮다는 마음이 없으며,
교만한 마음이 없고 사랑하는 마음도 없으며,
탐하는 마음이 없고 성내는 마음이 없고 탐함을 따르는 마음도 없으며,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걸리는 마음이 없고 막히는 마음이 없으며,
잡된 마음이 없고 번뇌의 마음이 없고 번뇌를 따르는 마음이 없으며,
성내는 마음이 없고 어리석은 마음이 없고 성냄을 따르는 마음이 없으며
어리석음을 따르는 마음이 없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여래는 자연스럽게 고요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고요한 경계를 찬탄하며 머물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여래는 한 법[一法]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없느니라.
모든 경계에서 마침내 만족하며 앞에 나타내 모두 알지만 모든 여래는 저 일들과 저 중생들이 지은 모든 업을 보고 자연스럽게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여래는 모든 중생이 수행해서 성취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며, 모든 중생이 수행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근심하지 않느니라.
그러나 모든 여래는 수행하는 중생에게 걸림이 없는 큰 사랑[大慈]으로 언제나 앞에 나타나 계시며, 그릇되게 행하는 중생에게도 걸림이 없는 큰 슬픔[大悲]으로 언제나 앞에 나타나 계시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행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비유가 서로 알맞은 것을 안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비유가 서로 알맞은 것을 알게 되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해가 위ㆍ중간ㆍ아래에 솟을 때 모든 중생들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평등하게 떠올라 평등하게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여래ㆍ응공ㆍ정변지도 이와 같아서
상ㆍ중ㆍ하의 모든 중생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출현하여 평등한 지혜 광명으로 널리 비추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허공은 모든 중생에게 막히고 걸림이 없으나 저 허공은 연기ㆍ구름ㆍ티끌ㆍ안개들의 사물로 막히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에게 막히고 걸림이 없지만 연기ㆍ구름ㆍ티끌ㆍ안개처럼 아견(我見)과 번뇌객진(煩惱客塵)에 막혀 여래를 보지 못하고 여래의 공덕과 이익을 받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나무에게 비록 불의 성질이 있지만 인연이 없으면 그 쓰임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비록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한 힘과 자재한 힘이 있지만 모든 중생이 정진과 믿음 따위의 인연을 멀리 여의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부처님의 일을 하지도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 물들일 물감을 한 그릇 안에 넣고 여러 가지 옷을 물들임에 다시 많은 물감을 섞어 한 그릇 안에 넣고 물들인 옷은 그 닿은 것을 따라 물들여진 색깔이 같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나 저 모든 물감은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여러 가지 선근 공덕으로 장엄하였으나 모든 중생의 믿음 따위의 훈습이 다름에 따라서 부처님 여래를 뵙고 받아들이는 공덕은 차별되고 같지 않느니라. 그러나 부처님 여래는 분별을 하거나 차별이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모든 물은 가득하게 차면 넘친다.만약 사람이 모두 아래로 흐르는 것을 헐뜯고 거슬러 흐르는 것을 찬탄한다면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거나 헐뜯어도 항상 지혜를 따라서 실천하니, 만약 교만을 따른다면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감자(甘蔗)를 만약 사람이 자르거나 자르지 않아도 저 감자의 단맛은 잃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사람들이 친근하고 가까이하며 공양 올리고 공경하거나 친하고 가까이하며 공양 올리거나 공경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끝까지 해탈의 단맛을 버리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대지(大地)는 그 성질이 편안하고 견고하여 모든 중생에게 분별함이 없느니라.
어떤 사람이 땅에서 과실을 구하려고 만약 씨앗을 심고 때맞게 김매고 거름을 주어 가꾸면 저 사람은 때가 되면 과실을 거두니라.
만약 씨앗도 뿌리지 않고 김을 매지도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끝끝내 과실을 얻지 못할 것이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저 대지는 고요히 항상 머물지만 저 중생에게 분별하는 것이 없느니라.
만약 중생이 부처님께 공덕을 구하려고 하여 믿는 마음과 공양 올리는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면 저 사람은 공덕의 과실을 얻을 수 있느니라.
만약 믿는 마음과 공양 올리는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공덕의 과실을 얻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성내고 비방하고 헐뜯고 꾸짖은 뒤에 전단향(栴檀香)이나 용뇌향(龍腦香) 따위를 몸에 발라도 이 전단향이나 용뇌향의 향기가 몸에서 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만약 사람이 화를 내며 비방하고 헐뜯고 꾸짖다가 친근하게 나오고 가까이하며 공양 올리고 공경하며 말씀하신 대로 수행하여도 모든 여래는 항상 중생과 함께 공덕을 두루 갖추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다리[橋梁]나 평탄한왕의 길은 모든 중생의 상ㆍ중ㆍ하의 품성으로서 가고 오는 이가 평등하게 머묾에 있어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상ㆍ중ㆍ하의 품성인 모든 중생으로서 수행하는 이는 평등하게 머물러 높거나 낮음이 없이 막히거나 걸림이 없이 수행하는 즐거움이 있느니라.
선남자여, 비유를 들자면 설산(雪山)에 선견(善見)이라 부르는 약이 되는 나무 왕[藥樹王]이 있는데, 저 약이 되는 나무 왕을 보는 이가 있으면 곧 모든 병의 괴로움을 멀리 여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도 이와 같아서
중생이 여래를 뵙기만 하면 모든 번뇌의 병이나 괴로움에서 멀리 벗어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 하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비유가 서로 알맞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을 안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습기불(習氣佛)ㆍ과보불(果報佛)ㆍ삼매불(三昧佛)ㆍ원불(願佛)ㆍ심불(心佛)ㆍ실불(實佛)ㆍ동불(同佛)ㆍ화불(化佛)ㆍ공양불(供養佛)ㆍ형상불(形像佛)을 말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습기불이라 하는가?
습기불이란 모든 바라밀의 과보로 얻은 것이며, 모든 바라밀로 이 법을 성취했느니라.
저 모든 바라밀을 의지해서 생기니 이것을 습기불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과보불이라 하는가?
과보불이란 습기를 의지해서 생긴 부처님이며, 과보로써 성취한 색신(色身)인 보불(報佛)이니라.
중생을 의지하여 머물러 유지하고, 법의 힘을 의지하여 머물러 유지하니 이것을 과보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삼매불이라 하는가?
삼매불은 여래가 어떤 삼매에 드는가에 따라 저 삼매에 든 힘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시 마음을 내지 않고백천만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이며,
저 삼매를 의지해 주지(住持)하는 힘 때문에 나타내 보이니 이것을 삼매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원불이라 하는가?
원불은 모든 보살들이
‘어떻고 어떠한 중생을 따라서는 이러한 인연과 이러한 법으로써 여러 가지 색신(色身)을 나타내 보여 저 중생들을 제도하고,
저들 중생이 이러저러하면 이러저러한 형색과 모습과 위의를 나타내어 제도하며,
저 중생을 따라 부처의 몸으로써 제도시키기에 적합한 이는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저 중생을 교화시키겠다’는 서원을 하니,
이것을 원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심불이라 하는가?
심불은 모든 보살이 자재할 수 있는 것을 얻는 것이니, 이 모든 보살은 마음의 자재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법에서 마음을 따라 성취하느니라.
이 모든 보살은 모든 중생이 당연히 부처님 몸을 뵙고 교화시킬 수 있는 이면 곧 자재한 마음으로 곧 부처님 몸을 이루니,
이것을 심불이라고 하느니라.
또 선남자여, 다시 다른 뜻이 있으니, 모든 중생들 스스로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알고, 부처님을 믿으니,
이를 심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실불이라 하는가?
실불은 모든 번뇌에 물드는 것을 멀리 여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때가 없이 맑고 깨끗한 여러 가지 형태와 색깔의 32상(相)과 80종호(種好)의 대장부 모습[相]을 마침내 성취한 부처님의 미묘한 색신으로 지금 나타내 보일 수 있으니,
이것을 실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동불이라 하는가?
동불은 모든 중생과 더불어 자업(資業:생활 수단의 직업)과 받아씀과 음식과 가고 머물고 가고 오는 위의와 나아가고 그침을 함께하는 것이니,
이것을 동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화불이라 하는가?
화불은 모든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이 모든 색신삼매(色身三昧)를 나타내 보여 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자재함을 성취하고대자대비를 모두 나타내 보임을 얻으며 화불의 색신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니,
이것을 화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공양불(供養佛)이라 하는가?
공양불은 어떤 사람이 스승이나 화상(和上:和尙)을 부처님같이 보면 저 사람에게 스승과 화상은 부처님과 같을 것이니라.
마땅히 이와 같이 보고 공양하며 저 분을 의지하여 법을 받고 부처님 법에 만족하며 부처님 법을 성취하면
이것을 공양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형상불(形像佛)이라 하는가?
형상불은 어떤 사람이 만약 다른 이를 시켜 불상을 조성하거나 스스로 불상을 조성하거나에 상관없이 모든 공양과 공경하는 일로써 공경하고 공양 올리며 존중하고 찬탄하며 가까이하고 공급하고 모시면서 이 사람이 이와 같은 저 형상불을 의지해 부처님 법에 만족하고 부처님 법을 성취하면
이것을 형상불이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열 가지 부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오직 말을 의지하여 설법하는 것을 안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면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오직 말[言辭]을 의지하여 설법하는 것을 아느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음(陰)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며, 계(界)를 말함ㆍ입(入)을 말함ㆍ중생을 말함ㆍ업을 말함ㆍ태어남을 말함ㆍ늙음을 말함ㆍ죽음을 말함ㆍ죽고 나서 다시 태어남을 말하는 것도, 저러한 일을 여의게 하는 것도 말뿐인 까닭으로 열반이라 말하지만 또한 말뿐인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음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제일의(第一義) 가운데 색음(色陰)은 없느니라.
만약 제일의 가운데 색음이 있다 하더라도 저 색음을 버리면 곧 끊어져 없어질 것이니 저러한 법을 버리는 것이 곧 해탈이니라.
만약 이와 같다면 제일의 가운데 색과 해탈이 가고 머무는 곳이 있어야 하나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색음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저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제일의 가운데는 저 식음(識陰)도 없느니라.
만약 제일의 가운데 식음이 있다 하더라도, 저 식법을 버리면 곧 끊어져 없어질 것이니, 저 법을 버리면 곧 해탈이니라.
만약 이와 같다면 제일의 가운데 식과 해탈이 가고 머무는 곳이 있어야 하지만 뜻은 그렇지 않다.
이런 까닭으로 식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인 것이니라.
선남자여, 계(界)와 입(入)의 뜻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중생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오로지 인연에 의해 나고 죽을 뿐 중생은 없느니라.
만약 중생이 진실로 있다면 같은 음(陰)이 다 없어지는 것은 알맞지 않다.
만약 같은 음이 다 없어진다면 당연히 허공과 같으니라.
만약 그렇지 않은 것이면 당연히 5음(陰:5蘊)이 같고 이것은 나고 죽는 것이 있음과 함께하지만 뜻은 곧 그렇지 않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중생이란 말을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업(業)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업을 짓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라.
만약 업을 짓는 것이 있다면 업을 지을 이는 없느니라.
저것을 짓는 것은 허공과 같으니라.
또 음(陰)과 같이 이것은 나고 죽으며 변화하느니라. 짓는 것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러한 뜻인 까닭에 저것을 짓는 이도 없고 또한 짓는 업도 없어서 허공과 같은데, 무엇을 지음이 있게 된다고 말하는가?
이런 까닭으로 업을 짓는 이가 없는데 저 짓는 이를 여의고 어찌 업이 있다고 말하는가?
이런 까닭으로 업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태어남[生]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제일의에는 태어남이 없느니라.
만약 제일의에 태어남이 있다면, 태어남은 곧 항상하는 것이니라.
만약 이와 같다면 태어남은 곧 태어남이 아니며, 또다시 태어남은 태어남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니 태어나서 번뇌하는 것은결국 누가 하는 것인가?
이런 까닭으로 태어남이라 말하는 것은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늙음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제일의에는 늙음이 없느니라. 만약 제일의 가운데 늙음이나 늙은이가 있다면 한 사람이 없어도 늙음은 있어야 할 것이니라.
또 만약 늙을 것이 있다면 곧 젊은 시절의 늙음이니 만약 젊은 시절의 늙음이라면 늙은 시절의 늙음은 아니다. 젊은이는 늙음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젊은 시절에는 늙음이 없느니라. 만약 늙음을 여의었다면 무엇을 늙었다 하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늙음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죽음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니라.
선남자여, 제일의에는 죽음이 없느니라.
만약 제일의 가운데 죽음이 있다면 곧 죽음의 법을 얻을 수 있으니 만약 죽음의 법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오로지 한 사람만 얻으면 나머지는 당연히 죽지 않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죽는 이가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제일의에는 죽음의 법이 없느니라.
또 죽은 이는 좇아 올 곳이 없고, 가도 이를 곳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죽음의 법은 체성(體性)이 비고 고요[空寂]하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죽음이라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제일의에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남이 없느니라.
만약 제일의 가운데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죽음이 곧 태어남이고, 태어남이 곧 죽음이니라.
만약 이와 같다면 죽음과 태어남은 곧 한 법이며, 또 당연히 두 몸이니라.
첫째는 태어남에 의탁되었고,
둘째는 이미 태어남을 받은 것이니라.
만약 태어남을 받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5음(陰)이 있어 태어남을 받는다.
무슨 까닭인가?
5음을 여의고는 저 식(識)이 생길 수 없으며, 색ㆍ수ㆍ상ㆍ행 따위의 법을 의지해야만 식심(識心)이 생기게 되니 모든 음을 의지하므로 식과 반연(攀緣)이 거기에 머무느니라.
만약 의지함을 여의면 곧 저 식심은 한 생각에도 머물지 못하느니라.
저 법과 같이 머물고 이같이 태어남을 받으며 종자와 같이 싹이 나니,
이런 까닭으로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엇을 저 일을 여의면 반열반(般涅槃)한다고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가?
선남자여, 제일의에는 열반이 없느니라.
열반이란 것은 세간의 적멸을 알면 열반이라고 하지만 곧 세간을 열반이라 하지 않으며 또한 세간을 여의고 열반이 있는 것도 아니니라.
세간은 꿈과 같고 환술과 같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나 법이 있으니, 이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와 같은 이름이 생겼고,
이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이름이 없어지고 모든 세간의 형상이 적멸된 것을 열반이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생각은 아지랑이나 거품과 같아서 저 아지랑이나 거품과 같이 생기고 사라지니 실체가 없느니라.
세간 열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런 까닭으로 세간에서 열반이라고 말하지만 오직 말뿐이라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법행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며,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서 오직 말에 의지해 설법하심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