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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비밀
오늘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사람처럼 복잡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일이 많고 문제도 많고 시끄러운지. 세계는 세계대로 복잡하고 우리나라도 우리나라 문제로 복잡하고 또 우리 사회문제도 복잡하고 우리 가정문제도 복잡하고 복잡한 문제가 너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은 사람이 문제가 많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모든 주체는 사람이니까.
사람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또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한없이 복잡하다. 오늘 흙이라는 문제를 갖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보면 아주 복잡하고 난해한 그런 존재인데 또 어떻게 다르게 보면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흙을 보면서 사람은 흙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다. 성경에도 보면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우리 육체를 흙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는 말 같다. 우리 애가 어렸을 때 그런 얘기를 해주면 아빠 지금도 사람을 흙으로 만들어서 콧구멍에 김을 불어넣으면 사람이 되냐 하고 이렇게 물었다. 아이들의 물음이 아주 순진하지만 진실하다.
사실 성경이 사람을 흙덩어리로 빚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이 꼭 흙하고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흙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가 참 쉽고 날마다 밟고 다니고 무시한다. 그런데 그 흙에서 나온 조화가 측량할 수가 없다. 몇 만년을 지구상에 흙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또 앞으로도 흙이 얼마동안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흙에서 나오는 그 생산품은 무궁무진하고 끝이 없는 것 같다. 조상 때부터 사용하던 밭을 지금도 사용하는데 여전히 똑같은 소출이 나온다. 그리고 똑같은 소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씨를 심으면 흙에서는 다른 소출이 나온다. 그래서 이 흙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궁한 것을 생산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스스로 무엇을 생산해내지는 않는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데 씨가 들어오면 그 씨를 살려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흙의 운명은 어떤 씨가 들어오냐, 어떤 농부가 그 씨를 가지고 가서 경작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흙 자체로서는 무한한 가능성은 있지만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 이것을 볼 때 사람하고 아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숨이 코에 붙어있고 이러고 있다가도 5분만 숨이 꺼지면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살다 죽는 것을 보면 너무 허망하다. 금방 숨 쉬고 있던 사람이 금방 죽는다. 굉장한 사람,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별 수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별 수 없다. 그 자리에 가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렇게도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세상에 살면서 떠들고 시끄럽고 복잡하고 고민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만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아웅다웅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그렇게 복잡하게 살고 복잡하게 생각했던가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굉장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또 굉장하다. 이것이 사람의 비밀이다. 흙이 꼭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데 나오는 것을 보면 굉장한 것이 나온다. 굉장한 것이 나오지만 가을에 가면 도로 흙이다. 그리고 버려졌던 흙도 씨가 다른 씨가 들어가면 유명해지기도 한다. 제주도에 가보니까 귤 밭이 많은데 지금부터 10여년전만 하더라도 완전히 자갈밭이어서 아무 쓸모없는 땅이 많았다. 북제주 쪽으로 가면 흙은 약 30% 정도 되고 돌멩이가 약 70% 된다. 조금 쓸만한 흙이 있는 곳은 다 개간을 해서 밭을 했다. 개간할 수 없는 곳만 남아있었는데 귤나무를 심은 이후로 전부 귤 농장이 되었다. 귤나무는 흙만 있는 곳보다 자갈이 많은 곳에서 잘된다고 한다. 귤 밭이 되어 땅값이 엄청나게 올랐다. 지금은 또 귤 값이 없어서 귤나무를 베어내는 실정에 있다. 이렇게 쓸모없는 땅도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어떤 나무를 심으니까 이렇게 귀한 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렇고 저런 사람은 저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라도 좋은 씨만 심어버리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아주 옥토라 하더라도 농부가 없고 좋은 씨가 없어 가꾸지 못하면 황무지가 된다. 그래서 흙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것이다. 흙은 자기 스스로 나는 이렇다 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옥토라고 해봤자 씨가 나쁜 씨가 들어오면 할 수없는 것이고 농부가 게으르면 할 수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참 쓸모없는 흙이고 이런 흙도 있나하고 생각했다할지라도 좋은 씨나 합당한 농부가 들어오면 그 흙은 귀한 것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좋은 씨가 들어오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씨가 들어오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지 처음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있는 것도 아니고 팔자가 그렇게 타고난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와서 경작을 하면 잘되고 경작을 안하면 잘못되는 것이 인생이다. 이런 것이 인생이니까 우리 스스로는 자랑할 수 없지만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디에서 경작하느냐, 어디에 맡겨지느냐에 따라 귀하게 되기도 하고 천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 발견된다.
나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데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 보면 저런 사람은 참 쓸모가 없다할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은 정말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 30년을 살아왔다. 늘 공존하고 있다. 왜 내가 공존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느냐하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쓸모없다하던 사람도 어떤 것이 들어가면 그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이 된다. 그런가하면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도 아무리 가도 변화가 안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사람은 좋다 나쁘다할 것이 아니고 무슨 씨를 누가 경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이건 안되고 저건 안되고 이런 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다 가능하고 뭔가 기회가 주어지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다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니까 사람에 대한 벽이 없어지고 편견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같이 산다. 아주 품질이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나 아주 품질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같이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고 같이 살면서 평화롭게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은 이렇게 무한히 가능성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능성이 있다. 내 스스로도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이미 고정되어버린다. 내가 옳다든지 그르다든지로 고정되어 버리면 쓸모없는 사람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무한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이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거기에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고정시켜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도 역시 희망이 없다.
우리 인생은 이것이다 저것이다로 고정시키는 것처럼 나쁜 것이 없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키우면서도 이 자녀는 이렇다 이 자녀는 저렇다로 고정시켜버린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이번에 누가 와서 자기 애기가 5~6살을 먹었는데 어디 가서 뭘 훔쳐왔다고 한다. 그래서 옆에 사람들이 너네 애기가 뭘 훔쳤다더라, 나쁜 버릇이 있다고 얘기를 해서 근심이 되어 왔다. 그래서 내가 그 애기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것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애들은 장난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장난한 것이지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계속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기간 동안 하다보면 지나간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어른이 저것은 도적이다 하고 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애를 도둑으로 키워버리는 것이다. 언제든지 그 애를 볼 때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애는 도둑질이 뭔지 몰랐지만 도둑질이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 의식하게 된다. 그러면 크면서도 계속 도둑질을 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어떤 때는 거짓말을 잘 하는 기간도 있고 남의 것을 훔쳐오는 기간도 있고 또 남을 때리고 오는 때도 있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온다. 이런 거쳐 오는 과정을 부모가 고정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를 버리지 않는데 어른의 생각으로 고정시켜 버리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버리게 된다. 그래서 문제아 뒤에는 반드시 문제의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부모가 문제라는 것이다.
고정관념, 뭘 고정시켜 버리는 것, 그런데 인생은 절대로 고정시킬 수가 없다. 오늘 콩을 심어 콩 밭이라할지라도 영원히 콩밭은 아니다. 언제 귤 밭이 될지도 모르고 또 언제 감 밭이 될지도 모르니까 밭은 밭이지만 그냥 밭일뿐이지 절대로 콩 밭이 아니다. 영원히 콩 밭은 없다. 그러면 사람도 영원히 도둑질 하는 사람도 없고 영원히 깡패도 없고 영원히 선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어떤 것을 받으면 변하는 것이니까. 이런 변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까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고 관대한 마음이 생기고 부드러운 마음도 생기고 또 희망을 주게 되고 같이 대화가 되게 되는 생활을 해왔다.
한 가지는 흙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인생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리에서 가능성이 있다.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어진다. 나는 흙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내가 장담할 수도 맹세할 수도 없고 나는 이렇다 하고 주장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은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이렇다 나는 죽어도 이렇다 하는 사람은 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니까 그 길로는 갈지 모르지만 다른 길이 열린다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만일 흙이 콩 밭을 고집한다면 그 밭은 영원히 콩 밭밖에 안될 것이다. 콩이 시세가 좋을 때는 괜찮겠지만 콩 값이 떨어질 때는 밭 값도 떨어져 다시는 회생을 못할 것이다. 그러니 흙은 스스로 생각할 때 나는 콩 밭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로 생각하면 안된다. 나는 늘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싸우고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굉장히 복잡하다.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복잡하다. 고부간도 그렇고 친구간도 그렇고 회사 안에서도 그렇고 맨 마지막에 올 때는 어쩔 수 없는 단계에서 오는데 그 때는 이미 사건이 확대되어 서로가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서 문제가 표출되게 마련이다. 그러면 해결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근원은 아주 조그마한 것이고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말이 꼬이고 꼬이고 행동이 꼬이고 꼬여서 점점 커진 것이다. 맨 마지막에 와보면 너무 커져버려서 해결할 방법이 없이 헝클어져 버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얘기 한다. 지금 헝클어져 있는 그것을 가지고 네가 왜 이렇게 말했느냐 네가 왜 이렇게 말했느냐를 지금 여기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원래 출발할 때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무슨 문제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봐라.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그렇게 되었다. 자존심을 좀 건드렸다든지 하는 조그마한 문제인데 말이 오가다보니까 자꾸 말이 커져 불어나고 불어나서 감정이 상해지고 뒤틀려서 문제가 커진다. 원점으로 돌아가면 문제는 참 쉬운데 원점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이 안된다.
원점으로 돌아간다, 근원으로 돌아간다. 내가 흙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흙이라는 것으로 돌아가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다. 나는 왜 잡초가 이렇게 많은가, 나는 왜 콩 밭인가, 이 모든 문제가 거기서는 끝이 나지 않지만 흙이라는 그 자리로 들어가면 아주 단순한 문제이다. 내가 언제 콩 밭이었나, 내가 언제 엉겅퀴 밭이었나. 나는 콩 밭도 아니고 엉겅퀴 밭도 아니지 않았는가. 그러면 아주 단순한 문제이다. 어떤 농부가 와서 무엇을 뿌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사람이 나는 콩 밭이다, 나는 엉겅퀴 밭이다, 너는 엉겅퀴 밭이다, 나는 포도밭이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가을이 오면 도로 흙으로 돌아갈 것인데 가을이 돌아오기 전에 뭐라고 주장하여 나를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가을이 돌아오면 도로 흙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복잡한 문제가 생길 때 간단한 생각을 하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나도 인생이 복잡하려면 아주 복잡할 뻔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복잡한 일이 생겨도 그 근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보니까 문제가 복잡하게 확대되지를 않는다. 좀 가다가 말아버린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이니까. 어차피 가을이 돌아오면 도로 흙이 될 것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한참 돌아다니고 쏘다니다가 시끄럽게 되어 그 때야 죽느니 사느니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미국에 가보니 정말 이혼한 사람이 많다. 미국사람들은 많이 만나지 않아 모르겠는데 한국교포들을 만나보면 이혼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미국 가서 잘살아 보겠다고 갔는데 이혼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것이 이제 우리나라도 번져 와서 4명의 1명꼴로 이혼을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이혼하는 문제도 보면 처음에는 조그마한 문제이다. 확대시킬만한 문제도 아니고 아주 작은 문제인데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고 법정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으로 커져 버리게 된다.
자기가 시작한 자리가 어디인줄 알면, 우리 인생의 시작된 자리가 어디인줄 알면 그리 복잡한 문제도 없고 짧은 인생에 그렇게 아웅다웅하고 살 일도 없다. 짧은 인생을 더 행복하게 더 만족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는데 바늘귀만한 것을 가지고 팥이니 콩이니 따지다보면 커져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어린아이들을 놔두고 이혼을 한다. 참 비참한 일이다. 젊은 두 사람이야 나가면 또 살겠지만 아이들은 고아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고아 되는 것이 불쌍하다는 것을 모르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다 알지만 이미 이혼을 해야 될 때가 되면 자식도 어쩔 수 없다는 상태에 와서 이혼을 한다. 그러니 얼마나 일이 커져버린 것인가. 일이 그렇게 커져버리기 전에 자리로 돌아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다.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고 처음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보면 더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다.
흙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흙에다 묻는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우연한 말이 아닌 것 같다. 딱 맞는 말 같다. 사람을 흙에다 묻는다는 것을 본다는 것이 참 필요하고 또 불가에서는 다비장을 해서 화장을 하는데 그것도 모든 것은 허무하다 아무런 미련을 갖지 말아라 이생에 미련을 갖지 말아라는 뜻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흙에다 매장한 것을 보나 다비장에다 매장한 것을 보나 내 인생의 원점이 저기구나, 나는 저기서 왔다가 저기로 돌아갈 사람이구나, 이것을 알면 큰 문제가 없고 문제가 커질 일도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가끔가다 화도 나고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도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도로 흙으로 갈 것인데 내가 이것을 잘 해결해 내 마음대로 해도, 내 오기대로 해도 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어떤 부자가 농사를 많이 지어 그 해 소출을 많이 얻은 모양이다. 이것을 어떻게 보관하면 좀이 쓸지 않고 쥐가 먹지 않고 도적이 침범하지 않을지 근심이 생겼다. 돈 많은 사람은 돈 지키는 것이 걱정이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 우리 인생은 아무 할 말이 없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있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자리에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면 할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 중학생 한 사람이 내게 고민이 있어 왔다고 했다.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여자친구와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할 인생 설계를 다 해놓았는데 중간에 누가 새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못잡고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나인지 저 친구인지를 마음을 결정하라고 했더니 이번 금요일까지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한다. 그런데 금요일이 돌아오기까지 너무너무 괴롭다는 것이다. 고민이 되어 못견딜 것 같아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했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그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난 후에 우연히 어느 병원에 문병을 갔다가 그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그 병실에서 어떤 청년이 나오면서 ‘저를 모르겠습니까?’ 하는데 그 학생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사고가 나서 목이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그 학생이 그때 말한 그 여학생하고 결혼을 했는가 아니면 결혼을 못했는가를 뒤로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학교만 나오고 고등학교를 못갔다고 한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대학교 결혼까지 다 설계를 했고 그 약속 때문에 괴로웠던 학생인데 뒤로 들으니 중학교만 마치고 고등학교를 못갔다고 한다.
사람이 내일 일을 모르니 번민하는 것이다. 또 내일 일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일 일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이 내일 일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 모르면 모르는 것으로 알고 살면 너무너무 좋고 편한데 내가 그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 것으로 잡아당기려고 하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우리가 원점으로 돌아가면 문제는 간단하다. 아주 간단하고 쉽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이다. 한참 싸우다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왜 싸웠는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를 찾아보면 물줄기 찾아가듯이 아주 간단하고 쉽다. 낙동강 물이 저렇게 크게 흐르고 있지만 원줄기 찾아가면 잘 모른다. 아주 자그마한 곳에서 물이 나와 그것이 나오다가 뭘 만나고 뭘 만나고 해서 큰물이 된 것이다. 우리 인생도 저질러 놓은 자리에 가면 너무너무 크고 저지르지 않는 자리에 가면 아주 작은 일이다. 나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다시 한번 원점을 생각해 본다. 근원을 한번 생각해 보면 문제가 쉽게 풀어진다. 내 문제도 쉽게 풀어지고 다른 사람 문제도 원점에서 풀면 쉽게 풀어진다.
이 흙이라는 것이,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것에 깊은 비밀이 들어있구나. 무한한 가능성도 들어있지만 또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또 무한하다. 시작은 조그마하지만 크기도 하고 아주 큰 것이지만 시작을 찾아가면 조그마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흙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자기는 비어있는 것이다. 자기는 항상 아무것도 없다. 흙 스스로는 씨가 없으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좋은 씨를 만나면 좋은 농부를 만나면 그 흙은 영광스러워질 수 있고, 좋은 농부를 만나지 못하면 영광스럽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농부가 참 중요하구나, 인도자가 참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누구의 인도를 받았는지가 중요하다. 커서도 누구의 인도를 받느냐가 참 중요하다. 평생 동안 내가 누구의 인도를 받느냐가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다.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누군가의 영향을 계속해서 받으면서 산다. 영향을 받는데 어디서 영향을 받는지에 따라서 인생이 결정된다. 어떤 농부에 의해서 농사가 지어졌느냐에 따라서 밭이 결정되듯이 인생도 마찬가지로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이렇게 말씀하신 곳이 있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렇게 말씀하신 곳도 있다. 같은 원리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이는 내 위에 누가 있다는 말이다. 내 위에 나를 이끄신 이가 있고 나를 경작하신 이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했을 때는 너희가 나를 따르면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모든 원리가 다 그런 것 같다. 생명의 원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따르고 따라가고 이끌고 이끌려 가는데 좋은 인연으로 이끌리고 좋은 인연으로 따라가면 복된 길로 가게 되고, 나쁜 악연이 생겨 나쁜 인연으로 끌려가면 잘못되게 된다. 사람은 타고날 때부터 잘되고 못되고를 타고 나는 것은 없는 것 같고 나와서 어떤 길로 가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되고 자기 일생이 결정되는 것이니까 어찌 이렇게 흙과 똑 같은지.
그리고 콧구멍에다 숨(생기)을 불어 넣어 산혼이 됐다고 하는데 산혼이라는 말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오관을 가지고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단지 지능만 가지고 있지 생명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는 있지만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들어와서 하는 존재이다.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은 절대로 없다. 이것이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이 다 그렇고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무엇을 만든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람 역시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만든다. 사람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계를 보면 사람의 형상을 따라 사람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컴퓨터가 최첨단에 속한 것일텐데 바로 그것이 사람의 형상을 따라 사람의 모양대로 만든 것이다. 컴퓨터는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반드시 무엇이 꼭 들어가야 움직이고 역할을 하지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역할을 하지 않는다. 휘발유가 들어가든지 전기가 들어가든지 아니면 움직이는 사람의 손이 들어가든지 뭐라도 들어가야 되지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어딘가의 영향을 받아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사람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있구나. 나보다 크신 이만 만난다면 나보다 나은 이만 만난다면 나는 무한히 발전하겠구나. 나보다 높은 이를 만난다면 나는 무한히 높아질 수 있고 나보다 크신 이를 만난다면 나는 무한히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절망이 아니고 그것은 희망이다.
지금도 우리는 계속 발전할 수 있다. 여러분도 계속 발전할 수 있고 나도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기울어져가는 때인데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 지금도 더 나은 것을 만나면 더 발전할 수 있다. 더 좋은 것을 보게 되면 더 좋은 것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사람도 흙하고 똑 같구나. 과거의 보릿고개 넘어갈 때 양식이 다 떨어져 버리고 먹을 것이 없었다. 밑에 익지 않은 보리를 베다가 그것을 찌든지 굽든지 삶든지 해서 가난을 넘겼던 시절이 있다. 그 시절에서 어떻게 우리가 쌀이 남아도는 시절이 됐냐하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이 통일벼가 재배되어 우리나라 식량문제가 급격히 해결이 되었다. 한 마지기에서 1~2가마 나오던 것이 4~5가마가 나오니까 급격히 쌀 생산이 늘어나서 우리나라 보릿고개가 없어졌던 기억이 있다. 똑 같은 원리이다. 다른 씨를 만들어내어 농사를 하니까 4~5배의 생산력을 내게 되었다. 지금은 쌀이 남아 처치곤란이라는 말도 있다. 한 때는 쌀이 없어 쌀로는 절대로 술을 빚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은 쌀 막걸리까지 나오고 쌀을 북한에 보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굉장한 일이다. 옛날에 비하면 경지 면적이 훨씬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 생산량은 더욱 높아졌다. 이건 모두 경작 기술에 따라 다르고 씨에 따라 달라진 문제이다.
우리 인생도 똑 같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무엇을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가 다르다. 나는 나보다 나은 분을 만났다. 나보다 앞선 분을 만났다. 그리고 나보다 영광스러운 분을 만났다. 내가 흠모할만한 분을 만났다. 내 인생이 끌려오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발전한 것 같다. 변화하고 발전해서 나이가 들어가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육신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경험 가운데에 있다. 어려서 같이 자라던 친구에게 카드를 보내면서 우리 육신은 후패하지만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써서 보낸 적이 있다. 머리가 희어지고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다 기울어져가는 징조이다. 그런데 속사람은 옛날과 비해 훨씬 달라졌다. 우리 육신은 후패하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하던 바울처럼 지금 나도 그렇게 고백하게 되고 또 그렇게 자랑하게도 된다. 육신은 분명히 없어져 가지만 속에서는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이 전보다 더 행복한 것이 나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또 남에게도 담대하게 이야기 해진다. 어떻게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기울어져가면서 난 날마다 새로워져간다고 어떻게 이런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또 내가 실재로 그렇다.
흙의 운명, 흙의 비밀을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보면 이 안에 넘치는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다. 내 인생에서 이것을 안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안 것이 없는 것 같다. 많은 것을 모르지만 이 한 가지만 아는 것만 하더라도 내 인생은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참 복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흙이라는 것을 안 것 하나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흙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냐며 이상한 소리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30년 동안 이 이야기를 해왔는데 조금도 피곤하지 않고 똑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전혀 질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똑 같은 문제를 갖고 똑 같은 이야기를 하면 내 스스로도 싫증이 날 것인데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도 뭐 한 가지를 오래 못하는 성질이다. 오래 못 보는 성질이고 오래 못하는 성질인데 이것만은 30년을 이야기해도 계속 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할 때마다 내 스스로가 즐겁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그리 즐거운지. 나는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왜 그렇게 희망이 생기는지.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은 참 비밀이구나! 어린아이가 들으면 장난하는 소리 같은데 그 속에 인생의 깊은 비밀이 들어있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야 될 문제이다. 흙덩어리 하나! 내가 모든 문제가 생길 때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는 흙덩어리 하나이구나! 그리고 콧구멍이 뚫어져서 숨이 왔다 갔다 하는구나! 이것만 알게 되면 일이 그냥 쉽게 풀리고 찡그렸다가도 웃어지게 되고 고민하다가도 풀리고 잠을 못자다가도 잠을 자게 되고 이런 일이 생기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