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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무언동자경 상권
[도(道)와 언교(言敎)는 평등하다]
이에 동자가 그 법회의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불도[道]와 언교(言敎)는 평등하여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볼 수 없고 가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다고 말함은 입으로 그 도를 말할 뿐 형상이 없기 때문이고,
가질 수 없다고 말함은 사람이 그 도를 구하기는 하여도 처소가 없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처소가 없으므로 머무는 곳이 없고, 머무는 곳이 없는 곳에 머무는 그것이 바로 도의 머묾입니다.
모든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이 또한 이와 같고
그 밖의 무수한 공덕의 뿌리도 모두다 이와 같아서,
언교를 말하더라도 말할 것이 없기 때문에 언교란 다만 음성을 빌린 것이고 실지로는 언사가 없는 것입니다.
[보시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보시를 말해보더라도 보시하는 이와 보시 받는 이와 보시[惠與]에 회향하는 곳이 있어서 도가 일체에 평등하게 머물게 되니,
가엾이 여기는 말을 하거나 불도의 가르침을 베풀어 자비로운 마음을 행하는 그 도의 자연스럽고 평등함이 저 허공과 같습니다.
마음의 깨달음에 따라 말하여야만 그 말의 모든 것이 다 청정함을 헤아릴 수 있고, 그 도가 허공과 같이 상서롭기가 이와 같습니다.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이 보시한다거나 보시 받는다는 온갖 번뇌를 모두다 버려야만 시도무극(施度無極:布施波羅蜜多)이라 할 수 있으니, 힘써 행해야 할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보시는 도의 은혜가 아니라고 하든가 도는 보시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두 가지 일이 단지 음성을 빌린 것뿐이며, 진실로 아무런 집착이 없고 어떤 형상도 없는 것입니다.
가령 이와 같이 도와 언교를 받아 간직한다면 보살행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시도무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왜냐 하면 보시하는 시주가 청정하여 그 보시한 것에 대한 갚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율의 가르침]
그리고 귀로 계율[禁戒]에 대해 듣고서 색(色)에 집착하지 않으면 생겨나는 것이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니, 이를 계율이라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계율을 닦는 자도] 그 몸과 입과 마음으로 하는 일이 모두 조작함이 없고 모두 소유하지 않으며, 또한 분별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강설함에 있어서 어떤 인연은 서로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입으로 말하는 그 명칭을 곧 계율이라 하거나 또는 입으로 말하는 그대로가 바로 계율이라 하거나 이 두 가지 일은 모두다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계율의 업이란 그 일체가 다만 언어를 빌렸을 뿐이고 아무런 장구(章句)가 없는 것이며,
또 도를 헤아려본다고 하더라도 어떤 말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입으로 드러내 말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또는 몸으로 업을 지어도, 이 계율은 도덕을 힘써 돕는 것이니,
계율을 도라고 말하고 말로서 계율을 밝히려는 그 일체가 모두 형상이 없어서 마치 저 허공과 같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이것으로써 그 매우 깊고도 미묘한 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동자가 다시 게송을 읊어 찬탄하였다.
말과 마찬가지로 도(道) 또한 그러하여
간직할 것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한 말에서도 볼 것이 없는 것이
내가 선설하는 불도라네.
서원을 세워 도를 구하지만
그 바라는 것도 머묾이 없으므로
머묾도 없고 있는 곳도 없으니
도가 존재하는 곳 또한 이와 같다네.
모든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도 그와 같고
모든 공덕을 짓는 것도 그러하여
언사(言辭)란 다만 음성을 빌린 것일 뿐
말한다해도 아무런 말할 것 없는 것이네.
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보시해야 마땅한 곳에 보시하는 것이니
그래야 비로소 보시 받는 이가
모두 평등한 도에 머물게 되리라.
입으로 보시를 드날리고
불도의 일을 설명한다면
그 도는 또한 자연 그대로
저 허공처럼 평등하리라.
만약 마음을 훤히 깨칠 수 있다면
입으로 선설하는 것
그 모두가 다 청정하고
청정함을 듣는 자도 모두 도에 나아가리라.
몸과 입과 마음에서
온갖 번뇌를 모두 버리고
남에게 권하기를 또한 그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도무극(施度無極)이네.
보시는 도에 귀착되지 않고
도가 보시를 의지하지 않으니
이 두 가지는 모두 이름을 빌렸을 뿐
집착도 없고 형상도 없는 것이라네.
만약 의지하는 바가 없고
도를 받아들임 또한 그렇게 하며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것을 바로 보시라 하네.
가령 계율을 들음에 있어서도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아서
일으키지도 않고 멸할 것도 없으면
이것이 바로 계율의 모습이라네.
계율을 행하지 않음도 이와 같아서
몸ㆍ입ㆍ마음에 다름이 없으며
지음도 없고 소유한 것도 없이
임시로 말이 존재할 뿐이네.
인연이 합쳐져 말이 있고
이름을 붙여서 계율이라 할 뿐
나의 계율은 바르고 평등하니
이 두 가지 일은 번뇌가 없다네.
계율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모두가 말을 빌린 것일 뿐
도의 이치를 얻은 자로선
말도 없고 업도 없다네.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계율로써 도의 이치를 힘써 권하는 것
계율과 불도의 가르침을 생각함이
모두가 저 허공과 같다네.
만약 이것을 훤히 깨우친다면
그는 곧 홀로 뛰어나 널리 계율에 들어
도에 노닐고 머물게 되리니
그 깊고 오묘한 장구(章句)를 깨닫게 되리라.
[인욕의 가르침]
그때에 동자가 또 그 법회에 온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인욕의 가르침이란 또한 하나의 언사이고 공(空)과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비로소 인욕이라 할 것이니,
인욕은 바로 평등과 같아서 3계도 이와 같고,
인욕을 말하는 것은 어떠한 부류의 형상도 없는 것이어서 볼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이 평등한 마음을 인욕이라 합니다.
만약 텅 비어 고요한 것을 인욕의 근본이라 한다면,
소리와 냄새ㆍ맛 따위는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고 그저 문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욕이란 말을 선창하는 것입니다.
여래ㆍ정각께서 세 가지의 인욕을 말씀하셨으니,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이요,
이러한 인욕을 훤히 깨달은 자라야만 인욕을 수행한다 할 것입니다.
가령 그 몸뚱이를 자르고 팔ㆍ다리를 갈래갈래 찢어버린다 하더라도 성내는 마음과 몸뚱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그 몸뚱이를 마치 장벽(墻壁)처럼 본다면 그것이 바로 몸에 대한 인욕입니다.
아무리 나쁜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듣더라도 모두 참아 견디어 내고, 모든 언사에 있어서 그 말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입에 대한 인욕입니다.
온갖 더러움 속에 뒤섞이더라도 마음이 고요하여 우울하지 않고 마음으로 모든 문자를 잘 분별한다면 그것이 바로 마음에 대한 인욕입니다.
이러한 인욕을 수행하되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이 함께 일치되어야만 비로소 인욕의 도(道)라고 합니다.
[정진의 가르침]
성교(聖敎)를 널리 전하고 여러모로 힘써 돕는 자는 가장 훌륭한 것이건 보잘것없는 것이건 또 보통의 것이건 온갖 정진을 억 겁이 다하도록 하여, 얻지 못할 것도 성취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정진하더라도 미칠 수가 없고, 도덕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것, 이것을 바로 정진이라 합니다.
닦는 정진을 설령 이와 같이 하더라도 겁내지 않고 공포를 느끼지도 않는다면,
대정진을 최고로 잘 통달한 용맹스러운 보살로서 인의(仁義)를 다 갖추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동자가 거듭 게송을 읊었다.
인욕의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입으로 선창하는 것이고
공과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인욕이라 하며
그 인욕은 3세에 평등하다네.
아무리 인욕의 모습을 말하더라도
모습이 없어 볼 수 없으니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인욕이라 할 수 있다네.
인욕은 텅 비고 고요한 것이라
소리와 냄새ㆍ맛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
거기에 어떤 문자도 없는 것
이것을 인욕이라 한다네.
세존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인욕
그 몸의 행과 입의 말과 마음의 생각을
누구라도 훤히 깨달아 널리 편다면
인욕이라 말할 수 있다네.
가령 온몸 마디마디를 잘라버리더라도
마음에 성내는 마음을 품지 않고
몸뚱이를 마치 장벽처럼 본다면
이것을 몸에 대한 인욕이라 한다네.
아무리 나쁜 말을 듣더라도
그 욕하는 말에 보복하지 않고
모든 언사를 다 참아 낸다면
실로 그 말에 머물 수 있네.
어떠한 더러움 속에 뒤섞이더라도
마음이 고요하여 우울하지 않고
그것이 공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마음에 대한 인욕이라 한다네.
인욕의 도 또한 그러므로
몸과 입과 마음을 이와 같이 한다면
그것을 곧 도라고 하며
불도를 힘써 돕는 것이라 하리라.
모든 정진을 다하여
최상이건 보통이건 보잘것없는 것이건
억천 겁이 지나도록
얻지 못한 것을 성취하리라.
정진으로 얻을 수 없고
도덕으로도 잡을 수 없어
일체법에 미칠 수 없다면
그야말로 정진이라 하리라.
만일 온 힘을 다해 이를 행하며
겁내지 않고 어렵게 여기지도 않는다면
그를 곧 뛰어나게 정진하는
용맹스러운 보살이라 하리라.
[선정의 가르침]
이에 동자가 다시 법회에 온 여러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른바 선정[禪思]이란 생각하는 것도 없고, 선정을 헤아려보아도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어서 모든 생각을 버려야만 곧 적도무극(寂度無極:禪定波羅蜜多)이라고 합니다.
고요하고도 맑고 깨끗하여 말이 없고 게으름도 없이 모든 번뇌를 여의어 없애버려야만 곧 적도무극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모든 법에 대해서 버리지도 왔다갔다하지도 않아 마음에서 마음을 여의어야만 이것을 적도무극이라 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선정이 불도를 향한 마음에 이르러서도 늘 평등하게 온갖 일을 관찰합니다.
만일 평등할 수 있다면 모든 관찰에 있어서 삿됨도 올바름도 없으리니, 이것이 이른바 불도는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혜의 가르침]
문자도 없고 말할 것도 없으며, 끝이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며, 게으름도 없고 제 멋대로 하는 일도 없어야 이를 곧 지도무극(智度無極:智慧波羅蜜多)이라 합니다.
[생사의] 이 언덕도 없고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도 않습니다.
또한 이쪽 저쪽에 머묾이 없고, 법계를 바르게 건립하지만 머묾도 없고 또한 집착도 없으며, 문자도 없고 선포할 것도 없으며, 문자가 없으므로 다시는 일체의 생각을 거론하지도 빌리지도 않습니다.
만일 이러한 법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를 곧 지도무극이라 합니다.
6도무극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이치를 평등하게 관찰한다면 일체 모든 법에 평등할 수 있고 또한 모든 중생에게도 평등할 수 있으며,
만약 일체 모든 법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에게 평등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께 평등할 수 있으니, 모든 부처님께 평등하였다면 그는 일체지(一切智)를 잘 받들어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두려움 없는 용맹이 이와 같다면 바로 끝없는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가르침의 명령[敎命]에 순종할 수 있다면 곧 불가사의한 법안(法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에 동자가 거듭 게송을 읊었다.
선정이란 생각하는 것 없고
오롯한 마음으로 머무르는 곳 없이
일체의 모든 생각을 다 끊어야만
적도무극이라고 이름한다네.
고요하고도 맑고 깨끗하게
게으르지 않고 번뇌도 없이
온갖 더러운 번뇌를 다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적도무극이네.
또 그 마음이 일체의 법에
버림도 또 가고 되돌아옴도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그 마음을 벗어나야만
고요히 저 열반의 언덕에 닿는다네.
마음과 도를 따져보고
그것을 관찰해보면 모두가 평등하니
만약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다면
불도는 얻기 어려운 것 아니라네.
문자를 버리고 말도 없이
근본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기뻐하지도 않고 방자하지도 않아야만
이를 지혜라고 한다네.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으로 건너지도 않고
이쪽 저쪽에도 머물지도 않으며
법계를 올바르게 건립하되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네.
문자로서 선포할 것이 없어
모든 생각과 함께 하지 않으니
이렇게 모든 법을 받아들여야만
이를 지혜라고 한다네.
모든 도무극이 다 그러하므로
동일한 이치로서 관찰한다면
모든 법에 평등하고
모든 중생에게도 평등할 수 있다네.
모든 법에 평등할 수 있다면
모든 중생에게 평등할 수도 있고
모든 법에 평등할 수 있다면
곧 일체지와 똑같다네.
그러므로 큰 지혜로
보살이 용맹하게
이 가르침의 명령을 따를 수 있다면
불가사의한 법안을 얻게 되리라.
[이 법문의 공덕]
그곳의 모든 정사(正士)에게 이 장구(章句)를 설하여 그 모든 갈래를 분별하자 1,200대중이 모두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켰고, 6만의 보살들이 무소종생법인(無所從生法忍:無生法忍)을 얻었다.
그때 연꽃 위에 앉았던 모든 보살들이 곧 연꽃으로부터 내려와 부처님께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는 다시 무언보살에게 예배하고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언보살이시여, 저희들도 성사(聖師)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정성껏 바른 법을 좋아하고 경전을 받들어 섬기며, 효순(孝順)하게 수행하기를 반복해서 하겠습니다.”
이때 현자 사리불(舍利佛)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여러 보살들은 무엇 때문에 입으로 여래에게
‘저희들도 효순하게 수행하기를 반복해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선포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대답하셨다.
“이는 모두가 무언보살이 여러 보살들에게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해 그들에게 불도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과 인의예절(仁義禮節)의 행동과 위없이 바르고 참된 대승의 교법을 연설함으로서 그 듣지 못한 자를 개화하여 불도를 향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효순하게 수행하기를 반복해 스승의 은혜를 갚는 것이므로 이제 일부러 여기에 와서 공양의 공덕을 행하고,
또 이 법회의 대중들이 부처님을 받들고서 경전에 대한 설법을 듣는 그 광경을 보려고 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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