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장진론 상권
[유위와 무위]
진성(眞性)에서 유위(有爲)는 공(空)하네.
마치 환(幻)과 같으니, 인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네.
무위(無爲)에서는 실체가 있지 않아
일어나는 것이 없으니, 마치 공화(空華)와 같네.
진성(眞性) ① 있는 그대로의 본성·상태. ②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 집착이 없는 청정한 성품. |
자신과 남의 종(宗)에 관하여 헤아리고 차별하여 비록 수많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이 있으나
인식되는 경계에는 간략히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이고,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삼성(三性) ① 의식에 형성되어 있는 현상의 세 가지 성질.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온갖 분별로써 마음 속으로 지어낸 허구적인 대상.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인 차별상. (2) 의타기성(依他起性). 온갖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인식 작용. (3) 원성실성(圓成實性). 분별과 망상이 소멸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청정한 모습. |
여러 어리석은 범부는 승의제의 이치인 유위와 무위의 전도됨이 없는 성품을 바르게 깨달아 알지 못하여, 헛되이 모든 법의 자성에 집착하고 차별하여 여러 삿된 견해의 그물을 더한다.
마치 두려워할 만한 야차의 모습이나 혹은 여인의 모습을 그려 놓고 눈이 아찔하고 어지러워져서 뜻에 실제로 있다고[實有] 하고는,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까닭에 스스로 두려워하거나 흑은 탐욕에 물듦을 일으키고,
저 경계에 대해서 수없이 헤아려 여러 견해의 그물이 증장하고 분별하는 것과 같다.
만약 승의제의 이치인 유위와 무위의 전도됨이 없는 성품을 바르게 깨달아 알면, 이 때 세간의 지혜로운 화공은 저것에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나니,
앞에서 설한, 유위와 무위의 경계를 차별하는 삿된 견해의 그물에 스스로 묶여 마치 누에가 고치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저것이 있지 않는 까닭에 무분별의 지혜에 나아가 행을 이룬다.
승의제(勝義諦) 산스크리트어 paramārtha-satya ① 분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된 진리. 분별이 끊어진 후에 확연히 드러나는 진리. 직관으로 체득한 진리. ② 가장 뛰어난 진리. 궁극적인 진리. 가장 깊고 묘한 진리. ③ 진리의 세계. |
[유위의 변론]
이 뜻을 드러내어 먼저 유위를 변론하는 것은, 모든 세간은 이 유위의 경계에 대해 여러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성(眞性)에서 유위(有爲)는 공(空)하네. 마치 환(幻)과 같으니, 인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네”라고 말하는 것은
세간에서 존재[有]를 모두 용인하기에 자종(自宗)도 또한 세간의 존재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세간의 현량(現量)이나 생기(生起)의 인연(因緣)도 역시 존재를 용인해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눈 등의 유위는 세속제(世俗諦)에 포함된다. 심지어 소치는 사람까지도 모두 다 눈 등의 유위를 실유(實有)로서 알기에, 이와 같이 자종(自宗)이 허락하는 현량이나 공지(共知)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성(眞性)으로써 간별하여 주장[宗]을 세운다.
진실한 뜻 자체를 ‘진성’이라 이름하니, 곧 승의제(勝義諦)를 말한다.
승의제에서 ‘유위(有爲)는 공하다’는 주장을 세우지만 세속제에서는 아니다.
세속제(世俗諦) 산스크리트어 loka-saṃvṛti-satya 제(諦)는 진리를 뜻함. 분별과 차별로써 인식한 진리. 허망한 분별을 일으키는 인식 작용으로 알게 된 진리. 대상을 분별하여 언어로 표현한 진리. 세속의 일반적인 진리. 세속에서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진리. 세속의 중생들이 알고 있는 진리. |
뭇 인연이 합성하고 조작하는 것이 있기에 ‘유위’라 이름하니, 곧 12처(處)를 말한다.
그러나 법처(法處)의 일부에서 제외되는 것은 허공(虛空)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ㆍ진여성(眞如性)이며,
여기에 다시 타종(他宗)이 허망하게 나타나는 환(幻) 등의 유위(有爲)를 용인하는 것도 제외된다. 왜냐 하면 환 등의 유위를 공이라 주장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유위는 승의제에서 실제로서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을 하여 이제 공을 세운다.
다시 눈과 같은 일종의 유위는 승의제에서 그 실체가 공함을 밝힌다.
공(空)과 무성(無性)에는 허망현현문(虛妄顯現門)의 차별이 있으며, 이것을 주장명제로 세운다.
뭇 연에서 일어나는 남ㆍ여ㆍ양ㆍ사슴 등의 여러 환사(幻事)의 자성은 실체로서는 없어도 현현하여 있는 것과 같다.
세우는 목적과 그 내용에 두루 편재하여 동법(同法)의 비유가 되기 때문에 ‘환화와 같다’는 말을 한다.
그 상응하는 바대로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이 같음을 가설한다. 가설로서 같다고 말했기에 일체 동유상법(同喩上法)은 존재한다는 힐난을 할 수 없다.
‘여인의 얼굴이 마치 달과 같이 단아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모든 달[月法]이 얼굴 위에 있다는 힐난은 할 수 없다.
결송(結頌)에 법이 이 동법의 비유로써 설해지고 있으나 이와 같은 차례로 이 반송(半頌)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약본(略本)이기에 생략되어 있지 않다.
주장하는 바의 유법(有法)은 다 연(緣)에서 발생한다. 그 이유는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는 말을 한다.
원인 등과 뭇 연에서 모두 발생하므로 ‘연에서 발생한다’는 말을 한다. 곧 ‘연에서 발생한다’, ‘연에서 현현(顯現)한다’는 뜻이다.
이품(異品)을 부정하기 위하여 이법(異法)의 비유를 세워도 이품이 없기에 부정의 뜻이 이미 성립한다.
그러므로 해석할 때 이품을 가설(假說)하고 비량(比量)을 건립해도 오류가 아니다.
이품(異品) 산스크리트어 vipakṣa. 인명(因明)에서, 주장 명제인 종(宗)의 술어와 전혀 다른 성질에 속하는 부류.
이법유(異法喩) 인명(因明)에서, 주장 명제인 종(宗)의 술어와 그 종(宗)을 내세우게 된 이유로서 제시한 인(因)과 전혀 다른 성질에 속하는 예(例). |
삼량(三量) 인식의 세 가지 근원. (1) 현량(現量). 언어와 분별을 떠난 직접 지각이나 직접 체험. (2) 비량(比量). 추리에 의한 인식. (3) 비량(非量). 그릇된 직접 지각과, 그릇된 추리에 의한 인식. 곧, 사현량(似現量)과 사비량(似比量). 또는 비량(非量) 대신에 성교량(聖敎量), 곧 성자의 가르침으로써 삼량이라고도 함. |
어떻게 여기에 비량을 건립하는가?
이른바
‘진성(眞性)에서 눈의 속성은 공하다. 뭇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체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진성의 입장에서 모두 그 자성은 공하다. 심지어 소치는 여인 등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위신(威神)과 주술(呪術)과 약의 효력[藥力]에다 초목ㆍ흙벽돌 등을 첨가하여 만든 뭇 연에서 나타난 남자ㆍ여자ㆍ코끼리ㆍ말ㆍ궁전ㆍ정원ㆍ물ㆍ불 등의 현상에 어리석은 범부가 정신이 팔리는 따위의 허망된 일들과 같다’는 것이다.
저 자성이 조금이라도 실체로서 있다면 마땅히 전도(顚倒)가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법성(法性)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연하여 발생하는 법에는 다 자성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만약 연하여 발생하는 것을 안다면 곧 법성(法性)을 알게 된다.
법성을 안다면 공성(空性)을 알게 된다.
만약 공성을 안다면 지혜로운 자를 보게 된다.”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일체 연하여 발생하는 것은 모두 무(無)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의 자성이 모두 없는 까닭이다.
또한 연하여 발생하는 것은 곧 공성이며, 공성을 아는 자는 방일(放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