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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권
2. 법보론(法寶論)
2.1. 삼선품(三善品)
[문] 그대가 “법보(法寶)에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지만, 어떠한 공덕이 이기 때문에 예배드려야 하는가?
[답] 부처님이 스스로가 찬탄하여 말씀하셨다.
“나의 연설한 법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다 진실하다. 이치가 진실하고 말도 진실하고 뛰어난 법이 구족하며 청정하고 부드러워서 맑은 행(梵行)에 순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처음ㆍ중간ㆍ끝이 다 진실하다 함은 부처님의 법은 때마다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다.
소년 시절ㆍ장년 시절ㆍ노년 시절의 세 가지 시절도 다 진실하며,
들어올 때와 다닐 때와 나갈 때에도 또한 진실하다는 것이다.
또 처음에는 죄악을 끊고 중간에는 복 받는 과보를 버리고 끝에 가서는 온갖 것을 다 놓아버린다.
이런 것을 세 가지 진실한 일이라 한다.
또 부처님은 세 때에 항상 바른 법(正法)을 연설하셨다. 다른 외도(外道)들이 법답지 못한 말을 섞어서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까지 항상 슬기로운 이들의 좋아하고 즐겨하는 대상이 되셨다.
또 세 때에 온갖 법문이 매우 깊어서 다른 경서가 처음에는 머트럽고 중간에는 세밀하다가 끝맺음에는 아주 조잡한 것과는 같지 않다.
이러한 인연들 때문에 세 가지가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치가 진실하다는 것은 불법의 이치에는 깊은 이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금생의 이익과 후생의 이익과, 또는 출세(出世)하는 도의 이익을 다 얻으므로 외도의 경서에서 천안(天眼)만을 더 얻고자 원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말도 진실하다는 것은 지방 풍속의 말을 따라서 능히 바른 진리를 보여 주므로 말도 진실하다고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의 결과는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말을 하는 데는 능히 이치를 가리어야 하나니, 이것을 말도 진실하다고 한다.
또 불법은 말로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지방의 사투리를 따라서 도를 얻도록 하나니, 말도 진실하다고 한다. 외도의 경서에서는 말만 귀하게 여기는데 만일 말을 실수하거나 음성을 잃으면 말하는 그 사람이 죄과를 당하게 되는 일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는 참 이치[眞諦]를 잘 설명하기 때문에 이치가 진실하다 하고, 세속 이치[世諦]를 잘 설명하기 때문에 말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뛰어난 법[獨法]이라 함은 부처님은 바른 법[正法]만을 말씀하고 실없는 말씀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시며, 또 옳은 법과 그른 법을 섞어서 말씀하지 아니한다.
또 뛰어난 법이란 완전한 열반[無餘涅槃]을 위하여 말씀할 뿐이며, 또 부처님만이 설명하실 수 있기에 뛰어난 법이라 한다.
[문] 성문(聲聞)에 속한 경전은 성문만이 말하고, 또 다른 경전은 천신들이 말한 것도 있다. 그대는 어찌하여 부처님 혼자만이 말씀하였다고 하는가?
[답] 그 법의 근본이 다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모든 성문과 천신(天神)들은 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이다.
비니 중에서 말하기를
“불법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제자의 말이요, 변화(變化)의 말이요, 여러 천신의 말이라 한다”고 하였다.
간추려 말하자면 온갖 세간에 있는 착한 말은 다 부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법이라 한다.
구족하다 함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은 모자람이 없다. 울타가경(鬱陀伽經) 중에서 구족한 모습을 설명함과 같다.
또 부처님의 법문은 다른 경문을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화가라나경(和伽羅那經)은 다섯 가지의 경문을 의지한 연후에 만들어졌지마는 부처님의 경문은 그렇지 아니하여서 한 게송 중에 여러 가지 뜻이 다 갖추어졌다.
마치 “모든 죄악 짓지 말고/착한 일을 봉행하며/자기 뜻을 깨끗이 하면/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구족하다 한다.
청정하고 부드럽다 함은 두 가지가 깨끗하므로 청정하고 부드럽다 한다. 말이 깨끗하므로 청정하고 이치가 청정하므로 부드럽다 한다.
또 부처님은 이치[正義] 중에서는 이치에 따르는 말을 두었고 바른 말[正語] 중에서는 말에 따르는 이치를 두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외도들이 경문에만 따라 취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불법 중에는 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법도 또한 분별하여서 분명한 이치를 밝힌 경전[了義經]을 의지할 것이요
분명한 이치를 다 밝히지 아니한 경[不了義經]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깨끗한 법[淨法]이라 한다. 다만 경전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다.
또 불법에는 세 가지 법인(法印)이 있다.
일체무아(一切無我)와 유위(有爲)의 모든 법의 념념무상(念念無常)과 적멸열반[寂滅涅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법인은 모든 논사들이 무너뜨릴 수 없고 진실하기 때문에 청정하고 고르고 부드럽다 한다.
맑은 행을 따른다 함은 여덟 가지 바른 성도[八直聖道]를 맑은 행[梵行]이라 하는 것이니 범(梵)은 열반이라는 뜻이며 이 도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맑은 행이라 한다.
법보는 이러한 공덕을 성취한다. 그러므로 예배드려야 한다.
2.2. 중법품(衆法品)
또 부처님은 스스로 칭찬하여 말씀하셨다.
“내 법은 능히 멸하여 능히 열반에 도달하고 능히 바른 지혜를 내고 능히 잘 거느려 인도[將導]한다” 하셨다.
능히 멸한다 함은 탐심과 진심 등의 모든 번뇌의 불을 멸하기 때문에 능히 멸한다고 한다.
마치 깨끗하지 못하다는 관[不淨觀]을 익혀서 음욕(婬欲)의 불을 끄는 것과 같고 인자한 마음을 익혀서 진심 등을 없애는 것과 같은 것이요, 외도가 단식(斷食)하는 등의 법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능히 멸한다고 한다.
능히 열반에 도달한다 함은 불법은 필경에는 반드시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요, 외도가 존재의 갈래[有分]중에 머물면서 선정 등에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불법 중에서는
“함이 있는 온갖 법은 다 허물이 있고 칭찬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요,
바라문들이 범천의 세계를 칭찬하는 따위와는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은 능히 열반에 도달한다고 한다.
능히 바른 지혜를 낸다 함은 부처님의 법이라면 모두가 열반을 목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바른 지혜를 낸다.
또 부처님의 법 가운데에 참다운 지혜의 열매가 들어 있음은 마치 듣는 지혜로부터 생각하는 지혜를 내고 생각하는 지혜로부터 닦는 지혜를 내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은 능히 바른 지혜를 낸다고 한다.
능히 잘 거느려서 인도한다 함은, 부처님의 법은 먼저 자기가 잘 성취하고, 다음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법 가운데 머물도록 한다. 그러므로 잘 인도한다는 것이다.
또 다시 부처님의 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말을 잘한다는 것[善說]이요,
둘째는 현세의 과보를 얻는다는 것[現報]이요,
셋째는 시일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無時]이요,
넷째는 잘 거느린다는 것[能將]이요,
다섯째는 직접 맛본다는 것[來嘗]이요,
여섯째는 슬기로운 이는 스스로가 안다는 것[智者自知]이다.
잘 말한다 함은, 부처님은 모든 법에 대하여 법의 참모습 그대로를 말씀하셨다. 만일 착하지 못한 모습이면 착하지 못한 모습이라 말씀하고, 착한 모습이면 착한 모습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잘 말씀한다고 한다.
현세의 과보를 얻는다 함은 부처님의 법에는 능히 현세의 과보를 얻는다.
경전에서 말씀한
“이른 아침에 교화를 받으면 저녁에 도를 얻게 하고, 저녁에 법을 말씀하면 다음 날 아침에 이익을 얻도록 한다”라고 함과 같다.
또 현세의 과보라 함은,
현재사문인과경(現在沙門因果經) 중의 말씀에서
“현재에 공경과 명예와 선정과 신통 등의 이익을 얻는다”고 말씀함과 같다.
또 불법에는 다 이치가 있기 때문에 공경하는 현세의 과보와 후세의 과보와 열반의 과보를 얻게 되지마는
여러 외도의 법에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현재의 과보와 후세의 과보조차도 얻지 못하거든 하물며 열반이겠는가?
그러므로 현세의 과보라 한다.
시일을 가리지 않는다 함은, 불법은 어떤 날짜와 달과 해(歲)와 별 등의 길하고 흉한 것을 가리지 아니하고 바로 수도(修道)할 수 있음이 있다.
아무 날ㆍ아무 달ㆍ아무 해에는 수도할 수 없다는 바라문의 법에 초봄에는 바라문이 불(火)을 받고 늦은 봄에는 찰리(刹利)가 불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과는 같지 않다.
또 혹 해가 돋기를 기다리고, 혹 해가 아직 돋기 전에 불에 공양하기도 하나니, 마치 다섯 가지 곡식을 맞추어서 심는 것을 보는 것 같다.
혹은 말하기를 “불법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리라” 하기도 하지마는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때를 가리지 않는다 한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시되
“불법은 수행(修行)하기가 용이 하나니, 거닐고 서고 앉고 눕거나 간에 수행을 얻지 못하는 때가 없다” 함과 같다.
능히 거느린다 함은 바른 행위[正行] 때문에 중생을 거느려서 해탈하는 곳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능히 거느린다는 것이다.
직접 맛본다 함은 불법은 응당 자신이 증득해야 하고 남만 따르지 아니해야 하나니,
부처님이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다만 내 말만을 믿지 말고 마땅히 스스로가 생각하면서 이 법은 행해야 하고 이 법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할 것이요,
외도가 그의 제자에게 말하기를
‘이런 문답을 버리기를 마치 깨끗이 씻은 사람이 먼지나 흙을 좋아하지 아니함과 같이하고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내 말만을 따르라’ 함 따위와는 같지 않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직접 맛본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이는 스스로 안다 함은, 이 불법의 이익은 지혜 있는 사람이면 곧 믿고 이해한다.
단식(斷食)이나 하는 일들은 머트럽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믿고 즐겨하는 것이요, 지혜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른 지혜는 번뇌를 부수므로 그런 법들은 슬기로운 이가 곧 이해한다.
아무리 맛난 음식으로 그 몸을 채우더라도, 마음으로 정진하면 탐심과 진심에는 물들지 않나니, 이러한 일들을 지혜 있는 사람이면 당장에 안다.
마치 사람이 병이 나으면 자신이 병의 떠나갔음을 아는 것과 같고 물맛이 차가운 줄은 마시는 자신이 아는 것과 같다.
또 혹시 말보다 지나치는 법이 있다. 마치 땅의 단단한 모습과 같다.
단단하면 어느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인가?
말로 대답할 수는 없다. 대[觸]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니, 나면서부터의 장님[生盲]에게 푸르다 누르다 붉다 희다를 말할 수 없음과 같다.
만일 사람이 불법의 맛을 알지 못하면 불법의 진실한 이치를 말해 줄 수가 없다. 적멸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불법은 자기가 깨쳐 알아야 되고 자기가 깨친 것을 남에게 재물을 주듯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바라연경(婆羅延經) 중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나 자신이 너의 의심을 끊을 수는 없다. 네가 능히 나의 법을 증득하면 네 의심이 스스로 끊어지리라”고 하심과 같다.
또 다시 이 법이 남의 몸에 전달될 때에도 불을 전해주는 것들을 보듯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범부의 어리석은 사람은 무명(無明)의 산에 막히고 덮혀서 이 법을 믿지 않는다.
아이라왈 사미(阿夷羅曰沙彌)로 인하여 큰 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함과 같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이는 스스로 안다고 말한다.
또 불법은 몹시 깊지마는 해설하여 보이면 얕은 것이니, 거짓을 끊어 없애고 하늘과 인간에게 유포한다.
몹시 깊다(甚深)함은 불법이 몹시 깊어서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흔히 현재의 결과만 보고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재천(自在天) 등의 삿된 원인을 말하며,
열두 가지 인연이 깊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세상 사람의 지혜는 얕으므로 불법 중에서 깊은 생각을 내지 않으면 여러 가지 인연의 법을 통달할 수 없다.
내지 작은 풀잎까지라도 여러 가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면 그 모양은 차차 깊어지며,
부처님이 말씀함과 같아서 여러 가지 인연의 법은 그 일이 아주 깊으며, 애욕이 다하여 떠나 없앰과 열반의 자리도 또한 보기 어렵다.
[문] 만일 인연이 몹시 깊다면, 아난(阿難)은 무엇 때문에 얕다는 생각을 내었는가?
[답]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그 말은 옳지 못하다. 아난은 그가 거룩한 제자로서 법 모양을 통달하였거니, 어떻게 인연의 법이 얕다 하였겠는가”고 한다.
또 만일 대강으로만 인연법을 관찰하면 그 때문에 얕다는 생각을 낸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잘 분별하여 번뇌의 업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사람이 본래 배우던 일에 끝맺음을 얻게 되면 문득 얕다는 생각을 내게 된다.
마치 큰 지혜를 얻으면 첫머리 글을 도로 살피는 것과 같으리라.
혹 어떤 사람은 지혜가 성취되지 못하면 몹시 깊은 법에 대하여 곧 얕다는 생각을 내기도 한다.
또 부처님은 설법을 잘하시기 때문에 혹 어떤 사람은 도리어 얕다는 생각을 내기도 한다.
또 불법에는 모두가 ≺공≻이요, 이 ≺공≻은 몹시 깊되 부처님은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로 선시(宣示)하셨으니 뜻이 이해하기 쉬워서 어린아이라도 알게 되었음은 마치 수다야사미(須陀耶沙彌) 등의 일과 같다.
또 부처님의 법은 견고하여 모든 언어 가운데 가장 진실하므로 바라타(婆羅陀)와 나마연경(羅摩延經)등이 말만 있고 진실한 뜻이 있지 않은 것과는 같지 아니하며
노제 범지(盧提梵志)가
“세존이시여, 모든 비구들은 이익이 되는 법과 진실한 법 가운데서 정근(精勤)하고 수학(修學)하므로 이른바 번뇌가 다 끊어졌나이다” 하고 말함과 같다.
또 부처님의 법은 온 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바라문이 “바라문의 법은 다만 자기네만 도를 얻고 다른 사람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또 부처님의 법은 높고 귀중하여서 모든 하늘의 임금들이 다섯 가지 욕락을 마음대로 즐기면서도 역시 다 와서 믿으며 받든다. 이러한 인연으로 당연히 법보에 예배드려야 한다.
2.3. 십이부경품(十二部經品)
또 부처님의 분류하면 열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다라(修多羅)요,
둘째는 기야(祇夜)요,
셋째는 화가라나(和伽羅那)요,
넷째는 가타(伽陀)요,
다섯째는 우타나(憂陀那)요,
여섯째는 니타나(尼陀那)요,
일곱째는 아파타나(阿波陀那)요,
여덟째는 이제왈다가(伊帝曰多伽)요,
아홉째는 사타가(闍陀伽)요,
열째는 비불략(鞞佛略)이요,
열한째는 아부다달마(阿浮多達磨)요,
열두째는 우파제사(憂波提舍)이다.
수다라는 바로 내려 새기는 말씀이다.
기야는 글귀로 수다라를 노래하는 것이니, 혹은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제자가 말씀하기도 한다.
[문] 무슨 이유로 글귀로써 수다라를 밝히는가?
[답] 이치를 견고하게 하려함이니, 마치 노끈으로 꽃을 꿰면 차례로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또 말씨[言辭]를 아름답게 꾸며서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하려함이니 마치 꽃을 뿌리기도 하고, 혹은 꽃다발로 단장[莊嚴]을 함과도 같다.
또 말뜻을 게송 가운데 넣으면, 간단하면서 이해하기가 쉽다.
어떤 중생은 곧게 내려 새기는 말을 좋아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게송으로 말씀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
또 먼저 바로 말씀으로 설법하신 다음에 게송으로 읊으면 뜻이 환하게 나타나서 믿음이 단단하여지게 된다.
또 말뜻을 게송 중에 넣으면 차서가 서로 어울려 붙어서 찬양하는 말을 하기가 편이하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읊으셨다.
혹은 말하기를 “불법에서는 게송을 짓지 아니해야 한다. 노래와 비슷하다”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으레 게송을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 스스로가 게송으로 모든 이치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경전에서
“세간의 온갖 아름다운 말씨는 모두 나의 법에서 나왔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게송에는 미묘한 말씀이 들어있다.
화가라나라 함은 모든 이치를 풀이한 경전을 화가라나라 한다.
만일 경전만 있고 대답도 없고 풀이도 없는 사무애경(四無礙經) 등과 같은 것이면 수다라라 하고, 문답(問答)이 있는 경전이면 화가라나라고 한다.
마치 “네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어두운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가고 어두운 데서 밝은 데로 들어가며 밝은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가고 밝은 데서 밝은 데로 들어간다”고 설명한 것이 그것이다.
어두운 데서 어두운 데로 들어간다 함은 비천한 사람이 세 가지 악한 업을 짓고 나쁜 갈래에 떨어지는 일들과 같나니, 그러한 경전들을 화가라나라 한다.
[문] 부처님은 무슨 이유로 대답도 없고 풀이도 없는 경전을 말씀하는가?
[답] 어떤 경전은 이치가 깊고 중하다. 그런 경전의 뜻은 아비담(阿毘曇) 중에서 따로 설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풀이를 하지 아니하셨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경전은 다 풀이가 있건만 법문을 결집하는 이가 깊은 뜻이 담긴 경전을 추려서 아비담 중에 두었으니,
마치 안으로 결박되고 바깥으로 결박된 사람은 밤새도록 그것을 풀려고 하므로 이 뜻은 당연히 번뇌[結使]의 무더기 중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가타라 함은 제2부에서 기야를 해설한 것이니, 기야는 게송이라는 말이다.
게송에는 두 종류가 있다. 1은 가타라 하고 2는 노가(路伽)라 한다.
노가에서 두 가지가 있으니 1은 번뇌를 따른 것이요, 2는 번뇌를 따르지 아니한 것이다.
번뇌를 따르지 아니한 것은 기야 중에 말씀한 것인데 그것을 가타라 한다.
이 두 가지 게송을 제외한 나머지의 게송이 아닌 경을 우타나라 한다.
니타나라 함은 그 경전의 인연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과 성현이 말씀하신 경전의 법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다. 이 모든 경전의 인연은 수다라 중에 있기도 하고 다른 곳에 있기도 하나니 그것을 니타나라 한다.
아파타나라 함은 본말(本末)의 차서에 따라 설법하신 것이 그것이니
경전에서
“지혜 있는 이의 말씀은 순서가 있고, 이치가 있고, 해설이 있어서 산란하지 않게 한다”함과 같다.
그것을 아파타나라 한다.
이제왈다가라 함은 곧 경전의 인연과 경전의 차서이다.
만일 이 두 가지 경전이 과거 세상에 있는 것이면, 이제왈다가라 한다.[진(秦)의 말에는 “이 일은 과거의 그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사타가라 함은 현재의 일을 인연하여 과거의 일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래는 미래의 일도 말씀하셨으나, 그 일은 다 과거와 현재를 인연한 것이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아니하셨다.
비불략이라 함은 부처님의 자세한 설명(廣說)을 모은 경전을 비불략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모든 큰 성인은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즐겨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세간의 잡담을 싫어하고 대중을 즐겨하는 근본을 뽑았기 때문에 자세히 설법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다.
경전 중에서 도를 얻은 어떤 이가 2개월 동안을 경과한 다음에야 한 마디의 말을 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런 일을 끊기 위하여 자세히 설법하신 경전이 있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말씀한다.
마치 여래의 두 가지 설법인 1은 자세하고 2는 간략하게 말씀한 것과 같다. 자세한 것은 간략한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아부타달마라 함은 미증유경(未曾有經)을 말한다. 겁(劫)이 끝날 무렵에 큰 변동이 일어나는 일이라든지 모든 하늘의 몸과 부피라든지 대지(大地)가 진동하는 일 등을 말함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일들을 믿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 미증유경을 말씀하신 것이니 현재에 지어 받는 업보와 모든 법의 세력은 생각하거나 의론으로 할 수 없기[不可思議] 때문이다.
우파제사라 함은 마하가전연(摩訶迦栴延) 등 여러 거룩하고 지혜 있는 분들이 널리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 때문에 논경(論經)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으며, 경전에 논(論)이 있는 까닭에 뜻을 해득하기가 용이하다.
이 12부의 경전을 부처님의 법이라 한다. 법보는 이와 같은 공덕을 다 갖추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예배드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