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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론 상권
1. 죄와 복을 버리는 장[捨罪福品]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어 예를 올립니다.
자비로우신 세존께서 무량한 겁 동안 온갖 고를 짊어지셨고
번뇌가 이미 끊어지셨으며 습기 또한 제거되셨기에
범천[梵]ㆍ제석천[釋]ㆍ용(龍)ㆍ천신이 모두 경배드립니다.
또 위없이 세상을 비추는 법으로,
흠과 더러움을 청정하게 하고 희론(戱論)을 그치게 하는
부처 세존들의 말씀과
공양받을 만한 이들[應眞僧]인 여덟 현성[八輩]께 예를 올립니다.
[외도] 게송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라고 했는데 어떤 이들이 세존인가?
[불자] 그대는 왜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가?
[외도] 여러 가지로 세존의 상(相)을 말하기에 의심을 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위뉴천(葦紐天)[진(秦)에서는 편승천(徧勝天)이라 한다.]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진(秦)에서는 대자재천(大自在天)이라 한다]을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가비라(迦毘羅)ㆍ우루가(優樓迦)ㆍ늑사바(勒沙婆)를 다 세존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왜 붓다만을 세존이라고 말하는가? 그래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불자] 붓다께서는 모든 법의 실상을 명료하게 장애 없이 아시며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붓다만을 세존이라 하는 것이다.
[외도] 다른 지도자[導師]들도 모든 법을 명료하게 알고 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을 말한다.
가령 가비라의 제자는 『승거경(僧佉經)』을 암송해서 선법(善法)들의 보편상[總相]과 특수상[別相]을 말한다. 25제(諦) 중에서 청정한 지각[覺]의 요인들을 선법이라고 한다.
가령 우루가의 제자는 『위세사경(衛世師經)』을 암송해서
“6제(諦) 중에서 구나제(求那諦)에 의해서 하루에 세 번 목욕하고 두 번 불을 공양(供養) 하는 등의 화합에 의해서 ‘나’[神]의 일부분인 선법을 생기게 한다”고 말한다.
가령 늑사바의 제자는 『니건자경(尼乾子經)』을 암송해서
“다섯 가지 열로 몸을 굽고 삭발하는 등의 고통을 받는데 이것을 선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논사들은 스스로 단식을 행하고 호수에 몸을 던지고 불에 뛰어오르고 스스로 높은 산에서 떨어지고 말을 하지 않고서 항상 서 있고 우계(牛戒)를 지키는 등 이것을 선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심오하고 청정한 법인데 왜 붓다만이 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가?
[불자] 이것은 다 그릇된 견해[邪見]이어서 바른 견해[正見]을 뒤엎기 때문에 심오하고 청정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외도] 부처님은 어떤 선법(善法)을 말하는가?
[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선을 행하는 법(法)이네 [수투로](修妬路)
부처님께서는 대략 두 종류의 선법을 말씀하셨다.
‘그치게 하는 것’[止相]과 ‘행하는 것’[行相]이다.
모든 악들을 그치게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고, 모든 선을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악이라 하는가?
몸[身]을 그릇되게 행해하는 것, 입[口]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생각[意]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살생ㆍ도둑질ㆍ음행(淫行)이다.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거짓말[妄語]ㆍ이간질[兩舌]ㆍ욕[惡口]ㆍ꾸미는 말[綺語]이다.
생각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은 탐욕[貪]ㆍ증오[瞋惱]ㆍ그릇된 견해[邪見]이다.
또 10불선도(不善道)에 포함되지 않는 매질ㆍ몽둥이질ㆍ묶는 일ㆍ가두는 일 따위가 있다.
그리고 십불선도 앞뒤의 여러 가지 죄를 악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하는가?
악을 그치게 해서 짓지 않는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기거나 입으로 말하거나 계를 받거나 해서 오늘부터 다시는 결코 짓지 않겠다 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것들을 선이라 하는가?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몸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 합장하는 일, 절을 드리는 일 등이다.
입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진실한 말, 적절한 말, 부드러운 말, 이익을 주는 말이다.
생각을 바르게 행하는 것은 자(慈)와 비(悲), 바르게 봄[正見] 등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청정한 법을 선법이라고 한다.
어떤 것들을 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 선법을 믿고 받아들이며 수습(修習)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외도]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서두에 길상[吉]이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논사들이 경전을 저술하는 법이 서두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이해하기 쉽고 진리의 소리[法音]가 널리 퍼진다. 만약 지혜가 있는 이가 독송하고 기억해서 알아 둔다면 수명이 늘고 위덕(威德)이 있으며 존중을 받게 된다.
가령 『바라하파제(婆羅呵婆帝)』[진(秦)에서는 『광주경(廣主經)』이라 한다]라는 경전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경전 등에서는 처음에 모두 길상[吉]을 말한다. 최초가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도 최후도 길상하다.
그대의 경전은 처음에 악을 말하기 때문에 길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대의 경전은 과실이 있네” 하고 말한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그릇된 봄[邪見]을 끊기 위해 이 경을 말하는 것이네. [수투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릇된 봄[邪見]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과실이 없다.
길상이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또 만약 조금이라도 길상이 있다면 경전의 초두에 길상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는 실제로는 길상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한 사태를 두고 이 사람은 ‘길상하다’ 하고 저 사람은 ‘길상하지 않다’ 하고 어떤 사람은 ‘길상한 것도 아니고 길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한다.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상함이 없는 것이다.
그대 어리석은 이는 방편 없이 억지로 즐거움을 구하길 바라고 허망하게 기억과 표상을 일으켜서 ‘이것은 길상하다’, ‘이것은 길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와 타자와 양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또 이 길상함[吉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법은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발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자성[自相]이 없으므로 타성[他相]또한 없다. 또 무한역행이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에 다시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모두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발생[生法]에는 세 종류가 있다. 자기에게서 발생하는 것, 타자에게서 발생하는 것, 양자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길상함[吉事]이 없다.
[외도] 이 길상함은 자기에게서 발생하니 마치 소금과 같네. [수투로]
비유하면 소금의 자성인 짠 맛이 다른 사물을 짜게 하는 것과 같다.
길상함도 이와 같아서 자성이 길상함이 다른 사물을 길상하게 한다.
[불자] 앞에서 이미 타파했기 때문이네. 또 소금의 성질[相]은 소금 속에 머물 러 있기 때문이네. [수투로]
‘나’는 앞에서 자성(自性)으로서 발생하는 법은 있지 않다고 하며 (이를) 타파했다.
또 그대의 의도는 소금은 인과 연들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은 자성(自性)으로서 짠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다시 그대의 말로 그대의 말을 타파해 보겠다. 소금이 다른 사물과 합한다 하더라도 사물은 소금이 되지 않는다. 소금의 성질은 소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소의 성질은 말의 성질이 아닌 것과 같다.
[외도] 마치 등불과 같네. [수투로]
비유하면 등불이 이미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추듯이 길상함도 이와 같다. 자기를 길상하게 하고 또한 길상하지 않은 것도 길상하게 한다.
[불자] 등불 자체에도 다른 것에도 어둠이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등불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 왜 그러한가? 빛[明]과 어둠은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등불에는 비추는 작용[能照]이 없다. (어둠이 없기에 어둠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춤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은 자기를 비추지 않는다.
비춤을 받는 장소에도 또한 비춤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비출 수 없다.
어둠을 타파하기에 비춤이라 한다. 어둠을 타파하는 일이 없기에 비춤이 아니다.
[외도] 처음에 발생할 때 둘 모두를 비추기 때문이네. [수투로]
나는 등불이 먼저 발생하고 나서 이후에 비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발생할 때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을 비춘다.
[불자] 그렇지 않네. 한 법(法)에서 유와 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처음에 발생하고 있는 것은 반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반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발생한 것은 비출 수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하물며 어떻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비추는 일이 있겠는가? 또 한 법이 어떻게 유이고 무이겠는가?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네. [수투로]
또 등불이 이미 발생했든 아직 발생하지 않았든 모두 어둠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질[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어둠을 타파할 수 있겠는가?
[외도] 마치 주술이나 별과 같기 때문이네. [수투로]
멀리서 먼 데 있는 사람에게 주술을 걸어 괴롭힐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하늘에서 별이 변해서 사람을 길상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등불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어둠에 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
[불자] 실제를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등불에 힘이 있어서 어둠에 도달하지 않아도 능히 어둠을 타파할 수 있다면, 인도[天竺]에서 등불을 켰을 때 어찌 중국[振旦]의 어둠이 타파되지 않겠는가?
주술과 별의 힘이 먼 곳에 미칠 수 있듯이 등불이란 사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처음에 길상하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네. [수투로]
또 만약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을 말한다면 다른 때는 길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때도 길상하다면 그대가 처음에 길상을 말하는 것이 허위의 말[妄語]가 되고 말 것이다.
[외도] 처음에 길상하기에 다른 때도 길상하네. [수투로]
처음에 길상의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때도 길상하다.
[불자] 길상하지 않음이 많기에 길상함도 길상하지 않음이 되네. [수투로]
그대가 경전에서 처음에 길상함을 말한다면 많은 것이 길상하지 않음이 된다.
길상하지 않음이 많기 때문에 길상함도 길상하지 않음이 되고 말 것이다.
[외도] 마치 코끼리의 손과 같네. [수투로]
비유하면 코끼리는 손을 갖고 있기에 ‘손을 갖고 있는 것[有手]’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눈과 귀와 머리 따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눈과 귀와 머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부분의 길상함에 힘이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의 길상하지 않음을 길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네. 코끼리의 과실이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다면 머리와 발 등과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부분[分]속에 전체[有分]가 갖추어져 있다면 어찌 머리 속에 발이 있지 않겠는가?
다름[異]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만약 코끼리가 손과 다르지 않다면 그래도 코끼리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체가 부분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가 그대로 발일 것이다. 둘은 코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함[一]을 타파할 때 말하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이 길상함[吉事]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최초에 길상하기 때문에 중간과 최후도 길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외도] 악을 그치게 한다 할 때 ‘그치게 한다’는 것은 좋은 일[妙]이다. 어떻게 처음에 두지 않는가?
[불자] 수행자는 반드시 먼저 악을 알고 난 이후에 그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악을 앞에 두고 그치게 한다는 것을 뒤에 둔 것이다.
[외도] 선행을 처음에 두어야 하네. 좋은 과보가 있기 때문이네. [수투로]
모든 선법에는 좋은 과보가 있다. 수행자는 좋은 과보를 얻고자 하기 때문에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앞에 선행을 말하고 뒤에 악을 그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불자]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거친 번뇌[鹿垢]를 제거하고 다음에 미세한 번뇌를 제거한다.
만약 수행자가 악을 그치게 하지 않는다면 선을 닦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후에 선법을 배이게 한다.
비유하면 옷을 빨 때 먼저 거친 때[鹿垢]를 제거한 이후에 물을 들일 수 있는 것과 같다.
[외도]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했으니 다시 선행을 말할 필요가 없다.
[불자] 보시 등은 선행이기 때문이네. [수투로]
보시는 선행이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또 가령 큰 보살은 먼저 악을 그치게 하고 4무량심(無量心)을 행한다.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다른 이의 목숨을 수호하는 일은 선행이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외도] 보시는 인색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시는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불자] 그렇지 않다. 만약 보시를 하지 않는 것이 악이라면 보시를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 된다. 또 번뇌[漏]들이 멸진했을 때 사람의 인색함과 탐욕은 이미 멸진한 것이다.
보시할 때에 어떻게 악을 그치게 하겠는가?
혹은 어떤 이는 보시를 행하긴 하지만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하지는 않는다.
설사 (보시를 행하는 것이 인색한 마음을) 그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선행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보시는 선행이다.
[외도] 이미 선행을 말했으니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이 곧 선행이기 때문이다.
[불자] 그치게 하는 것의 특징[相]은 ‘멈추게 하는 것’이고, 행하는 것의 특징은 ‘짓는 것[作]’이다. 특징[性]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말하는 것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포함하지 않는다.
[외도] 이것은 실제로 그러하다. 나는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선법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만약 선행을 말했다면 굳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불자]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을 말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은 계(戒)를 받을 때 악들을 멈추게 하는 것을 이른다.
선행은 선법을 수습(修習)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단지 선행의 복을 말할 뿐 악을 그치게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이가 계를 받아서 악을 그치게 할 때 불선(不善)의 심(心)이든 무기(無記)의 심이든 이 때 선(善)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복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악을 그치게 하기 때문에 또한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그치는 일을 말해야 하고 또 선행도 말해야 한다.
이 악을 그치게 하는 일과 선행은 중생의 의도[意]를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세 종류로 나누셨네. 하급과 중급과 상급의 사람이 갖고 있는 보시와 지계와 지혜이네. [수투로]
수행자는 세 부류가 있다.
하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시(布施)를 가르치고,
중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계(持戒)를 가르치고,
상급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가르친다.
보시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재물을 버리는 일에 상응하는 사업(思業)ㆍ신업(身業)ㆍ구업(口業)을 일으키는 것을 이른다.
지계는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 속에 생기거나 계를 받을 때 오늘부터 다시는 세 가지의 몸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 네 가지의 입을 그릇되게 행하는 것을 짓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지혜는 모든 법상(法相)들에 심(心)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 하급ㆍ중급ㆍ상급을 말하는가?
이익의 차이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보시하는 이는 이익이 작기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계를 지키는 이는 이익이 중간 정도이기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지혜가 있는 이는 이익이 가장 높기에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또 보시의 과보는 가장 낮고 지계의 과보는 중간이고 지혜의 과보는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급ㆍ중급ㆍ상급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외도] 보시하는 이는 모두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보시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보시를 행하는 이는 하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이른다.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보시라 하는가?
[불자] 과보를 위한 보시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기 때문에. [수투로]
과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현세의 과보[現報]와 후세의 과보[後報]이다.
현세의 과보란 명예[稱敬]와 존중[敬愛]등이고, 후세의 과보란 후세의 부귀 등인데,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과보라 한다. 왜 그러한가? 바꾸어서 얻고자 하기 때무이다.
비유하면 물건을 팔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멀리서 다른 지방에 도착해서 비록 잡다한 물건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지만 중생에게 연민을 품고 있지 않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업(業)은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보시해서 과보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보시라 하는가?
[불자]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존중하면서 이익되게 하고자 금세와 후세의 과보를 구하지 않고 보살들과 상급의 사람들과 같이 청정한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을 청정한 보시라고 한다.
[외도] 계를 지키는 이는 모두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계를 지키는 일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이를 중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한다.
[외도] 어떤 것들이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인가?
[불자] 계를 지켜서 즐거움의 과보를 구하네.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 [수투로]
즐거움의 과보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계(人界)에서 부귀를 받는 것이다.
계를 지켜서 천계에서 천녀(天女)와 즐거이 놀기를 바라거나, 인계에서 다섯 욕계의 즐거움[欲樂]을 받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음욕을 위하기 때문이다.
‘마치 거꾸로 된 것과 같네’란 안으로는 다른 색(色)을 욕구하면서 바깥으로는 친해서 사이가 좋은 척하며 속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청정하지 않은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이 난타에게 말했다.
마치 숫양들이 서로 부딪치는 것과 같네.
앞의 것을 갖고서 다시 버리네.
그대가 계를 지키고자 하나
그 일이 또한 이와 같네.
몸은 비록 계를 지키나
마음은 탐욕에 이끌리네.
이 업(業)이 청정하지 않거늘
이 계(戒)를 어디에 쓰겠는가?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한 계라고 하는가?
[불자]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선법은 계(戒)가 근본이다.
계를 지키는 이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으니 환희한다.
환희하니 마음이 즐겁다.
마음이 즐거우니 한 마음[一心]을 얻는다.
한 마음을 얻으니 진실한 지혜가 생긴다.
진실한 지혜가 생기니 싫어함을 얻는다.
싫어함을 얻으니 탐욕을 벗어난다.
탐욕을 벗어나니 해탈을 얻는다.
해탈하니 열반을 얻는다.
이것이 청정한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외도] 만약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면 울타라가(鬱陀羅伽)ㆍ아라라(阿羅邏) 등이 최상이네. [수투로]
만약 지혜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를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라고 말한다. 이제 울타라가와 아라라 외도(外道) 등이 상급의 지혜를 갖는 이가 된다.
[불자]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지혜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청정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것이다.
[외도] 어떤 것들을 청정하지 않은 지혜라고 하는가?
[불자] 세간[世界]에 계박되기에 청정하지 않네. 마치 원수가 와서 친구가 되는 것과 같네. [수투로]
세간의 지혜는 생사(生死)를 증대[增長]하게 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지혜는 되돌아가서 계박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원수가 처음에는 친구인 척 속이다가 오래되면 해를 끼치는 것과 같다. 세간의 지혜도 또한 이러하다.
[외도] 단지 이 지혜만이 생사를 증대하는가? 보시와 지계도 그러한가?
[불자] 복(福)을 취하고 악을 버리네. 이것들은 유행(流行)하게 하는 법이네. [수투로]
복은 복의 과보를 말한다.
[외도] 만약 복이 복의 과보를 말한다면 왜 [수투로](修妬路)에서 단지 복만을 말하는가?
[불자] 복은 원인이고 복의 과보는 결과이다.
어떤 때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하고 어떤 때는 결과로서 원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원인으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천량의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금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금으로 인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금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 그림을 보고 손재주가 좋다[好手]고 말하는 것과 같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다고 한다.
‘취한다’란 집착한다는 것이니, 복의 과보에 집착하는 것이다.
악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유행[行]이란, 사람을 항상 생사에 유행하게 하는 것이다.
[외도] 어떤 것들이 유행(流行)하지 않는 법인가?
[불자] 둘 모두를 버리는 것이다. [수투로]
‘둘’이란, 복의 과보와 죄의 과보를 말한다.
‘버린다’란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복에 집착하지 않으면 다시 5도(道)에 왕래하지 않는다.
이것을 유행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외도]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하네. 과보가 좋기 때문이네. 또 인연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네. [수투로]
복의 과보는 좋아서 모든 중생들은 항상 좋은 과보를 구한다. 그러니 왜 버려야 하겠는가?
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또 그대는 지금 이유[因緣]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복을 버릴 필요가 없다.
[불자] 복이 소멸했을 때 괴로움이 있네. [수투로]
‘복’이란, 복의 과보를 말한다. 소멸은 상실하고 괴멸하는 것을 말한다. 복의 과보가 소멸할 때 즐거운 일이 없어지게 되어 큰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즐거운 느낌[樂受]이 생길 때 즐겁고 머물고 있을 때 즐겁지만 소멸할 때는 괴롭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복을 버려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 복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도(助道)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복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하물며 어찌 죄를 버리지 않겠는가?
[외도] 죄와 복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대가 복이 소멸할 때 괴롭다고 말한다면 죄가 생기고 머물 때는 즐거울 것이다.
[불자] 죄가 머물 때는 괴롭네. [수투로]
‘죄’란 죄의 과보를 말한다. 죄의 과보가 생길 때 괴롭거늘 하물며 어찌 머물 때 괴롭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 괴로운 느낌이 생길 때 괴롭고 머물 때 괴롭고 소멸할 때 즐겁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대가
“죄와 복은 상반되기에 죄가 생길 때 즐거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대답하겠다.
“그대는 어찌 죄와 복이 상반되기에 죄가 소멸할 때 즐겁고 생길 때와 머물 때는 괴롭다고 말하지 않는가?”
[외도] 상주함의 복에는 버려야 할 이유가 없기에 버리지 않아야 하네. [수투로]
그대가 복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소멸할 때 괴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상주함의 복의 과보에는 소멸할 때의 괴로움이 없으니 버리지 않아야 한다.
경전에서는
“마사(馬祀)를 행하면 이 사람은 노쇠함과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복의 과보가 상주하기에 태어나는 곳도 상주한다. 이 복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불자] 복은 버려야 하네. 두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네. [수투로]
이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독이 섞인 밥은 먹을 때는 즐겁고 소화하고자 할 때는 괴롭다. 복도 이와 같다.
또 복의 과보가 있는 것은 즐거움의 원인이지만 많이 받아들이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불을 가까이 하면 한기를 막아주기에 즐겁지만 더 가까이에 다가서면 몸을 태우니 괴롭다.
그러므로 복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두 가지 특징이 있기에 무상하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그대가 마사(馬祀)의 복보(福報)는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단지 언설이 있을 뿐이네. 인연이 없기 때문이네. [수투로]
또 마사(馬祀)의 과보는 실제로는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마사의 업의 인연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의 인연이 한계가 있다면 과보도 한계가 있다.
마치 진흙덩어리가 작다면 물단지도 작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사(馬祀)의 업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상하다.
또 그대의 천신[天]은 증오가 있어서 함께 다투고 서로 괴롭힌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대의 마사 따위의 행위[業]는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에 모두 무상하다.
유루의 청정한 복은 무상하기에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어찌 죄가 섞인 복을 버리지 않겠는가? [수투로]
또 마사(馬祀)와 같은 행위[業]에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승거경』에서는
“제사[祀法]는 청정하지 않고 무상하다. 이루고 이루지 못함의 특징(相)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외도] 만약 복을 버린다면 짓지 않아야 할 것이네. [수투로]
만약 복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면 처음에 짓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왜 지혜가 있는 사람이 헛되이 괴로운 일을 짓는가?
비유하면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고 나서 다시 깨뜨리는 것과 같다.
[불자] 도(道)를 생기게 하는 순서이네. 마치 때묻은 옷을 빨아서 물을 들이는 것과 같네. [수투로]
마치 때묻은 옷을 먼저 빨고 후에 깨끗해졌을 때 물을 들인다면 빨래해서 깨끗이 한 것이 헛되지 않은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물들임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때묻는 옷은 물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먼저 죄의 때를 제거하고 다음에 복덕(福德)으로써 마음에 배이게 하고 이후에 열반도(涅槃道)의 물[染]을 받는 것이다.
[외도] 복을 버리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수투로]
복에 의지해서 악을 버린다. 무엇에 의지해서 복을 버리는가?
[불자] 무상(無相)이 가장 위이네. [수투로]
복을 취하면 인간계와 천계에 태어나고 죄를 취하면 3악도(惡道)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무상의 지혜가 가장 으뜸이다. 무상이란 모든 상(相)을 억념하지 않고 모든 수(受)를 여의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에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에 의지하는 곳[所依]이 없다. 이것을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이 방편에 의지해서 복을 버릴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세 종류의 해탈문 없이 제1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에 의지하지 않고서 앎과 봄을 얻고자 하는데, 증상만(增上慢)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공(空)이란 말이 실질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